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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창작이 동행하는 시대의 예술가 /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년 01월 17일 20시 50분  조회:1431  추천:0  작성자: 강려
 
이론과 창작이 동행하는 시대의 예술가
 
김철교(시인, 평론가)
 
1. 예술가의 ‘지금-여기(now & here)’
 
  예술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예술작품에 얼비치는 색깔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예술관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나 큰 틀의 색채는 바뀌지 않는다. 주변환경에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신체적, 정신적, 지식적 환경 등을 모두 포함한다. 큰 틀이 바뀌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고유한 육체적 DNA를 가지고 있듯이, 정신적 DNA에 해당하는 내재된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학습과 의지에 따라, 페르소나가 형성될 수 있지만 말이다.
 
  페르소나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의미하며, 융(Carl Gustav Jung)에 의하면,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다. 누구나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에 따라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특히 경계해야 할 그림자같은 성격이다. 시류 혹은 소속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형성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면 기교에 의존하게 되어 작품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되고 예술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다. 복잡한 신체구조가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서 질서정연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태어날 때 창조주의 완벽한 설계도라 할 수 있는 DNA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다만 성장과정에서 부딪히는 환경과 학습에 의해 인테리어가 갖추어지고,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있다.
 
  육체적 DNA에 상응하는 정신적 DNA는 무의식이라 하겠다. 우리는 무의식의 역동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DNA는 각각의 신체 및 정신적 기능들을 조화롭게 다독이면서 인간을 완전한 통일체로 운행시킨다. 인간세상은, 각 개인의 신체조직은 물론 개인들이 모여 이루고 있는 사회조직도, 모든 개체들이 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근본 원리다.
 
  이성과 감성, 각종 욕망들이 얽히고설키면서도 조화로운 인류의 삶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예술은 어느 한 분야나 역할만 강조하면 전체적인 화합을 깨뜨리게 마련이다. 최근 나름대로 각 예술분야들이 세분화되어 있으나 본래의 목적, 즉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이웃예술과 손잡고 나가는 종합화가 필연적이며, 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자기 예술혼을 드러낸다. 미술은 시각으로, 음악은 청각으로 즉시 받아들이지만, 문학은 일단 언어로 뇌에 접수되어 재해석한 후에 수용된다.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그림과 음악이 우리 삶을 지배했고 문학은 음악과 뒤섞여 있었다. 문학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주문과 기도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형태를 잡고 널리 유포된 것은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된 후의 일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사포의 서정시,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등이 BC 5세기경에 터를 잡았다. 이후 철학, 역사, 소설 등이 등장하여 문학이 장르별로 세분화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도래하여 장르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첨단과학기술의 영향에 힘입어 장르 구분이 무색해지며 예술은 물론 모든 분야가 융·복합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하이퍼미디어 시대에는 “한 작품 안에서 서로 다른 매체가 융합하고 분열하며 경쟁하는 상호매체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수용자(독자나 관객 등)에게 기울었던 무게가 점차 예술가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디지털 예술에서 예술가의 권력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예술가는 프로그래머로서 혹은 프로젝트의 지휘자로서 수용자의 연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수용자는 “작품을 ‘즐기는’ 것이며, 여기에 상호작용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이것은 순수하게 유희의 성격이지 ‘생산’이나 ‘창작’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 유현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예학』, 문학동네, 2017, 17~19쪽).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더욱 이론과 창작 모든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 현대는 창작과 이론이 분리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예술이 완전해지려면 창작과 이론이 함께 가야한다. 예술작품에는 치밀한 논리적 구성과 함께 감각과 지각과 영감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변 예술인 미술, 음악, 문학에서 상호영향을 얻는 것은 물론, 철학을 비롯한 주변 모든 학문과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2.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조화
 
  창작과 이론의 공존, 인접예술 및 학문과의 교류가 원활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예술의 본령인 감성,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이성, 즉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가 필요하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두 신(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갈등과 조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스 정신의 총화로 보았다.(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남우 역, 열린책들, 2014, 참조) 아폴론 신은 이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것은 균형 잡힌 아름다운 형상들을 지칭한다. 즉, 조형예술의 원리다.  
  디오니소스는 술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인간들에게 도취와 광란을 통해 삶의 고통을 망각하게 도와준다. 디오니소스적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음악은 개별화된 인간들을 보편적 쾌감과 도취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폴로적인 것의 주요 개념 중에 하나인 ‘개별화의 원리’로 무장한 소크라테스적 도덕이 비극을 무력화시켰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인해 적대적이었던 자연과 인간은 화해하고,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인간은 보다 화합하는 공동체로 융화된다는 것이다.
 
  아폴론은 윤리의 신으로 절제를 중요시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지주로 하고 있는 그리스문화의 주춧돌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리스 비극에서 읽은 것이다. 비극은 합창단으로부터 나오며, 민중 가운데에서 선정된 합창단은 무대 위에서 연기자들이 신들의 이야기를 공연할 때, 신이 된 것 같은 합일의 경지를 경험한다. 또한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들과 관객을 관조하는 또 다른 관객이 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합창단에 의해 비극적 서사의 고통이 한층 강화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엄한 합창에 의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예술의 역할이 바로 이런 합창단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고, 관객에게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를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정신에서 탄생했고, 신화적 정신이 투영되었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의식(이성)의 빗장을 풀고 인간의 무의식(신화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집단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한 것들이 축적되어 있고, 신화는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니체는 음악의 역할을 서사가 담당하고 신화가 극에서 사라지면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어렵다고 보았다.
 
  아리스토델레스가『시학』에서 비극이 관객에게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주장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있던 긴장과 불안 등 심적 부조화가 정돈되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도 자유연상과 꿈의 분석 등을 활용하여, 마음속에 쌓인 억압된 감정 등 무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치유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예술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자기의 무의식을 작품에 투영하고, 관객들은 그 작품을 통해 유사한 경험을 함으로써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 힘이 부활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에는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가 사용되었다. 또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를 발견한 것이다.
 
3.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
 
  시에 있어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시’라 할 것이다. 예술사조의 큰 흐름을 보면 항상 이성과 감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단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가 관심사였지만 대부분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균형을 이룰 때 예술적 가치를 높여주고 우리 인간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 중에 특히 산문은 이성에, 시는 감성에 더 무게의 중심이 있었다.  아무리 산문이라 해도, 그것이 예술을 지향한다면, 서정성이 어느 정도 물들여 있어야 호소하는 힘이 크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 서정성은 주춧돌이 되고 있다. 더구나 시는 무엇보다도 서정성이 가장 핵심으로 여겨져 왔다.
 
    서정시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먼저 제시하기도 한다. 서정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와 아울러 거기 담긴 언어와 정서의 아름다움
    은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승화
    의 기능도 함유한다.(이숭원, 「시와 서정」,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9쪽).
 
  물론 과유불급이라고 서정성이 넘치다보면 값싼 감정의 늪에 허우적대는 경우가 적지 않고 시인 개인의 독특한 향기가 실리기 어렵다. 가장 이상적인 서정시는 이성으로 정제된 감성에 의해 써진 시라고 할 것이다.
   
    서정은 서정이되, 인간의 심성을 고양하고 삶의 확충에 기여하는 서정, 그러면서
    도 기존의 틀에 박힌 서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현하는 서정, 
    그런 자질을 함유한 시가 뛰어난 시라는 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숭원, 앞의 책, 58쪽).
 
  서정시를 거부하는 시도도 적지 않았지만 서정을 벗어나서는 시의 가치가 빛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음식물을 먹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예술, 그 중에서도 감성을 다독여주는 서정시에 둥지를 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복잡하고 삭막해져가는 현대에서 피폐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예술치료가 융성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술은 감성을 다독여 깊은 무의식에 접근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서정을 배제하는 정신도, 서정을 극복하고자하는 시도도,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
    었으며 이때마다 시와 비시의 경계가 새롭게 확장되며 시의 영역 또한 확대되었
    다. (김현자,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서정의 본질과 의미」, 『한국시학연구』 16, 2006. 8쪽)
 
  예술가는 익숙한 것에 반감을 갖는 경향이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사조는 항상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 형식과 자유, 통제와 해체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생성 소멸되어 왔다. 그럼에도 예술에서 차지하는 서정성,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무게가 전혀 줄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의식에 기대고 있는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은 감성에 근거하지만 이성으로 정제되지 아니하면 정돈된 작품이 될 수 없다.
 
4.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많은 예술 중에 특히 음악-미술-시가 한데 어우러져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 밭을 풍성하게 가꾸어 왔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도 결국 신화(처용)를 매개로 하여 미술(세잔, 피카소, 폴록: 추상미술,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요소)과 음악(모차르트: 절대음악,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기능을 아우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김철교,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한국시학연구』제 49호, 97~118쪽.
 
 칸딘스키와 끌레는 음악과 미술의 융합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시도하였고, 피카소와 호안 미로는 시와 미술을, 바그너와 클림트는 시와 미술과 음악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1) 모든 학문의 총화로서의 예술
 
  과학과 철학도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것이 현대예술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술전시장은 음향이미지와 빛의 이미지, 색의 이미지들이 통합되고, 여기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 철학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으면, 즉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는 해명이 없으면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찌그러진 깡통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폐기물이지만, 전시장에 전시되어 철학의 옷을 입으면 예술이 된다.
 
  “철학이 이성적인 시각에서 개념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인 반면에, 예술은 감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주영, 『예술론 특강』, 미술문화, 2007, 9쪽).  미술에 철학이 가미되어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은 이성과 감성의 통합으로 예술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줄다리기가 팽팽할수록 시를 읽는 기쁨과 맛이 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는 모든 학문의 총합이 예술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성과 감성을 오가며 많은 실험을 해보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해체를 논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통합되어 질서를 세우고 구원(해방, 자유)을 향해 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것을 ‘모던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던낭만주의는 이성과 감성의 통합과 추상성을 큰 특징으로 할 것이다. 추상성은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추상예술은, 모든 수용자들에게 각기 다른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구원(해방)을 준다. 모든 수용자는 무의식에 침전된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추상성이 지나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은 낙서와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낙서와 추상의 차이는 예술성을 담보하는 통일적 이미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다. 화장실에 있을 때는 낙서이지만 시집(詩集)으로 들어오거나 전시회장 액자 속에 넣어 걸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변기가 화장실에 있는 것과 전시장 진열대에 있는 것의 의미가 다름을 듀샹이 잘 보여주었다. 허접쓰레기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나 수용자에게 통일된 예술적 이미지를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일상성을 벗어난 예술적 추상성일 것이다.
 
(2)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의 융·복합
 
  앞에서 누누이 언급한 바와 같이, 미술가는 형상이미지를 통해, 음악가는 음향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언어이미지, 즉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무의식을 다룬다. 따라서 보다 무의식에 가까이 다가가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무의식에 침전된 찌꺼기들을 다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함께 작동해야 할 것이다.
 
  문자나 소리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예술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 질서나 체계로는 정확히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재현되지 못하는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 시는 기존 언어의 한계 위에 서서,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며 불러보는 안타까운 기다림”( 김유중, 「김춘수 시 <꽃>의 정신분석적 이해」, 『국제한인문학』 16집, 2015, 국제한인문학회, 125~126쪽.)을 머금고 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속이 타는 예술가는 미술이나 음악에서 차용한 은유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 함은, 시인은 색깔이나 음향의 이미지조차도 언어로 은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절대음악의 경우는 물론이려니와 표제음악의 경우에도 수용자들이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알지 못하여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가 언어의 의미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즐길 수는 없는가? 우리 수용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가곡을 듣고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다. 김춘수가 자신의 무의미시론을 말하면서, 염불에서 리듬만 남는 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시를 절대음악에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추상미술의 경우에도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모르더라도 훌륭하게 수용자들은 자신이 창조하는 이미지로 즐길 수 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 점화된 시기는 낭만주의다. 이 시기에 선포된 예술통합이념은 바그너의 종합예술품 개념을 거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빛을 본다. 바그너에 의하면 종합예술품은 여러 다른 예술을 새로운 유형의 예술작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바그너가 생각하고 있던 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해야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의 음악을 독립적인 장르로 보지 않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후기 작품은 오페라(가극)이 아닌 악극(musikdrama)으로 불리게 되었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와 달리 연극적인 요소를 더 강조한 새로운 장르를 최초로 탄생시킨 것이다.”(금난새,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생각의 나무, 2008, 203~205쪽)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문자표현의 한계와 딜레마를 통합적인 악극의 개념으로 극복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언어와 음이 갖는 음성적, 음향적 측면뿐만 아니라 시각적, 조형적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매체융합의 역사적 물결은 20세기 초 프랑스와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고조된다.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55쪽).
 
     바그너(Richard Wagner)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영향은 음악을 미학적인 표준으로 만들었다. (······) 음악은 극       의 본질을 표현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무대는 음악화되었다. (······) 바그너는 예       술의 분리가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의 분권화와 개인적 이기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온전한 인간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종합예술이 모든 예술장르       를 다시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 우선 ‘순수한 인간적’ 예술의 형태인       무용예술, 음악예술, 언어예술에 (······) 세 개의 미술적 장르를 더한다. ‘건축예       술, 조형예술, 회화예술’이 그것이다. (······) 이상의 여섯 예술 장르는 역사상 그       리스 비극에서만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상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미래의 예술작품’ -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 『한국연극학 24호』, 2004, 181~186쪽).
 
  시인으로써 회화와 음악을 잘 활용한 사람은 표현주의 시인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라 할 수 있다. “특이한 시어조음 및 배열, 무엇보다 잦은 색체은유의 사용은 당시 발아하기 시작한 초기 표현주의 추상미술과 맥을 같이한다. 그 어느 현대시인보다 강한 음악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추상이란 문자, 형상, 음의 통합으로 전개된다. 반세기 전 바그너가 선포한 종합예술품 이념이 구현된 셈이다. 추상은 표현주의 회화와 서정시를 묶어주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칸딘스키와 트라클이 추상예술의 추구라는 표현주의 이념의 실현에 있어 공통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색체와 언어 또는 음향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고위공, 앞의 책, 66~72쪽).
 
(3) 문학(시)-음악-미술의 상호의존성
 
1) 시와 음악
 
  시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시와 음악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견해, 둘째, 타협이 불가능하여 어느 하나는 다른 것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 셋째, 서로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가사와 음악의 변증법적 관계를 주장하는 뤼베(Nicolas Ruwet, 1933~2001)의 견해에 따르면, 시에 곡이 붙여진 가곡의 경우, 시는 음악과 연합하여 보다 폭넓은 전체를 이루면서 그 의미 또한 시너지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최인령, 「시와 음악의 관련성을 바라보는 인지주의의 관점 – 말라르메의 시와 라벨의 음악 분석」, 『프랑스문화예술연구』19집, 2007, 411~415쪽).
 
  음악의 최근 경향은 미술처럼 철학화되어 가고 있다.  “‘음악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단지 진실해야 할 뿐이다’라고 한 리게티(G. Ligeti, 1923~2006)의 언급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관을 함축적으로, 명료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전상직,『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7, 18쪽).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음악과 미술의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부작용의 하나가 수용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학도 이러한 예술적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숱한 실험들이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1990년대부터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다. 여전히 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확실한 흐름을 형성하기에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예견컨대, 시문학의 경우에도 이성과 감성이 손을 잡고, 신과 인간이 화해하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조화를 표방하면서, 다양한 과학기법을 활용하는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2) 시와 미술
 
  문학과 미술, 특히 미술과 시는 깊은 우정을 쌓아왔다. 본고에서는 화가의 이론을 시에 실험한 아폴리네르, 화가이면서 시인인 피카소를 예로 들고 싶다. 특히, 석학들의 글을 다소 많이 인용한 것은 어설픈 해설보다 전문가들의 생생한 주장을 듣고자 함이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예술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의 한사람이다. 특히 입체파 화가들과 교제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피카소에게 브라크를 소개하고 당시 낯선 예술운동이었던 입체파 화가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그의 시도 입체파 미술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회화에서 시간을 지속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보기에 입체파 화가들은 한 사물의 여러 면을 하나의 화폭에 그려 넣음으로써 시간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기욤 아폴리네르,『알코올』, 황현산 역, 열린책들, 2010, 31~35쪽.)  아폴리네르의 입체주의 기법의 시는 『알콜』의 첫 번째 시 <변두리>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입체주의적 기법의 시, 합성적 또는 ‘동시주의적’ 기
     법의 시이다. 감각과 기억이, 꿈과 현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무런 원근법
     적 질서도 없이,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논리적 관계도 없이 동일한 평면상에 병
     치되어 있다. 이는 마치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자연의 질
     서와는 다른 질서를 갖추고 있는 이질적인 여러 마티에르들의 병치 또는 편재의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같은 파격적인 이미지 나열의 수법은 아폴리네르의 두 
     번째 시집이며 마지막 시집인 『상형시집(Calligrammes, 1918)』에 이르러서는
     물체의 형태를 인쇄술의 배열에 의해서 재현하는 좀더 파격적인 실험으로 발전
     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구가 나오는 <비수에 찔린 비둘기와 분수>같은 시편은 『상형시집』의 특징 
     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월간미술, 2002, 63~65쪽).
 
  여기 제시된 그림은 아폴리네르의 시 <비수에 찔린 비둘기와 분수>전문이다. 시어와 시행을 평면적으로 쓰지 않고 비둘기와 분수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파격적인 실험시다.
 
 
 
비수에 찔린 비둘기와 분수
 
비수에 찔린 다정스런 형상들
꽃핀 사랑하는 입술들
미아 마레이 이예트 로리 
애니 그리고 그대 마리
너희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 아가씨들이여
눈물짓고 기도하는 분수 곁에서
저 비둘기는 넋을 잃고 있다
옛날의 모든 추억이
오 전쟁터로 떠난 내 친구들이여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대들의 시선이 잠자는 물속으로
우울하게 사라진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 있는가
레날 빌리 달리즈는 어디 있는가?
그 이름들이 우울하게 울린다
교회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듯
참전한 크렘니츠는 어디 있는가
아마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내 영혼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분수가 내 고통 위로 눈물짓는다
북쪽 전쟁터로 떠난 이들이 싸우고 있다
땅거미가 내린다 오 핏빛 바다여
월계수 장미 전쟁의 꽃이 피 흘리는 정원
 
  피카소의 시선집 『피카소 시집』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미카엘이 쓴 서문에 의하면, “대단한 열정으로 시 쓰기에 전념했던 그는 1935년에서 1936년까지 거의 매일 시를 썼고 오늘날까지 피카소가 마지막 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1959년에 이르기까지 몇 번 펜을 놓았을 뿐 꾸준하게 시 쓰기를 계속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피카소는 한계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시를 썼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동기술법으로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부분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글쓰기를 진행해 나갔고 언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크나큰 자유를 누렸다. 피카소는 예술 속의 모든 장벽을 거부한다. ‘단어로 그림을 쓸 수 있고 시에 느낌을 그려 낼 수도 있으니 어쨌거나 모든 예술은 하나다.’ 피카소는 텍스트의 공간성을 강조한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아 텍스트의 각 페이지들은 시각적으로 구성하였다. 그의 시 어디에서나 그림과 관련된 어휘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 피카소에게 글쓰기는 임시로 가져본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열정을 다 비친 하나의 활동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지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09,9~16쪽). 
 
3) 음악과 미술: 간딘스키, 끌레
 
  음악과 미술의 관계는 화가들이 음악을 자신의 그림에 투영시키려는 노력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음악가들도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림에서 음악을 듣고, 음악 속에서 그림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특히, 간딘스키와 끌레는 음악에 정통한 화가들이다.
 
    미술사조는 구체적 영역, 즉 비례와 균형에 바탕을 둔 실사(實寫)에서 점차 벗어
    나 쇼펜하우어가 적시한 대로 ‘음악의 상태’, 곧 추상의 영역으로 옮겨왔다. 드디
    어 ‘그림으로부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구체적 표현 대상이
    나 의미가 배제된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형태는 각기 눈과 귀라는 상이한 경로
    를 통해 지각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와 가슴 속에서 공통된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추상미술에 있어서의 음악적 속성에 관하여는 이미 칸딘스키
    (W.Kandinsky, 1866-1944)가 그의 저서 <점,선,면: Punkt und Linie zu 
    Fläche>과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를 통해 화폭에 담긴 형태들의 크기, 색채, 위치, 방향성, 운동성 등을 음
    악적 관점에서 논한 바 있다. (전상직, 앞의 책, 33쪽).
 
  칸딘스키는 렘브란트 그림에서 명암이 주는 강력한 화음을 발견했으며, 바그너의 음악에서 예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음악의 힘이 반영된 회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색을 음악과 연관시킴으로써 화가에 의해 구현된 음악은 우리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음악을 ‘눈으로’, 그림을 ‘귀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클레는 회화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회화적 사고>라는 글로 ‘문화적 리듬’을 언급하면서 음악에서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의 리듬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그의 회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칸딘스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클레는 들로네의 색상 대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김광우, 앞의 책, 22~25쪽).
 
  이러한 미술-음악-문학의 다양한 만남과 조화는 결국 예술이란 장르의 세분화가 큰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시-소설- 희곡 등의 구분도 예술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시로 쓰고, 시에 서사가 있고, 희곡에 시와 그림과 음악이 융·복합되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5. 요약과 제언
 
  예술가는 내적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주변 예술과 사회 정치 경제에서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예술적 감각으로 소화시켜 새로운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전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웃 예술에서 혹시 얻을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훔쳐보고, 특히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 영역을 무한히 넓혀갈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이성적 측면이 강한 아폴론적인 미술과 감성적 측면이 강한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그리고 대사를 이루고 있는 시(詩)가 조화를 이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 셋이 합쳐질 때 극의 효과, 치유의 효과,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 셋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poetic drama)을 통해서, 예술이 수용자들에게 다가가 효과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극은 단지 언어이미지, 음향이미지, 색채이미지의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스토리텔링이 가미되어 있다.
 
  현대를 ‘영상의 시대’라 일컬을 만큼 이러한 효과를 영상예술에서 비교적 잘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상은 나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남의 이야기를 관조하는 측면이 강하고, 시극은 내가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니체가 칭송해 마지않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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