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론
※해체시란? 언어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불신에서 출발하여
기존 전통시의 형태를 파괴한 일련의 전위적 실험시이다.
해체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시의 새로운 흐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들어 박남철, 황지우 등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했을 때 '우리'는 원초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러한 간주관적인 자장권을 가리킨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말하자면 '의미 공동체'이다.
의미공동체 = 일종의 역사 공동체. 역사를 공유하여
표현, 단어의 의미도 함께 공유한다.
ex) 아, 오월 → 5.18
아, 삼월 → 3.1
문학은 의사소통의 일종이며 이게 되려면 의미공동체(역사,문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문학은 '열린 개념'이기 때문에
열린개념?
- '한마디로 규정해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즉, 공동체가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시란, 하나의 시의 개념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시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되어있다. 우리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의 기화된 어떤 상태, 어떤 마성을 띤 뽀얀 에테르 상태의 콘텍스트를 통과한다.시적인 것은 이같은 에테르 상태를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의식의 화학적 변화에 의해 주어진다.
나는 시를 쓸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의 관계를 나는 응시한다.
시적인 것= 시가 될 수 있는 것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이 시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시적인 것들이 될 수 있고 그것들의 관계를 주시한다.
시적인 것 A와 B의 관계를 중시한다.
나에게 시는 '시적인 것'의 '보기'(창조가 아니다!)에 의해 얻어진다.
시적인 것은 창조가 아니다.원래 있는 것들의 관계를 보고 시를 창조한다.
그러면 시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그것은 모든 그때그때의 시속에 있다. … 시적인 것의 포착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까지의 포착이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형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때그때의 내용이 그때그때의 형식을 가져다 준다.
변한 내용이 형식이다. ex) 해체시.
시가 자기 표현, 즉 자기 노출로써 얻어졌던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낀 성질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시적인 것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속사정을 자세히 보면 시적 인 것의 개념 자체가 주관과 주관 사이에 열려 있는 공통감각, 즉 상식의 배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나의 시적인 것이 그의 시적인것과 일치할 수 있을까?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주관적'인것. * 그러면 주관을 버리지 않고 소통하는 방법은?
나는 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혹은 느끼고 표현했는데 읽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실패한 시들이 대개 그렇다. 하지만 나 한사람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시적인 것으로 느껴주지 않는 시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 없는 이유는 그와 같은 시적인 것이 없기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비시적인 것으로 혹은 덜 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시적인 것으로 느껴줄 몇몇 사람은 이 세상에 꼭 있기 때문이다. 시적인 것의 수준과 감수성에 따라 시적인 것을 느낀다. 한 개인의 피부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시적인 것은 그것의 인식론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이유에서 무의미하다.
나만 이해되는 시는 무의미하다. 시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간주관성= 완벽한 주관주의 ,극단적 객관주의 둘다 아니다. 주관과 주관사이의 공통감각. 이것을 시 쪽으로 가져오는 것.
읽히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작품은 무의미하다.
↑황지우의 시에 대한 생각.
어느 경우든 문학은 현실에 이미 참여되어 있다.
황지우는 문학은 사회속에 참여 되어있다고 본다. 사회, 정치 이런것들의 참여.
문학은 순수해야! 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참여이며 문학은 사회성을 띠어야한다.
매스컴은 반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소통의 전형적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할 상황을 무화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하게 하는 것을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매스컴 = 일방적으로 전해질뿐.
표현할 수 없거나 금지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이 양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효과의 창출을 통해 이 침묵에 접근하고 있다.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
내용이 곧 형식이다, 파괴를 양식화 한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자 진단이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그 징후를 예시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쳐야한다. 그래서 독자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징후의 내적 의미를 '자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 할 수 있게 해야한다. 바로 이것이 해방을 예시하는 방식이다.
문학은 사회의 징후를 보여줄 뿐. 혁명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시는 혁명의 도구가 아니다.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야한다.
(* 이게 민중시들과 엇갈리는 부분!!
문학은 사회적이다! 라고 했지만..80년대의 민중시, 민중문학을 했던 사람들(박노해 등)과 엇갈리는 부분이다. 문학은 혁명의 관여가 아닌 그 조짐에 관여하는 것이다.
김남주와 박노해는 시 자체가 도구라고 생각하고 시인보다는 혁명가라는 정체성이 더 컸음.
그들은 조짐이 아니라 시는 직접적으로 혁명에 나서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
황지우가 사회적인 어떤 것들을 중요시하고 시를 썼지만 결국 민중시인들과 엇갈려 나갈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김남주의 경우 민중들만 일어세울 수 있다면 시는 바로 쓰고 없어져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음.)
[출처] 황지우 시론 정리|작성자 최고민혁
[출처] [스크랩] 황지우 시론 정리|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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