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예술학 석사 박연복
나는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를 맛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멋스럽지 않게 반응 할 것이다. 시가 무슨 음식이냐는 식일 것이다 그 도 그럴 것이 맛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시라는 단어와 쉽게 어우러지지 않기 때문에 생소하고 조급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좀더 넓고 깊고 형이상학적으로 드려다 보면 그렇게도 잘 어우리는 단어가 없을 상 싶어 이를 종종 사용해 왔다. 우리가 먹는 일상의 음식이 맛이 나지 않으면 먹으려 들지 않듯 시도 맛이 나지 않으면 읽으려 들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존재자는 독자들이기 때문에 그 시를 쓰는 작가는 그 글을 읽는 독자를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더 좋은 작품을, 독자들에겐 사랑받는 시를 쓰려고 혼신의 노력을 한다. 조리사가 한 황홀한 맛과 보기에도 아름다운 음식을 빗어내기 위해 노력하듯이 작가도 매양 그렇게 한다. 그러자면 시인은 옛 법에 따라(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모방과 모사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시적 변용과 시적 도구, 또는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고 만들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려고 들 것이다. 시 쓰기는 이런 방법으로 출발 한다. 그러므로 시 쓰기에 필요한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사실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감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시 쓰기란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래야만 시로써 독자들에게 그 본 뜻을 들어 내 보여주게 되며 충격적인 감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1. 시는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 대가를 필요로 하듯이 시 쓰기에도 그럴만한 대가를 요구받는다. 그 것은 새로움과 낯설음, 삐딱하게 보기다. 김소월의 산유화는 일제 강점기에 쓰여 졌다. 그러므로 시대적 배경과 문화가 존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가 그와 같이 형식과 내용으로 쓰여 진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 할 수 있을 것이고 읽혀질지 의문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적인 시풍에만 의존하려는 것도 우선 경계되어야 하지만 동양적인 것, 그리고 인접하고 있는 가까운 나라의 시풍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시 쓰기가 어느 한쪽 형식과 내용으로 치우쳐 편중되는 일은 더더욱 없도록 노력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시는 삶의 거울이며 나를 또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해 내보이는 작업이다. 시들어 가는 풀잎 하나에도, 그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데도 철학이 있듯 우리가 인식 되어지는 세계는 우리를 바로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에 쓰고 싶거든 어떤 소재이던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던지 가리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써라. 그러게 하면 당신은 새로운 삶의 행복과 글쓰기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예시를 한번 감상해보기로 하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도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은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서정주님의<국화 옆에서>에서-
2. 감정의 형상화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T.S 엘리엇은 주지주의에서 “지성을 존중하고 감성을 억제하는 노력은 자신이 한다.”라고 말했듯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내면으로부터 외연으로 들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문제, 슬프고 기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정서화 하는 문제, 죽고 사는 철학적인 것과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도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등나무에 하얀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것을 이른 아침에 보았다고 치자, 그 것을 보는 순간 누구나 똑같은 감정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일상적인 일로 보아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막연하게 연민의 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껴안고 즐거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고뇌할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사물을 보는 시각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로 자라난 환경과 문화가 달라 그 느낌의 깊이와 정도의 차이가 다른데서 오는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식 정도와 세계를 보고 느끼는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결함에서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시를 쓰려는 사람은 삶 그 자체를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곧 시를 쓰는 배우려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다. 이럴 때만이 자기의 감정 속에 자신의 의식을 녹아내려 아름다운 이야기와 훌륭한 이미지를 내연에서 외연으로 끄집어내 감동적인 작품을 써 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경험이 곧 시라고 하는데도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
개미들을 위하여
6월은
연분홍
잠옷 속에 있는 소녀의
이마 위에서 푸른
6월은
총살되고
-전봉건의<개미를 소재로 하나의 시가 쓰여 지는 이유>에서-
3. 동심을 가져라
어린이는 쪽빛 하늘을 바라볼 때, 그 하늘이 어떤 하늘인가 하는 물음 이전에 하늘을 자기 눈 안으로 들어 온 그림 그대로의 하늘로 본다. 여기에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을 그들은 가감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심의 그대이며 더러움이 묻지 않은 깨끗함 그대로의 심성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파란 하늘과 푸른 하늘을 구별하고 구름이 낀 하늘과 새털구름의 하늘을 구별하여 자신의 생각과 이데 오르기 을 접목 시킨다. 그들의 사고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한 마리의 개미를 보게 되면 동화 속에 나오는 부지런한 개미를 연상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성적 논리에서 오는 이성적 어긋남이다. 시를 쓰기를 원환다면 이런 생각보다는 티 없이 맑은 가슴과 눈을 가진 아이를 닮아야 한다. 그래야 시가 맑은 호수와 같다.
그 뿐이fi. 어린이들은 창조적인 상상력과 미래를 생각하는 원만함이 있다. 그들의 꿈이야 말로 곧 세계이자 그 세계가 시가 된다. 꿈은 곧 미래를 상징한다. 참신한 상상력은 글의 원동력이 된다. 길섶 민들레는 키가 작다고 해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아도 제일 먼저 봄을 알리기 위해 샛노란 꽃을 피운다. 그 길고 모진 겨울을 견디고 제일 먼저 봄의 화신이 되는 것처럼 좋은 시를 쓰고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우린 작은 이 꽃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매화 잔치는 끝난 줄 알았는데
쏟아지고 있었다
동백처럼 뭉텅뭉텅
나의 하늘임이
목련 같은
실바람 곁에
아침,
꽃잎을 처음 열려는
박미 마을에 개나리가
* 이글은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 박미: 서울 금천구 시흥3동 금천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의 옛 이름
-박연복의<은유가 있는 마을에 눈은 내리고>에서-
4. 삐딱하게 보기
가) 패스타쉬의 기법
언어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매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상적인 사실 언어(과학언어)가 있고 다른 하나는 문학을 위한 감성이 풍부한 감성언어가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과학언어보다는 시적언어(감성언어)를 쓴다. 그렇다고 해서 한 편의 시 속에 일상 언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시를 쓰기 위해선 시적 요소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소설이나 수필을 쓰듯 배경과 인물, 행동의 삼요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시는 그런 논리적인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스럽게 쓰기를 원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전자와 같이 복잡하지 않다. 다만 시적 언어는 그 언어적 구조와 기능이 소설이나 수필 또는 희곡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것은 시에는 리듬(음악성)과 은유(비유), 상징, 아이러니, 원형 이미지, 등과 같은 시적 도구가 있는가 하면, 삐딱하게 보기, 낯설게 하기, 패쉬타쉬, 등의 기묘한 표현 방법도 있지만 소설이나 수필은 그렇지 않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제 요소들은 시간과 지면 관계로 생략하고 여기선 “삐딱하게 보기”만 다루기로 하겠다. 이 기법은 꼭 그렇게 활용해야만 시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기법상의 훌륭함이며 이를 활용해 창작된 작품 자체가 맛나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비판을 가해야 할 부분엔 이 이상 더 좋은 기법이 없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자는 것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전자산업의 획기적인 발달로 그 매체를 이용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곧 언어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의 해체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다. 언어의 절대적인 논리는 객관적으로 의심받기 시작했고, 언제부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객관적 진실 찾기에서 주관적인 진실 찾기 패턴으로 돌아가기 시작 했다. 바로 언어를 삐딱하게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언어를 삐딱하게 보자는 것은 사회적 사건들을 삐뚤어지게 보자는 의미도 된다. 문학에서는 그것이 인유나 페러디, 혼성보방 등으로 변질되어갔다. 삐뚤어지게 보기와 패스 타쉬는 인유(引喩)가 그 본질이다. 인유법은 유명한 시나 문장, 어구 등을 끌어다 자신의 표현으로 대신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럼 시 한편을 보기로 한다.
그러한 실예를 나의 가친의 경우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88세를
끝으로 5년 전 지구 밖으로 떠나야 할 대, 그이 자산은 6억 정도는
되었지만 후처인 Y씨에게 모든 거슬 유산으로 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비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재혼해 온지 24년은 됐고 서로가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임종할 때의 모든 일을
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아버지의 유지에 다라서 그의 모든
것들이 계모에게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도밭아서 하는 모습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이었습
또한 그와 비슷한 예를 미국의 베스트셀러의 소설인<매
디슨 고을의 다리>(the bridge df madison county)에서도 보았습
니다. 사진작가인 주인공이 취재차 그 유명한 매디슨 고을 다리에
갔을 때, 그를 안내해 주었던 유부녀와의 사을 동안의 열애를 잊지
못한 나머지, 독신으로 일생을 보낸 끝에 자기의 모든 유물을 유
언 집행 대리관을 통하여 그녀에게 보내는 광경은 참으로 감동적
이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라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답다는 실예이기도 한 것입니다.
- 김경린의< 사라의 선물과 아버지 유산>에서-
나) 비틀어 짜기의 기법
비틀어 짜기의 기법은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논리성을 부정하므로 새로움과 낯설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언어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은 언어의 비 논리성을 시 창작에 활용한다는 것이 된다. 이는 언어의 본질 중 지시기능을 초월하지는 의미다. 즉 언어의 모순이다. 또 언어의 모순은 관념에서 일탈 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비틀어 짜기의 기법은 최대한의 언어 모순이 일어났을 때 성공한다. 이 방법을 개그 쪽에서도 많이 활용한다. 곤 역설적이어야만 흥미를 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러니의 기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웃기는 행위란 진실을 사실적 언어만 웃길 순 없다. 그것은 반듯이 언어의 비대칭적인 관계나 비정상적인(비틀어진) 어법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이것이 언어의 비틀어 짜기다. 시의 장르에서도 이 기법을 활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가 초월이어야 한다. 언어의 초월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낸다.
그럼 예시를 보기로 한다.
처 죽일 놈의 오월,
환희의실록은심장을이렇게미치게한다
잔디처럼 납작 엎드린 초록의 신들이
바람가지에 가랑가랑 매달려 어깨를 욱실욱실
쑤셔댄다
홀딱 발가벗은
태양 말고도
허였게 맑아버린 내 육신이 더 무섭다
돈이라고는 고작 천원자리 두장뿐인데
손님커녕 전화 한번 진종일 걸려들지 않는다
내일은라면을사야할일이다
지난 아이엠에프 때도 이렇진 안했다
그래도 나줏손 무렵
흐릿한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꿀벌 똥구 만큼의 여유쯤 있었다
처 죽일 놈의 오월,
불행한실록은이렇게미쳐버리게한다
집세줄날이돌아온다
벼락 같이 주인이 달려올 터이다
콘크리트같은
내얇은주둥이를꿰매어놓을일만남았을터이다
박연복의<집세>에서
누구나 시를 잘 써 보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무엇을 쓸까 망설이다 하루해를 다 보낸다. 그것은 시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자신의 이성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편안한 마음에서 써야한다. 무엇을 쓸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쉽게 시에 다가갈 수 있을까가 더 중요 하다. 시는 삶의 경험을 쓰는 것이다.
그 삶이 거짓이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말할 때 진정한 시로서 보이는 것이다. 진실한 사건을 언어라는 기호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시적 응용과 변용이 따르는 것이며 위에서 거론한바와 같은 기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시는 일상의 활용 언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변용된 언어와 비유된 언어, 상징된 언어들을 차용한다. 시가 좋다 시가 맛이 있다, 그 시 훌륭하다고 할 때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시적 도구를 잘 활용한 탓이기도 하다. 시는 언제나 가볍게 써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어라, 가급적 사건은 한 가지만 다뤄라, 매미의 울음소리에도 눈을 기우여라, 그리고 아무것이나 무조건 써라, 연필로 써라, 내용은 어쩌던 길게 써라, 지금은 산문의 시대다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라. 이렇게 하면 자신의 시적 진실을 새로운 시적언어로 아름다운 낯선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리라.
-끝-
시인 박연복 (홈바로가기)
[출처]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 예술학 석사 박연복|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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