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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미지에 말을 걸다 / 황정산
2019년 02월 01일 20시 36분  조회:1444  추천:0  작성자: 강려
송시월 시 접신 외 4편을 중심으로
이미지에 말을 걸다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많은 비약을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현대시는 언어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한다. 과거의 언어는 투명한 매체였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고 하늘의 이치를 형상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바로 말이었다. 그때는 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또는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낭송하기 위해 비유나 운율 등의 시법을 만든 것이다.
현대시는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뒤집기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언어가 언어이기 때문에 진실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시가 거쳐 온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극단에 무의미시가 존재한다. 무의미시는 언어의 언어성을 배제하고 언어가 가진 물질성만 남겨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극단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송시월의 시는 현대시가 이루어온 이러한 방향성의 또 한 극단에 서있다. 그의 시는 어떠한 서술도 부정한다. 서술이라는 것은 말이 인간이 세상을 설명하는 한 방법일 뿐이고 말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송시월 시인은 그 환상 대신 거기에 이미지는 놓아둔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도 형성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미지는 그냥 이미지로만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이미지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지에게 말을 걸 때 이 작품은 해석되고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송시월의 시는 이미지로 된 놀이터라 할 수 있다. 한 작품의 예를 들어 보자.
 
여자의 잠을 기습 공격하는 말들
여자를 끌고 시베리아의 최북단 툰두라의 벌판을 달린다
투바크 카스쪼르킨과 점니네 카스쪼르킨이 접신예식을 마치고
여자의 껍질을 벗긴다
대지와 강물의 신에게 피를 뿌리고 피를 마신다
 
순록이 된 여자가 무수한 순록을 낳는다
 
순한 눈망울 굴리며 바다를 건너려다
물에 빠진 순록들
 
탕탕탕......
연평도가 흔들린다
망원경속 나무들이 흔들린다
NLL를 엎어치는 파도
 
집단 사냥꾼들 쓰러진 순록을 바다의 냉동고에 넣는다
진피가 벗겨지고 알집을 긁어낸 채
부력으로 떠오른 ㅅ ㅜ ㄴ ㄹ ㅗㄱ 이란 자모음들
차마고도를 오른다
 
길을 구르던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튼다
- <접신> 전문
 
이 시는 쉽게 연결되지 않은 이미지들의 나열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 이미지들이 시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연결된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이미지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이나 서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애써 그것을 만들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만들고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꼴라쥬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이미지의 꼴라쥬를 보여주자 순록은 "ㅅ ㅜ ㄴ ㄹ ㅗㄱ 이란 자모음들"로 분리가 된다. 말이 의미를 상실하고 완전한 물질성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리된 말의 자료들이 “차마고도를 오”르는 고행을 수행할 때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트는 기적이 만들어 진다. 차마고도를 오른다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이다. 말의 의미를 해체하는 것으로 말이 보여줄 수 없는 진실을 찾아가는 힘든 고행길을 상징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작업이고 부단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럴 때 “천년 묵은 염주알” 즉 이미 사문화된 종교적 설법이나 사상 등이 비로소 생명력을 얻어 가치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는 이미지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던져진 이미지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시적 이미지에 부단히 말을 걸어야 한다.
다음 인용된 시는 이 이미지에 말 걸기를 형상화 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접시에 담긴 피라미드형원형아파트
무덤 한 알 한 알을 따서 깨물어먹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먹고 아직 보랏빛 신맛이 도는
조카들을 먹는다
고택이 된 고조부 증조부 할아버지를 먹고
망우리 공동묘지 몇 알도 먹는다
씨를 뱉는다
잇사이에 검푸른 이끼가 낀다
 
갓을 쓰신 아버지가 걸어 나와 기웃거리다가
다른 씨방으로 들어가신다
또 하나의 씨에서 나오신 백발의 어머니 두리번두리번
문을 잊은 듯 공동묘지로 들어가신다
내가 잠시 흔들린다
- <포도송이> 부분
 
이 시는 포도송이와 한 집안의 가계를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가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도를 한 알 한 알 먹는 감각을 다시 입안에서 느껴보아야 한다. 그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포도송이의 생생함을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다시 되살리는 길이다.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포도알을 한 알 한 알 되새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똑 같은 맛과 비슷한 모양을 갖춘 포도알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여 한 가계의 모습을 투사한다. 포도알이 아버지도 되고 조부도 되고 어린 조카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말일 뿐이고 포도송이를 이루는 하나의 포도알일 뿐이다.
그런데 그 포도알이 포도알을 넘어, 다시 말해 호칭이 붙여진 조카니 아버지를 넘어 한 알 한 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입안에서 씹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말이기도 하다. 주어진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어진 이미지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시는 우리에게 비로소 말을 건넨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에게 꺼낼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포도송이 같은 것이다. 한 알 한 알 따서 입안에서 씹지만 그 모두는 가계의 계보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는 한 무더기를 형성하고 있다가 우리 입안에서 몇 개의 신맛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것은 바로 말이다. 말을 걸어서 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포도송이다.
 
뒷산 딱따구리가 드르르르 지나간다
내 배꼽을 중심으로 쩍― 갈라지는 오른쪽과 왼쪽
끊긴 탯줄에서 붉은 강물이 쏟아진다
나는 오른쪽과 왼쪽 손목을 꺾어 강물에 던진다
연어 두 마리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충돌하는 두 대륙사이,
깊이를 잴 수 없는 눈물의 호수
밤마다 별처럼 반짝이는 울음을 낳는 好哭場
웅얼웅얼 별천지다
근육질의 별을 먹는 연어
온몸 팽팽하게 불을 켠다
 
불빛지느러미로 물줄기를 당긴다
쭈-욱 끌려오는 알래스카와 베링해협
- <배꼽을 가르다> 부분
 
딱다구리와 연어와 강물은 이 시 안에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연어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배경을 이루는 산자락에서 “딱따구리가 드르르르 지나”가고 있어도 이 들이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물들은 사물들 나름의 물질성으로 다만 존재할 뿐이다. 첫 연은 바로 이런 사물들의 물질성을 일부러 갈라놓는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라면 이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서 통일성을 형성하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안온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시의 사물들은 배꼽을 중심으로 갈라지듯이 분열한다. 그리고 다음 연에서는 더 크게 두 대륙 사이로 갈라진다. 거기에 알라스카도 만들어지고 베링해협도 만들어진다. 이렇게 거대한 각자 하나의 사물로 형성된 이미지의 물질성은 그것이 그 자체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의미를 형성하지도 않는다. 이미 그런 의미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말들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거대한 이미지의 압도적인 크기만이 남는다. 그 이미지의 꼴라쥬에 우리는 말은 건다. 이미지야 얼마나 더 가야 너는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느냐고, 이미지는 대답한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아니 어쩌면 베링 해협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알래스카와 베링 해협을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가당치 않은 손놀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를 쓰는 일은 의미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존재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다만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에 말 거는 우리의 존재를 살아있게 하는 일이다. 바로 이 점은 송시월의 시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시작,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 발표,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월간 『우리詩』주간. 비평집으로 <주변에서 글쓰기>가 있음
[출처] [스크랩] 이미지에 말을 걸다 ( 송시월 시 접신 외 4편을 중심으로, 시문학 7월호)|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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