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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소쉬르와 퍼스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1)-강인규
2019년 02월 03일 21시 07분  조회:1023  추천:0  작성자: 강려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강인규
 
 
 
 
1. 기호학과 구조주의
 1.1. 인간: 의미의 생산/소비자
 1.2. 언어의 함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1.3. 기호학: 의미를 둘러싼 투쟁
 
2. 소쉬르의 기호학: 자기완결적 구조로서의 공시언어
 2.1. 기호, 기표, 기의
 2.2. 의미작용
 2.3. 가치
 2.4. 계열체와 통합체
 
3. 구조와 구조주의
3.1. ‘구조’와 ‘주체’
3.2. ‘랑그’와 ‘파롤’/ 구조와 현상
 
4. 퍼스의 기호학: 반영의 체계
4.1. 기호, 해석소, 지시대상
4.2. 도상, 지표, 상징
 
 
 
 
1. 기호학과 구조주의
 
1-1. 인간: 의미의 생산/소비자
 
기호학은 간단히 “기호의 과학(science of signs)”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호학은 모든 사회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작업이다.  인간의 활동 가운데 ‘무의미한’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의미를 추구한다.  심지어 떨어지는 낙엽 하나, 작은 별 하나에 조차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커뮤니케이션학의 기본 명제는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만일 상대방의 말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대답할 때, 이는 상대방의 발언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의미’의 거부는 곧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와도 같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아래의 표현들은 ‘의미’가 우리의 삶에서 갖는 중요성을 드러내 준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그처럼 이해심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꽃을 주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는 단순히 ‘특정 식물의 일부 조직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주 전화를 걸어올 때, 우리는 이것을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나의 전화번호나 나의 전화기가 아니라) 보이는 관심의 징표로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의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기호학자인 셈이다.  여기에서 꽃을 주는 행위나 전화를 거는 행위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다.  기호학의 기원을 고대 희랍시대로부터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 현대의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Structuralist Linguistics)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2. 언어의 함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간단히 정의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일단 ‘데카르트적 주체(subject)를 허문 탈근대 철학’의 관점에서 설명해보기로 하자.  이 관점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발견했던 ‘선험적, 이성적인 주체(subject)’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진리’는 오직 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들은 신의 힘을 빌지 않고도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이러한 자신감의 터를 닦고자 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요구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진리를 세울 토대, 즉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는 진술이다.
당시 이 명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하자.  그 판단은 옳은 것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으나, 그 판단을 하는 나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명제는 곧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론은 언어와 대상의 일대일 대칭을 기초로 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에 앞서 선행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붙여진 이름으로서의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고 사물에 내재된 의미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투명한 재현의 매체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래의 예를 보면, 언어는 대상과 일대일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싸리눈”
(한국어)                “snow” (영어)
“함박눈” 
 
“mutton”
(영어)                “mouton” (불어)
“sheep” 
 
 
한국어에서는 눈을 “싸리눈”과 “함박눈” 등으로 대상을 구분해서 지칭하는 반면, 영어에는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눈”이라는 하나의 기호로 일반화한다. 눈또한 영어에서 목장에서 뛰노는 양과 정육점에 걸린 양고기가 각기 “쉽(sheep)”과 “머튼(mutton)”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불어에서는 “무통(mouton)”이라는 하나의 기호가 두 개의 다른 대상을 동시에 지칭한다. 여기서 언어가 대상과 일대일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권에 따라 대상을 상이한 방식으로 나누고 구분한다. 언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단하는 폭력적인 매체이다. 이로써 언어는 대상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대상이 언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에 선행한다. 
우리의 인식은 언어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언어의 매개 없이 ‘직접’ 현실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눈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에는 몇 가지 눈이 내릴까?  함박눈, 싸리눈, 진눈깨비....  우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직접’ ‘현실’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네 가지 이상의 눈을 보기가 힘들 것이다.  반면에 에스키모인들을 한국에 데려다 놓는 순간 한국에는 십여 가지 이상의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에스키모인들에게는 한국의 눈이 열 다섯 가지 이상의 완전히 다른 종류로 구분되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키모인들이 사는 지역에는 다른 눈, 즉 다른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눈’을 지칭하는 더 세분화된 언어를 가지고 있는 탓이다.
사람들은 언어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의 세계 –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Symbolic) – 에 들어가기 전, 아기들은 자신과 어머니를 분리되지 않은 한 덩어리라고 여긴다.  다시 말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너’와 ‘나’의 구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언어와 대상은 일대일 대칭이 아닐 뿐 아니라, 상이한 언어는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함으로써 특정 대상을 보이게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게 하기도 한다.  한국어를 학습하지 않은 영어권의 사람들이 한국어의 모음 ‘ㅡ’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현실세계’에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존재할까?  “미소”와 “웃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뚱뚱함”과 “날씬함”은 어떠한가?  “모퉁이”이 끝나고 “벽”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처럼 '현실'은 경계선이 없는 한 덩어리의 연속체 속에 존재한다.  언어는 그것들을 낱낱이 쪼개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은 연속적인 ‘아날로그’인 반면, 언어는 파편화된 ‘디지털’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아무리 잘게 자른다고 해서 단절적인 파편이 연속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아니다.  그 빛의 스펙트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무한히 많은 색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대상의 이러한 연속성과 가변성을 담아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안정적인 형태로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효과다.
            우리는 이렇게 ‘현실’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것을 보거나 경험하는 행위는 특정 대상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결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세계에서 '무의미한'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잔잔한 호수에 비친 나무 그림자 조차 '낭만'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우리의 경험은 늘 언어라는 의미의 체에 의해서 걸러지기 문에 각적이거나 직접적인 현실의 지각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언어 속에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언어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언어는 ‘나 자신’ 즉 ‘주체’와는 무관하게 학습된 ‘남의 말,’ 즉 타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에게 말하고 생각하도록 지시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 곧 ‘나’란 언어가 우리의 인식에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생각이 보장해 주는 것은 ‘나’의 ‘존재’ 아니라 ‘남’의 ‘언어’일 뿐이다.  내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데카르트의 명제는 라캉의 명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1-3. 기호학: 의미를 둘러싼 투쟁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란 사회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반 문화적 현상은 우리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이고, 따라서 분석을 요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우리나라”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일컫는 말일까?  한국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 줌의 재벌 총수?  아니면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  아니면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입시준비에 시달리는 입시생? 혹은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  결국 “우리나라”라는 말, 즉 기호는 이 땅에서 남을 혹사시켜 돈을 긁어 모은 사람이건, 그 축재과정의 희생재물이 된 사람들이건 간에 모두 “조국”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 묶어 두려는 지배계층의 음흉한 계략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호학은 이러한 권력의 흉계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현대 기호학은 크게 두 가지 원류를 갖는다.  하나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주창한 “세미올로지(Semiology)”고 두번째는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 Peirce)로부터 시작된 “세미오틱스(Semiotics)”다.  기호학에는 유럽과 미국의 두 가지 전통이 있는 셈이다.  아래에서 이 두 가지 기호학의 특성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2. 소쉬르의 기호학: 자기완결적 구조로서의 공시언어
 
2-1. 기호(Sign), 기표(Signifier), 기의(Signified)
 
 소쉬르의 기호학은 앞서 말한 ‘구조주의 언어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쉬르는 ‘기호(Sign)’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꽃”이라는 소리나 글자를 들을 때 머리 속에 향기로운 꽃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는데, 이 때 소리나 글자는 “기표”가 되고, 이것의 자극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관념은 “기의”가 된다.  흔히 기표를 “기호의 물리적 형태”로 정의하지만, 이는 소쉬르가 본래 제안한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소쉬르는 기표 역시 정신적인 심상(image)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는 사물과 이름의 결합이 아니라, 개념과 소리-심상(sound-image)의 결합이다.여기서 소리-심상이란 물질적인 소리, 즉 순전히 물리적이 사물이 아니라, 그 소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남기는 자국이요 인상일 뿐이다.”[1]
 
2-2. 의미작용(Signification)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의 가장 큰 특성은 기표와 기의 간의 “자의성(arbitrainess)”이다.  즉 “꽃”이라는 소리나 글자는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과 아무런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결합될 자연적 동기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적 관습(convention)에 의해 종이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 할 것ㅊ은 ‘기표’와 ‘기의’의 구분이 개념적 이해를 위한 인위적인 도식일 뿐, 그 자체로 구분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2-3. 가치(Value)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호가 ‘현실’의 외부대상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낳을 뿐, 결코 언어 밖의 물리적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의미란 ‘~이 아님’이라는 부정의 연속선상에서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이것은 사전을 찾는 행위와 유사하다. 사전은 한 낱말의 뜻을 다른 낱말들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그 풀이에 사용된 낱말을 찾기 위해서는 또 사전을 뒤져야 하고, 거기에 나와 있는 낱말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사전을 넘겨야 한다. 결국 사전 찾기는 끝나지 않는다. 의미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질문과도 같다. “이게 뭐야?”라는 질문에 답하기 무섭게 그 대답에 사용된 말은 또 다른 질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꽃”이라는 기표는 ‘저 밖의’ 물리적 대상과 연관될 필요도, 연관될 수도 없으며, 단지 “잎,” “줄기,” “열매” 등의 다른 기표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산출한다.  다시 말해 “꽃”은 “잎”이 아니고, “줄기”가 아니며, “열매”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기호의 다발 속에서 차이를 통해 의미를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갑”이라는 기호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을”이나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택된 기호의 의미는 선택되지 않은 다른 기호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기호의 이러한 특성을 “가치(Value)”라고 부르고 있다.  “의미작용”이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인 반면, “가치”는 기호들 간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2-4. 계열체(Paradigm)와 통합체(Syntagm)
 
              
       나는  영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통합체)  
       너는  순희    따로 발레   
       그는  지희    달리 미전
           :      :         :       : 
           :      :         :       : 
 
         (계열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기호가 지닌 의미는 그것이 아닌 다른 기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는 영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는 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함께 간 사람이 “순희”나 “지희”가 아니기 때문이며, 함께 본 것이 “발레”나 “미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의 완전한 의미체계, 즉 ‘통합체(Syntagm)’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항목을 ‘계열체(Paradigm)’라고 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을 문화현상에 적용했던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를 를 옷 입기(garment system)와 메뉴선택(food system)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열체는] 우리가 동일한 신체 부위에 동시에 입거나 쓸 수 없는 의류로서, 이것에 변화를 줄 때 옷입기의 의미가 달라진다.  모자-두건-머리띠를 예로 들 수 있다.통합체는 종류가 다른 의류들을 함께 구색을 갖추어 입는 것이다.  치마-블라우스-자켓의 배열이 통합체의 예이다.”[2]
 
3. 구조(Structure)와 구조주의
 
3.1. ‘구조’와 ‘주체’
 
사회이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사회’라는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관점과 ‘개인’이라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사회’를 강조할 때, 개인은 그에 부속된 무기력한 존재로 이해되며, 여기서 개인의 ‘선택’이나 ‘자발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회라는 총체적 관계 속에서 결정될 뿐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사는 ‘나’의 욕망이란 개인의 고유한 본성이나 자율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통해 소비자로서의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내’가 좋아하는게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좋아하도록 (혹은 좋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고 결정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를 “구조(structure)”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조주의 철학에서도 ‘구조’는 주체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주체는 구조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중세의 ‘신’이라는 구조에 종속되지 않은 인간 존재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조주의 이후 이 관점은 완전히 폐기되고 만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조건으로 내세운 ‘생각’이란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회구조 없이는 말도, 생각도 불가능하다면, ‘나’란 언어가 개인 내면에 심어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나’라는 의식 혹은 주체가 언어라는 사회구조로 환원되는 상황에서는 개인도, 자율성도, 저항도 존재할 수 없고, 이런 면에서 구조주의는 다분히 결정론이나 숙명론의 성격을 갖는다.
            ‘구조’가 ‘주체’의 대립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 이외에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별적 현상의 대립개념으로서의 ‘구조’가 그것이다.  이 경우 ‘구조’는 ‘근원’의 동의어가 된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의 밑바닥에 깔린 근원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벨기에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는 인류문화의 ‘구조’를 “여자를 교환하는 결혼형식(exchange of women)”으로 파악한다. 다른 집에 여자를 내주고 자기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결혼 양식이 모든 문화의 구조 혹은 공통분모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3.2.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구조와 현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조주의의 기원을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로부터 찾는다. 그가 언어를 파악한 관점이 구조주의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했는데, 여기서 ‘랑그’란 일종의 언어규칙이고, “파롤”은 그 규칙이 사용된 실제의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예컨대 지금 이 강의에 사용되고 있는 모든 말은 구체적인 발화로서의 ‘파롤’이지만, 이 언어행위는 한국어라는 일종의 규칙체계인 ‘랑그’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샘(랑그)에서 물(파롤)을 퍼올리는 행위인 셈이다.  여기서 랑그는 언어의 ‘구조’인 반면, 파롤은 그 구조의 지배를 받는 ‘행위’ 혹은 ‘현상’ 된다.
            요약하자면, 구조란 사회를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으로서, 이에 따르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태도와 행위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될 뿐, 어떤 능동성이나 자율성도 갖지 못한다.  개인은 사회의 생산자가 아니라 생산품일 뿐이다.  일단 완성된 사회구조는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가 되어 스스로 움직이고 성장해 가기 시작한다.  사회구조는 분명히 개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일단 사회체계가 형성되고 나면 도리어 사회성원들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주체로 군림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소쉬르의 전통에 입각한 기호학에서 기호는 외부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기호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저 밖의 현실(reality)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독립적 구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미는 ‘저 밖의 현실’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 자의적인 – 독립적 구조인 언어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언어는 나름의 독자적인 ‘총체성(wholeness),’ ‘가변성(transformation),’ 그리고 ‘자율성(self-regulation)’[3]을 지닌 채 스스로를 복제해 가는 유기적이고 자기 완결적 구조다.  
 
4. 퍼스의 기호학: 반영의 체계
 
4.1. 기호(Representamen), 해석소(Interpretant), 지시대상(Object)
 
 퍼스의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보다는 해석학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퍼스는 기호는 현실세계를 지시하는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기호현상을 외부 대상과 분리했던 소쉬르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관점이다.  소쉬르가 기호를 “기표-기의”라는 (현실과 무관한 언어구조 속의) 두 개념으로 설명한 반면, 퍼스는 현실 속의 지시대상을 상정하고 있다.
 
“기호(Sign 혹은 Representamen)는 어떤 사람에게 특정 대상을 표상해주는 것이다. 기호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발전된 다른 기호를 사람의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첫번째 기호에 의해서 생성된 또 다른 기호를 해석소(Interpretant)라고 부른다.  그 기호는 대상(Object)을 지시한다.”[4]
 
4.2.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퍼스는 기호가 외부대상에 대해 보이는 ‘유사성’을 근거로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도상’ 즉 아이콘은 현실세계를 모방하고 있는 기호인 반면, ‘상징’은 알파벳처럼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의적인 약속이다. ‘도상’의 예로는 초상화나 성대모사 등을 들 수 있다.  ‘지표’는 실존적(혹은 물리적)으로 대상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기호다.  (특정 대상의 존재를 알려주는) 발자국이나 (병이 났음을 드러내 주는) 반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상과의 유사성과 연관성을 토대로 각 기호의 특성을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   동기화(motivation) –
  
       지표     도상    상징
 
   – 자의성(arbitrariness) + 
 
여기서 ‘동기화(motivation)’가 기호와 대상 간의 자연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반면 ‘자의성(arbitrariness)’은 기호가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 인위적 관습에 의존하는 정도(conventionality)를 말한다.  ‘지표’는 대상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동기화는 높고 자의성은 낮은 기호인 반면, ‘상징’은 대상과 무관한 기호 이므로 동기화는 낮고 자의성은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퍼스의 기호학은 현실과의 연관 정도에 따라 기호의 충실도(modality)를 구분한다.  이에 따르면 ‘지표’와 ‘도상’은 비교적 충실도가 높고 ‘상징’은 충실도가 낮은 기호가 된다.  
 
 
[1] Saussure, F ([1915]1966)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New York: McGraw-Hill, p. 66.
[2] Barthes, R ([1964]1967) Elements of Semiology, New York: Hill and Wang, p    63.
 
[3] Piaget, J ([1968]1971) Structuralism,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p.   3-16.
 
[4] Peirce, C ([1897]1956) “Logic as Semiotic: The Theory of Signs,” Buchler, J (ed.) The Philosophy of Peirce,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 99.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1)-강인규|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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