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연구 / 이철(강릉대교수)
1. 문제제기
20 세기 초 서구 문예사에 주된 흐름으로 나타난 모더니즘(modernism)은 시에 있어서는 이미지즘(imagism)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등이 중심이 된 이미지즘 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시가 보여준 감상주의(Sentimentalism)와 매너리즘(mannerism)을 극복하여, 정확하고 간결한 시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풍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시인들보다는 오히려 스땅달, 플로베르, 모빠상 등의 프랑스 소설가들이 보여준 정확한 산문정신에 힘입고 있었다.
당대 영시의 느슨하고 장식적인 언어를 청산하게 만들었던 이 정신은 기본적으로 사물과 언어, 대상과 표현을 정확하게 1대1 대응시키려는 일사일언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미지스트들이 이어받은 이 정신 속에는 기본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주관에 의해 대상을 굴절시키지 않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태도가 숨어 있었다.
현대 영시에 이런 혁신을 가져왔던 이미지즘 운동은 그러므로 정확성과 객관성이 그 중요한 특징들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2~3년이 지나면 그 본질적인 부분인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등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자유시 운동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파운드는 자신을 여전히 이미지스트로서 지칭하면서도 객체적 사물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식 세계에 투영된 바로서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문제는, 객관성을 그 핵심으로 하던 이미지즘 운동을 끌어가던 파운드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어떻게 주관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운드 자신의 단순한 취향변화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크게는 당대 예술의 전반적인 흐름에 영향을 입고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이미지즘이 갖고 있었던 이중성, 혹은 변화 가능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지즘의 이중성을 상정하지 않고는 파운드가 그 이후에 보여준 변화나 자기모순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미지즘의 이런 이중성에 대한 이해는 또한 1910년대 중반 이후 파운드의 이미지즘이 객관적 세계보다는 예술가의 통합적 창의력을 중시하는 보티시즘(Vorticism)으로 흡수되는 과정과 파운드의 중, 후기의 대작 시편(The Cantos)에 보이는 주관성 과잉을 자연스럽게 설명해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시인의 객관적 태도를 마치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변치 않은 핵심처럼 여기는 통념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미지스트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이 운동을 주도하며 새로운 방향을 유도했던 시인이 파운드인 만큼 그의 이미지즘에 대한 이해는 이미지즘의 통합적 성격에 대한 이해에 다름 아니다.
2. Imagism의 모호성
예술사조란 당대에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가 과거에 서구 예술사에서 풍미하던 예술사조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예술사조가 한 시대를 휩쓸며 그 시대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빌어 만들어낸 여러 작품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와도 혹은 거센 바람과도 같은 예술사조들은 당시로서는 어떤 경계도 없고 확실한 모습도 없어 보일지라도, 그 시대가 흘러가고 그 사조도 흘러가 버리면 후대에 남는 것은 화석과 같은 작품 들 뿐이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과 그 밖의 다른 기록들을 통해 과거의 예술 사조를 역으로 가늠하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비교적 명확한 기록들과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근거로 삼는다고 해서 그러나 하나의 예술사조가 손에 잡힐 만큼 명확하게 규정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현대 예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낭만주의나 모더니즘 같은 경우도 그 성격을 놓고 비평가들 간의 의견이 여러 가지로 갈라진다. 이 글이 그 성격을 규명하려는 이미지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크게 보아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한 부분으로서,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시적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격 규정의 어려움이 그 범위가 작아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즘의 경우 그 어려움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서 더욱 가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즘의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려운 이유는 우선 이미지즘 시선집이 거의 발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이미지즘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만큼 그 시들이 읽히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한 부분으로서, 혹은 20세기 초 영시상의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서, 시사(詩史)에서만 중요하게 다루어질 뿐, 그 시들을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부재는 책의 출판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미지즘 시 선집은 이 운동이 활발하던 1910년대에만 몇 권 발간되었을 뿐 그 이후로는 거의 출판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즘에 관심을 갖고 이들 시를 읽으려는 사람들은 영시 앤쏠로지에서 이곳저곳을 찾아가며 읽을 도리 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수효는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적으며, 또 이것들을 읽어봐야 회화적 특징이 강조된 짧은 영시들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미지즘의 중심인물 중의 하나인 파운드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미지즘 고유의 시라고 얘기될 수 있는 것은 실제 몇 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즘을 규정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이미지즘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이미지(image)'라는 것이 20세기 시에서 비로소 언급되거나 중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아마 시가 생겨날 때부터 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므로 특별히 20세기 초 영국시단이 산출한 특정한 시들만을 이미지가 강조된 시, 혹은 이미지즘시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실제의 시를 살펴보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우는 달(The Waning Moon)
그리고 미치고 약해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흐릿해져 가는 정신에 이끌려 침실로부터
엷은 베일에 싸인채, 비틀거리며 나오는
여위고 창백한, 죽어가는 여인처럼,
달은 어두운 동녁에서 솟아올랐다.
희고 모양새 없는 덩어리
And like a dying lady, lean and pale,
Who totters forth, wrappt in a gauzy veil,
Out of her chamber, led by the insane
And feeble wanderings of her fading brain,
The moon arose up in the murky East,
부두 위에서(Above the Dock)
한밤중 조용한 부두 위
밧줄 매인 높은 돛대 꼭대기에 엉긴 채
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도 멀리 보였던 것은
아이가 놀다가 잊어버린 한 개의 풍선일 뿐.
Above the quiet dock in mid night.
Trangled in the tall mast's corded height,
Hangs the moon, What seemed so far away
Is but a child's balloon, forgotten after play.
인용된 첫 번 째 작품은 쉘리(P.B Shelley)의 것으로 1820년에 씌어진 시이고, 두 번째 것은 흄(T.E Hulme)의 시로 1912년에 나온 파운드의 시집 "재치 있는 즉답"의 권말 부록으로 실린 여섯 편 중 하나이다. 이미지즘의 원조격인 흄이 1908년 <시인클럽>을 창설한 후 이 클럽의 회원들은 매주 수요일 소호(Soho)가(街)에서만나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인용된 두번째 시는 바로 이 당시 1908~1909년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런 점에서 이 시를 이미지즘시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시는 어떠한가 ? 두 번째 시의 경우처럼 시사적(詩史的)인 배경을 고려해서 규정한다면 이를 낭만주의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두 시의 유사성에 주목하면 이미지즘과 낭만주의가 일종의 친연관계(親緣關係)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미지즘과 낭만주의는 서로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즘에는 낭만주의에서 이어받은 유산보다는 낭만주의를 극복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낭만주의가 결(缺)한 고전주의적 기율(紀律)로 향하는 경향은 이미지즘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이 두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전문(全文)을 인용하고 있는 이들 두 시가 매우 짧다는 점이 눈에 띈다. 시가 짧다는 것이 어떤 류의 시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기는 어렵지만, 소위 이미지즘시들이 다른 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이들 시는 모들 '달'을 소재로 삼고 있다.
시의 길이나 소재에 있어서의 유서성만을 가지고 이들이 같은 종류의 시라고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시가 모드 '달'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축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시는 달을 죽어가는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엷은 베일'에 싸였다는 표현으로 보아 이 달은 옅은 구름에 어슴프레 가리우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어가는'이라는 표현은 솟아오르는 달 보다는 지는 달에 더 어울리는 표현일 수 있지만, 이 시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달이 뜨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어두운 동녘에서 달이 나오는 것을 어두운 침실에서부터 어떤 여인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에 빗대고 있다. 인간의 광기가 달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관념은 '미치고(insane)'라는 표현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이 미친 여인이 '비틀거리며 나온다(totters forth)'는 것은 달이 서서히 그러나 시각적으로 불규칙해 보이는 속도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첫머리에 있는 '그리고(And)'라는 표현은 글의 시작부분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일텐데, 이 표현 때문에 여기에서는 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일련의 어떤 계속되는 과정의 연장으로 보인다. 굳이 얘기하자면 어떤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윽고 거기에서 일어나 나오듯 달이 지평선(동족의 들, 산 혹은 바다)아래 숨어 있다가 때가 이르자 그곳에서 나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표현이 달의 움직임을 느리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리고'라는 말 앞에 숨어있는 것은 솟아오르기 전 달의 상황이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상황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에 달이 동녘에서 솟는 모습이 부가적으로 그저 덧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쨌든 제3의 상황이 있었다고 해도 이 시 자체로는 그것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추측할 수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달을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도 끝내 달을 하나의 사물로 보는 시인의 객관적 시각에 주목하는 일이다. 마지막 행의 '희고 모양새 없는 덩어리(A white and shapeoess mass)'라는 표현에는 감상(感傷)에 젖지 않으려는 시인의 결연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애절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달의 여인 같은 모습이 결국 차가운 하나의 천체덩어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인용된 두 번째 시에서는 달이 이미 한참 솟아올라 돛대 꼭대기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전개되어 있다. 이 시의 배경은 배가 정박해 있는 한밤중의 한적한 항구인데, 이때 어떤 배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인 듯한 달이 사실은 낮에 아이가 놀다가 잊어버린 풍선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풍선' 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달은 아마 보름달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실제의 달을 아이가 잦고 놀던 풍선으로 비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돛대 위에 걸린 아이의 풍선을 처음에는 달로 비유했다가 결국 그것은 달이 아니고 풍선이었음을 말하고 있는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멀리 보였던 것은' 혹은 '풍선일 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그렇게 하늘 높이 뜬 달처럼 보였던 것이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 아이가 놀다가 놓쳐서 날아가 돛대 꼭대기에 걸려있는 풍선 이었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적인 이미지는 역시 하늘에 걸려있는 달의 모습이다.
인용된 두 시에 대한 분석에서 이들의 구조상의 유사성도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 시는 달을 여인에 비유하다가 그것이 결국 달덩어리임을 보여주고, 두 번째 시는 풍선을 달로 보았다가 그것이 결국 아이의 풍선이었다고 말한다. <여인 -달>의 전환이 첫 번째 시의 흐름이라면, <달-풍선>은 두 번째 시의 흐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들이 모두 유비(analogy)를 시적 방법으로 하여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첫 번째 시는 ' -처럼(like)'이라는 말로써 그 유비의 명확성이 두 번째 시에 비해 더 잘 드러날 뿐이다. 대신 두 번째 시는 그 유비관계가 숨겨져 있는 만큼 <아 ! 그게 달이 아니고 풍선 이었군> 하는 발견의 놀라움 같은 것을 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미지즘시를 변별해낼 것인가? 하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짜여진 시를 모두 이미지즘시라 할 것인가 ? 적어도 영시사에서는 그런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축으로 씌어진 시는 엄청나게 많다. 사실상 모든 시작(詩作)은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쉐익스피어의 많은 극작품에 나타난 기발하고 다양한 이미지,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기상(奇想 conceit)같은 것들은 모두 이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이미지'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비평가들이 작품을 분석하고 그 중요성을 설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인과 작가들은 이를 문학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 혹은 이미지즘시라는 것을 따로 규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20세기 초의 서구의 이미지스트들이 주장하던 이미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떤 점에서 기존의 관념과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의 주장을 요약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스트라는 시운동 집단이 사실상 그 범위가 확실히 정해진 시인들의 단일한 모임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지즘에 대한 규정을 어렵게 만드는 세 번째 요인으로서 이미지즘의 변천사와 관계가 있다. 이미지즘이 단일한 줄기를 중심으로 발전 혹은 변모해간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규정도 단순하게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즘의 본류를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자 들 간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그중 하나는 이미지즘이 흄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나고 알려지다가 미국시인인 로웰 여사(Amy Lowell)에게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지즘이 파운드에 의해 주창되고 전파되다가 로웰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다. 흄을 중심으로 이미지즘을 설명하는 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파운드가 이미지즘의 발전에 약간의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그 역할이 미미했다고 보고, 파운드 보다는 오히려 1908~1909년 사이 흄과 같이 활동했던 플린트(F.S.Flint)나 스토러(Edward Storer)를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 반면 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파운드와 함께 소위 <이미지스트 3원칙>을 마련한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올딩턴(Richard Aldington)을 중시하고, 흄의 역할은 단지 하나의 예고편이었다는 생각을 편다.
흄과 파운드의 시론이 가진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미지즘의 중심인물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 이미지즘의 전체적인 성격규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908~1909년 무렵 런던 시단의 중심인물은 흄이었고, 흄의 시론이 1912년 이후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운동을 전개하는데 적지 아니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평자에 따라서는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포드(Ford Madox Ford)를 거론하는데 포드의 중요성은 파운드 자신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지즘에 강한 영향을 미친 불란서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태도도 포드를 통해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는 이들 두 사람의 영향 말고도, 파운드 자신의 프로방스 문학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운드는 이들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중세 로망스 문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자신의 문학관을 어느 정도 정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따라서 이제 흄과 포드의 시이론을 살피고, 파운드가 자신의 연구와 이들의 영향하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즘 이론을 정립했는가. 또 그 이론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어떻게 변모해 갔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3. T.E Hulme과 F.M Ford의 영향
이미지즘이 하나의 시운동으로 정립되는 배경은 단순하지는 않지만, 이미지스트들이 지향하고 있었던 목표는 어떤 점에서 통일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낭만적이라기 보다는 고전적인 예술을 지향하고 있었고, 따라서 언어에 있어서의 정확성과 견고성 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20 세기 초 런던에서 흄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문학회는 1908~1909년 사이에 있었던 <시인클럽>과 그것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1909년의 <후속클럽>이 있었다. 처음에 플린트는 "새로운 시대"에서 <시인클럽>의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공격을 가했지만 흄과의 이후 가까운 사이가 되어 1909년3월에 스토러, 조셉 캠벨(Joseph Cambell),플로렌스 파(Florence FArr)등과 함께 이 <후속클럽>을 만들게 된다. 파운드가 이 모임에 소개된 것은 같은 해 4월이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파운드는 이들과의 문학적 교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훗날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이들에게 진 빚을 부인 하는 데서도 엿보인다.
1912 년 이후 파운드가 펼친 이미지즘 운동과 1908~1909년의 흄 중심의 문학운동이 어떤 연관성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지즘을 애기하는데 흄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론의 중요한 부분은 이미 흄 등이 주장한 것과 다를 바 없고, 또 파운드가 초기에 이들과 일정한 교류를 한 것이 사실이므로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이들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파운드가 흄 등으로부터 이어받은(혹은 이들과 공감한) 문학관은 크게 보아 고전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흄이 처음 가지고 있었던 태도는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것이었다. 초기의 흄이 낭만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주로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영향이 크다. 그는 베르그송의 견해를 그대로 이어 받아 인간의 직관을 중시하는 대신 지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함으로써 반지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생각은 그의 문학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는 고전주의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서 그는 현대시가 그 형식에 있어서 고전주의적 엄격성과 절제를 갖는 대신 자유시형을 가져야 하며, 내용도 시인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흄의 시이론의 핵심 중의 하나는 이미지에 관한 것인데, 그는 현대시가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주의적인 특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미지가 시각ㄱ적이고 구체적이므로 고전주의에서 흔히 그리는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적 행위 대신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또 자유시를 옹호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인데, 그에 의하면 자유시는 개인의 '어떤 모호한 기분(some vague mood)'을 전달해 줄 수 잇다는 것이다.
초기의 흄은 이렇듯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 자유시와 이미지를 강조하며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을 펼쳤지만, 1911년 무렵부터 라세르(Lasserre)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와는 달리 오히려 반 낭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라세르는 19세게 말의 데까당 운동이 지닌 감상적 낭만주의를 배격하고 대신 고전주의의 질서와 절제의 정신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흄이 자신의 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이러한 생각의 반영이다. 흄에 의하면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억압적 질서에 의해 타락하게 되므로 이런 질서를 깨드림으로써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낭만주의라면, 고전주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정적이고 제한된 동물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조직에 의해 훈련되어야 한다고 보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흄은 서구에서 지난 백년간 낭만주의가 계속되었으나 이제 '고전주의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따라서 '건조하고 견고하며 고전적인 시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이 주는 건조한 견고성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축축하지(damp)'않는 시를 시로 생각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한 묘사(accurate description)'가 시의 올바른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있어서의 흄의 영향력을 부인하는 비평가들의 논리는 어떤 점에서 일리가 있으나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주로 1908~1909년의 흄의 활동이나 그 당시 흄이 가지고 있었던 시이론과 파운드의 이미지즘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초기와는 달리 1911년 이후 고전주의자로서의 흄이 주장하는 시의 건조함과 견고성, 그리고 정확성은 그대로 파운드 이미지즘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흄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않게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포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포드의 인상주의적 문학관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이 새로운 변신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다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리의 역할을 했다는 말은 포드가 파운드 이미지즘 발전의 기초가 된 동시에 극복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미지즘에 있어서 흄과 포드이 상대적 중요성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적어도 파운드는 흄의 역할을 경시하는 대신 포드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파운드에 의하면 포드는 당시 영국 최고의 비평가였다. 파운드는 제1차 대전 직전 몇해 동안 런던에서 글을 쓰는 문제에 관한한 그 빛이 흄이 아닌 포드에게서 나왔다고 말한다. 파운드가 이 당시 포드를 주목한 것은 바로 포드가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로부터 정확한 산문정신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심지어 운문에서 조차도-명료성과 정확성, 산문 전통을 주장하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 효과적인 글쓰기에 대해 주장하기 때문에, 그를 중요하고 혁명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포드나 그를 이어 받은 파운드에게 있어서 '산문' 혹은 '산문정신'이란 '시' 또는 '운문정신'이라는 말과 대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모든 종류의 글에서의 간결함과 정확성을 지향하는 어떤 글쓰기 혹은 글쓰기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포드는 '산문'을 '하나의 정신적 습성'이라고 말한다. 포드는 또한 1912년 이전에 자신이 접한 유일한 시는 산문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시인들에게 고집스럽게 '산문을 포착'하도록 권한다.
파운드에 의하면 포드는 '영국 인상주의 작가들의 목자'로서 제1차 대전 이전의 인상주의는 거의 그를 통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포드의 인상주의는 이처럼 산문정신을 중시함으로써 결국 사실주의적, 객관주의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포드가 예술가의 주관적인 생각보다 세계의 객관적 사실의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당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단순한 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일반 하회 문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드의 이런 관심은 문학적인 문제로 넘어올 때 결국 객관적인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지향하게 마련이었다. 그는 예술가의 목표가 '자기 시대의 관점에서 자기 시대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파운드 등의 이미지스트들을 '삶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아무런 논평 없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자들로 지칭한다.
인상주의를 이처럼 사실주의로 해석하고 간결하고 정확한 산문 정신을 중시한 포드의 문학적 태도는 그의 영향을 받은 파운드의 시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파운드는 포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술에 있어서의 '객관성(objectivity)'을 강조하며 그 중요성을 자신에게 주입시켜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미지즘 초기의 파운드가 시에 있어서의 객관성, 사실성, 정확성 등을 중시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포드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는 이상과 같이 흄과 포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후기의 흄이 가진 고전주의적 태도와 포드의 인상주의가 갖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기본적 목표가 객관적 사실의 정확한 기록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이미지즘은 어떤 대상을 시인의 주관에 의해 변형하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보다는 그 대상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Pound의 Imagism 이론
1) 초기의 산문집
파운드의 이미지즘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흄과 포드이 예술이론 뿐만이 아니다. 그의 이미지즘 시이론과 실제 시작(詩作)은 이들의 예술이론 외에 프로방스시와 라틴, 희랍의 서정시, 그리고 나중에 중국 한시와 일본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특히 파운드의 프로방스와 라틴시 연구는 그의 초기 시작과 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이한 점은 이때 그의 시와 이론이 일종의 괴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파운드가 런던에 도착한 1908년에 낸 처녀시집 "꺼진 촛불(A Lume Spento)"에는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형용사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반해, 그이 시이론은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초기 시로써 이미지즘을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형용사의 사용은 그의 시이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망스 문학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그의 시에 장식적인 요소를 갖게 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연구는 사실상 이미지즘을 태동하게 한 일종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년 간에 걸친 파운드의 연구 결과는 1910년 "로망스의 정신(The Spirit Romance)"이라는 책으로 나타나는데, 이 속에는 이미지즘의 핵심적 내용들이 이미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는 단테(Dante)와 카발칸티(Cavalcanti), 카툴루스(Catullus)등의 중세와 라틴계 시인들의 연구를 통해 시를 쓸 때의 표현의 '정확성(precision)' , '생생함(vividness)' , '명료성(clarity)'등을 주장하고 있고,. 이것은 그대로 이미지즘의 주장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정확성이 예술가의 능력과 명예, 진정함을 가름하는 시금석'이며 단테의 "신곡"이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표현의 '적확성' 혹은 '정확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운드가 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나는 오리리스의 사지를 거둔다"와 같은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단테가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미덕인 '관찰과 언급의 정확성'을 강조하고, 예술가들은 그저 '제시(present)'할 뿐 '논평(comment)'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운드는 또한 "시와 드라마"의 1912년2월호 "서문"에서 표현에 있어서의 정확성을 강조하며, 19세기 시에 대해 평가하고 20세기 시에 대해 전망을 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다소 흐릿하고(a rather blurry)' '다소 감상적이며(a rather sentimentalistic)'' 매너리즘에 빠진 시대(mannerism sort of a preiod)'인데, 그래서 그는 이제 앞으로의 20세기 시가 '더 견고하며(harder)' '더 건전할(saner)'것이라고 말하며 '엄격하며, 직접적이고, 감정으로 미끄러들지 않을 것(austere, direct, free from emotional slither)'을 기대한다.
이상의 사실들은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몇 년 전부터 다른 시인, 예술가들과의 교류 이전에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등을 토대로 이미지즘의 중요한 내용을 어느 정도 확립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파운드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다른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미지즘을 하나의 시운동으로 확립하고, 이런 운동을 토대로 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2) Imagism의 3원칙 재고
파운드가 자신의 로망스 문학 연구들을 토대로 흄과 포드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미지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봄의 일이다. 파운드는 이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두리틀, 올딩턴 등과 함께 소위 좋은 글의 '3원칙'을 마련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이 시운동 집단을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미지스트' 혹은 '이미지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공식화가게 된다. 이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이 '3원칙'은 1913년3월 "시"지에 "이미지즘"이라는 표제하에 실리게 된다.
a.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취급 할 것.
b.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c. 리듬에 관해서는 ; 메트로놈적 연속이 아니라 악구(樂句)의 연속 원리에 따라서 쓸 것.
이 3원칙은 이미지스트들이 펼친 주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표현에 있어서의 간결성, 정확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1원칙이 말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취급이나 제2원칙이 규정하는 불필요한 말의 배제 등은 바로 이를 말한다. 다만 제3원칙은 이미지스트가 중시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기계적인 리듬 대신 음악적인 리듬, 즉 자유시형(free verse)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표현의 정확성과 자유시를 주장하고 있는 이 3원칙 속에는 사실상 이미지즘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 모순적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은 이미지즘의 변형 혹은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1원칙은 시인들에게 '사물'을 직적 취급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다룰 대상을 '사물'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이미지스트들이 얼마나 단순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은 시를 시인 의식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의 표현으로서 생각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 자체보다는 그 사물에 대한 시인의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인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대상을 '사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그 연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에 있어서의 모방론(mimesis heory)의 한 형태이다.
20 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이론을 전개하는 이미지스트들의 생각이 19세기 이전 예술관의 답습임을 볼 때 기이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이 이런 고전적인 예술관을 전개한 배경이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방론의 핵심은 사물의 정확한 모사(模寫)이다. 사물의 모사가 정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을 표현하는 시인의 언어가 정확하게 그 사물에 들어맞을 때 가능하다. 이것은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의 산문정신에 다름 아니다. 그 산문 정신의 요체(要諦)중의 하나는 사물과 언어를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일사일언이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영시들은 말하자면 이미지스트들이 보기에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고, 시인이 표현하려는 사물과 언어의 정확한 1대1 대응은 이에 대한 일종의 처방전이었다는 말이다. 파운드는 '하나의 용어(a term)'는 오직 '하나의 사물(one particular thing)'을 의미해야 하며, 아무리 차이가 사소하다고 해도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뭉뚱거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이 사물에 더 이상 밀착되지 않을 때는(when words cease to cling to things)'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그는 말하기도 한다.
정확한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제2원칙에도 나타나 있다.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주문은, 불필요한 말을 삼가해서 말을 경제적으로 의미를 최대한 충전시켜 쓰라는 뜻이다. '위대한 문학은 의미를 가능한 최대로 충전시킨 언어에 불과하다'고 파운드가 말하는 것도 같은 문맥으로 풍이 할 후 있다. 말을 충전하는 기술은 바로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에게서 배워온 것으로, 파운드는 스땅달(Stendhal)이나 플로베르(Flaubert)를 알지 않고서는 정말 좋은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미지즘의 원칙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 혹은 모순은 제2원칙의 '표현(presentation)'이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이 말은 시인이 대상을 변형하거나 논평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제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제1원칙에 나오는 '사물(thing)'이라는 말과 맞지 않는다. 사물이 표현 대상이라고 할 때 시속에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재현(representation)된 것이다. 말하자면 시속에서 '사물'은 '재현'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그대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물의 정확한 표현은 오직 그 사물 자체이다. 파운드 자신의 다른 표현을 빌자면, '매는 매(ahawk is a hawk)'다. 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매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재현' 대신 '표현'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들이 언어를 통해 대상이 간접화되는 것을 피하고 그 대상에 가까이 가고자, 달리 말하면 그 대상을 그대로 시에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열정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표현의 정확성을 지향하는 이들의 태도가 이 원칙에 배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시인이 표현하는 것이 사물인가 언어인가. 대상인가 혹은 그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의식인가 하는 문제로 확대된다. 이것은 제1원칙에 나오는 '주관적이든(subjective)' 혹은 '객관적이든(objective)'이라는 말에서도 엿보이는 문제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시인의 내면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 또 '객관적'이라는 말은 시인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단순한 해석이다. 시인의 내면 정신을 표현했다고 할 때, 표현된 것은 그 정신의 구조 자체 보다는 사실상 그 정신이 활동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낸 제3의 그 무엇이다. 또한 시인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묘사했다고 할 때. 그 표현이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그것은 사물 자체는 아니다. 시인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지고 그 의식 작용에 따라 재구성되고 변형된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 경우 기본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다. 사물이 인간에게 이해되는 것이 인간의 인식작용을 떠나서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인간의 인식 문제로 돌린다고 해도, 언제나 인식은 주관과는 별개의 객관적 존재를 상정하게 마련이다.
3) 이미지즘의 변화 혹은 발전
표현의 정확성과 경제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즘의 3원칙 속에 숨어있는 이 이중성은 이미지즘에 대한 규정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면서도 이미지즘의 급격한 변화 혹은 발전을 설명해 줄 열쇠로 보인다. 시인이 표현하는 것이 사물인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시인의 인식인가 하는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존재와 인식이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이 글이 논의하는 주제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시인들의 개성과 문학관의 차이에 따라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파운드가 이미지즘을 형성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흄과 포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인식 보다 사물을 중시하고, 그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은 물론, 감상적이고 부정확한 언어들로 가득한 당대 영시에 대한 진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운드도 초기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주관적 인식 보다는 객관적 사물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려내려 한다. 이것은 이미지즘의 출발점이 언제나 사물이었음을 말해 주며, 이런 점에서 데이비(Davie)는 파운드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자(realist)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미지즘의 3원칙을 발표할 때 까지의 파운드에게는 위의 칭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원칙 속에는 파운드가 의식했건, 의식치 않았건 변화의 조짐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미지즘 3원칙은 1912년 경까지 흄, 스토러, 폴린트, 토드, 파운드 등의 문학적 논의를 몇 개의 원칙으로 정리한 것이면서도, 이미 이 원칙은 새로운 변화를 예견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3원칙은 1913~1914년을 전후한 예술가들의 관심 변화, 특히 파운드의 시적 태도의 새로운 변화에로 넘어가는 일종의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는 이 원칙을 발표하던 당시는 때로는 인간의 객관적 사물세계에, 또 때로는 주관적 의식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존재>와 <인식>이라는 두 축을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점차 사물 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존재 보다는 인식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고, 결국 사물, 존재 세계를 떠나 인간의 의식 세계, 의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이것은 바로 파운드가 이미지즘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시의 새로운 예술 운동이었던 보티시즘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파운드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보티시즘은 이후 그의 모든 시와 산문을 규정하는 하나의 원리로 작용한다. 그의 시 "케세이(cathay) 1915)","휴우 셀윈 모벌리(Hugh Selwyn Mauberley), 1920)" 그리고 "시편들(The Cantos), 1930-1969"은 파운드가 보티시즘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현재의 모습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 3원칙에 내재한 이중성 혹은 모순은 결국 후기 파운드의 변모의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운드가 사물의 세계보다는 인식의 세계에 관심을 돌리고 그래서 마침내 이미지즘을 떠나게 되는 데는 파운드 자신의 방향 변화 뿐만 당시 문단의 사정 변화 또한 한 몫을 하게 된다. 이 변화는 1913년 후반기에 이르러 이미지스트 그룹에 몇몇 시인이 새로 참가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로렌스(D.H Lawrence)와 윌리암스(W.C.Williams),로웰(Amy Lowell)등으로, 기존에 이 그룹에 속해 있던 시인들과 함께 그들은 최초의 이미지즈트 엔쏘로지 출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책의 출판과정에서 일어난 로웰과 파운드의 불화로 끝내 파운드는 이 그룹을 떠나고 만다.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그룹을 떠나게 된 것이 그러나 이런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파운드가 보기에 로웰을 새로운 주축으로 한 이 그룹은 과거에 자신이 주장했던 이미지즘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지즘'이라는 말은 '어떤 명료성과 강렬성(a cettain clarity and intensity)'과 연관 되는 것인데, 새로운 그룹은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유시'에만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파운드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 1915년에 출판한 "몇몇 이미지스트 시인들"이라는 엔쏠로지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 그룹의 여섯 위원들이 합의를 한 6원칙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1913년 시"지에 파운드 등이 실은 이미지스트 3원칙과 거의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이들이 제시한 원칙들 중 첫째의 '장식적이지 않은 정확한 말' , 다섯째의 '흐릿하거나 불명료하지 않은, 견고하고 명료한 시' , 그리고 여섯째의 '집중' 등에 대한 주문은 이미지즘 3원칙의 제1,2원칙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둘째의 '새로운 정조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리듬'과 '자유시'에 대한 언급은 이미지즘의 제3원칙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적어도 원칙에 있어서 만은 초기 이미지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도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파운드의 비난대로 자유시형을 추구하는 집단에 머물고 만다. 1915년에 나온 이들의 엔쏠로지가 성공을 거둔 후 많은 모방자들이 나타나지만, 이들은 이미지즘의 본질이라 할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강렬성 등의 정신은 잃어버린 채 자유시에만 몰두한다. 결국 로웰 중심의 이 후기 이미지즘은 한 때 인기가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량 있는 시인들의 부족으로 곧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1917년에 나온 세 번째 엔쏠로지의 판매가 부진하자 이 여섯 시인들도 이제는 이 운동을 그만 둘 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파운드 이후 로웰로 명맥이 이어지던 이미지즘은 끝이 나게 된다.
파운드가 이미 이 일이 있기 전인 1914년경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선 것은 위에 말한 대로 로웰 중심의 이미지즘의 한계성, 그리고 로웰과의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1913년 중반부터 다른 곳에 관심을 쏟게 되는 그는, 고디에 브르제스카(Gaudier-Brzeska)를 통해서 조형예술을 알게 되고 또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의 원고 정리를 하며 한자(漢字)의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또한 파운드가 변모를 하는 데는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의 영향도 크게 작용한다. 예를 들면 1913년 12월 런던에서 열렸던 엡슈타인(Epstein)의 개인전과 관련된 논쟁에서, 당시 독일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흄은 기하학적, 추상적 예술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와 함께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1912년에 나온 그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파운드에게 추상적 예술의 세계를 다시 일깨워 준다. 이런 모든 경향은 결국 파운드로 하여금 이미지즘을 떠나 보티시즘의 세계로 향하게 만든다.
1914 년 이후 파운드의 작품을 지배하게 되는 보티시즘은 기본적으로 객체적 사물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창조적 인식을 중시한다. 그래서 파운드는 사물의 단순한 수용보다는 언어를 통한 예술가의 새로운 세계 창조에 관심을 기울인다. 파운드의 이런 변화에는 앞서 살핀 대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의 정립 단계에서 발표한 이미지스트 3원칙에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이 숨어 있었고. 나중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경향의 발전적 형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의 단계별 변화 혹은 발전을 가져온 여러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이미지즘 이론 자체가 그 내부에서 출발점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이중성 혹은 모순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맺는 말
20세기 초 파운드가 주도했던 이미지즘 운동은 그 강력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운동을 통해 창작된 시는 의외로 그 양에 있어서 빈약하다. 그리고 그나마 발표된 시들도 대부분 짧은 자유시에 불과하다. 스피어스(Spears)는 표현의 정확성과 경제성을 규정하는 이미지즘의 제1,2원칙은 후기 빅토리아조와의 결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진정으로 규범적인(truly descriptive)'것은 제3원칙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제1,2원칙의 '정확성'에 대한 주문은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애매한 요구이고,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쓸 때 따를 수 있는 실질적인 것은 제3원칙이라는 것이다. 제3원칙이 자유시를 규정하는 것이고 보면 이미지즘 시가 결국 자유시의 일종으로 결말이 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즘 시가 가진 한계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소 이분법적이기는 하지만 시를 주제와 기법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때, 이미지즘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말하자면 기법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지즘은 따라서 시의 내용이나 주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정확성과 견고성을 일단 확보하면 시는 그 주제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문제를 삼기 어려웠다. 그래서 데이쉬즈(Daiches)에 의하면 이미지즘 시들은 과도한 정확성과 자유시형 등을 주장할 뿐 인간의 이상이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표면예술(a surface art)'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시들이 정확한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효과를 강조할 뿐 전체적인 유기적 통일성을 찾기 어려우며, 따라서 그 핵심에는 '공허(emptiness)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미지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러나 이미지즘이 현대 영시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이 주제나 내용보다 기법과 형식에 치우친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 자신의 편향된 관심 때문이라기보다 그 당시 영시가 가진 문제점이 주로 그런 기법이나 형식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그들의 주문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당대의 시가 가진 문제점이 느슨하고 감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바로 언어이므로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바로 훌륭한 시의 기본 요건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미지즘 운동을 통하여 서구의 현대시는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등에 대한 각성을 함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시가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들을 극복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1. Vorticism
소용돌이주의(Vorticism)는 파운드가 런던에 머물고 있을 당시(1908-1920) 영국 전위예술가들의 예술적 취향이나 태도, 또는 그들의 예술을 시에 적용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창안해 낸 시작법의 일종이다. 소용돌이주의는 소용돌이(vortex)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그룹의 이념은 미래파의 문학사회 이론 및 입체파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소용돌이는 에너지의 최고점이며, 메카닉 가운데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소용돌이를 세계관의 상징으로 삼는 역동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영국의 정적인 예술 전통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 운동은 파운드가 이미지즘이 지나치게 정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의 소용돌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의 출현을 알려 주는 유일한 전위예술의 한 분야였다. 파운드는 "소용돌이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어느 한 진영에 모여 있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이미지즘이고, 다른 진영에서는 미래주의이다. . . . 그것이 하나의 예술운동이 되는 한, 그것은 일종의 가속화된 인상주의"(심인보 296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소용돌이" 또는 "회오리 바람" 등으로 정의되는 "Vortex"라는 단어는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재생의 힘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끓어 오르는 힘(동적 상황)과 조용한 형태의 무력감(정지상태)을 결합시킨 용어로 해석되어 왔다. 이미지즘과 소용돌이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미지즘이 정적 이미지만을 표현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소용돌이주의는 이미지즘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적 이미지를 시로써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파운드의 시 「장기시합과 놀이에서의 독단적인 말」("Dogmatic Statement in the Game and Play of Chess")라는 시에서는 동적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파운드의 시도가 잘 보여진다.
이 시는 소용돌이파의 그림처럼 선, 색채, 모형을 기본 바탕으로 한 추상시로서, 장기판의 딱딱한 규칙에 따른 난폭한 힘의 소용돌이를 나타낸다. 장기 두는 사람이 대문자 L 모양으로 채색된 장기판을 때린다.
손 뻗쳐 여러 각도에서 공격하고,
한 가지 색으로 버틴다.
장기판은 빛으로 살아 있다. . . .
한 판이 끝나고 장기에 진 사람은 판 모양을 헐어 버리고 다시 만들며 이기는 순간까지 계속 장기를 두려고 한다.
빙글빙글 돈다, 가운데 모이고, 외퉁수 장군, 소용돌이 속에서 왕은 쓰러진다.
충돌, 눈에 띄는 줄무늬들, 강한 색채의 진선들,
안에서 작용하는 차단된 빛, 도망, 시합의 재개.
이 시는 빛과 공간의 틈새로 만들어진 장기판의 선이나 색깔에 도취되어 장기를 두는 추상적인 모습을 그린 시이다. 즉, 기세가 불리하여 쫓겨 도망갔다가 돌아서서, 다시 상대방의 말(馬)을 잡아먹으려는 상황을 그림처럼 재미있게 표현한 이 시는 소용돌이주의 시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소용돌이주의 시인들은 위의 시에서 본 것처럼 동적 심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특별한 활자체 모양을 도입하였다. 소용돌이주의자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의 특징인 온순, 화해, 자연, 부드러움, 19세기, 교육, 민주주의, 곡선, 부드러운 선, 혼합된 색채 등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예술적 장식물을 공격하였다. 그 대신 그들에게 거칠음, 양극단, 난폭, 현재, 기구, 딱딱함, 날카로움 등으로 이루어진 금속성의 물체는 유동적이며 가변성이 있어 엉키거나 똑같은 모양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소용돌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시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한 활자체로 모양을 다음고, 활자체 모양의 배열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고조시키려고 하였다. 소용돌이파는 활자체 모양을 다루는 솜씨가 제일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일종의 자유산문형의 넓은 공간을 큼직하고 묵직한 글자로 조심스럽게 메꾸고 있다. 사실 이들은 크고 넓든 텅 빈 흰 종이 위에 굵직굵직한 검은 선이나 글자로 얽힌 추상화 같은 시를 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시에다 그림과 같은 글자체를 보충하여 시각적 효과를 노린 시를 자신들의 예술로 고정시키려 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들의 글에서는 글 자체가 만들어 내는 그림들이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시각적 경험의 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 산업혁명을 지나면서 그 이전의 구조물들이 목재나 석재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철골 구조물이 생겨났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889년에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인 에펠탑(Eiffel Tower)는 기존의 석목재 구조물과 구별되는 철골 구조물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이 탑은 높이가 984피트(약 300 m)로 그 이전에 건설된 어떤 건물에 비해서도 약 2배에 이르는 높이였다. 사물 혹은 장면의 정확하고 객관적 표현을 목표로 했던 소용돌이주의자들이 그들의 활자 모양을 고안하고, 글 자체로서 만들어내는 그림들이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이룬다는 점은 시각적 경험의 변화에 따른 필수불가결한 산물일 것이다.
또한 소용돌이주의는 사진술의 발달과도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인데, 고정되어 있는 사진(still pictures)은 1890년대에 움직이는 사진(moving pictures)으로 발전하였다. 촬영되고 영사되는 활동사진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낸 1887년부터 계속된 다양한 혁신들의 상대적 가치는 불분명하다(엘리스 32). 하지만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에서 선보인 최초의 영화 시사회장에서 관객들이 화면상의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곧장 자신들에게로 와서 충돌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던 일례를 보면, 그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 경험의 재생이 보다 구체화되고 동적으로 표현되는 시점에서 소용돌이주의자들의 동적 심상의 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2. Objectivism
객관주의(objectivism)란 객관적인 예술 혹은 문학의 이론 또는 실천이다. 이 용어는 1930년대에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에 의해서 사용된 것으로 시를 기계적인 형태로 고려하고 분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려는 운동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 용어는 시의 구조상의 외견을 검토하고 어떻게 그 시가 구성되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운동에 참여한 시인들은 Louis Zukofsky, George Oppen, 그리고 Charles Reznikoff이다. 이 유파는 실용주의와 물질주의를 중요시 여겼는데,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미국인들의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고전주의적이고 유럽 식의 영향이 시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느꼈다. 그는 현대 미국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로 삼아 전통적인 시형을 무시한 시를 썼다. 그래서 브래들리(Sculley Braddley) 등은 그를 미국문학의 "전위파"(avant-guard)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윌리엄스와 관련해서만 살펴볼 것인데, 서론에서 기술했듯이 윌리엄스에게서 이미지즘과의 연관성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실제로 파운드와 시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파운드는 1908년 10월 21일자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에게 보낸 서한에서 흄이 주장하는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 및 군말의 폐지(absolutely accurate presentation and no verbiage)"의 내용과 비슷한 "시작법의 궁극적인 달성(ultimate attainments of poesy)"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1. 사물을 내가 그것을 보듯이 그려내라.
2. 미.
3. 교훈적 경향에서의 탈피.
4. 만약 당신이 적어도 더 좋게 혹은 더욱 간단하게 다른 소수의 사람을 반복한다면 훌륭한 일이다.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첫 번째 항목은 특히 이미지즘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항목이다. 윌리엄스는 아마도 이 항목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시에서 어떤 교훈이나 사상의 직접적 표현을 배제하였으며, 어떤 전경을 표현할 때는 마치 그림을 그려내듯이 하였다. 아래에 인용한 윌리엄스의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에서 이러한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이
빠알간 손수레에
의존해 있다
빗물에 씻긴
손수레
그 옆엔 하이얀
병아리떼.
비록 전에 살펴본 파운드의 시에서처럼 각종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한 가지 장면을 표현해 내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라"는 파운드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은 오히려 이미지즘보다도 더욱 깊게 사진 예술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겨진다. 육안에 의한 상상 의식으로 표상된 현실상과, 상상 의식과는 관계없이 물리적 정확성으로 재생하는 영상 사이의 상극성으로 사진은 스스로 표현의 가능성을 깊게 하는 것이다.
회화는 보는 이를 명상으로 유도하여 연상 작용에 몰두케 한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한 화면을 눈으로 포착했는가 싶으면 이미 화면은 바뀌어져 가고 있어, 정착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 . . 화면을 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화면의 변화에 의해 즉각 중단되는 것이다. 여기에 영화의 쇼크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이것은 고도의 신경 활동으로 포착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회화와 유사하다. 그러면서도 회화처럼 명상으로 유도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회화가 미크로코스모스적(Mikro-kosmos)미시적 공간인데 대하여 . . . 따라서 완결된 세계인데 대하여 . . . 사진은 미완의 부분적 공간이며, 명상이라는 작품과 자기와의 독자적이며 폐쇄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지향보다도, 작품에 대해서 체험적이며 미지의 공간에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지향이 본질 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화 작품은 작자의 모든 사고와 상상과 구체화의 완결이고, 또 집약이며 결과이다. 그러므로 보는 이는 그 결과로서의 화면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 작품은 그것이 작자가 사건의 곁에서 목격했다는 입증인 한, 작품을 통하여 작자의 체험을 우리는 추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영상이 구상적이라는 이유로서만이 아니라, 영상이 작자의 체험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진을 보는 법은 명상적이기보다는 체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글은 어쩌면 윌리엄스의 시들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윌리엄스는 우리는 물질 세계로부터 사고를 받고 형성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라이트 형제는 처음에 새를 보지 않았다면 결코 인간의 비행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새의 날개가 그들에게 비행기에 대한 사고를 제공했던 것이다. 윌리엄스가 말했듯이 "물질 속이 아니고서는 사고가 있을 수 없는 것(No ideas but in Things)"이다. 로젠탈은 "모든 사물은 우리가 색깔, 모양, 상호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영역은 그것, 의식의 자유, 즉 우리가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으로서 서로간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윌리엄스의 객관적 사고영역을 표현한다(심인보 248-9 참고). 즉 윌리엄스의 시는 독자들에게 오로지 이미지만을 보여 주고, 그 이미지를 보면서 독자들이 나름의 사고를 갖기를 요구한다.
출처,.dungdan.com,최재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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