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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2019년 03월 09일 21시 04분  조회:1328  추천:0  작성자: 강려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말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말들은 항상 <이것이며 다른 것>인 동시에 <저것이며 저 너머의 것>을 말한다. 사고는 단념하지 않고 줄곧 말의 사용을 강요하며, 한번 또 한번 자신의 법칙에 따르도록 한다. 반면에 언어활동은 한번 또 한번 반항하면서 구문론과 사전학에 의해 구축된 제방들을 파괴한다. 어휘학과 문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으로 판결받은 활동이다. 거기에서 마치 정적인 존재인 것 같은 문법은 언어가 소리들의 결합이며, 소리들은 보다 단순한 단위 곧 언어세포를 구성한다고 단언한다. (중략)
 
언어활동은 의미있는 단위, 곧 구절들에 의한 하나의 우주인 셈이다. 이러한 단언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문법적인 분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가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 아이들은 단어들을 고립시킬 수 없다. 문법의 습득이 구절을 단어들로 나누고, 단어를 음절과 문자로 분리하도록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단어에 대한 자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구절에 대해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의미개념들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글을 쓰기 때문에 하나의 구절이 여러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겨우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이와 동일한 경향이 나타난다. (중략)
 
시는 언어활동 및 언어세포로서의 구절과 동일한 복합적이며 분리할 수 없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모든 시는 자신에 대해 닫혀진 총체로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한 구절이거나 여러 구절들의 결합이다. 시인은 토막토막 잘린 어휘가 아닌 치밀하고 분리시킬 수 없는 단위들 안에서 표현한다. 시의 세포, 가장 간단한 핵은 시구이다. 하지만 산문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구절의 단위, 즉 구절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고 언어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의미나 의미있는 지시가 아니라 리듬이다. (중략)
어느 누구도 말의 마술적 힘에 대한 신념을 뽑아 버릴 수 없다.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언어활동 앞에서의 보류는 지적인 활동이다. 단지 어떤 순간에서만 우리는 단어들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언어활동 앞에서의 신뢰는 인간의 자발적이며 원초적인 활동으로서 사물은 스스로의 이름인 것이다. 단어의 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신앙에 관한 회상이다. 자연이 활기를 띠고 있을 때 각각의 물체는 자신의 삶을 지니고 있으며, 객관적인 세계의 이중적 존재인 단어들 역시 활기에 가득 차 있다. 언어학은 우주와 같은 존재로서 부르고 대답하는 세계 밀물과 썰물, 결함과 분리, 흡기와 호기의 세계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다른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두는 상응한다. 말은 살아 있는 존재, 천체와 초목들을 주재하는 것과 유사한 리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의 결합이다.
 
자동필기를 실행해 본 모든 사람들은 – 이런 시도가 가능한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활동의 기묘하게 빛나는 연합을 알고 있다. 초혼과 소리침. 앙드레 브르통은 <낱말들은 사랑을 창작한다> 말한다. 그리고 알폰소 레예스 같은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언어에 대한 스스로의 지배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는 시인에게 경고한다. <어느 단어들이 너에게 대항하여 연합할 것이며 일순간에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문학적 증거들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 정신착란, 최면과 기타 의식의 이완상태는 구절의 분출을 도와준다. 이미지의 강물에 이끌리며 우리는 순수한 존재의 언저리를 문지르고 합일의 상태, 우리 존재와 세계 존재의 마지막 결합을 추정한다. 조수를 막아내는 방파제일 수 없을 때 의식은 동요한다. 그리고 곧바로 모든 것이 최후의 한 이미지에서 흘러나온다. 하나의 벽이 우리의 통행을 중단시키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중략)
 
모든 구두현상의 심층부에는 하나의 리듬이 있다. 단어는 몇몇 리듬원칙에 따라서 결합되고 분리된다. 만일 언어활동이 하나의 은밀한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절들과 말에 의한 연상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이라면, 이러한 리듬의 재생은 우리에게 단어에 대한 힘을 줄 것이다. 언어활동의 원동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끌어당기고 밀치는 동일한 세력들을 이용함으로써 말에 의한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끌어 준다. (중략)
 
시 작용은 주문, 요술 밖의 다른 마술행위들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인의 자세는 마술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중략)
 
마술사에게 있어 신들은 가설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달래주고 사랑해야 하는 실재도 아니며, 유혹하여 극복하거나 조롱해야 할 세력이다. 마술은 위험하고 불경스런 기획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인간능력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마술사는 홀로 신들과 마주보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고독에 뿌리박고 있으며, 거의 항상 무위로 끝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의 자존심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실상 발산되지 않은 모든 마술 – 이것은 선물, 박애로 변형되지 않은 것이다 – 은 자신을 부수고 결국에는 창조자(마술사)를 부숴 버리게 된다. (중략)
 
마술사는 우주적인 힘과의 상호소통, 하나의 힘을 지닌 예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 그 둘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마술은 삶의 우애 – 동일한 흐름이 우주를 거닌다 –를 긍정하고 인간의 우애를 부정한다.
현대시의 어떤 창작물은 이와 동일한 긴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마도 말라르메의 작품이 최상의 예가 될 것이다. 단어들은 결코 자신 보다 많이 실은 완전한 상태일 없으므로 교배한 덕분에 검게 되어 버린 열대꽃처럼 거의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각각의 단어는 현란하기만 한데 이것이 단어의 명백함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를 시원하게 아니면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광물적인 명백함이다. 아주 높은 지점에서 벌이는 언어활동은 연극에서 내화(耐火)와 같은 존재가 될 만하다. 말라르메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오직 무대에서만 진정한 형상화가 완전히 소멸되거나 완성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는 우리에게 극적 시도인 다양한 시 단편들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고 몽상적인 극에 대한 고찰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보통의 시어가 없는 연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활동을 이루고 있는 긴장은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그의 신화는 박애적이지 않다. 즉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지튀르인 것이다.
 
그의 명백함은 결국 자신을 불태워 없앤다. 화살은 표적이 의문투성이인 우리의 고유한 이미지일 그것을 사람을 향해 되돌아온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술적 이중성 –하나의 우주로 생각되는 작품- 이라 할 언어활동을 창조하려는 시도에 있다기보다는 특히 이러한 언어활동을 연극, 인간과의 대화로 변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자각에서 형성된다. 만약 작품이 연극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빈 페이지에서 흘러나오게 될 또 다른 선택권은 없다. 마술행위는 자기 살해로 변질된다. 언어활동의 마술적인 경로를 따라서 프랑스 시인은 침묵에 이른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침묵은 하나의 말을 포함하고 있다. 소르 후아나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싶던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이다. 인간의 침묵은 하나의 무언이다. 따라서 그건 말없는 가운데의 상호소통이며 잠재되어 있는 의미이다. 말라르메의 침묵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무(無)를 말한다. 그것은 침묵 이전의 침묵이다. (중략)
 
시는 요술이나 주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도요법과 점술방식과 같이 시인은 언어의 은밀한 힘을 눈뜨게 한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활동을 매혹시킨다. 또는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중략)
 
모든 리듬은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이다. 그래서 리듬은 전적으로 내용물에 대한 실속 없는 측정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 하나의 감각인 것이다. 리듬은 측정이 아닌 원초적인 시간이다.
(중략)
 
우리 존재는 시간이며, 우리가 지나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시간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리듬은 시계 달력과는 상반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곧 시간은 추상적인 측정이 되기를 중단하고, 구체적이며 하나의 방향을 갖춘 존재로 되돌아간다. 끊임없는 분출, 보다 더 저쪽으로의 영원한 전진, 시간은 영속적인 발산이다. 시간의 본질은 <보다 더>와 이러한 <보다 더>에 대한 부정이다. 시간은 역설적인 방식에 의한 의미를 긍정하며, 역설적인 의미처럼 그 자신을 줄곧 부정하는 하나의 의미 –보다 더 저쪽으로 가는 것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있다-를 지니고 있다. 시간은 파괴이며, 파괴되는 순간에 반복되지만 각각의 반복은 하나의 변화인 것이다. 항상 동일한 것인 동시에 동일한 것의 부정이다. (중략)
 
시인에게서 나온 단어들이 말하는 것은 이미 그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을 지칭한다. 좀더 부언하면 단어들은 줄기에서 나온 꽃처럼 자연스럽게 리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리듬과 시어 사이의 관계는 무용과 음악적인 율동 사이를 주재하는 관계와 다르지 않다. 리듬을 무용의 울려퍼지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무용 또한 리듬의 육체적인 해석이 아니다. 모든 무용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무용이다. (중략)
 
리듬은 이미지, 의미이며 삶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자발적인 태도로서 우리에게서 벗어나 있지 않다. 곧 리듬은 우리를 표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리듬은 구체적인 세상사이며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이다. 단테가 인지하고, 별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은 사랑이라 불린다. 노자와 장자는 상대적인 대립요소들의 산물인 다른 리듬 소리를 듣는다. 헤라클레투스는 리듬을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리듬은 동시에, 각각의 독특한 내용물을 다른 것에서 증발시킴이 없이 단일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이미지,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세속적인 달력은 우리에게 과거든지 미래든지간에 하나의 현재, 하나의 총체적인 실재 속에서 모든 시간을 포옹하는 원초적인 시간으로의 통행문을 닫아 놓고 있다. 신화적 날짜는 우리에게 과거를 미래와 결합시키는 현재를 추측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신화는 자신의 총체 속에 인간의 삶을 포함한다. 리듬을 통하여 전형적인 과거, 곧 현재로 구현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재적인 미래로서의 과거를 실제화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만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없다. (중략)
 
존재라는 의미에서 볼 때 시는 모방에 의한 하나의 재생으로 이는 말에 대한 가장 오래된 뿌리- 원형, 신화들 – 내에서 시인이 전형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서정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도 미래로서의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 –어린 아이들, 원시인들 요컨대 모든 인간이 더욱 심원하고 본래의 성향에서 고삐를 놓을 때처럼-이 직업적인 모방가라고 단언하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이런 모방은 원초적인 창조로서 시간들의 원점과 인간 각자의 밑바탕에 있는 어떤 것, 시간 자체 및 우리와 합일되고 모두에 대해서도 또한 유일하며 독특한 존재인 어떤 것에 대한 초혼, 재생, 재창조이다. 시의 리듬은 현재인 동시에 미래인 과거, 우리들 자신에 대한 실제화이다. 시구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시간이며 영속적으로 재창조되는 리듬, 원초적인 시간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재생, 반복되는 죽음과 새로운 재생인 것이다. 산문에서 의미 또는 의미화에 의해 주어지는 구절 단위는 시에서 리듬을 통하여 획득된다. 그러므로 시적인 연관성은 산문과는 다른 질서를 지닌 존재라야 한다. 리듬을 갖춘 구절은 우리에게 그 의미에 관해 살펴보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시구의 의미 있는 단위가 어떻게 얻어지는지를 연구하기 전에 운문과 산문 사이의 관계를 좀더 가까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끝>
 
옥따비오 빠스 <詩와 散文> (1990, 民音社; 옮긴이- 김현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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