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S. 엘리엇 비평의 대화적 상상력
시론을 '시작' 하며 또는 용의 머리(龍頭) : 소위 '포스트' 시대에 교활한 엘리엇 '되' 살리기
또는 '새로' 읽기 또는 '다시' 좋아하는 법 배우기 중에서.
엘리엇은 좋은 의미에서 '교활한' 야누스이다. 여기서 '교활한'이란 말은 다면체적 엘리엇에게서 우리는 그의 한 면만을 보고자 고집하게 때문에 생기는 그의 알 수 없는 다른 면에 대해 의혹/의심하는 우리 자신의 '불평'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담장에 걸터 앉아 언제나 양쪽을 바라보는 포월(匍越)하는 니체의 '초인'이다. 엘리엇은 미국 '남부인'으로 태어나 동부의 최고 대학을 다닌 '동부인'이 되었으며,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와 문학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갈등과 대화의식은 그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강한 방랑자, 유목민으로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고 ('철학'과 '문학'의 보이지 않는 대화이던가?) 시의 습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서양 철학은 물론 동양 철학(특히 인도 철학)에도 심취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이미 정신적 지적 유목민이었다.
엘리엇은 위대한 이민자였다. 미국에서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스스로 지적 정신적 망명자가 되었으며, 스스로를 급진적으로 '타자화' 하였다. 그는 약속되었던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 자리를 의연히 떨쳐버리고 I.A. 리차드가 제시하였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 영문학과의 자리도 거절하고 치열한 세속적 삶의 싸움터인 런던의 야시장 바닥에 자신을 내던졌다.
엘리엇이란 작가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시대적 '산물'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의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작가로서 키워져 버린(만들어진)-자신의 의지에 반(反)하여-분열되 버린 자기 시대 속에서의 실존적 지식인이었다(이는 초기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나 [황무지]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시의 '심적' 자아는 초기 산문에서 '공적' 자아로 나타난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뒤얽힘과 갈등은 [푸루프록의 사랑노래]에 실존적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화구조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기의 '시'와 '산문'의 갈등구조는 자신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또 다른 양상인가? '시'에서는 엄청난 형식파괴를 통한 실험 그리고 [황무지]의 경우에서처럼 시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의 예상치 못한 병치와 접합으로 새로운 충격과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하는 바흐친의 눈으로 보자
그의 [도스토예프스키의]의 생각은 어디에서든지 목소리들, 반(半)목소리들,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몸짓이라는 미로를 통해 나아간다. 그는 다른 추상적인 입장을 토대로 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결코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어떤 지시적인 원칙에 따라 생각을 서로 연결하지 않으며 여러 견해들을 병치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 자신의 견해를 구축한다.
같은 맥락에서 엘리엇 자신은 병렬적 상상력과 중층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터너와 미들턴의 시행을 보면, 언어의 끊임없는 작은 변모가 일어나고, 어휘들은 끊임없이 새롭고도 갑작스러운 결합 속에서 병치되고, 의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들과 중첩된다. 이것은 감각의 아주 높은 단계로의 발전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결코 필적할 수 없었던 영어라는 언어의 발전-을 증명하는 예이다. 그리고 정말로 체프먼, 웹스터, 터너, 단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는 지성이 즉각적으로 감각과 닿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감각은 어휘가 되었고 어휘는 감각이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지성과 감성이 손쉽게 교류하는 대화관계에 있고 감각과 어휘 사이에 자연스럽게 환유적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의 이러한 대화적 중첩적 특징들은 산문에서는 문체나 내용적인 엄청난 절제와 통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의 엘리엇에게 분명 시는 산문의 알터 에고(alter ego)였다. 어느 것이 진정한 엘리엇인가? 왜 이와 같은 긴장관계를 만드는가? 분열증은 시에서 토해 내고 다시 산문에서 편집증적으로 추스린 것은 엘리엇 특유의 담론전략이었던가? 분열증인가? 편집증인가? 그러나 엘리엇 자신의 자신의 시와 산문과의 상호보완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비평에서 가장 정확한 의견들을 주장하는 반면 나의 운문에서는 그 의견들을 파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개의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중적 역할을 가진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수치감도 느끼지 않는다. [...] 산문에서는 사색이 이상과 합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반면 시작(詩作)에서 우리는 단지 실제만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는 다른 시뿐 아니라 산문으로부터도 배울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산문과 시 사이의 상호관계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처럼 문학에서 생명력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주위의 끔찍한 현실 -서구 문명의 몰락과 와해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절대적 진선미를 추구하려던 자신은 이미 산산이 파편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이 통합하고자 했던 (서구 중심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중략
엘리엇 자신도 그 어느 비평도 후세에 계속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문학비평도 후세대를 위해서 그것이 자체로 계속 유용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본질적 가치를 계속 가지지 않는다면 호기심 이상의 감성을 자극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 비평의 일부가 이러한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진다면, 우리는 만일 우리가 또한 그 작가와 그의 첫번째 독자들의 입장 속에 우리 자신들을 집어 넣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 그 가치를 그만큼 더 정확하게 향유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무엘] 존슨과 콜리지의 비평을 공부한다면 틀림없이 커다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대화적 비평의 대가들인 존슨과 콜리지를 보고 엘리엇이 끊임없이 배웠듯이 우리는 엘리엇의 의식구조[대화구조]에 우리 자신을 새로 끼워 넣어 다시 읽고 새로 써서 그의 비평의 가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보자. 다시 말해 알튀세적인 '징후적 읽기'를 통해 엘리엇을 우리 시대에 다시 보이게 만들자. 이러한 시도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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