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1. 시라는 수수께끼
그는
시를 '마신다' 고 표현한다.
인간과 우주 앞에서 느낀 당혹감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고 고백한다.
시의 실체는 열정과 즐거움이다.
2. 모든 단어는 잠자는 은유
눈과 별, 시간과 강, 여자와 꿏, 인생과 꿈, 죽음과 잠, 전투와 불
은유의 변형은 무한하다.
3. 이야기하기
이야기 하는 것과 시를 읊는 것이 합쳐지기, 를 즉
이야기의 즐거움에 시의 기품이 추가되기를 소망.
소설이 무너지고 있다. 보르헤스는 시인의 어원이 원래 만드는 사람을 뜻했기에 다시 그런 역할을 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만들다는 의미는 이야기를 지어내 읊다는 뜻이다.
4. 시의 번역
번역은 반역이다 라는 인구에 회자되는 이탈리아 경구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변역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직역의 기원이 성경의 번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쓴 텍스트를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직역 덕분에 사람들은 모국어와 다른 묘사 방법을 배우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고 믿는다.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역사적 상황보다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5. 사고思考와 시
이론에 의해 정의된 문학론 보다는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은 문학 그 자체를 추구한다. 그는 말이 가진 마법의 힘을 설명하고, 중요한 것은 문체의 정교함이 아니라
시가 살았느냐 죽어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시인의 신조>
저는 제 자신을 본질적으로 독자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감지하듯이 저는 감히 글을 써왔습니다만, 제가 읽었던 것이 제가 썼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읽지만,
누구든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기 때문입니다.
시가 정체를 드러낸 결정적인 순간의 중요성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어떤 생각과 씨름해 왔습니다. 그 생각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수천 수만의 순간들과 날(日) 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을 단 한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問道夕死可矣)"를 떠올리는 말이다.
그 결정적 순간이 심지어 한 인간의 이미지까지도 결정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하는 순간이 그를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배신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든 것과 같이. 그 순간을 겪으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키츠가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어느 한마리 새의 노래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새소리라고 느끼면서 영원을 맛보았다는 그 시 이야기는 보르헤스의 산문과 시 곳곳에서 인용된다. 핵심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즉
문인으로서의 소명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저의 인생에서 중심적인 사실은, 언어의 존재 및 그 언어를 시로 짜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그 사건이 일어난 아버지의 서재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십분 이해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문학 인생은 그 순간의 자기 복제와 재생인지 모른다. 보르헤스 문학의 비밀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물론 그를 글쟁이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외면의 형식이고, 내면적인 내용은
초월(꿈)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영매靈媒 로서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제가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 저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성이 작가의 작품과 많은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문학의 죄악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자의식적(self- conscious)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상황들에 대해 잊습니다. 저는 꿈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평론가들에게 감사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거창한 철학적 의미보다는 소박한 꿈을 나누는 일반 독자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스름 황혼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유대인의 손은
렌즈를 몇 번이고 윤을 내고 있다.
저물어 가는 오후는 두렵고 춥다.
(모든 오후는 저물어갈 때 그렇게 마련이다.)
게토의 변두리에서 창백해져가는
히아신스 빛 공기와 그 손은
그 말 없는 이에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명백한 미로를 꿈꾸고 있었다.
다른 거울의 꿈속에 비춰진 꿈의 반영에 불과한 명성과
처녀들의 두려운 사랑도
그를 흔들지 못했다.
은유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힘들게 수정을 갈고 있다.
모두 자신의 별들인 ,조물주'의 무한 지도地圖를.
보르헤스의 시 '스피노자'
1969년에 보르헤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을 동경했었다. 이때도 중남미 좌파 지식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보르헤스를 비판했다. 어쨌든 이제는 국제적으로 보르헤스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어, 어딜 가나 그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구루(정신적 스승)' 의 대접을 받았다.
꿈의 책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삶의 책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위의 단편이 그 점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년이 깊어가며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보르헤스 역시 이 삶이란 꿈에서 그만 깨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나 가끔 악몽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란 걸 알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하는 것처럼, 보르헤스도 인생 자체가 하나의 일장춘몽이란 걸 인식하고 언제라도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면서 이 고해苦海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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