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 바슐라르 현상학, 몽상
바슐라르는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의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한 다음, 물리학을 전공한 뒤 철학을 연구하였다. 바슐라르는 1930년에서 1940년까지 디종 대학교의 교수를 거친 뒤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하였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과 같은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대한 연구들은 - 과학적 정신에 대한 정신분석의 한 종류로,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과학의 발전에서 심리적 요인으로서의 - 역사적 인식론에 대한 그의 관찰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바슐라르는 하이젠베르크의 <<양자론의 물리학적 원리>> 1장을 사례로 들어 광입자설과 빛의 파동설을 각각의 이론을 보완하면서 다 같이 옹호한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 4장) 바슐라르는 한 이론이 다른 입장에서 장점을 취해 내재하는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과학에서 심리학적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우수한 사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obstacle épistémologique)라는 개념을 만들어 어떻게 과학적 진보가 지적 형태의 특정 유형에 의해 저지되는지 논증한다. 인식론의 한가지 과업은 과학에서의 과학자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지적 형태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오귀스트 콩트의 과학을 연속적인 진보로 보는 — 상대성이론과 같은 과학사의 불연속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과학적 진보에 의해 대체된 — 실증주의에 반대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 대한 저작에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에 따라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 "인식론적 단절"의 용어는 바슐라르는 거의 쓰지 않았으나, 알튀세르를 통해 유명해진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과학사에 대한 연속적인 관점을 지지한 에밀 메이에르송에 대해 비판한다.
바슐라르는 새로운 이론들이 새 패러다임 안에서 개념들의 의미를 바꾸면서 낡은 이론들과 통합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뉴턴과 아인슈타인 이론의 두가지 다른 의미의 질량의 개념) 이렇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모순되지 않고, 큰 테두리 안에서 통합된다.
데카르트적 인식을 가진 합리주의자로서 (비록 그가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의 경향이 있지만 새로운 이론으로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뒤를 잇는다. - "새로운 과학적 정신", 결론 부분) 바슐라르는 일반적 지식에 대해 "과학적 지식"을 대치시키고, 오류는 단지 부정성이거나 착각이라고 여겼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긴 오류의 역사적 교정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경험을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착각(illusion première)의 교정이라고 생각한다. [1])
인식론의 역할은 개념의 (과학적) 제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 개념들은 단지 이론적 제안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이며 교육학적인 활동을 퍼뜨린다. 이것은 왜 전구는 추상적-구체적 대상의 한 예로써 과학적 사고의 대상인지 설명해 준다. [2] 인식론이 작동하는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인식론은 과학적 추리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대신에 인식론은 과학사의 한 부분을 제시해 준다.
바슐라르는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이중성에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확률론은 합리성을 심화시켜 현실을 복잡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이다. (켈빈 경 같은 사람이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더라도 [3]) "새로운 과학정신"에서 그의 주된 명제 중 하나는 근대 과학이 과정 철학으로 흡수될 수 있는 "관계의 존재론"으로 사물의 고전적 존재론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 따르면 물질과 광선의 물리적 개념은 물체와 운동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두 개념이 별개이고 물체가 존재론적으로 실제한다고 생각한 고전 철학에 반하여, 근대 과학은 광선과 물질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보면 고전적 인식론에 따른 인식의 상태인 고정된 물체를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 데카르트주의에서의 "단순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론과 실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속하여 개선되는 복잡한 대상만이 존재한다. (VI, 4) 직관은 원초적이지 않고, 만들어진다. (VI,2). 이 주제는 바슐라르를 구성주의 인식론의 한 부류를 지지하게 한다.
바슐라르의 작업들은 인식론 외에도 시, 꿈, 정신분석, 상상 등의 많은 논제를 다룬다. 불의 정신분석(1938년)과 공간의 시학(1958년)은 그의 저작들 중에 유명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 및 유럽 철학의 주된 두 가지 흐름인 현상학과 과학철학 중 과학철학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서, 그의 과학철학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이나, 라캉철학식의 소위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한 철학과는 다르다.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 인간이 해 온 "과학"적 행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억압되어왔던 인간의 상상력이 오히려 인류의 발전에 기여해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특히 인터넷)에서는 라캉철학등의 등쌀에 밀려 듣보잡 취급 내지는 들어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가 프랑스 철학의 선구자인것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연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다가 거의가 미학자로 취급하고 있는 상황.
오히려 그의 철학의 일부분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의 철학자들만이 철학의 대표자인양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것을 프랑스 철학의 주류인줄 알고 공부한 학생들이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참조
2 생애 ¶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생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파리의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28세 되는 해에 수학 학사 자격증을 독학으로 취득한다. 1차 대전에 참전했다 제대한 후 35세에 고향 마을 중학교의 물리•화학 교사로 재직한다. 36세에는 역시 독학으로 철학 학사 자격증을 얻고 38세 되는 1922년에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중학교에서 철학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43세가 되던 해인 1927년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에 디종 대학에서 문과대 교수로 임용되어 철학(과학철학)을 가르치게 된다. 1940년 소르본 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부속 과학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62년 사망할때까지 과학철학과 미학(상상력)연구에 대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3 사상 ¶
국내에서는 일명 '몽상의 미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학자 및 시학자, 문학비평가로 알려져있는 것과 달리 그는 프랑스 특유의 과학철학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의 초기 저작인 "새로운 과학적 정신" 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 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사상은 새로운 과학의 발전을 목격한 그가 새로운 과학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그의 첫 시도는 미학적 탐구와는 거리가 있는, '과학적이지 않은 사항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과학에서 전혀 틀리거나, 극히 일부분에서만 인정하고 있는 학설[1]들이 소위 '과학적'인 이론으로 신봉되었던 역사에 주목하여, '왜 이렇게 잘못 생각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오류를 빚어내는 원인이 인간 심리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주관성에 의심을 던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과학적 탐구에서의 역사 중에서, 현재 볼때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수많은 오류들이 발견되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 오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 그러한 오류를 낳게 되며, 그러한 오류의 교정은 가능한가 하는 화두를 던지게 된다. 그 의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순수 사고'는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앙리 베르그송등의 선대 철학자가 주장한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저작인 "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du feu 에서 그는 인간의 시간이란 비연속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계속적으로 연결된 시간에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마다 이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세계에 대항하여 싸우는 존재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한 대결을 통하여 순간순간 창조해가는 것이며, 그런 과정이서 탄생한 것이 시와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의 과학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인 "인식론적 단절"이란 이러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사란 흔히 생각하듯 인간의 지식의 축적에서 그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실증주의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과학사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혁명들은 불연속적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새로운 과학 정신이 기존의 이론들의 발전한 결과 새로운 과학 정신이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계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고 전혀 다른 새 패러다임 안에서 세계를 바라봄으로 다른 과학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과학 정신이 이전의 과학 정신을 일정한 조건 안에서만 옳다는 부분적 진리로 포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등장이 이러한 '감싸기'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과학 정신에 포용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또한 과학 지식 자체가 객관적이며 절대적이라는 사항에 반대하여, 소위 객관적인 사실로 믿어지던 과학적 지식에 대해, 앞서 설명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더욱 객관성에 근접한 과학 지식이 탄생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객관성은 목표이지 현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객관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과학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객관성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합리론과 유물론의 통합을 가져왔으며, 인간의 이성이란 존재하지만, 또한 그러한 이성과 만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도 없다. [2] 하지만 이성 또한 순수한 형태란 없고 항상 대상과 관련을 맺는 능동적인 것이라고 설정하는 응용합리주의의 태도를 세우게 된다.
이러한 과학 정신을 단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것에 대한 탐구에서, 바슐라르는 인간의 원초적 경험, 친숙한 이미지나 언어의 친숙한 의미, 역사적 상황이나 정서에 뿌리를 둔 확실치 않은 사고 등을 '인식론적 방해물'로 설정한다. 이러한 경향과 태도들에 의해 인간은 오류를 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방해물의 원흉은 '몽상에서 비롯된 시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시적인 이미지를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한 말 그대로의 '순수한 과학정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겠다는 과정에서 나온 저작이 앞서 이야기한 "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du feu 이라는 책으로서, 인간의 의식 내면에서 과학 정신(합리적인 사고, 또는 사고의 객관성)이 아닌 인간의 주관성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의식 활동으로서의 상상력의 가치를 탐구하고 있다.
상상력은 창조적 현실성을 가진 인간 심리의 또 다른 활동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상상력은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의식 활동의 중요한 면으로 보았으며, 인간 의식의 고유한 자율적 활동으로 보았다.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객관성이라는 인간 의식의 한 측면과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행복과의 사이에서 조율하는 중요한 존재로서, 인간의 합리화/객관화/과학화만을 중심으로 달려온 서구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4 영향 ¶
현대 프랑스 철학계의 선구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수준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은 이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미셸 푸코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역시도 그의 인식론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있다. 라캉철학에서도 그의 몇 가지 개념을 가져다가 같다붙이기재해석을 하여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상상력에 대한 연구 유산은 질베르 뒤랑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어 상상계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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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천동설, 용불용설, 창조론 등
[2] 한마디로 이성을 통해 물질이 인식된다.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즉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중에서, 살림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몰랐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중에서
문명의 의식은 곧 '자연' 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은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중에서, 홍성사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해졌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 정여울, 문학평론가
‘상상력’이 중요한 화두인 세상이다.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느니, 우리의 미래가 상상력에 달려있다느니,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느니,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느니•••.
물론 백 번 옳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인 구호들처럼 상상력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상상력은 숱한 오해와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단어다. 상상력이란 말 앞에 ‘기발한’이나 ‘엉뚱한’이란 관습적인 수식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이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분명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상상력은 삶 그 자체다. 먹고 자고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우리의 모든 것이 상상력에 의해 결정된다.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의 질(質)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특별한 아이디어’만으로 국한시켜서는 상상력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어머니가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치댈 때면, 어린 우리는 으레 그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다 반죽 한 귀퉁이를 떼어 달라 어머니를 졸라대곤 했다.
하여 그 희고 몰캉거리는 작은 덩어리를 조몰락거리며 이런저런 모양을 빚어보던 순간의 만족감. 계곡에서의 물놀이, 바닷가나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켤 때면 그것의 불편함보다 왠지 모를 아늑함과 은밀함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비눗방울 놀이, 바람개비나 연을 날리던 추억, 둥실 떠오른 풍선이나 기구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의 본질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원초적인 순간들이다. 이런 체험으로부터 일찍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질적 상상력’이라 명명했던 상상력이 비롯된다.
세계가 ‘물, 불, 흙, 공기’라는 4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고찰은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극 도입하고 심화시켜 새로운 비평의 관점을 제시한 학자로 유명하다.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심층적인 상상체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배하는 물질의 한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물질이란 물론 4가지 기본 요소인 ‘물, 불, 흙, 공기’를 지칭하지만, 상상력의 우주 속에서 그것들은 과학적인 의미의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상징적이고 고유한 기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슐라르의 물질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다. 에너지란 곧 잠재된 변화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구조주의자’, ‘과학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의 정체는 시인이나 몽상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의 저작들은 학술적인 이론서보다는 아름다운 에세이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잠언록처럼 읽힌다.
<물과 꿈>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의 물을 발견하게 한다. 일상의 어느 한순간 ‘물의 이미지’가 발아(發芽)시킨 특별한 상상력은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깊숙이 삼투(渗透)해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깊이에 있어 인간 존재는 흐르는 물의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참으로 변하기 쉬운 원소이다.”
강물도 인간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 끌림으로 물의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물이라는 존재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순환과 변모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환과 변모를 본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며, 그것도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물은 흐르고 넘치고 고이고 스미고 증발하고 떨어져 다시 흐른다.
우리는 그러한 물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비 내리는 창 밖을, 잔잔함 호수를, 흘러가는 강물을, 넘실대는 바다를. 우리는 물에서 물 이상의 것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더러워진 것을 물로 씻어내며, 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빚는다. 비, 눈, 구름, 안개, 이슬, 우박, 얼음, 폭포, 분수는 모두 물이다.
우리의 몸에는 피와 땀과 눈물과 젖과 양수와 정액 같은 물이 존재한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물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물은 불과 공기와 흙과 섞인다.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듯이.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상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때의 상상은 공허한 망상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꿈의 본질이다. 난폭한 물, 잠자는 물, 부드러운 물, 복합적인 물, 죽은 물, 모성적인 물•••.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또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바슐라르는 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물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물은 싹을 틔우게 하고 샘을 넘치게 한다. 물은 어디서나 생겨나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샘은 억누를 수 없는 탄생, 지속적인 탄생이다. 이토록 커다란 이미지는 그것을 사랑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언제나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르시스의 신화와 셰익스피어가 그린 <햄릿>의 오필리어의 죽음과 에드거 앨런 포우가 시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물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것을 좀 더 깊고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바슐라르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이란 역시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다.
상상력을 상상한다는 것. 삶의 전부와 관련된 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현상학, 몽상
<시적 이미지의 형상학>
현상학은 내면의 형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내면의 의식에 대해 직관으로 드러낸다. 후설과 하이데거에 의해 논의되는데 이것은 과학적, 합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오직 직관에 의해 접근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면서도 예술의 주제가 없다. 그때의 직관에 의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구조주의 사고에 익숙하다. 그래서 극도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현상학을 드러내는 바슐라르가 어렵다. (하지만 니체이후 철학이 없어진다. 체계에 체계를 쌓는 일이 없어진다. 헤겔의 철학을 보면 인간의 두뇌가 기계보다 더 기계적일 수 있다. 그래서 니체 이후 온전한 것은 없다는 말이 돈다. 온전하고 고유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미지가 어떻게 기원하는가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에 이르고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적 이미지를 4개로 분리한다. 언어: 언어 위로 떠올라 시적 의식을 남김없이 삼킨다. 예측불가능하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는 자, 초월하는 자, 아는 것을 명명하는 자이다. 지식: 이미지는 비지식이다. 여기서 非지식이란 무지가 아니라 앎의 초월이다. 삶: 삶이 이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시인은 삶을 살기위해 창조하지 않는다. 시인은 창조하는 것처럼 삶을 산다. 그래서 시에 진실, 솔직이란 용어를 사용은 의미상 중복이다. 열정: 울림과 반향을 가진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의 다양한 측면으로 흩어지게 하는 반면, 울림은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정신분석가는 이미지를 지적으로 만들고, 심리학자는 반향에만 사로잡혀 감정만 묘사하고, 비평가는 울림을 짓누르고 에 의해 달라진다.
정신은 헤겔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다. 세계는 정신이다. 인간의 주관이전에 세계정신이 있다. 개별자가 자기 정신을 발현해도 궁극적으로 세계정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정신과 영혼의 구분이 필요하다. 정신은 고차원적이다. 초개인적이고 세계의 원리가 섞여있다. 주관과 객관이 섞여 있다.
정신과 달리 영혼은 세계가 없다. 순수하고 불가분하며 불멸한다. 세계가 지극히 개인적이다. 영혼의 현상학은 몽상이다. 넋의 뿌리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극단의 개인적인 상황까지 가닿는 것이다. 균열된 개인의 존재의 이야기이다.
꿈과 몽상은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가능하다. 그래서 낮의 몽상을 더 가치 상향한다. 몽상가의 코기토가 주목되는 것이다.
꿈은 주체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 속에 와서 꿈을 꾸는 것 같다. 이것은 밤의 수동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몽상은 코기토가 있다. 주체가 있다. 구조주의 이후 주체가 없다. 고유한 의식이 살아서 자기의식을 쓰는 일이 가능할까? 주체가 없는 시는 꿈이다. 시적 몽상은 우주적 몽상이다. 우주적 몽상은 넋 뿌리에 가 닿는 것, 본질 깊숙한 곳에 가 있는 넋의 상태이다. 바슐라르는 몽상을 더 지켜나가야 한다고 한다. 주체가 있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고 한다. 정신을 폄하하고 영혼의 탑을 쌓으라고 한다. 몽상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상상력을 통해야 한다. 낮의 몽상의 세계는 초보 현상학에 속한다. 그래서 몽상을 통해 현상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시적이미지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 상상력의 현상학에 이르러야 한다. 시적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직접적 산물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오직 현상학만이 이미지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이미지의 통주관성의 크기와 힘과 의미를 가늠하게 한다.
이미지의 현상학을 밝히기 위해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몽상적인 의식이 관여한다. 정신과 영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영혼은 불멸의 말이다. 영혼과 정신을 나누어 보는 것이 시적이미지의 발전과정을 몽상에서부터 이미지의 실현에 이르게 한다.
몽상 중에서도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여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몽상이 있다. 그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몽상은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몽상은 여성적인 아니마이다. 자신의 몽상을 구분하는 자는 꿈 저 밑에서 대단히 조용한 내면의 여성적 존재를 발견한다. 그때 아니무스가 활동한다.
몽상가의 코기토. 나는 몽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몽상에서 주체가 항상 존재한다. 몽상을 꿈꾸는 자는 나다. 내 몽상을 꿈꾸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나다. 라고 말할 의식을 몽상은 갖고 있다. 이 몽상으로 우주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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