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는 미국의 시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으로, 하버드, 뉴욕 양 대학을 졸업, 변호사가 되고, 그 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재해보험회사에 입사, 부사장까지 되었다. 비즈니스와 시를 양립시킨 특별난 시인이다. 그는 자기 비평에 엄했으며, 44세 때 처음 간행한 시집 <소풍금(小風琴)>(1923)에 의해서 그의 천재성을 비평가에게 인정받았다. 그 밖에 <질서의 관념>(1935), <푸른 기타를 가진 사나이>(1937) 등을 출판, 영국에서 간행된 <선시집(選詩集)>(1954)도 있으며, 다시 75세 탄생을 기념하여 <전시집(全詩集)>(1954)이 출판된 후 곧 죽었는데,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언어를 단지 의미 전달의 도구로 삼지 않고 언어 그 자체의 모양이나 음조(音調)를 효과적으로 써서 이 세계의 음영(陰影)을 나타내는 그의 시는 세련의 극에 달한 고도(高度)의 것으로 1950년에 볼링겐상(賞), 1955년에 퓰리처상을 획득했다.
The Snow Man
우리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만
서리를 볼 수 있고 눈으로 딱딱하게 껍질이 입혀진
소나무의 가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랫동안 추위를 경험하고 나서야
얼음으로 덥수룩하게 털이 돋은 노간주 나무를 볼 수 있고
정월의 햇빛을 받고 멀리서 반짝이는
꺼칠한 가문비 나무를
그래야만 바람이 내는 소리에서
어떤 곤궁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몇 개의 가랑잎이 내는 소리는
대지가 내는 소리, 대지는 허허로운 곳에서
불어오는 꼭같은 바람으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눈 속에서 경청하고 있는 청자(聽者)는
자신도 없음이면서
거기에 있지 않는 없음과 있는 없음을 듣기 때문이다.
The Course of a Particular
오늘 잎새들이 운다.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에 매달려서
그러나 겨울의 텅 빔은 덜 허허롭다.
아직도 겨울은 차디찬 그늘과 모양을 갖춘 눈으로 가득하다.
잎새들이 잉잉 운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울음이다. 어느 누군가가 들으라는 울음이다.
.
.
.
잎새들이 운다.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는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숨을 거둔 영웅들에게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아니며
인간의 울음소리도 아니다.
이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는 잎새들의 울부짖음이다.
드디어 한 사람의 듣는 귀는 찾았으나...
울부짖음은 아무하고도 상관이 없다.
스티븐슨 -상상력
자본주의에 적응을 잘 한 시인이다. 보험회사 부사장까지 맡았다. 그 만큼 정신세계는 파운드나 엘리어트와 다르다. 시가 난해하고 어렵다.
스티븐슨은 현실을 배제한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상상력이 현실로 표현된다. 현실은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다.
질서는 혼란에서 정리인데, 스티븐슨은 상상력에서 인식되는 것이 질서는 곧 인식이다. 아이가 태양을 그릴 때, 태양의 모양은 다양하다. 본 것이 질서가 된다. 상상력에서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적이다. 실재에 이르는 실마리이다. 실마리는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티븐슨의 상상력은 카시러, 논리실증주의, 낭만주의 요소, 프로이드와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
카시러는 낭만주의에서 시적 상상력은 본원적 형이상학적이다.고 한다. 오직 낭만주의 시가 예술이고 철학이며 우주라 한다. 낭만주의 사상에서 시적 상상력은 실재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그래서 참다운 시는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우주 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제로 있는 것만 믿는다. 형이상학을 믿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없고, 시인이 떠드는 이상한 소리이다.고 한다. (신을 형이상학적 용어라 한다면 신이 실재에 속한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신이 없는데,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미학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낭만주의 요소에서 상상력(낭만주의)은 마음의 자유롭고(실재) 감정적이고(감상) 추상이다(감정 푸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억압이고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프로이드가 상상력은 없다고 한다. 무의식은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한다. 바슐라르는 프로이드 이론을 꽃을 두엄으로 만든다고 표현한다. 상상의 의도적 허구들이 과학의 선구자가 된 예가 많다. <공상과학 영화(상상)를 보고 과학이 발전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상상력은 형이상학이다. 삶에서 상상력은 사회적 제도, 관습, 신분제, 장례, 결혼, 의식, 죽음 보고 들은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이 삶에서의 상상력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인간이 유토피아에 접근하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의 이성이나 과학 또는 철학이 사회를 지배해도 다수의 대중은 그들의 삶에서 상상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세상은 상상력이 지배한다. 세상이 곧 상상력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예술에서의 상상력이다. 현실속의 비현실, 비정상속에 정상, 혼란 속의 질서이다.
현실속의 비현실이라는 것은 잠정적인 질서가 부여된 현실 속에 또는 비현실 들어오는 게 예술이다. 그것은 영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영상 즉, 이미지는 관념이 복사된 것이다. 영상은 현실속의 비현실을 흔든다.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현실을 흔든다. 이것이 상상력이다. <공상과학 영화(상상)를 보고 과학이 발전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비정상 속에 정상은 랭보나 카프카가 비정상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정상이다. 이것은 상상력이 이룬 결과이다. 이성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정상, 질서를 먼저 본다. 이성은 상상력의 방법화 작업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이성은 규범, 정상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이성을 앞선다. 이성은 상상력에 의해 정의된다.
그 예로, 의상은 사회 형식으로서의 상상적 삶의 사례이다. 비범상한 것을 범상화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 예이다. 또는 정원에 꽃을 들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고 한다. 이때 정원, 꽃은 질서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정원희의 꽃은 정원희라는 공공의 질서에 꽃이라는 개인의 질서가 드러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마음의 힘으로서의 상상력의 차이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실제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참고할 만한 자료(싸이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hm29&logNo=11004394295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http://builder.hufs.ac.kr/user/ibas/k2board/F374B91EA10B4F3DBD431B05BA030C52_00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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