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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개념
2019년 03월 12일 17시 14분  조회:854  추천:0  작성자: 강려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개념
 
프로이트와 라깡은 “욕망은 결핍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이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신기한 건 이러한 종류의 논란은 언제나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이 고전의 힘일 것이다. 논란을 끊임없이 끌고 가는 ‘힘’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어머니를 성적으로 강하게 갈구하던 아이가 남근기에 이르러 거세에 대한 공포를 겪어내고, 그것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과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이론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철학의 세계에서 마음껏 활개 치도록 풀어놓은 라깡의 이론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의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변용된다. 내용인즉슨 어느 것도 구획되지 않는 연속성의 상상계에서 말을 배움으로써 이름이 주어지고, 따라서 지칭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생겨남으로써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형성된 아기는 엄마와의 연속적인 관계에서 강제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는 안돼! 엄마는 아빠거야!”랄까? 이렇게 아기는 엄밀하게 근친상간이 차단됨으로써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철학에서 보듯, 그들은 인간의 욕망이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식적 행동의 기저에는 무의식적인 갈망이 있다는 것. 욕망이란 늘 채워지지 않지만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이다. 인간은 상징계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타인의 욕망을 쫓는다. 의사, 변호사가 되고자 하고, 대통령, 장관을 갈구하며 말이다.
 
“욕망은 생성적인 것이다.”
헌데 이 이론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나선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서마저도 『앙띠-오이디푸스』라고 명명할 정도다. 그들은 프로이트, 라깡에 대한 반박을 가족에서부터 시작한다. “어찌 욕망의 메커니즘을 너무도 좁은 가족 안에서만 보는가?”이다. 그들은 욕망개념을 이른바 가족드라마(family romance)안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혁명적 사유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욕망을 당나귀 눈앞에 걸어둔 당근처럼 쫓아도 쫓아도 먹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예 출발점을 달리해서 욕망이란 끝없이 분출하는 어떤 생명력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즉, 기표 속에 욕망을 가두는 구조주의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욕망은 기표를 바꿔 놓기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 기표들의 체계에 저항하고 구멍을 내고, 적어도 보다 합리적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또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 가타리 역시도 기표체계를 부정하는 낭만적인 이론은 전개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랜 기간 고전의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에 대치되는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 냈다. 이 욕망에 관한 반대되는 이론들은 상충되어 철학계의 획을 그어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무수히 그어 나갈 것이다. 이렇듯 공부하는 이들의 선택사항이 늘어가는 것, 어느 이론에 수긍할지 혹은 어느 변형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지 결정범위가 늘어간다는 것이 바로 철학의 매력이 아닐까?
1960년대에 들뢰즈는 가타리와 공동연구를 시작했으나 책들은 거의 들뢰즈 이름으로만 세상에 나왔다. 그와 다른 철학의 차이점은 이전까지의 철학은 표상의 철학, 존재의 철학 즉 총체화 하는 담론을 규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어찌보면 정신 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통합하고 새로운 사유의 양식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공상 과학 소설에 비유할 만큼 기존의 철학과 거리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개념어를 만들었다. 푸코는 자기자신의 방법론으로 사회이론을 펼쳤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닮았다. 철학은 그 철학적 문제를 구성하는 틀 가운데 위치하며, 개별 철학은 그 철학적 이론으로 구성된다. 그리스 철학을 예로 들면 문제의 틀은 만물을 구성하는 아르케를 찾으려는 노력이라 할 수있고  탈레스는 아르케가 물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이론은 당대에는 중요할지몰라도 결국 철학사 적으로 남는 것은 문제의 틀이다. 들뢰즈나 푸코도 수백년 뒤에 그들의 이론 보다도 그들이 던진 문제의 틀이 철학사 적으로 남을 것이다. 
 
철학사의 주류에서 일탈한 철학자들 
스피노자, 흄, 니체,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철학사의 구성 가운데 어디에 위치시킬지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상은 철학의 전통적 흐름에서 빗겨나있다. 들뢰즈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중 그는 니체의 권력의지와 계보학을 그대로 인용한다. 권력의지는 자유의지와는 다른 거의 무의식적인 의지이다. 계보학은 누가 진리를 묻는가에 대한 계보를 찾는 것으로. 현실은 여러 가지 차별화 된 층 들이 상호 중첩적으로 작용한다. 그는 힘들의 성격은 권력의지로 평가되고 힘들의 기원은 계보학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푸코도 <식의 고고학>서 지식을 고고학적으로 다룬다. 이는 계보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식의 체계를 중시하기보다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칸트철학을 연구하는다는 가정하에 보면 평면적으로 칸트의 지식 체계 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왜 이런 철학을 했고 어떤 힘이 칸트에게 작용했는가를 다루는 것이다. 지식의 체계보다는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들뢰즈 역시 니체의 권력의지를 그대로 받아 들여 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뢰즈 철학의 키포인트는 욕망이다. 들뢰즈는 욕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설명 한다. 18세기 까지만 해도 욕망, 감정 같은 것은 철학의 소재가 아니었다. 철학은 이성으로 하는 이성의 학문이었다. 이후 칸트가 감정 이라 것을 철학적 범주에 넣으면서 감정이 철학으로 들어왔으나, 욕망은 19세기 빅토리아 시기까지만 해도 철학의 대상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욕망은 빈 구멍이라 했다. 2500년 동안 욕망은 자신에 없는 무엇을 채우려는 자신 밖의 무엇을 찾는 것 이었다. 라깡 역시 욕망은 체계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욕망을 손실이나 결핍으로 본다. 기본적으로 욕망은 뭔가 비어 있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개념이었다. 반면 들뢰즈는 욕망을 생산하는 행위로 힘으로 본다. 욕망은 꼭 긍적적인 힘은 아니나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욕망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통하는 면이 있다. 
들뢰즈 분석의 기본 도구는 '욕망하는 기계' 다. 기계는 근대철학에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욕망은 심리적인 에너지임. 욕망은 기계처럼 웅웅거리고 삐걱거리며 항상 뭔가를 생산한다. 기계란 개념 구조주의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이 탈 중심화 됨. 구조가 주체가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에선 기본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근대적인 의미의 주체와는 다르다. 구별 하기 위해서 기계란 말을 만들어 쓴 것. 하이데거도 마찬가지지만 주체란 개념에서 인간이란 속성, 인격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은 하나의 흐름이다. 
현대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언어에 대한 관심, 질 보다 양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다. 마르크스-양에 관한 철학 . 기계라 한 것은 주체의 도덕적인 측면 윤리적인 측면 같은 것을 배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흐름과 생성의 철학에서 욕망을 하나의 flow 흐름이라 했다. 그가 말한 욕망의 기계에서 machine은 우리말의 기계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 Machine엔 장치, 도구란 의미가 있다. 기계는 구체적으로 개별적 인간 일 수 도, 사회체제 일 수 도 있다. 
 
욕망은 신체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선 침묵하라"하고 말했듯이 구조, 언어, 무의식 등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겨점에 선 개념들이 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 이런 선상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의식으로 구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딜레마다. 기계나 신체란 개념 역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가계나 신체는 확실히 무의식적인 개념이다. 욕망, 신체, 기계는 다 무의식의 레벨에 속하는 것이지만 의식의 영역에서 다루기에 훨씬 사물적인 느낌을 가진다. 다루기가 자유롭다. 다른사람의 의식이 나에겐 무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기계, 신체라는 것도 인간이나 인간속성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무의식을 이야기 할 때 쉬워진다. 무의식의 영토도 펜이나 지우개처럼 자연소재 같은 느낌을 갖는다. 
 
정신분석과 정치경제학의 연결 
욕망하는 생산은 곧 사회적인 생산으로 상식적인 의미의 생산과 같은 것이다. 사회적인 장, 사회적 무대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욕망의 생산물로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양자의 관계를 찾고 결합시키려는 시도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둘을 통합하지 않고 애초부터 하나의 경제학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자본의 흐름에서 볼 때 리비도의 흐름 같은 심리적인 흐름과 같은 것으로 결국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에 양자 간의 관계는 따로 말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회는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필요성에 따라 사회를 구성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통제 없이 그대로 놔두는 것은 동물의 사회다. 인간이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은 코드화, 인코딩으로 동물계는 욕망의 통제가 없는 무코드화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들뢰즈의 인간사회 분류 
원시영토기계 - 다양한 욕망을 다양한 코드로 통제하는 사회로 욕망이 대상과 일체화된다. 욕망이 대상과 일체가 되는 도착증의 사회. 모든 활동이 욕망에 고착되어 있으므로 탈영토화는 없다. 
고대군주기계 - 군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어 욕망이 군주로 집중된 사회. 욕망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 편집되는 사회지만 욕망이 대지에서 벗어나는 탈영토화, 초코드화가 시작됨 
문명자본주의 기계(자본주의 사회) - 자본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이 집중되기 때문에 욕망통제가 초코드화 한다. 그러나 여기엔 원시사회처럼 코드화가 병행되기도 한다. 그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이중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법적으론 자유롭지만 경제적으론 자본가에게 고용됨으로 실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함. 자본이 모든 현상을 통제함으로 전제군주식의 초코드화가 필요한 사회다. 
고대사회에는 제한적인 탈영토화가 있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제한 적인 탈영토화가 시작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자본주의 안에 이미 자본주의 붕괴의 요소가 내재되어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운동이 정해진 수위를 넘어서는 것을 방치하면 체제가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탈 영토화를 그냥 방치하지 못한다. 다시 재영토화를 시도한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 영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안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요소를 가진다. 자본주의를 방치하면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처럼 이윤률이 저하되고 결국 모든 자본은 자본가에게 축적된다. 그러나 자본가의 입장에선 생산된 잉여가치가 상품으로 소비되어야 하므로 노동자들이 빈곤해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상품의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윤율은 보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자체모순을 해결 하기위해 케인즈는 국가가 개입해 (국가독점자본주의) 독점자본을 관리하는 국가수요 유효수효를 주장한다. 
 
영세민취로사업같은 것 
자본주의가 탈영토화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을 용인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를 방치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함으로 자본주의는 스스로 다시 재영토화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자정능력, 수정 자본주의적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비판은 자본 자체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체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영토화하고 한편으로 초코드화 하면서 코드화 한다. 한편으로 탈영토화를 용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본주의는 생래적으로 분열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분열증이 지극히 정상인 사회다.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이념적으로 탈영토화 코드화를 추구하고 반자본주의 세력인 사회주의가 이념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해 탈영토화 탈코드화를 추구 했지만 결과적으로 또다른 재영토화에 머물고 말았다. 초코드화 한 것이다. 레닌이 1917년 혁명을 완수하고 나서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를 위해 내건 것이 신경제정책이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생산력이 증대될 수 없는 것이다. 이념은 스탈린주의란 사회주의를 내결었지만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 자체는 탈영토화 코드화에 있으나 생산력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재영토화에 머물고 말게 된다. 초코드화의 예를 들면 천리마 운동, 대약진 운동 같은 것들이 있다.  
들뢰주는 혁명론자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자본주의의의 분열증을 스스로 부정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정신 분석이란 가치와 오이디프스라는 수단으로 분열증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기본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 이데올로기 역시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 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란 수단으로 분열증을 계속 조작 억압하고 치료하는 재영토화의 도구이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석과 오이디프스를 통해 재영토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재용토화 하면 탈 영토화가 안 되므로 자본주의적 발전이 없다. 탈 영토화를 주장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신분석 수단을 통해 재영토화를 하고있다. 그래서 그는 오이디푸스를 거부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요 저서 중 하나가 <앙띠오이디프스>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석이란 도구를 통해 억압하고 치환하고 재영토화 한다. 사회적 현상과 리비도의 결합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 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결합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의 길은 분열증을 더욱 가속화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더욱 극한으로 밀고 나가 분열증을 더욱 가속화해 탈 영토화를 조장해야한다. 억압적 질서는 거부하고 탈코드화로 나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철저히 거부해야 하고, 욕망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극복해야한다. 현실의 탈코드화 한 것들, 무질서한 것들, 이런 것들을 질서로 치료 하려는 시도가 근대의 이성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무질서를 질서의 틀로 수용 한다면 발전이 없으므로 현실의 무질서, 탈코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권장해야 한다. 
들뢰즈는 분열증과 분열증 환자를 구별 하고 있다. 무질서로 욕망의 흐름이 탈주하도록 해야 하지만 정도를 넘거나 때 이른 돌파하면 붕괴하게 된어 정신 분열증환자가 된다. 고전적인 혁명론은 분열증을 억제해 다른 이성의 코드화를 추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본주의의 극복은 욕망의 흐름을 억제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탈주해야 하고 돌파해 나가야 한다. 붕괴되면 정신 이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욕망의 흐름을 다른 기계와 창조적으로 접속 시켜야 파시즘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음. 파시즘은 무솔리니가 어려워진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일치단결을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전적 마르크스 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위기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해 위기가 공황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가 탈영토화가 되지 못하고 재영토화 된 것이다.  
빌헤름라이히는 프로이드와 마르크스를 통합의 원형을 이야기 한다. 파시즘을 정치적 역사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심리적,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박정희정권 국민 대다수가 유신독재를 찬성 하지 않았는데 정권이 독재를 관철 시킨 독재정권이고 히틀러의 독일은 대중이 지지한 파시즘 정권이다.  
처칠등 당시의 정치가들은 히틀러란 이상한 놈이 나와 유럽 역사를 파시즘으로 이끌었다고 단순하게 말했다. 독일의 파시즘은 괴벨스등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낸 것이고, 대중은 괴벨스에 의해 선동 된 것으로 믿었다. 유럽은 광기어린 놈들을 제거되면 점잖고 올바른 도덕의 역사로 회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막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모순이 노출된 사건으로 보고 정치 경제학적 분석을 내렸다. 그러나 빌헤름 라이히는 대중 스스로가 파시즘을 원하고 억압을 원했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흔히 선동을 통해 대중을 조작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선동 이전에 이미 대중이 파쇼를 원하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다. 설사 대중이 파시즘을 원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파시즘에 동의 한 것은 이미 대중들이 파시즘을 수용할 심리적 조건이 성숙되었기에 그렇게 될 수 있던 것이며 더 나아가 대중 자체가 파시즘을 원하고 있었다. 즉 나치는 욕망의 조작이 계급적 이해를 압도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대중은 스스로 억압당하고자 하는 마조키스트이며 파시스트는 사디스트로 볼 수 있다. 대중은 억압을 원했다. 이런 관점은 파시즘을 욕망의 무의식적 흐름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사례다.  
들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파시즘은 탈주의 선상에서 돌파 못하고 붕괴(break down)된 경우로 본다. 자본주의적 분열증을 극복하기위해 재영토화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탈주의 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탈영토화하지 못함으로 재영토화 된 것이라는 것이다. 욕망들이 대상에 고착 될 경우 파괴적 힘이 된다. 예를 들면 현실 사회주의란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이념으로 내세웠으면서 개혁코드화, 초코드화 된 것이라 할 수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은 사실 황제의 권력을 가졌다. 전제 군주의 시대는 곧 국가를 중심으로 초코드화 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나 파시즘이나 같은 것으로 보았다. 사회주의야말로 1930년대 반파시즘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이 소비에트 공산당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 둘의 심리적인 구조는 파시즘처럼 비슷한 양태를 취한다. 들뢰즈는 현실 사회주의도 돌파(break through)하지 못하고 붕괴된 것으로 본다.  
 
천개의 고원의 리좀 
리좀은 우리말로 하면 근경, 뿌리도 줄기도 아닌 뿌리-줄기, 줄기와 뿌리가 일체인 연근 같은 것이다. 들뢰즈는 서구인식론을 리좀적으로 설명한다. 기존의 서구인식론은 수목구조로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뻗어가는 구조로 보았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로마 철학 -> 중세 철학 -> 근대철학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과정을 지닌 것으로 일하고 위계적이다. 하지만 리좀은 수평적이며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성격이 있다. 동일성보다 다양성이며, 초,탈코드화, 탈영토화된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기존의 철학은 총체적인 종합적인 담론 구조다. 리좀은 기존 철학처럼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나무구조 같지 않고 하나의 모델로 환원 되지 않는다. 리좀은 선을 기본 단위로 한다. 수평적 선의 구조. 들뢰즈는 리좀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하면서 이러한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철학 역사가 리좀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푸코나 들뢰즈도 지금껏 그래왔듯이 역사 분석을 할 때 현재를 분석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분석한다. 사회적인 현상과 욕망의 현상이 일치하는 가에 대한 분석이다. 이들은 메이저에 가려져 왔던 마이너 역사에서 의미를 찾고 마이너가 오히려 메이져를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역사는 항상 리좀적으로 구성되어 왔는데 우리의 인식은 수목형으로 완성되어버렸다. 나무구조는 점을 중심으로, 리좀의 구조는 선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의 인식론적 관습에 의해 선적구조의 인식을 함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선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 선을 끊어 점으로 인식->분절화 함. 우리는 점을 묶어 선으로 인식->총체화 해야 함. 
 
몰 개념
베르그송, 바실라르 등 프랑스 철학자는 독일 철학처럼 사변적이기보다는 자연과학적 비유가 뛰어나다. 몰틀은 분자로 분자의 덩어리에 비유 되는데 재영토화 하고 초코드화 한다는 점에서 리좀과 닮았다. 몰틀은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를 지향하고 몰적인 분절성은 딱딱한 선, 단단한 선, 초코드화, 재영토화 성향을 지니고 있다. 몰틀의 분절성은 유연함, 유연한 선, 무른선, 탈영토화, 탈코드화 성향/ 기능/ 운동을 한다. 분자적 분절성보다 몰틀적이 되어야 자본주의를 극복해 탈영토화로 갈 수 있다. 
몰틀적 분절성은 양면적라 몰적인 분절성으로 갈 가능성이 있어 탈영토화 하지 못하고 재영토화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보수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면 몰틀은 절대적 운동성, 탈주화, 돌파로 연결 될 수 있다. 몰틀은 기본적으로 탈영토화 탈코드화 함으로 탈주선이 될 가능성이 충분 하다. 예를 들어 폭주족 ,갱단, 히피, 펑크음악 같은 것은 사회적 경계에서 탈주선 근처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네오나치즘은 붕괴의 케이스. 
들뢰즈는 사회 발전의 동력은 학교, 기관, 기업, 국가, 정부같이 크고 단단하고 질서 정연한 곳에서 혁명적 동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선 혁명이 날 수 없는 기존의 세력이 집합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여의도, 강남, 강부자는 혁명의 주역이 절대 될 수 없다. 이들은 영원히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재영토화 할뿐이다. 초코드화에서 탈피할 수 없다. 오히려 탈코드화는 폭주족이 더 가깝다. 사회의 메이저 그룹, 중심 세력, 엘리트 그룹은 사회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 세력도 되지 못한다. 
 
유목민 노마드 
유목민은 탈주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 되면서 정착민과 대비된다. 들뢰즈의 유목민은 실체적 유목민과 상징적 유목민, 둘 다를 가리킨다. 정착민은 국가 권력에 내재화 되어 초코드화 되어 있다. 노마드는 이런 정착민적인 속성을 거부한 벗어난 사람들로 늘 국가나 사회가 전제 군주로부터 탈주 한다. 현대의 전제 군주는 화폐다. 이런 탈현대적인 시대가 곧 오리라고 들뢰즈는 믿는다. 
로마제국과 이슬람의 차이; 로마제국 1세기 - 전형적 정착민, 국가체계를 갖추고 전형적 전쟁 기계를 이용한 경우. 퇴역군인에게 영토를 주기 위해 영토 확장. 제국이 정복주체가 됨. 이슬람 7세기 - 전형적 유목민. 똑같이 정복 전쟁을 했는데 마호메트가 제국의 형태를 갖추는 과정 자체가 전쟁의 과정임. 제국 형성 과정=전쟁, 둘이 일치함 
정착민과 유목민의 차이; 초코드화, 영토화, 재영토화에 대한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향한 노마드의 혁명이 역사다. 보수 엘리트가 역사의 주체라고 생각 하지만, 사실 그러지 않다 노마드적 혁명은 결국 역사적으로 진보주의에 속한다. 탈영토화 노마드적 혁명이 들뢰즈가 말한 혁명인 것이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코드라면 욕망을 단일한 중심으로 코드화 하는 것이 초코드화이다. 욕망은 해소 되어야 하는 것이지 억압되고 통제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탈주선을 돌파해야한다. 욕망은 혁명을 소망하는 게 아니라 욕망자체가 혁명이다. 욕망이 억압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 혁명이다. 혁명의 형태는 욕망을 현실로 지속시킬 때 나오는 것이고 욕망을 추상의 형대로 환원하거나 재영토화 하는 곳에는 혁명이 없다. 혁명은 마음으로부터의 혁명 일수도, 정치 경제적 혁명 일수도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정치경제학 분석과 심리 분석 둘 다를 아우른다. 혁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말하기 어려우나 경제학적 범주에서 본다면 장애인을 보살필 필요가 있을까?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을 취업 시키는 것은 정상인을 취업 시키는 것보다 손해다. 장애인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19세기 빅토리아시기부터다. 들뢰즈는 장애인에 대한 초코드화나 장애인을 고용하는 차원이 아닌 장애인의 존재 자체가 더욱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에서 사회의 동력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마이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마이너가 아니다. 대중까지 포함한 메이저에 가려왔던 마이너에 대한 관심 동정은 재영토화라 할 수 있다. 마이너로부터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 복합적 신체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해 ‘우리가 기계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데 기계가 맞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노동자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로 산업기계의 이지적 기관이다. 인간이 어쩌다가 산업기계의 부속이 됐을까. 자본의 욕망(리비도)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몸집을 불리기 위해 인간을 손으로, 화폐를 혈액으로 삼아 생산물을 낳는 신체다. 
자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욕망하는 신체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이고 기계처럼 작동한다. 욕망의 흐름 속에는 인간과 기계, 사물과 동물의 구별없이 모두 접속하여 네트워크 형태의 신체를 구성한다. 즉, 하나의 부분-기관이 항상 다른 부분-기관에 연결되면서 형성되는 리비도적 신체이다. 어떤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고 어떤 흐름을 절단-채취하는지에 따라 신체는 매번 다른 복합체의 기계적 기관이 된다. 
 
접기
이러한 신체구성의 메커니즘을 라캉은 부분충동들의 몽타주라고 규정했다. 즉 충동적 신체는 미리 정해진 목적과 규칙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고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주어진 소재와 우발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소재를 조합하는 콜라주처럼 구성되는 신체이다. 신체는 결코 개체 보존이나 생식과 같은 총괄적인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부분충동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신체라는 것은 이처럼 무수히 많은 곳과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거대한 자본이라는 흐름에 유기적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을 수 있는 보루로 작용할 수 있다.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욕망의 신체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 코드 
흔히 코드라고 말할 때, 코드는 충동의 방향과 성질을 결정하는 단항적 기표들의 연쇄다. 그리고 충동의 방향/의미란 곧 충동들의 결합방식과 그 사건적 의미. 코드는 충동기관들의 결합방향에 따라 신체들의 질적 특성을 결정한다. 여기서 방향이란 미분적 변이의 방향으로, 그런 변이의 방향에 따라 욕망하는 신체의 성질이 결정된다. 코드는 “흐름들의 성질 하나하나를 규정하는 것” 코드는 리비도의 양을 결정하며, 그 양에 따라 충동기관들의 가치가 결정된다. 
자본주의가 획일적인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이유는 일체의 코드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소유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시하는 재화의 코드적 가치가 상실되고 모든 재화는 화폐로 측정되는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부의 정도에 따라 능력이 측정되고, 사는 동네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되고 등등. 이와 같이 양화된 충동기관들의 흐름이 결합되어 자본이라는 충만한 신체가 형성되고, 재화나 사람의 존재이유는 이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결부됨으로써만 확인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는 사람과 사물을 분리시킨다. 전-자본주의적 코드 사회에서 사물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표시한다. 특정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물에 깃든 코드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유와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와 함께 사물의 가치는 양적인 상품가치(교환가치)로 환원된다. 상품화된 사물에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존재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타인에게 팔 수 있다는 의미, 즉 사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탈코드화에 의해 사회적 생산단위였던 친족단위는 해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재편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주된 역할은 탈코드화된 인간의 생산, 즉 원자화된 개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가족 속에서 리비도적 신체는 낱낱이 분리된 유기체, 즉 개체로 재편되고 그 개인들은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붙는다. 일전에 ‘한겨레’ 김형태 변호사 칼럼에서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노동자’를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기현상에 대해 꼬집은 글도 이러한 맥락이다. 
 
# 소외 
맑스는 노동을 감성적 인간활동으로 규정한다. 노동의 소외란 감성의 소외다. 우리는 결코 감성적 신체의 일부가 아닌 것을 감각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이 자신의 감성적 신체 일부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감성적 실천 속에서 파악된 인간은 유기적 개체가 아니라 자연적, 인공적 대상과 함께 감성적 신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이다. 맑스는 이런 감성적 인간의 집합적 신체성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맑스는 감성적 인간활동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외란 그 주체적 감성활동(실천)이 수동적-관조적 감성으로 전도되는 현상이다. 소외의 결과 실천적 감성의 결과물은 수동적 감성, 즉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이런 소외를 상품의 물신성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감성적 실천의 결과물에 불과한 상품이 마치 독자적인 생명과 가치를 지닌 것처럼 시장을 활보하며 창조자의 운명을 지배하는 물신이 된다. 
최근 영어광풍을 보자. 영어의 가치는 세계화 시대의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미국식 회화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 자체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다. 영어는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물신주의적 믿음 속에서, 미국식 회화 능력의 유무로 계층화가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의 생산이 은폐되는 것이다. 
 
# 혁명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헐벗고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재산이 없기 때문에 고유한 정체성도 없는 자들, 안정된 지위가 없기 때문에 정당한 몫이 없는 자들, 자본이 없기 때문에 자본의 재생산기관인 국가도 없고 가족도 없고 사적 소유에 의해 정의되는 사적 인간, 즉 개인도 아닌 ‘무리’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 감성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간대중이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저런 정체성을 지닌 감성적 인식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실천 주체다. 
혁명은 인과율의 법칙 속에서 오지 않는다.(지젝) 역사 발전의 법칙 속에서 혁명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혁명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실천이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혁명적이다.(들뢰즈-가타리) 
반면에 예속집단은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집단이다. 이해와 목적의 틀 속에서, 인과율의 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집단은 언제나 외부 현실의 지배적 힘에 예속된다.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실천적 감성의 주체를 수동적 감성(인식)의 대상으로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법을 바꾸고 사물의 존재조건 자체를 바꾼다. 모든 법의 정초 과정은 폭력적이다. 이런 제헌적 폭력이 없는 혁명은 가짜 혁명이다. 레닌의 혁명이 폭력적인 것은 단지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이라서가 아니라 혁명 자체가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제헌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외부의 어떤 타자에게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는 자기 입법적 실천 행위이다. 그럴 때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저 먹고 자고 자식만 낳는 존재 취급받던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감성의 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빼냄으로써 자본주의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적 감성의 실천 주체가 된다. 
 
◆ 코드: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말한다.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TP, 313) 
코드의 변이가 있는 곳에서는 단순한 첨가가 아니라 잉여가치 같은 새로운 차원(평면)의 구성이 일어난다.(TP, 314) 
 
◆ 환경 
물질적 자연의 부분 중에서 코드화된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절대적 반복, 즉 절대적 코드화는 없기 때문에 환경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변한다. 
모든 환경은 진동한다. 구성요소의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구성되는 시공간의 블록인 것이다. 예컨대 살아있는 것은 물질(materials)로 구성된 외적 환경, 구성요소 및 구성물질로 이루어진 내적 환경, 막이나 경계로 이루어진 중간환경, 에너지원이나 행위-인식으로 이루어진 병합환경을 갖는다. 모든 환경은 코드화되어있는데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나 각 코드는 항상 코드변환(transcoding, transduction)의 상태에 있다.(TP, 313) 
환경은 혼돈(chaos)에 열려있다. 
환경은 혼돈에 열려있다. 혼돈은 소진과 침입의 위협을 가한다. 율동(리듬)은 혼돈에 대한 환경의 대답이다. 혼돈과 율동이 공유하는 것은 ‘사이’이다. 두 환경의 사이, 율동-혼돈 혹은, 캐오스모스이다. (TP, 313) 
환경이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갖추어진 물질(formed substance)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식’(형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코드이다. 
형태와 물질(substance), 코드들, 환경들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TP, 502) 
* 주의: matter 와 substance의 차이 
둘 다 ‘물질’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번역으로는 잘 구분이 안된다. substance란 형태가 부여된 matter이다. “Substances are nothing other than formed matters."(TP, 41) 예를 들면, 잉크병에 들은 잉크는 아직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기에 (병의 형태는 별도이다) matter에 해당하지만 흰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굳어진 잉크--문자--는 substance이다. 
 
◆ 층(strata) 
코드들(환경들)이 서로 접합(articulation)되어 층(strata)을 이룬다. 그런데 층을 구성하는 접합은 항상 이중접합(이중협격)이다. 접합되는 것은 내용과 표현이다. 형식과 물질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에 내용과 표현은 실질적으로 구분된다. 내용의 접합과 표현의 접합에서 내용과 표현은 각각 고유한 형식과 물질을 갖는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상응관계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으며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양자 사이에는 실질적 구분이 존재하고, 상호 전제가 존재하고, 동형성(isomorphy)만이 있을 뿐이다. 
- 층이 아니라 지칭이다. 어떤 물질적 환경들이 이중분절(절합, 접합)들이 하나의 지층을 형성한다. <천 개의 고원> 제 3장 도덕의 지질학에서 표현된 내용/표현의 지층들을 이중분절의 관점에서 설명한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로 옮겨진 SUBSTANCE는 그냥 실체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싶다. 
 
◆ 코드화(coding), 위로부터의 코드화(overcoding), 탈코드화(decoding)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코드화란 반복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며, 탈코드화란 그 패턴의 소멸을 뜻한다. 위로부터의 코드화란 접합된 여러 코드들을 하나의 통일성 속에 묶어 놓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권력이 개입된다. 국가의 성립은 이러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대표적 경우이다. 뒤에서 살펴볼 리조움(뿌리줄기)이나 다수성(multiplicity)은 위로부터의 코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 '위로부터의 코드화'는 초코드화로 탈코드화는 그대로 써도 무방할 듯싶다. 초코드화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코드들이 하나의 초월적 코드(기표)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전제군주의 신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초코드화를 통해 여러 코드들은 하나의 초월적 기표, 즉 수목형 모델로 환원되고 통합된다. 단 리좀(구근식물-뿌리줄기)는 그런 초코드화를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하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들 자체로 된다. 
 
◆ 영토, 영토화 
환경구성요소들이 방향성(직선의 모양을 상상할 것--강사)을 잃고 차원성(평면의 모양을 상상할 것)을 띨 때, 기능적이기를 그치고 표현적이 될 때 바로 영토가 존재한다. 율동이 표현성을 가질 때 영토가 존재한다. 영토를 정의하는 것은 표현물들(matters of expression!!)(성질들)의 출현이다. 새나 물고기에 있어서 색의 예를 들어보자. 색은 내부의 호르몬 상태와 연관된 막 상태이다. 그러나 색은 일정한 유형의 행동(성적 흥분, 공격성, 도망)에 묶인 한에서는 기능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반면에 색은 영토적 혹은 더 정확하게는 영토화하는 표징--즉 서명signature--인 시간적 항상성과 공간적 넓이를 획득할 때 표현적이 된다. 문제는 색이 영토에서 예전의 기능을 다시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느냐가 아니다. 후자는 분명하다. 그러나 기능의 이러한 재조직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고 있는 요소가 표현적이 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의미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임을 함축한다.(TP, 315) 
영토는 실상 환경과 율동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과 율동을 “영토화하는” 행동이다. 영토는 환경과 율동의 영토화의 산물이다. 
 
◆ 아쌍블라주(assemblage) 
<영토와 아쌍블라주> 
아쌍블라주는 환경으로부터 영토를 추출해냄으로써 시작한다. 모든 아쌍블라주는 기본적으로 영토적이다. 영토가 아쌍블라주를 만든다. 아쌍블라주는 영토적인 한에서 여전히 층에 속한다. 즉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는 면에서 층에 속한다. 
- 영어로 아쌍블라주로 옮기는 불어의 Angencement은 배치로 옮기는 것이 좋다. <천 개의 고원> 제 10장 얼굴성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배치의 4가성이라고 지칭한다.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첫 번째 분할> 
아쌍블라주가 층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표현이 기호체계, 즉 기호의 체제(a regime of signs)가 되고 내용이 실제 행위의 체제(pragmatic system), 즉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 겪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semiotic system / pragmatic system)이 모든 아쌍블라주의 첫 번째 분할이다. 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 각 경우마다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비물질적 변환’> 
진술 혹은 표현들(쉽게 말하자면 말해진 것--강사)이 몸들(물체들) 혹은 내용들(pragmata--강사)에 속성들로 “귀속되는”(attributed) 비물질적 변환(incorporeal transformation)은 층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서는 나중에 들뢰즈>가따리의 언어이론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임--강사). 층에서는 표현들이 기호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내용들도 실제 행위(pragmata)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호들이 표현하고 실제의 일로 귀속되는 비물질적 변환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쌍블라주는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유효한 정도만큼 층에 속한다. 우리는 기호의 체제들과 실제 행위의 체제들을 그 나름의 층으로, 앞에서 언급한 광의의 의미의 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새로운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좁은 의미의 층과는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다. (TP, 504)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두 번째 분할> 
영토성(내용과 표현 포함)의 측면과 함께 영토를 가로지르고 가만있게 하지 않는,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이 선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선들은 영토적 아쌍블라주를 다른 아쌍블라주로 열어 놓는다.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에 직접 작용하여 그것을 태곳적부터 있었거나 장차 올 땅(land)으로 열어 놓는다(예를 들어, 독일 가곡에서 혹은 낭만주의 예술 일반에서 영토와 땅의 게임). 또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를 그것들이 발동시키는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기계로 열어 놓는다.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은 환경의 일정한 탈코드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해서 확대된다. 코드가 탈코드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듯이 영토는 탈영토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다. 
<요약> 
아쌍블라주는 4가(價)적이다. 1) 내용과 표현 2) 영토와 탈영토화. 
 
◆ 탈영토화 
탈영토화는 영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탈주선(a line of flight)의 작동이다. 
1) 탈영토화는 탈주선을 가로막는 보상적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질 수 있다. 이럴 때 탈영토화는 부정적이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재영토화로 쓰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잃어버린 영토를 “대표”(stand for)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 어떤 대상, 어떤 책, 어떤 기구나 체제를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기구는 영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것은 실상 탈영토화를 수행하며, 다만 이는 즉시 재산, 노동, 화폐에의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진다. 
2) 탈영토화가 긍정적(적극적)이 될 경우. 바꾸어 말하면 탈영토화가 재영토화를 누르고 재영토화는 이차적 역할만 하는 경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긍정성은 상대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그리는 탈주선은 구획되어 있고 연속적인 “절차들”로 나뉘며 블랙홀들로 가라앉고 심지어는 일반화된 블랙홀(큰 재난)로 끝나기 때문이다. 수동적 겪음(passion) 및 의식과 연관된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주체적 기호체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긍정적이다. 
3) 절대적 탈영토화 : 절대적 탈영토화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절대적”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먼저 탈영토화, 영토, 재영토화, 그리고 대지 사이의 관계들을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영토 자체는 영토를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할 수 없다. (...) 영토적 아쌍블라주 자체가 다른 유형의 아쌍블라주들로 열려 있거나 그것에 의해 끌려가기 때문이다. 둘째, 탈영토화는 다시 상관되는 재영토화와 분리할 수 없다. 탈영토화는 단순하지 않으며 항상 다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개의 형태들에 참여하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특한 속도와 운동을 수렴시켜서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순간에 “탈영토화된 요소”와 “탈영토화하는 요소”를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제, 본원적 작용(original operation)으로서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이 탈영토화 자체에 내재하는 이 차별적 관계들을, 탈주선에 내재하는 이 다수성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땅은 탈영토화의 반대가 결코 아니다. 이는 “the natal"의 신비에서 이미 보여질 수 있는데, 여기서 열렬하고 탈중심적이며 강렬한 초점은 영토의 바깥에 있으며, 탈영토화의 운동에서만 존재한다. 대지, 빙하적인 것(the glacial)은 오히려 최고의 <탈영토화>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우주>에 속하며, 인간존재가 그것을 통해 우주의 힘을 따오는 물질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탈영토화된 것으로서 대지가 그 자체로 탈영토화의 엄밀한 상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탈영토화가 대지의 창조자라고--단순한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땅과 우주의 창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로. 
이것이 “절대적인”의 의미다. 절대적인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나 무차별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어진 (상대적인) 양들을 초과하는 양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아니다. 상대적인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운동을 표현할 뿐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수적인(multiple) 것으로 간주된 “하나의” 몸(body)을 그것이 소용돌이의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매끄러운 공간과 연관시킬 때 절대적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일자>로 간주된 몸을 그 몸이 움직이는 결이 진 공간, 비록 가상적일지언정 직선들을 가지고 측정하는 결이 진 공간과 연관시킬 때 상대적이다. 탈영토화는 두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탈주선을 방해하는 일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하거나 탈주선들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구획작업을 하는 이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할 때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이다(그러나 이미 효과적이다). 탈영토화는 첫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 바꾸어 말하면 탈주선들을 연결시키고 추상적인 활력선(an abstract vital line)의 차원(power)으로 끌어올리거나 공존지속성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을 그릴 때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적 탈영토화는 그것이 초월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로 반드시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상대적 혹은 부정적 탈영토화도 작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포괄적인” 어떤 것으로, 대지를 위로부터 코드화하고 탈주선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결합시키는 대신에) 봉합하여 정지시키고 파괴하는 총체화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 그리하여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혹은 심지어는 상대적인 탈영토화에서도 한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환점에서 탈주선들은 방해받고 구획될 뿐만 아니라 파괴 혹은 죽음의 선들로 바뀐다. 여기에 걸린 것은 실로 절대적인 것 속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다. 대지가 사방에서 에워싼 매장(埋葬) 및 자살 조직의 대상으로서 띠가 둘러지고 둘러싸이고 위로부터 코드화되고 봉합되느냐 아니면 대지가 공고화되고(consolidated) <우주>와 연결되며 생성들로서 그것을 가로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서 우주 속으로 넣어지느냐이다(니체의 표현: 대지가 빛이 되어라...). (TP, 508-510) 
 
◆ 리조움 
층뿐만 아니라 아쌍블라주들도 선들의 복합이다. 선의 첫 번째 상태 혹은 첫째 종류의 선을 밝혀 보자면 이렇다. 선은 점에 종속된다.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된다. 선은 형상적이든 아니든 윤곽을 구성한다. 그것이 구성하는 공간은 결이 진 공간이다. 그것이 구성하는 셀 수 있는 다수성은 항상 우월하고 보충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일자(一者)에 종속된다. 이러한 유형의 선들은 몰적이며 구획된, 원형의, 이원적, 수상(樹狀)의 체제를 구성한다. 
두 번째 종류는 퍽 다른 분자적인 것으로서 “리조움” 유형의 선이다. 사선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부수거나 뒤튼다. 사선은 이제 윤곽을 구성하지 않으며, 사물들 사이를, 지점들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면을 그려내는데, 이 평면은 그것을 가로지르는 차원들 말고는 다른 차원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구성하는 다수성은 일자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공존지속성(consistency)을 띤다. 이는 계급의 다수성들이 아니라 대중 혹은 무리의 다수성들이다. 규범적이고 법적인 다수성들이 아니라 변칙적이고 유목적인 다수성들이다. 생성의 다수성들이며, 변환의 다수성들이지, 셀 수 있는 원소들도 아니고 질서지워진 관계들도 아니다. 엄정 집합(exact aggregate)이 아니라 퍼지(fuzzy) 집합이다. (...) 
그러나 일자와 다수적인 것(the multiple) 사이의 대립을 다수성들의 유형들간의 구분으로 대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유형간의 구분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을 미리 배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 나름으로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다수성들은 나무모양이고 다른 것들은 아니라는 식이라기보다는 다수성들의 수상화가 존재한다느 것이 초점이다. 이것이, 리조움을 따라 흩어져 있는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할 때나, 그 줄기들이 (특히 얼굴의 경우에 우리가 보았듯이)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결지어서 비교가능하고 분할가능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획들을 형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중” 운동 혹은 분자적 흐름이 그것을 구획하고 정류(整流)하는 축적과 정지의 지점들에서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조움의 줄기들은 항상 나무에 작별을 고하며 대중과 흐름은 나무에서 나무로 뛰고 나무를 뿌리뽑는 연관들을 창안하면서 항상 달아난다. 이것이 바로 공간을 매끄럽게 하기이며, 이는 다시 결이 진 공간에 재작용한다.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영토들이 이 심층적인 운동들에 의하여 동요한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의 나무들은 피는 눈과 리조움들에 의하여 뒤흔들린다. 그리하여 리조움의 선들은 그것을 구획하고 심지어는 결짓는 나무의 선들과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탈주 및 파열의 선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개의 선들로 구성되는데 각 선은 그 위험을 지닌다. 우리를 옥죄며 우리에게 동질적 공간의 결들을 부과하는 구획된 선들뿐만 아니라 이미 이 미시적 블랙홀들을 나르는 분자적 선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항상 그 창조적 가능성을 버리고 죽음의 선으로 전환될 위험, 순전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전환될 위험을 감수하는 탈주의 선들도 그렇다. (TP, 505-506) 
 
◆ 기계, 전쟁기계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을 비판한다. 하나는 기계론자(mechanists)들의 견해로서 이들은 단순히 부분들의 조립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활력론자들(vitalists)의 견해로서 이는 기계를 생물체에 동화시키거나, 생물체를 기계에 동화시킨다. 이 두 관점이 공히 가지고있는 문제점은 대상을 통일성(unity, 혹은 일자에 의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들뢰즈 가따리가 재구축한 기계 개념은 기술공학적 기계(,the technical machine, 상식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다수성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며, 통일성이 구현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영토적 아쌍블라주가 (자연적 조건에서든 인위적 조건에서든) 탈영토화의 운동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하나의 기계가 풀려나졌다고 말한다”(TP, 333)라고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의 기계 개념은 그 독특한 언표(enunciation)의 힘에 착목한 것이다. 언표란 예의 비물질적 변형을 일으키는 표현(말함인 동시에 행함인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앞의 내용--“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참조. 
전쟁기계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탈영토화의 양자의 발산이 목적인 기계를 말한다. 즉 변이와 생성이 목적인 기계이다. 전쟁은 변이가 아니라 변이의 실패이다. 전쟁기계가 변화시키는 힘을 잃었을 때 남는 유일한 목적이 전쟁이다. 이럴 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거나 그 자체를 국가기구로 구축한다. 파괴만을 하는 것으로 
전쟁기계는 법과는 아주 다른 법(nomos)이다. 국가형태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하며, 자기자신에 동일하게 남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서 전쟁기계는 변형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술적 창안뿐만 아니라 산업혁신에서, 종교적 창조뿐만 아니라 상업적 유통에서, 이러한 흐름들과 조류들은 이차적으로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도록 허용한다. (TP, 360) 
 
◆ 블랙홀 
 
이는 탈영토화가 폐쇄되는 경우이다. 이는 때이르거나 극히 갑작스런 탈영토화의 조건에서, 경로들이 봉쇄될 때 일어난다. 이럴 때 기계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개별적인” 집단효과를 발한다. 들뢰즈 가따리는 혁신적 과정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선 블랙홀로 떨어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면에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거나 금제(inhibition)들이 서로 봉합되어 반향하면 공존지속성으로 열려져 나가는 대신에 아쌍블라주의 폐쇄가 일어난다. 마치 진공 속에 탈영토화되는 것처럼. 들뢰즈 가따리는 기계란 항상 아쌍블라주를, 영토를 열고 닫는 독특한 열쇠라고 한다. 
탈영토화 재영토화
어떤 사물의 용도가 고정된 사용개념을 벗어나(탈영토화) 새로운 용도로 쓰이게 되는(재영토화) 개념으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손은 강의실의 영역에서는 공부하는 기계로 쓰입니다. 교수는 칠판에 손으로 분필을 가지고 글씨를 쓰고 학생은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는 공부 도구 역할을 합니다. 이 손의 용도는 식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 들여오면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도구로 바뀝니다. 이 때 교실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이것을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식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옴으로써 (재영토화) 손의 용도는 바뀝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어떤 사물과 연관된 기계적 관계를 생각할 때 이러한 영역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설명하는 철학적 용어입니다. 
미셸 푸코는 현대의 권력을 신체 권력으로 파악한다. 강압이나 권위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거시 권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신체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포섭해가는 미시 권력이라는 뜻이다. 푸코는 이 신체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판옵티콘(pan opticon ; 일망감시체계)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서 그는 공간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주공간처럼 우리의 신체도 수직적, 수평적 공간 활동을 하고 있다. 
푸코의 비판적 계승자인 질 들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의 ‘영토’를 벗어나라(‘탈영토화’)고 권한다. 자기만의, 소수자의 새로운 영토를 만들라(‘재영토화’)는 주문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권력을 보다 확장해가는 거대 영토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이제 사이버 공간에서도 자신의 의미,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거대 자본에 늘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소수자본도 그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여성, 노역자,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투쟁은 눈물겹다. 
빛의 속도의 시대에 출발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있다면, 비행기를 발명한다는 것은 추락을 발명하는 것이다. 아바타란 소멸을 연습하기 위한 가면의 존재들이다. 차라리 침묵하라. 혹은 감쪽같은 변신.
푸코와 들뢰즈를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유와 철학의 행동방침이다. 그는 다세포 소경인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원 지방적으로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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