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적 정신분석 시각에서 본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는 문학의 구성과정에서 작가의 정신적 작용과 창조적 상상력이 상호적으로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유대가 깊은 관계이다. 프로이트는 ‘창조적 글쓰기와 백일몽’이라는 글에서 작품의 기본재료가 되는 작가의 백일몽은 바로 그의 소망충족의 욕구와 직결되며, 작품의 플롯과 다양한 문체는 작가의 원초적인 소망을 변경시키고 다양한 형태로 우회하여 접근함으로써, 작가나 독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대할 때 수반되는 긴장감이나 수치심 등을 피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형태로부터 즐거움을 얻게 하는 일종의 ‘전희’(forepleasure)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작가는 이 전희를 통해 독자들을 자신의 더 핵심적인 심층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정신분석적 맥락에서 문학의 장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형태로 설명되었다. 사실세계보다 환상을 다루는 로망스의 형식은 좀더 작가의 원초적이고 유아기적 환상 혹은 꿈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장르로 인식되었고, 반면에 소설의 형식, 특히 사실주의 소설은 로망스와 달리 환상보다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거나 작중인물들의 망상의 비이성적 요소들을 파헤치려는 의도를 가졌다하여서, 다소 정신분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서, 패트릭 브랜트링거는 조지 엘리어트 같은 사실주의 작가가 “자아의 망상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우리 삶을 형성하는 실질적 힘들에 대해 우리가 맹인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점 . . . 인간의 고통과 기쁨을 형성하는 그 세세한 과정들의 어두움을 꿰뚫으려는 강력한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브랜트링거는 이런 일반적 인식을 그대로 수용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 두 개의 장르가 서로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것을 다루는 문학형태가 사실주의 보다 더 핵심적 진리를 다룰 수 있고, 사실주의 소설에서 보이는 현실 혹은 인물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대한 욕망은 “환상에 대해 느낀 공포를 누그러뜨리려는 욕망”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무의식을 해방하려는” 로망스 혹은 “자기-분석적”인 소설 장르에 관계없이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정신분석은 각 작품의 정신적 경향들을 특징짓는데 유용하다고 보았다.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다루는”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학비평가로서 갖추어야할 기본자세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 불릴 정도로 인간의 진정한 진리추구에 필수적인 무의식이라는 도구를 발견한 프로이트의 혁명적 직관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망각되어졌을 때, 문학은 정신분석이 그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동적이고 비창조적인 영역으로 전락하고, 문학이 과학을 초월하여 미리 예견해준 소중한 지혜들의 출구를 막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점에서 현대 문학비평가의 당면한 과제는 도구적 이성 즉 규범적 자아의 양성에 몰입한 비창조적이고 비직관적인 자아심리학에 대항하여, 무의식의 발견자로서의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외치며, 정신분석을 재정립한 라깡의 정신분석적 개념과 그의 문학비평을 살펴보고, 그의 정신분석적 시각이 열게 해줄 문학의 새로운 지평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비평의 역사
정신분석적 비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함으로써 문학이 제2의 자리에서 정신분석의 개념을 증명해주던 도구로 전락하였던 초기1 단계를 쇼쇼나 펠만은 “응용 정신분석applied psychoanalysis”라 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런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대안으로, 펠만은 정신분석과 문학이 서로 어느 하나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루implication”된 상태임을 지적하면서, 문학은 정신분석에 의해 더 잘 이해될 수 있고, 정신분석도 문학적 기제로 구성되어있어서, 그것을 이해할 때 더 진정한 이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정신분석과 문학의 상보적 관계 내지 동등한 관계를 강조하던 정신분석의 두 번째 단계는 그 대칭성에서 엿보이듯이, 무의식적 영역을 다루고 파악해내는 문학 및 정신분석 둘 다의 속성을 지나치게 균형적인 모델로 만들어버린 한계를 가진다. 이런 한계를 보충하는 제 3번째 단계는 라깡의 이론이 사회의 구조인 언어 및 법 체계에 인간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을 인식한 초기 단계의 이론을 극복하고, 인간의 “욕동drive”과 그것이 속한 영역인 “실재계”를 강조하던 단계와 일치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의 정신분석 비평은 이런 라깡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여, 하나의 기호로 존재하는 문학의 의미를 정신분석에 의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론도 문학처럼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 실재계와 사라지는 동시에 맞닿은 문학의 기호들이 어떻게 더 풍부하게 발굴되지 않은 주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현현시키는가를 언급함으로써, 무의식을 다루는 문학을 진정으로 살리고 또 사이버화되어가고 상품문화와 예술에 제도화되어가는 인간의 의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가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우선, 정신분석의 첫 번째 단계의 양상을 살펴보자. 프로이트는 문학이 그 구성과정에서 정신적 과정과 직결됨을 보여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신분석 논문에서 문학의 기본기제인 은유를 통해 여러 환자들의 꿈이나 증상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 중 도라라는 여성의 증상을 설명하면서, 도라의 손지갑을 여성의 성기로 그리고 도라의 어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진주귀걸이를 남성의 ‘정액’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정신적 기억들이 옛 기억들과 접합하여 기억된다는 정신적 작용을 시냇물이 흘러갈 때 옛 마른 수로위로 먼저 흘러들어간다는 은유적 비유법을 써서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트는 남성들이 소변으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욕망이 불의 심지가 남성의 팰러스를 상징하므로 남성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문명적 욕망이라고 설명함에 있어서도 문학의 기본기제인 상징을 이용해 정신적 상황을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상징과 은유를 즐겨 사용하는 문학적 소양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핵심적 개념인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도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프스 왕》)에 기초를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를 논하거나 E. T. A. 호프만의 작품(《모래인간The Sand-Man》)을 논의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신분석비평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문학적 성향과 비평적 실천은 초기 정신분석비평가들이 문학을 대하는데 모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초기 정신분석비평은 프로이트처럼 문학작품에서 주로 상징을 읽어내고 그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예를 들어, 초기 정신분석비평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권총 혹은 뾰족한 탑들을 남성의 성기인 팰러스로, 집 혹은 동굴 등을 여성의 성기라는 단순한 상징으로 읽거나, 조금 복잡한 차원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지 못하는 햄릿의 우유부단함을 오이디프스적 콤플렉스로 설명하여서, 햄릿이 어머니를 소유한 삼촌, 클로디어스와 동일시하여 그가 누리는 것을 원하는,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펠만은 이런 첫단계 정신분석비평의 예로 조셉 우드 크러치Joseph Wood Krutch와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의 애드가 알렌 포우의 비평을 들었다. 펠만은 크러치가 포우의 상상적 직관력은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의 작품이 그의 병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마리 보나파르트의 포우의 분석은 그녀의 《도난당한 편지》의 논의에서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되찾아주는 것을 어머니의 잃어버린 페니스를 다시찾아주기rephallicization로 해석하는 것에서 보여지듯이, 적어도 그의 작품이 담지하는 시적 영감과 직관들을 풍부한 프로이트적 개념들(벽나로를 어머니의 자궁으로, 벽난로 중앙의 편지통을 달고 있는 매듭을 여성의 음핵으로) 상징적으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지만, 그녀 역시 그의 작품을 정신분석의 개념들을 증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펠만은 보나파르트도 역시 “포우의 작품을 그의 신경증의 재창조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 . 포우의 텍스트가 표현하는 병리적 경향들은 정상적 사람들이 어렸을 때 더욱 성공적으로 단순히 억압하였던,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본능들과 욕동”들의 과장된 모습들“이라고 봄으로써, 문학작품을 ”임상적 진단clinical diagnosis"의 접근으로 처리한다고 비난하였다. 펠만은 보나파르트의 문학에 대한 임상적 접근의 예로 포우를 ‘시체애호가necrophilist'로, 보들레르를 ’공공연한 가학자declared sadist'로 보는 그녀의 시각과, 보들레르가 포우를 존경하고 그의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발견한 것, 즉 “시체애호증과 가학증의 관계”는 오로지 본능이론에 의해서만 밝혀진다고 본 점을 들고 있다.
펠만은 과연 “시가 임상적으로 진단될 수 있을까?”에 의문을 품고, 작가의 무의식적인 성적 환상들만 다루고, 작가의 탁월한 의식적 예술, 즉 그의 시적 기술과 의식적인 예술적 통제력을 전적으로 배제한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비평의 한계를 라깡이 극복하였다고 보았다. 펠만은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에 대한 라깡의 정신분석적 비평과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다섯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하였다. 첫 번째 특징은 라깡의 읽기는 ‘차이성difference’의 해석이었고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읽기는 ‘동일성identity’의 해석이었다는 점이다. 라깡이 이 소설에서 읽어낸 반복은 편지라는 하나의 기표가 여왕, 장관 그리고 듀팽의 세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차이성의 연쇄고리를 형성하여서, 이 연쇄고리는 편지가 누구의 손에 떨어지든지에 관계없이 편지가 상징하는 기표를 주변으로 결정되는 구조적 차이 때문에 의미를 형성해 간다고 읽었다. 반면에 보나파르트는 충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포우의 가학적 시체애호적 욕망이라는 같은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보았다.
라깡과 보나파르트의 읽기 사이의 그 두 번 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은 기표의 분석이고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기의의 분석이라는 점이다. 다시말해 라깡의 분석은 편지를 하나의 기표로 보고 이 기표의 텍스트 상의 움직임을 간파하여서 이것이 전치되어가는 구조적 관계를 밝혀내는 것에 주력하였다면,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이 편지 자체의 숨겨진 내용을 읽어내려는 분석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펠만이 지적한 세 번 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이 텍스트적인 분석인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작가의 전기에 입각한 접근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네 번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이 분석가와 작가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분석가가 환자로서의 작가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 텍스트 속에서 일상적인 논리를 뛰어넘어서 문제를 풀어나간 듀팽이라는 시인적 인물로서의 작가에 관심을 두는 분석이었던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포우라는 시인이 병자로, 그리고 비평가는 의사로 존재하는 주인과 하인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펠만은 라깡의 읽기는 전통적인 정신분석비평, 즉 “응용 정신분석”을 전복하는 대안적 읽기임을 주장하였다.
두 정신분석비평의 읽기의 다섯 번 째 특징은 보나파르트의 분석이 정신분석이론의 ‘적용application'이었다면, 라깡의 읽기는 바로 정신분석비평이 문학 안에 ‘연루’ 되는 읽기라는 점이다. 펠만은 라깡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포우를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우의 텍스트가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과 문학은 서로 안에서 ‘상호연루interimplication’되었음을 주장하였다. 펠만은 라깡의 정신분석이 문학에 대해 기여한 바는 그의 “학파”의 새로운 ‘도그마’에 있다기 보다 해석가의 중요한 자질인 독창성과 직관을 통해 어떻게 정신분석이 문학에 연루되는지를 보여준 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펠만이 전통적인 정신분석비평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한 이런 ‘연루’의 정신분석비평도 두 확고한 영역을 연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해석가의 ‘직관의 모험’을 예찬하였다는 점과 두 영역의 대칭적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의 접근방법으로서는 다소 도식적이고 제한적인 방법이며, 무의식의 차원을 다루기 보다 표층의 의식적 영역을 직관적으로 연결하는 고도의 의식적 차원에 기초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또다른 형태의 제한적이고 의식적인 정신분석적 비평을 극복하는 것은 펠만이 제시한 것과 달리 라깡의 정신분석적 ’도그마‘(이론) 그 자체의 힘으로 가능하다.
라깡의 정신분석적 개념에 의한 새로운 정신분석 비평
라깡의 이론의 발전이 초기의 상상계 강조시기, 중기의 상징계 강조시기 그리고 말기으 실재계 강조시기로 나뉘어졌듯이, 쥴리아 라인하드 립튼과 케네드 라인하드는 정신분석을 ‘상상계적 적용’, ‘상징계적 연루’, 그리고 ‘실재계적 외/친밀성extimacy’의 단계로 나우었다. 앞서 언급한 두 단계의 정신분석비평의 역사도 바로 프로이트이론의 일방적 적용으로 문학에서 이미지나 작가 및 작중인물의 성격분석을 중심으로 정신분석의 개념을 증명하는 상상계적 적용단계와 펠만의 분석처럼, 첫 단계의 나르시스적인 일방적 적용의 실수를 교정하고 정신분석과 문학의 쌍방적 연루과정을 강조하던 시기는 상징계적 단계의 정신분석비평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라깡의 《도난당한 편지》의 분석도 1955년 4월에 상징계를 강조하던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서 펠만이 강조하였듯이, 정신분석이 문학과 상호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계적 정신분석비평이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상징계적 포우 읽기는 후기구조주의자 쟈끄 데리다에 의해 비난된 바 있다. 데리다는 라깡이 자신의 이론인 상징계의 역할과 기표, 무의식을 ‘잃어버린 편지’로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문학을 자신의 이론을 위해 사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문학자체의 요소인 화자를 배제하여 화자가 마치 듀팽인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주체의 이중적 분리성을 무시함으로써 및 의미의 산종성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라깡의 정신분석비평의 한계는 그의 이론이 점점 실재계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극복되고, 명실공히 문학을 정신분석의 ‘원인cause' 즉 ‘욕망의 대상object a'으로 간주하고 실재계와 결합함으로써, 문학의 의미를 확장하였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펠만의 정신분석과 문학의 ’연루‘와 다를 바 없이 보이지만, 라깡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 명확히 규정될 수 없지만, 그것이 실재계와 상징계의 빗겨간 소실점vanishing point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임을 생각할 때 이 오해는 사라진다. 다시말해 ‘원인’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은 지금까지처럼 그 의미가 명확히 규명되어져야하는 기표로 쓰여진 상징계만의 차원이 아니라, 실재계도 담고 있어서 그 모호함과 비결정성으로 인해 더 많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문학은 실재계가 상징계의 차원에서 드러내지지 못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의 해골처럼 ‘일그러진 형상anamorphosis’으로 표출되며, 상징계와의 빗겨난 만남으로 인해 생긴 ‘얼룩stain’이다. 끊임없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은 각자 따로 떨어져나가려는 실재계와 상징계 그리고 상상계를 함께 묶어주는 일종의 ‘쌩똠므sinthome'('징후’의 라깡적 개념)이기도 하다. 라깡은 1975-76년 그의 세미나를 《쌩똠므》라는 제목으로 제임스 조이스 논의를 위해 진행했다. 라깡에 의하면, 조이스의 ‘현현epiphany’(어떤 대상이나 주체의 속성 혹은 무의식적인 어떤 것이 이 한 순간 강렬하게 느껴지거나 폭로되어지는 느낌)이나 《피네간의 경야》같은 작품은 바로 실재계의 ‘쥬이상스’가 상징계를 침범한 것과 같은 ‘생똠므’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깡의 포우읽기 같은 상징계적 정신분석비평이 이런 실재계적 정신분석비평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그의 《햄릿》비평에서 엿보인다. 이 비평은 라깡의 포우비평이 보여준 이론중심적 경직성을 벗어나서 ‘욕망의 대상’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햄릿의 욕망을 잘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실재계적 비평이 되기 까지에는 미흡하다. 이런 비평은 라깡의 ‘두번째 죽음’, ‘두 죽음 사이in-between the deaths’, 죽음충동death drive, '외/친밀성extimité‘, '그 것das ding', '칸트와 사드’ 등 여러 개념들이 사용하여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및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의 인물들을 비평할 때 가능해졌다. 《욕망과 해석》이라는 세미나(VI)에서 행해진 햄릿 비평은 다소 상징계적 법과 그것에 의해 표출되지 못한 실재계의 잔존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라깡은 이 연극을 제 2의 《오이디프스 왕》이라고 불렀으며, 일종의 오이디프스적 드라마로서 (아버지 살해의) 범죄와 질서의 관계를 비극적 차원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비평과 더불어, 라깡은 햄릿 비평에서 욕망과 강박신경증의 구조적 관계를 상술하였다. 라깡은 인간이 소유하기 불가능한 ‘팰러스’ 내지 쥬이상스를 욕망하면서, 유일하게 그것의 잔존물로 남겨진 ‘욕망의 대상’을 통해 이 ‘팰러스의 상실’, 즉 ‘존재(실재계)의 구멍hole in the real'을 애도한다고 보았으며, 햄릿의 욕망은 바로 타자의 욕망으로서, 타자(어머니 혹은 무의식)가 욕망하는 팰러스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impossible desire’ 때문에 햄릿의 ‘강박 신경증obsessional neurosis’이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연극에서 햄릿이 ‘욕망의 대상’인 오필리아에 대해 감정을 정립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욕망의 대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런 맥락에서 그녀의 이름을 ‘오 팰러스oh phallos’로 연상시켰다. 또한 햄릿이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연기하는 것도 이전의 비평처럼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삼촌을 통해 획득하려는 욕망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팰러스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쥴리아 라인하드 립튼과 케네드 라인하드가 《햄릿》을 상징계적으로, 《리어》를 실재계적으로 보았듯이, 슬라보 지젝도 라깡의 후기 정신분석 비평이 실재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립튼과 라인하드는 햄릿의 주체를 욕망의 주체로,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의 주인공을 욕동의 주체로 보았다. 지젝도 라깡의 이론이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욕망의 주체에서 실재계의 욕동drive을 중심으로 이론이 전개된다고 보았다. 특히 모든 욕동의 근본인 죽음의 욕동은 실재계를 가장 잘 대변해줄주는 개념으로 라깡의 여러 복잡한 개념의 핵심이 된다. 특히 라깡이 안티고네와 눈 먼채로 콜로노스를 떠도는 오이디프스를 아름답고 숭엄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의 욕동은 중요한 개념이다. 라깡은 이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두 죽음 사이’의 언캐니한 세계라고 말한다. 이 ‘두 죽음 사이’의 세계는 생물학적 죽음도 초월하여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과 관련된 세계이다. ‘두 번째 죽음’은 일명 죽음의 욕동으로서, 상징계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햄릿이 기도하는 삼촌을 죽였다면, 그 삼촌은 육체적 죽음을 겪은 것이지만, 햄릿은 그런 죽음에 만족하지 않고 기도로 인해 삶의 흔적도 남길 수 도 없게 의미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도 완전히 죽는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번째 죽음’은 리어왕이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처럼 자신의 운명(Ate: 상징계적 차원)을 피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육체적 죽음에 매인 자들이 아니라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처해서 그 운명을 초월하고 무(無)화시키는(두 번째 죽음)도 감행하는 진정한 욕동의 주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두 죽음 사이’에 사는 것이며 상징계와 맞닿으며 빗겨나간 실재계의 핵인 ‘사물’을 맴도는 숭고한 차원의 주체이다. 이 ‘두 죽음 사이’의 세계는 리비도적 라멜라lamella처럼 무정형적인 영원히 죽지 않는 차원의 세계이다.
립튼과 라인하드가 새로운 정신분석비평으로 제시한 욕동의 주체를 읽어내는 비평은 바로 이 ‘두 죽음 사이’의 숭고한 인물들, 바로 운명과 상징계적 의무를 초월함으로써 고통을 지불하면서도 윤리적으로 실재계적 차원에 충실했던 인물들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죽음의 욕동을 두 가지의 모델로 제시하여서, 고통을 치르더라도, 즉 쾌락원칙을 넘어서‘죽지 않는’ 리비도적 쥬이상스에 충실한 죽음의 욕동이 있는 반면에, ‘즐기라’는 쥬이상스의 본질적이다 못해 윤리적이라고 까지 설명된 “쾌락의 어리석은 수퍼에고적 죽음의 욕동”을 극복하고 자신의 ‘환상을 거슬르게traversing the fantasy“ 만드는 죽음의 충동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칸트와 사드‘라는 논문에서 사드처럼 일상적인 차원에서 악이라고 할 정도로 가혹한 일이지만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는 것, 즉 ’쥬이상스에 대한 의지‘를 윤리적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법, 윤리는 우리가 우리의 상황이나 개인적 열망(칸트에서 병리적인 것)에 따라 취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족되기를 원하는 초자아의 욕망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과 욕망은 서로 반대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실체로서 윤리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의 윤리학은 욕망에 따르는 것, 즉 욕망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지젝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주체들처럼 ‘전체주의적인’ 쥬이상스에 대한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서 치료의 목적인 ‘자신의 [상상계적] 욕망을 극복하고’, 윤리적일 정도로 거스를 수 없는 [실재계의] 욕망을, 즉 더욱 과격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 “씰리쎄Scilicet: 너는 해도 된다You are allowed to”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사드에 대한 언급은 쥬이상스의 의지를 자유로이 구가한 사드를 윤리적으로 예찬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라깡은 사드가 지나치게 사디즘의
테크니크를 과시하는 잘못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라깡은 고통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즐기려는 욕망의 목소리에 충실하는 쥴리에뜨 같은 사드의 가학적 행위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윤리적인 숭엄한 인물로 승화된 반면, 사드는 사형선고를 면하기 위해 그의 범죄를 변명하는 비윤리적 주체로 전락한 것을 지적하였다. 라깡은 이런 사드가 결국에는 절대적인 욕망 그 자체에 순응하기 보다 여성들의 ‘남근선망’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해결책으로 ‘구부러진 바늘’curved needle', 즉 페니스 그것도 ‘큰 것’을 제시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였다. 라깡은 이런 사드의 한계로 인해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사드가 언어가 사용되는 ‘우리의 세계에서, 깨어있는 상태로, 자연의 가슴으로 다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게 했을’ 그런 종류의 무감각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 “진정으로 욕망에 대한 글로서, 거기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라깡의 실재계를 강조하는 이론은 문학이 일종의 현실의 세계라는 가상과 더불어 반드시 실재계에 속한 존재의 핵, 즉 ‘사물’ 주위를 맴도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더 이상 일상적인 기표만이 아니라, ‘사물’주위를 맴도는 침묵과 비문법적, ‘외/친밀성’의 언어로 구성되어야한다. 이런 라깡적 의미에서 문학은 다른 담론과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일관적으로 연결된 데서 오는 읽기의 쾌락을 주지는 않지만, 사물’ 주위를 맴돌음으로써, 어떤 몇 개의 의미로 한정되게 전달되는 언어활동이 아니라, 좀더 실재계와 상징계가 그리고 독자의 상상계가 어우려져서 얻게되는 쥬이상스, 즉 그 자체도 작가의 이 세 영역의 어우려진 매듭인 ‘쌩똠므’의 문학만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독자의 실재계에 속한 ‘사물’을 자극하는 모호한 ‘일그러진 형상’, 얼룩, 오브제 아, 즉 또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된며, 이러한 실재계와 조우하려는 라깡적 문학 비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창작품이고 ‘얼룩’이 되어 독자에 의해 더 풍부한 의미로 대체되어지는 결과를 유발하게 된다.
출처 : Lacanian | 글쓴이 : 해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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