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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