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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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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심상운 시론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7> /심 상 운
2019년 07월 12일 21시 28분  조회:990  추천:0  작성자: 강려
 *월간 <시문학> 2006 10월호 발표 <오탁번/임종성/이혜선 시인의 시>
                                 
                                        
오탁번 시인의 시- 「애기똥풀」「라라에 관하여」
 
 
1
개구리밥 자라는 둠벙가에서
눈 깜박이며 살레살레 고개젓는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
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
새끼 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
애기똥풀 감황柑黃빛 꽃물 발라 주던
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
둠벙도 먼 강물도 꿈꾸지 못하는 나에게
누룽지처럼 맛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련해주고 떠난
누나여
 
2
새끼 자라가 눈을 뜨고 둠벙에서 나와
흐린 강물 헤엄치며 불러보아도
이젠 영영 보이지 않는
땀방울 송송 맺히던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
감장종지만한 젖가슴도
쥐이빨 옥수수같은 앞니도
세상의 강물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추억의 빈 공책 빛 바랜 페이지에서
옹알옹알 속삭이며
그때 그 어린 눈망울로
내 사타구니의 다 큰 자라가 미운 듯
말똥망똥 눈 흘기는 애기똥풀이여
누나여              
                                    -------「애기똥풀」 전문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雉岳山을 한참 바라다 보았다.
 
7년이 지난 2월달 아침, 나의 天井에서 겨울바람이 달려가고 대한 극장 나列 14에서
라라를 다시 만났다.
 
다음날, 서울역에 나가 나의 內部를 달려가는 겨울바람을 전송하고 돌아와 高麗歌謠
語釋硏究를 읽었다.
 
형언할 수 없는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소리에서 깨어난 아침, 次女를 낳았다는 누님의
解産 소식을 들었다.
 
라라, 그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風車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라여, 本能의 바탕이여. 아름다움이여.
                       ------------------------「라라에 관하여」전문
 
시의 현실은 시인의 의식이 선택하여 재구성하고 의미를 붙인 가상현실(허구)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시나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오래 견디는 현실이냐 하는 것이다. 시대적인 이데올로기나 가치들은 그 시대가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蜃氣樓다. 물질적인 것들도 시간의 이빨에 오래 견디기 힘들다. 언젠가는 다 바스라지고 녹아서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정의한다. 시인들도 형이상학적인 인식을 통하여 해바라기처럼 진리를 향하여 언어의 날개를 펼친다. 그런데 진리는 이미 기성복같이 만들어진 것 즉 관념이기 때문에 시로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각이나 정서의 옷을 입혀야 한다. 그런 시들을 관념시 또는 형이상학 시라고 한다. 오탁번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시가 지닌 시간성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대적 가치나 사상,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상적인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변하지 않는 시간성이 들어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본능本能이라는 원초적인 세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애기똥풀」에서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불러일으켜 순수한 본능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세계는 어쩌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같다. 눈곱만한 부끄러움도 분별심도 없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그 세계는 이 세상에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나는 일이 없어질 때까지 변하지 않을 세계이며 어른들 기억의 맨 밑바닥에 잠들어있는 본래적인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초적인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곳(낙원)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는 이 시의 구절들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언어보다도 영원성에 접근해 있다. <애기똥풀의 가녀린 꽃잎 위로/문득 떠오르는 진외육촌 누나의 얼굴이여/아직 눈도 못 뜬 내 사타구니에/새끼 자라의 연한 살결 간지럼 태우며/애기똥풀 감황柑黃빛 꽃물 발라 주던/누나의 눈웃음이/ 봉숭아물 곱게 든 손톱만큼 예뻤다>는 이 시에서 진외육촌누나와 나의 관계는 아담과 이브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기억의 재생이 환기시키는 정서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성의 힘으로 인해서 시간의 굴레를 뚫는다.「라라에 관하여」는 그런 원초적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사춘기를 지나서 직업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인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이고 간결한 사실의 나열과 압축, 그리고 냉정한 이성理性의 언어로 축조된 이 시는 본능과 이성의 갈등에서 끝내는 허물어지고 마는 이성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적인 시인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겨울바람, 형언할 수 없는 꿈, 누나의 해산,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 등은 결국 고려가요어석연구高麗歌謠語釋硏究를 읽는 이성理性의 나를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라라, 그 보잘것 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風車 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라라여, 本能의 바탕이여. 아름다움이여.>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오탁번 시인의 이런 꾸밈없는 솔직함과 본능의 드러냄은 그의 시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를 여는 바탕이 되고 무상無常의 시간을 극복하는 에너지가 된다. 또 서사적인 그의 시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는 재미를 주고 상상의 문을 열게 한다.
 
*오탁번(吳鐸藩):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당선되어 등단.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處刑)의 땅」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함.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오탁번 시 전집」등
 
임종성 시인의 시-「山行」「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내가 바위처럼 우뚝
솟으려 할 때 산은
낮게 낮게
멀리 가는 냇물을 보여주고
 
내 마음이
칡넝쿨처럼 얽힐 때
똑바로 뻗은 나무를 보여주고
 
계곡을 오르다
내가 잡풀처럼
억세어질 때
유유히 흐르는
흰 구름을 보여주고
 
날 저물어
내가 잎으로 떠돌 때
산은 환한 풀꽃으로
길을 밝혀준다
-------「山行」전문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
좁은 행간 속에
높고 먼 하늘이 내려와 앉고
한낮에도 별들이 총총 반짝인다
내가 책을 펴기도 전에
나무는 시의 내부를 거의 파악한 듯
내 시선이 다음 시행 끝에 이르기 전에 나무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일 때
나무는 흐려진 그늘로도
연을 이루고
그다지 밝지 않은 문장 속을
모두 비추는가
잠시 어둠에 젖은 마른 잎처럼 졸다가
시퍼런 풀빛으로 깨어나면
내게로 거침없이 부딪쳐오는 한 세상
이 산에서 사는 하나의 풀이거나
풀 속에 맺힌 이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한 점 벌레 같다는 생각에 이르는 동안
나무에 기대어
다시 시를 읽는다
--------「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전문
 
자연은 현대시에서도 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인공적인 변화가 빠르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자연은 그 현실을 바르게 보는 마음의 중심기둥 역할을 한다. 시인은 자연을 통해서 변화하는 현실의 의미도 짚어보고 무상한 실체를 체험하기도 한다. 특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동양적인 자연관은 자연이 객관적인 대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얻는 사유의 언어들이 비록 실제가 아닌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깨우침을 주는 새로운 감각의 언어로 변형시켜 독자들에게 부단히 접근한다. 임종성 시인의 「山行」은 산을 스승으로 삼아서 산의 가르침을 배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높은 것과 낮은 것, 얽히고 굽어진 것과 똑바른 것, 억셈과 유연한 것, 어둠과 빛의 대조를 통해서 삶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보는 시각視角의 균형감각을 잡아주고 있다. 우리들은 높이 솟은 바위를 부러워하고 그 바위 같이 솟아보려고 하지만 산은 낮게 흘러가는 냇물을 보여 줌으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 삶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칡넝쿨처럼 얽힐 때/똑바로 뻗은 나무를 보여주고//계곡을 오르다/내가 잡풀처럼/억세어질 때/유유히 흐르는/흰 구름을 보여주고//날 저물어/내가 잎으로 떠돌 때/산은 환한 풀꽃으로/길을 밝혀준다.>는 구절들이 비록 관념적인 교훈의 드러냄이라고 하여도 시인의 체험이 묻어난 살아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시적 생명력을 갖는다. 그 생명력의 바탕에는 시인의 담담한 서술의 언어가 한 몫을 하고 있다.「나무에 기대어 시를 읽으면」은 자연물과 자아自我가 하나가 된 상태. 즉 대상물에 완전히 몰입沒入된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무와 시인이 한 몸이 된 이런 경지에서 시의 주체는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내 시선이 다음 시행 끝에 이르기 전에 나무는/ 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는 상상 속의 사건이지만 시에 대한 나무의 반응이라고 생각할 때 그 발상이 매우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산 에서 시는/ 하나의 풀이거나/ 풀 속에 맺힌 이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한 점 벌레 같다>는 그의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자연을 단순히 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 시와 나를 같은 생명체로 인식하는 임종성 시인의 정신의 경지가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보통의 시들이 자연을 시의 보조물로 취급하고 비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비교할 때 그의 자연관은 독보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정신의 출발점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그 지극한 사랑이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경지를 연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세계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임종성 시인의 시편들에서 감지되는 생명적인 것들이 더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뜨거운 감응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며 그의 시와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 임종성(林鍾成): 1977년 <시문학>에 「새벽바다」「자정」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땅뺏기」「숨쉬는 상처」등
 
이혜선 시인의 시-「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고조선 빗물」
 
탐스런 젖무덤 실한 엉덩이
떡 버텨누운 자궁속으로
속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만나는 눈빛 하나
 
시간의 끝에서
다시 끝끝까지 걸어들어가
반짝이는 꽃빛 하나
그립고그리운 너를 만난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
언제까지나 그리운 그이름을 만난다
 
꽃이슬 반짝이는 새아침의
붙잡을 수 없는,
핏줄속에 돌고있는 그이름을 만난다
 
억겁 후의 이름을
돌고있는 그별을 만난다
---------「나를 만난다-반파 유적지 母系氏族村에서」전문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너 그리움으로 잠들지 않고
비가 되어 내린다. 한밤 내내
 
검은 땅 위의 나를 흔들어
나 빗속에 나와 서면
팔 벌린 네가 빗물이 되어 온다
 
마음하늘에 꽃 한 점 없어도
어둔 촉각소리 어디서 샘 솟아
그리움 되는 빛
 
날새 날갯죽지도
잠 못드는 마을 마다
짚단베개 고이고 잠을 청하랴
 
빈 뼈 속속들이 태우며
그대 지금 가고 없는 고조선 사람아
----------------「고조선 빗물」전문
 
민족이니 역사의식이니 하는 사고思考의 산물들은 언어로 표현될 때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현재의 시간도 관념이 아닌 생생한 감각으로 건져 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 잠겨있는 돌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다. 맑은 물속에서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면서 황홀하게 빛나던 수석水石은 물 밖으로 나와서 물기가 마르는 그 순간에 이미 물속의 돌멩이가 아닌 메마른 지상(관념)의 돌멩이로 변하고 만다. 사실 우리들이 시 속에서 현실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며 역사이고 가상적인 현실이며 역사일 뿐이다. 어디에도 지나간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관념이나 지식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고타마 싯다르타는 수보리에게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의 지극한 염원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다. 이혜선 시인은 어느 날 반파 유적지 모계씨족촌母系氏族村에서 <탐스런 젖무덤 실한 엉덩이/떡 버텨누운 자궁속으로/속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만나는 눈빛 하나//시간의 끝에서/다시 끝끝까지 걸어들어가/반짝이는 꽃빛 하나/그립고그리운 너를 만난다/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어머니/언제까지나 그리운 그이름을 만난다>고 했다. 그 만남은 우리들 핏줄의 실체와의 만남이고 본질적인 만남이다. 그는 그 만남을 생명의 본적지며 원형인 여성의 자궁 속에서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생동하는 언어로 잡아내고 있다. 그 현실은 그의 역사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다. 물속의 돌멩이같이 물과 햇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황홀한 꿈의 현실이다. 이런 역사의식에 몰입해 있는 이혜선 시인은「고조선 빗물」에서는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너 그리움으로 잠들지 않고/비가 되어 내린다. 한밤 내내//검은 땅 위의 나를 흔들어/나 빗속에 나와 서면/팔 벌린 네가 빗물이 되어 온다>라고, 한밤 내내 잠들지 않고 고조선古朝鮮 사람과 만나는 환상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의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의 현형現形이다. 그 그리움의 원초原初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체험과 사유의 세계를 탐구해야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리움의 세계가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데서 약간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과거지향의 의식(꿈)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상실되었던 자궁내의 생활에 대한 재귀 본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그리움과 꿈의 세계는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 회복과 자기세계의 재발견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그리움의 원형세계原形世界로 나타나는 현실(환상)은 본래적 자아의 회복과 재생에 대한 지향이며, 환상과 상징(이미지)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확인된다. 민족의 역사의식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더 끈질기고 강하게 발현되는데, 그 원인도 이런 자기회복과 재생의식에서 근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혜선 시인의 역사의식의 시 속에는 자기발견의 깊은 내면 의식이 들어 있어서 독자들을 역사의 세계로 안내하고 때로는 독자들 스스로 자기의 원형을 찾아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나는 그의 시편들 중 역사의식에 젖어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을 만난다.「치술령 돌어미」에서는 신라시대 박재상 아내의 한恨을 만나고「서라벌 바람은」에서는 나라를 지키려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소리에 담긴 염원을 듣는다. 그 한恨과 피리 소리는 과거의 역사를 뛰어넘어서 오늘의 현실로 다가오고 들려온다.
 
*이혜선(李惠仙): 1981년 ,시문학>에 「돌문」「나를 만남」「지장보살」「갈대밭 머리」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 「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등
 
* 월간 <시문학> 2006년 10월 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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