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시인, 소설가, 예술가들은 왜 산문 ‧ 에세이를 ‘수필’이라 부르지 않는가?>
시詩를 잃어버린 아이들
권정생
(1937∼2007 아동문학가)
옥이네가 살던 절안골 외딴 곳에는 고만고만한 초가집이 네 집이 있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논밭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 때 묻지 않고 착하게 살았다. 감자밥 보리밥이 그다지 싫지 않고 뭣이나 맛이 있고 따뜻했다. 옥이네 삼촌 내외만 빼놓고는 모두 삼대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었다. 닭들이 울타리를 넘나들며 봄에는 어미닭이 병아리를 까서 데리고 다니고 개들이 텃밭을 뛰어다니고, 송아지도 함께 장난치며 다녔다. 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들이 집 뒤꼍에서 무성히 자라고 맛있는 과일을 달아주었다. 십 리길이 넘는 장터에 장이 서면 아버지들은 올망졸망 장거리를 짊어지고 갔다. 해질녘이면 외딴집 아이들은 산모롱이까지 아버지 마중을 가서 갖가지 사온 물건들을 받아들고 깡충깡충 달려왔다. 이날 저녁은 모든 집에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나고 저녁상 앞에서 아버지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 얘기에 정신이 팔린다. 호롱불 밑에서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는 저절로 정신이 홈빡 빠지게 마련이다. 날라리 약장수 이야기, 동동구리무 분장수 이야기, 야바위꾼 이야기, 장터에서 일어나는 얘기는 밤이 깊도록 들어도 재미가 있다.
봄이면 온산에 진달래꽃이 피고 여름엔 산나리꽃이 피었다. 이쪽저쪽 골짜기에 흐르는 물은 깨끗해서 그냥 퍼마시고 미역도 감았다. 가재도 잡고 버들치도 잡고 쟁개미도 잡았다. 가을엔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열리고 여름엔 눈이 내리고 노루랑 토끼들이 집 마당까지 먹을 것을 찾아 내려왔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옛날얘기를 들려주고 움 속에 묻어둔 배추뿌리도 깎아먹고 날무도 깎아먹었다.
좀 가난하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외딴집 마을은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이 절안골 외딴집들이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그곳 아이들 말대로 하면 “대통령 아버지가 전깃불도 넣어주고 텔레비전도 넣어준댔어요.” 이렇게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외딴집 아이들은 전깃불이 들어오기 전에 국민 학교만 마친 채 도회지의 공장으로 뿔뿔이 떠났다. 개울 건너편으로 자동차 길이 뚫리고 못골 옆에 난 데서 온 사람이 목장을 만들었다. 옥이네 삼촌도 도회지로 떠나고 탄광 갔던 인수네 아버지는 폐암으로 죽고 할머니만 남았다. 조용하던 골짜기가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 꿈같은 행복을 약속했던 대통령들도 모두 가짜로 드러났다. 군사정권은 농촌을 이렇게 망가뜨렸다.
지금은 절안골 외딴집 네 집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신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주변 논밭들이 높은 값에 팔려나가자 근방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객지로 떠났다. 수정처럼 깨끗하던 골짝 물은 구정물로 바뀌어 지고 버들치도 쟁개미도 가재도 모두 사라졌다. 이용가치가 없는 골짜기 따비밭이나 다락논들은 가꾸는 사람이 없어 쑥대밭이 되었다.
베틀가나 물레노래를 부르며 길쌈을 하던 할머니도 없고 논매기 노래와 밭매기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던 할아버지 아저씨도 없다. 장날이면 술 취한 장꾼을 골탕 먹인다는 톳제비(도깨비)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외딴집 아이들은 뿔뿔이 헤어져 어디서 어느 기업체 사장님 밑에서 공장노동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더러는 원하지도 않는 어둔 뒷골목에서 타락해버린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 아버지가 약속했던 꿈같은 행복은 이렇게 절안골 아이들의 운명을 바꿔버렸다.
농촌에 아이들이 없어 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쨌든 타의든 자의든 젊은이는 농촌을 마다하고 떠나갔고 아이들도 끌려갔다. 왜 이래야만 되는 걸까?
오래 전에 여름 뒷산에 뻐꾸기도 울지 않고 꾀꼬리 소리도 듣기 어려워졌다. 산에는 새가 날아오지 않고 강물엔 물고기가 없고 아이들이 없는 농촌은 죽은 농촌이 되었다. 노인들만 남아서도시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균제, 제초제—제초제가 아니라 살균제—를 뿌려 가꾼 쌀과 고추와 양파와 온갖 채소를 만들어낸다.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모두가 죽을 날짜를 세면서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농촌이다.
아이들은 시인이라는데 그 아이들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게 하는 슬픈 현실은 무엇 때문이며 누구 때문인가. 아이들이 시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아이들을 시인이 되게 한 것은 아름다운 자연이다.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새소리를 듣고 흰 구름을 보고, 별을 바라보며, 그리고 짐승들과 벌레들과 어울려 땀 흘리는 고통을 배우고 따뜻한 생명들과 살을 비비는 삶이 있어야 한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과 여름날의 소낙비와 무지개와 지루한 장마 비도 알아야 한다.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도 배우고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내도 체험해야 한다. 시인은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삭막하다 못해 살벌해져 가는 오늘날의 도시환경은 ‘죽은 시인의 사회’ 그대로다. 일회용품을 찍어내는 기계처럼 아이들도 그 기계가 되기도 하고 일회용 싸구려 상품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 가서 똑같은 선생님께 똑 같은 방법으로 공부를 하고 똑같은 텔레비전에 똑같은 쇼를 구경하면서 크는 아이들은, 개성도 없고 하나같이 똑같다.
시를 익히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렇게 죽은 인간으로 키워져 사고력도 행동도 획일적으로 되어버린다. 행여나 다른 아이와 다르게 될까봐 오히려 불안한 지경이다. 앞집 아이가 피아노를 배우면 우리집 아이도 배워야 하고, 옆집 아이가 태권도를 하면 우리 아이도 태권도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에게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콘크리트로 된 똑 같은 집에 살며 친구보다 기계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덩치만 크고 가슴은 그야말로 옹졸하기 그지없다.
가까운 친구를 사랑하기보다 경쟁의 대상으로 만들어 평생 적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무슨 시심(詩心)을 키울 수 있겠는가. 자연에서 격리당한 아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시인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구태여 몇 줄의 노래를 읊어내는 시인만이 시인이 아니다. 농촌의 농부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그들은 생명을 만드는 온갖 것을 몸과 마음을 쏟아 부어 키워내기 때문이다.
씨 한 톨 심어놓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미닭이 알을 품고 병아리가 깨기를 기다리는 마음, 보리 이삭이 패고 그 이삭이 알이 영글어 누렇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 이런 마음만이 건강하고 힘찬 시를 낳을 수 있다. 자연스런 것은 결국 자연 속에서 살아야만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만드는 것은 어쨌거나 만든 것이며 인위라는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기계에서 해방시키고 콘크리트 벽속에서 풀려나야 된다. 흙냄새 거름냄새 풀냄새를 맡게 하고 새들과 짐승들과 얘기를 하도록 하자. 괭이질을 하고 지게를 지며 땀 흘리는 농군이 되게 하자. 그래서 시인으로 살게 하자.
똑같은 것을 흉내만 내는 인간이 되어 일생을 시체로 살게 버려두는 건 죄악이다.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아이들을 시인으로 키우고 생명 가진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살충제, 살균제, 살초제 같은 농약을 버리고, 두엄을 만들고 김을 매고 지게를 지는 튼튼한 농사꾼으로 크면, 강물도 살아나고 들판도 살아날 것이다. 물고기가 살고 새들도 날아오고 온갖 벌레들이 살아나면 도덕도 함께 살아난다. 도시의 물질문명과 기계 문명은 영혼을 망가뜨리고 온 몸뚱이의 기능마저 퇴화시킨다. 도시 아이들은 좌변기 말고는 똥도 못 눈다. 뜀박질은커녕 재대로 십 리길도 걷지 못한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온갖 일을 기계에다 의존 않고는 못하는 게 지금 도시 사람들이지 않는가. 손으로 옷에 단추 하나 못 달면서 어머니 노릇한다는 건 말이 아니다. 어머니는 아기의 옷을 손수 만들어 입히는 일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기워준 옷을 입고 자란 아이는 사물을 보는 눈에 사랑이 담기기 마련이다. 기계적인 감각에서 손의 감각과 대자연의 감각으로 뻗어나가면 결국 하늘을 발견하고 그 속에 아이도 하늘이 된다. 겨울의 눈보라와 여름 비바람을 헤치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인간만이 마음이 따뜻한 시인이 될 수 있다.
([중학생을 위한 산문 50선] 엮은이 김 훈 ‧ 안도현)
|작법공부|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 절안골 사람들은 가난하였지만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하게 살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두 번째 부분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후 절안골 사람들은 어떻게 황폐화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세 번째 부분은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독자는 굳이 작가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안골 사람들이 어떻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가를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선명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주고, 새마을운동 이후 황폐한 절안골 사람 이야기도 논리로 설명하지 않고 눈에 선한 이야기로 들려주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너무도 절절한 이야기로 보여주고 들려주기 때문에 독자가 작가의 논리에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감동 먹기 때문이다.
논리적 전개를 아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정생 작가의 작법을 보라. 논리로 논리를 펴지 않고 이야기 중간 중간에 “아이들이 없는 농촌은 죽은 농촌이 되었다.” 혹은 “왜 이래야만 되는 걸까?”라는 질문 형의 문장, “조용하던 골짜기가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 꿈같은 행복을 약속했던 대통령들도 모두 가짜로 드러났다. 군사정권은 농촌을 이렇게 망가뜨렸다.” 같은 작가의 불같은 분노가 타오르는 문장을 섞어 넣고 다시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는 작법의 글을 쓰고 있다.
이것이 조연현 교수가 말한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 되는 현대수필에세이’의 <창작적 형식>이다.
이태동 교수는 “훌륭한 수필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쉽게 그리고 많은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⑩
남다른 통찰력으로써 생生의 이면이나 자연 가운데 숨어 있는 도덕적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때만 글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 작품이야 말로 ‘
생生의 이면이나 자연 가운데 숨어 있는 도덕적 진실을 발견’하는 작법의 작품이 아닌가. 필자가 사는 동네는 80년대 식 다가구 3층 벽돌집들이 아직 남아 있는 변두리 동네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얼굴 맞대고는 차마 할 수 없는 갖가지 저주들이 씌어져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3대가 망한다.’는 문구도 본 일이 있다. 그런 모양들을 10년 넘게 보면서 ‘이 민족은 쓰레기 치울 방법조차 생각해 낼 줄 모르는 구나!’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백 년 동안 ‘신변잡기’ 비난을 들어오고 있는 수필계 지도자들이야 말로 ‘쓰레기(신변잡기) 하나 치울 방법조차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 나라 수필계 지도자들이 피천득의 <수필> 대신 권정생 작가의 <시를 잃어버린 아이들> 같은 작품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면 진즉에 ‘신변잡기’에서 벗어날 방법도 찾아내었을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특별히 똑똑하게 태어나는 아이 가 있다는 말이 잘못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이 수많은 과학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사회 전반에 뛰어난 여성들이 진출하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소설문단만 해도 젊은 여성작가들이 해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젊은 여성 소설가들은 타고나서 소설작가가 되었고 3천 5백여 수필가들은 그렇지 않아서 ‘신변잡기’ 작가가 되었는가? 아니다. 잘못된 선택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현대문학 이론>을 선택하면 ‘신변잡기’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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