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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홍문표 시창작 강의 노트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10
2019년 11월 01일 21시 16분  조회:1036  추천:0  작성자: 강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2
모더니즘시의 이해와 창작
홍문표
(1) 모더니즘의 일반적 개념
① 근대 또는 현대의 지향 - 모더니즘(Modernism)은 바로 모던(modern), 즉 근대 또는 현대를 지향하는 인간 문명의 역사적 이념이다.
② 이성중심주의 - 근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합리적, 과학성, 전체성을 향한 플라톤 이래의 보편적, 본질적 가치중심주의 사상이다.
③ 반과거 주의 - 모더니즘은 언제나 전시대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완전을 향해 진보한다고 보는 변증법적 사고다. 헤겔 - 현재는 과거의 완성이다.
(2) 20세기 모더니즘 문학
① 반 19세기 사조
기존의 리얼리즘과 합리적인 기성 도덕, 전통적인 신념 등을 일체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 도시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에 기반을 둔 다양한 문예사조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넓게는 니체의 허무주의,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혁명이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포함한다.
② 20세기 모더니즘의 두 양상
주지적 모더니즘 - 20세기 모더니즘은 이미지즘, 주지주의, 형식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등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 - 다다이즘, 미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부조리문학, 해체주의, 포스 트모더니즘 등이 있다.
(3) 모더니즘 문학의 공통적 특징
① 전위성과 실험성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은 모더니즘과 관계가 있다. 실험적인 까닭에 이들은 일정한 형식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모더니즘의 예술은 의식적으로 제작하는 만큼 기존의 것들을 파괴한다. 이런 경우 파괴는 거의 현대문명, 과학적인 기술 등에 의해서 창조의 의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파괴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통, 특히 바로 전 시대의 예술방법과 주제 및 소재다.
② 반사실주의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적 유물론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유물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 정신의 부자유로 보고 반발한다. 그런 점에서는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와도 상통한다.
③ 현실과 미래 지향
모더니즘 문학은 과거 지향적이라기 보다는 현실 지향적이고 나아가서는 미래에 대하여 예언적인데, 그 예언은 묵시록적인 세상의 파멸, 반 유토피아에 대한 비젼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④ 지적인 문학
반낭만은 필연적으로 주지적이다. 이는 낭만주의가 주정적이기 때문이다.
“시는 현대의 지성과 정신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소위되는 정신적 소산물인 따름이다.” - 김광균
“시는 언어의 구조물이다” - 김기림
⑥ 형식화된 내용
사상이나 내용은 일정한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형식화된 내용이 바로 문학이다. 사상의 조형성(造形性)이 최대의 관심이다.
⑦ 이미지의 중시
사상의 형식화, 조형성의 논리는 바로 이미지즘의 시각성 내지 감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운드(E. Pound)의 시각시(phanopoeia)에 통하는 개념이고, “시어는 시각적이며 구체적인 언어”라고 말한 흄(T.E. Hulme)의 정의에 통하는 말이다. 플린트(F.S. Flint)의 이미지즘(Imagism)이나 랜솜(J.C.Ransom)의 물질시(physical poetry) 엘리엇(T.S. Eliot)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도 같은 개념이다.
⑧ 현실비판
모더니즘시는 이성적이고 도시적이지만 동시에 도시적인 현대와 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엘리엇의「황무지」김기림의「기상도」등이 그것이다.
⑨ 도시어 사용
모더니즘 시인들은 도시어․ 문명어․ 외래어 등을 즐겨 사용한다. 김광균의 경우 시집명으로서「와사등」과 「기항지」가 있고 그밖에 공장, 교당, 분수, 호텔, 급행열차, 전신주, 새로팡지, 램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사용했다.
⑩ 반자연, 비개성적 자연
모더니즘시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모든 자연, 또는 사물에 감정을 배제한다. 소위 객관적 주관의 서술태도를 보인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처럼
재재 발렸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 정지용의「바다」에서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 박두진「하늘」에서
(2) 주지주의적 모더니즘 시
①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
문자로 보면 지성을 모든 가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정리하면 인식론에서는 감각론, 경험론, 직관주의, 신비주의 등에 대립하며 실재는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이성중심주의에 근거한다. 주정주의의 대립개념으로 감각과 정서보다는 지성을 중요시하는 창작태도 또는 그 경향을 의미한다.
② 주지주의와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
1) 시는 개성과 정서으로부터의 도피
엘리어트는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시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도피다. 그것은 개성의 표현이 아니고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지금껏 전통적인 시론은 감정과 개성을 시의 절대적인 요건으로 생각하였는데 엘리어트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2) 의미와 이미지가 동일한 객관적 상관물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효과는 작가의 자서전적인 의미보다 오히려 기교, 즉 이미지에 의한 깊은 매체로서의 작품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미와 이미지가 동일하게 되어야 한다. 이처럼 관념이나 정서와 동일한 이미지를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라고 그는 부른다. 객관적 상관물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 정서와 사상에 상응하는 사물의 이미지나 장면 등을 찾아내어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창작에 있어 감정보다 이미지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난 인생을 커피 숟갈로
되질하듯 살아왔던 것이다.
- 엘리어트의「J.A. 프로푸록의 연가」에서
인생을 커피 숟갈로 되질했다는 표현은 바로 객관적 상관물의 설명에서 특정한 정서(particular emotion)가 될 수 있는 일단의 대상, 상황, 사건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지겹고 무의미하게 살아온 과거를 ‘커피 숟갈로 되질한 인생’이라고 표현할 때, 우리는 갑자기 충격적인 정서적 환기를 실감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텔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같은 작품에 나타난 일절이다. 여기서는 희미하고 몽롱한 저녁을 ‘수술대 위에 에텔로 마취된 환자’라는 객관적 상관물로 대응함으로써 신선한 감각의 환기를 느낄 수 있다.
3) 사상의 감각화
이는 결국 사고의 감각적 파악, 사고를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으로 귀착된다. 말하자면 사상을 장미꽃 향기처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시론이기도 하다. 사상의 감각화, 이를 통합된 감수성(unified sensibility) 이라고도 한다.
④ 랜섬의 형이상시와 컨시트
1) 시의 세 유형
랜섬은 시를 사물을 표현하는 형이하적인 물질시(platonic poetry)와 사상만을 나타내는 관념시(physical poetry), 메타포와 내포적 언어를 쓰는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면서 사상만으로 치우친 명상시, 감정으로만 치우친 낭만주의 시 등은 감수성의 분열( dissociation of sensibility)을 보이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는 힘, 즉 사상과 감각이 통합된 감수성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형이상학적 기상(metaphysical conceit) 즉 컨시트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푸른 치맛 자락을 훨훨 휘두르며
학교와 탑 밑 잔디밭을 거쳐,
늙은 완고덩이 선생들의 강의 들으러 가라
한 마디로 믿지는 말고
흰 리본으로 너의 윤나는 머리를 묶어라
그리고 결말 같은 건 전연 생각지 마라
저 풀밭을 거닐고 하늘에서 지저귀는
푸른 새들과 같이
-「푸른 소녀들」
(2)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① 흄의 이미지론
1) 건조하고 단단한 이미지
영국의 비평가 겸 철학자인 흄(T.E. Hume)은 종래 낭만주의 문학의 주관적인 입장과 시의 모호성을 비판하고 예술에 있어서 객관성과 훈련은 물론 시에 있어서는 축축하게 젖어 있는( wet and damp) 시가 아니라 건조하고 단단한(dry and hard) 이미지의 시이기를 강조하였다.
2) 음악에서 조각으로
새로운 시는 음악보다 조각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청각에 대해서보다는 시각에 대하여 호소한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조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3) 정확, 정밀, 확실
이미지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구상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는 시의 세 가지 목표로서 정확, 정밀, 확실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이미지즘(imagism) 형성의 철학적 바탕을 이룬다.
가을밤의 싸늘한 촉감
나는 밖을 걸으면서
얼굴이 붉은 농부같이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를 넘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멈춰 서서 말을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둘레에는 도시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었다.
- 흄「가을」
③ 파운드의 이미지론
시란 간결하고 견실한 언어, 리듬과 의미의 일치, 관용적인 표현의 거부, 형용사는 장식이 아니라 직접 내용이라는 것인데 이는 한자나 한시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한자가 갖는 상형성은 소위 은유의 그림(picture of metaphor)과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고도로 긴축된 언어의 묘미에서 많은 것을 발견한다.
군중들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의 꽃잎들
-「지하철 정거장에서」
“3년 전에 나는 파리의 라꽁꼬르드의 지하철에서 내려 갑자기 한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 그리고 한 아름다운 어린아이의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서, 그 날 종일 그 인상 받은 것을 나타낼 말을 찾고자 애썼지만, 그 돌연한 감정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30행의 시 한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버린 것은 그것이 소위 강열도 제 2위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 후에 그 반 정도 길이의 시를 썼고, 7년 후에 위와 같은 글귀를 지었다.” - 파운드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43
아방가르드, 다다와 초현실주의 시
홍문표
(1)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① 예술의 혁명운동
전위, 아방가르드(avant garde)란 본시 군대용어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의 뜻이다. 이것이 변하여 러시아혁명 전야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으로 일관된 정당과 그 당원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이 예술에 전용(轉用)되어 끊임없이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전복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전위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아방가르드는 1차 대전 전후 유럽에 나타난 것인데 아도르노는 물화된 이성의 해방을 위해 비이성적 세계관으로 대응하는 예술운동이라고 했다.
다다이즘․ 미래주파 운동이 그 출발이었고, 추상예술과 초현실주의가 전위예술의 2대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첨단적인 경향의 총칭이 되었다.
②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는 모두가 반과거적 새로움의 지향이지만 주지적 모더니즘은 이성을 통한 새로움의 추구이고, 아방가르드는 반이성, 비이성을 통한 새로움의 추구라는데 차이가 있다.
(2) 다다이즘
① 다다의 선언
“나는 하나의 선언을 한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나도 무엇을 말하려고는 한다. 그러나 나는 주의를 내세우는 선언에는 반대하는 바이다. 나는 주의 자체를 반대한다. 그리고 나는 설명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의의란 것이 싫기 때문이다. 다다이즘은 관념을 버린다는 말이다. 다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다다, 기억의 폐지, 다다, 고고학의 폐지, 다다, 예언자의 폐지, 다다, 미래의 폐지, 다다, 자연에서 비롯된 모든 우상에 대한 이의없는 절대적 신앙, 다다.”
- 트리스탄차라, 1918
② 다다의 형성
다다이즘은 세계 1차대전 도중에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1916년 루마니아에서 스위스 쮜리히에 망명해 온 트리스탄 차라(T.Tzara)를 비롯하여 같은 해 독일로부터 역시 쮜리히에 망명해 온 위고 발(H. Ball) 등 몇몇 망명 예술가들에 의해 ‘다다’라는 단체가 조직되고 1919년 파리에서 브르똥(A. Breton), 아라공(L.Aragon), 수뽀(P.Soupault) 등 여러 시인들이 「문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이 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시의 한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소리도 없이 많은 문이 열렸다. 그것은
팔을 내밀은 무거운 광야의 날개다.
쇠의 초원은 길잃은 대상의 뼈가
흩어져 있는 운하를 넘는다.
공중에 매달린 길에 뻗은 주검은
추운 군중의 목구멍 속에서 타고 있다.
하상에는 녹모토의 한 가닥 빛이 가로누어
유리의 축으로 바람은 찢어지고 있다.
바다의 뇌우에서 눈은 익고
기르는 빛에 싸인 많은 옥석은
많이 모여서 잠든다.
어떤 고통도 입술의 물결에 미끼를 뿌리지 않는다.
권태는 야생의 직물원료의 물가에 좌초했다.
- 차라의「문은 열렸다」에서
(3) 이상의 전위적 모더니즘
① 이상과 전위적 모더니즘과 그 계보
이상의 시는 20년대 정지용이 보여주던 미래파적 요소나 임화가 보여주던 초현실주의적 요소가 새롭게 계승된 것이라고 봄. 이런 변증법적 연속이 50년대 김수영의 초현실주의적 기법이나 조향의 데뻬이즈망, 김춘수의 무의미 시, 60년대 ‘현대시’ 동인 일부가 보여주는 내면탐구, 비대상 시, 80년대의 박상배,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 90년대의 송찬호, 박상순같은 시인들에 의해 계승됨.
② 분열과 단절의 현대성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 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 이상스런흉내를 내었소.
-「꽃나무」
꽃나무로 표상되는 자연과의 소외, 대상과의 단절감, 공포의 확인.
이 시는 자연과 자아의 단절, 대상과 주체의 단절뿐만 아니라 자연의 내적 분열, 자아의 내적 분열이라는 2중의 단절을 보여준다.
30년대 많은 이미지스트들이 대상에 대한 감각적 인상에만 집착함으로써 주체의 고뇌나 불안이나 절망을 괄호친다면 이상에 의해 비로서 우리 모더니즘 시는 주체와 객체의 단절, 주체의 내적 분열이라는 현대적 주제가 드러난다.
1)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
2)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 나는지금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를하는중일까
-「오감도시 제15호」
1)의 시는 이상시의 모태이며 출발점으로 대상, 객체, 세계와 단절되면서 이상이 체험하는 내적 분열, 자아 찾기, 자아 성찰의 풍경이며 그는 마침내 이 풍경 속에서 분열한다. 그의 자아 찾기는 네 가지 모티프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거울, 신체기관, 섹스, 수학적 기호이다.
2)의 시에서 ‘거울 속의 자아’는 진정한 자아, 혹은 자아의 본질에 해당된다. 이상은 이런 자아, 본질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이유는 거울 속의 자아는 허위의 자아, 가상, 이미지,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자아 찾기는 허구와의 만남으로 끝나고, 산책자로서의 그의 시선, 보고 / 보여지는 시선은 분열되고 리얼리즘이 아니라 기호의 공간으로 넘어간다.
③ 절망에서 기호로
몽타쥬 기법 - 파편성 강조
(수염(鬚.鬚)- 그밖에 수염일수있는것들모두를이름)
1
눈이존재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처소는삼림인웃음이존재하였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유령은수족관이지만대단히유려하다
그것은음울하기도한것이다
-「수염」
유기적결합법칙파괴
초현실주의기법시도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또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
-「절벽」
무의식의드러남, 자동기술법, 성행위묘사, 반합리주의
(5) 초현실주의와 자동기술법
① 브르똥의 쉬르레알리즘 선언
다다의 일원이었던 브르똥은 다다와 결별하고 쉬르레알리즘이란 초현실주의를 선언하였다. 쉬르레알리즘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아폴리네르로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란 새로운 표현방법도 아니고 보다 순수한 것도 아니고 시의 형이상학도 아니다. 초현실주의는 정신 및 그것에 관련된 모든 것으로서의 전적인 해방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고칠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사상의 허약성을 그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이, 즉 기성 가치관들이 얼마나 흔들리는 기초이며 다져지지 않은 땅 위에 흔들리는 집을 짓고 있는가를 알려주려고 한다. 우리는 부정의 전문가다. 초현실주의는 시의 단순한 한 형식이 아니다. 초현실주의는 스스로의 방향으로 되돌아가려는 정신의 절규다.”
② 초현실주의와 자동기술법
무의식의 언어 질서
초현실주의는 자연에서 직접 얻어지는 이미지 대신에 잠재의식의 이미지를 비현실적(또는 초현실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각된 의식에서 보면 무질서하고 일종의 분열증을 일으켜 조리가 닿지 않지만 정신분석학상에서 보면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혁신의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동기술법에 의해 이미지의 아날로지(유사성)를 무시하는 듯이 보이지만 원래 이미지는 아날로지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게 마련이며 쉬르레알리즘이라 해서 이 일반적인 언어의 구성원칙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름도 다간 무렵 중앙 시장을 지나가는 그 여자 손님은
발톱으로 걷고 있었다
하늘엔 절망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 막대한 배암풀을 굴리고 있었다
핸드백 속에는 나의 꿈 그 신의 어버이만이 빨아들였다는
소금 프라스크가 들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개에게
마치 상태가 수증기처럼 퍼져 있었다
거기에 막 시비의 판단이 내려진 순간이었다
젊은 여인은 그런 시비의 판단으로 흉악하게 보이고 또
눈총을 받는 도리밖에 없었나 보다
나는 대체 조상 칼리움의 대사 부인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인가
- 브르똥「해바라기」
(6) 조향의 초현실주의와 데뻬이즈망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따리아>
<마주르카>
<다이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바다의 층계」
데뻬이즈망이란 자리바꿈, 곧 전위를 의미한다. 조향에 의하면 전위시키는 방법으로는 서로 관계없는 것들을 한데 갖다 붙이는 파피에 콜레, 이것이 발전된 콜라주, 살바돌 달리의 편집광적 기법 등이 있다. 이 시의 경우 ‘뽄뽄따리아’ ‘디이젤 엔진’ ‘들국화’ 같은 이미지들은 일상적 합리적 문맥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는 오브제가 된다. 그러나 너무 기계적이다.
 
홍문표 시창작 강의 노트 44
한국 모더니즘 시의 두 양상
홍문표
1.은유와 환유
1) 은유법의 기초
은유는 시(詩)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사법으로 가장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기법이다. 직유법이 “달처럼 예쁜 얼굴” 등 유사성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표현기법이라면 은유법은 유사성이 약하거나 없는 사물이나 개념을 대비시켜 동일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표현기법이다. 은유법은 표현적 유사성보다 '내면적 동질성'을 중시한다.
따라서 은유의 핵심은 등가성, 두 사물을 동일시하려는 시인의 상상력이 작용하며 여기엔 분열된 사물을 통합하려는 시 정신이 있다
하늘은 동전이다.
책은 칫솔이다.
눈발은 마음의 어두움을 가리는 하얀 커튼이다.
창문은 영혼의 통로다.
너는 나의 반쪽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2) 환유법의 기초
수사학에서 환유법은 대유법 중 하나로 대유법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이중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비유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에서 빵은 음식 전체를 그 일부인 빵으로 대신한 경우다.
“빵(식량, 먹거리 전체) 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빼앗긴 들(조국 강토 전체) 에도 봄은 오는 가”
한편 환유법은 부분이 아니라 특징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비유로 예를 들어 철수가 항상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할 때, "야, 저기 야구 모자 온다."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철수가 온다는 것인데 야구 모자로 철수 전체를 대신한 것이다. 이런 것을 환유법이라고 한다.
“펜(글)이 칼(무력)보다 강하다”
“요람(탄생)에서 무덤(죽음)까지”
“한 잔(술) 했다”
글이나 문장 또는 문학작품을 펜이라고 할 때 이것도 넓게는 은유 또는 상징적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은유와 근본 차이는 등가성이 아니라 인접성 또는 접촉성이다. 따라서 이는 사물을 더욱 분리하고 구체화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은유와 환유에 대한 문제는 단지 이런 수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 철학 언어학 시학의 근본적인 문제이고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의 특징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고 있다.
2. 은유와 환유의 시학적 이해
1) 야콥슨의 시와 산문과 은유와 환유
시인들이 시어를 선택하여 산문과 다른 낯설음을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야콥슨은 등가성(equivalence)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그는 시의 언어는 등가성의 규칙에 따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시어를 투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때 등가성이란 바로 은유적 방식을 말한다. 이에 비하여 일반 산문은 등가성의 원리를 선택의 축으로 하지만 결합의 경우는 접촉성에 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접촉성은 환유의 방식이 된다.
ㄱ) 일상어법
     
접촉성
     
접촉성
     
                         
 
     
식사
     
한다
 
 
는 +
   
 
을 +
 
먹는다
 
 
소인
     
끼니
     
때운다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ㄴ) 시의 어법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폭포
   
흐르는
 
퍼런
 
징소리
 
 
분수
처럼+
흩어지는
+
푸른
+
종소리
 
 
빗물
   
뿌려지는
 
시퍼런
 
새소리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등가성
 
                               
 
산문의 문장은 낱말과 낱말이 인접성에 의하여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이고 시의 문장은 낱말들이 등가성에 의하여 은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다. 시는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계열축의 언어를 선택의 축으로 하여 결합해 가는 언술이고, 산문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환유적 접촉으로 결합해 가는 언술이다.
2) 프로이드의 꿈과 은유와 환유
그런데 은유와 환유의 원리를 프로이드는 꿈에서 찾고 있다. 프로이드는 꿈을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이나 소망의 변장된 성취라고 했다. 말하자면 현실이 어떤 욕망을 직접 충족하지 못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억압을 느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꿈이라는승화 방식을 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꿈은 잠재적 꿈과 현시적(드러난) 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이 둘은 인과론적 관련성을 가지는 것으로 무의식적 꿈의 사고라는 것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꿈의 작업이라는 변형(위장) 과정을 거쳐서 의식계에 떠오른 것인데 우리가 잠을 깨고 기억하는 현시적 꿈이 그것이다. 왜 잠재적 꿈이 위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이는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계에 떠오르기에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굴 죽였으면 또는 누구와 잤으면 하는 부도덕한 무의식적 욕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도덕적인 의식이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그 욕망을 변형시켜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죽이고 싶다 자고 싶다는 것은 꿈 사고를 이루는 잠재적 꿈이고 위장하는 과정이 꿈 작업이며 실제로 우리가 꾸는 꿈이 현시적 꿈이된다. 꿈의 해석은 이 현시적 꿈을 재료로 해서 꿈 작업을 해명하고 잠재적 꿈을 알아내는 작업이다. 문학이나 시도 그러한 꿈의 원리와 같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상상이란 창조 과정을 거쳐 작품으로 내 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 작업에는 크게 압축방법과 전치(치환, 자리바꿈)방법이 있다. 압축이란 하나의 꿈이 잠재적인 꿈보다 내용이 적어지는 것으로 잠재적인 것이 생략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압축의 꿈 작업이 문학 창작에서는 은유의 문장으로 드러난다.
반면 전치는 실체를 위장하기 위해 일련의 연상을 통해 잠재적 꿈 사고의 요소들을 현시적 꿈의 요소들로 바꾸는 것이다. 예컨대 여인과 자고 싶다는 무의식은 여인과 관련 있는 핸드백이나 머플러 등을 만지는 꿈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의 작업이 문학에서는 환유가 된다.
3) 라캉의 무의식의 언어와 은유와 환유
한편 라캉은 인간이 태어나 사회 생활을 하는 과정을 프로이드의 심리학과 소쉬르 등의 언어학과 결합하여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 어떻게 의식이 형성 되는 가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삼 단계로 설명한다.
상상계를 거울단계라고 하는데 생후 6개월 내지 18개월 된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영상을 보고 거울 앞의 모습과 실제를 혼동한다. 어린이는 처음에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손이나 발 등이 자신이 볼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의 전부일 뿐이다. 그러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주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며 자기 몸 일부를 사랑하는 자기성애의 단계에서 몸 전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발전해간다. 상상계에서 어린이는 아직 자신과 타인의 구분하지 못한다. 어린이는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 우는데 이것이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가장 가깝게 지내는 어머니도 자신과 동일시한다. 상상계는 이러한 상상적 오인을 특징으로 하는데 상상계에서 형성되는 주체성은 결국 허구적일 뿐이다. 왜냐면 자신이 본 자신의 총체적인 모습은 거울을 통해 본 허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와 타자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보는 사고를 은유적 사고라고 한다. 자궁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 고향이나 엄마 품에 대한 그리움의 원천은 바로 나와 객체간의 구별이 없는 상상계의 무의식적 심리다. 이는 에덴에 대한 향수도 그렇다. 왜 시인은 나와 사물을 동일시하는 가 그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나와 사물을 동일시하고 은유가 나와 너를 동일시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린이는 '자아'라는 개념을 갖게 되면서 아이의 자아는 분열되고 만다. 분열된 자아 때문에 상상계에서 어린이는 혼란을 겪게 된다. 그리고 다음 단계인 상징계로 넘어간다.
상징계는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다. 자아가 형성될 수 없었던 상상계와는 달리 상징계에서는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로의 진입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 외에 아버지라는 금기를 받아들임으로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상징계로 진입한 어린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아버지의 법으로 전치 즉 바꾸게 된다. 그동안 어머니라는 존재는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정의 없이 그 존재를 이해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외부의 금기를 받아들이고 사회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외부 사회의 무엇을 받아들일 때는 그 사물의 이미지를 그 사물의 이름으로 전치하게 된다.
실재계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즉 상징적 질서바깥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과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데 라캉은 이 영역을 ‘실재계’라고 부른다. 특히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 사람들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위기를 겪은 다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소중한 대상을 다시 획득할 수 없는 일이다. 비유적으로 얘기하면 상상계(바라봄만 있는 세계)와 상징계(보여짐을 의식하는 세계)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것이 실재계다. 즉 나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킬 짝이라고 믿었다가(상상계), 포착하는 순간 허상이 되고(상징계), 이 때 상징계로 들어가며 제외된 부분이 잔여물(대용물)로 남아 다시 숭고한 대상이 생긴다(실재계). 라캉의 실재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균형을 탈선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균형을 진행시켜 주기도 한다. 1
한편 소쉬르 이론에서는 체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랑그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개의 주체사이의 관계에 대한 빠롤이라고 했다. 그런데 랑그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세계이다. 개인들이 말을 하기 위해선 그 규칙에 따라야 하고, 그 규칙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랑그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 규칙에 따라 의미를 말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의미나 판단 혹은 사고가 ‘주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언어 구조에 내장되어 있고, 거꾸로 ‘주체’들이 사고하고 판단하기 위해선 이 언어 구조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그 결과 ‘주체’는 더 이상 자기가 말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의 중심이 아닌 게 되며, 그 중심은 오히려 주체 외부에 있는 언어라는 객관적 구조에 있다는 게 분명해 진 셈이다. 이는 은유중심의 언어에서 환유중심의 언어로 전환함을 의미하며 주체에서 타자로 개인에서 사회로 통합에서 분열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의 전환을 주도하는 논리가 된다.
나’라는 주체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데카르트식 주체는 보기만 하는 주체, 즉 보여짐을 당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셈이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왜 위험한가. 그것은 아직도 거울단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신경증환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 가는 것, 대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대상에서 벗어나는 반복 없이 삶은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주체는 심한 경우 히틀러처럼 역사를 광기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3. 시에서 은유와 환유
시의 언어는 기호의 차원에서 두 가지 기본적인 수사학을 상정할 수 있다. 은유와 환유가 바로 그것이다. 은유는 기호가 기호 체계 너머의 세계나 관념과 같은 지시대상을 지칭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언어관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하나의 기호가 지칭하는 세계가 또 다른 기호일 뿐이라는 기호 내적인 언어관을 지향한다. 환유에 의해 형성되는 기호는 그러므로 기호 너머의 세계를 지칭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더니즘시의 기호관이 대표적인 환유적 기호관이다.
이에 비해 서정시의 기호는 그것 자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는 곧 은유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형성되는 동일성의 세계를 지향한다면 기호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기호와 지시대상 혹은 관념과의 사이에 형성되는 동일성을 상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시의 언어는 언어 기호의 차원을 넘어 사상이나 관념, 정서 혹은 절대의 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서정시가 근원 혹은 본질을 지향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서정시와 은유
서정시란 주체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다. 이는 보여줌의 시가 아니라 바라봄의 시다. 그리하여 세계를 자아화한 동일성의 세계로 만들어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다. 과거에는 이를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라 했다. 자기의 감정을 대상 속에 투입하여 나와 대상과의 감정적 교류를 시도하고 심적 연합을 이룩하려는 시적 태도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
동일성의 논리는 나와 너, 자아와 세계,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되는 화해의 시학이기도 하지만 고정된 사물의 의미가 새롭게 명명되고 전환되는 창조적 행위이기도 하다. 동일시는 내가 네가 되는 객체의 주체화,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는 사물의 변질, 정신이 물질이 되고 물질이 정신이 되는 전이와 창조가 자유롭게 실천되는 세계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나 의미가 해체되고, 새롭게 재구성되고 재창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에서 동일성의 논리는 바로 시학의 원리이기도 하고 시를 창작하는 근본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재는 근원적으로 개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개체적인 만큼 존재는 고립적이며 단독자이며 그래서 정서적으로 보면 고독하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들이 지니는 근원적인 불안의 속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보면 신앙적 구원 논리가 되고, 철학적으로는 초월의 논리가 되며, 시적으로는 상상을 통한 정서적 구원의 논리가 된다.
물결이 햇살을 마시면서 토한다
歲月에 결리는가 이따금 허릴 튼다
바람이 손 발을 씻고 내 머리에 닦는다
山이 거꾸로 매달린 채 빠져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내 얼굴도 걸려 있다
아무리 또 건져봐도 자꾸만 달아난다
때묻은 本性을 열심으로 헹궈냈다
썩어가는 俗性을 하나하나 씻어냈다
한웅큼 떠서 마셨다 고대로 하늘 맛이다
나도 자꾸 마시면서 토한다
하늘을 마시고 山을 마시고 나를 마신다
난 그만 저 江이 된다 기어이 江이 된다
- 유제하 「강」
2) 은유적 모더니즘시
1930년대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등을 우리는 모더니즘 시인 또는 주지주의 또는 이미지즘 시인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시라면 서정시와 달리 모두가 환유적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들 시에도 은유적인 요소가 강하다.
琉璃에 차고 슬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琉璃를 닥는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유리창의 차가우면서도 투명한 이미지 속에 자신의 정서를 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이미지를 통해 다른 그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이미지들이 재현적 차원의 세계를 담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를 통해 시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사용에서 은유적 관점의 언어관을 읽을 수 있다.
정지용의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그 너머에 항상 관념이나 정서의 덩어리들을 거느리고 나타나는 은유적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동일성을 상정하고 기호가 지시대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은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모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公主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이 시에서 서술 대상인 나비와 자아는 완전한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점은 수사학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기림은 이 시기의 시에 오면 이처럼 자아와 대상 사이의 일체감을 회복하면서 대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아와 대상 사이의 동일성의 세계를 회복하게 될 때, 대상에 대한 풍자나 조소는 사라지고, 자아와 대상 사이에서 달성되는 동일한 정서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나비의 정서는 자아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자아와 정서와 나비의 정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성 속에서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外人墓地의 어두은 수풀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나리고
空白한하늘에 걸녀있는 村落의時計가
여윈손길을 저어 열시를가르치면
날카로운 古塔같이 언덕우에소사있는
褪色한 聖敎堂의 집웅우에선
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종소래
- 김광균, 「외인촌」
김광균의 모더니즘적인 특성을 잘 드러내는 시 중의 하나인 이 시에서는 도시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통해 당대의 도시적 감성을 드러내는 이들 모더니스트들의 지향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진하게 묻어나는 감정의 밀도에서 김광균만의 독특한 한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김광균은 이러한 도시적 감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을 객관화된 시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주관적인 정서를 덧씌워 표현한다. ‘공백한 하늘’, ‘여윈 손길’ 등과 같은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시인이 지닌 고독과 비애의 정서가 강하게 묻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독이나 비애의 정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데 있다.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자아와 대상 사이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장르이다. 자아의 정서와 대상의 정서가 완전한 일체감을 이룸으로써 이 둘 사이의 구분이 전혀 불가능한 융화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서정시의 본질적인 요소라면, 김광균의 시에 나타나는 대상이나 이미지가 바로 이와 같은 서정시의 본질과 동일한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30년대 모더니즘시의 한 특성을 읽을 수 있다. 정지용이나 김기림의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김광균의 시에서도 은유적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다면, 30년대 모더니즘시 특히 영미 주지주의 계열의 모더니즘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서정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환유적 모더니즘시
같은 1930년대라도 이상의 경우는 은유라기보다 환유적임을 볼 수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이상<烏瞰圖 -시제15호> 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상상계에서는 거울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가 일치한다. 은유가 그렇고 서정시가 그렇다. 그런데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이는 상징계다. 바로 환유적 발상이다.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김춘수에 이르러 더욱 심화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어리디어린, 생물/무생물, 밝음/어두움, 구체/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통합되지 않고 분열된다.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는 의미의 고정화가 아니라 무한한 지연,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연기된다는 점에서 환유적이다.
잎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는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날고
- 오규원, 「후박나무 아래․1」전문
오규원의 시도 대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후박나무/어미 개/새끼/싸락눈/태반/선혈’ 등이 어미 개를 중심으로 한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사물들로서의 환유적 언어체계를 보여줄 때, 우리는 은유적 사유체계로부터 환유적 사유체계로 이행해 온 한국 현대시의 한 모습을 본다.
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황지우 “수은등 아래 벚꽃”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수은등 아래 벚꽃)이라 했을 때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건 "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거기 느닷없이 "죄"라는 추상어를 데려옴으로써 삶의 심각한 본질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시 벚꽃의 만개와 겹치면서 아름다움과 죄악을 현란하게 교직한다. 이처럼 그의 환유는 이 시의 중심축이 된다.
은유는 남자의 문자현상을 특징짓는 기법이라면 환유는 여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글쓰기는 만져지는 무엇을 비롯한 근접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욕망이 승한 특징을 보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보다 생생하고 풍성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된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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