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1-1
일상의 시학과 메타포의 시학(1)
홍문표
1. 들어가면서
(1) 몇 개의 이야기
개그;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 지식 중심 서열중심
개미와 베짱이, - 실용중심주의
풀라톤의 시인 추방설 - 내용중심주의
크라인 바움의 “죽은 시인의 사회”, 웰튼고교 키팅선생 토드 연극희망 부모 의사희망 자살 키팅 퇴출 학생들 오 캡틴 환송 –지식 실용중심 비판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인간 인공부화장 생산 매일 해피드럭, 존 부모의 자궁으로 탄생 반문명인 보호 구역 동물원 원숭이 취급, 죽으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다 술이다 시다 - 기술 진보 과학 중심 비판
별주부전, 용왕중병 토끼 간, 별주부 토생원 유혹 간이냐 용궁이냐- 물신주의 비판
(2) 세상과 시인
세상은 객관적인 것, 합리적인 것, 물질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전통적인 것, 상식적인 것, 바로 일상적인 것들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 이를 달리는 세속적이니 통속적이니 현실적이니 함, 이러한 세상에서 시인의 존재감, 시의 본질 시의 목적시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라신느의 “숨은신”, 신이 숨어 있는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모순된 현실에 타협하는 길, 현실과 대결하는 길, 현실을 도피하는 길, 현실을 초극하는 길,
시인의 길 – 현실을 뛰 넘는 것, 새 하늘 새 땅을 선취하는 것, 바로 현실을 초극하는 길,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시학의 원리가 웰렉과 워렌이 말한 “시는 리듬과 메타포다” metaphore(meta=over, phore=carryng) 넘다와 옮기다, 뛰어넘다, 초극하다, 따라서 시에서 모든 뛰어넘기의 논리가 바로 메타포의 시학이다.
2. 뛰어넘기(메타포) 시학 정리
(1) 객관에서 주관으로
㉠ 국화 : 명. 식물. 엉거시과에 속하는 식물. 줄기는 나무질화 하며 잎은 대개가 깊이 찢어지고 품종이 다양함. 대국. 중국. 소국으로 나눠지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하국. 추국. 동국으로 나누기도 함.
- 현문사 「한국어 대사전」에서
㉡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국화 옆에서」에서
㉠의 문장 :국화에 대한 객관적, 사전적, 학술적 서술, 국화의 생태, 종류, 특징들을 객관적으로 인식, 그러나 생명력 감동이 없는 문장
㉡의 문장 : 국화에 대한 시인 자신의 주관적 견해, 비과학적 서술, 국화꽃과 소쩍새, 국화와 누님, 과학적으로 전혀 무관, 그런데 생명력, 감동, 풍요로움이 있음
객관적 세계 인식에서는 인간과 물질, 정서와 사상, 사물과 사물 모두가 개별화 고립화 되어 있다. 여기에 객관적 세계의 소외가 있고, 고독이란 비극이 있다. 따라서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뛰어 넘기는 바로 소외와 고독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식이다.
(2) 이성에서 감성으로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성(logos)과 감성(pathos)을 공유한 존재다. 그런데도 문명사는 이성, 지혜, 지식, 합리성, 과학성의 우월성만을 강조, 이성만능주의, “아는 것이 힘이다” 감성적 기능을 경시
최근의 뇌과학- 좌뇌-이성적 기능, 우뇌-감성적 기능. 두뇌의 좌측을 상한 사람은 이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우측을 상한 사람은 감성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좌뇌를 상하면 수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뇌를 상하면 눈물이나 웃음을 모르는 목석같은 인간이 된다.
최근의 천재교육- 우뇌를 키워라, 지능지수(IQ)보다 감성지수(EQ)를 높이는 것
신은 우리에게 좌뇌와 우뇌를 균형있게 개발하여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삶을 향유하도록 축복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좌뇌만 개발하여 이성적 사고, 이성의 문화에만 치중한 정신의 반신불수, 불구자의 삶을 살게 된다.
하버마스의 도구적 이성과 이성의 타락 - 지식, 기술, 이권만을 중시하는 이성중심주의가 인간의 물질적, 기술적, 지적, 권력 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적 이성으로만 수행되어질 때, 세상은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으로 타락됨. 여기에 현대인의 비극이 있음. 오늘의 진짜 대도는 지식 기술이 우세한 고학력 계층의 정치 경제범, 여기에 이성을 뛰어넘어 감성의 메타포를 모색해야하는 당위가 있음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얼굴이 보인다.
내게로 불 밝혀 가야 하는
땅이 보인다.
세상을 다 받아들고도 비어 있는 손
잠들지 못하는 나라
산맥이 일어서고 골짜기가 깊다.
강물이 꿈을 꾼다. 바다가 깨어 있다.
미래의 내 음성이 들리는 곳
손바닥 깊이 들어가면
고요하다.
이 고요한 길속에
길이 엇갈려져 끝이 없다.
혼돈과 창조의 거센 바람소리
우주의 숨소리
밤하늘 별의 운행이 화안히 비친다.
- 이성선「손의 명상」에서
(3) 추상적에서 구체적으로
감정은 섬세하고 예민한 것이어서 한 가지 대상에 대해서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다르다. 그러기에 감정은 가장 주관적이며 개별적인 것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실 주관적이란 말은 사물을 공통된 것으로 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특성을 구별하여 보는 것이며 이는 개별적인 존재성을 살리는 시적 리얼리티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라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 김수영 「사랑」에서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 김소월 「금잔디」
(4) 과학적 진실에서 시적 진실로
시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이라면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 과학적 진리에 대한 우상- 과학만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에 이성중심의 인간들은 과학에만 진리가 있다는 우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과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진리와 패러다임- 최근에는 같은 과학이라도 관점이나 구성방식, 해석과정에 따라 그 진실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쿤은 어떤 사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전체적 관점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하였다. 가장 분명한 예로 물리학에서는 전기를 파장(波長)으로 보지만 화학에서는 미립자(微粒子)로 보는 것이다. 즉 어떤 패러다임이냐에 따라 과학에서조차 진실은 천의 얼굴을 갖게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패러다임조차 애당초 존재한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체계라는 것이다.
시적 진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진리에 대한 겸허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즉 과학적 진실은 과학적 패러다임에 따른 것이고, 종교적 진실은 종교적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며, 시적 진실은 시적 패러다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진실만이 진실이 아니라 종교적 진실도, 시적 진실도 각각 그들 나름의 진실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5) 약물치료에서 시 치료로
일상을 뛰어넘는 문학의 최대 기능은 망과 정서의 해방감. 행복감, 만족감, 충만함을 주는 것인데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catharsise)라고 했다.
인간은 어떠한 자극을 받는가에 따라 신체의 각 기관이 다양하게 반응하고 이에 따라 슬픔, 기쁨, 웃음, 노여움, 두려움, 놀라움, 그리움, 사랑스러움 등의 정서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시끄러운 소리는 불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는 소화기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짜증스런 기분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경쾌한 리듬은 소화기능을 돕고, 즐겁고 유쾌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바로 좋은 시는 그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 카타르시스는 바로 스트레스 해소, 정신 정서 심리적 힐링, 동시에 육체적 건강에 지대한 효과 - 시 치료, 문학치료 예술치료(대체의학)의 근거가 됨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가 되어 바람에 흔들리거나
양지바른 산자락에 앉아
시나 몇 줄 쓰고 싶다.
청청한 하늘 바라보면서
새털구름 한 자락 잘라
백두산에는 바늘꽃 심고
한라산에는 미나리아재비
밤에는 초롱한 별빛을 세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나 부르고 싶다.
가지는 꺾이어도 좋다.
허리는 부러져도 좋다.
잎들이 떨어져
너에게 짓밟혀도 좋다.
봄이면 속살이 돋고
여름이면 또 꽃이 피는 것을
꺾어지면 어떠리
부러지면 어떠리
짓밟히면 어떠리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1-2
일상의 시학과 메타포의 시학(2)
홍문표
(6) 현실에서 상상으로
시, 또는 문학 그리고 예술은 어떤 존재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telling)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방법으로 감동하게 하는 세계라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구체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구체적이란 어떤 존재를 감각적으로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showing) 방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예술의 행위는 바로 어떤 생각이나 심정을 구체적인 어떤 사물이나 사건으로 예를 들어 보여 주는 작업이 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여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원된 사물을 이미지(image)라 하고 이러한 사고를 상상(imagination)이라 한다.
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꺼야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주는데
나무들에게도 정말은
눈이 있을 꺼야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표현-“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 주는데” - 일상의 시학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표현-“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 거야” “나무들에게도 눈이 있을 거야” -메타포 시학, 이처럼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이 없다면 미래도 없고, 초월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삶의 확장도 없다. 그것은 시만이 아니라 인생도 그렇다.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 전봉건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7) 낯익음에서 낯설음으로
① 낯익음의 언어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쉬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 반복적으로,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공식적인 언어는 이해는 있으나 감동이 없다. 바닷가의 파도소리, 친숙화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되었을 때 조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탈언어화 상태가 된다. 지각적인 의식의 언어가 생략될 때 남는 것은 기호뿐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호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이고 산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 존재하는 삶이란 이미 창조적 인간이 아니고 기계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비인간화의 무의미한 세계일뿐이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
-낯익음의 일상의 시
② 낯설음의 언어
시어의 참 기능 - 따라서 예술가가 대항하고 투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일상과 습관과 안일과 매너리즘의 권태다. 대상을 습관적인 문맥에서 뜯어내고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과 함께 묶음으로써 시인은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기계적 반응(stock response)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서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texture)을 뛰어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바로 일상적인 낯익음의 용법의 일상적인 시학을 을 배제하고 보다 낯선 뛰어넘음의 메타포 시학 통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적 자유이고 해방이다.
당신은 짐승, 별, 내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 됩니다
당신의 살갗 밑으로 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 이성복 「당신은 짐승, 별」
(8) 워킹(walking)에서 땐싱(dancing)으로
시인 발레리는 산문과 시를 구분하면서 산문은 도보(walking)요 시는 무보(dancing)라고 했다. 도보 즉 걷기는 사건이나 행동의 시작이 있고 중간 과정이 있고 마침이 있다. 그러나 무보 즉 춤추기는 제자리에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시가 리듬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시에 반복적인 리듬이나 메타포가 없다면 그것은 일상의 시학
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네가 있고
너는 내 욕망의 무지개가 되어
내 손에 가득한 장미가 되어
흐느적거리는 육질의 껍질을 벗고
날마다 비상하는 오월이 되어
육자배기로 돌아가는 자유가 되어
현재로 자족하는 서정시가 되어
아스라이 펄럭이는 깃발이 되어
홍문표 「늘 푸른 강물이듯이」에서
(9) 인접성에서 등가성으로
시인들이 시어를 선택하여 산문과 다른 낯설음을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야콥슨은 등가성(equivalence)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그는 시의 언어는 등가성의 규칙에 따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시어를 투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하여 일반 산문은 등가성의 원리를 선택의 축으로 하지만 결합의 경우는 접촉성에 의한다는 것이다.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의 「외인촌」에서
1) 일상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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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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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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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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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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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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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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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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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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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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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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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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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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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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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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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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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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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의 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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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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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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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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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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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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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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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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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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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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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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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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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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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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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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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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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려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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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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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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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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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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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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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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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의 문장은 낱말과 낱말이 인접성에 의하여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이고 시의 문장은 낱말들이 등가성에 의하여 은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다. 따라서 웰렉이 현대시는 은유(metaphor)다 라고 한 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시의 원리가 리듬이라는 것도 사실은 등가성의 원리에 있다. 어휘반복, 구절반복, 이미지반복, 의미 반복 등 모든 반복의 규칙은 바로 등가성의 원리와 일치하는 논리다. 시는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계열축의 언어를 선택의 축으로 하여 결합해 가는 언술이고, 산문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환유적 접촉으로 결합해 가는 언술이다.
(10) 분열에서 통합으로
메타포란 meta-over와 phore-carrying, 기존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기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옮긴다는 말이 또 다른 분열과 혼란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시에서 메타포의 본질은 분열에서 통힙이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 “인생은 나그네길”,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그대는 보름달” 등에서 마음과 호수, 인생과 나그네, 하나님과 목자, 그대와 보름달은 서로를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서로를 동일시하여 분열된 상태를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 과학적 사고는 사물을 분석하고 구별하여 너와 나를 분리하는 것이고 문명어 또한 모든 사물을 기호화, 상징화하여 모든 존재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상실되고. 주체와 타자의 분리,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조장했다. 메타포는 이처럼 신과 인간과 자연이 분열되고 소외된 정신적 절망에서 너와 나 주체와 타자의 화해와 통합을 통한 에덴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지상의 종교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어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 박두진의 「꽃」에서
(11)통합에서 구원으로
메타포는 분열에서 통합이라고 했다. 이성과 과학은 세상을 분열시키지만 시의 상상과 메타포는 분열된 것들을 감성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다. 통합은 대결이 아니라 화해요 사랑이다. 그런데 분열된 것을 통합한다는 시정신은 좋으나 솔직히 “내 마음은 호수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등의 논리가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된다. 마음과 호수가 동일할 수 없으며, 죽음이 바위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상상과 메타포가 시적 방법이라 해도 이성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휠라이트는 시를 역설(paradox)이라했다. 여기서도 prra는 ‘넘어서다’이고 doxa는 ‘이견, 다르다’는 뜻이다. 시는 현실을 넘어선 다른 의견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실로 믿는 것, 거기에 시적 구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파라독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설을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기독교적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학에서도 상상이니 메타포니 하는 사실을 뛰어넘는 이 모든 역설들을 단지 기교로 볼 것인가. 그것은 분열에서 통합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러한 통합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단계에 이를 때, 진정 시적으로 구원된 경지라 하겠다.
시인은 시를 왜 쓰는가. 취미인가, 심심풀이인가, 말장난인가, 분열된 세계를 사랑과 열정으로 통합하여 화해된 세상 모두가 하나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것인가. 메타포의 시학은 바로 그러한 세상을 꿈꾸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지상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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