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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끝
2019년 12월 21일 16시 42분  조회:831  추천:0  작성자: 강려
홍문표시창작강의 노트 53-1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1)
홍문표
 
1. 문학의 길, 인간의 길
 
이 거대한 우주, 이 영원한 우주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야 무신론자라면 인간이란 지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의 하나로 자연환경 속에서 어떤 단백질 인자가 무수히 많은 진화와 변이를 거쳐 고등생물로 진화한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생명체들 중에 왜 인간만이 모든 만물을 대자적으로 사고하고 의식하는 존재가 되어 만물의 영장이 되었을까. 그것도 특별한 진화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현생 인류의 전 단계는 무엇인가, 원숭이인가, 침팬지인가. 만일 원숭이나 침팬지가 인류의 전 단계라면 왜 아직도 원숭이와 침팬지가 현존하는가, 그들은 아직 진화가 덜 된 것들인가.
이렇게 진화론과 창조론을 거론하는 것은 우리 인간을 진화론으로 볼 것인가. 창조론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인간의 존재이유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지금도 저 열대의 밀림에서 서식하는 침팬지가 우리 할아버지가 되고 인간이 더 진화하면 우리도 하늘을 나는 조류가 된다는 논리가 되는데, 만일 그런 논리에 동의한다면 우리 인간은 아직도 진화과정에 있는 동물의 하나일 뿐이며 그러기에 인간의 존엄이나 영혼의 소중함이 무시되는 유물론의 메마른 인생관만 남게 된다.
그러나 모든 생명들이 각각의 유전자와 각각의 생존질서를 가지고 탄생한 것이라면 여기엔 조물주의 창조적 계획과 목적을 생각해야 하고, 특히 모든 생명체들 중에 유독 인류만이 최고의 의식적 존재이며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이 지구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별한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왜 우리 인간은 수백만 생명체 중에서 의식이 있고, 정신이 있고, 영혼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졌을까. 그냥 우연히 운 좋게 진화되어 만들어진 존재라면 우리도 개나 돼지처럼 잠시 세상에서 약육강식의 본능으로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지만 모든 만물을 판단하고 경영하고, 지배할 수 있는 신의 속성을 가지고 창조된 영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라면 영장으로서의 역할, 사고하고, 모방하고, 창조하고, 변형할 수 있는 지적 존재로서의 역할, 그 존재 이유와 삶의 방법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사유와 행동이 요구된다. 그리고 창조적인 인간, 영장으로서의 인간, 영적존재로서의 인간, 로고스(loges)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면 마땅히 인간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그 해답을 모색할 것이며, 그러한 존재 인식의 바탕에서 독특한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 것이고, 문학도 해야 할 것이고 역사를 창조하고 기록해 가야 할 것이다.
만물의 영장을 자인 한다면 인간의 첫 번째 작업은 마땅히 인간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인간의 연원, 인간의 출발, 인간의 탄생에 관한 문제를 거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출발지가 없다면 과정도 없고 종착지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성이니 정체성이니 하는 모든 존재들의 실체는 어떤 원인과 결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한다. 의식이 없는 목석이나 동물들은 이런 문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만은 정신과 영혼과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존재의 근원과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상의 모든 민족들의 그 연원이나 탄생에 대한 생각들을 보면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초자연적인 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히브리민족들은 야웨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고, 인간도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히브리와 대조를 이루는 인본주의 그리스 민족도 제우스 신으로부터 인류가 탄생되었고 로마에서는 주피터, 중국에서는 삼황이. 인도에서는 브라만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환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더러는 신화니 비과학이니 허구니 하지만 한국인에게 천손 사상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이고 정신이고, 믿음이고, 그러기에 그것은 진실이다. 이처럼 모든 인류의 출발은 초월적인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목석이나 짐승과는 전혀 다른 정신과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다. 정말 신의 형상을 입은 영적인 존재다. 그러기에 인간의 기원을 자연이나 아메바나 침팬지에서 찾을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류의 출발은 이처럼 하늘로부터 천손으로, 로고스로, 신령한 존재로 시작했는데 인류의 역사과정과 현재는 매우 비관적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입고 창조된 인간이 득죄하여 실락원의 저주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지상의 형극을 걷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비관적 인생관은 기독교의 교리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그렇다. 불교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느 것도 고정적인 것이 없고 그러기에 실상도 없는 것인데 그런데도 인간은 그런 가변적인 사바세계에 집착하여 허망한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현실주의적인 공자의 유교적 사고에서도 도(道)가 상실된 현실을 개탄하면서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독백을 하게 된다. 이점에 대하여 혹자는 또 이들을 종교적 망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냉철한 이성적 사유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놀랍게도 철학자들도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 키엘케고르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안한 존재라 했다. 순진무구한 경우는 그 무지가 불안한 것이고, 삶은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의 불안이 있고, 득죄한 이후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형별, 그 유한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했다. 인간이 불안한 존재이기에 결국 절망적인 존재라는 인식은 무신론의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싸르트르는 인간은 목석이나 동물과 달리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하는 대자적 존재인 바 그래서 오히려 인간들은 늘 결핍을 느끼게 되고 걸신들린 아귀처럼 그 결핍을 채우고자 몸부림치는데 문제는 아무리 결핍의 항아리에 물을 부어도 밑 빠진 항아리는 채울 수가 없으며 그러다가 마침내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허무를 세계내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도 유한한 지상의 소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상황의 존재라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도 프로이드는 인간을 욕망의 존재라 하였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욕구불만과 갈등을 느끼게 되는데 욕구를 채우면 또 다른 욕구가 분출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란 만족과 불만의 악순환을 거듭하는 불만의 존재라 하였다.
그렇다면 문학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그동안 문학에 대한 정의를 보면 문학이란 인간의 사상 감정을 미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며 이를 통해 교훈과 쾌락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공통된 문학관이었다. 말하자면 감동적인 문학형식을 통해 기쁨도 주고 깨달음도 준다는 것이 과거의 문학관이다. 왜 인간에게 교훈과 쾌락이 필요했을까 그것을 역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인간이 무지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된다. 인간이 완전하고 행복했다면 교훈과 쾌락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문학에 대한 정의나 목적이 그러한 위안이나 교훈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문제해결의 문학, 치유의 문학, 구원의 문학이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왜 현대에 와서는 치유와 구원을 문학의 기능과 역할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는가. 그것은 인간이 과거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와 갈등에 빠져 있고, 중병에 걸려 있고, 죽을 지경의 절망에 있거나 뭔가를 상실했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신적인 형상을 입고, 탄생한 그 화려한 출발과는 다르게 그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종교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이나 모두가 자아의 상실, 주체와 타자의 분리, 또는 본질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과 좌절, 그 허무와 불안을 인간의 실상, 즉 실존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영혼을 가진 인간의 당면 문제가 되고 문학의 과제가 되고 그러기에 종교나 문학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인간의 존재이유가 되고 문학의 존재이유가 되고 최고의 가치가 되고 최고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물에 빠진 자, 잃어버린 자, 정상이 아닌 자, 얽매인 자, 배고픈 자, 그래서 마침내 고독과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된 자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물속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이며,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며,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결핍을 채우는 것이다. 이를 포괄적으로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종교나 문학이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구원이 그 핵심이 된다.
그런데 종교가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학에도 구원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변별성이 있는가. 그리고 문학에서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가 창작하고 있는 내 작품들이 또는 우리들의 작품들이 정말 구원에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유행 따라 물결 따라 덩달아 춤이나 추는 맹목의 손짓인가 스스로의 문학에 질문하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문학적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그렇다면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에는 어떤 과정이 있는가. 이 점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는데 이에 대하여 일찍이 키엘케고르는 구원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한 바가 있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 그것인데 이는 인류가 추구하는 예술, 도덕, 종교와 관련한 문화적 구원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과 이성을 통한 인간 구원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라는 점에서 문학적 구원을 검토해보고자 하는 본 주제와 밀접한 것으로 사료되기에 이를 함께 검토하면서, 정말 문학을 하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과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도 문학적 구원이란 주제에 동참할 것인가 그 길을 물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미적 실존과 감성의 문학
키엘케고르는 그의 저서 『불안의 개념』에서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인간만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인간은 불안에서 피할 수도, 그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절망이다. 그래서 불안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불안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하고 슬픈 존재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면 이를 극복 해야할 책임과 사명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근원적인 불안과 절망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고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결국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불가능과 가능, 구속과 자유, 죽음과 영생, 인간과 하나님, 지상과 천상이 분리된 단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상태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그러한 일치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인간이고 실존이고 근원적인 불안과 고독인 이유다. 따라서 인간의 불안과 절망, 그 원죄의 천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지만 불행하게도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력이 아닌, 타력, 어떤 절대자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신이 인간에게로 다가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이성적인 역설이기 때문에 과학과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인간들로서는 그러한 기적을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 시도 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가 미적 실존의 단계다.
인간이 불안과 절망의 상태에서 시도할 수 있는 첫 단계는 미적 실존 또는 감성적 실존의 방식이다. 이는 가장 기초적이고 직접적이며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생활태도다. 사실 개개인의 현존재에 대한 출발점은 직접성이나 감성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미적 실존의 생활은 오직 그날 그날의 현실적인 생활에 만족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얻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든 것은 내 자신의 힘으로 체험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고통 속에서 평화와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활방식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감성과 관능에 따른 만족이나 향수의 입장에 서는 것이 미적 실존이며, 또한 심미적 실존의 인간관이다. 비근한 예이지만 인간이 불안할 때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술에 취하거나 심지어는 마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자극을 통해 이를 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더욱 악화 시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보다 고상하게 승화시키는 방법으로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을 통한 초월의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미적 실존의 생활은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만을 주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향락과 쾌락을 추구할 뿐이다. 키엘케고르는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미적 실존의 결과는 언제나 무라고 하였으며 그러기에 미적인 생활에서는 아무것도 얻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감각적인 탐미를 통하여 현실을 도피하려 하지만 결국은 우수와 불안, 그리고 권태로 끝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실존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쾌락의 윤작(rotation of crops)을 되풀이 한다. 쾌락의 윤작이란 끝없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는 것, 즉 심미적으로나 또는 감각적으로 항상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전환 없이는 신선한 자극이 없고, 신선한 자극 없이는 그 생활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악순환이다. 이는 술이 술을 부르고, 죄가 죄를 부르고, 미가 또 다른 미를 부르는 탐미적이고 악마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탐미적 실존의 대표적인 인물이 돈 판이다. 그는 수많은 여성을 단지 감성적 쾌락으로만 사랑할 뿐이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부터 육체의 자유를 선언했을지라도 돈 판은 계속 불안에 쫓긴다. 아무리 새로운 쾌락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쾌락의 순간이 끝 날 때마다 불안과 우수 그리고 권태는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탐미적 결과는 마침내 죽음을 수반한다. 따라서 심미적 실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쾌락의 생활은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은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정신 또는 영적인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심미적 관심의 대표적 문화양식이 바로 문학예술이다. 특히 문학의 경우 낭만주의나 예술주의 또는 실험적인 형식주의들은 모두 감각이나 정서를 통한 미적 실존의 구체적인 표현행위가 된다. 그런데 우리 문학사에서 보더라도 불안 심리가 극도로 고조되었던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보면 국권상실과 자아상실이라는 이중의 불안에서 이를 벗어나고자 찾은 곳은 오히려 어둡고 축축한 현실 도피적인 공간이었다.
저녁의 피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없는 -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 이상화 「말세의 희탄」에서
이러한 병적인 감성의 시는 이상화뿐만 아니라 당시 황석우의 「태양의 침묵」, 홍사용의 「눈물의 왕」, 오상순의 「허무혼의 선언」, 박영희의 「일광으로 짠 병실」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이 절망과 불안의 심리를 벗어나기 위하여 모색한 탐미적 정서는 오히려 더욱 병적 정서에 침잠하는 퇴행적 자학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자조와 퇴행이 일시적인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비판에 부닥치게 된다.
미적 실존의 허구는 예술주의 또는 예술지상주의 에서도 볼 수 있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나 「광화사」같은 소설을 보면「광염소나타」에서는 미적 욕망과 이상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주인공인 천재음악가가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하여 방화와 살인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광화사」에서는 주인공 화가가 눈먼 소녀를 범하고 죽이는 사건으로 미를 창조한다는 내용인데 모두가 미를 추구하지만 결과는 영혼의 공허함과 황폐함을 보일 뿐이다.
한편 문학에서 미적인 관심은 특히 형식 창조라는 관점에서 끝없는 모색을 실험하고 있는데 새로운 형식의 실험, 낯설게 만들기, 기존 형식의 해체와 창조 등의 구호를 내걸고 도전하는 모든 형식주의들이 그것이다. 최근에 볼 수 있는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모더니즘, 이미지즘, 포멀리즘, 해체시, 메타시, 키치시, 하이퍼시 등 시대마다 새로운 구호를 내걸고 도전하는 실험시들의 반란은 모두 새로운 형식의 도전이며 미적 감성의 욕망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미적 탐구들이 분명 일시적으로는 정서적 충격이나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영원한 행복감이나 영혼까지 구원을 보장하는 궁극적인 해답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상의 「오감도」가 당대 현실에서 정서적 미학적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부정과 해체라는 돌발적인 용기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오감도가 인간의 영혼까지 구제하는 영원한 깃발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춘수의 무의미 시 가령 「눈물」같은 시가 독자들에게 일시적인 당혹감을 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형식 실험의 시들이 불안과 절망과 상실감의 현대인을 구제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해체시나 하이퍼시도 그렇다. 그것이 시적인 미학의 탐구는 분명하지만 그래서 일시적으로 신선한 감성의 충격을 주고는 있지만 그러한 당혹감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시적 감동이나 충동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또는 영혼의 구원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홍문표 시 창작 강의 노트 53-2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2)
홍문표
3. 윤리적 실존과 이성의 문학
그래서 지쳐버린 미적 실존 즉 감성적인 문학은 드디어 자신의 생활이 외면적, 육체적, 감각적, 개인적, 쾌락의 노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참된 자기의 모습을 찾기 위한 엄숙한 자각과 결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감성적인 것에서 이성적인 것으로 미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실존으로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실존의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실존을 미적 실존의 모순성을 의식하고 양심의 입장에 서는 실존이라고 했다. 즉 윤리적 실존의 인간은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 시간과 영원과의 대립에서 유래하는 자기모순의 사실에 직면하여 불안이나 절망을 회피함 없이, 그것을 사실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통합하려고 결의하는 실존의 모습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은 모순된 현실에 직면하여 엄숙한 양심을 가지고 보편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유한성인 자기 속에 실현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자각하여 그것을 결단하는 실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실존의 생활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같은 윤리적 실존의 생활태도에는 항상 양심과 엄숙 그리고 사회적 의무만이 요구된다. 양심의 입장에 서서 자기의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윤리적 실존은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미적 실존을 영위하는 자들을, 꿀을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이동해 가는 나비에 비할 수 있다면 윤리적 실존을 영위하는 자들은 자신의 임무에 절대 충직한 꿀벌에 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미적 실존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표명하게 된다. 미적 실존에서는 결혼을 연애의 무덤으로 간주하므로 그것을 회피하고 계속 새로운 사랑을 찾아 유랑하는 반면 윤리적 실존은 결혼을 신이 제정한 성스러운 제도로 확신하고 평생토록 일편단심 충절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윤리적 실존의 단계에 이른 자들은 어디까지나 칸트가 말했던 실천 이성의 지상명령, 즉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그 어떤 형편에서도 내적 균형을 잃지 않고 합리적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은 지조와 정직, 성실과 충절을 그 무엇보다 중시한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에서도 인간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 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도덕률마저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유한성, 즉 자기 자신이 너무 무력하며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윤리적이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가 바라다보는 도덕적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현실의 자기가 너무나 추악하고 불순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키엘케고르에 의하면 윤리적 실존은 이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이 거짓된 진지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윤리적 행동과 수고는 자기도취, 자기 신격화의 거짓된 진지성으로 끝나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자기를 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실존 속에서는 아무리 성자 같은 구도자라 할지라도 불안과 절망이 깃들어 있으며, 자기의 내면성에 깃든 불안과 부자유를 아무리 윤리적으로 포장해도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문학에서도 감성의 문학이 윤리적인 문학으로 전환하였는데 그것은 먼저 중세 문학이나 고전주의 문학에서 볼 수 있다. 중세에는 금욕주의적인 종교와 철학이 역사를 주도하면서 문학의 주제는 권선징악이라는 율법적인 윤리가 주도하게 되었다. 감성은 늘 죄악시되었고, 윤리와 도덕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 설은 관념이나, 이성 또는 도덕이나 철학이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그렇다. 특히 중국의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라하여 문학에 사특한 요소를 배제하고 오직 문학이란 도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했다. 이러한 도덕주의, 윤리주의 환경에서는 문학도 인간도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감성의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 근대 낭만주의였지만 지나친 감정의 과잉과 비현실적 이상의 추구는 다시 이성의 회복, 현실의 회복, 진실의 회복이란 사실주의 문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는 환상적인 미래보다 당장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는 이성의 윤리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1920년대 이 땅에서 제기된 리얼리즘의 양심은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의 인식이었다.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모두 뒈져버려라!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라고 했다. 최서해도 「기아와 살육」에서 “모두 죽어라! 이놈의 세상을 부수라! 복마전 같은 이놈의 세상을 부수라, 모두 죽어라!” 이러한 개인적 분노는 마침내 집단적 분노로 발전한다. 원래 양심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고 집단적인 공동체적 삶의 율법이다. 그래서 이성과 양심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실주의는 개인적인 저항에서 집단적인 저항, 계급적인 저항으로 발전한다. 이 땅에 계급적 정의와 양심이 등장한 것은 1925년대부터다. 그러나 계급주의 윤리는 결과적으로 조국 분단과 동족 상생의 비극적 역사에 기여했고, 아직도 민족 분열과 대립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으며, 그토록 빈궁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내세운 리얼리즘의 진보적 윤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빈부의 문제나, 사회적 모순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소란한 북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1960연대 이후 참여문학이나 민중문학의 그 치열했던 양심과 정의와 민주화와 평등의 윤리도 소리만 요란했을 뿐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불신과 갈등만 커져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인간 사회란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윤리가 모든 것을 해결할 만큼 도덕적으로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데서 미적 실존은 물론 윤리적 실존의 절망이 있는 것이다.
4. 종교적 실존과 인간의 구원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과 절망, 유한한 인생의 한계성에 대한 절망과 좌절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래서 감성적 실존, 즉 미적 실존에 투신해 보지만 감성은 더욱 감성을 요구하고, 쾌락은 더욱 쾌락을 요구하고. 미적인 창조적 욕망은 더욱 미적인 욕망을 요구하는 악순환 속에서 절망은 더욱 깊어만 간다. 우리는 감성적이고 미적인 문학을 통하여 낭만주의, 예술주의, 형식주의,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해체시, 낯설음의 시학, 메타시, 아방가르드, 무의미 시, 하이퍼 시 등 무수히 많은 미적 상상력을 탐닉하였지만 영혼은 여전히 공허할 뿐이며 돌아보면 그저 자아도취라는 허구의 환상에서 맴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집단, 주관보다는 객관, 감성보다는 이성, 환상보다는 현실에서 진리와 양심과 정의와 평등의 윤리와 도덕을 앞세워 투쟁을 하였다. 리얼리즘, 내추럴리즘, 공리주의, 계몽주의, 반영론, 컴뮤니즘, 소시얼리얼리즘, 민족주의, 민중주의, 계급주의, 역사주의라는 갖가지 진실과 정의와 평등과 총체성의 수식어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의 깃발을 흔들며 가열차게 윤리적 투쟁을 전개했지만 여기서도 분열과 대립과 갈등만 더욱 조장되었을 뿐 현실은 여전히 모순과 대립의 이전투구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미적 실존이나 감성적 문학, 윤리적 실존이나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문학, 형식이냐 내용이냐, 순수냐 참여냐 하는 이원론적 흑백논리 등 불완전하고 유한한 이들 인간의 휴머니즘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구원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구원이나 영원한 행복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밖의 존재, 인간보다는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만이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전지전능한 신 앞에 참회하고 자비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키엘케고르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전능한 존재이고 무한한 존재이고, 그러면서도 우주만물을 창조한 존재이고, 지금도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말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불가능한 존재가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성이나 가능성은 오직 초월자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무한성과 가능성을 믿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인간의 유한성과 불가능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종교요, 그것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휠라이트는 인간의 사고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수평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 사고다. 수평적 사고란 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 사고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이나 감성을 앞세운 모든 인본주의적 문명이 바로 수평적 사고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이성은 마침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헤겔은 말했지만 우주의 시작과 끝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수평적 사고로는 측정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도 그렇다. 그런데도 불가사의한 우주는 여전히 건재하고, 죽음의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를 엄습한다. 그러니 우주의 시간이나 공간, 사후의 시간이나 공간은 영원히 초월의 영역이고 신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 영역과 신성의 영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속의 영역은 감성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이지만 원천적으로 불완전한 영역이기에 결국은 불안하고 허무하며 그리하여 마침내는 절망하고 죽어야 하는 원죄의 공간이다. 그러나 신성의 공간은 모든 것이 가능한 무한한 공간이다. 신성의 공간은 죽음이니, 절망이니 하는 세속적 사고의 영역을 벗어난 절대 자유와 행복이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사고의 뒤뜰에는 천국이 있고, 낙원이 있고 극락이 있게 된다. 따라서 세속의 영혼들은 바로 이러한 신성의 세계로 가는 것이 절체절명의 소망이 된다. 그러나 수평적 사고의 원죄에 갇혀 있는 세속의 인간들로서는 신이 거처하는 신성의 세계로 갈 수 없는 단절이 있다. 그렇다면 이 단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수평적 사고가 아니라 오직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사고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수직적 사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상승의 방법이다. 따라서 종교에는 인간이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는 종교와 절대자가 인간에게 다가와 역사하고 구속하는 종교가 있게 된다. 고행과 참선과 명상과 수도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교이고 신이 하강하여 인간에게 섭리한다는 종교는 기독교가 그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르는 인위적인 종교를 보자. 키엘케고르는 이러한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생활의 연장 위에 있는 실존으로 보며 자기 스스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닿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인위적인 종교라고 했다. 이것은 신적인 것들이 모든 인간에게 현존하며,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종교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실존은 윤리적 척도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에게 두고 있다. 윤리적인 실존이 보편성 가운데 자기 자신을 세우려 하는 반면 종교적 실존은 자신이 신의 요구에 합당한 실존이 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자기 자신을 멀리한 채 신이 보시기에 합당한 실존이 되고자 무한한 정열로 변혁을 시도한다는 말이다.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출처] 누구를 만나든 ------------티벳트 명상시|작성자 스타
이러한 종교적 실존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살아갈 뿐, 지상적인 쾌락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다. 왜냐하면 유한성에 마음을 두게 되면 절대적인 신과의 관계는 끊어지기 때문이다. 즉 유한성에 속하는 것을 얻으려 하자마자 무한성을 향한 추구는 정지되고, 유한성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티벳 사원의 길가에서는 오늘도 맨땅을 수년간 엎드려 절하며 오르는 신심을 본다. 오체투지의 고행이다. 양 팔꿈치, 양 무릎을 땅에 대고 절하며 몇 번이고 수 천리 언덕길을 기어간다. 갠지스 강가에는 지금도 평생을 명상하는 수도자들이 있다. 더러는 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도 있다. 모두가 자신을 포기하고 신의 경지, 초월의 경지를 향한 고행의 행진이다. 그런데 키엘케고르는 인위적인 종교가 내면적 변혁 말고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이 절대적 목적을 위하여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실존을 그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위적인 상향적 종교는 절대적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사실은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전 실존을 걸고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정립된 정신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 이상 죄의 침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이미 들어와 있는 원죄에 대하여는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인간의 힘으로 신적 경지에 이르는 상향적 초월의 종교로는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할 수 없으며 구원은 오직 절대 타자인 천상의 신, 절대자가 인간에게로 다가오는 방식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말한다. 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종교의 경우 신의 영역 즉 신성(神聖)의 존재는 단지 인간이 상상하는 가공의 영역이 아니라 신성이 세속에 직접 현현됨으로 인간은 그 신성을 경험하게 된다. 엘리아데는 이 신성의 현현을 성현(hierophany)이라고 불렀다. 신성은 루돌프 오토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비와 공포와 매력이 신성에 접했을 때에 인간 쪽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렇듯 신성은 절대 타자로서 체험되는 종교적 실재다.
성경의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였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성이 인자(人子)로 온 성현의 대표적 예인데 이를 기독교에서는 육화(incarnation)라고 한다. 이러한 성현은 물론 수평적 사고로는 인식할 수 없는 역설적 사건이다. 신이 인간이 되고 신성이 사물에 접신된다는 것은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성현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우리들 인간들의 삶 속에서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이 하늘에서 하강한다는 신앙이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건은 우리의 오성, 우리의 과학,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계선 밖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로는 부조리한 것이며 그 무엇으로 증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역설을 시인하지 않는 한 진정한 구원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이란 유한자가 영원자를 통해서만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신에게로 다가간다거나 인간이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진정한 구원의 종교는 신이 하강한 종교만이 그 정당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과학적 논리,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이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를 믿는 데는 오직 이성과 감성의 인간적인 집착을 내어던지는 결단이 요구됨을 지적하였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결론은 감성적 실존이나 이성적 실존, 미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으로는 결코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하며, 종교적 실존으로 비약해야 하는데 종교적 실존이라 해도 인위적인 종교가 아니라 절대 타자인 신으로부터 내려받는 은총의 종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홍문표 시 창작 강의 노트 53-3
감성과 지성과 영성의 문학(3)
홍문표
5. 구원의 문학과 영성의 문학
이처럼 인간적인 감성적 사고나 이성적 사고, 미적 실존이나 윤리적 실존에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 진정한 구원이 불가능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러기에 겸손히 신적인 세계, 초월적인 힘, 절대자의 능력과 자비를 통하여 보다 높고 넓은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수직적 사고 또는 그러한 신앙적 인식 태도를 우리는 영성(sprituality)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영성은 세속을 초월한 궁극적인 실재를 인정한다. 또한 인간이란 결코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영역 이상의 초감각적 초이성적 품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보다 깊은 가치들과 의미들을 찾아 명상하고 기도하며 소통한다. 바로 세속의 삶, 일상의 삶, 외적인 삶에서 내적인 삶, 내적인 생명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결코 특정한 인간에게만 부여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영성이 있다. 신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절박할 때는 누구나 신을 찾는다. 영성이 있다는 증거다.
영성의 경지에서야 세속적인 자아는 더 큰 실재와 소통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더 커다란 자아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진정한 깨달음 또는 거듭남이라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세속의 진부한 집착에서 벗어나 분열된 너와 내가 하나 되고 자연과 우주와도 합일되며 마침내 신성의 영역(divine realm)과 합일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을 법열이니 충만함이니 엑스타시라고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진정한 자유요, 해방이요 구원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사물을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서 보게 되고, 예언과 계시의 신성한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데 문학이 이러한 경지에서 쓰여지게 될 때 영성의 문학이 된다. 따라서 영성의 문학은 궁극적인 실재, 즉 절대자가 있고, 초월이 있고, 속세의 집착을 벗어난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우주 자연과의 합일이 있고, 신성(神性)의 놀라운 예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사에서 오늘도 수없이 쏟아지는 문학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지금 어찌 살고 있으며 어떤 문학을 쓰고 있는가. 문학은 감성이고 예술이고 창조라 하여 이미지와 메타포와 리듬과, 구성과, 문체와, 형식의 미적인 실험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학은 이성과 양심과 자유라 하여 총체성과, 계급과, 빈부와 민주화와 반영과 비판과 투쟁과 혁명과 리얼리즘과 이데올로기의 깃발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집트에서 사백 년이나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모세가 그의 민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네 아비에게 물으라”였다. 역사에 모든 해답이 있다는 말이다. 개화기 이후 신문학의 역사도 이제 백 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시인 작가들이 한국 문학이라는 영봉을 향하여 오르다 갔고, 지금도 수많은 문인들의 행렬이 문학의 등성을 타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이름 없이 갔고, 더러는 한동안 반짝이다가 역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의 시대를 넘어서 지금도 빛나는 예언이 되고 감동이 되고 구원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 몇몇 작품도 있다. 어떤 작품들인가, 이들은 놀랍게도 한결같이 영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일백 년 문학사를 통해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감동을 주고, 영향을 주고 깨우침을 주고 있는 시들을 보자. 1920년대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의 「산유화」를 들 수 있다. 이 시대 대부분 시인들이 낭만주의니 감상주의니 하면서 불안과 좌절의 정서를 어둠과, 동굴과 죽음으로 노래하던 병적인 분위기에서, 또는 암울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투쟁을 선언하던 리얼리즘과 계급주의의 치열한 분위기에서 한용운은 이들 양극화의 세속을 뛰어넘어 오히려 부재한 절대자 님을 향해 통곡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강한 영성을 보여 주고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비록 님과의 상실이 있지만 그래도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그 지극한 신앙에 민족적인 위로가 있고 구원이 있다. 김소월은 자연을 절대화하는 영성을 보여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여름 없이 꽃이 피네”
1930년대 서정주의 그 많은 시중에서 그래도 생명력이 있는 시는 「국화 옆에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바로 수직적인 불교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서시」도 그렇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의 시는 하나님에 대한 부끄러움과 참회의 영성이 있어 지금까지 애송하게 된다. 이육사의 「광야」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는 유학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진 매우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암담한 현실을 초극하고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절대성을 긍정하는 영성의 시를 써서 계속 감동을 준다.
1940년대 조지훈의 「승무」도 그렇다. 그의 시가 단순히 춤사위나 보여주는 미적 표현이었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거기엔 현실을 초극하려는 불심의 지극한 영성이 있다. 1950년대 김춘수는 많은 미적 실험 시를 썼다. 무의미 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남은 시는 무의미 시가 아니라「꽃」이다. 존재성에 대한 깊은 성찰의 영성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김수영은 현실 비판의 많은 시를 썼다. 시대적 양심과 정의의 시들이다. 그러나 김수영을 기억하게 만든 시는 그러한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시가 아니라 「풀」이다. 민초를 절대화한 영성의 시만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몇몇 소설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괴테는 젊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이미 약혼한 여인을 짝사랑하다 마침내 자살한다는 대중소설이다. 한 여인에 대한 집착, 이것을 사랑의 극치로 미화하는 미적 실존, 소위 탐미적 낭만주의는 결국 자기 파멸로 끝이 난다. 미적 실존의 한계다. 그런데 그의 「파우스트」는 세계적인 고전이 되고 있다. 어째서일까.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윤리적 실존의 대표적 인물이다. 노년에 이르러 허무함만 느끼고 있을 때 젊음과 여인의 유혹을 받는다. 미적 실존의 욕망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결국 그의 영혼을 구한 것은 윤리나 미가 아니라 천상의 음악이었다. 톨스토이에게도 「안나까레리나」가 있다. 부부생활에 실증을 느낀 안나가 다른 남자와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여의치 못하자 결국 자살한다는 대중소설이다. 미적 실존의 절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부활」은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다. 어째서일까.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이성과 양심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회가 있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브스키의 「죄와 벌」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는 양심과 정의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윤리적 실존의 표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무익한 노파를 죽이고도 떳떳했다. 그러나 그의 참회는 신을 믿으면서도 몸을 팔아야 하는 소냐를 통해 이루어진다. 종교적 실존에 구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성의 작품이다.
이처럼 소설에서도 인간적인 욕망과 이성, 미와 양심과 정의에 집착한 「젊은 벨텔의 슬픔」이나 「안나까레리나」나 「죄와 벌」의 라스코리니코프는 마침내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만일 거기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쾌락이나 정당성의 환상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신을 의지하고, 신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파우스트」나 「부활」이나 「죄와 벌」의 참회에 영원함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다.
영성의 문학에는 절대적 가치가 있고, 초월이 있고, 신이 있고, 종교가 있고 영원한 구원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에서는 일상의 감성이나 이성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벗어나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세계에 대한 감동과 깨달음을 만나게 되고, 소통하게 되고, 그리하여 함께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렇다고 이들 영성의 작품들이 감성과 이성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지금까지 감동과 깨달음과 예언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이들의 작품들은 모두가 문학성에 충실하면서도 신성이 있고, 초월자의 섭리가 있고, 자유가 있다.
문학의 기본은 문학성이고, 시의 기본은 시성이다. 따라서 영성의 문학이라 하여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나 교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시의 경우 메타퍼와 리듬과 관념에 충실하면서 그 위에 영성이 있어야 한다. 소설도 그렇다. 리얼리즘이니 현실의 반영이니 하여 세상에 칼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소설 문학 형식에 더하여 영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 작품을 쓰는 모든 문인들이 경청해야 할 부분이다. 문학은 예술이라 하여 미학적 기교에만 집착하는 형식주의나, 문학은 내용이라 하여 윤리적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는 역사주의는 문학사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인기와 관심은 있었겠지만 영구히 행복한 문학은 아니었다. 모두가 유행가 가사처럼 시대마다 반짝이다 사라진 것들이다. 지금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무의미 시, 해체 시는 어디 있는가, 계급문학, 민족 문학, 참여문학, 민중문학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낭만주의 리얼리즘, 형식주의 역사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또 어디 있는가. 깃발을 흔들 때마다 그것만이 진리인 줄 알고 박수를 쳤던 우리들의 어리석음, 유한한 인간들의 무상한 시행착오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생도 문학도 철이 들 때가 되었다. 깨달을 때가 되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그 험난한 세월 속에서 그래도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희망을 주고 보다 높고 깊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문학성에 충실하면서도 초월적인 세계와 소통하는 영성의 문학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신문학 일백 년 우리는 형식이냐 내용이냐, 순수냐 참여냐, 감성이냐 이성이냐, 낭만주의냐 사실주의냐, 보수냐 진보냐, 그 흑백의 양극화 논리에 모두들 매달려 상처뿐인 진창 놀이를 반복해 왔다.
이제는 유한한 인간의 감성과 이성,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만으로는 결코 영원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인간 존재의 실상을 분명히 알고 그 양극화의 허망한 미로와 갈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유한한 인간의 실존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거대한 우주와 자연 속에서 초월자의 섭리와 사랑을 느끼며 지상의 절망과 불안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영성의 문학에서 우리들 문학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 영혼을 지닌 인간이 가야 할 길이며 문학자의 소명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시적인 구원이 아니라, 일시적인 놀라움이 아니라 영원한 놀라움과 영원한 구원이 약속되는 영성의 삶, 영성의 문학으로 비약하는 기적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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