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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탐험-쥘 베른 지음-정성환 옮김
2021년 09월 20일 13시 55분  조회:554  추천:0  작성자: 강려
 지저탐험-쥘 베른 지음-정성환 옮김

 
<차 례>
수수께끼의 암호················· 3
아름다운 소녀·················· 8
아, 알았다!·················· 12
이제는 떠나자·················· 16
그로이벤의 꾸지람················ 20
아이슬란드로·················· 24
맹렬한 회오리·················· 29
지옥의 입구··················· 33
해면 아래 3천 미터··············· 37
나 혼자 가겠다················· 42
야, 물이다, 물!················ 46
미아가 되다··················· 52
땅 밑의 바다·················· 57
앗, 괴물이다!················· 64
큰 폭풍····················· 69
거대한 코끼리와 원시인············· 73
사크누셈의 동굴 ················ 78
터널에 빨려 들어가다.·············· 83
분화구에서 지상으로··············· 88
기쁨의 날···················· 91
 
작품 해설···················· 93
 
수수께끼의 암호
 
"이봐, 악셀. 어디 있어? 빨리 와!“
연구실에서 마치 우레 같은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젠장, 또 아저씨의 말버릇인 '빨리 와'가 시작됐네. 이 모양이니 마음놓고 낮잠도 못 자겠어."
나는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상의를 입었다. 나는 악셀이라고 하는데 올해 열 여덟 살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부모를 여의게 되자 아저씨네 집에 맡겨졌는데, 지금은 아저씨의 연구실에서 조수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 아저씨는 리이덴브로크라고 하는데, 도이칠란트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의 지질학 교수다. 키가 크고 다부진 몸집으로, 커다란 쇠테 안경을 끼고 있다. 원래 나이는 쉰 살이지만, 언뜻 보기엔 마흔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악셀. 내가 부르고 있는 게 들리지 않아?“
또 아저씨가 호통을 쳤다.
"벌써 와 있어요.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아도 똑똑히 들려요.“
나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방에는 천장까지 닿는 시렁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어서, 여러 가지 광석 표본이 꽉 차 있었다. 이 표본을 고쳐 진열하고 먼지를 털고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내가 맡고 있는 일이다. 아저씨는 유럽에서도 유명한 학자이지만, 성질이 급해서 화를 잘 내는 게 흠이었다. 아저씨는 책상 앞에 앉아 낡아빠진 큼직한 책을 살펴보고 있다가, 내 발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며,
"악셀, 빨리 이리 와서 이 책을 봐라. 이건 정말 대단한 책이야.“
"무척 지저분한 책이군요. 어디서 구한 거여요?“
"오늘 아침에 고서점에서 찾아 낸 거야. 이건 지금으로부터 8백 년 전에 아이슬란드에서 만들어진 책이지."
"대관절 어떤 내용인데요? 저는 도무지 읽어 낼 수가 없군요.“
"응, 너는 읽지 못할 게다. 이건 룬 문자거든."
"룬 문자라는 건 뭡니까?"
"여태 그것도 모른단 말이냐. 한심한 녀석이구나. 룬 문자란 옛날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글자야. 아무튼 읽을 줄 몰라도 좋으니, 이 책을 손에 들고 잘 보란 말야."
아저씨는 나에게 그 책을 건네주었다. 그 때 책갈피 속에서 한 장의 종이 조각 같은 것이 스르르 방바닥에 떨어졌다. 집어 들어보니 그것은 몹시 낡아서 갈색으로 변해 버린 양피지였다. 그 양피지 위에는 그림인지 부호인지 알 수 없는 글씨 같은 것이 어수선하게 늘어 놓여 있었다.
“악셀, 그건 뭐냐?”
“모르겠어요. 이 책 속에서 떨어지더군요."
"이리 줘 봐.”
양피지를 받아 든 아저씨는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이내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룬 문자가 틀림없지만, 무슨 뜻인지 나는 통 모르겠다. 어때, 악셀, 너는 이걸 읽을 수 있겠니?“
나는 참다못해 아저씨가 읽지 못하시는 걸 제가 어떻게 읽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말해 버릴까 생각했지만, 또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아저씨는 양피지를 책상 위에 놓고 눈살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가정부 마르타 할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르타 할멈은 통통하게 살찐 자그마한 몸집으로 늘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할멈을 퍽 좋아했다.
“주인님, 식사 준비가 됐습니다.“
마르타 할멈이 말했다.
“뭐요, 식사라고? 식사 따윈 개한테나 줘 버려요!”
아저씨가 우레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할멈은 깜짝 놀라서 달아났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엔 할멈이 정성을 들여서 만든 음식들이 늘어 놓여 있었다. 따끈한 수프와 햄을 넣은 오믈렛, 자두 소스를 친 송아지 불고기, 음료로는 프랑스산 포도주이고 식후의 디저트는 설탕에 절인 참새우였다. 나는 몇 번이나 군침을 삼키면서 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저씨는 오지 않았다.
“주인님은 어떻게 되신 걸까요? 여느 때엔 늘 식사시간을 기다리고
 계시곤 했는데,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신 게 아닐까요?“
할멈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무 데도 아프지는 않아요. 골똘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겨여요. 하지만 나는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 것 같아서 먼저 먹어야겠어요.“
나는 포크를 집어들었다. 음식은 어느 것이나 모두 맛이 훌륭했다. 정신없이 퍼먹고 있는데 또 아저씨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악셀? 빨리 오란 말야!”
“곧 갑니다.”
나는 당황해서 설탕에 절인 참새우를 입에 넣은 채 허겁지겁 달려갔다.
“악셀, 이건 아무래도 암호문 같구나.”
“암호라고요? 보물을 묻어 둔 장소라도 적혀 있다는 말씀입니까?“
“글세, 그건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누구든지 해독하지 못하도록 글씨가 바꿔져 있는 거야. 알겠나, 악셀. 내가 이 암호를 한 자씩 알파벳으로 읽어 갈 테니, 너는 내가 읽는 대로 다른 종이에 써 보란 말야.“
“그러지요.”
나는 아저씨가 읽는 글자를 하나하나 빠짐 없이 적어갔다. 아저씨는 내가 다 쓴 것을 손에 들고 오랫동안 살펴보고 있다가,
“소용없구나. 이렇게 해 봐도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누가 이렇게 알아내기 어려운 암호를 썼을까?“
하고 못마땅한 듯이 말하고는, 그 종이를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나는 문득 생각나서, “아저씨, 어쩌면 이 암호를 쓴 건 이 책의 임자일지도 몰라요. 이 책 어디엔가 그 임자의 이름이 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겠구나, 악셀. 좋은 생각을 해냈다. 그걸 찾아보도록 하자.“
아저씨는 처음부터 그 책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표지의 아래쪽에서 책임자의 이름인 듯한 룬 문자가 발견되었다.
"아르네 사크누셈‥‥‥ 이 책임자는 아르네 사크누셈이야!“
아저씨가 자랑스러운 듯이 소리쳤다.
"아르네 사크누셈이라는 건 누구입니까?“
"16세기의 아이슬란드의 유명한 과학자지. 그 사람이 이 암호를 썼다면, 이건 절대로 엉터리나 장난으로 쓴 건 아냐. 뚜렷한 의미가 있는 거지‥‥‥ 좋아, 나는 반드시 이 암호의 수수께끼를 풀어 볼 테다.“
 
아름다운 소녀
 
아저씨는 또다시 알파벳으로 쓴 암호를 책상 위에 놓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간혹 입 속으로 중얼중얼 혼잣말하면서. 나는 몹시 지루하고 따분해져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내 눈은 벽에 걸려 있는 그로이벤의 초상화로 옮겨졌다. 그로이벤은 올해 열 일곱 살이 되는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 아저씨네 집에 맡겨졌었다. 외모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음씨가 곱고 학문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연구실에서 표본을 정리할 때엔 몇 시간이고 나를 거들어 주곤 했다. 어쩌다 쉬는 날이면 나는 그로이벤을 데리고 엘베 강가에 놀러 가곤 했다. 물결이 잔잔한 곳에는 수련 꽃이 피어 있고, 눈송이같이 새하얀 백조가 헤엄치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강가를 거닐면서, 날이 저무는 것도 잊은 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어느 새 아저씨도 모르게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로이벤은 일주일 전쯤부터 친척집에 일을 거들어 주러 간 채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몹시 쓸쓸했다. '빨리 돌아왔으면 좋을 텐데‥‥‥‘ 내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아저씨가 느닷없이 탁자를 탁 치면서, "이젠 알았다. 암호를 풀 열쇠를 찾아냈어!“ 하고 외쳤다. 나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알겠나, 악셀. 사크누셈은 암호문을 가로로 쓰기 않고 세로로 쓴 게 틀림없어. 마치 중국이나 일본글처럼 말이야. 악셀, 무엇이든 좋으니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세로로 써 보아라. 세로로 대여섯 자씩 쓰는 거야, 어서 해 봐."
나는 시키는 대로 문득 떠오른 생각을 세로로 적어 보았다.
"어때, 이젠 됐니?“
"예, 됐습니다.”
"그럼, 그걸 옆으로 읽어 봐.”
"loulyir(아이오미 어) luudt (루우드테), ovcetu(오브세투)‥‥‥ 잘 읽지 못하겠어요, 아저씨. 무슨 뜻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된 거야. 그게 암호거든 옆으로 읽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지만, 세로로 읽으면 알 수 있지. 이리 줘 봐라.”
아저씨는 나에게서 종이 조각을 받아 들자 큰 목소리로 읽었다.
"I love you very much, my dear little Grguben (아이러브 유 베리 머치, 마이 디어 리틀 그로이벤).”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한다, 귀여운 그로이벤.’
나는 찔끔했다. 무심코 엉뚱한 말을 써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건 뭐냐, 악셀. 너는 그로이벤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냐?”
아저씨가 어안이 벙벙해진 것같이 말했다.
"예...... 저어...... 아니......“
나는 얼굴이 홍당무같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야단 맞을까 하고 각오하면서...... 그러나 다행히 아저씨는 암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 그 이상 그로이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럼 악셀, 다음엔 다른 일을 해 보자. 네가 아까 알파벳으로 쓴 암호가 있었지? 그 말 가운데 처음 한 자씩을 골라내어 한번 가로로 써 봐라."
나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낱말의 맨 처음 한 자씩만을 골라내어 가로로 늘어놓아 보았다. 그러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것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이건 뭐야......? 아까보다 더 알쏭달쏭해져 버렸구나.“
아저씨는 낙심한 듯 암호가 적힌 종이 조각을 책상 위에 도로 놓고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구나, 악셀. 그러니 바깥에 나가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아, 알았다!
 
"좋아, 아저씨가 없는 동안에 내가 혼자 이 암호를 풀어 봐야지.“
나는 암호 종이 조각을 책상 위에 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역시 안 돼. 아저씨가 풀지 못하는 암호를 내가 풀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만두는 게 좋겠다.“
나는 단념했다. 그리고 화끈해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그 종이 조각을 왼손에 쥐고 얼굴에다 대고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잠시 그렇게 하고 있다가 나는 별안간 '앗' 하고 소리쳤다. 종이 조각 속에 '아르네 사크누셈' 이라는 글씨가 언뜻 보이는 게 아닌가 !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데."
나는 또다시 종이 조각을 책상 위에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맨 윗줄에 mmessunkaSenrA라는 글씨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A로부터 시작하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똑바로 Arne Saknussemm(아르네 사크누셈)이라고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아, 그렇구나. 이 암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말하면 끝에서부터 읽으면 되는 거야. 이것 말고도 더 읽을 수 있는 말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니 아닌게 아니라 있다. 둘째 줄에 terrestre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라틴어로 '지구'라는 뜻이다. 그리고 넷째 줄에는 Craterem이라는 글자가 있다. 이것도 역시 라틴어로 '분화구'라는 뜻이다.
"이젠 됐다! 나는 드디어 암호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찾아냈어! 이 암호는 라틴어인데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다시 말하면 끝에서부터 읽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걸 내가 알게 됐을까? 그렇지, 나는 암호가 적혀 있는 종이 조각을 왼손에 쥐고 얼굴에다 부채질을 했는데, 그 때 그 글씨가 거꾸로 보인 거야. 그럼 이제는 이 암호를 끝에서부터 써 봐야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연필을 쥐고 암호의 글자를 끝에서부터 차례로 옮겨 써 보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훌륭한 문장이 되었다.
 
용감한 탐험가여, 7월 1일 전에 스네펠스 산의 분화구에 스카르타리스의 그림자가 떨어진다. 거기서부터 내려가라. 그렇게 하면 그대는 지구의 한가운데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거기에 다녀왔다. -- 아르네 사크누셈
 
나는 여러 번 그 글귀를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스카르타리스의 그림자가 떨어진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 밖의 것은 충분히 알 만하다. '7월 1일 전에 스네펠스 산의 분화구에서 내려가면 지구의 중심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암호를 쓴 아르네 사크누셈은 이미 거기까지 갔다 왔다.'는 것이다. 분화구에서 기어 들어가 지구의 한가운데까지 다녀왔다는 말은 정말일까? 만일 이것이 정말이라면, 아르네 사크누셈은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탐험가인 셈이다. 훌륭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 머리도 어지간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아저씨조차 풀지 못한 암호를 훌륭하게 풀었으니 말이다. 나는 몹시 자랑스러워져서, 나 자신이 푼 암호문을 손에 쥐고 흔들며 방안을 빙빙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것은, 만일 아저씨가 이 암호문을 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였다. 연구에 열심인 아저씨는 반드시, "그게 사실이라면 사크누셈이 했던 대로 나도 지구의 중심까지 가 보고야 말겠다.“고 말할 게 틀림없다.
학자들의 이야기로는 지구의 내부는 엄청나게 열이 높아서, 돌이건 바위건 곤죽같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 어슬렁어슬렁 내려가면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다. 이 암호를 푼 것은 아저씨에게 보이지 않는 게 좋아. ' 이렇게 생각한 나는 암호를 푼 종이 조각을 호주머니 속에 깊이 밀어 넣었다.
마침 그 때 아저씨가 산책을 끝내고 돌아왔다. 아저씨는 연구실에 들어오자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암호를 풀어 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글씨를 써넣어 보기도 하고 지워 보기도 하며 그 일에 몰두하고 있다.
"아저씨는 또 그 일을 하십니까?“
"물론이지. 나는 이 암호를 풀 때 까진 식사도 안 하고 자지도 않을 작정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시면 몸에 해로워요. 오늘밤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다시 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흥. 그러니까 너는 글렀다는 거야. 자고 싶거든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일찌감치 자 두렴. 나는 절대로 자지 않을 테니.......”
아저씨는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암호문을 지켜보고 있다.
'아무리 오래오래 생각해도 아저씨는 알아 내지 못할 거야. 그러다가 지쳐서 그만둘 거야.'
이렇게 생각한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깊이 잠이 들어 버렸다.
 
이제는 떠나자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잠이 깬 나는 깜짝 놀랐다. 아저씨가 여태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밤새껏 자지 않고 줄곧 생각한 모양이다.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서고, 머리는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지고, 뺨이 홀쭉하게 꺼져서, 하룻밤 사이에 10년이나 더 늙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은근히 근심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아저씨는 미치거나 병이 생겨서 쓰러져 버릴 것이다.
"아저씨, 좀. 할 얘기가 있는데요......‥.”
"시끄러워, 지금 한창 중요한 때니까 잠자코 있어."
"하지만 아저씨, 바로 그 암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뭣이 어쩌고 어째? 암호가 어떻게 됐다고?“
"저는 어젯밤에 그 암호를 풀어 버렸다니까요."
"하하하, 허튼 소린 하는 게 아냐.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그걸 풀 수 있었다는 거야."
"하지만 정말 풀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요. 그 암호는 라틴어인데 끝에서부터 읽어 가면 됩니다. 이걸 보셔요. 여기에 푼 게 있습니다.“
나는 종이 조각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아저씨에게 넘겨주었다. 아저씨는 우습게 여기는 듯이 그 종이 조각을 보고 있었으나, 갑자기 그 눈이 커지고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탁자를 탁 치며 일어섰다.
"이건 놀랍구나 ! 확실히 사크누셈의 암호를 바로 푼 거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걸 알았지?“
“우연히 알게 됐지요. 그 암호가 씌어 있는 종이를 왼손에 쥐고 얼굴을 부채질하고 있었더니 글씨가 거꾸로 보이더군요.“
“그랬었구나. 어쨌든 이건 굉장한 발견이다. 고맙다, 악셀!“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자 느닷없이 나를 껴안고 입맞춤을 했다. 나는 어리벙벙했다. 아저씨로부터 입맞춤을 받아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저씨, 저는 아직 그 암호문 속에 모르는 게 있습니다. 가령 스네펠스니 스카르타리스니 하는 건 무슨 말일까요?“
“그건 아이슬란드에 있는 화산의 이름이지. 악셀, 책장에 아이슬란드 지도가 있으니 가져와 봐. 응, 바로 그거야.“
아저씨는 지도를 펴놓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아이슬란드야, 영국과 그린란드 사이에 있는 커다란 섬이지. 우리가 살고 있는 함부르크에서 약 2천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거든. 그런데 악셀, 이 아이슬란드의 서쪽 해안을 잘 보란 말이야. 레이카비크라는 곳이 있지? 이게 아이슬란드의 수도야. 이 레이카비크 북쪽에 반도가 있고 그 끝 쪽에 산을 표시한 게 있지, 그게 바로 스네펠스 화산이야. 이 화산의 분화구를 내려가면 지구 중심에 닿을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분화구라면 연기랑 용암을 계속 뿜어 올리고 있을 게 아닙니까? 그런 곳에 어떻게 내려갈 수가 있습니까?“
"아냐, 이 스네펠스 산은 7백 년 전쯤에 분화를 멈춰 버린 사화산이거든. 그러니 걱정 없이 내려갈 수 있지."
"암호문에 '7월 1일 전에 스네펠스 산의 분화구에 스카르타리스의 그림자가 떨어지니, 거기로 내려가라.'고 돼 있지요. 그런데 이건 무슨 까닭입니까?“
"스네펠스 산에는 아마 분화구가 여러 개 있을 거야. 그 중에서 어느 분화구로 내려가면 좋은가 하는 걸 사크누셈이 가르쳐 준거야. 7월 1일 전- 즉 6월말 경까지 스네펠스 화산의 꼭대기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러면 스카르타리스라는 산의 그림자가 분화구의 하나에 떨어지니, 그 분화구 속으로 내려가라는 의미지."
"아닌게 아니라 그럴 듯한 생각을 했군요."
"거기까지 알면 이젠 충분할 게다. 그러니 악셀, 우리 곧 떠나도록 하자."
"갑자기 떠나자니 어디로요?“
"뻔한 일 아냐? 아이슬란드로 건너가서 스네펠스 화산에 올라가는 거야. 그리고 분화구를 통해 지구의 중심까지 내려가는 거지."
"누가요?“
"누구라니, 너와 나 두 사람밖에 더 있니?"
"저도 간다는 겁니까? 당치도 않아요, 저는 싫어요."
"싫다고? 왜 싫다는 거야?“
"지구의 한가운데는 불덩이처럼 돼 있다더군요. 학자들의 계산으로는 30미터쯤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간다면서요. 지구의 표면에서부터 지구의 중심까지는 약 6천 4백 킬로미터나 됩니다. 그러니 지구의 중심은 20만 도 이상으로 고온이지요. 그런 곳에 내려갔다가는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뼈까지 고스란히 녹아 버릴 게 아닙니까?“
"하하하, 악셀은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내 말을 잘 들어. 인간의 과학은 상당히 진보해 왔지만, 아직도 모르는 일이 많이 있는 거야. 특히 지구의 내부가 어떻게 돼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 아르네 사크누셈 말고는 누구도 지구의 중심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없으니 말이야."
"그럼 아저씨는 사크누셈이 정말로 지구의 중심까지 내려갔었다고 믿고 계시는 겁니까?"
"믿고 말고, 사크누셈 같은 훌륭한 과학자가 사람들을 속일 리는 없지. 지구의 내부가 어떻게 돼 있는지, 학자들이 계산한 대로 과연 20만 도나 열이 높은지 어떤지,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거야. 알겠니 ? 악셀, 2, 3일 안에 아이슬란드로 떠날 테니 준비를 잘해 둬라.“
 
그로이벤의 꾸지람
 
나는 낙심했다. 걱정하고 있었던 일이 끝내 현실로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암호의 비밀을 아저씨에게 알리지 말았어야 한다고 뉘우쳤지만 이젠 늦었다.
'어쨌든 지구의 중심으로 내려간다는 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그건 모험이 아니라 자살을 하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만두게 해야 해.'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런데 얼마 가기도 전에 저 편에서 금발의 소녀가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로이벤이다! 친척집에서 돌아온 것이다.
"오랜만이야, 그로이벤!“
"어머나, 악셀, 어떻게 된 거여요? 안색이 무척 나쁘네요.“
"응,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사실은......‥
나는 그로이벤에게 고서적 속에서 사크누셈의 암호문을 발견한 일과, 아저씨가 그것을 믿고 아이슬란드의 분화구에서 지구의 중심으로 내려가 보기로 결심을 한 일이며, 나한테도 같이 가자고 한다는 것 등을 대강 추려서 이야기했다.
"어머나, 정말 굉장한 계획이네요!“
내 이야기를 다 들은 그로이벤은 푸른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외쳤다,
"그래서 악셀은 물론 찬성했겠지요?“
"찬성하다니 당치도 않아. 나는 그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탐험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저씨가 그 계획을 포기하게 하려 하고 있는 거야.”
"왜 포기하게 해요? 나는 아저씨 생각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사크누셈의 암호가 사실인지 어떤지, 지구의 내부가 어떻게 돼 있는지, 자기 눈으로 확인해 보고 오겠다는 건 과학자로서 정말 훌륭한 생각이어요."
"하지만 그로이벤, 이 탐험은 아주 위험한 거야. 자칫하면 두 사람 다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는지도 몰라.”
"어머나, 악셀은 그렇게 겁쟁이어요? 위험을 두려워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못 해요. 내가 남자라면 물론 같이 갈 거여요."
나는 깜짝 놀라며 그로이벤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눈물이 떠올라 있다. 나는 갑자기 겁을 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미안해, 그로이벤. 내가 나빴어. 나는 아저씨와 함께 가겠어.“
"고마와요.“
그로이벤은 기쁜 듯이 내 손을 잡고,
"아저씨가 건강하다고 해도 이젠 나이가 많잖아요. 그러니 악셀이 곁에서 잘 보살펴 드려야지요."
"응, 약속하겠어.“
"이봐요, 악셀. 혹시 사크누셈의 암호가 엉터리라고 해도 그런 건 아무 상관없는 거여요. 여하튼 실제로 탐험을 해 봐서,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라도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알았어. 그로이벤의 말이 옳아."
잠시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느닷없이 아저씨가 뛰어나와,
"이 녀석아, 너는 대관절 어딜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는 거야. 빨리 채비를 하지 않으면 늦는다.“
"하지만 아저씨, 오늘은 5월 26일이어요. 암호에 씌어 있는 7월 1일까진 아직 충분한 시간 여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너는 글러 먹었다는 거야. 아이슬란드로 건너가는 범선은 한 달에 한 번밖에 떠나지 않아. 그리고 거기까지 항해하는 데 열흘쯤 걸리니, 늦어도 모레 아침엔 여기를 떠나야 하는 거야. 알겠니, 모레 아침에 떠나는 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준비를 시작했다. 지하탐험에 필요한 긴 로프를 비롯하여 곡괭이며 삽과 천막 등을 상자에 넣고 있는데, 그 때 마르타 할멈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달려와 말했다.
"악셀 도련님, 대관절 무슨 일이어요? 주인님도 뭔가 큼직한 짐을 꾸리고 계시던데......”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어요."
그러자 마르타 할멈이 또 물었다.
"어디로 여행을 하십니까요?“
"지구 속으로, 이 땅 밑으로 가는 거예요.“
나는 마룻바닥을 가리켰다.
"그럼 지하실에 가시는 겁니까? 하지만 이상하군요. 지하실에 가는데 곡괭이가 왜 필요합니까?“
나는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지하실보다 좀 더 밑에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할멈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 이상 더 설명하지 않았다.
 
아이슬란드로
 
드디어 떠나는 날이 왔다. 새벽 5시 반에 우리를 태우고 갈 마차가 왔다. 나는 짐을 싣고 아저씨를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현관의 돌층계에 할멈과 그로이벤이 서서 물끄러미 우리 쪽을 보고 있다. 그로이벤은 그저께 그토록 열렬한 어조로 나를 격려해 주었는데, 오늘 아침엔 웬일인지 기운 없이 풀이 죽어 있다. 나는 다시는 그로이벤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할멈, 조금도 염려할 건 없어요."
아저씨가 느닷없이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우리는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서, 할멈이 만들어 주는 맛좋은 수프를 먹게 될 테니 조금도 걱정 말아요."
"예, 그렇게 되셔야지요, 주인님."
할멈이 허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연 그로이벤이 마차 옆에 달려와서 내 팔을 잡고 나직이 말했다.
"악셀, 아저씨를 잘 보살펴 드려야 해요."
"응, 알았어.“
"그리고 악셀도 몸조심해요."
그로이벤은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는 아무 미련이 없다. 마부가 휘파람을 불자 마차는 덜컥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부르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 해안의 키일 항에 닿자, 그 다음엔 배를 타고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으로 건너갔다. 여기에서 아이슬란드로 가는 범선이 떠나는 것이다. 부두에서 물어 보니 아이슬란드로 가는 배는 6월 2일에 떠난다는 것이었다.
"아저씨, 배가 떠나기 까진 아직 나흘 남았군요. 그 동안에 코펜하겐 시내를 천천히 구경할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냐. 그 나흘 동안에 등산 연습을 해서 하체를 단련시켜야 해."
"등산이라고요? 하지만 산 같은 건 아무 데도 보이지 않잖습니까?“
"잔말 말고 나를 따라와."
아저씨는 나를 교외에 있는 운하 근처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거대한 교회가 있는데, 창처럼 뾰족한 지붕 끝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저기를 봐, 악셀. 너는 이제부터 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는 거야.“
"저렇게 높은 데로 올라가요? 싫어요. 높은 곳에 올라가면 엉덩이가 근질거리고 눈이 어질어질해집니다.“
“그렇게 무기력해서야 무슨 일을 하겠니. 내 말을 잘 들어. 우리는 산꼭대기에서 깊은 구멍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해. 그러니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겁을 먹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도록 단련을 해 둘 필요가 있는 거야. 어서 따라와."
교회 안에는 꾸불꾸불한 나선 층계가 있었다. 그 층계를 150단쯤 올라가면 전망대로 나서게 되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코펜하겐 거리가 상자 안에 만든 모형 정원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흡사 개미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아저씨, 이젠 그만 해 두고 빨리 내려갑시다.“
“얼빠진 소릴 하고 있구나. 등산은 이제부터다. 이번엔 저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는 거야."
아저씨는 뾰족한 지붕을 가리켰다. 거기엔 가느다란 쇠사다리가 달려 있다.
“저런 곳에 올라가면 바람에 날려버립니다.“
“걱정 마라. 내가 발을 붙들어 줄 테니 문제없어. 어서 올라가.“
아저씨에게 떠밀리어 나는 몹시 겁을 내며 가느다란 쇠사다리를 올라갔다. 귓전에서 바람이 윙윙거리고 탑이 흔들리고 있다. 간신히 지붕 꼭대기에 닿았다.
"그럼 악셀, 이젠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봐."
"그건 안 돼요. 눈을 뜨면 떨어져 버립니다.“
"정말 한심한 녀석이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또 연습하자."
"내일도 온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지, 네가 숙달될 때까지 몇 번이라도 되풀이 할거야.“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아저씨의 명령으로 지붕에 오르는 연습을 했다. 숙달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어서, 나흘째 아침이 되자 나는 높은 지붕 꼭대기에서 태연하게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게 되었고, 항구에 떠 있는 배와 날아다니는 갈매기까지 어렵지 않게 셀 수 있게 되었다.
6월 2일 아침, 우리는 발키리 호라는 범선을 타고 아이슬란드의 레이카비크로 향했다. 다행히 바람이 순조롭게 불었기 때문에, 배는 열흘 후에 아이슬란드의 서쪽 해안에 있는 레이카비크 항구에 닿았다. 내가 아직 선실에서 자고 있을 때, 갑판에서 아저씨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나와 봐, 악셀. 스네펠스 산이 보인다!“
갑판에 뛰어나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흡 떴다. 멀리 북쪽에 길쭉한 반도가 보이고, 그 가장자리에 눈이 쌓인 채로 있는 두 개의 봉우리가 보였다.
"저게 스네펠스지. 높이는 1천 5백 미터, 우리는 저 꼭대기에서 지구의 중심으로 내려가는 거야."
아저씨가 기쁜 듯이 말했다. 우리는 상륙하자 그곳의 고등 학교로 가서 박물학 교사인 프리드릭슨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아저씨의 이름을 잘 알고 있어서 반색을 하며 말했다.
"리이덴브로크 박사님이 이런 먼 곳까지 와 주시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이 아이슬란드에서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이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럼 지금 물어 보고 싶습니다마는, 혹시 이 학교 도서관에 아르네 사크누셈이 쓴 책이 남아 있습니까?“
"사크누셈이라고요? 아아, 아이슬란드가 낳은 16세기의 유명한 과학자 말씀이군요. 유감스럽지만 사크누셈이 쓴 책은 이 학교에도, 또 거리의 도서관에도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사크누셈이 너무 뛰어난 학자였기 때문에, 덴마크 왕의 미움을 받아 책이 모두 불태워져 버렸던 겁니다.“
"불태워졌다고요? 그거 정말 아깝군요."
아저씨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귀에 입을 대고는,
"너도 들었을 테지, 악셀 ? 책이 불태워진 사크누셈은 스네펠스의 비밀을 암호로 써서 남겨 두었던 거야. 이것으로 그 암호는 더욱더 확실한 게 됐어."
하고 기쁜 듯이 말했다.
"박사님,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프리드릭슨 선생이 물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는 스네펠스 산에 올라가 지질을 조사하고 싶은데, 누군가 안내를 해 줄 만한 사람이 없을까요?“
"아, 그런 일이라면 마침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스 비엘케라는 이 고장의 사냥꾼인데, 진실하고 똑똑한데다 덴마크어도 잘 하니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겝니다. 내일 아침 호텔로 찾아가게 해 드리지요."
"고맙군요.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내의 호텔로 돌아갔다.
 
맹렬한 회오리
 
이튿날 아침 우리가 잠이 깨었을 때, 안내인 한스 비엘케가 찾아왔다.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건장한 남자로, 어깨가 넓고 얼굴의 절반은 텁수룩한 붉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악수를 할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한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나는 정말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이 안내인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덴마크어로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했다. 한스가 돌아가자 우리는 탐험하러 갈 때 가지고 갈 짐을 정리했다. 6개월 분 식량으로 말린 고기와 비스킷, 150도까지 측정할 수 있는 한란계, 길이가 120미터나 되는 로프와 합성섬유로 만든 줄사다리, 피켈, 곡괭이, 컴퍼스, 전지를 사용하는 휴대용 전등, 라이플총, 콜트 권총, 그리고 연화약을 많이 준비했다. 이 화약은 터널이 막혔을 때 바위를 폭파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안내인 한스가 말을 네 필 끌고 찾아왔다. 우리는 한 필의 말에 짐을 싣고, 나머지 세 필에 각자 올라타고는 거리를 떠났다. 레이카비크에서부터 스네펠스 산까지는 바닷가를 따라 18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우리는 날이 저물면 염소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여행을 계속하여, 6월 22일에야 겨우 스네펠스 산의 기슭에 닿았다. 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여기서부터는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한다. 몸집이 큰 한스는 백 킬로그램쯤 되는 짐을 지고 앞장을 서서 유유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나도 각각 짐을 짊어지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 옛날 스네펠스 화산이 뿜어 올린 용암이 여기저기 속돌처럼 뒹굴고 있어서 여간 올라가기가 어렵지 않다. 나는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한스는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겨우 10분의 7 정도의 높이에 이르렀다. 한스는 일단 멈춰 서서 기슭 쪽을 내려다보더니 별안간, "아, 미스투르다! 빨리 숨지 않으면 위험해 !” 하고 외쳤다. 미스투르라는 것은 아이슬란드 말인데, 회오리나 모래 폭풍이란 뜻이다. 아닌게아니라 기슭 언저리에 한 줄기 모래 먼
 지가 솟아올랐는데, 그것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점점 산 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
"빨리, 빨리 피해야 해요!“
한스는 우리를 재촉하면서 겨우 큰 바위 뒤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동시에 무서운 소리를 내며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사방은 이내 밤처럼 아주 캄캄해졌다. 나는 큰 바위 밑에 꼭 엎드리고 있었지만, 머리털이 남김없이 곤두서고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질 것같이 되었다. 잠시 후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갈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그 중에는 주먹보다 더 큰 바위 조각도 있었다. 위험했다. 1분만 더 늦게 피했어도 우리는 회오리에 휘말렸거나, 아니면 쏟아져 내리는 '돌비'를 맞아 몹시 다쳤을 것이다.
"고맙네, 한스. 자네 덕택에 살아났어."
폭풍이 지나가자 아저씨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한스는 한번 웃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다시 짐을 짊어지고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믿음직스러운 건장한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한스는 무뚝뚝하지만 정말 훌륭한 안내인이야."
오후 11시경에 우리는 스네펠스 산의 정상에 닿았다. 한밤중의 태양이 수평선 위에서 창백하게 빛나고 있다. 북위 65도로서 북극권에 가까운 이 지방에서는 여름 동안 밤이 되어도 해가 저물지 않는다. 우리들의 발 밑에는 지름이 2킬로미터이고 절구 모양인, 오래 된 분화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깊이는 5, 6백 미터나 될 듯싶다.
"이제부터는 이 절구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거야. 거기에 지구의 중심에 이르는 곧게 패인 굴이 있을 거야."
하고 아저씨가 말했다. 우리는 자꾸 무너지는 속돌의 경사면을 천천히 내려갔다. 밤이 끝날 무렵에야 우리는 겨우 절구의 밑바닥에 닿았다. 아저씨가 말한 대로 거기에는 곧게 패인 세 개의 굴이 있었다. 지름이 각각 30미터쯤 되는 깊은 우물 같은 굴이었다.
"아저씨, 이 세 개의 굴 중에서 어디로 내려가야 하는 거예요?“
"그 사크누셈의 암호에 '스카르타리스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곳으로 내려가라.' 고 씌어 있었지. 그러니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기다려 봐야지."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절구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북쪽에 창끝처럼 뾰족한 봉우리가 보였다.
"이보게 한스, 저 산 이름은 뭐라고 하는가?“
"스카르타리스입지요.“
"그럼 좋아. 우리는 지금 저 산 그림자를 주목하고 있어야 해.“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날은 흐린 날씨인데다 안개마저 끼기 시작하는 바람에, 아무리 기다려도 태양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따라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바위 옆에 천막을 치고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지옥의 입구
 
6월 28일에야 겨우 태양이 나타나 스카르타리스의 뾰족한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절구 밑바닥에 비쳤다. 그 그림자가 마치 해시계의 바늘 그림자처럼 조금씩 움직여 간다. 그런데 꼭 정오쯤에 산봉우리의 그림자는 세 개의 굴 중의 하나인 한가운데 굴에 어김없이 비쳐들었다.
“이거다! 이 굴을 따라 내려가면 지구의 중심에 닿을 수 있는 거야!“
아저씨가 자랑스레 외치고 한가운데 굴을 향해 달려갔는데, 거기에 닿자마자 이내,
“아, 이 바위에 사크누셈의 서명이 있구나, 악셀도 와서 봐."
하고 외쳤다. 굴 옆의 바위에 과연 글씨를 새긴 자국이 보였다. 비바람에 닳아서 반쯤 지워지려 하고 있었으나, 확실히 룬 문자로 '아르네 사크누셈'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백 년 전에 사크누셈이 이 굴을 내려갔었던 거야. 이젠 우리도 내려갈 준비를 해야겠다, 악셀.“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굴 가장자리에 가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는 이내 소름이 끼쳤다. 굴속은 아주 깜깜하여 얼마나 깊은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흡사 지옥의 입구 같다. 이런 곳으로 내려가면 두 번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내 눈앞에 금발의 그로이벤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죽기는 싫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저씨가 이 일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렇다. 한스가 내 편을 들게 하면 된다. 한스 역시 이런 굴속으로 들어가기는 싫을 것이다. 한스가 '싫다'고 말하면 짐을 지고 갈 사람이 없게 되니, 아저씨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봐요, 한스. 당신은 이 굴속으로 들어가겠어요? 아니면 이제부터 마을로 돌아가겠어요?“
나는 물어 보았다. 반드시 한스가 '나는 마을로 돌아가겠다. '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한스는 뜻밖에도 침착하게, "나는 주인님한테 돈을 받고 따라왔으니, 주인님이 '돌아가라.'고 말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네." 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글렀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단념했다. 그 사이에 아저씨는 길이가 120미터나 되는 로프를 반으로 접어 한가운데 부분을 고리로 만들어 굴 가장자리에 있는 큰 바위에 걸고, 로프의 양쪽 끝을 굴속에 축 늘어뜨렸다.
"악셀, 너는 이 로프를 잡고 내려가는 거야."
"하지만 아저씨, 짐이 무거워서 로프가 끊어질는지도 모릅니다.“
"무거운 짐은 먼저 던져 넣어 두면 되는 거야.“
아저씨는 떨어뜨려도 망가지지 않을 짐만을 따로 묶어서 굴속에 던져 넣었다. 짐은 여기저기의 바위에 부딪치면서 깊은 굴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럼 내가 먼저 내려가겠다.“
아저씨가 로프를 잡으려고 하자 한스가, "가만 계십쇼, 주인님. 안내인인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맨 먼저 로프를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이 아저씨이고, 맨 마지막에 내가 뒤따르는 순서로 천천히 내려갔다. 굴은 거의 수직이었지만, 군데군데 바위가 튀어 나와 있어서 발을 디디기가 좋았다. 간혹 갑자기 무서운 소리를 내며 바위가 무너지는 바람에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60미터쯤 내려가니 평탄한 선반같이 비죽 나온 바위가 있었다.
한스는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한쪽 로프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러자 맨 위의 바위에 매어 두었던 로프가 스르르 끌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 로프를 가까이 있는 비죽이 튀어나온 바위에 단단히 매어 두고, 우리는 다시 깊은 굴속을 향해 내려갔다. 로프의 길이는 60미터, 그만큼 내려가는 데 30분쯤 걸렸다. 우리는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꼭 열 네 번째에 수직으로 팬 굴 밑바닥에 닿았다. 먼저 던져 넣은 짐이 7, 8미터쯤 떨어진 곳에 무사히 뒹굴고 있었다.
"아저씨, 60미터씩 열 네 번 내려왔으니 우리는 지금 840미터나 깊은 곳에 와 있는 셈입니다. 이만큼 내려왔으면 충분하지요. 그러니 이제는 되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저씨는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작 지저 탐험은 이제부터란 말이다. 저길 봐."
아저씨가 가리킨 곳에 터널 입구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약 45도의 각도로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터널을 어디까지고 내려가면, 언젠가는 지구의 중심에 닿을 수 있는 거야. 오늘밤엔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하자."
아저씨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린 고기와 비스킷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아저씨와 한스는 맛있게 먹는 듯했지만 나는 거의 식욕이 없었다.
꺼칠꺼칠한 용암 위에 드러눕자, 우리가 내려온 곧게 패인 굴이 마치 커다란 망원경 안쪽처럼 보이고, 그 끝에 푸른 별 하나가 호젓이 보였다. ‘지금쯤 그로이벤은 뭘 하고 있을까? 그리고 마르타 할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나는 피곤해서 깊이 잠들어 버렸다.
 
해면 아래 3천 미터
 
"어서 일어나, 악셀. 이젠 떠나야 한다.“
아저씨의 목소리에 잠이 깨었을 때엔 오전 8시였다.
아저씨는 휴대용 전등을 켜자 앞장을 서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터널의 천장은 어지간히 높고, 석영의 결정이 전등에 반짝반짝 반사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터널은 곧바로 동남쪽을 향해 뚫려 있다. 이 터널은 그 옛날 스네펠스 산이 분화했을 때, 용암을 뿜어 올린 길이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스네펠스 산이 화를 내어 크게 분화를 시작해서, 시뻘건 용암을 뿜어 올리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만 한 가지 고마운 것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45도의 내리막 경사면이기 때문에 짐을 로프로 매어 끌고 가면 되는 것이다. 그 날 우리는 낮에 한 번만 쉬고 아래로 아래로 굴을 내려가, 오후 8시경에야 겨우 걸음을 멈춘다.
"오늘밤은 여기서 묵기로 하자."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기압계를 살펴보고 있다가, "우리는 지금 해면 아래 3천 미터의 깊이에 와 있는 거야, 악셀.“ 하고 말했다.
"3천 미터요? 그렇게 깊은 데까지 내려왔습니까? 하지만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학자들의 계산으로는 30미터를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오르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3천 미터의 깊이라면 백 도가 돼야 할 텐데, 이 한란계는 15도를 가리키고 있거든요. 곧게 팬 굴을 떠났을 때가 6도였으니 겨우 9도밖에 오르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자기가 직접 시험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야. 지저의 온도는 아마 학자들이 계산했던 것보
 다 훨씬 낮은 게 틀림없어."아저씨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6시에 일어나서 출발했다. 정오쯤에 우리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곳에 이르렀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아저씨?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글쎄 말이다. 어쩌면 사크누셈이 써 둔 표지가 있을지도 모르니 잘 찾아봐."
나는 전등으로 사방의 벽을 비춰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도표인 듯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어요, 아저씨."
"그럼 먼저 오른쪽 길을 가 보자. 거기가 막혀 있으면 여기까지 되돌아와서 왼쪽 길을 가보는 거야."
하고 아저씨가 말했다. 우리는 오른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네 시간쯤 지나자, 나는 이상한 일을 깨닫게 되었다. 로프를 매어 끌고 오던 짐이 갑자기 무거워진 것이다.
"아저씨, 이 길은 내리막이 아닙니다. 오르막이어요. 이대로 가면 지면 위로 나가 버립니다.“
"이 길이 오르막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그렇지만 짐을 끌어당겨도 움직이지 않는 거여요. 확실히 오르막이어요. 이봐요, 한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 길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알 수 있겠어요?“
"오르막입지요, 틀림 없습니다요.“
한스가 대답했다. 아저씨는 난처한 듯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비록 지금은 오르막이라도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또 내려가게 될 거야. 이젠 빨리 떠나자. 짐은 짊어지고 가는 거야.“
나는 아저씨가 고집이 센 데 한심함을 느꼈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으나, 두 시간쯤 가니 아주 지쳐 버렸다. 나는 여러 번 쉬면서 수통의 물을 마셨다. 물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저씨, 좀 기다려 주세요. 물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 이대로 나아가면 모두 죽어 버립니다.“
"걱정 마라. 여기는 지하니까 얼마 후에 반드시 샘이 있는 곳에 닿게 돼.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어서 기운을 내어 걸어가란 말야."
길은 어떤 때엔 오르막이 되고, 어떤 때엔 내리막이 되었다. 우리는 그 날 하루와 이튿날 하루 종일을 계속해서 걸었다.
사흘째 날 아침, 앞장을 서고 있던 한스가 돌연 멈춰 서서, "주인님, 이 길은 막혀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다가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터널이 끝나 있었다. 막다른 쪽의 벽은 석탄층인지, 손으로 만져 보니 검은 가루가 묻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저씨? 화약으로 폭파해서 이대로 나아가겠습니까?“
"아냐, 이런 좁은 곳에서, 더구나 석탄층인 장소에서 화약을 사용하는 건 위험해. 자칫하면 벽 전체가 무너져서 생매장될 우려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갈림길이 있는 데까지 되돌아가자. 그리고 다음엔 왼쪽 길을 나아가 보는 거다.“
되돌아가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낙심해 버렸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쓰러지면 두 번 다시 지상에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서 아저씨와 한스를 따라갔다.
수통의 물은 벌써 오래 전에 다 마셔 버렸다. 혀와 목구멍이 바싹 말라서 마치 사막 같았다. 아아, 물을 마시고 싶다! 혹시 지금 물 한 컵을 나에게 먹여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평생토록 그 사람의 노예가 되어 그를 섬겨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다.
아저씨와 한스가 가진 수통의 물도 역시 없어졌지만, 두 사람 다 한 마디도 푸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계속 걸어갔다. 돌아갈 때엔 갈 때보다 갑절이나 걸려서, 7월 7일이 되어서야 우리는 겨우 갈림길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나는 한시름 놓는 동시에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의식을 잃어버렸다.
 
나 혼자 가겠다
 
얼마쯤 지났는지 나는 꿈결 속에서,
“......가엾어라, 악셀.“
하고 말하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이내 잠이 깼다.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아저씨의 무릎에 안겨 있고, 옆에서 한스가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아, 악셀, 정신을 차렸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지. 나 때문에 공연히 고생을 했구나. 자, 물이 여기 있다. 어서 마셔요.”
아저씨는 내 입에 수통을 대어 주었다. 꿀꺽 마신 그 물맛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저씨? 샘을 발견하셨어요?“
"아냐, 지금 네가 마신 건 내 수통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물이야.“
“그럼 아저씨는 마시고 싶은 걸 참고 저를 위해 물을 남겨 두셨군요?“
"아니, 반드시 너를 위해 그랬던 건 아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 세 사람을 위해 남겨 뒀던 거야. 아무튼 너한테 도움이 돼서 다행이구나.”
"고맙습니다, 아저씨.“
나는 나도 모르게 아저씨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저씨 역시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그러나 아저씨는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우리들을 위해 마지막 한 모금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나는 이 때까지 아저씨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방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젠 분명히 알았다.
"이봐, 악셀.“
잠시 후 아저씨가 말했다.
"너한테 무척 고생을 시켰구나. 여기까지 참 잘 따라와 줬다. 그만하면 이제 됐으니, 너는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래, 한스를 데리고 가는 게 좋겠군."
"저희들더러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셔요?“
"나는 혼자 이 왼쪽 길을 따라 가 보겠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볼 작정이야.“
"그건 너무 무모한 일이어요. 혼자 지저로 들어가시다니, 목숨을 버리러 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목숨을 버리게 될는지 어떨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지. 나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치우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미야. 그러나 너는 다르지. 너는 아직 젊어. 노인인 내 흉내를 낼 건 없어. 어서 한스를 데리고 돌아가도록 해요."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가지고 갈 음식물과 계기류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혼자 갈 작정인 모양이다. 나는 문득 함부르크의 집을 떠나올 때, 그로이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로이벤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나에게, "아저씨를 잘 보살펴 드려요." 하고 말했었다. 혹시 내가 아저씨를 혼자 지저에 남겨 두고 뻔뻔스럽게 집에 돌아간다면, 그로이벤은 뭐라고 말할까? 그렇다. 아저씨를 저버리고 가다니, 그런 짓은 나로서는 할 수 없다 !
"아저씨, 잠깐 기다려 주셔요. 기어코 가시겠다면 저도 같이 가겠어요."
"악셀은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리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아저씨와 함께 가고 싶은 거여요. 같이 가게 해 주셔요."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따라와도 좋아. 하지만 한스는 뭐라고 말할까? 이봐, 한스, 자네 우리와 함께 가겠는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저는 주인님에게 고용돼 있습니다. 주인님이 그만두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같이 가겠습니다.“
한스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한스, 이 왼쪽 길을 가도 물이 없을지도 모르는 거야.“
"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느님만 알고 계시지요."
한스가 천천히 말했다.
"한스는 훌륭해! 잘 말했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느님의 뜻대로야. 그럼 이젠 떠나자. 어때, 악셀은 걸을 수 있겠니?“
"문제없습니다.“
나는 물을 마신 덕분에 상당히 기운이 나 있었다. 그래서 짐을 짊어지자 아저씨와 한스를 뒤따라 왼쪽 터널을 나아갔다.
 
야, 물이다, 물!
 
약 두 시간쯤 나아가자 길은 다시 내리막이 되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래가 무너져서 줄줄 미끄러 떨어진다. 이렇게 되니 짐을 로프에 매어 끌고 가면 되므로 아주 편했다. 아저씨는 이따금 전등으로 천장과 벽을 비추면서, "저걸 봐, 악셀, 이 근처는 모두 화강암이야. 이런 장소에는 흔히 샘이 있게 마련이지. 이제 곧 물을 마실 수 있게 될 테니 기운을 내라.“ 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 날 우리는 밤 8시경까지 마냥 걸었다. 압력계로 측정해 보니, 지금 우리는 해면 아래 6천 미터의 깊이에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뜻밖에 빨리 왔구나."
아저씨는 기쁜 듯이 말하면서 공책에 숫자를 적어 두었다. 아저씨는 아무리 지쳐 있을 때라도, 그 날 걸어간 거리와 방향이며 온도 등을 또박또박 기록해 두었다. 이튿날 아침엔 6시에 일어나서 출발했다. 길은 여전히 내리막길이었지만 가도가도 끝이 없어서, 애타게 찾고 있는 샘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한스는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하였으나, 나는 목만 마르고 아무 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린 고기 따위는 냄새를 맡기만 해도 메슥메슥해졌다. 그저 애타게 물만 마시고 싶었다. 오후 3시경에 나는 별안간 현기증이 나서 앞으로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앗, 악셀, 왜 그래?“
아저씨가 달려와서 나를 안아 일으켰다.
"아저씨, 저는 이젠 더 걷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내버려두고 먼저 가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한 사람을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겠니. 너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지쳐 있을 뿐이야. 잠시 쉬면 곧 나을 거야."
아저씨는 짐 속에서 담요를 꺼내서 모래 바닥에 깔고 나를 뉘어 주었다. 잠시 가만히 누워 있자 겨우 현기증이 가셨다. 그 때 나는 문득 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아저씨, 한스는 어떻게 됐어요?“
"한스 말이냐? 글쎄, 어딜 갔을까? 조금 전까지 분명히 내 옆에 있었는데......”
"어쩌면 집에 돌아가고 싶어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당치않은 말은 하지 마라. 한스 같은 사람이 우리를 버리고 달아날 리가 있니. 아마 혼자 먼저 갔을 테지."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지금쯤은 되돌아와야 되잖아요."
나로서는 아무래도 한스가 달아났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한스도 인간이고, 이렇게 괴로운 일만 계속되면 달아나 버리고 싶어질 것이다. 그 때다. 돌연 터널 앞쪽에서 불빛이 깜박이더니 한스의 듬직한 몸집이 쑥 나타났다.
"주인님, 물이 있군요."
"물이 있다고? 정말인가, 한스? 자네는 정말 물을 마셨나?“
"아뇨, 아직 마신 건 아닙니다. 다만 물소리만 들었습니다.“
"물소리가? 그럼 그 곳에 우리를 데리고 가 주게."
아저씨가 외쳤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한스를 뒤따라가면서, 한스를 의심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달아나기는커녕 앞으로 먼저 나아가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낸 것이다.
"바로 여깁니다. 벽에 귀를 대 보십시오. 물소리가 들리지요?“
그가 말한 대로 암벽에 귀를 대 보니, 지축을 흔드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음, 이건 확실히 물소리야!“
아저씨가 외쳤다.
"이 벽 저쪽 편에 지하수가 흐르고 있어. 이젠 이 근처를 잘 찾아봐. 어디엔가 물이 스며 나와 있을 거야."
우리는 화강암 벽과 그 아래쪽 언저리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이 나와 있지 않고 바싹 말라 있었다. 아저씨는 몇 번이고 벽을 탁탁 두드려 보면서, "안 되겠군. 이 화강암 벽은 두께가 1미터나 돼. 이 정도면 도저히 물은 구할 수 없어."하고 낙심한 듯이 말했다. 모처럼 물소리를 들으면서 한 모금도 물을 마실 수가 없다는 것을 알자, 나는 기진맥진하여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한스만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벽을 따라 왔다 갔다 하더니, 돌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에 짊어진 짐 속에서 곡괭이를 꺼내어 화강암 벽을 힘껏 찍었다.
"아니, 한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벽이 제일 얇습니다. 여기를 뚫으면 틀림없이 물이 솟아날 겁니다.“
한스는 힘 자라는 대로 몇 번이고 곡괭이를 찍었다. 그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바위가 너무 견고해서 한 시간이 지났는데, 겨우 30센티미터쯤밖에 파나가지 못했다. 한스는 수없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하고 교대할까요, 한스?“
내가 이렇게 말을 건넸을 때였다. 돌연 한스의 곡괭이 끝에서 슈욱 하는 소리가 나더니, 굉장한 기세로 물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소방 펌프의 호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듯한 기세였다.
"와아!“
한스의 육중한 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아, 물이다! 물이다!“
나는 달려가서 두 손으로 그 물을 떠받으려고 했으나, 그 순간 ‘앗, 뜨거워.’ 하고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찬물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델 것같이 뜨거웠던 것이다. 모르기는 하지만 백 도 가까이 될 듯싶었다. 사방은 이내 자욱한 김에 휩싸여 버렸다.
“아저씨, 저건 온천입니다. 뜨거워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어요.“
“얼마 후엔 식을 테니 너무 초조하게 생각지 말고 기다려 봐."
아저씨가 말했다. 뜨거운 물은 연방 넘쳐 나와, 냇물같이 터널 속을 흘러갔다. 잠시 후 조심조심 두 손으로 떠보니, 아닌게 아니라 아저씨가 말한 대로 마시기 좋을 만큼 식어 있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아저씨도 한스도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손으로 물을 떠서는 훌쩍훌쩍 계속 마셨다.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뜨거운 물은 쉴 새 없이 연방 솟아 나온다.
"아저씨, 이대로 버려 두기는 아깝군요. 수통에 넣을까요?“
"하하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물줄기를 따라 자꾸 내려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지구의 중심에 닿을 수 있게 되지. 목이 마르면 이 냇물을 마시면 되는 거야.“

"아아, 그렇군요. 냇물이 우리를 안내해 주는 셈이군요. 그런데 아저씨, 이 물은 원래 한스가 발견한 것이니, 이 냇물에 '한스 천'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이봐 한스, 자네 공로를 기념해서 이 냇물을 한스 천이라고 이름짓겠네. 이 이름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거야."
아저씨는 수첩을 꺼내어 '7월 8일, 한스 천을 발견.'이라고 적어 두었다. 그러나 한스는 조금도 기쁜 듯한 얼굴을 보이지 않고, 담요를 꺼내어 재빨리 잘 준비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어느 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미아가 되다
 
이튿날 우리는 딴 사람이 된 것같이 씩씩해져서 여행을 계속했다. 우리들의 발 밑으로는 한스 천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물을 마시고 싶을 때엔 언제든지 마실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식욕이 나서, 한스와 아저씨 못지 않게 무엇이든지 실컷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길은 어떤 때는 가파른 내리막이 되고, 또 어떤 때는 곧게 팬 수직 굴이 되었다. 곧게 팬 굴에선 한스 천이 흡사 폭포같이 되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바위의 모난 귀퉁이에 로프를 매어 두고, 물보라를 받으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기어 내려갔다.
8월 7일, 우리는 드디어 해면 밑으로 130킬로미터의 깊이에까지 도달했다. 걱정했던 기온은 그다지 높아지지 않아서 고작 27도였다.
"아저씨, 우리는 대체로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해 걸어왔지요? 그래서 깊이는 알게 됐지만, 출발한 데서부터 얼마쯤이나 멀리 떨어진 곳일까요?“
"내 계산으로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스네펠스 화산의 동남쪽으로 약 5백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지점일 게다.“
"5백 킬로미터라고요 ? 그렇게 멀리 떨어졌어요? 그럼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아이슬란드의 지하를 떠나 대서양 바로 밑에 와 있는 셈이군요!“
"그렇지.“
"놀랍군요. 바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 바다가 있겠네요. 만일 바다의 밑바닥이 뚫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바닷물에 빠져 버리겠군요."
"하하하, 지각의 두께는 130킬로미터나 된다. 따라서 무너질 염려는 절대로 없으니 안심해."
그러나 나는 머리 위에서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넘실거리고 범선이 달리고 고래가 헤엄쳐 다닌다고 생각하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튿날엔 길이 신기하게 평탄해졌다. 한스 천은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흐르고 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앞장을 서서 나아갔다. 얼마쯤 지났는지, 나는 문득 내가 외토리가 된 것을 깨달았다. 뒤돌아보았으나 두 사람의 모습은 물론이고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
나는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터널 속에 요란하게 메아리만 칠 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야단났군! 길을 잘못 들어선 거야!“
전등으로 발 밑을 비춰 본 나는 섬뜩해졌다. 한스 천이 어느 새 없어졌다. 확실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어디서 잘못 들어섰을까? 그렇지, 아까 길모퉁이가 있었어. 거기서 터널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는데, 나는 그만 아저씨와 한스와는 다른 터널로 와 버린 거야!“
내가 당황해서 되돌아가려고 달리기 시작한 순간, 바위 귀퉁이에 발이 걸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휴대용 전등이 깨지는 바람에, 사방은 이내 칠흑같이 캄캄해져 버렸다. 나는 이런 어둠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손을 코끝에 가져가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장님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저씨, 어디 계셔요? 저를 도와 주셔요!“
나는 미친 듯이 외치면서 손으로 더듬으며 걸어가다가 이마를 바위 귀퉁이에 호되게 찧어 버렸다. 손으로 이마를 만져 보니 피가 나왔는지 끈적거렸다. 그러나 그 피의 빛깔조차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시간 가량 울부짖으면서 어둠 속을 기어다녀 보았으나, 끝내 기진맥진하여 축 늘어진 채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는 틀렸다. 여기서 죽는 수밖에 없다.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로이벤도 마르타 할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고사하고 내 시체는 백골이 된 채 영원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문득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봐, 악셀! 어디 있어?“
그것은 어딘가 먼 나라에서 들려 오는 듯한 아스라한 목소리였으나, 아저씨의 목소리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길을 잘못 들어서서 미아가 된 겁니다. 빨리 구해 주십시오."
"걸을 수 있겠느냐?"
"걸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전등을 떨어뜨려서 깨져 버렸어요.”
"알겠다. 그럼 먼저 네가 어디쯤 있는지 거리를 재어보자. 내 말을 잘 들어라, 악셀. 내가 시계를 보면서 네 이름을 불러 보겠다. 너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 곧 대답을 하는 거다. 알았지?”
"알았습니다. 소리가 전해지는 시간으로 거리를 재는 거군요?“
"그렇지. 그럼 부르겠다. 이봐, 악셀."
"예, 아저씨."
나는 한껏 목청을 돋워서 대답했다. 잠시 후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꼭 40초구나. 왕복 40초니 한쪽은 20초 소리가 공기 속에서 전해지는 속도는 1초에 340미터니까, 20초 후면 6천 8백 미터 - 약 7킬로미터구나."
"7킬로미터라구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그다지 먼 거리는 아냐. 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야 한다. 악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터널 속의 굉장히 큰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터널의 출구가 여러 군데 있지. 네가 지금 있는 터널도 이 공간과 통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걸어오면, 반드시 내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을 거야. 알겠니, 악셀? 너는 전등이 없으니 급히 서둘러서는 안 돼.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걸어와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기어오는 게 좋아. 네가 여기까지 오면 깜짝 놀랄 일이 있단다. 그걸 기대하면서 끝까지 버티는 거야. 알겠지?“
"알았습니다."
7킬로미터의 길을 손으로 더듬으며 기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날 길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티어 냈다. 아저씨는 1분마다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뚜렷해졌다.
"악셀, 이제는 백 미터 가량밖에 남지 않았으니 기운을 내."
아저씨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앞쪽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젠 한 고비만 남았다! 나는 기쁜 나머지 아저씨가 주의해 주던 말도 잊어버리고, 느닷없이 일어서서 밝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연 내 몸이 둥실 공중에 떴다. '앗 !' 하고 비명을 질렀을 때엔 이미 늦었다. 내 몸은 공중제비를 해서, 수직으로 팬 깊은 굴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뒷머리가 무언가 딱딱한 것에 부딪힌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기절을 해 버렸다.
 
땅 밑의 바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엔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고 담요 위에 뉘어져 있었다. 아저씨가 근심스러운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아, 아저씨, 저는 무심코 똑바로 패인 굴속에 떨어졌었나봐요.“
"그래. 하지만 그건 내 실수였어. 네가 오고 있는 길에 그런 굴이 있을 줄은 몰랐던 거야. 어때, 상처가 몹시 아프니?“
"대단치는 않아요.“
"다행이군. 한스가 붙여 준 아이슬란드의 약초가 효과가 있었던 거다. 너는 이틀 동안이나 기절을 하고 있었단 말야.“
"이틀 동안이나요?“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는 굉장히 넓은 곳이군요. 그리고 전등도 켜지 않았는데 이렇게 밝은 건 무엇 때문입니까?“
"나도 모르겠어. 아마 오로라 같은 공중 전기의 작용 때문일 테지."
"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거여요?“
"한스는 지금 뗏목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뗏목이라뇨? 그런 걸 만들어서 무엇에 쓰려고요?“
"하하하, 이제 곧 알게 된다. 그런데 악셀, 너 걸을 수 있겠니?“
"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픈데요. 먹을 것 좀 주십시오."
"그래.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어."
비스킷과 말린 고기를 배가 부르게 잔뜩 먹은 나는 원기 왕성해졌다.
"그럼 악셀, 이젠 떠나자.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
잠시 아저씨를 뒤따라가니 깊은 숲이 있었다. 숲이라고 해야 보통 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높이가 15미터나 되는 거대한 버섯 숲이었다. 갓 모양의 윗부분의 지름도 넉넉히 10미터쯤은 되었다.
"정말 엄청나게 큰 버섯이군요. 저는 거인국에 들어간 걸리버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하하하, 그럴 테지. 그런데 저 버섯의 밑동을 잘 보란 말이야.“
버섯의 밑동에는 횐 뼈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동물의 뼈 같군요.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큰......
"이건 1억 2천만 년 전쯤에 지구에서 번성했던 공룡의 뼈야.“
"공룡이라고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그 공룡이 살아 남아 있어서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기라도 하면 큰일이군요."
"그럴 염려는 없을 게야. 그럼 이번엔 이 언덕 위로 올라가 보자.“
언덕 위에 올라간 나는 엉겁결에 '앗! ' 하고 외쳤다. 눈앞에 마치 바다처럼 커다란 호수가 넓디넓게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거센 바람이 불어서 호숫가에는 철썩철썩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저 편 호숫가까지 얼마쯤 떨어져 있는지, 수평선 언저리는 어렴풋이 푸른빛에 싸여 있었다. 나는 흡사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놀랍군요. 땅 밑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다니......“
"아냐, 이건 호수라기보다 바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거야 저 편 물가까지 넉넉히 150킬로미터는 될 게다. 나는 이 바다에 '리이덴브로크 해'라는 이름을 붙였어. 어때, 악셀, 좋은 이름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아저씨, 이런 바다가 있으니 이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겠군요. 우리들의 탐험은 여기서 끝나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는 뗏목을 타고 이 바다를 건너는 거야. 나를 따라와 봐, 악셀."
물가를 따라 잠시 가니 물결이 잔잔한 후미진 데가 있었다. 거기서 몸집이 큰 한스가 나무를 로프로 비끄러매어 부지런히 뗏목을 만들고 있었다. 뗏목의 길이는 5 미터이고, 너비는 3미터쯤 되었다.
"여, 도련님, 이젠 다 나았나요?“
한스가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빙긋 웃었다.
"한스는 저 나무를 어디서 구해 왔을까요, 아저씨?“
"저건 나무가 아니라 화석이야."
"화석요? 화석이라면 무거워서 물에 가라앉아 버릴텐데요.“
"그렇지 않아. 이 근처의 화석은 마치 속돌처럼 속에 공기가 들어 있어서 걱정 없어. 이걸 봐라.“
아저씨는 물가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 바다에 던져 넣었다. 돌멩이는 한 번은 가라앉았지만 이내 가볍게 떠올랐다.
"어때, 뜨지? 우리는 화석의 뗏목을 타고 이 바다를 건너가는 거야. 그럼 이제는 악셀도 뗏목을 만드는 일을 거들어라.“
나는 아저씨의 열정에 어이없기보다도 감탄해 버렸다. 아저씨는 앞길에 바다가 있든 냇물이 있든 절대로 단념하지 않고 어디까지라도 전진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한스를 거들어서 길쭉한 화석으로 마스트를 만들고, 납작한 화석으로 노를 만들고, 담요를 잇대어 돛을 만들었다. 8월 13일, 마침내 뗏목이 완성되었다. 식료품과 다른 짐들도 실었다.
"이제는 출범이다. 한스는 돛을 올려라."
담요로 만든 돛이 오르자 뗏목은 북서풍을 타고 조용히 물가를 떠났다.
"오늘의 출범을 기념해서 이 후미를 '악셀 항구'라고 부르기로 하는 게 어떨까, 악셀?“
"그보다도 '그로이벤 항구'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더 멋있을 것 같아요."
"참, 너는 그로이벤을 좋아했지. 좋아, 그럼 그로이벤 항구라고 부르기로 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저씨는 내가 그로이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뗏목은 시속 10킬로미터로 동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아저씨, 지금 우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요?“
"아이슬란드의 동남쪽 약 천 5백 킬로미터쯤이지."
"그럼 북해 밑을 뚫고 나가 스코틀랜드 근처군요. 놀라와요. 땅 밑에 이렇게 큰 바다가 있다니...... 그런데 아저씨, 바다 빛깔이 점점 파래지기 시작했어요. 물고기가 있을지도 모르니 낚시질을 해 볼까요?“
"좋아, 해 보려무나."
나는 낚시 바늘에 말린 고기를 꿰고, 거기에 긴 끈을 달아서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5분도 못 되어 뚜렷한 반응이 있었다. 급히 끌어 올려 보니 길이가 30센티미터쯤 되는, 마치 갑옷같이 딱딱한 비늘이 있는 물고기가 걸려 있었다.
"아, 아저씨, 이 물고기는 눈이 없는데요. 어떻게 된 걸까요?“
"어디 보자. 음, 이건 갑주어라고 하는데, 3억 5천만년 전쯤에 살고 있었던 물고기지. 지상에선 완전히 멸종해서 지금은 화석으로밖에 발견되지 않는데, 그런 것이 이 지하의 바다에 살아 남아 있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왜 눈이 없을까요?“
"오랫동안 아주 캄캄한 바다 밑에 있었기 때문에 눈이 필요하지 않게 돼서 자연히 없어져 버렸겠지. 그걸 구워 먹어 보는 게 어때, 악셀?“

"이런 기분 나쁜 물고기는 싫습니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3억 5천만년 전의 물고기가 살아 남아 있다면, 어쩌면 전세기의 괴물- 예컨대 뱀처럼 목이 긴 플레시오사우루스(수상룡)가 이 근처의 바다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아저씨에게 이런 말을 하면 ‘겁쟁이’라며 비웃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아무도 몰래 라이플 총을 끌어당겨 탄환을 장전해 두었다.
 
앗, 괴물이다!
 
8월 16일--출범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여태 저편 바닷가는 보이지 않는다. 바다의 빛깔은 마치 잉크를 뿌려 놓은 것처럼 검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악셀은 바다의 깊이를 재어 봐라.“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곡괭이 자루에 긴 로프를 비끄러매어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 스르르 로프가 풀려갔다. 끝내 깊이 360미터의 로프를 전부 끌어내어 던졌지만 아직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어림없습니다, 아저씨. 이것으론 닿지 않습니다
"그럼 굉장히 깊구나. 이젠 됐으니 끌어 올려.”
나는 간신히 로프를 끌어올리고 곡괭이를 뗏목 위에 내던졌다. 한스는 노를 저으면서 물끄러미 곡괭이를 바라보고 있더니, 돌연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 거야, 한스?“
"곡괭이에 이빨 자국이 있군요? 무언가가 이 곡괭이를 씹은 게 틀림없습니다.“
"뭣이, 이빨 자국이 있어?“
곡괭이를 본 나는 섬뜩했다. 곡괭이의 쇠붙이 부분이 세 군데나 움푹 패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드릴로 도려낸 것 같다.
"아저씨! 이 바닷속엔 무서운 괴물이 있어요. 그게 이 곡괭이를 씹은 겁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단한 쇠에 이빨 자국을 내는 괴물-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아저씨는 이빨 자국을 이모저모 세밀하게 살펴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괴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증거다. 나는 또 하나의 라이플 총에도 탄환을 장전하여 아저씨에게 건네주었다. 오후 6시경에 덜컥 하는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가 타고 있는 뗏목이 10미터쯤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와아, 야단났다!“
우리는 당황해서 마스트에 매달렸다. 한순간만 늦었더라도 우리는 세 사람 다 바닷속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뗏목을 들어올리는 괴물 어쩌면 이것은 괴물이 아니라 고래가 아닐까?
그런데 돌연 뗏목의 앞쪽 백 미터쯤에 괴물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고래는 아니다! 거대한 뱀같이 목이 긴 괴물이다! 쩍 벌린 입에 톱니 같은 이빨이 죽 드러나 있다.
"아아, 저건 공룡의 일종인 플레시오사우루스다! 저놈한테 당하면 꼼짝 할 수가 없어. 한스, 빨리 노를 저어서 뗏목을 돌려. 달아나야 해!“
아저씨가 외쳤다. 그러나 한스는 노를 저어 뗏목을 돌리려고는 하지 않고, 말없이 뗏목의 뒤쪽을 가리켰다. 뒤돌아본 나는 머리에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오싹 소름이 끼쳤다. 또 한 마리 다른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언뜻 보았을 때 나는 악어인 줄 알았다. 깔쭉깔쭉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악어가 아니라, 돌고래 같은 주둥이와 꼬리지느러미가 있는 괴물이었다.
"저건 이크티오사우루스(어룡)다! 저놈은 육식을 하는 짐승이야! 악셀, 너는 앞쪽의 수장룡을 쏴! 나는 뒤에 있는 놈을 쏠 테니."
아저씨가 외쳤다. 나는 연방 라이플 총을 발사했다. 한발은 확실히 명중했다고 생각했지만, 수장룡은 끄떡도 하지 않고 10미터나 되는 긴 꼬리로 해면을 철썩철썩 때리면서 뗏목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해 왔다.
"한스, 빨리 뗏목을 돌려요, 어물어물하다가는 꼼짝없이 당해!“
내가 소리쳤다. 그러나 한스는 어찌 된 셈인지 노를 저어 뗏목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너무 겁이 나서 멍청해져 버린 것일까?
뗏목은 바람에 밀려서 거침없이 수장룡 쪽으로 나아간다. 이제 남은 거리는 10미터, 이윽고 5미터까지 접근했다. 수장룡의 거대한 머리가 대번에 뗏목 위에 덮쳐 왔다. 인처럼 창백하게 빛나는 눈, 훤히 드러나 보이는 횐 어금니. '아아, 이젠 살아나기는 틀렸다 !' 하고 생각한 순간, 한스가 힘껏 노를 저어 뗏목을 옆으로 돌렸다. 뗏목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오른쪽으로 크게 돌았다. 그 순간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수장룡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래위로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괴수의 밥이 될 뻔했다. 겨냥이 빗나간 수장룡은 한 번 깊이 물 속에 잠겼다가, 잠시 후 또다시 그 긴 목을 물위에 쑥 내밀었다. 그 순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타고 있는 뗏목 뒤에서 무서운 속력으로 쫓아 온 어룡이, 악어 같은 입을 꽉 벌리고 수장룡의 목을 힘껏 물어 버린 것이다.
"카악!“  
수장룡은 소름이 끼치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뱀처럼 긴 목을 잽싸게 놀려서 어룡의 등지느러미 언저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하여 두 마리의 괴수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이내 맹렬한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마치 폭풍을 만났을 때처럼 물결치고, 세찬 물보라가 분수처럼 우리들의 뗏목에 내리쏟아졌다.
한스는 머리에서부터 흠뻑 젖으면서도 침착하게 노를 젓고 있다. 뗏목은 북서풍에 돛을 부풀리면서 거침없이 괴수들의 싸움터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소 한스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영리한 한스는 맨 처음부터 두 마리의 괴수가 서로 싸우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수장룡이 습격해 오는데도 달아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쪽을 향해 다가갔다가, 마지막 순간에 뗏목의 방향을 핵 돌려놓았던 것이다. 얼마나 침착하고 배짱이 있는 사내인가! 괴물끼리 싸우게 해 두고 그 틈에 달아나다니......
"카악!“
"쿠욱!“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괴물들은 아직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도 차차 멀어지고, 그 모습도 이윽고 물결 저 편에 숨어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맙네, 한스. 자네 덕택에 또 살아났어."
아저씨가 젖은 상의를 짜며 말했다.
그러자 한스는 횐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괴물이 두 마리뿐이었기에 다행이었죠. 그게 혹시 세 마리였더라면 우리는 꼼짝 못하고 당했을 겁니다.“
"자네는 무섭지도 않던가?“
"웬걸요, 저 역시 겁이 났지요. 그렇지만 겁이 난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손을 써 보지 않고서는......“
나는 더욱더 한스가 좋아졌다. 이 사람이 같이 있어 주는 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걱정 없다고 생각했다.
 
큰 폭풍
 
그로부터 닷새 동안쯤 평온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뗏목은 서북풍을 받아, 시속 1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동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아저씨, 어디까지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군요."
"음, 아마 이 바다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모양이구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아이슬란드의 동남쪽으로 약 2천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바로 영국 해협 언저리야."
"이렇게 바다 위를 수평으로 달리고 있으면, 지구의 중심에는 다가가지 못하겠군요."
"그렇단다. 한시바삐 육지에 닿아서 수직으로 패인 굴이나 터널을 발견해야 해.“
아저씨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그런데 8월 20일, 돌연 바람이 딱 멈추어 버렸다. 담요로 만든 돛은 축 처졌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사방의 공기는 마치 한증막에 들어간 것같이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아저씨의 머리를 본 나는 '앗! ' 하고 외쳤다. 아저씨의 머리카락이 흡사 바늘을 심어 놓은 것같이 한올한올 곤두서 있는 게 아닌가.
"큰일났어요, 아저씨. 아저씨의 머리카락이 죄다 곤두서 있어요.“
"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스의 머리를 보란 말야."
한스를 돌아다본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스의 텁수룩한 머리털과 붉은 수염이 마치 실로 매어서 끌어올린 것처럼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것이다.
"이건 대관절 무엇 때문일까요, 아저씨?“
"공중 전기의 작용이다. 악셀, 네 머리털을 비벼 봐.“
내가 머리털을 비벼 보니, 고양이의 등을 거꾸로 문질렀을 때처럼 불꽃이 튀었다.
"도련님, 장난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제 곧 큰 폭풍이 몰아닥칠 겁니다. 빨리 돛을 내리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한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뗏목 위의 짐을 로프로 비끄러매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나는 담요로 만든 돛을 내리려고 했다. 다음 순간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돌풍이 덮쳐왔다. 눈 깜박할 사이에 돛은 리본처럼 찢어져서 바다 위로 멀리 날려 가버렸다.
지금까지 기름을 흘려 놓은 것같이 잔잔하던 바다에 산더미 같은 큰 파도가 일어, 뗏목은 마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가볍게 마구 흔들렸다. 우리는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마스트 밑동에 단단히 몸을 비끄러매어 두고 있었으나, 그 마스트도 밑동만을 1미터쯤 남겨 두고 툭 부러져 버렸다. 돌연 번개가 번쩍거렸다. 그러자마자 우리가 타고 있는 뗏목에서 겨우 백 미터쯤 떨어진 바다 위에 거대한 불기둥이 솟았다. 동시에 고막이 터질 듯한 천둥이 울렸다.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마스트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뗏목에 벼락이 떨어져서 우리는 시꺼멓게 타 죽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세찬 폭풍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뗏목은 거센 바람을 받아 사정없이 자꾸 밀려가기만 했다.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싶어, 나는 몇 번이고 컴퍼스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공중 전기의 작용으로 바늘이 제 구실을 못 하게 되어 버렸는지, 어떤 때는 동쪽을 가리키고 어떤 때는 서쪽을 가리켜서 전혀 쓸모가 없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야 겨우 폭풍이 그쳤다. 한스는 이내 짐을 살펴보고는, "죄송하게 됐군요, 주인님. 말린 고기를 넣은 봉지와 라이플 총 두 자루가 파도에 휩쓸려 가 버렸습니다." 하고 미안한 듯이 말했다. 짐을 잃은 것이 자기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괜찮아, 한스. 아직도 비스킷과 어포가 남아 있어.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두 달 동안 탐험을 계속할 수 있으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차라리 식료품 같은 것은 모조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무리 고집스런 아저씨라도 탐험을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저씨가 이렇게 열심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 탐험에 성공하게 해 드리고 싶다.' 고 하는 심정도 있었다.
학자들이 자기가 하는 연구에 열심이라는 것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저씨와 함께 여행을 해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참된 학자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저씨는 자기 자신의 연구에 생명을 걸고 있는 것이다.
8월 26일 아침, 뗏목의 이물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던 한스가 별안간,
"앗, 육지가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아저씨와 나도 벌떡 일어서서 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10킬로미터쯤 바로 앞쪽에 검은 바위산 같은 것이 둥그스름하게 솟아올라 있고, 그 기슭에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음, 확실히 육지군. 이젠 기뻐해라, 악셀. 지저의 바다는 여기서 끝이다. 우리는 저 육지에 올라가 지구의 중심으로 통하는, 곧게 내리팬 굴을 찾아내는 거야."
아저씨는 자못 기쁜 듯이 손을 비비적거렸다. 정오쯤에 뗏목은 무사히 바닷가에 닿았다.
"아저씨, 우리는 그 폭풍 때문에 무척 멀리까지 밀려난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쯤일까요?“
"글쎄 말이다. 도중에 자석이 잘못되는 바람에 잘 모르겠지만, 그대로 곧바로 남동쪽으로 나아갔다면, 우리는 이미 프랑스의 지하를 통과해서 지중해 밑에 쯤 와 있을 게다.“
"지중해 밑에요? 그럼 아이슬란드에서 3천 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셈이군요."
"그렇지. 이젠 악셀과 나는 상륙해서 곧게 팬 굴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한스는 뗏목에 남아 부서진 데를 수리 해 주게.“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주인님, 너무 멀리 가시면 안됩니다. 라이플 총이 없이는 위험하니까요.“
한스가 말했다. 아저씨와 나는 수통을 허리에 차고는 피켈을 가지고 상륙했다.
 
거대한 코끼리와 원시인
 
모래톱을 잠시 걸어가니 큼직한 흰 뼈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야, 이건 마스토돈의 뼈구나!“
아저씨가 소리 쳤다.
"마스토돈이란 신생대의 중간쯤- 지금으로부터 3천만 년 전쯤에 지상에 살고 있었던 거대한 코끼리지. 이걸 봐, 여기에 어금니가 있군. 그런데, 이건 뭘까?“
아저씨가 파낸 것은 굉장히 큰 해골이었다. 인간의 두개골의 세 배는 넉넉히 됨 직했다.
"이거 굉장하군요. 고릴라의 머리일까요?“
"아냐, 그렇지 않아. 이건 확실히 인간의 두개골이야! 이렇게 큰 인간의 두개골은 아직 한 번도 지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거야. 악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두개골을 지상에 가지고 돌아가고 싶구나. 모두 무척 놀랄 거야.“
"하지만 아저씨, 이렇게 무거운 건 도저히 가지고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게 내리팬 굴을 찾아야 하니까 어서 가시죠."
나는 아저씨를 끌고 가다시피 하며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가자 깊은 숲이 있었다. 높이가 20미터쯤 되는 유칼립투스를 비롯하여 전나무며 자작나무 등이 우거져서, 그 밑은 해질 무렵처럼 어둑어둑했다.
"이건 마치 오스트레일리아의 큰 삼림 같군요......”
"음, 태양 광선이 없는 곳에서 용케도 이렇게 잘 자라왔군."
우리는 담쟁이덩굴과 가시나무를 헤치면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돌연 앞쪽에서 나뭇가지가 툭툭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건 대체 뭘까? -‘ 나무숲 사이로 살펴본 나는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이 놀랐다. 무지무지하게 큰 코끼리가 동물원에서 본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서너 배나 더 큰 거대한 코끼리가 긴 코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나뭇잎을 질근질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 저건 마스토돈이다!”
아저씨가 외쳤다.
"3천만 년 전의 마스토돈이 여태까지 이 지저 세계에 살아 남아 있었구나. 이건 정말 희한한 발견이야! 좋아, 나는 저 코끼리를 사생하겠어!“
아저씨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아저씨. 혹시 저 코끼리가 덤벼들기라도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우리에겐 라이플 총이 없어요. 그러니 들키기 전에 빨리 달아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스케치가 끝나기 전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테다.“
아저씨는 한사코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옆에 한 그루의 커다란 전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저씨, 저 나무에 올라가요. 저기라면 안전해요."
나는 나무에 오르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지상에서 7, 8미터 높이의 굵은 나뭇가지에 오르자, 로프를 아래로 드리워서 아저씨를 끌어 올렸다.
"음, 여기라면 특등석인걸."
아저씨는 기쁜 듯이 말하고 스케치를 계속했다. 거대한 코끼리는 나무를 자꾸 밀어 쓰러뜨리면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빨리 사생이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문득 묘한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에서 세 마리의 기묘한 동물이 뒷발로 서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언뜻 봤을 때엔 나는 고릴라인 줄 알았다. 이마가 좁고 턱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고릴라치고는 너무 크다. 신장은 3미터는 충분히 될 것 같다. 긴 머리털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얼굴에 드리워져 있다.
"아저씨, 아저씨, 저기 좀 보세요. 이상한 게 오고 있어요.“
"어디에? 앗, 저건 원시인간이다!“
아저씨의 안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저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조상이야. 아까 본 거대한 두개골의 임자란 말이다. 으음, 정말 굉장한 것들이 나타났구나.“
"우리를 해칠 작정일까요?“
"아냐, 저들이 노리고 있는 건 아마 저 마스토돈일 거야. 저걸 봐,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있지. 저걸로 마스토돈과 싸우는 거야. 알겠니, 악셀, 절대로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세 사람의 원시인들은 앞쪽의 마스토돈에 정신이 팔려서, 나무 위에 우리들이 숨어 있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전나무 바로 아래까지 오자 '끽끽.' '깩.' 하고 짐승 같은 목소리로 서로 신호를 하면서 세 방향으로 흩어지더니, 마스토돈을 멀리서 둘러싸려는 듯이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봐, 악셀, 이 틈에 나무에서 내려가 달아나야 해."
"달아나다니요? 원시인과 마스토돈과의 싸움을 구경하지 않을 겁니까?“
"그런 소리 마라. 우리들에게 무서운 건, 마스토돈이 아니라 원시인이야. 아마 자기네 패거리들과 무리를 짓고 있을지 모르니까, 들키는 날엔 크게 변을 당하게 된다. 자, 빨리 내려가자."
우리는 전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오자 바닷가를 향해 꽁무니가 빠지게 달리고 또 달렸다. 세 시간 후에 우리는 간신히 바닷가의 뗏목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충실한 한스는 우리가 없는 동안에 숲에서 나무를 베어 와서 마스트를 만들고, 담요를 기워서 잇대어 돛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노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아저씨?“
"육지는 위험하니 얼마 동안 바닷가를 따라 나아가기로 하자.“
뗏목은 새로 만든 돛을 올리고 바닷가를 따라 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사흘 후 우리 앞쪽에 긴 반도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반도와 육지가 이어져 있는 근처에 큰 동굴이 보였다.
"이젠 저 동굴을 탐험해 보자. 운이 좋으면 곧게 내리 패인 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저씨가 말했다.
 
사크누셈의 동굴
 
동굴은 바로 바다 옆에 있어서, 물결이 철썩철썩 밀려들고 있었다. 아저씨와 나는 한스를 뗏목에 남겨 두고 상륙했다. 동굴을 향해 흰 모래톱을 걸어가고 있는데, 돌연 내 구두 끝에 무엇인가가 부딪혔다. 집어들어 보니 그것은 길이가 40센티미터 정도 되는 단도였다. 어지간히 낡은 것인 듯 붉게 녹이 슬고 끝이 뭉툭해져 있었지만, 칼자루에 훌륭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아저씨, 이런 것이 떨어져 있더군요.“
"좀 보여 다오. 야, 이건 옛날 아이슬란드 인이 사용하던 단도구나. 아이슬란드 인이 여기에 왔었다면, 어쩌면 사크누셈인지도 모른다!“
아저씨는 눈을 번득이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돌연,
"악셀, 저걸 봐!“
하고 외치고는 동굴 오른쪽의 큰 바위를 가리켰다. 그 큰 바위에는 두 개의 룬 문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A.S. 이건 확실히 아르네 사크누셈의 머릿글자야! 지금으로부터 3백 년 전에 사크누셈이 여기에 왔던 거야.“
"그리고 이 단도로 저 글씨를 새겨 뒀군요."
"그렇지 .“
"그러나 사크누셈이 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었다고는 단정할 수가 없지요."
"아냐, 틀림없어. 사크누셈은 나중에 올 사람들을 위해 이 표지를 새겨 둔 거야. 악셀, 어서 들어가 보자."
우리들의 휴대용 전지는 이미 건전지가 다 닳아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휴대용 램프에 불을 켠 다음 동굴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미처 10미터도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앗!’ 하고 외치며 멈춰 섰다. 동굴 안쪽이 검은 바위에 막혀 버린 것이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빠져나갈 길은 없다. 아저씨는 피켈로 막다른 바위를 두들겨 보면서,
"안 되겠다. 이 암벽은 두께가 10미터 이상이나 되는구나. 한스가 아무리 곡괭이를 휘둘러도 여기를 뚫지는 못할 게다.“
"사크누셈도 여기에서 되돌아갔을지 모르겠군요."
"아냐, 그럴 리는 없지. 사크누셈의 암호에 '나는 지구의 중심에까지 다녀왔다. '고 씌어 있었거든. 나는 사크누셈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아저씨는 휴대용 램프로 암벽을 살펴보고 있다가,
"이걸 봐라, 악셀. 여기에 바위가 떨어진 자국이 있는데, 이걸 보니 이젠 알겠다. 사크누셈이 여기를 지나간 뒤에 큰 지진이 일어나 바위가 무너져 떨어지면서, 이 터널을 막아 버린 거야. 악셀, 아쉽지만 우리들의 탐험은 여기서 끝났다. 이젠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
아저씨는 낙심한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아직 단념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아저씨. 우리가 훌륭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으셨어요?“
"보물이라니, 뭔데?“
"뗏목에 싣고 온 50파운드의 면화약이지요. 그 화약으로 이
 암벽을 폭파하면 될 거여요."
"아, 그렇구나.“
아저씨는 벌떡 일어서서 느닷없이 나를 껴안았다.
"훌륭하구나, 악셀. 용케 생각해 냈어! 정말 너를 데려오기를 잘 했다. 자, 그럼 당장 작업을 시작하자!“
우리는 뗏목이 있는 데로 돌아가 화약과 곡괭이를 가져왔다. 한스가 그것을 훌륭하게 보존했기 때문에, 큰 폭풍을 만났는데도 화약은 전혀 젖지 않았다. 나는 큰 바위 밑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50파운드의 화약을 밀어 넣었다.
"아저씨, 공교롭게도 면화약의 길이가 40센티미터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불을 붙이자마자 재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위험해요.“
"그래? 그럼 내가 불을 붙일 테니 너는 뗏목에 가 있어라.“
"아니어요, 아저씨. 이건 제가 말을 꺼냈으니 제가 하겠어요. 그리고 저는 집을 떠날 때 그로이벤한테 '아저씨를 잘 보살펴 드리라.' 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그러니 꼭 제가 하게 해 주셔요."
"닥쳐! 명령을 내리는 건 대장인 나야."
"하지만 아저씨, 달리는 건 제가 훨씬 빨라요."
나는 계속해서 기를 쓰고 우겼다. 결국 아저씨는 내 고집에 꺾여, "그럼 악셀, 너에게 맡기겠다. 침착하게 재빨리 해야 한다.“ 하고 말하고는 뗏목이 있는 데로 물러갔다. 나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황급히 뗏목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굴에서 나와 아직 백 미터도 달리기 전에, 느닷없이 뒤쪽에서 무서운 폭음이 울리며 대지가 마구 뒤흔들렸다. 나는 잽싸게 옆의 바위 뒤에 엎드렸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바위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려왔다. 사방은 연기와 모래 먼지에 휩싸여 눈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그 때 나는 돌연 아저씨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악셀, 빨리 뗏목을 타라. 빨리, 빨리!“
 
터널에 빨려 들어가다.
 
나는 뒤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 전의 대폭발로 동굴이 있던 언저리에 큰 구멍이 뚫려서, 바닷물이 거침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마치 거대한 고래가 입을 한껏 벌려서 바닷물을 들이켜고 있는 것 같다. 뗏목은 아저씨와 한스를 태운 채 굉장한 속도로 그 큰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려 하고 있다.
"악셀, 빨리 타! 잘못하면 혼자 남게 된다!“
아저씨가 소리쳤다. 나는 정신없이 바닷가를 따라 달려가 뗏목에 껑충 뛰어오르려 했으나,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물 속에 빠져 버렸다.
'아아, 이젠 살아날 가망이 없을까?' 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은 한스의 우람한 손에 의해 뗏목 위에 힘껏 끌어 올려졌다. 그와 동시에 뗏목은 폭포 밑의 깊은 웅덩이에 떨어지듯, 터널 속으로 대번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어느 쪽을 보나 칠흑 같은 어둠뿐 -다만 요란한 물소리만 들릴 뿐이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으로 판단하건대, 뗏목은 적어도 시속 7,80킬로미터의 속도로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윽고 갑자기 사방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졌다. 한스가 휴대용 램프에 불을 켠 것이다. 한스는 램프를 발 밑에 내려놓고, 손에 긴 막대기를 쥐고는 뗏목의 이물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모퉁이에 접어들 때마다 막대기를 쑥 내밀거나 하며 방향을 돌리는 것이었다. 만일 한스의 이같은 활약이 없었더라면, 뗏목은 바위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을 것이다. 뗏목은 닷새 동안 무서운 속도로 아래쪽을 향해 떠내려갔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물도 마시지 못했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 뗏목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중요한 식료품을 넣은 자루와 물을 넣어 두었던 나무통을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아저씨, 형편이 이렇게 됐으니 지구의 중심에 가 닿기 전에 우리는 굶어 죽겠네요."
"음, 일이 고약하게 됐구나."
아저씨가 신기하게도 마음 약한 소리를 했다.
"악셀, 나는 너와 한스에게 사과해야겠다. 나의 연구를 위해 너희들을 희생시키다니...... 운 좋게 다시 지상에 나갈 수 있어야 할 텐데......”
엿새째가 되자 그제야 물의 흐름이 멈추어서 뗏목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아마 터널 속에 물이 가득 찬 모양이군."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대체 이제부터 어떻게 될까?“
그러자 느닷없이 한스가 외쳤다.
"주인님, 이 뗏목은 멈춰 있는 게 아니군요.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뭐라고? 올라가고 있다니, 그럴 리가 있나?“
"아닙니다. 확실히 올라가고 있어요. 이걸 보십시오.“
한스는 휴대용 램프로 암벽을 비친다. 찬찬히 보니 잿빛 암벽이 아닌게 아니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확실히 뗏목은 위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됐다! 이 뗏목은 곧게 내리 패인 굴속에서 위를 향해 들어 올려지고 있는 거야! 잘 되면 지상에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저씨가 외쳤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들어 올려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것 같다. 동시에 기온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더위를 여태껏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다. 한란계를 보니 자그마치 7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윽고 어디선가 대포를 쏘아 대는 듯한 소리가 울려온다. 쾅 하는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뗏목이 마구 흔들렸다.
"저건 무슨 소리일까요, 아저씨?“
아저씨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응, 저건 화산이 폭발하는 소리야! 이 뗏목은 지금 화산의 분화구를 향해 밀어 올려지고 있는 거야!“
"분화구를 향해서요?“
"그래. 뗏목 주위를 둘러봐. 이건 물이 아니고 용암의 줄기란 말이다."
지금까지 뗏목을 들어올리고 있던 물은 과연 어느 새 질척질척하게 녹은 용암의 흐름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 견디기 어렵도록 뜨거운 것은 당연하다. 만일 우리가 타고 있는 뗏목이 화석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불타 버렸을 것이다.
쾅쾅쾅! 폭발하는 소리가 더욱더 가까워졌다.
"이봐, 한스와 악셀은 내 말을 잘 들어라."
아저씨가 고함쳤다.
"이제 곧 분화구에서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 때 사방이 밝아지면 잽싸게 웃옷이나 외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될 수 있는 대로 팔다리를 오므리고 있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크게 화상을 입게 돼."
사방엔 유황 가스가 꽉 차 있어서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리고 견딜 수 없이 뜨거워서 마치 화형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아아, 이젠 틀렸다. 여기서 불에 타 죽게 됐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사방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나는 아저씨가 가르쳐 준 대로 잽싸게 외투를 뒤집어쓰고 팔다리를 새우처럼 오므렸다.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내 몸은 공중에 뿜어 올려졌다. 동시에 수백 개의 탐조등이 비친 것처럼 눈이 부셨다. 그리고 이내 모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그 다음엔 아주 기절을 해 버렸다.
 
분화구에서 지상으로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엔 따뜻한 재 위에 뉘어져 있었다. 아저씨와 한스가 근심스러운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스가 자랑하는 수염도 아저씨의 윗도리도 형편없이 타고 그을어 있었다.
"아아, 아저씨, 우리는 분화구에서 뿜어 올려져서 살아난 겁니까?“
"그래, 마침 다행히 그다지 폭발이 강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중에 높이 날려가 버리지는 않았다. 너는 하마터면 용암 줄기에 밀려 나갈 뻔했지만, 한스가 구해서 여기까지 옮겨다 줬던 거야."
우리들의 머리 위엔 분화구의 정상이 보이고, 거기서는 무럭무럭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멀리 눈 아래에는 해맑은 남빛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횐 돛이 콩알처럼 작게 보였다.
"여기는 어디일까요, 아저씨? 작은 섬 같은데요."
"나도 잘 모르겠다. 강렬한 햇빛과 바다 빛깔로 보아, 어딘가 따뜻한 남쪽 섬 같지만...... 저길 봐, 기슭 쪽에 과수원 같은 게 보이지? 아마 올리브나 오렌지 숲일 거야. 저기에 내려가서 물어 보자."
우리는 절룩거리면서 간신히 기슭까지 닿았다. 거기에는 맛좋을 듯싶은 오렌지 열매가 나뭇가지가 휘어질 만큼 듬뿍 열려 있었다. 우리는 말도 하지 않고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걸신들린 것처럼 오렌지를 먹었다. 그 맛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 숲 속에서 눈이 부리부리한 예닐곱 살의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 쪽을 보고 있다.
"얘야, 저 산 이름이 무언지 너는 알고 있을 테지?“
아저씨는 화산을 가리키며 프랑스어로 물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지 잠자코 있다. 아저씨는 이어서 영어와 에스파냐어로 물어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어로 물어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내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스트롬볼리.“
사내애는 이렇게 대답하자 토끼처럼 잽싸게 달아나 버렸다.
"으음, 스트롬볼리란 말이지. 굉장히 먼 곳에까지 밀려와 버렸군.“
아저씨가 신음하듯 말했다.
"아저씨, 스트롬볼리가 대관절 어딥니까?“
"이탈리아 반도가 장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잖아. 그 장화의 발 끝 북쪽에 있는 작은 섬의 활화산이지."
"그럼 여기는 지중해 한복판입니까?“
"놀랍군요. 아이슬란드의 오래 된 분화구를 통해 지저로 들어갔다가, 남쪽 바다의 활화산 분화구에서 불쑥 튀어나오다니, 우리는 정말 희한한 여행을 한 셈이군요."
"그렇지. 약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저 여행이지. 악셀,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지구의 중심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아직 누구도 해 본 적이 없는 탐험 여행을 한 셈이야.“
"사크누셈도 역시 저 분화구에서 튀어 나왔을까요?“
"아냐, 사크누셈은 그 단도가 떨어져 있던 동굴에서 다른 길을 택해 지구의 중심까지 다녀왔을 거야. 어쨌든 우리들의 이번 여행은 더없이 귀중한 경험이었지. 나는 무척 만족스럽단다.“
아저씨는 기쁜 듯이 두 손을 비벼댔다. 그 날 밤 우리는 기슭의 농가에 묵고, 이튿날 배를 타고 시칠리아 섬의 멧시나로 건너갔다. 그리고 또 여러 번 배를 갈아타고 기차도 갈아 탄 끝에 9월 9일, 마침내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충실한 안내인 한스와도 여기에서 작별을 하게 되었다. 한스는 역의 플랫폼에 내리자, 말없이 아저씨 앞에 그 우람한 손을 내밀었다. 약속을 한 임금을 달라는 의사 표시인 모양이다.
"한스 덕택에 우리는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어. 자네가 없었더라면 이번 탐험은 도저히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정말 고맙네."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 약속을 한 임금의 갑절을 주려 했지만, 한스는 아저씨의 손을 쑥 밀어 치우고는 정해진 금액밖에 받지 않았다.
"그럼 주인님과 악셀 도련님, 하느님의 뜻이 계시다면 언젠가 또다시 만나 뵐 수 있겠지요. 그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한스는 이렇게 한 마디만 하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가 버렸다. 정말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사내다. 그러나 나는 한스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안내인이며, 만나기 어려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기쁨의 날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마르타 할멈과 그로이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여기서 장황하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주인님, 그리고 도련님, 저는 밤마다 새로 수프를 만들어 놓고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정말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할멈은 이렇게 말하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저씨는 대학에 가서 이번의 탐험 여행 결과를 보고했다. 학자들 중엔 믿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이덴브로크 교수는 나이가 든 탓으로 멍청해져 버린 거야. 지저 세계를 5천 킬로미터나 여행하다니, 그런 기적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남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태연했다.
"새로운 발견은 어떤 시대에도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게 마련이지. 나는 수첩을 바탕으로 이번 탐험을 기록해 두겠다. 그러니 악셀, 너도 네 눈으로 본 여행기를 쓰도록 해라. 잘 되면 책으로 만들어 줄 테니."
"잘 부탁합니다.“
"악셀도 이번 여행 덕택으로 아주 의젓한 어른이 됐구나. 그러니......“
"그러니 어쩌라는 겁니까?“
"이젠 머지 않아 그로이벤과 결혼해도 좋을 게다. 그렇지, 책이 만들어지면 결혼식을 올리도록 해라."
"정말입니까, 아저씨?“
나는 느닷없이 아저씨를 부둥켜안고 입맞춤을 했다.
"이 녀석아, 능청맞게 굴지 마라!“
오랜만에 아저씨의 호통이 떨어졌다.
"아저씨, 악셀, 빨리 이리로 오세요.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
식당에서 그로이벤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작품 해설
 
놀라운 공상 과학의 세계 - <지저 탐험>
 
<지저 탐험>의 원래 제목은 (지구 중심을 향한 여행)이라고 하는데, <15소년 표류기>의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쥘 베른이 서른 여섯 살 때 쓴 작품입니다.
쥘 베른은 1828년 2월 8일에, 프랑스 서해안의 낭트라는 항구 가까이 있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변호사였으므로, 아들인 베른에게도 법률 공부를 시켜서 자기 뒤를 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른은 소년 시절부터 모험과 바다를 퍽 좋아하여, 어른이 되면 뱃사람이 되어 아직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바다며 섬을 탐험해 보고 싶다고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베른은 열 두 살 때 부모 몰래 어떤 상  선의 사환이 되어 대서양으로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집에 알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베른은 배가 다음 항구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에 의해 배에서 끌어 내려져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베른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파리의 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그 곳을 졸업하자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주식 중매인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일들은 베른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했던 베른은 문학에의 열정에 더욱더 깊이 사로잡혀서, 분주하게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시와 희곡을 써서 발표했습니다. 희곡 중에는 실제로 상연된 것도 있습니다.
1862년 베른이 서른 네 살 때,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기구를 실험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에 대해서도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베른은 기구에 관한 일들을 여러 가지로 조사하던 중 타고난 공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하여, 이내 <기구를 타고 5주일 동안>이라는, 과학에 바탕을 둔 모험 소설을 써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너무 공상적이고 엉뚱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출판사에서도 출판을 맡아 주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어떤 출판사의 호의로 어느 교육 잡지에 연재하는 형식으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구를 타고 5주일 동안>이 발표되자 대번에 크게 소문이 나서, 이듬해에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베른은 출판사로부터, "이렇게 재미있는 모험 소설을 계속 써 달라." 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베른은 신바람이 나서 두 번째 작품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지저 탐험>입니다. 이것 역시 첫 작품 못지 않게 대호평을 받아, 베른은 이내 인기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베른은 40년 동안에 50여 편의 과학 모험 소설을 썼습니다. 중요한 것만 살펴봐도 <지저 탐험>에 이어 <달세계 여행> <해저 2만 리> <80일간의 세계 일주> <신비의 섬> <떠 있는 섬> <15소년 표류기)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베른이 쓴 소설은 항상 그 시대에 한 걸음 앞서 있었습니다. 비행기도 잠수함도 로케트도 모두 베른의 소설이 발표된 뒤에 고안되고 발명된 것들입니다.“20세기의 과학은 베른의 꿈을 뒤쫓아서 발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백 년 이상이나 전에 씌어진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온 세계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베른의 모험 소설이 단순한 상상과 공상만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올바른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른은 매우 연구심이 강한 노력가여서, 한 작품을 쓰기 전에 몇 번이고 도서관과 박물관을 찾아가고, 학계의 전문 잡지도 훑어보는 등, 충분히 조사하고 나서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른은 '과학 모험 소설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으면서, 1905년 3월 24일 일흔 일곱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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