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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두뇌-커트 쇼드마크 CURT SIODMAK 지음-이 원수 번역
2021년 09월 22일 20시 57분  조회:590  추천:0  작성자: 강려
 인공 두뇌
DONOVAN'S BRAIN
 
커트 쇼드마크 CURT SIODMAK 지음
이 원수 번역
 
커트 쇼드마크
1910년 독일 태생이었으나, 스위스와 영국에 이주하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함. [우주 공항], [비행접시 지구를 습격] 등 영화의 각본을 많이 썼다.
 
◎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원수․박홍근/문학박사 최인학
공학박사 양옥룡/이학박사 김희규
전교육감 김성묵
 
 
인공 두뇌
 
수상한 의사··················· 5
비행기 사고··················· 11
대답하라!··················· 18
왼손잡이의 글자················· 25
살인 미수···················· 30
은행과 늙은 비서················ 38
제니스의 걱정·················· 46
살인범 하인즈·················· 52
도노반의 비밀·················· 60
열세 살의 소녀················· 68
뇌는 살인한다·················· 75
도망치자!··················· 79
악마와의 싸움·················· 90
도노반의 뇌는 악마다!·············· 94
 
행성의 밝은 아침
 
행성 타리슈·················· 100
운석이다!··················· 104
로켓 보트··················· 110
불행의 연속·················· 116
건설하자··················· 119
털이 많은 족속················· 126
끊임없는 싸움················· 130
새로운 묘··················· 132
다가오는 적·················· 145
운명의 바위·················· 151
최후의 명령·················· 156
대폭발···················· 160
새로운 지도자················· 168
깨쳐가는 인류················· 173
 
등장 인물
 
패트릭 : 이 책의 주인공. 자기가 만든 인공 두뇌에게 조종당하여 사건에 말려들고, 죽을 뻔하다가 누이동생 제니스와 시트라스 박사의 희생으로 죽음을 면한다.
제니스 : 패트릭의 누이동생으로서, 아주 예쁘고 상냥한 아가씨. 로스앤젤레스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면서, 오빠를 위해 용감하게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시트라스 박사 : 늙은 의사. 패트릭과 제니스를 위하여 온 심혈을 기울이다가 결국은 패트릭을 살리고 죽어 간다.
도노반 : 비행기 추락으로 죽어 가는 것을 패트릭이 수술하여 머리만 살려낸 인공 두뇌. 살았을 때는 백만장자로서, 냉혹하고 악한 인간이다.
스탠리 : 옛날 도노반의 비서, 지금은 백발의 노인.
후라 : 도노반의 변호사
 
수상한 의사
 
여기는 미국의 남쪽, 멕시코와 국경을 이루는 애리조나주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작은 마을이다.
무엇이든 태워버릴 듯한 사막의 더위로 인해 인디언들 외에는 백인이라고는 몇 살고 있지도 않았다.
이 작은 마을이 무엇이 좋아서인지 4~5년 전에 젊은 두 남매가 들어와 마을 변두리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적이 수상쩍게 생각했다.
그 뿐 아니다. 젊은 남자는 여태껏 로스앤젤레스에서 의사 노릇을 했다는데, 여기서는 단 한 사람의 환자도 보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때때로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이 그 집안에서 들리곤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기분이 나빠 근처에도 가려하지 않았다.
"구경거리로 쓸 짐승을 길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야, 사람의 간을 빼내서 약을 만드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람이 아니고 원숭이를 가지고 그러나 본데……."
"사람이건 원숭이건 기분 나쁜 얘기 아닌가."
마을사람들은 이런 얘기들을 하며 무서워하는 얼굴로 젊은 남매가 사는 집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 젊은 의사의 누이동생 제니스는 뛰어나게 예쁘고 상냥해 보이는 소녀였다.
그래서 이따금 시장을 보러 나오는 그 소녀에게 마을 사람들이 물어 보기도 했지만 제니스는 쓸쓸하게 웃을 뿐, 그의 오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이 오누이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은 가까운 동네 코너퍼에 있는 불시착용 비행장의 늙은 의사 시트라스 박사뿐이었다.
시트라스 박사는 옛날에는 꽤 뛰어난 의사였다고 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굉장한 세균학자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했다. 이 코너퍼에 와서 살게 된 것도 그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무서운 사막의 더위 속에서 30년 이상이나 산 때문인지, 지금은 팍 늙어버려서 늘 술만 마시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다만 그는 이 근방에 사는 인디언들에게 고맙게 해 주고 있는 때문인지 인디언들에게는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런 시트라스 박사가 코너퍼에서 언제나처럼 낡아빠진 자동차를 타고 이 마을에 왔던 어느 날, 마을 사람 하나가 큰맘먹고 물어 본 일이 있었다.
"선생님, 저 젊은 의사는 뭘 하고 있습니까? 이 근방에서는 산사람의 간을 빼낸다느니, 구경거리 인간을 만들고 있느니 하고 여러 가지로 소문이 돌고 있는데요."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는 술에 취해 몽롱해진 몸을 갑자기 똑바로 하고 적잖이 두려운 듯이 말했다.
"패트릭이 하고 있는 일은 그보다 더한 거야. 악마의 연구라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트라스 박사는 오누이의 집 방문은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무서운 것을 두려워하면서 들여다보듯이. 그리고 그 연구가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그러면, 패트릭이라는 젊은 의사는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시트라스 박사가 말하는 악마의 연구란 무엇일까?
9월 어느 날, 시트라스 박사는 언제나처럼 낡은 자동차를 털털거리며 패트릭에게 갔다.
시트라스 박사는 더위가 심한 사막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낡은 외투를 입고 온다. 그날도 역시 그랬다. 변함없이 술을 마신 듯,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패트릭의 연구실에 들어가자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기어코 했구나!"
시트라스 박사는 헐떡이듯이 말하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패트릭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실 중앙에는 유리 그릇이 놓여 있는데, 그 속에 갈색의 흐물흐물한 물체가 들어 있었다.
"인공 호흡기랍니다. 저 펌프에서 피가 보내지고 있는 거지요."
그 인공 호흡기라는 것에서는 붉은 색과 푸른색의 선이 얽힌 채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가닥에 이어져 있는 계기에서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그래프를 그리는 종이가 나와 있었다.
"패트릭, 이 계기가 자네가 말하던……"
"그렇습니다. 뇌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뇌파계입니다. 잘 아실 줄 압니다만 뇌에는 극히 조금이긴 하지만 전기가 담깁니다. 그 전기의 강도와 주파수를 재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는 양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건 원숭인가? 산 원숭이의……"
"예, 병으로 죽게 되어 있는 원숭이인데요"
패트릭이 태연하게 말하는데, 시트라스 박사는 더욱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걸 보게, 저 뇌파계를. 이놈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세. 아픔을 느끼고 있는 거야. 가엾게도! 이런 실험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야. 빨리 펌프를 정지시켜 편히 죽게 해 주게나. 몸뚱이가 없어지고 뇌만 살아 남아서야 눈곱만치도 즐거울 리가 없어. 게다가 필시 아픔을 느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패트릭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간신히 원숭이의 뇌를 살리는데 성공한 것인데요. 이번에는 사람의 뇌로서 진짜 실험을 해야지요."
"뭐, 뭐라고? 자네는 이 실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산 사람의 뇌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니, 그야말로 자네를 멸망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네. 나는 자네가 그런 말을 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네. 제니스도 걱정을 하고 있어. 제발 그만두게."
패트릭의 실험이란, 뇌를 산채로 보존하려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리고 뇌의 활동을 조사한다는,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않은 연구였다. 그러나 패트릭의 뛰어난 재능을 사랑하고 있는 시트라스 박사는 부모 같은 기분으로 이 실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건, 패트릭이 너무나도 이 연구에 열심이라서 동물 실험에 성공하면 법률로서 금지되어 있는 일, 즉 사람을 죽여서까지 실험을 계속할 것 같은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앙심이 깊은 시트라스 박사는 뇌의 비밀을 조사한다는 일부터가 하느님의 뜻에 반항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성공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좋아 날뛰는 패트릭은 시트라스 박사의 충고에 입을 삐죽하고 말했다.
"시트라스 선생님, 저의 성공이 부러우신 모양이군요. 당치않은 말씀 마십시오. 이제부터의 연구야말로 중요한 것인 걸요. 그러시지 말고 도와나 주십시오."
"다, 당치않은 소리. 난 절대로 그런 실험에 끼여들고 싶지 않아!"
시트라스 박사는 무서운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만큼 일러줘도 모르느냐는 듯 슬픈 얼굴을 숙인 채 연구실을 나갔다. 그를 보내며 패트릭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진리를 캐내는 것이 과학자의 일이 아닌가. 시트라스 씨는 겁 많은 사람이야. 그래서 그걸 숨기기 위해 술만 퍼마시게 된 걸 거야. 그건 그렇고, 어떻게 산 사람의 뇌를 실험하는 게 좋을까?'
이것이야말로 시트라스 박사가 염려하고 있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을 해부해서 뇌를 꺼낸다 해도, 그 뇌는 죽은 뇌이므로 소용이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자진해서 제 뇌를 꺼내가도 좋다고 할 리 없다.
 
'그래도 나는 하고야 말테다.'
패트릭은 또렷이 그래프의 선을 긋고 있는 원숭이의 뇌파계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결심을 했다.
 
비행기 사고
 
그런 패트릭의 결심이 실제로 시험받게 되는 날이 왔다.
그로부터 4~5일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오전 세시쯤, 갑자기 패트릭의 거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밤중에 무슨 전화지?'
연구실에서 그때까지 아직 실험을 계속하고 있던 패트릭은 수상쩍어 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아, 패트릭 씨지요. 저는 임무관 화이트입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산에 여객기가 추락을 했답니다. 곧 구조하러 와 주십시오."
임무관은 산불을 방지하거나 삼림 보호를 맡은 관리이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라면 시트라스 박사의 일이 아닙니까?"
패트릭은 연구를 중지하고 여기서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까지 가기가 싫어서 그렇게 말했다.
"분명 그렇긴 합니다. 허나 아무리 시트라스 씨에게 전화를 걸어도 일어나질 않는군요. 필시 만취가 되어 잠이 든 모양입니다."
임무관의 말이 그럴듯해서 패트릭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나도 시트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요. 그래도 안 되면 곧 그 곳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 주시오."
수화기를 놓고 패트릭은 곧 시트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전화를 받는 박사에게 비행기 사고를 알리자,
"부탁하네, 자네가 대신 가 주게. 나는 늙은이라 몇 시간 동안 말을 타고 추락 현장으로 가는 건 어렵네. 그러다가는 내가 죽을 것만 같아. 나중에 자네 집에 가서 기다리겠네."
시트라스 박사는 졸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패트릭은 곧 근방 사람들에게 응원을 청해 구조대를 만들었다. 세 시간 가량 산길을 올라가자, 임무관 화이트의 집이 있었다.
"잘 와 주셨소. 두 사람은 죽었지만 아직 두 사람은 살아 있소. 하지만 살기 어려운 중상이니, 빨리 좀 봐 주시오."
안내를 받아 추락 현장에 가니, 거기에는 보기에도 처참하게 비행기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강력한 엔진을 가진 자가용 소형 여객기였다. 생존자의 한 사람은 젊은 남자이고, 또 한 사람은 꽤 나이를 먹은 남자였다.
"이 나이 많은 사람 쪽은 어디서 본 일이 있는 것 같은데……."
패트릭은 곧 젊은 남자를 진찰했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어 있도록 주사를 놓고 구조대가 운반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쪽은 곧 수술을 하지 않으면 부러진 다리에서 출혈이 심해 죽을 것 같았다. 패트릭은 재빨리 그 나이 많은 사람을 임무관의 숙소로 운반했다.
"어디 여기서 수술을 해 보자. 그러지 않고서는 몇 시간도 살아 있지 못할 테니까……."
패트릭은 이렇게 말하고 곧 물을 끓여오게 해 수술 기구를 소독하고, 다른 여러 가지 준비를 척척 해냈다. 그리고 수술을 하기 위해 옷을 벗겼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양복 안쪽에 W.H. 도노반이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안면이 있는 것 같더라니, 신문에서 자주 사진으로 본 그 얼굴이야."
도노반은 유명한 백만장자였다. 미국서도 첫째 가는 통신판매 백화점의 주인이다.
'그런 도노반을 나처럼 이름 없는 의사가 수술을 하고 보면 나중에 여러 가지로 말썽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패트릭은 그런 말을 임무관에게 하지는 않았다.
임무관이 야단법석을 떨어 수술을 조용히 할 수 없게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패트릭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자르고 피를 멈추게 했다. 그러나 도노반의 몸뚱이는 식어갈 뿐이었다. 패트릭의 집에까지 내려갈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나머지 구조대원의 한 사람과 더불어 간신히 말 위에 도노반을 묶어 싣고, 패트릭은 있는 힘을 다해서 출발했다. 이미 해는 높이 떠 있었다. 하룻밤 밤샘을 한 몸이라 몹시도 피곤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도노반은 몇 번이나 호흡을 중지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패트릭은 혀를 꺼내어 산소를 흡입시켰다.
가까스로 패트릭의 집에까지 돌아왔을 때에는 누가 보아도 도노반은 구원될 수 없어 보였다.
"피닉스에 있는 큰 병원에 구급차로 실어 간다 해도 헛일이다. 그러느니 보다는 실험실에서 빨리 응급 치료를 하지 않으면."
이런 생각을 했을 때, 패트릭은 이거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좋은 기회가 아닌가 했다.
'도노반은 어차피 죽는다. 그렇다면 숨이 끊어지기 전에 뇌를 꺼내도 뭐라고 할 말은 없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의사로서의 자기의 책임감이 그걸 거부했다.
도노반을 운반해 온 구조대 사람들은 처음으로 보는 실험실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전부터 소문이 떠돌던 이 실험실에서 패트릭이 무얼 하는 것일까 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패트릭은 그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잠시 동안 수술대에 뉘어져 있는 도노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결심을 실행으로 옳길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유혹의 마음이 더 강했다.
'동물의 뇌로 성공한 일이 사람의 뇌로 실패할 까닭은 없다. 게다가 이 지방 사람들과 비교해서 이 도노반이란 남자는 아무튼 소문난 사람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생 동안 뇌를 써서 훈련되어, 다른 사람보다 굳센 것이다. 이거야말로 가장 뛰어난 표본이다! 생명의 비밀을 알아 내는 실험이기도 한 것이다.'
드디어 이렇게 생각하고는, 설령 곧 죽을 사람이라 해도 살아 있는 동안에 인간을 해부해도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제니스, 이리 와서 나 좀 도와 줘."
제니스는 환자를 치료하는 거라 생각하고 곧 달려왔다. 여기서는 누이동생 제니스가 바로 간호사 일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메스와 수술용 톱을 가져와."
패트릭을 도노반의 오른쪽 귀 바로 위의 피부에 메스를 넣었다. 그리고는 왼쪽 귀 위에까지 반원형으로 절개했다.
"오빠, 뭘 하는 거야?"
제니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패트릭은 상관 않고 다시 메스를 넣었다.
"무슨 짓을!"
제니스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도노반의 호흡이 끊어졌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빨리, 죽기 전에 뇌를 꺼내야 해."
패트릭은 수술용 톱으로 두개골 뒤쪽을 쓱쓱 톱질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에 제니스는 새파랗게 질려 방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들어온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시트라스 박사였다. 시트라스 박사는 금방 취기가 싹 가신 듯한 모습이었다. 패트릭은 됐다 싶었다. 시트라스 박사 같은 훌륭한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시트라스 박사가 이 수술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계 없이, 패트릭은 조르는 듯이 말했다.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도 제니스처럼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잠깐 서 있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른 나이프를 쥐었다.
"오냐, 내가 여기를 잘라 내지. 이왕 해 놓은 일이니 말린대도 별 수 없겠지."
시트라스 박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패트릭을 돕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꺼낸 도노반의 뇌는 인공 호흡기에 담겼다. 그리고 펌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는 본래처럼 해놓지 않으면…… 빨리 하지 않으면 안돼. 집에 오기 전에 내가 전화를 걸었으니까. 구급차가 시체를 운반하러 올 거다."
시트라스 박사는 힘 빠진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한 일의 중대성에 새삼 놀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패트릭은 뇌를 빼낸 두개골 속에 솜을 쑤셔 넣고, 원래대로 바로잡아 테이프로 붙였다. 그리고는 그 위에도 붕대를 칭칭 감아 도노반의 피를 묻혔다. 패트릭은 후욱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머리도 다친 줄 알게 될 테니까 괜찮을 겁니다."
패트릭과 시트라스 박사는 도노반의 시체를 들것에 실어 밖으로 내놓았다. 이 더위로서는 시체가 곧 썩는다. 썩은 시체를 다시 한번 진찰할 생각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일을 끝내고 나자, 패트릭은 당연한 일인 듯이 이렇게 말했다.
"시트라스 박사님, 사망 진단서를 써 주십시오."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는, 다시금 자기가 한 일의 두려움에 움찔했다. 그러나 손을 빌려 준 이상 거짓 진단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기어이 생기고 말았군. 하지만 내가 반대한 일이 조력을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야."
시트라스 박사는 진단서를 쓰면서 중얼거렸다.
패트릭은 그런 시트라스 박사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죽을 몸뚱이였는걸요. 뇌만이라도 살려줄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도노반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요?"
"뭐라고, 도노반이라고?"
"예, W. H. 도노반입니다. 그 유명한 백만장자……"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의 안색은 한결 더 파래졌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노반의 뇌를 도둑질했는가!"
시트라스 박사는 힘없이 말하고는 모자를 들고 일어섰다.
"오냐, 시체와 함께 피닉스 병원에 가자.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넘어가 보기로 해야지. 그밖에 방법이 없어. 이왕 벌린 일인걸."
시트라스 박사는 방을 나갔다.
패트릭은 박사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몹시 피로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탄로가 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았다.
'좌우간 잠을 자자. 그리고 저 뇌를 어떻게 살려가나, 그리고 어떻게 연구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패트릭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는 침대에 몸을 던지듯 드러누웠다.
 
대답하라!
 
도노반이 죽은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대에 거대한 재산가가 된 남자의 죽음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죽기 조금 전에 여러 가지 수수께끼 같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죽기 4~6일 전에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회사를 모두 아들 하워드에게 물려준 일이었다. 도노반처럼 남에게 천시받을 정도로 욕심이 많고 아직도 일을 하고 싶어하던 남자의 행동으로서는 어딘지 좀 이상한 것이었다.
둘째로, 왜 갑자기 자가용 비행기로 변호사를 둘이나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여행을 떠났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도, 그 변호사들이 회사의 일을 맡아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범죄인을 변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수상쩍었다.
셋째로, 도노반이 죽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수백만 불의 돈이 행방불명됐다. 도노반이 어디에 감춘 것 같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발견되지 않았다. 가슴과 다리를 다쳐 병원으로 운반된 젊은 남자도 죽은 이제, 모든 일이 오리무중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덕택에 패트릭은 도노반의 아들과 딸에게 불려가서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의 자식들은 도노반이 죽었을 때 패트릭에게 돈이 보관된 곳을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부자의 자식들에게는 아비의 죽음이란 것보다도 그쪽이 더 문제였던 것이다.
패트릭으로서는 도노반의 돈 같은 건 조금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도노반의 뇌를 훔친 일이 발각될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유명한 의사도 출장 와서 패트릭에게 사망의 원인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시트라스 박사가 잘 말해 준 모양이었다.
시트라스 박사로 말하면, 이와 같이 온 나라 안에서 소문이 자자한 도노반의 사고에, 자기의 임무를 게을리하여 무명의 의사로 하여금 처치하게 한 점을 비난받았다. 그 결과 불시착 비행장의 의사직을 그만두게 되고 말았다.
"오빠, 가엾은 시트라스 씨를 우리 집에서 모셔요. 그 분은 지금 있는 관사에서 쫓겨나게 됐지 않아요."
시트라스 박사를 좋아하는 제니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의 책임이라는 듯이 패트릭에게 말했다. 도노반의 뇌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패트릭에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실험을 싫어하는 시트라스 박사가 훼방을 놓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패트릭의 집에 온 시트라스 박사는, 이미 패트릭의 실험에는 조력을 하지 않을 눈치였다.
그러나 뇌가 잠자지 않을 때는 전기가 켜지고 잠이 들면 전기가 꺼지는 패트릭이 발명한 장치에는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을 우물거리다가는 그냥 제니스의 방에 들어가서는 연구실에는 들어가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패트릭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선, 어떻게 해야 도노반의 뇌와 연락을 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뇌파계의 그래프를 보는 것이 제일 필요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도노반의 뇌에 말을 걸 수 있을 것인가. 뇌에는 귀는 없지 않은가. 또 뇌에서 어떤 대답을 찾아내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귀는커녕 입도 없는 것이다.
"좋아! 모르스 신호로 뇌를 넣어 둔 유리 그릇을 두들겨 보자."
패트릭이 유리 그릇을 두들기면 틀림없이 그래프에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니까 연락이 안 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도노반, 대답하라. 도노반, 대답하라."
이 말을 모르스 부호로 쳤다. 확실히 뇌파계는 반응을 나타냈다. 그래프에 산과 골짜기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은 항상 다르게 변하고 있다.
'아, 그렇군. 도노반은 모르스 부호를 모르는 거야. 부호를 모른다면 알아차릴 수 없지.'
패트릭은 도노반에게 모르스 부호를 가르쳐 주려했다.
"A는 점․선(․-), B는 선․점․점․점(-․․․), C는 선․점․선․점(-․-․)이다. 알겠어?"
도노반의 뇌가 깨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전등이 켜 있는 한, 패트릭은 끈기 있게 부호 가르치기를 되풀이했다. 몇천 번이나, 밤낮 없이 패트릭은 모르스 부호를 되풀이해 쳤다.
사흘이 지나자, 뇌는 패트릭의 모르스 신호에 맞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F(․․-․)를 신호하면 몇 번을 쳐도 같은 산과 골짜기를 그래프에 나타내게 된 것이다.
"됐다."
하고 생각은 했지만, 뇌는 그 반응을 되풀이할 뿐, 패트릭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았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뇌가 죽어버리면 어쩌지?"
뇌는 매우 피로해 있는 듯, 깨어 있는 표시의 전등을 켰다가도 곧 잠들어 버렸다. 그 뿐 아니라 자면서도 뭔가 그래프 위에 커다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구나.'
무슨 꿈을 꾸는 것일까? 몸이 죽어버린 이제 와서 꿈을 계속 꾸고 있는 뇌의 활동은 기분 나쁜 것이었다. 필시 살았을 때 못다 한 일을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패트릭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참다못해 시트라스 박사에게 가서 말했다.
"시트라스 박사님, 연구실에 좀 와 주십시오."
시트라스 박사는 상냥한 제니스로 인해, 거칠어졌던 기분이 누그러들었는지 요즘은 술을 끊고 지냈다. 그래서 보기에도 건강해진 것 같았다.
"자네가 하는 실험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네."
시트라스 박사는 머리를 저었다. 패트릭은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말했다.
"박사님의 협조 없이는 저의 실험도 계속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그러나 시트라스 박사는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자네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그 실험에 반대하네. 인공 생명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 짓은 신을 거역하는 거야. 필경 그 뇌한테 자네가 거꾸로 지배당하고 말 걸세."
패트릭은 열심히 말했다.
"확실히 박사님의 말씀대로 그럴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대개 과학의 진보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고, 하려들지 않은 걸 저 같은 사람이 연구했기 때문이니까요."
"그런 것과 자네의 연구는 같지 않네. 자네가 하는 연구는, 과학의 힘으로써 인간을 옛날로 되돌아가게 하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실험이야."
패트릭은 단념하고 말했다.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박사님, 한 가지만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패트릭은 어떻게 해서 도노반의 뇌와 연락을 하려고 했던가를 자세히 시트라스 박사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도노반의 생각을 알 수 있을지 그 방법이 없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뇌파계의 그래프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시트라스 박사는 간단한 것처럼 말했다.
"모르스 부호를 가르치려는 건 쓸데없는 일이지. 그런 헛고생하지 말고 자네의 뇌가 수신기가 되면 되는 거야. 그게 잘 될지 어떨지는 확실치 않지만 말이네."
"수신기라고요?"
"그렇지. 도노반의 뇌에서 발신되고 있는 뇌파를 수신하는 거야. 그러려면 자네의 뇌에서 일체 모든 생각을 없애고 오직 도노반의 뇌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거야."
"그런 건…… 신들린 사람 같은…… 게다가 아주 비과학적이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확실히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 방법 외에 도노반의 마음을 알아낼 방도는 없을 걸세. 하긴 그게 성공하는 날엔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되기는 하지만……"
시트라스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제 더는 돕고싶지 않다는 얼굴이다. 도와주지 않는다면 안 해도 좋다. 더구나 무당 같은 방법이 성공할 까닭도 없다라고 화가 난 패트릭은 그냥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참동안 어렴풋이 도노반의 뇌를 지켜보고 있던 패트릭은, 과연 그 방법 외에 도노반과 연락할 방법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좋아! 아무튼 해 보기로 하자. 아무 다른 생각은 말고 도노반의 뇌만 지켜보고 있어보자."
 
왼손잡이의 글자
 
패트릭은 지쳐 버렸다. 아무리 열심히 도노반의 뇌를 생각하고 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도노반의 뇌는 점점 맥을 못 추는 것 같았다. 그래프의 반응도 약해지기만 했다.
'그렇군. 도노반의 뇌에 좀더 영양을 취하게 하지 않으면 안돼. 발신기의 힘이 약하면 전파도 약해지듯이 뇌파의 힘도 약하게 되는 거다.'
패트릭은 보다 더 신선한 피가 뇌에 보내지도록 장치를 고쳤다. 그리고 아미노산과 지방과 단백질의 양을 늘려 보았다.
그 효과는 일주일쯤 지나니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뇌파계의 움직임은 훨씬 기운찬 선을 그리게 되었다. 패트릭은 여기서 힘을 얻어, 이번에는 화장터에서 죽은 사람의 뇌의 재를 얻어와서 그것도 피에 섞어 넣었다. 생각나는 것은 모두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뇌는 기운을 차릴수록 잠도 푹 자게 되었다. 이제는 꿈도 꾸지 않는 것 같았다.
"됐다! 나는 인류 최초의 대성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뇌는 기운을 차렸지만, 역시 패트릭에게 아무 것도 전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4~5일이 지난 뒤, 우연히 손이 잘못 미끄러져서 펌프의 전선을 접촉시켜 인공 호흡기를 감전시켜 버렸다.
"아차!"
재빨리 펌프를 전처럼 해 놓았지만 뇌파계의 파장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죽어버린 것인가!'
황급히 혈맥에 약을 넣고 나니, 몇 분 후에 그래프가 격렬한 선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리고는 전등이 다시 켜졌다.
"깜짝 놀랐네!"
패트릭의 가슴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도노반의 뇌를 훔친 후로 이미 한 달 남짓이나 계속되는 노고로 패트릭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그 감전 사건 뒤로는 맥이 빠져 저도 모르는 사이에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핏 눈을 뜬 패트릭은 갑자기 앗! 소리를 질렀다. 펴놓았던 노트에 어느 새 잉크로 무슨 글씨가 씌어 있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창도 문도 잠긴 그대로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러고 보니 왼손 가까이 펜이 굴러져 있고 손가락에는 잉크가 묻어 있었다.
'잠결에 낙서를 한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왼손으로는 글씨를 써 본 적이 없는데……'
재빨리 노트의 낙서를 열심히 읽어보았다. 그 글씨는 다음과 같은 글자였다.
'W. H. 도노반'
패트릭은 머리를 흔들어 보고, 또 손으로 두드려 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패트릭은 도노반의 뇌를 훔치고부터 여러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조사하여 살아 있을 때의 도노반을 연구해 보고 있었다. 거기서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도노반은 왼손잡이였다고 했다. 어쩌면 도노반의 뇌가 이렇게 쓰라고 명령했는지 모른다. 이 글씨도 내 필체가 아니고…… 그러니까 감전으로 해서 뇌가 갑자기 활동을 시작한 것이나 아닐까!'
즉시 잠들었을 동안의 뇌파계의 그래프를 조사해 보았다. 거기서 어느 때 선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뇌가 몹시 흥분해 있은 걸 보여 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역시 도노반이 쓴 것인지도 모를 일이야. 하지만……"
패트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할 기분이었다. 너무나 피곤해 있었고 도노반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잡지에서 본 도노반의 서명을 흉내내어 무의식중에 써본 것이 아닐까.
'필시 그런 때문이겠지. 뇌가 나에게 글자를 쓰게 명령하지는 못할 것이다.'
패트릭은 그 때부터 늘 연구실에서 자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나 도노반에서의 연락으로 글씨를 쓰게 될 수 있게끔 노트와 펜을 놓아두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패트릭은 또 한 번 전번과 똑같이 노트에 쓰인 글씨를 발견했다.
"요전번 글씨와 똑같군! …… 하지만 아직 진짜인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야. 아무튼 잠잘 때의 일이니까. 아, 증거가 있었으면! 더 많은 증거가……"
그러나 그 후 2~3일 지난 어느 날, 기다려 마지않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다. 그것은 패트릭이 책상에서 일기를 쓰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갑자기 머리가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자기 머리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흐릿한 느낌이었다. 그 때 갑자기 손이 움직여져서 펜을 쥐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W. H. 도노반'
이번 글자는 이제까지의 글자보다도 더욱 선명하고 독특한 글씨였다. 그리고 패트릭이 펜을 제자리에 갖다놓자 갑자기 의식이 또렷해졌다. 마치 그 동안 자기의 혼이 어디 나가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패트릭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패트릭은 인공 호흡기 옆으로 가서 모르스 부호로 신호를 했다.
'이름을 쓰라고 했는가?'
물론 뇌가 대답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상에 돌아오자 아까처럼 머리가 흐릿해져 왔다. 그리고 아까처럼 왼손이 자기 손이 아닌 것같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이번에도 또렷이 글씨를 쓰는 것이다.
'W. H. 도노반' 이라고.
드디어 패트릭은 실험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아직 성공하지 못한 실험을. 도노반의 뇌는 그로부터 차례차례 패트릭에게 명령하여 여러 가지 글자를 쓰게 했다.
'로저 하인즈'
'안톤 스탠리'
무슨 뜻일까. 그건 패트릭도 알 수가 없었다.
"도노반은 옛날 사람들을 생각한 모양이다."
다음에 패트릭은 얼마쯤 떨어져 있어도 도노반의 힘이 전해지는지 시험해 보려고 했다. 그래서 피닉스를 향해 차를 달렸다.
그러자 2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머리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손이 움직이고 핸들을 돌려 자동차가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틀림없이 진짜다."
패트릭은 실험에 성공한 걸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한편, 무언지 모를 세계에 한 걸음 한 걸음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 세계에 빠져들면 다시 되돌아 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패트릭은 그런 생각을 떨어버리려는 듯이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뭘 겁내고 있나. 진정한 과학자는 겁쟁이여서는 안 된다."
그러는 중에도 도노반의 뇌는 점점 원기가 있게 됐다. 그리고 뇌가 깨어 있을 동안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패트릭의 머리에 명령해 왔다. 차츰 패트릭은 뇌가 깨어 있을 동안은 조용히 뭘 생각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살인 미수
 
어느 날, 패트릭은 도노반의 뇌가 시키는 대로 뭔가를 노트에 쓰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 상업은행'
'로저 하인즈'
이 때 누군가 귓가에서 패트릭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패트릭은 뒤돌아볼 수도 없고 쓰던 글씨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그냥 멍해 있는 것이다. 글씨를 다 쓰고 나서 머리가 맑아졌을 때에야 패트릭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의아해하는 얼굴을 한 시트라스 박사가 넘겨다보는 듯이 서 있었다.
"패트릭, 내가 부르는 소리가 안 들렸나?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았지?"
패트릭은 잠자코 노트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여 주었다.
"아니 이건?"
"예, 도노반의 뇌와 연락을 하고 있었던 참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저편에서 제게 연락해 온 거라 해야겠지요. 다시 말하면 박사님이 말한 대로 제 뇌가 수신기가 되는 데 성공한 겁니다."
그 누구와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반가워서 패트릭은 지난 열흘 남짓한 동안의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시트라스 박사의 안색이 점점 나빠져갔다.
"기어이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닥쳐온 모양이군. 뇌의 힘이란 건 한이 없는 것이니 어디까지 자네를 지배하게 될지 상상도 하기 어렵네. 게다가 이런 방법이란 자네 생각을 도노반의 뇌에 연락할 수 없는 것이네. 다만 저편이 하라는 대로되고 마는 게 아닌가. 끝장에는 도노반의 뇌에 끌려 다니게 되고 말 것이네."
"그렇지만 실험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펌프를 정지시켜서 혈액을 보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언제거나 원하는 때에 연구를 그만둘 수 있습니다. 도노반의 뇌를 지배하고 있는 건 접니다. 제가 그걸 살려 주고 있는 거니까요."
시트라스 박사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아니야! 이미 끝낼 때가 됐어. 자네에게 아직 그만둘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실험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네. 제발 패트릭. 펌프를 정지시켜서 저 뇌를 죽게 해 주게."
갑자기 박사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 나오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완고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날 밤의 일이다. 패트릭은 잠을 자면서 비몽사몽간에 무슨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으아! 으악!……"
우는 것도 같고 구원을 청하는 것도 같은 기분 나쁜 외침이었다. 패트릭은 부리나케 문을 열고 연구실로 뛰어들어갔다. 뇌의 전등이 이 소동에 떠는 듯이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까지 들리던 그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커다란 사람의 몸뚱이가 마룻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연구실의 전등을 켜자. 어쩌면, 거기에 시트라스 박사의 몸뚱이가 구르고 있지 않은가. 아니, 구르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죄고 있는 것이다. 패트릭은 달려가서 시트라스 박사의 손가락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굳어져 있는 손가락은 좀처럼 풀어 낼 수가 없었다.
이 때, 문 쪽에서 나무라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무슨 짓이야?"
바라보니 제니스가 얼굴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무슨 짓이고 아니고 할 게 아니야. 박사님이 미친 사람처럼 자기 목을 조르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제니스는 고개를 저으며 무서운 듯이 서서만 있었다.
"그러고만 있지 말고 박사님을 소파 위로 데려 눕히자."
시트라스 박사의 심장은 굉장한 속도로 뛰고 있어서 이제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패트릭은 제니스에게 얼음 주머니를 가져오라고 하여 박사의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얼마 후, 차츰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앓는 소리를 하면서 박사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거기 패트릭이 있는 걸 알고는 갑자기 이를 덜덜 떨며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보는 듯 패트릭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는 말없이 일어나, 어느 틈엔지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여행 가방을 가지러 비틀비틀 걸어갔다. 이런 밤중에 시트라스 박사는 이 집에서 떠나려 한 것이다.
"왜 이러십니까? 박사님은 좀더 조용히 누워 있지 않으면 안되실 텐데……"
패트릭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는 무엇이 두려운지 얼어붙은 듯이 멈춰 섰다.
'이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나로서는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으니.'
시트라스 박사의 시선을 따라보고 패트릭은 그 이유를 알았다. 전지 퓨즈 상자가 열려 있는 것이다. 박사는 퓨즈를 끊어서 펌프를 정지시켜 뇌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뇌를 죽인 다음 이 집에서 도망치려고 한 것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박사님, 당신은 도노반의 뇌를 죽이려 했군요. 무슨 그런 짓을 하시려 했습니까?"
패트릭이 소리치자 시트라스 박사는 도리어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나를 목 졸라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뭐라고요? 자기 손으로 자기 목을 조이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시는 걸 제가 도와서 간신히 풀어드렸는데……"
"당찮은 소리. 생각을 해 보게. 제 손으로 제 목을 졸라 죽는 놈이 어디 있겠나? 그건 그렇다 하고, 아침에 다시 만나세."
패트릭은 혼자가 되자 자리에 걸터앉아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해 보았다.
"도움을 청하는 외침으로 눈을 떴을 텐데…… 그러나 박사의 목소리였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아니면 누가 소리쳤을까?'
이 때 제니스가 들어왔다. 제니스의 얼굴에도 아직 공포의 표정이 남아 있었다.
"오빠, 실험을 중지해 줘요."
제니스가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안돼, 그럴 순 없어."
"오빠가 하고 있는 일은 악마의 실험이에요. 만일 오빠가 그 실험을 계속한다면 난 여기 있지 못해요. 이 집에서 나가 로스앤젤레스 병원에 간호사로 일하러 가겠어요."
"일자리를 찾아가는 건 좋지만, 어째서 악마의 실험이란 말을 하지?"
"오빠는 시트라스 박사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너까지 그런 말을 하느냐? 난 박사를 구해 준거야.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겠니?"
제니스는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패트릭이 실험을 중지하지 않을 듯 하자 슬픈 얼굴이 되어 방을 나가려 했다.
"잠깐! 내 물어볼 일이 있다. 너는 시트라스 박사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게 아니냐?"
"아뇨. 뭔가 쿵 하는 소리에 놀라 나온 걸요. 그러자 오빠가……"
패트릭은, 제니스가 나간 뒤에 다시 한 번 도노반의 뇌를 지켜보았다. 뇌는 지금 일어난 소동에 몹시 지쳐버렸는지 깊이 잠이 든 듯, 전등은 꺼져 있었다.
'그렇군! 꿈속에 들은 그 구원을 청하는 소리는 도노반의 뇌가 살려 달라고 한 소리였구나. 뇌는 그럴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진 거야.'
패트릭은 뇌의 힘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큰 걸 새삼 알게 된 것 같아 오히려 기뻤다. 자기의 실험이 점점 성공해 가는 듯이 생각을 하며.
다음날 정오쯤, 로스앤젤레스로 출발한 제니스를 배웅하고 돌아온 시트라스 박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방에 들어왔다. 박사의 너무나도 변한 모습에 놀라, 패트릭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어젯밤의 일을 사과했다.
"정말 미안했습니다. 아마도 도노반의 뇌의 작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트라스 박사는 손을 저으며 별일 아니라는 시늉을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자기가 미안하다고 하는 태도로 얘기를 했다.
"내가 자네 실험을 방해하려 한 게 잘못이었네. 나이가 많아지니까 정신이 없어서 탈이로군. 그보다도 자네의 훌륭한 연구에 협력을 해 주어야 할 텐데 말일세."
이 말을 듣고 패트릭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제니스가 없어진 이제 시트라스 박사의 협조를 얻은 것은 백만의 군사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다음날부터 사흘 밤에 걸쳐 패트릭은 같은 꿈을 꾸었다. 그건 언제나 반드시 패트릭이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 상업은행에 들어서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조그만 수염을 기른, 안색이 나쁜 출납계의 남자가 있다. 패트릭이 그 남자에게 다가가서 수표 용지를 받아 가지고 데스크로 간다. 그리고는 거액의 숫자를 그 수표에 써넣고 전부터 자주 도노반이 명령해 오는 '로저 하인즈'의 이름을 쓴다. 그리고 수표 오른쪽 위에 트럼프의 스페이드 모양을 그려 넣는 것이다.
눈이 뜨이면 언제나 패트릭의 책상 위의 노트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약도와 몇 곳의 길거리와, 상업은행의 위치가 또렷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시트라스 박사님, 이건 무슨 일입니까?"
패트릭은 이상히 생각하고 꿈 얘기를 해보았다.
시트라스 박사는 잠시 생각해 보고 있다가 갑자기 기운차게 지껄여댔다.
"도노반은 틀림없이 자네에게 거기 가 달라는 것일 거야. 죽기 조금 전까지 도노반이 계획하고 있은 게 틀림없어. 패트릭, 가 봐 주게. 뇌의 시중은 내가 들어주지. 걱정이 되거든 매일 전화를 걸어서 뇌의 상태를 물어 보면 될 거 아닌가?"
이런 권유를 듣기 전부터, 패트릭은 이미 로스앤젤레스에 가 보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다만 뇌에 대한 일이 걱정된 것과, 도노반이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그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뇌가 더욱더 기운이 나고 굳세어져서, 자기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실험실을 떠나 있는 일이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 이 때라면 언제든지 뇌를 기운 없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패트릭에게 있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에 들어서는 일이 커다란 매력이었다. 게다가 패트릭은 도노반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게 알고 싶었다.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여러 사람을 괴롭혔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남자였다. 그러기에 그 계획도 정녕 뜻밖의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패트릭은 자진해서 뇌를 돌봐 주겠다고 말한 시트라스 박사에게 일말의 불안을 느끼면서 로스앤젤레스로 여행을 떠났다.
 
은행과 늙은 비서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 상업은행은 바로 꿈에 본 것과 똑같은 은행이었다. 그곳에 갈 때도 이상했다. 호텔을 나오자 갑자기 그 흐릿한 상태로 되어 있었다. 패트릭은 도노반이 시키는 대로 걸어갔다. 다만 신호가 빨강일 때와 자동차가 왔을 때만 패트릭은 멈춰 섰지만 도노반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정녕 도노반은 단 하나의 목적만 생각하고 있을 뿐, 뒷일은 내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패트릭은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은행에 들어서자 곧 출납계로 갔다. 꿈에 본 것과 다름없는 자그마한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패트릭은 수표를 받아 가지고 데스크로 가서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다음은 도노반이 시키는 대로였다. 5만 불의 금액을 써넣고, 로저 하인즈의 서명을 하고는 오른쪽 위에다 스페이드를 그렸다.
현금 출납계는 수표를 받아들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하인즈씨에요?"
패트릭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빨리 해달라고 했다. 출납계는 웬일인지 대단히 서두르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후 출납계는 다시 돌아왔다.
"지배인이 뵙자고 하십니다."
패트릭은 안쪽의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즈씨입니까?"
"나는 의사 패트릭이라는 사람입니다."
앞에 놓인 수표를 다시 한번 들고 보았다. 그리고는 잠자코 노려보고 있어서, 패트릭은 거칠게 말했다.
"그 수표에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단 말이오?"
지배인은 황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인하신 걸 본래의 하인즈씨의 사인과 맞춰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같습니다. 게다가 구석에 그린 스페이드까지도 하인즈씨의 지시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손님은 하인즈씨가 아니고 패트릭 씨라고 하시기에……."
"내가 어떤 이름으로 은행에 저금을 했거나 문제는 없을 게 아니오? 아무튼 사인도 스페이드도 맞았지요. 아무런 곤란한 일은 없지 않소?"
그러자 지배인이 황급히 말했다.
"12년쯤 전에 하인즈씨로부터 이 은행에 그야말로 굉장히 많은 돈과 편지가 보내져 왔었습니다. 신분이나 그 밖의 것은 숨겨두고 싶다고 편지에 씌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뿐, 하인즈씨로부터 그 뒤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로서는 크게 걱정을 하고 있은 거지요. 그러던 차에 오늘 당신께서 나타나 처음으로 이 예금에서 돈을 찾으시기에……."
확실히 지배인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2년쯤 전이라면 자기는 몇 살이었을까. 15~6세였을 것이다. 그런 나이의 사람이 은행이 놀랄 정도의 돈을 예금할 수 있을까하고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면서 패트릭은 말했다.
"도둑맞은 돈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겁니까?"
"처, 천만의 말씀. 돈을 보내온 은행은 매우 신용이 있는 은행이고…… 다만 저희들로서는 손님에 대해서 잘 알아 두는 것이 의무이니까요."
"그럼, 이젠 그 정도로 하고 현금을 주시오. 나는 바쁩니다. 거기에 무슨 문제는 없겠지요?"
지배인은 크게 당황해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스턴 백에 가득히 돈을 넣어 가지고 호텔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패트릭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노반은 왜 신분을 감추고 그 은행에 예금을 했을까? 그리고 로저 하인즈란 어떤 사람일까? 그 5만 불의 돈은 무엇에 쓰라는 돈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겨났다.
"아무튼 내일은 돌아가야지."
패트릭은 이렇게 결심을 하고, 시트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고는 곧 드러누웠다. 도노반으로부터 지시가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베갯머리에 종이와 연필을 두고 잤다. 무언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잘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침에 깨어 보니까 역시 밤사이에 쓴 것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안톤 스탠리, 바이런 스트리트 120번지, 5백불, 142235
"틀림없이, 이 남자에게 전해 주라는 뜻이겠지. 맨 끝의 숫자는 뭘까?"
얼마 후, 패트릭은 반쯤 수상쩍어 하면서 그 남자를 찾아갔다.
스탠리는 백발 노인이었다.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지만 대단한 근시인지 거의 패트릭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 패트릭이라는 의사입니다. 도노반 씨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도노반 씨의 심부름이라고요? 그분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스탠리는 불안스러워 하며 되물었다.
"예, 저희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도노반 씨가 죽기 직전에, 당신을 만나 이 돈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5백 불의 돈에 눈을 가까이 대고 스탠리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5백 불이군요. 됐습니다. 안경을 깨뜨려서요. 비싼 것이라 좀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도노반 씨는 죽기 전에 제 일을 생각해 주셨던가요? 그렇다면 제가 도노반 씨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틀린 것이었군요. 그분은 그밖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뭐라고 말을 할 정도가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어떤 사람이란 것도?"
패트릭이 고개를 저으니까 스탠리가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도노반 씨의 비서를 하고 있었어요. 늙은이가 되어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말이오."
주위를 둘러본 패트릭은, 그러고도 꽤 가난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도노반 씨는 퇴직금을 상당히 내셨겠지요. 그렇게 오랜 세월, 비서를 했다면……."
도노반의 성격이 알고 싶어, 패트릭은 일부러 그런 질문을 했다.
"처, 천만의 말씀. 도노반 씨는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내가 눈이 나빠져서 전과 같이 일을 할 수 없게 된 걸 알자, 곧 봉급을 반으로 깎았을 정도였고, 훨씬 예전에 그분에게서 빌린 돈 5백 불도 그 반으로 내린 봉급에서 까버린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와서 5백 불을 받게 된 게 이상할 정돕니다. 그 5백 불도 유럽에 있는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됐을 때 급히 가야할 비용으로 꾼 것이랍니다."
패트릭으로서도 이상한 일이었다. 도노반이란 사내는 들으면 들을수록 욕심쟁이요, 냉혹한 인간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왜 이제 와서 스탠리에게 500불의 돈을 주려고 하는가. 그걸로 옛날의 죄를 씻어 보려는 것일까.
사람은 죽을 때 자기가 지은 죄를 후회한다고 하지만, 도노반이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수수께끼는 어떤 것일까. 패트릭은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그리고, 당신은 로저 하인즈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요?"
스탠리는 패트릭이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깜짝 놀라는 태도였다.
"어떻게 당신이 그 이름을…… 글쎄요, 정말로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으로 캘리포니아 은행에 예금된 일이 있었지요. 참, 그렇군요. 그분은 하인즈라는 이름에 몹시 신경을 써서 내게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게 했지요. 그러고 보니, 시릴 하인즈라는 남자가 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단히 잔혹한 살인을 하고 8월경에 붙잡혔습니다만, 설마 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겠지요?"
패트릭은 이 말을 들으니, 어쩐지 도노반의 목적하는 바를 알게 되는 것 같았다. 도노반이 왜 자가용 비행기에 변호사를 데리고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는가를. 그리고 패트릭에게 로스앤젤레스에 가 주기를 바랐는가를.
'그랬던가? 도노반은 그 살인범 시릴 하인즈를 위해 변호사를 데리고 갔던 것인가. 그러다 안 되고 말았으니까 내게…… 그러나 시릴 하인즈라는 남자와 도노반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로저 하인즈와는……'
"그밖에 또 무슨……?"
스탠리가 이렇게 말했을 때 갑자기 도노반이 무언가 명령을 했다. 패트릭의 머리가 흐릿해지고 뜻하지 않은 말이 입에서 나왔다.
"글쎄요, 당신한테서 열쇠를 받으려는 건데요."
"열쇠라고요?"
패트릭도 놀랐다. 패트릭 자신도 모르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 나왔는지를. 도대체 무슨 열쇠일까? 그러자 또 머리가 흐려져 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어젯밤의 글이 적힌 종이를 꺼내고 있었다.
스탠리가 그 종이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도노반 씨의 필적이오! 몰라보지 않습니다."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뒤쪽에서 슬금슬금 뭘하고 있더니, 조그맣고 납작한 열쇠를 가지고 왔다. 은행에 있는 개인용 금고의 열쇠였다.
'그렇군. 그 번호는 금고 번호였군. 하지만 어느 은행에 있는 금고일까?'
패트릭은 스탠리와 헤어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일이 차츰 알려졌지만 아직 명백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하인즈와 도노반의 관계를 생각하며 의심스러움이 더욱 심해진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앞을 본 패트릭은 앗! 하고 소리쳤다. 바로 눈앞에 무서운 속력으로 달려오는 자동차가 있었던 것이다. 눈 깜짝할 새에 패트릭은 길바닥에 퉁겨 내동댕이쳐져 버렸다.
 
제니스의 걱정
 
패트릭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밤중이었다.
눈을 떠보니 어느 새 병원에 운반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집을 나간 제니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일하는 병원이에요. 그보다도 머리가 아프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서야 패트릭은 자기 몸을 돌아보았다. 붕대 투성이었다.
"굉장히 많은 붕대를 감았군. 깁스까지 한 모양인데. 그러고 보니 대단한 부상인 것 같은데, 그래도 별일 없는 모양이지? 아프지는 않으니……"
패트릭은 의사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 제니스가 놀라며 말했다.
"오빠는 머리도 깨졌어요. 몇 시간 동안 괴로워하는 모양은 차마 못 보겠던데요. 몇 번이나 주사를 놓았는걸요. 그러고도 아주 기력이 좋은 것 같은데 정말 아프지 않아요?"
"이상한 일이야."
하고 말했을 때 갑자기 굉장한 아픔이 온 전신을 쑤셔댔다. 주먹을 꽉 쥐고 아픔을 참으려 했지만 너무나 심한 통증이라 손바닥에 자기 손톱이 박힐 정도였다.
제니스가 부리나케 의사를 부르러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패트릭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픔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픔이 가셔져 갔다. 아픔이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 속도로 나아져 갔다. 그 뿐 아니라 고통을 느낀 기억조차도 없었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문이 열리더니 제니스와 의사가 들어왔다.
"아직 아픕니까?"
그러면서 의사는 주사를 놓으려 했다.
"아니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젠 아프지 않으니까요."
의사가 놀란 얼굴을 지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아픔이 사라질 리가 없는데요."
"나 자신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패트릭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몸뚱이를 돌아보았다. 몸뚱이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마치 자기가 뇌만으로 돼 있는 듯 손발이나 등에 아무런 감각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의사가 나가고 나자, 패트릭은 시트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도록 제니스에게 부탁했다. 아무래도 이 이상한 일들이 도노반의 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시트라스 박사가 전화에 나오자 패트릭은 물어 보았다.
"박사님께 물어 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약 48시간 동안에 어떤 변화가 없었습니까?"
"음, 자네가 환자인데 걱정시키고 싶지 않지만, 아마도 열이 있는 것 같네. 갑자기 체온이 올랐다가, 잠이 들면 다시 내린다네."
그랬었구나! 도노반의 뇌가 나의 아픔을 맡아 주었구나!
이 때 아까보다도 더 심한 고통이 패트릭을 엄습해왔다.
패트릭은 필사적으로 전화에다 대고 소리쳤다.
"뇌를 깨워 주시오. 그릇을 두들겨요. 자게 하지 말아요."
그러자 곧 아픔이 사라져 버린다.
"뇌는 깨었어. 이렇게 되면 자네 쪽은 어떤가?"
"뇌가 잠이 깨면 나는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말하자면 뇌는 나를 대신해서 아픔을 느끼고 있는 셈입니다.
전에는 도노반이 내 운동 신경에 명령을 했는데 이젠 필시 내 뇌의 아픔을 느끼는 부분도 자유롭게 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요?"
패트릭은 의사답게 냉정히 말했다. 전화기 저쪽에서 시트라스 박사는 크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머지 않아 자네 뇌 전부를 도노반의 뇌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돼 버릴 거네."
"그게 어떻습니까? 과학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시트라스 박사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문득 옆을 보니, 제니스가 지금 전화 내용을 듣고 있었는지 두려움과 절망의 빛을 띤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패트릭에게 뭔가 얘기하려는 듯하더니 잠자코 나가 버렸다.
그러나 아픔을 느끼지는 않아도, 몸에 깁스를 했기 때문에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도노반의 뇌는, 패트릭이 환자인 것도 모르고 자꾸만 여러 가지 명령을 보내 왔다. 그 뇌의 명령에 따라 패트릭이 침대에서 나오려고 하면 제니스가 달려와서 몰핀을 주사했다. 지금 이 상태의 몸으로 움직이면 나을 것도 낫지 않게 된다. 제니스가 당황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몰핀 주사를 놓으면 곧 뇌는, 패트릭과 연락이 되지 않게 되는 게 이상했다. 몰핀이 도노반의 뇌가 명령해 오는 패트릭의 뇌의 부분을 잠재워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뇌는 지금도 퇴원할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더 원기왕성해졌다. 마치 귓가에서 크고 또렷한 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트라스 박사가 말했지만, 이쪽 생각을 도노반의 뇌에 전하지 못하는 것이 불안해!"
패트릭이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데도 이쪽 사정에는 관계없이 명령을 계속해 왔다. 전에는 명령이 오면 패트릭은 그걸 반가와 했었다. 뇌가 하라는 대로 해 보려고 정신을 집중시키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패트릭은 뇌가 명령하는 대로 싫어도 움직이지 않고서는 안 되게 되어 있었다. 확실히 도노반의 뇌에 지배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내일이 퇴원 예정일이다.
도노반의 뇌가 펜을 들어 적으라고 명령해 왔다.
제니스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패트릭은 그런 행동을 보여 주기가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패트릭은 일어서서 책상 있는 데로 걸어가서는 펜을 쥐고 쓰기 시작했다.
- 시릴 하인즈, 후라 -
시릴 하인즈는 스탠리가 말한 살인범이다. 그러나 후라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글씨를 쓴 패트릭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제니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빠, 왼손으로 썼지요. 그 뇌가……."
"그게 어떻단 말이냐? 뇌를 보존시킬 수 있다는 걸 안 것만 해도 대성공이지만, 그 뇌와 연락을 할 수 있는 실험은 앞으로의 의학에 혁명을 가져오게 할거야. 굉장한 발견을 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과학자에게 온 세계 사람들은 감사해 하고 있으니까 말야."
"그래도 오빠의 경우, 뇌를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 뇌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잖아요? 난 지금 그 광경을 보고 있었어요."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아. 일부러 뇌의 명령에 따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야. 언제라도 이 편에서 생각하는 대로 실험을 그만둘 수 있어. 시트라스 박사에게 부탁해서 뇌에 혈액을 보내 주는 펌프를 정지시켜 달라면 되는 거니까."
패트릭은 아픈 데를 찔렸기 때문에 허세를 부려서 말했다.
"되나 보세요. 오빠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뇌가 방해를 하게 될 걸요. 게다가 뇌는 점점 강해져 가고 있잖아요?"
한사코 말하는 제니스에게 패트릭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잔소리 마. 나는 끝까지 해 볼 테니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아 줘."
제니스는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제 오빠하고는 만나지 않겠어요. 그래도 꼭 내가 필요하거든 불러 줘요. 곧 달려 올 테니."
제니스는 쓸쓸히 방을 나갔다.
패트릭은 한참 후에 제니스를 불러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앞으로의 불안보다도, 도노반의 비밀을 캐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좋아. 가보는 데까지 가 보는 거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면 돼."
시트라스 박사와 제니스가 친절한 마음에서 해 주는 말을 황급히 지워버리는 듯, 패트릭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살인범 하인즈
 
깁스를 한 채 퇴원을 해 호텔에 돌아오자, 도노반의 뇌는 '나다니엘 후라'라는 소리를 귓가에 되풀이했다. 전화 번호부를 펴보니 나다니엘 후라라는 사람은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주유소 사람이고, 한 사람은 변호사였다.
'도노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물론 변호사 쪽일 것이다.'
패트릭은 곧 전화를 걸었다.
"후라 씨는 누구나 확실한 사람의 소개 없이는 만나지 않습니다."
후라의 비서가 냉정하게 말했다.
"도노반 씨의 소개요."
패트릭이 이렇게 말하자, 갑자기 비서는 공손해졌다. 그리고는 오후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후라의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패트릭은 웬일인지 이런 일에서 발을 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후라를 만나기만 하면 인제 어디까지나 도노반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만 같았다.
만일 도노반의 뇌가 미치기라도 하면 이쪽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즈음 특히 깊이 느끼는 일이지만, 이렇게 도노반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나면 몹시 피로해지기 때문이었다.
'무슨 못난 생각을 하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내는 것은 과학자의 할 일이 아니냐.'
패트릭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후라는 매우 유능한 변호사인 것 같았다.
"도노반 씨의 소개라고 하셨지요? 그분은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집에서 돌아가셨지요. 하지만 죽기 조금 전에 무슨 법률상의 일로 의논할 일이 생기거든 자기 변호사의 한 분인 당신을 만나보라고 했어요."
후라는 좀 수상쩍어 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시릴 하인즈의 변호사가 돼 달라는 것입니다."
후라는 사람 깜짝 놀라게 하지 말라는 듯 손을 크게 벌렸다.
"그 남자는 20년이나 변호사 노릇을 한 나로서도 눈을 가리고 싶을 만큼 잔혹한 살인을 했소이다."
패트릭은 곧 입을 열었다.
"만일 하인즈를 구해 주실 수만 있다면 5만 불을 드리겠습니다."
후라는 패트릭의 차림을 힐끗힐끗 건너다보았다. 확실히 그럴 만도 했다. 환자로 누워 있던 몸에다 싸구려 양복을 입고 있는 이런 남자가 5만 불의 큰돈을 가지고 있을 턱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눈초리를 했다. 패트릭은 잠자코 주머니에서 돈 뭉치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후라는 다소 불안한 듯, 패트릭의 신분을 알아보려고 했다.
"어째서 그 남자를 위해 이런 짓을."
패트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사형이라는 잔인한 형벌을 없애고 싶어서입니다."
"이 남자는 유죄가 틀림없습니다. 그럼, 사형을 면하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무죄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목적은 사형 반대가 동기겠지요?"
도노반의 뇌가 '무죄' '무죄'하고 소리치는 것 같아 패트릭은 또렷이 말했다.
"당신과 입씨름을 하려고 온 건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맡지 않겠다면 다른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하고 패트릭이 일어서려 하자, 후라는 황급히 말했다.
"아무튼 사건을 조사해 봅시다. 그런 다음에 의논하는 게 좋겠군요."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그럼 곧 하인즈를 면회할 수 있도록 수속해 주십시오."
"그건 곧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하인즈의 친척이 되는가요?"
"아닙니다."
후라는 놀란 듯 했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그럼 친구이신가요?"
"사실을 말하자면 바로 4~5일 전에 이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본 일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침착한 후라도 그만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후라가 수속을 해 주어서 패트릭은 주 형무소로 하인즈를 만나러 갔다. 가는 길에 담배를 샀는데 자기가 싫어하는 여송연을 산 데 패트릭은 놀랐다. 게다가 어느새 왼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부터 식사까지 달라졌군. 고기라고는 한 점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를. 온통 채소만 먹지 않았나. 이것도 필시 도노반의 식성이겠지.'
패트릭은 새삼스레 뇌의 힘이 무한한 걸 놀랍게 생각했다. 뇌는 패트릭의 뇌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곧, 나는 도노반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게 아닐까. 정말 미래 세계에서는 어떤 위대한 뇌에 의해 전인류가 인조 인간처럼 행동하게 되는 게 아닐까."
형무소에 도착하자 따로 소장에게로 안내되었다.
소장은 패트릭에게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듯,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이 주에서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변호사를 선임한 모양인데요. 특히 하인즈와 무슨 관계도 없다면서요."
패트릭은 그 말에 상관 않고 대답했다.
"하인즈는 자기의 죄를 자백했나요?"
"아뇨, 저런 인간은 절대로 자백 같은 건 하지 않지요."
"그럼 무죄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가 봐도 틀림없는, 그 사나이가 한 범행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패트릭이 잠자코 있으니까 소장이 설명을 했다.
"어떤 여자를 자동차로 치어 죽였답니다."
그래도 패트릭이 잠자코 있으니까 소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도 한번 죽여놓고 또 한번 돌아와서 여자의 얼굴을 짓눌렀으니까요. 자동차 타이어의 자국으로 곧 그 사내의 짓임이 드러났답니다."
그제야 패트릭이 말했다.
"누구를 치어 죽였는가요?"
"그 사내의 모친이지요."
소장은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하인즈는 취해 있었고, 사람을 친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지만요."
소장은 이래도 변호사를 대 하인즈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 주겠는가 하는 듯이 패트릭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패트릭은 조용히 말했다.
"빨리 만나게 해 주십시오."
소장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패트릭을 하인즈의 독방으로 안내해 주는 간수도, 저런 남자에게 뭐하러 면회를 하느냐는 듯이 패트릭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거칠게 감방 문을 열곤 했다. 하인즈는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시릴 하인즈는 잘생긴 청년이었으나, 보기에도 잔혹한 듯한 입술이었다. 패트릭이 악수를 하려 했으나 하인즈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자네는 로저 하인즈를 알고 있나?"
그러자 하인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목을 매고 자살한 우리 아저씨요.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본 일은 없지만요."
도노반의 뇌에서 아무런 명령도 오지 않아 패트릭은 자기가 묻고 싶은 질문만 했다.
"그럼 W. H. 도노반을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 몇 주일 전에 비행기 사고로 죽은 부자겠지. 신문에서 본 일이 있어요."
그의 태도에서 보아, 하인즈는 도노반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자네를 도와주려고 하네. 이 지방에서는 일류의 변호사 후라 씨를 대고 말야."
그러자 하인즈는 수상쩍어 하는 듯이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지요? 나를 위해서 그런 일 해 주지 않아도 내가 죄지은 증거는 없어요. 당신은 경찰의 앞잡이겠지. 남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기 잇속만 차려서 나한테서 자백이라도 받아내려는 계획이겠지."
이렇게 말하는 하인즈의 비뚤어진 기분에 지지 않고 패트릭은 상냥한 소리로 얘기를 해 주었다. 그러나 하인즈는 점점 더 반항하는 태도를 더해 갈 뿐이었다. 그것은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어떤 나쁜 짓이라도 척척 해내는 범인에게 흔히 있는 성질이었다. 면회가 끝났을 때, 패트릭은 한숨을 쉬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인즈는 어디로 보나 살인범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노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인간을 구해 주려고 야단인가? 오랫동안 충실히 일한 비서 스탠리에게까지 퇴직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 예사로 돈을 쓰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패트릭의 가슴에는 무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것이 무겁게 남아 있었다.
 
도노반의 비밀
 
호텔에 돌아온 패트릭은 몹시 피로를 느꼈다. 게다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도노반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그 하인즈 같은 남자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패트릭의 성격으로서는 마음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돌아오자, 곧 시트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사님, 얼마 동안 뇌에 영양을 주는 걸 중지해 주지 않겠습니까?"
"이제 와서 무슨 소린가? 자네는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한다고 하지 않았나, 과학을 위해서. 이제 와서 실험이 무서워졌나?"
"무서워할 줄 아십니까? 이 며칠 동안 쉬고 싶어서요."
"그럴 수는 없네."
시트라스 박사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패트릭은 피로해서 털썩 자리에 앉았다.
'어째서 박사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주지 않을까. 혹시 박사까지도 도노반의 뇌의 명령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패트릭은 곧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과로의 탓인지 어느덧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에는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새로이 자기에게 기운이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시트라스 박사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기를 잘했지. 내가 꼭두각시 인형처럼 되어 도노반이 시키는 대로 할 것 같은가."
열 시쯤 되었을 때, 펄스라는 사나이가 나타났다. 말인즉 변호사 후라로부터 패트릭을 만나 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펄스는 하마같이 큰 남자였는데,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후라 씨로서도 안 되는 일을 내가 해 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유죄냐 무죄냐를 결정하는 배심원은 3백 명 가량의 사람 가운데서 열두 명을 골라냅니다. 3백 명이라 하지만 거절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백 명 가량의 사람이 재판이 시작됐을 때 배심원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요."
펄스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패트릭에게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일이 그 백 명의 비밀을 알아 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비밀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패트릭은 놀라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비밀을 캐내서 그걸로 협박을 하여 무죄로 하게 한다는 건가요? 그런 일이 이 세상에서……. 대체 정말 그럴 수가 있나요?"
"예에, 그러나 이번 사건만은 나로서도 판단이 서지 않지만, 아무튼 그 비용으로 지금 곧 5천 불을 내주셔야겠소."
"결과도 모르는 일에 5천 불이나 낼 수 있겠소?"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오. 하인즈라는 남자는 아주 나쁜 놈이니까요. 세상에 나서 여태껏 일을 한 적이 없고, 남에게서 마구 돈을 빌리고, 나중에는 제 어머니가 일해서 번 돈을 훔치기까지 하는 놈이니까, 배심원들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살해 방법으로서는……"
"하인즈는 어떻게 제 모친을 죽였나요?" 패트릭이 물어 보았다.
"당신이 더 잘 아실 텐데…… 몇 차례나 어미의 돈을 훔쳐 가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경찰에 가서 말하려 한 것이지요. 그러는 모친을 기다렸다가……."
갑자기 펄스는 자기 얘기가 무서워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번 사건만은 나로서도 싫군. 5천 불 정도로서는 모자라지. 4만 불 정도 가지지 않고서는 해내기 어려울 정도요."
패트릭도 배심원을 공갈 협박하거나 매수하거나 하는 건 당치 않은 얘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까지 바래다주러 나간 패트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지금 당장 현금을 드릴까?"
"물론 그래야지요."
이렇게 대답을 하고도 갑자기 걸음을 멈춘 펄스는 패트릭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시 하인즈는 당신의 아드님이 아니신가요?"
"뭐라구요?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오?"
패트릭은 움찔하며 되물었다. 서른 살도 되지 않은 패트릭을 보고…….
펄스는 놀라고 이상해 하며 말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렇게 보였기에 한 말입니다."
패트릭은 펄스가 가고 나자 거울 앞에 섰다. 패트릭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 때, 갑자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흐릿해졌다. 도노반의 뇌가 필시 여느 때보다 힘있게 활동해 온 게 틀림없었다. 패트릭은 시험삼아 피부가 빨개지도록 손목을 꼬집어 봤지만 조금도 아프지가 않았다. 심호흡을 해 봐도 어깨를 흔들어 봐도 자기 몸 같지가 않았다.
깜짝 놀라 의자에 돌아오려고 하자, 어느 틈엔지 오른쪽 다리를 가볍게 끌면서 걷고 있는 걸 알았다. 역시 패트릭도 적잖이 겁이 났다.
"벌써 나는 도노반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된 것인가. 어서 하인즈와 도노반의 관계를 조사하고 이 문제에서 손을 떼자.'
패트릭은 이런 결심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캘리포니아 상업 은행으로 걸어갔다. 언젠가 스탠리에게 받은 열쇠는 이 은행에서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은행에 가서 전날 본 수염을 기르고 있는 출납계원에게 열쇠를 보여 주니까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곧 지하실의 개인용 금고 실로 안내해 주었다. 금고 안에는 작은 봉투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길거리에 나와서 그 봉투를 열어 보니 다음과 같은 영수증이 나왔다.
 
[일금 1,833불.
위의 금액을 영수하였음.
1901년 2월 7일
캘리포니아주 산쥬언
로저 하인즈 도노반 귀하]
 
패트릭에게는 뭐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산쥬언이라는 곳은 도노반이 맨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인데……'
호텔에 돌아오니, 언제 왔는지 스탠리가 와 있었다.
새 안경을 산 때문인지 전날보다 기운이 있어 보였다.
"요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택으로 큰 도움을 얻었지요. 무슨 사례라도 하고 싶어 좀 조사한 걸 알려드리러 왔습니다만……"
스탠리는 이렇게 말하고 자기가 산쥬언에 갔다온 얘기를 해 주었다. 패트릭은 방금 본 영수증에 있었던 산쥬언에 관한 얘기가 나왔기 때문에 바싹 다가앉았다.
"당신께서는 요전에 로저 하인즈를 아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렇소."
"나중에 여러 가지 기록을 찾아보았더니, 산쥬언에 살고 있던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기에 조사를 해 왔습니다."
"목을 조르고 자살했다는 사람이지요?"
패트릭은 형무소에서 시릴 하인즈로부터 들은 그의 아저씨의 일을 생각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저도 도노반 씨가 자기 사업을 해나갈 적에 얼마나 무자비한 짓을 해 내는가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만, 이런 처참한 짓을 그분이 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스탠리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로저는 그분의 유일한 친구로, 산쥬언의 역장이었지요. 로저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귀여운 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소녀를 자기 아내로 삼고 싶어했던 거지요. 그래서 한 가지 계획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스탠리는 과연 도노반의 비서를 오랫동안 해온 만큼 얘기를 하는 투가 퍽 재미있었다.
"그분은 로저를 해치기 위해서 로저가 가지고 있을 수도 없는 돈을 빌려 달라고 한 것이지요."
"1,833불을."
"아! 벌써 알고 계시는군요."
"아니,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 분을 존경하고 있던 로저는 내일 돌려준다는 말을 믿었겠지요. 그래서 철도의 차표 판돈에서 그 분에게 돈을 꾸어 준 것입니다. 그 돈으로 그 분은 장사를 시작했구요. 이리해서 백만장자가 될 기회를 붙들었습니다. 돈은 들어와도 로저에게는 돈이 없다고만 하고 돌려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도노반이 일부러 그랬는지 그건 알 수 없지 않소?"
"아닙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로저가 역장자리를 쫓겨나서 형무소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돈을 갚은 겁니다. 그리고 그 때 분명히 일부러 갚지 않고 있었다는 말을 했답니다. 로저는 친구에게서 배반당한 걸 알고는 목을 매고 죽은 겁니다. 그런 후 몇 달 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슬픔에 잠겨 있는 로저의 딸을 아내로 데려갔어요."
스탠리의 말은 아주 공손한 것이었으나 도노반이 한 일을 진심으로 미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부인을 삼았을 정도니까 잘 될 리가 없지요. 게다가 부인도 로저의 자살한 원인을 어렴풋이 알게 된 모양이니까요. 그리고 부인이 죽었을 때, 그분은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때부터 저에게 하인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진실로 도노반은 친구를 배반한 일을 대단히 후회한 모양이었다.
"그럼, 시릴 하인즈는?"
"시릴은 로저의 단 하나 남은 친척입니다. 제가 비서를 그만둔 뒤라 잘은 모릅니다마는 시릴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살인범이 돼 있었던 모양이에요."
처음으로 듣는 도노반의 비밀은 무서운 것이었다. 패트릭도 스탠리에 못지 않게 속이 뒤틀리도록 화가 났다. 그런데 패트릭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꽤 쓸데없는 일을 조사했군. 그런 짓을 하느니 조용히 손자나 데리고 놀고 있는 것이 자네한테는 어울리는 건데……"
스탠리는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로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스탠리는 무서운 듯이 말했다.
"당신의 얘기하는 투는 그분의 말투와 똑같군."
 
열세 살의 소녀
 
그로부터의 패트릭은 패트릭 같으면서 영락없는 도노반이었다.
패트릭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보고 듣고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도 없이 되어 버렸다. 구원을 청하려 해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고, 자기가 하기 싫은 짓을 그의 손은 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패트릭이라고는 부를 수가 없었다. 도노반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였다. 겉보기는 패트릭이었지만…….
이로부터 도노반은 시릴 하인즈를 구해 내려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하려들었다.
어느 날, 변호사 후라가 찾길래, 패트릭이 아닌 도노반이 사무실로 가자 후라는 몹시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패트릭씨, 당신은 죽은 도노반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지요?"
도노반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화가 난 듯이 후라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후라는 그 모습에 좀 질린 듯하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행방불명이 될 수백만 불에 대해서 말이오. 그리고 그것과 교환으로 시릴 하인즈의 생명을 구해 준다고 약속했겠지요. 우리가 다 조사를 했어요. 스탠리의 조사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당신이 거액의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하인즈를 구하려 하는 까닭도 알 수가 없군요."
그러자 도노반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자유 아니오? 당신에게 많은 돈을 주었으니 맡은 일을 하면 되는 거요."
그 패트릭답지 않은 말투에 후라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하지만 도노반 씨의 유산은 아드님에게로 가야 하는 거요."
그러자 도노반은 벌떡 일어나, 문 옆의 조그만 선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전선이 쳐 있고 스위치가 있었다. 도노반은 그 스위치를 끊더니 발을 질질 끌며 돌아와서 말했다.
"언제나 용의주도하군!"
후라는 멍하니 무서움에 못 이겨 멈춰 서버렸다.
그의 말투는 바로 도노반이 곧잘 하던 모양 그대로였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건 패트릭이지, 도노반은 아닌 것이다. 후라는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어, 어떻게 알고 계시오?"
"어떻게든 좋아. 나는 내 말을 녹음하는 건 싫기 때문이야. 그보다도 랠스턴과 트루먼의 사건을 생각해 봐, 이상한 짓은 못할 텐데……."
후라는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입을 뻐끔거릴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 랠스턴과 트루먼의 사건이라는 후라와 도노반밖에 모르는 무슨 부정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도노반은 위협하는 태도로 말했다.
"그보다도 펄스에게 내 호텔로 오도록 해 주게.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으니 말야."
"패트릭씨, 그러나 하인즈는 아무리 해도 구할 길이 없어요. 검사는 하인즈를 사형에 처할 수 있게 할 증인을 발견했으니까요."
"증인을 발견했다는 건가? 그 따위 증인 같은 건 재판정에 나오지 못하게 하면 될 것 아닌가. 돈을 주면 된다는 것쯤 알고 있겠지."
도노반은 이 세상일은 무엇이거나 돈만 있으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열 세 살 짜리 소녀에요. 소녀의 때묻지 않은 마음에는 돈도 소용이 없어요."
역시 후라도 작은 소리로나마 불평을 했다. 그리고는 화를 내며 지껄였다.
"그 소녀는 하인즈가 제 어머니를 차로 치었을 때 보고 있었소. 한 번 치고 또 한 번 돌아왔을 때의 일도 보고 있었던 거요."
그리고 나서 후라는 한번 숨을 쉬었다.
"어머니는 범인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불렀어요. '시릴!'하고 부르고는 의사를 불러오라고 했소. 그런데도 하인즈란 놈은 다시 한번 뒤로 돌아가서 모친의 얼굴을 깔아뭉갠 거요. 도대체 자식이 제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일이오?"
"돼먹지 않은 얘기를 길게 늘어놓지 말아요. 그 계집아이는 신문에서 읽고 그런 생각을 해본 것이지. 그런 정도의 일을 변호사인 자네가 어떻게 해낼 수 없을 리가 있나. 더구나 자네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들키기만 하면 변호사의 자격이 박탈될 일을 해 오지 않았는가?"
"그건 그럴지 모르겠소. 하지만 아무러면 이런 잔혹한 범인을 변호하다니 이건 정말……"
"그럼 자네는 여기 있으면 돼. 내가 그 계집애에 대해선 어떻게 조처를 하고 오겠네. 아무튼 자네는 멍청이야."
도노반은 시뻘겋게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갔다. 후라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패트릭은 큰소리로, 나는 당신과 같은 의견이다, 그런 남자를 두둔할 필요는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패트릭에게는 자기의 소리를 낼 입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책임은 패트릭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인공뇌 배양기에 들어가서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 뇌와 같이 되지 않았나!'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던 펄스는 도노반을 보자 곧 말했다.
"패트릭씨, 배심원 쪽은 잘 되어 갑니다. 벌써 다섯 명이 우리편이 되었으니까요."
도노반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자, 펄스가 당황하여 말했다.
"정말입니다. 그러나 후라에게서 들었을 줄 압니다만 그 소녀가 나타난 데는 놀랐어요. 지금도 그 소녀의 부모를 찾아가서 만나고 왔습니다만……"
"좋아, 같이 가 보자."
갑자기 도노반이 다리를 절며 방을 나갔으므로 펄스는 부리나케 뒤를 따랐다.
"자동차는 있겠지?"
펄스는 요전과는 아주 태도가 달라져서 사람을 멸시하는 듯한 도노반에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펄스의 자동차에 올라앉아 소녀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펄스는 그래도 또 말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을 거요. 그 집엘 가도 말입니다. 그 소녀의 아버지는 목사님이니까요."
"목사라고? 그게 어떻단 말야. 목사도 사람이야. 돈으로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어."
그 도노반의 무시하는 듯한 소리에, 나쁜 일을 예사로 생각하고 있는 펄스까지도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나는 배심원을 매수하려는 정도의 사나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믿고 있으니까요. 목사님에게 대해서까지 그렇게 말씀하시진 말아 주십시오."
도노반은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럴 테니 빨리 차를 몰아. 잔소리는 듣지 않겠어. 좀 더 빨리! 그 계집애가 있는 한……"
도노반은 거기까지 밖에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패트릭은 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도와 도노반을 누구든 멈추게…… 시트라스 박사가 전기 스위치를 끊어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러나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고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여깁니다."
펄스가 말하자 도노반은 명령했다.
"여기서 세워, 이제부터 운전은 내가 한다."
그러나 운전대에 앉은 도노반은 그냥 자동차를 세워놓고 앞쪽만 물끄러미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시려구요? 왜 내려서 소녀의 아버지를 만나지 않지요?"
펄스가 불안스레 물었지만 도노반은 잠자코 있기만 했다.
길에는 행인이 거의 없었다.
이 때, 아파트에서 사람의 그림자 둘이 나왔다. 하나는 어머니 같아 보이는 여자이고 하나는 귀여운 소녀였다.
그러자 갑자기 도노반이 자동차를 몰았다. 그뿐이 아니다. 똑바로 두 여자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펄스가 일순간에 비명을 질렀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신은 설마……"
곧 옆에서 도노반의 손을 붙잡고 핸들을 돌렸다.
"찌이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자동차는 옆으로 돌았다. 그리고 뒤뚱 흔들리면서 먼저 오던 길로 똑바로 되돌아갔다.
"차를 세워!"
펄스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도노반이 엔진을 껐다.
"하마터면 죽일 뻔했어. 당신은 그 소녀를 죽이려한 거야. 재판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그 무슨 잔인한 짓을 생각해 냈단 말인가."
펄스는 얼굴에 땀이 흥건해 있었다.
"그 계집애를 해치우지 않으면 우리가 몹시 낭패란 말이다."
도노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뒤에서 펄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차로 그 소녀를 죽이려 드는 짓은 말아 줘!"
 
뇌는 살인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에, 도노반은 독한 술을 한 병 사서 주머니에 넣었다.
"난 술 같은 건 마시고 싶지 않아."
패트릭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호텔에 돌아오자 입구에 제니스가 서 있었다.
"오빠!"
그러나 도노반은 모른 척하며 지나쳤다. 제니스는 황급히 뒤를 좇아오려다가 수상쩍은 듯 걸음을 멈추었다.
'필시 내 모습이 달라진 걸 본 모양이군. 다리는 절고 있지, 어쩐지 노인 같은 모습이니까. 게다가 제니스를 보려고도 아니했지.'
패트릭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아봐다오. 그리고 나를 구해 다오. 시트라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펌프를 정지시켜 다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제니스 너뿐이다.'
제니스는 역시 찾아왔다. 그리고 호텔 방에 드러누운 도노반에게 소리쳤다.
"오빠!"
그 소리는 상냥했으나, 무언지 이상한 것에게 용기를 내어 대항해 가려는 태도였다.
"무슨 일이냐?"
도노반은 쌀쌀하게 물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도노반이 제니스를 아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니스처럼 진실로 마음 착한 사람은, 도노반처럼 자기 본위의 기분으로 나쁜 짓을 예사로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패트릭은 자꾸 제니스를 소리쳐 부르려 했다.
"제니스, 거기 책상 서랍에 내 일기가 있다. 바로 최근까지의 도노반의 뇌에 대한 일을 적어둔 일기다. 그걸 읽으면 내가 얼마나 도노반의 뇌에게 휘둘리고 있는지 알게다. 일기를 좀 봐 줘."
그건 소리로 나오지 않았으나 제니스는 일순간 부르르 몸을 떠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도노반이 또 물었다.
"오빠가 절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 왔어요."
제니스는 철없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러자 도노반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가라! 밖으로 나가!"
제니스는 말끄러미 도노반의 눈을 노려보았다.
도노반은 그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제니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제니스는 나와 도노반의 관계에 대해서 무언지 알아챈 것 같다!'
패트릭은 그렇게 생각하자 금방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반대로 도노반의 마음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벌컥 벌컥 술을 마셨다.
'됐어. 도노반이 취하면 나는 자유로워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패트릭은 곧 그 생각이 틀린 걸 깨달았다. 취하는 것은 패트릭의 몸이고, 도노반의 뇌는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고 난 패트릭은 어느 새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떴을 때 패트릭은 자기 의지대로 침대에서 일어 날 수가 있었다.
'이건 어찌 된 일인가? 요즘 며칠 동안에 없던 일이다. 아무튼 도노반의 뇌는 지금 내게 활동해 오지 않으니.'
패트릭은 재빨리 제니스를 부르러 나가려 했다. 제니스는 필시 이 호텔에 묵으며 패트릭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때가 아니면 제니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서 뇌가 돌아오기 전에……'
그러나 몸이 자유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혈액 속에 술의 알코올이 아직 돌고 있어서 마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패트릭은 한사코 걸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그대로였다.
'모처럼의 기회인데.'
패트릭은 마룻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어찌할 수도 없었다. 5~6분 지나자 또 도노반의 뇌가 돌아오는 걸 느꼈다.
훨씬 뒤,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패트릭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아직 깊은 밤이었다. 시트라스 박사에게서였다.
"패트릭인가?"
아주 겁먹은 목소리였다.
도노반은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연구실에 도둑이 들었네. 무섭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서 달려가 보았지. 그놈은 전기 퓨즈를 끊으려고 했네. 그래놓고 한바탕 해보려고 한 거야."
"그래?"
도노반은 그런 일쯤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가 보니까 죽어 있었어."
박사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도노반은 같은 말만 했다.
"뇌가 죽인 거야! 온몸에 감전이 되어 심장이 멈추어 있었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는가! 뇌는 요전에 자네 손을 빌어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벌써 그럴 필요도 없어졌네. 그 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야. 생각만 해도 무섭지 않은가?"
그러자 도노반이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난 피로해. 졸린단 말야."
그러면서 도노반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패트릭은 시트라스 박사가 눈치채 주기를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치자!
 
다음날 아침, 패트릭은 거울을 보고 크게 놀랐다. 거울에 비친 것은, 이미 청년다운 패트릭의 얼굴이 아니었다. 확실히 패트릭임에는 틀림없건만, 다 죽어 가는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창백해진 얼굴, 코 옆에 깊이 패인 주름. 그보다도 패트릭을 놀라게 한 것은 눈이 번쩍번쩍 기분 나쁘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도노반은 한 사람을 죽이고 나서부터 아주 변한 거야. 이제부터 무얼 할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 눈은 살인자의 눈이다!'
도노반은 호텔을 나와 렌터카 센터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동차를 빌어 가지고는 곧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도노반은 어제 그 아파트 쪽으로 자동차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를 멈춰 세우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도노반은 그 소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미 도노반의 뇌에는 선악을 분간할 힘이 없는 것이다. 오직 죽을 때 생각한 일, 시릴 하인즈를 구하려는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그 소녀를 죽이는 일이라도 예사로 하려 하는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패트릭은 어떤 일이 생각나서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뇌가 살인을 하면, 사형을 받는 건 나다. 뇌는 이번엔 시트라스 박사의 몸이나 누구의 몸이라도 그걸 빌려쓰면 되는 게 아닌가.'
이 때 저편에서 사이렌의 소리가 들려왔다. 순찰차였다. 순찰차는 도노반의 차 옆에 와서 정지하더니 경관이 내려 달려왔다. 도노반은 천천히 여송연을 꺼내 불을 붙였다. 경관이 물었다.
"당신은 이 곳에 사는 분이오?"
"아니오."
"뭘 하고있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소."
도노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제 이 근처에 온 일이 있소?"
"아아니!"
그러자 또 한 사람의 경관이 말했다.
"자동차가 다르군."
경찰에서도 어제 그 소녀를 깔아 죽이려 한 사건을 듣고, 이 근처를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동차 면허증을 보여 주십시오."
도노반은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패트릭의 면허증을 꺼냈다.
"의사신가요?"
경관은 금세 의심이 풀렸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저어, 변호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인데,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서 여기서 한대 피우려고 한 거요. 뭐 잘못된 일이라도?"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곳에는 계시지 않는 게 좋으리라 생각하는데요."
도노반은 서서히 액셀을 밟고 그 곳을 떠났다. 그러나 재수 없다는 듯 경관과 소녀를 쌍스럽게 욕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덕택에 살인을 하지 않게 됐다.'
패트릭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러는 것도 잠깐, 도노반은 도중에 철물점에 들러 튼튼한 밧줄과 긴칼과 커다란 가방을 사서 차에 실었다.
'또 무슨 궁리를 한 것인가? 칼과 밧줄로 뭘 하겠다는 거지? 게다가 저 큰 가방에 누구를 처넣으려는 건가?'
도노반은 호텔에 돌아오자, 무얼 생각했는지 성급하게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역시 어제 내가 제니스에게 말하려던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과연 패트릭의 일기장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없어져 있었다. 도노반은 한 순간 우뚝 서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거기 걸터앉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허덕이는 듯한 한숨을 쉬는가하더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후란가? 거기 내 누이동생이 가지 않았는가?"
도노반은 제니스가 일기장을 가지고 후라에게로 달려간 거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없었다.
"아뇨, 오시지 않았는데요. 아무튼 모든 것이 잘 돼 갑니다. 그 소녀도 어제 일로 아주 겁을 내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도노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도노반이 노리고 있는 건 제니스였다.
"제니스, 빨리 도망쳐라."
패트릭의 말로 되어 나오지 않은 소리는 한사코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외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도노반은 침착해질 수가 없게 됐다. 이리 저리로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손은 꼭 맞잡고 있었다. 도노반은 호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제니스의 방이 어딘가 물었다. 오빠가 누이동생의 방을 묻는 거라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리는 없다. 도노반은 비틀거리며 방을 나와 제니스의 방문을 탕탕 두들겼다.
"누구세요?"
제니스의 소리가 들렸다. 제니스는 안전한 곳에 피해 있지 못했던 것이다.
'바보 같은 것. 어째서 도망가지 못했단 말인가. 네 기운으로서는 어쩔 수도 없을 텐데. 도노반에게 대항하려해도 헛일이야.'
패트릭은 이를 갈고 싶은 심정이었다.
"열어!"
"문은 잠기지 않았어요."
제니스는 열심히 일기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일기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도노반은 그 일기를 힐끗 보고 말했다.
"날 따라와 줘."
그러자 제니스는 일부러 보란 듯이 일기장을 책상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갔다. 그리고 준비를 마치자 스스로 앞서 밖으로 나갔다.
"가십시다."
제니스의 말소리는 침착하기만 했다.
'가서는 안돼. 그 일기를 읽었으니까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내 앞에 있는 패트릭은 네 오빠의 몸뚱이지만 사실은 도노반이란 말이다.'
그러나 패트릭의 외침은 말소리로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제니스는 어떻게 이 괴물에게 대적하려는 것인가. 패트릭은 누이동생의 용기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도노반은 제니스를 자동차에 태우고 곧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할 얘기가 있다."
도노반은 로스앤젤레스의 변두리 교외를 무서운 속력으로 운전해 갔다.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고원이었다.
한 곳에 오자 갑자기 시동을 껐다. 그리고 도노반은 천천히 뒷좌석의 큰 가방을 보았다. 가방은 제니스의 시체를 운반하는 데 쓰일 것이다.
제니스는 분명히 자기에게 닥쳐온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니스는 조금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조용히 묻는 것이었다.
"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
도노반은 제니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 온 세상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 모두 나를 악한이요, 적이라고 보고 있다."
제니스는 조용히 달래는 듯이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당신은 일생 동안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잘못이에요."
그러면서 도노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제 얼굴을 보이게 했다. 도노반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용기 있는 소녀로부터 상냥하게 조용히 면전에서 말을 들어본 일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제니스는 아마도 도노반에게 마음으로써 상냥하게 이야기하면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헛일이야. 이놈에게는 이 악마의 뇌에게는 헛일이란 말이다. 이미 미쳐버렸는걸. 그러느니보다는 빨리 도망치는 거야.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하는 거야.'
패트릭의 들리지 않는 소리는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니스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야말로 이유 없이 남을 미워하고 있어요. 먼저 당신이 남을 미워하니까 그 사람도 당신을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기보다는 서로 이야기하려드는 일, 그게 가장 소중한 거예요. 모두가 그런 마음을 갖게만 되면……"
비로소 제니스는 무슨 일을 해도 이 도노반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오빠인 패트릭의 모습을 한 괴물을 다시금 노려봤다. 제니스는 아직도 패트릭이 힘을 내고, 그렇게 해서 도노반의 힘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하기만 하면, 뇌의 힘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패트릭에게 얘기하는 투로 말했다.
"오빠, 기운을 내어 저를 구해 줘요!"
"난 네 오라비가 아니다."
도노반은 불쑥 한 마디했다. 그리고는 상냥하게 용기를 내어 자기 앞에 정면으로 말을 하는 제니스에게 펄쩍 화를 냈다.
"어째서 나를 방해하나? 왜 모두들 나를 반대하느냐 말이다. 나를 불행하게 해 주고 싶어 서지? 하지만 너 같은 것한테 내가 질 줄 아나?"
도노반은 손을 쳐들었다.
"안돼요."
제니스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자동차의 문을 밀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제니스는 구원을 청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참 뛰어가다가 멈춰 서 있었다.
도노반은 천천히 제니스에게로 다가갔다.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었다. 제니스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주 침착한 눈으로 도노반을 쏘아보고 있었다. 도노반이 칼을 쳐들자, 곧 그 손목을 주먹으로 쳐서 칼을 떨어뜨리게 했다.
패트릭은 큰 소리로 외쳤다. 물론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제 누이동생을 제가 죽이려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 채하고 있어야 하다니!'
용케 칼을 떨어뜨리게 하기는 했지만 도노반은 밧줄로 제니스의 얼굴을 쳤기 때문에 제니스는 그만 비틀거렸다. 도노반은 놓치지 않고 제니스의 목을 잡았다.
'하느님!'
패트릭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외쳤다.
제니스도 동시에 외쳤다.
"하느님!"
그러나 그 남매의 기도도 통하지 않는 듯, 도노반은 제니스를 쓰러뜨렸다. 패트릭의 기분과는 반대로 자기의 손이 누이동생 제니스의 머리를 땅바닥에 눌러 박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니스의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이었다.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갑자기 어깨의 근육을 느끼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제니스에게 맞은 손목의 아픔도 느껴져 왔다.
"앗, 본래의 내가 됐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패트릭은 제니스의 목에서 손을 뗐다. 제니스는 기절하지는 않았다.
다만 제니스는 갑자기 죄이던 손을 놓는 것이 웬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패트릭의 눈을 보고는 큰소리로 부르며 와락 끌어안았다.
"오빠!"
패트릭은 자유로워진 기쁨에 입만 벌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지쳐서 하아 하아 하고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잘됐어. 오빠!"
"네 덕택에, 누이동생 살인을 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대체 어찌된 것일까."
그리고는 부리나케 패트릭은 어떤 일에 정신이 들어 허둥대기 시작했다.
"빨리!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자, 되도록 멀리. 그 놈이 돌아오기 전에!"
그러나 제니스는 조용히 말했다.
"이젠 돌아오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걸 알아?"
"그보다는 시트라스 박사님께 전화를 해 봐요. 덕택에 두 남매가 구원됐다고 말예요."
곧 자동차를 타고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주유소에 가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교환수의 말은 냉담했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습니다."
 
악마와의 싸움
 
패트릭과 제니스는 고속 도로를 시속 400킬로가 넘는 굉장한 속력으로 마구 차를 몰았다. 둘 다 시트라스 박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리운 집 앞에 차를 세우자, 근처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조금 전에 당신들이 호텔로 전화를 했었지요. 박사님께서, 이틀동안 밖에 나오지 않거든 당신들에게 전화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요."
이 말을 들었을 때, 패트릭은 당장에 쓰러질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연구실로 들어갔다. 과연 시트라스 박사는 패트릭과 제니스가 걱정한 대로였다. 박사는 연구실 안에 쓰러져 얼굴을 피바다 속에 묻고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뇌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전기 코드는 소켓에서 빠져 있었다. 도노반의 뇌는 형상이 없어져 뭉그러진 채로 무서운 꼴이 되어 있었다.
"이게 내 연구의 결과였다."
패트릭은 눈을 꼭 감았다. 패트릭은 처참한 박사의 몸을 안아 일으켜 침실로 옮기고 손과 얼굴을 씻겼다.
"박사는 이 뇌파계를 보고, 뇌가 무슨 살인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알아채신 거야. 요전에 사람을 죽였을 때 나타난 곡선과 같은 곡선이 여기 나와 있으니까 말야. 그래서 뇌가 거기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에……"
그 다음 일을 더 생각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필시 뇌는 곧 정신이 나서 제니스를 죽이는 것을 멈추고 시트라스 박사를 향해 갔을 것이다. 그래서 놀라운 힘으로 박사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면서도 최후의 힘을 다해 박사는 전기 코드를 잡아 뺐기 때문에 뇌도 죽고 만 것이다. 시트라스 박사는 감전된 사람처럼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아주 행복한 것 같고 그리고 평온한 것 같았다.
패트릭은 그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들여다볼수록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뉘우쳐져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 앞이 캄캄해져서 제니스가 달려오기도 전에 기절을 하고 말았다.
패트릭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는 피닉스 병원에 있었다. 옆에 제니스가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었다.
"아, 정신이 나셨군요. 병원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2~3개월 조용히 쉬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그도 당연한 말이었다. 남의 뇌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온 약 다섯 달 동안, 패트릭은 긴장의 연속이어서 아주 건강을 해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제니스가 눈이 빨갛게 충혈 돼 와서 한 권의 수기를 주었다.
"오빠, 이걸 읽어 봐요. 시트라스 박사님이 쓰신 거예요. 얼마나 시트라스 박사가 오빠를 생각하고 있었나……"
제니스는 우는 소리로 말했다.
그 수기는 죽기 조금 전에 쓴 것이었다.
- 오늘 뇌가 살인을 했다. 내가 두려워하던 일이 드디어 닥쳐온 것이다.
나는 영양으로 점점 강해지고 흉측해진 도노반의 뇌를 새삼 무서운 듯이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뇌가 살인한 걸 전화를 알렸을 때 패트릭의 대답은 이상했다. 어쩐지 내가 도노반의 뇌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패트릭은 이미 완전히 도노반의 명령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 아닐까. 이젠 패트릭이 아닌 도노반으로 돼 버린 거나 아닐까. 그러나 뇌가 살인을 하고 있을 때 왜 뇌의 펌프를 정지시켜서 죽이지 못했는지.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앞으로 또 그런 기회가 있기만 하면 놓쳐서는 안돼. 벌써 그런 때가 아니고서는 뇌를 죽일 수가 없으니까. 그만큼 뇌는 강해지고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죽어도 좋다. 패트릭 남매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이 괴물은 패트릭이 죽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서 살게될 것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죽여 없애지 않으면 안돼.
저번에 뇌에게 죽을 뻔했을 때, 나는 이 일을 깊이 깨달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패트릭을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던가.
그 때부터 나는 내가 뇌를 죽이려는 것을 뇌에게 눈치 채이지 않기 위해 몹시 애를 썼다.
뇌를 죽일 때는 펌프를 정지시켜도 되고, 영양물에 독을 섞어 넣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되도록 내가 협력을 해서 패트릭에게 이 실험의 위험함을 알려 주려고 했다.
그러나 아마도 내 생각은 틀린 것 같다. 뇌는 날로 강력해지고 살인조차 하게 되었으니.
뇌를 죽이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리라. 그래도 해 내고야 말 것이다. 내 사랑하는 패트릭, 제니스를 위해서. 그리고 이런 연구는 학문의 바른 길에서 빗나간 것이란 걸 패트릭에게 알려 주고 싶다.
그리고 패트릭의 뛰어난 능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향해진다면 나는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뇌만 죽이면 반드시 그 귀여운 제니스가 오빠를 기운 차리게 해 줄 것이다. 어린애처럼만 생각이 드는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 준다면……
 
도노반의 뇌는 악마다!
 
시트라스 박사의 수기를 읽고, 패트릭은 소리내어 울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얼굴을 적셨다.
"오빠, 그렇게 슬퍼만 하면 몸에 나빠요."
"그래. 그렇지만 나는 그 무슨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냐 말이야. 그리고 박사님을 그 때문에 돌아가시게 했으니……"
슬퍼하는 패트릭을 제니스가 달래주듯이 말했다.
"이봐요, 오빠. 아까 여기 병원의 원장 선생님이 갔다 왔는데, 오빠한테 코너퍼의 불시착용 공항의 의사가 돼 주었으면 좋겠다고요. 시트라스 박사님이 파면된 후로 아직 의사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대요."
패트릭이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자, 제니스는 권하는 듯이 말했다.
"원장 선생님이 하신 말씀인데 시트라스 박사를 파면시키고 비로소 알았대요. 박사님은 그 근방의 인디언들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일해 오셨다는 걸. 하기야 인디언들은 미신을 믿지요. 참 어려운 일이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그게 시트라스 박사가 내게 해 주신 일에 보답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 그리고 이제 저 집엔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집에는 아직도 도노반의 혼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니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패트릭의 손을 쥐었다.
이윽고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패트릭은 명랑하게 말했다.
"자아, 나의 새로운 생활의 출발이다."
그러자 제니스가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말했다.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보여 드리는 건데. 시릴 하인즈는 사형됐대요. 벌써 한달 전 일이에요."
제니스는 신문을 두어 장 가지고 왔다. 패트릭은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신문을 보다가 점점 얼굴빛이 새파래져 갔다.
그건, 바로 하인즈를 교수형에 처하려 하자, 기계 장치의 들판에 고장이 나서 처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형을 늦추어 기계를 수리하여 다시 시작했는데 또 고장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기계로 하지 않고 발로 들판을 차서 사형했다는 기사였다.
"아직도 도노반이 살아있는 건가?"
패트릭이 이렇게 중얼거리듯이, 제니스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도노반의 뇌는 없어졌지만 하인즈를 구하려던 뇌의 힘은 이 세계를 아직도 헤매 다니고 있는 거야."
그러나 제니스는 밝게 웃으며 그 신문을 잘게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오빠가 생각하는 것은 알겠어요. 그렇지만 악마의 힘보다도 우리들이 더 강한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저는 죽지 않았고 오빠도 구제된 거예요. 오빠가 인디언들의 치료에 몰두해 있으면 반드시 악마의 힘은 사라져 없어지리라 믿어요."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겠다. 네가 말하는 대로, 나는 일할 테다. 너와 시트라스 박사를 위해서라도."
 
 
행성의 밝은 아침
PLANET
 
빔 바이버 작
 
 
등장 인물
 
타트 대령 : 우주 이민단의 단장. 행성 도르시에서 우주 이민단을 이끌고 신세계 타리슈로 향하는 도중 큰 운석에 맞아 우주선이 파괴되어 로켓 보트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같이 탄 7명(남자 2명, 여자 5명)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이 시작된다.
클라프 중위 : 타트 대령과 함께 행성 타리슈로 온 남자 승무원. 바니스와 결혼해 아들까지 두었으나 사고로 사망.
 
<여자 대원>
 
아나리아 : 간호부. 행성 타리슈에서 타트 대령과 결혼. 사냥 길에서 실족하여 사망.
바니스 : 키가 작으나 건강한 기계 기사. 클라프 중령과 결혼했으나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미치게 된 불행한 여자.
기너 : 간호사. 명랑한 성격인데 타리슈에 도착한 일 년 후에 열병으로 사망.
도리다 : 동계 학자이고 컴퓨터 기사. 아나리아가 죽은 후 타트 대령과 결혼.
오르버 : 키가 큰 금발의 전자공학 전문가. 타리슈에 살고 있는 원숭이처럼 털이 많은 종족에게 피살당함.
엘들러 : 기관사. 오르버와 같이 털이 많은 종족에게 피살당함.
겔버 : 타트 대령과 아나리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 타트 대령이 죽은 후 새로운 지도자가 됨.
행성 타리슈
 
우주선 안에서는 밤낮이 없었다. 날마다 전망 스크린 속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공간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있는 1000명이 넘는 우주 이민단에게는 긴 여행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 날 우주 이민단의 단장 겔버 타트 대령은 우주선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서 관측실로 향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길고 긴 여행이었다. 고향인 행성 도르샤를 출발해 이미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많은 우주 이민을 이끌고 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실의에 빠진 단원들을 위로도 하고 훈계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지루해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훈련도 시키고 웃기기도 하며,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느라고 무척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생도 곧 끝이 날 것이다. 여행도 곧 끝나게 되어 목적지인 행성 타리슈도 보일 때가 되었다.
타리슈에 도착하면 그 곳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이민 계획은 성공해야 한다. 이 계획이 성공이냐 실패냐에 따라 죽어가고 있는 고향의 행성 도르샤 사람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 라고 타트는 생각했다.
그리고 먼 우주의 저편으로 멀어져 간 고향의 행성 도르샤의 물이 말라가고 있는 늪과 말라버린 시내와 나날이 늘어가는 사막과…… 그리고 건설 중인 대운하 공사가 잘 진척되어 가지 않던 일들이 문득 생각났다.
'옛날에는 고향 도르샤에도 바다가 있고 아름다운 숲도 있는 훌륭한 세계였다는 말들을 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고 있는 도르샤는 계속 비가 오지 않았고, 자주색 하늘빛에 구름 한 점 없는 말라버린 죽음의 세계였다.'
타트는 또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 죽음의 세계에서 수천만의 사람들이 우리들의 이 우주 이민 계획의 성공 보고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 계획은 도르샤의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만약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도르샤 인류는 멸망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타트는 관측실 문 앞까지 와서 발을 멈추고, 복잡한 생각들을 애써 떨쳐 버리려고 했다. 부하들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세를 바로 잡고 관측실의 문을 열었다.
실내에는 여러 종류의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항공사 론이 타트를 돌아보고 손짓을 했다.
"저것을 보십시오, 타트 대령님."
하며 관측 텔레비전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 스크린 한가운데의 어두운 우주 속에 옅은 녹색의 보석 같은 행성 하나가 떨리면서 비치고 있었다. 타트는 놀라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저것은……?"
"저것은 이 태양계의 제 3 행성입니다."
"타리슈일 테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드디어 왔습니다. 우리들의 목적지 타리슈에!"
항상 침착한 론 항공사의 목소리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남았나?"
"약 100만 킬로미터. 5일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잘 됐다. 고맙다. 론, 나는 이 사실을 이민 단원들에게 텔레비전으로 방송하겠다. 모두 볼 수 있도록 방송 스위치를 넣어 주게나."
"예, 잘 알았습니다."
타트는 론 항공사의 어깨를 툭 치고서는 뒤돌아서 힘차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다시 한 번 뒤돌아서 관측 스크린을 보았다.
지금까지 타리슈의 그늘이 되어 있었던 이 행성의 달이 때마침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저것이 지금부터 제 2의 고향이 된 신세계겠지!"
타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관측실 안의 승무원들도 바쁜 일손을 멈추고 타트를 쳐다보고 밝게 웃었다.
 
운석이다!
 
선 내의 텔레비전을 통해 타트는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이민단의 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타리슈에 데리고 간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 그 타리슈는 우리들 눈 앞에 있다. 이럴 때일수록 여러분은 일치단결하여 이곳을 우리들의 제 2의 고향으로 만들어야 한다. 도르샤에 뒤지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들은 살기 좋은 집을 짓고, 필요한 것을 만드는 공장을, 냇물에는 다리를, 평야에는 농장을 만들자. 있는 힘을 다해서 일하여 도르샤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 동포를 하루라도 빨리 이 곳으로 데리고 오자!"
"만세! 드디어 왔구나!"
"타리슈 만세!"
이민단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기쁨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5년이나 걸린 우주 속의 생활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더욱이 이 타리슈는 대단히 살기 좋은 행성이라고 지금까지의 과학적 조사 결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향인 도르샤보다 더 넓고 큰 바다가 있고, 보다 높은 산과 녹색의 평야가 있는 큰 대륙이 있었다. 그리고 공기도 살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던 신천지를 눈앞에 두고,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들떠 있었다.
타트 대령은 상륙 준비 작업을 재차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이 조사는 지금까지 몇 번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만인을 위해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타리슈에 도착한다는 전날, 타트는 제 7 격벽의 뒤에 있는 창고를 돌아보러 갔다. 그곳에는 도착하면 곧 필요한 건설 자재의 짐들이 포장되어 있었다.
자재 반은 6명의 여자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전자 공학 전문인 키가 큰 금발의 오르버, 작은 키의 건강한 기계 기사 바니스, 의사의 조수이며 간호사 자격을 가진 기너와 아나리아. 기관사인 엘들러, 그리고 통계학자이면서 컴퓨터 기사인 도리다 등 6명이었다.
6명은 테이블 가에 둘러서서 조잘거리면서 필요한 물건의 검사를 하고 있었다.
"자 다음은 구멍 파는 데 쓰이는 지주인데……"
이렇게 말하고 일에 성실한 도리다가 타트를 향해서 말했다.
"착륙하면 바로 필요한 것이겠지요, 타트?"
"그렇겠지. 폭발물과 총과 탄약의 창고와 핵분열 물질과 방사성 물질 전용의 창고 등을 곧 세우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가장 먼저 필요하지." 하고 타트는 대답했다.
"구멍 파는 기계를 놓는 장소에는 건축용 한동 분의 자재를 넣어 두면 되리라 생각되는데요. 지주를 그 장소에 다 넣을 수 없겠는데요, 타트?"
뚱뚱한 엘들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타트는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모자라면 나무를 잘라서 임시 창고를 만들면 되겠지. 지주는 스테인레스니까 비에 맞아도 괜찮지."
"하지만 창고를 만들만한 나무가 있을까요?"
오르버가 말했다.
"그건 걱정 안해도 돼요. 지금까지의 조사로 알게 되어 있으니까. 북극에는 상당히 큰 극관(빙판이라고도 하고 행성의 남극과 북극에 하얀 관과 같이 보이는 것)이 있어서 북반구에는 빙하가 상당히 많아. 그것이 점점 녹아 남쪽으로 오면 큰 산림지대 같은 것이 펼쳐져 있고, 우리들의 착륙 예정지는 그 초원과 산림지대의 중간 지점이다. 그러니까 건축용의 자재로 쓰일 나무는 많이 있을 거야."
"참 그랬었지요. 타리슈는 우리들의 고향 도르샤보다 훨씬 물이 많은 행성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군요. 식물이 무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렇게 큰 극관이 있으면 여름에도 선선할 것이고 겨울에는 대단히 춥겠군요."
바니스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 행성에는 털이 있는 동물도 있겠지요. 타트 대령님, 모피를 얻기 위해 사냥 대회를 해 보시면?"
타트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니스와 사냥으로 겨루어 보는 것은 싫은데. 바니스는 지난번 사격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였으니까 말야."
여자들이 일제히 명랑하게 웃었다.
그 때, 쏴 하고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리며, 테이블 위에 얹어 놓은 서류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뒤돌아보니 로켓 보트의 격납고의 에어록이 열리며, 한 젊은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우주선의 승무원 셀더 클라프 중위였다.
"클라프 중위, 설마 그렇게 작은 보트로 타리슈에 다녀온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오르버가 농담을 했다. 클라프 중위는 빙긋이 웃었다.
"해서 안 될 일이 있겠어요. 타리슈까지 100만 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내일 아침에는 타리슈의 대기권 내에 돌입해요. 그래서 보트의 시험을 하고 있었지요. 타트 대령님, 보여드릴 것이 있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라고 말하고, 클라프 중위는 에어록을 지나 격납고 쪽으로 되돌아갔다. 타트도 그 뒤를 따랐다. 에어록을 닫는 것과 동시에 클라프 중위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엄숙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여자 대원들에게 알리기 싫어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한 것입니다. 대령님, 실은 조금 전에 이 우주선이 운석과 충돌했습니다."
"뭐라고?"
순간 타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30분 전의 일입니다. 쾅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 그것이었구나! 뒤쪽 창고에서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움직인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심하게 당했는가?"
"지금까지는 대단치 않습니다만……"
클라프 중위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운석 탐지 장치가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어 스크린(SF에 자주 나오는 공상의 발명 중 하나인데, 적의 미사일과 광선포 등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우주선과 기지 둘레에 전기나 자기 또는 특수한 방사선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방패를 치는 것)이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열선포도 쓸 수 없게 되었고요."
"대단치 않다고 하지만 큰일 아닌가!"
타트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다음 또 운석이 충돌할 때에는 방어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게 큰 운석이 계속해서 충돌하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의 일에 대비해서 로켓 보트의 발사가 가능한지 시험하였습니다."
클라프 중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던가. 그러나 그렇다면 선장은 왜 비상 경보를 올리고 보트에 타도록 준비를 시키도록 하지 않았는가?"
"선장은 경보를 내면 이민단원이 큰 소동을 일으켜 혼란이 일어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규칙대로 경보를 내리도록 주장했습니다만 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수가 없었습니다."
클라프 중위는 입장이 난처한 표정이었다.
"실은 이렇게 대령님께 이야기하는 것도 명령 위반이지만, 아무래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타트는 화가 났지만 참고 말했다.
"내가 지휘하는 이민단원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해서 떠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와서 사고가 일어나면 큰일이다."
그는 그렇게 결심하고 벽에 붙어 있는 연락용 라디오의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꽝!
무서운 충격이 우주선 전체를 뒤흔들어놓고 말았다.
 
로켓 보트
 
타트 대장도 클라프 중위도 갑자기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곧 일어나서 에어록을 열고 창고로 뛰어 들어갔다.
여섯 명의 여자 대원도 모두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은 기울어지고 어디선가 부서지는 심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타트와 클라프는 여자 대원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기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시끄러운 경보 벨의 소리가 우주선 안에 울려 퍼졌다. 천장의 비상 램프는 심하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경보 발령! 경보 발령!"
조정실에서 스피커를 통해 울려 나왔다.
"지금 큰 운석이 우리 우주선에 충돌했다. 제 12, 13 격벽의 전선실, 선창은 공기가 새어 나가 기압이 내리기 시작했으니 모두 우주복을 입어 주십시오. 격벽의 해치(출입문)은 닫혀 있어서 곧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만, 수리반이 현장에 급히 가고 있으니 곧 구출될 것입니다. 침착하게 기다려서 지시를 따라 주십시오. 현재로서는 큰 위험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였다. 전보다 심한 충격과 굉장한 소리가 나서 타트 일행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겨우 일어선 타트는 분통이 터지는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되고 보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말지 모른다. 너희들은 빨리 보트를 타라. 이 윗방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가?"
"예, 아무도 없습니다."
아나리아가 대답했다.
"클라프, 자네는 로켓 보트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 놓아라. 나는 밑의 방에 누가 남아 있는가 살펴보고 오겠다."
타트가 이렇게 말하고 해치로 달려가려고 할 때 다른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전원 탈출하라! 전원 탈출하라! 원자로가 심하게 가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리 우주선은 곧 폭발할 것이다! 전원 로켓 보트에 타고 우리 우주선에서 탈출하라."
타트는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클라프 중위, 발진 준비! 모두 빨리 보트를 타도록!"
그는 여자 대원들을 한 사람씩 로켓 보트에 밀어넣고, 자신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자 대원들이 해치로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됐다. 클라프 발진이다! 이 우주선이 폭발할 때까지 200킬로미터 멀어지지 않으면 우리도 같이 폭발하고 만다!"
"자, 발진이다. 모두 꼭 붙잡고 있도록!"
굉음이 울렸다. 로켓 보트는 힘차게 모선의 격납고에서 튀어나와 우주 속으로 날아갔다. 타트 일행은 그 충격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타트는 공중에 둥실 떠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의식을 회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기도 하고 이마에 손을 얹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괜찮은가?"
타트가 물었다.
엘들러는 코피를 흘리고 있고, 오르버는 한쪽 눈이 부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별 탈이 없었다.
"클라프, 관측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넣어라. 모선의 상태를 보고 싶다. 그리고 오르버는 무전으로 우리 외에 탈출한 사람들과 연락을 취해봐."
로켓 보트의 천장에 있는 텔레비전 스크린이 밝아 왔다. 스크린의 한가운데에 차츰 멀어져 가고 있는 거대한 원반형의 우주선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 순간 스크린 전체가 환하게 빛났다. 모두 무심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때 보트는 뒤쪽에서 거인의 발에라도 차인 것처럼 먼 곳으로 떠밀려 나갔다. 모든 사람은 또 한번 심한 충격으로 인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스크린 안에는 심하게 타고 있는 가스의 덩어리가 비치고 있었다. 그 가스는 힘차게 우주 공간에 흩어지고 있었다.
"모선이 폭발한 것이다……"
클라프 중위가 신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우리 외에 살아 있는 사람도 있을까……"
엘들러가 가까스로 말했다.
"아마 가망이 없을 거야. 우리들처럼 빨리 탈출할 수 있는 보트는 없었을 거다. 1분만 늦어도 저 핵폭발의 수백만 도나 되는 가스 속에 휩싸이고 말았을 것이다."
타트가 괴롭게 말했다.
"아, 아……"
여자 대원들은 슬픔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르버는 머리에 쓰고 있던 리시버를 벗었다. 그러나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타트는 클라프 중위 쪽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보트의 진로를 타리슈로 잡아라. 착륙 지점은 북반구의 낮쪽 부분 온대 부근이고, 될 수 있는 대로 바다나 냇가 가까운 곳을 선택하라."
"알았습니다, 대령님."
"그리고 타리슈에 항로를 정하고 가속시켜서 착륙 직전에 엔진을 꺼라. 연료는 타리슈에 도착해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절약해야 한다."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타트는 오르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르버, 관측 텔레비전을 타리슈 쪽이 보이도록 하라."
오르버는 텔레비전 카메라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행성 타리슈의 모습이 커다랗게 비쳤다. 북극이 똑바로 보이고 끝없는 빙원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상당히 큰 이 행성의 달이 보였다. 아름다운 금빛의 달이었다. 모두 말없이 한참동안 그 아름다운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저곳이 우리들이 살 곳이군요."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아나리아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 여덟 사람만이……"
기너가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모두 들어라."
타트는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했다.
"우리들은 처음부터 이 행성 타리슈에서 뼈를 묻을 작정으로 탐험대에 참가했다. 그러나 불행한 사고로 1000명의 동료는 사라지고, 자재와 다른 여러 가지 필수품도 전부 잃고 말았다."
타트는 아무 말 없이 여자 대원들을 돌아다보며 격려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 여기에 여덟 명의 동료가 있다. 몇 사람 안 되지만, 이 보트에는 얼마만큼의 식량과 무기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민단의 정신을 발휘할 때다."
"잘 알고 있습니다, 타트 대령님."
아나리아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우리들이 용기를 잃는 것은 아니에요. 조금 슬플 뿐이죠. 아무래도 우리들은 여자니까요."
타트는 아나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른 다섯 명의 여자 대원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차례로 살폈다. 끝으로 조종석에서 이쪽을 돌아보고 있던 클라프 중위의 눈이 마주쳤다.
여덟 사람은 모두 빙긋이 웃었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마음먹고 있는 것은 모두 같았다.
 
불행의 연속
 
행성 타리슈까지는 아직 20시간 넘어 비행해야 한다.
타트와 클라프는 5시간마다 교대로 조종했다. 다른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타리슈는 차츰 가까워졌다.
타트는 세 번째 조종석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엔진이 걸려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옆의 조종석에 있는 클라프 중위에게 호령을 했다.
"이봐 클라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중심이 되는 엔진은 착륙할 때까지 꺼 놓으라고 내가 명령하지 않았던가!"
"꺼 놓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돋워 말하는 클라프의 이마에는 힘줄이 서 있었다.
"엔진을 꺼 놓고 손도 대지 않았는데 자연히 발동이 걸렸습니다. 아마 모선이 폭발했을 때 분사의 불꽃이 엔진 속으로 거꾸로 흘러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래서 엔진이 고장을 일으켜 자연히 발화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
타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 대원들은 놀라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 보트도 폭발하는 건가요?"
아나리아가 재빨리 물었다.
"그래요. 연료 파이프가 다 타고 불이 연료 탱크에 들어가면 폭발이 일어난다. 물론 우리 보트는 재가 되고 말 것이다."
"폭발하기 전에 착륙할 수 없을까?"
타트는 이미 눈앞에 크게 다가온 타리슈의 푸른 지표를 노려보며 말했다.
"조금 기다리십시오."
클라프 중위는 재빠르게 조종석 옆에 있는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렸다. 행성 타리슈까지의 거리와 로켓 보트의 속력, 그리고 지표까지의 시간 등을 계산했다. 채 1분이 되지 않았을 때, 그는 타트를 뒤돌아보았다.
"기회는 있습니다. 위험하지만 이대로 타리슈까지 비행하고, 역분사를 시켜가며 착륙시키면 되겠습니다."
"단 10분!"
도리다가 놀란 소리로 외쳤다.
"위성에 착륙하면 안 됩니까? 그 곳이 조금 더 가까운데요."
"가깝기는 하지만 그 위성에는 공기도 물도 없다. 착륙해도 살 수가 없어."
타트가 말했다.
"그래 클라프, 자네가 말한 대로 해 보자."
그는 여자 대원들 쪽을 돌아보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운반하기 좋도록 묶어라. 첫째로 무기와 탄약이다. 다음은 의복과 모포, 그리고 도구와 식량이다. 보트가 착륙하면 가질 수 있는 대로 가지고 빠져나가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타트는 창고 문을 열고 무기를 꺼냈다. 제일 먼저 권총과 단검을 허리에 차고 다른 사람에게 권총과 장총, 그리고 수류탄 등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 대원들은 식량과 도구 등의 포장 작업에 바빴다. 클라프는 로켓 보트의 조종을 하기 시작했다. 보트는 행성 타리슈의 표면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대기권에 들어간다. 모두들 좌석에 앉을 것!"
클라프가 외쳤다.
로켓 보트의 둘레에는 쏴아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보트가 공기에 부딪치는 소리다. 보트 안이 훤하게 밝아지더니 창문으로 붉은 빛이 비쳐 들어왔다. 보트의 둘레가 공기와의 마찰로 열을 내며 타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을까?"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스크린에는 바다와 대륙과 산림, 그리고 초원이 교대로 비쳤다.
"자, 조심할 것. 30초 내에 착륙시킨다!"
클라프가 외쳤다.
"도리다와 바니스는 착륙하면 곧 해치를 열 준비를 하라!"
타트가 외쳤다.
무서운 굉음과 진동이 보트를 심하게 흔들었다.
보트가 당장이라도 곧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스크린에는 흰 연기의 소용돌이가 보일 뿐이다. 착륙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면에 부딪쳐 죽고 말 것인가.
숨막히는 순간이다. 모두 초조하게 기다렸다.
 
건설하자
 
굉음과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고요해졌다.
스크린에는 희미하게 어떤 물체가 보였다.
"착륙했다. 자, 모두 밖으로 나가자!"
도리다와 바니스는 해치를 열었다. 밖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로켓 엔진의 분사열로 초원에 불이 붙었다. 그 심한 열풍을 느끼고 모두는 한순간 주저했다.
"이쪽이다. 알겠느냐, 내 뒤를 따르라!"
타트는 제일 큰 짐을 둘러메고 해치를 빠져나가 지면에 뛰어내렸다. 그리고 불의 기운이 없는 곳을 찾아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여자 대원들도 차례차례 뛰어내려 불 속을 헤치며 달렸다.
지면은 울퉁불퉁하고, 높이 솟은 잡초들이 달리는데 크게 방해되었다.
그러나 여덟 사람은 정신없이 달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옆에 달리던 사람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이윽고 초원은 끝나고, 눈앞에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저쪽이다! 저쪽으로 달아나자!"
타트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골짜기에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타트를 선두로 여덟 사람은 차례차례로 시냇가에 이르렀다.
"자세를 낮추어라! 곧 폭발할 것이다. 서 있으면 폭풍에 당한다!"
타트의 외치는 명령에 모두는 그대로 따랐다.
그 순간이었다. 작은 진동을 느끼자마자 배가 찢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몸 전체가 하늘로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쾅!
머리 위를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소리가 스쳐갔다. 새하얀 빛이 사방을 감싸고 태양은 노랗게 보였다. 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오랜 시간이 흘러간 것 같았다. 이윽고 흙과 모래와 여러 가지 파편이 비처럼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높고, 큰 폭발로 생긴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 동안 여덟 명은 정신을 잃고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정신을 차린 타트가 일어섰다. 옷에서 모래가 떨어져 내려왔다. 문득 시내를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도 깨끗하고 맑던 물이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로켓 보트의 연료 탱크만도 이 정도의 심한 폭발력이 있는데, 모선의 폭파는 얼마나 심했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구나."
타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디서나 볼 수 있었을 거예요. 도르샤에서도 볼 수 있었겠죠."
도리다가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바니스는 유쾌하게 떠들었다.
"그럴 거예요. 틀림없이 도르샤에서도 보였을 거예요. 도르샤 천문대에서도 이쪽을 관측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쯤은 사고가 일어난 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도르샤에서 우리들을 구조하러 올지도 몰라요."
도리다가 꿈에서 깨어난 듯이 높은 소리로 외쳤다. 한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모두는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그렇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는 될 수가 없어요, 도리다. 구조될 희망은 없어요. 우리들은 이 행성에서 움직일 수가 없어."
"그러나……"
"생각해 봐요. 우리는 이 우주선을 만드는 데 50년이나 걸렸어. 연구에 필요한 20년을 빼도 30년이다. 지금 바로 우주선의 건조에 착수해도 30년 후에 구조하러 오는 셈이다."
"대령님 말씀이 옳아요."
이번에는 클라프 중위가 입을 열었다.
"50년이라는 세월과 귀중한 자재와 막대한 비용, 그리고 과학 기술의 모든 힘을 기울여 만든 우주선이 갑자기 폭발하여 천여 명의 인명과 함께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세계 정부가 그러한 헛수고를 되풀이하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으리라고 보는데……"
"그래. 세계 정부는 우주 이민 계획을 포기하고 그만한 자재와 인력으로 도르샤의 자연을 개조하는 데 힘을 기울일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운하의 계획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도르샤의 사람들은 우리들을 포기한다는 뜻이군요."
엘들러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하는 것은 아니야. 도르샤에서는 우리들이 기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모를 거야."
"그건 그렇겠지만……"
엘들러는 고개를 힘없이 숙였다.
"우리들은 이제 아무도 만날 수 없군요. 처음 온 이 토지에 짐승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겠군요. 기계도 차도 비행기도 문명도 없이."
바니스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아나리아가 바니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당신이 말한 대로 아무 것도 없어요. 로켓 보트에 실은 얼마 안 되는 물자도 없어지고 말았어요. 지금의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만 거듭 닥쳐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아나리아의 목소리는 바뀌었다.
"문명의 이기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에요, 엘들러. 하지만 여기에 있는 우리들 여덟 명은 문명인이에요. 이 행성에는 우리들의 문명이 있어요. 우리들이 여기에서 문명의 세계를 우리들 손으로 건설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타트 대령님?"
라고 말하고, 아나리아는 타트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타트는 감사와 존경의 표정으로 아나리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로켓 보트에서 가지고 나온 모두의 공유 재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다. 권총과 단검은 각기 한 자루씩 있다. 그 외에 칼빈총이 여섯 자루, 큰 동물을 쏠 수 있는 강력한 장총 두 자루가 있었다. 탄환은 권총용이 대략 200발, 칼빈총은 1500발, 수류탄은 여섯 개, 대형 파괴 폭탄이 두 개, 의복은 하의가 대여섯벌, 잠옷이 몇 벌 정도.
그밖에 도끼 한 자루, 회중전등이 1개, 원자력 라이터가 세 개.
식량은 일 주일분의 통조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을 것과 먹을 수 있는 식물을 빨리 찾아 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클라프가 말했다.
"잡을 만한 동물은 있겠지만 탄약이 한정되어 있다. 될 수 있으면 오래 지탱하기 위해 처음부터 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 외에도 창과 활 같은 것도 만들어야지."
"짐승을 잡기 위한 함정도 파야죠. 그리고 이 행성의 동물들의 습성도 잘 조사하지 않으면 안될 거예요."
라고 바니스가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바니스가 이제 기운을 차린 것을 알고 모두 기뻐했다.
"오늘의 야영은 어디에서 할까요? 이쪽이 좋을까요?"
도리다가 말했다.
타트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 이 시내 위쪽으로 가자. 이 근처에는 땔나무도 적고, 첫째로 이번 폭발에 이 근처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달아나고 말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급히 짐을 꾸립시다. 꾸물거리면 해가 져요."
"그래요. 탄약과 식량은 옷과 모포로 싸면 좋겠어요."
기너도 소매를 걷어 올려가며 말했다.
모두가 일제히 일어서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 대원들은 모포를 펴고 식량과 탄약을 여섯 개의 꾸러미로 만들었다. 타트와 클라프는 수류탄과 대형폭발 탄약 상자를 어깨에 메기 좋게 꾸렸다.
이윽고 여덟 명은 제각기 짐을 둘러메고 총을 어깨에 걸고 강둑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원에는 폭발로 지름 100미터쯤 되는 큰 구멍이 생기고, 그 둘레의 풀들은 아직 연기를 내며 타고 있다.
장총을 둘러맨 타트가 선두에 섰다. 또 장총을 가진 클라프는 일행의 뒤를 지키며 따라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섯 명의 여자 대원들이 걷고 있었다.
이윽고 걸어가는 일행의 앞 지평선에는 초록색의 산맥이 보였다. 여덟 명은 그 산맥과 그 위에 펼쳐져 있는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름답고 넓은 세계다.
모두 입술을 깨물고 눈을 똑바로 뜨고 천천히 힘찬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털이 많은 종족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생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두 번째의 추운 겨울이 왔다.
타트 일행은 추위를 막기 위해, 산허리에 대형 폭탄으로 동굴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타트 일행은 이미 옛날과 같은 복장이 아니었다. 옷은 낡고 더덕더덕 기워 입고 있었다. 구두는 짐승의 모피로 새로 만든 반장화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총과 함께 돌로 만든 활촉을 사용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타트 대령은 아나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클라프 중위는 바니스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귀여운 남자아이를 낳았다.
오르버도, 엘들러도, 도리다도 원기가 왕성했다. 그러나 낙천적인 기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너는 일년 전에 이 행성의 열병에 걸려 여러 사람의 애타는 간호에도 불구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모두 행성 타리슈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항상 고향인 도르샤가 생각나서 가고 싶어 남모르게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 모두 이 행성 타리슈를 제 2의 고향으로 굳세게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것은 동굴 생활의 어느 날이었다.
해가 져서 어둠이 깔렸을 때, 물이 떨어졌기 때문에 엘들러는 가죽 포대를 가지고 골짜기의 시내에 물을 길러 갔었다.
동굴을 나서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한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까, 골짜기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또 한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엘들러가 야수에게 습격을 당한 모양이다. 어서 가보자!"
타트는 급히 총을 쥐고 동굴에서 뛰어나왔다. 모두 뒤를 따랐다. 골짜기의 시내 가까이 왔을 때,
"오! 저것은……."
클라프는 신음소리로 외쳤다.
시냇가에서 엘들러는 권총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엘들러에게 털이 많은 고릴라 같은 야수 네 마리가 손에 뾰족한 돌을 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엘들러에게 맞은 두 마리의 괴물이 흉하게 쓰러져 있었다.
"아니!"
모두 가까이 가서 권총과 장총을 쏘았다. 괴물들은 총의 위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총을 보고도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순식간에 괴물은 모두 사살되었다.
그러나 엘들러도 중상을 입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괴물의 돌도끼에 머리를 얻어맞고 그 힘센 손에 의해 목뼈가 부러졌다. 엘들러는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모두 아무 말 없이 엘들러를 시내 가까이에 묻어 주었다. 그 다음 괴물들의 시체를 처리하면서 클라프가 이상한 듯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일까? 사람의 종류일까? 야수일까?"
"음, 고릴라와 오랑우탄(삼림 속의 사람이란 뜻)같은 원숭이로서는 너무 사람에 가깝고, 사람으로 여기기에는 짐승과 흡사한데."
하고 타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리고 그 추잡한 괴물을 내려다보았다.
팔은 길고, 발은 짧고, 귀 위에 몸통은 사람의 두 배 정도로 컸다. 머리는 고릴라와 흡사하여 이마는 좁고 입은 보기에 흉하게 튀어 나와 있고, 굵은 뼈다귀라도 한입에 물어 부술 만한 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인간이라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원인(원시 시대의 인류, 원시인)일 것이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다. 그러나 원숭이라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돌도끼라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는 없으리라. 타리슈에는 아직 지적인 동물, 즉 인간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 괴물들은 이 행성 타리슈에 태어난 인간의 선조일까? 지금은 원숭이와 다름없지만 50만년쯤 세월이 흐르면 인류로 볼 수 있을 만큼 진화되어, 드디어는 우리들과 같이 높은 문명을 쌓아올리겠지.'
그러나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괴물에 대해서 타트 일행은 그들의 고향인 이 행성을 침입한 사람이 되겠지. 괴물들은 물론 자신들은 모르지만 다른 세계에서 침입해 온 자들에게 자기들의 고향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타트는 이런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버렸다.
'우리들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감상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제는 주저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명령해 괴물들의 시체를 산골짜기에 밀어 넣었다.
이것이 털이 많은 종족들과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끊임없는 싸움
 
그로부터 털이 많은 족속에게 타트 일행은 여러 번 습격을 받았다.
엘들러가 죽은 일주일 후, 털이 많은 종족은 수십 마리 집단이 동굴을 습격해 왔다. 여섯 명은 바위틈에 숨어 다가오는 털 많은 종족을 총으로 거의 전멸시켰다.
또 한때는 타트 일행이 행군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습격해 왔다. 그 때도 타트 일행은 재빠르게 나무 그늘에 숨어서 적이 다가오기 전에 반수 이상을 쏘아 죽였다.
어떤 때는 뗏목을 잡고 강을 건너는 털 많은 종족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때도 강가에서 총을 쏘아 전멸시켰다.
그리고 하루는 정찰하러 나간 타트와 아나리아가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수십 마리의 털 많은 종족에게 다가가서 수류탄 한 발로 전멸시켰다.
그리고 나서 한참 동안은 털이 많은 종족은 타트 일행을 습격해 오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완전히 전멸된 것은 아니고,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한 발의 총을 쏘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나고 만다.
"놈들은 이제 우리들이 무섭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기억력이 좋은 놈들이다."
하고 타트가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분간 습격해 오지 않겠죠."
클라프가 이렇게 말하자, 타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곧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왜요?"
"그들은 역시 보통의 야수가 아닌 것 같다. 아마 언어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혜가 있는 동물이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언어라니요? 설마 그런 야만적인 고릴라들이……"
클라프는 말도 안 된다는 투였다.
타트는 웃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의 고릴라가 아니다. 우리가 놈들을 만난 것은 불과 열흘 전이다. 보통의 야수라면 그렇게 짧은 기간에 우리가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런데, 아직 우리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들의 동료들까지 우리들의 대해 알고 있다. 즉 우리가 위험한 적이며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를 만난 동료들이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빨리 가르쳐 주는 걸 보니 언어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어."
"그렇겠군요."
클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젠 털이 많은 종족은 우리들을 공격해 오지 않겠죠? 우리들을 무서워하여 가까이 오지 않겠지요."
라고 아나리아가 말했다.
타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생각은 잘못이야. 언어도 가지고 지혜를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런 동물은 반드시 어떤 수단이든 써서 강한 적을 습격할까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우리를 적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틈을 보아서 공격해 올 것이다."
 
타트는 모두를 돌아다보며 명령했다.
"지금부터는 무슨 일을 하든 결코 혼자 행동해서는 안돼. 물을 길러 갈 때나, 딸기를 따러 갈 때도 반드시 두 사람 이상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타트의 이러한 생각은 들어맞았다.
 
새로운 묘
 
봄이 되어 눈이 녹아 타트 일행이 살고 있는 동굴을 나왔을 때, 곧바로 털이 많은 종족들이 일행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이상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항상 어디서나 털이 많은 종족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때는 풀 속에서, 어떤 때는 바위틈에서, 또 어떤 때는 숲의 나무 그늘에서 - 털이 많은 종족들이 번쩍이는 눈으로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그들은 타트 일행을 습격해 왔다. 타트와 아나리아 두 사람이 사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쪽이 두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은 무섭게 고함을 지르며 사방에서 습격해 왔다. 타트와 아나리아는 서로 등을 대고, 가까이 다가오는 털이 많은 종족에게 탄환을 퍼부었다. 그러나 털 많은 종족들은 이미 총의 무서움을 알고서 전처럼 똑바로 돌진해 오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게 처치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타트도 아나리아도 탄환이 떨어졌다. 그것을 안 털 많은 종족들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타트는 가지고 있던 창과 도끼로, 아나리아는 단검으로 가까이 오는 털 많은 종족과 대항해서 싸웠다. 때마침 총성을 듣고 급히 달려온 클라프 덕택에 겨우 그 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놈들은 날이 갈수록 영리해진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 행성 타리슈 인류의 조상이다."
라고 타트는 숨가쁘게 말했다.
"말하자면 놈들의 이 행성의 만물의 영장이란 말이군요."
클라프가 웃으며 말하자, 모두 와아 하고 웃었다. 그러나 타트는 웃을 수가 없었다. 이 행성에 가장 강한 동물이며 또한 수효도 많다. 아마 털이 많은 종족은 수만 수십만, 아니 수백만이 될지도 모른다. 죽여도 죽여도 불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털이 많은 종족들과의 싸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오래가면 갈수록 싸움은 이쪽이 불리할 뿐인 것이다.
'여간 단단히 각오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쪽이 당하리라. 아, 몇 년 동안이나 지탱할 수 있을까. 내년까지일까……'
타트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무서운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났는데도 타트 일행은 아직 살아있었다. 일행은 항상 타트가 선두에 서고, 클라프는 맨 뒤를 지키면서 초원과 골짜기를, 그리고 산을 넘어서 다녔다.
두 사람은 수염이 길었고 햇볕에 그을려서 얼굴이 까맣게 되어 딴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옷은 낡아서 지금은 모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네 명의 여자 대원들도 옛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떨어진 모피 옷을 입고, 머리는 나무 줄기로 묶고서 아이들을 업고 걷고 있는 모습을 만약 고향인 도르샤 사람들이 본다면 미개지의 토인 여자라고 생각될 그런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아홉 명으로 늘어났다. 타트의 장남은 이미 일곱 살이 되었다. 대단히 건강하고 민첩하며,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무기도 이 5년 사이에 완전히 변해 버렸다. 총은 물론 소중하게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전원은 날카롭게 다듬은 돌로 된 창을 가지고 있었다.
창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무겁고 튼튼한 창은 가까이에 있는 적에게 던지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는 무기였다. 또 가늘고 가벼운 창은 클라프가 발명한 투척기를 사용해 먼 곳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무기였다. 투척기를 사용하면 먼 곳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가 있었다.
털이 많은 종족들은 5년 전과 같이 여전히 끈질기게 일행을 쫓고 있었다. 그 수효도 옛날보다 늘어났다. 그러나 신중을 기하여 한번도 정면으로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그 5년 동안은 그런 대로 평화롭게 지냈다. 모두 이 행성의 기후와 자연에 익숙해져, 이제는 고향인 도르샤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행성 타리슈의 생활이 즐겁기조차 했다.
사냥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요즈음의 사냥에는 총을 좀처럼 쓰지 않았다. 이 행성의 동물의 습성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총과 달라서 창을 던지면 목표하는 동물 외에 다른 동물도 달아나지 않기 때문에 편리했다. 어떤 동물은 고기가 맛있고, 어떤 동물은 모피가 좋다는 것쯤은 다 알게 되었다.
고기를 말리는 방법과 뼈와 뿔을 이용하는 방법 등, 살아가기 위한 모든 방법들을 자연히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불편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원자력 라이터는 연료가 떨어져서 이미 사용할 수가 없었다.
 
탄환도 엄청나게 줄었다. 절약하며 사용해도 언젠가는 바닥에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식량을 얻기에도, 적과 싸우는 데도 무기로는 창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때를 상상하니 타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이들도 어리고 어른은 여섯 명밖에 없으니……'
힘이 빠지고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 때마다 타트는 마음에 채찍을 가했다.
'이렇게 약해서는 안 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모두 나 하나에 달려 있다. 어쨌든 아이들이 성장해 자기들의 힘으로 식량이 될 동물을 잡고, 자신의 힘으로 적과 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지탱해 나가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버텨 나가야만 한다!'
이렇게 하여 하루하루 흘러갔다.
생각지도 않던 무서운 사고가 일어난 것은,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던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그 때 타트 일행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항상 선두에서 걷고 있던 타트 옆에 있던 아나리아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조금 쳐져 있었다. 그래서 급히 앞으로 뛰어가던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앗!"
비명과 동시에 아나리아의 모습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모습이 사라지면서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 정지! 클라프, 자네는 모두를 지키고 있게. 오르버는 나를 따라와라!"
타트는 이렇게 말하고, 위험한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아나리아는 이미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신차려, 아나리아. 대단치 않다구."
타트는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오르버는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나리아는 자기의 부상을 잘 알고 있었다. 타트와 오르버가 아나리아를 옮기기 위해 나무로 들것을 만들고 있을 동안, 아나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무슨 짓이야, 아나리아!"
타트가 외치면서 뛰어갔다.
아나리아는 붉게 물든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몰아쉬면서도 방긋이 웃어 보였다.
"타트, 저는 아무래도 살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
"아니에요. 설사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해도 당신들에게 부담이 될 뿐이에요.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아나리아……"
오르버는 소리내어 울었다. 아나리아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가는데도 여전히 미소를 띤 낯이었다.
"오르버, 나는 대단히 피로해 있어요. 전부터 한 번이라도 좋으니 조용히 쉬고 싶었어요. 죽으면 모든 걸 잊고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것이 최후의 말이었다. 그리고서 아나리아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얼굴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가 남아 있었다.
타트 일행은 모두 통곡했다. 아나리아의 시체는 골짜기 바위 옆에 묻어 주었다. 돌로 묘비도 세워 주었다. 모두 이 새로운 묘 앞에 모여 새삼스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비참한 일이 일어난 뒤에도 좋지 못한 일은 꼬리를 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한달 후.
얼어붙은 내를 건널 때, 맨 뒤에서 걸어오던 클라프가 쓰러지면서 장총을 얼음 구멍에 떨어뜨렸다. 당황해 총을 찾으려고 하다가, 그만 클라프 자신이 얼음 구멍에 빠지고 말았다.
"클라프!"
타트는 뒤돌아서 달려갔다. 클라프가 물 위에 떠오르면 구조하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얼음 밑의 물은 차갑고 물의 흐름이 빨랐다.
물에 빠진 클라프의 모습은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다. 너무나 순식간이었고, 너무나 믿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클라프의 아내 바니스는 기절하여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서도 소리 없이 울 뿐,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털이 많은 종족들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의 적이 줄어들었다. 적들이 비통하여 기운을 잃고 있다. 공격할 때는 바야흐로 지금이다. 아마 이런 이야기가 털이 많은 종족들끼리 오고갔을 것이다.
그로부터 수 일 후, 타트 일행이 강가에서 야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십 명의 털이 많은 종족들이 갑자기 습격해 왔다.
"와아- 와아-"
밤중에 요란스런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천막 주위에는 수십 명의 털이 많은 종족들이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불침번은 누구냐?"
"오르버입니다."
"오르버! 오르버는 어디에 있나?"
그러나 오르버는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르버를 찾을 겨를도 없었다.
"카우!"
두목 같은 놈이 외치자, 털이 많은 종족은 일제히 천막을 향해 돌진해 왔다. 순식간에 무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털이 많은 종족들은 하나하나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돌도끼를 휘둘러대며 돌진해 왔다.
"이놈!"
타트는 권총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괴물 세 놈을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아 죽였다. 탄환이 떨어지자 창을 들고 두 놈을 때려눕혔다. 천막 주위에서는 모두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총성과 창과 돌도끼가 부딪치는 소리, 비명 소리, 털이 많은 종족의 부르짖는 소리 등이 곳곳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서로 섞여서 혼전이었다. 한참 동안은 어느 쪽이 이기고,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싸움은 10분 정도 계속되고 끝났다.
털이 많은 종족은 열 구가 넘는 시체를 남긴 채 물러서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천막 밖에서 도리다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오, 오르버, 오르버!"

타트는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타트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곳에는 오르버가 창으로 가슴이 찔린 채 죽어 있었다.
타트는 슬프다는 것보다 더 놀란 것이, 털이 많은 종족이 점점 영리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놈들은 오르버 모르게 살그머니 다가와서, 오르버가 가지고 있던 창을 빼앗아 오르버를 죽인 것임에 틀림없다. 적의 무기를 탈취하여 습격하다니, 상당히 지혜가 있는 동물이 하는 수법이다.
타트는 한참 동안, 오르버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도리다의 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로켓 보트로 이 행성에 착륙한 여덟 명의 동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와 도리다, 그리고 바니스, 이렇게 세 사람이 남았다.
"그런데, 바니스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갑자기 긴장되어 사방을 둘러보며 일어섰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도리다도 벌떡 일어섰다.
"아이들과 같이 천막 안에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천막으로 뛰어갔다.
바니스는 무사했다. 바니스는 벌벌 떨며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천막 안에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앗!"
도리다가 비명을 질렀다. 바니스 앞에 아이가 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 머리 뒤쪽이 털이 많은 종족의 돌도끼에 맞아 갈라져서 죽어 있는 것을 알았다.
"바니스……"
타트는 바니스 앞에 꿇어앉아 바니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위로를 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 일 전에 바니스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오늘은 또 다시 귀여운 아들마저 죽고 만 것이다. 바니스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의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니스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바니스, 용기를 가져요."
타트는 자기 자신을 격려하듯 말했다.
"아들이 죽은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지만, 우리들은 아직 돌봐 주지 않으면 안될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있지 않아요?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기로 해요. 용기를 내어 살아갑시다."
하고 타트가 아이를 끌어안으려고 하자, 바니스는 힘차게 손을 타트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손대지 말아요!"
"바니스, 죽은 아이는 묻어야죠."
"싫어요."
"바니스, 이해해야지요."
"지금까지는 당신의 명령에 복종해 왔지만, 이제는 다 싫어요."
바니스는 타트의 눈을 쏘아보았다.
"이것은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타트."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바니스."
도리다가 참지 못해 이렇게 말하자, 바니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도리다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묻겠는데, 왜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이런 곳에서 방황하지 않으면 안되나요? 무엇 때문에 타리슈에 가지 않나요? 이런 곳에 이렇게 있기 때문에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나요?"
타트는 놀라면서 바니스와 도리다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바니스는 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타트는 우주선 안에서 틀림없이 우리들을 타리슈에 데리고 간다고 약속했잖아. 타리슈에 도착하면 훌륭한 집과 공장을 건설해, 식량과 입을 옷과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면서 바니스는 갑자기 타트의 얼굴을 쳐다보며 호소하듯 말했다.
"타트, 왜 당신은 타리슈에 우리들을 빨리 데리고 가지 않나요? 나는 더 이상 이 곳에 있기 싫어요. 나와 나의 아이들을 어서 빨리 타리슈에 데리고 가주세요."
타트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바니스의 눈을 다시 쳐다보니, 미친 사람에게서만이 볼 수 있는 광기가 있었다. 바니스는 슬픔의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 것이다.
도리다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이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타트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살아남은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미치고 말았다. 나머지 두 사람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타트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다가오는 적
 
그로부터 또 10년이 흘러갔다. 이 행성 타리슈에 와서 20년이라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굴에서 생활했다. 봄이 되면 초원에 파릇파릇한 새순이 솟아올라, 온 대지는 푸르게 물든다. 여름에는 시내에서 고기를 잡으며 목욕도 하고, 가을에는 잡은 짐승의 고기를 겨울 준비로 말리기도 하고, 모피를 다루기도 하여 바쁘다.
이렇게 하여 이 20년간을 모두 힘겹게 살아왔다.
일행을 지도하고 지휘하는 사람은 역시 타트였다. 그는 이제 흰 머리카락이 많이 보이게 되었다.
이제는 장총도 가지고 있지 않다. 탄환은 이미 오래 전에 다 쓰고 만 것이다.
그 대신 타트는 긴 자루가 달린 손도끼와 끝을 강철로 만든 긴 창을 가지고 있었다. 그 창끝은 필요 없게 된 장총의 총신으로 오랜 기간 고생해서 만든 것이었다.
권총은 아직 허리에 차고 있다. 탄창에는 아직 여섯 발의 탄환이 들어 있다. 그밖에 대형 파괴 폭탄과 수류탄 한 발은 항상 어깨에 메고 있었다.
로켓 보트에서 가지고 온 옷은 다 낡아 없어졌고,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아래위 모두 모피를 다루어서 만든 것들이었다.
타트 옆에는 그 전에 아나리아가 그랬듯이 지금에는 도리다가 타트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아나리아가 죽은 얼마 후에 도리다가 타트의 아내가 된 것이다.
바니스는 아직도 옛날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미쳤기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걱정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상냥한 얼굴에다 성격은 부드럽고 몸이 불어 있었다.
그렇지만, 바니스가 바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보통 일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했다. 단지 10년 전의 그 사건이 일어난 날로부터 바니스의 마음은 환상의 세계로 빠지고 만 것이었다. 바니스로서는 이 20년의 세월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니스는 아직도 새로운 세계인 타리슈에 간다는 낙천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20년 동안에 일행의 수효는 열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그 옛날에 죽은 클라프 중위가 행렬의 끝을 지켜온 것과 같이, 올해 열 아홉 살이 된 타트의 아들 겔버가 걷고 있었다. 허리에는 아버지처럼 권총을 차고, 손에는 1미터쯤 되는 자루가 달린 돌도끼를 가지고 있다. 겔버의 옆에는 클라프 중위의 딸인 보올라가 갓난아기를 업고, 손에는 창을 쥐고 나란히 걷고 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였는데, 성장해서도 사이가 좋아 작년 겨울에 결혼했던 것이다.
보올라의 등에 업혀 있는 남자아이는 겔버 사이에 태어난 첫아들이었다. 이 아이는 타리슈 태생의 양친에서 태어난 토박이 타리슈 인이었다.
그 외에 일행에는 다섯 명의 소년과 다섯 명의 소녀가 있었다. 그 중에 세 명의 소년과 세 명의 소녀는 이미 15세 이상이 되었다. 보통 세계에서는 15세라면 어린아이로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타리슈에서는 그들 일행밖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었다. 이 어려운 세계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소녀이든 소년이든 자기 몫의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걸을 만한 아이 이외에는 모두 여러 종류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냥에 능숙하고, 털이 많은 종족과 싸울 때는 용감한 전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사이가 좋았다.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는 반드시 서로 돕고 고통과 기쁨도 서로 나누어 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이 일행을 살펴볼 때마다 타트는 '지금까지 겪어온 고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직 이렇게 작은 수이지만, 몇십 년이 지나면 한 부락을 이룰 수 있는 수효로 불어날 것이다. 드디어 그 부락은 둘 또는 셋으로 불어나고, 그러는 동안 새로운 문명이 싹틀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리운 고향인 도르샤가 가지고 있는 그 높은 문명보다도 위대하고 진보된 문명이 이룩될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제부터 일어날 어떤 고난에도 힘차게 헤쳐갈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타트 일행은 지금 구불구불한 험한 산길을 열심히 오르고 있었다. 머리 위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눈 아래에는 깊은 골짜기에서 빠르게 흐르는 물줄기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이 큰 산맥을 넘어서면 넓고 풍요로운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곳에 가기 위해 오랫동안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고 있던 곳은 털이 많은 종족의 수효가 점점 불어나서 그만큼 습격도 심했다. 그래서 타트 일행은 정들었던 그 땅과 이별하고, 산 넘어 평화로운 땅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털이 많은 종족은 뒤에 숨어서 따르고 있었다. 총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가깝게 따라 오지는 않아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고 있었다.
그 산맥을 넘기 전에 어딘가 에서 타트 일행을 포위하여 전멸시키려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항상 일행의 앞이나 옆에서 두세 마리의 털이 많은 종족의 정찰하는 놈이 가끔 번쩍 눈에 띄곤 했다. 뒤에 따라오는 수효는 백 마리 이상일 것 같았다.
타트 일행은 하루종일 걷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까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그 산마루를 내려서면 훨씬 길이 평탄하고, 그 앞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있었다.
"저 곳까지만 가면 다음은 훨씬 수월하다. 모두 피곤하겠지만 좀더 힘을 내어 걷자."
타트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했다.
그러나 털이 많은 종족은 영리했다. 산마루에 가까워질수록 털이 많은 종족은 점점 더 가까이로 접근해 왔다. 그리고 선발대가 앞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산마루에 닿기 직전에 포위할 작전인 것 같았다.
이렇게 험하고 좁은 산길에서 원숭이보다 몸이 재빠르고 털이 많은 종족에게 포위 당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면 견딜 도리가 없다. 어떻게 하든지 산마루에 먼저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딘가 좋은 장소에서 적이 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형 파괴 폭탄을 사용해 폭파시키면 되겠다. 그렇게 되면 끈덕진 저 종족도 따라오는 것을 포기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타트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자기가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총공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면 큰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죽을 각오를 하고 격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타트는 자기편의 힘을 계산해 보았다. 권총은 자기와 아들 겔버, 그리고 도리다 세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탄환은 합쳐도 스물한 발 밖에는 없다. 다른 것은 수류탄 한 개와 폭탄 한 개, 투창, 보통 창, 돌도끼, 그리고 강철제의 칼이 다섯 자루.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와 도리다, 겔버, 보올라 그리고 여섯 명의 소년소녀 합쳐서 모두 열 명뿐이다. 백 명 이상 되는 적과 비교하면 10대 1의 비율도 안 되는 적은 수효이다.
털 많은 종족들은 무기라고는 원시적인 돌도끼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 잘 싸우면 충분히 승산은 있다. 앞질러서 산마루에 도착한다면, 폭탄을 장치하기만 하면……
"모두 급히 걷자.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타트는 뒤돌아보면서 말하고,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운명의 바위
 
걷기 시작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뒤쪽에서 두 발의 총성이 연속 울려 퍼졌다.
타트는 손도끼를 힘껏 쥐고 뒤돌아보았다. 도리다는 조금 뒤에 따라오는 소년소녀들을 돌봐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구불구불한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소년 소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들 겔버가 자기 아내의 손을 붙들고, 한 손에는 권총을 잡고 숨차게 달려왔다. 그 뒤에는 뒤쪽에 있던 소년소녀 두 명이 숨을 헐떡이며 따라오고 있다.
"웬일이냐?"
"네 놈이 습격해 왔어요. 둘은 쏘아 죽이고, 하나는 보올라가 투창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한 놈은 도망치고 말았어요."
하고 절도 있게 보고한다.
"달아난 놈도 죽이려면 죽일 수가 있었는데, 겔버는 달아나는 놈을 공격하지 않았어요."
하고 보올라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달아나는 놈은 쏘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지켰을 뿐이야. 정말로 위험하고 창으로 처리하지 못할 때만 권총을 사용하라는 규칙을 따랐을 뿐이야."
겔버는 외우다시피 또박또박 말했다.
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했다. 겔버."
하며 그는 자기 권총을 허리에서 빼어서는 탄창을 열고 두 발의 탄환을 꺼내어 겔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걸 너의 권총에 넣었다. 너의 탄환은 여섯 발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아버지와 똑같이 여섯 발이 된다. 자 뒤로 가서 아이들을 더 빨리 따라오게 해라. 그리고 바니스가 뒤지지 않도록 주의해라. 너무 뒤지면 놈들에게 당한다."
"알겠습니다. 모두 바니스 아주머니를 도와드리자. 이것도 우리들의 법칙이니까. 자, 가자, 보올라."
겔버는 보올라를 재촉하여 달려서 뒤쪽으로 되돌아갔다. 타트는 잠시 멈추고 있던 소년소녀들에게 전진의 신호를 보냈다.
행렬은 다시 먼젓번보다 빠른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털이 많은 종족들이 공격해 왔다. 이렇게 되면 1미터라도 산마루까지 가까이 가야 한다. 때마침 일행은 높이 300미터나 되는 깎아 세운 것 같은 절벽을 오른쪽에 두고, 왼쪽은 낭떠러지가 있는 좁은 길에 이르렀다. 길은 갈수록 좁고 험했다.
타트는 여전히 선두에서 걸어가며 앞쪽을 주의 깊게 경계했다.
만약 이 절벽이 무너져서 길이 막히면, 뒤따라오는 털이 많은 종족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 난다. 탄환을 죄다 쏘고 투창을 사용해도 그렇게 많은 수효를 이길 수는 없다.
그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어떻게 하든지 모두를 무사히 산마루까지 올라가도록 해야한다. 오, 하느님. 제발 도와주소서!'
타트는 아주 오랜만에 하느님께 빌었다.
적을 상대하여 싸우는 데는 몇 십 명이라도 이겨낼 자신이 솟아올랐다. 피로와 무서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겔버 타트 대령. 타리슈 우주 이민단의 단장이다. 모두를 안전한 장소까지 데리고 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지금의 한 발자국이 백 발자국에 해당된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소년소녀와 아이들까지 필사적으로 걸어 올라갔다. 모든 사람은 타트의 결의를 말없는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절벽의 끝쪽이 멀리 보였다. 그 곳까지 가면 좋은 길이 나온다.
'잘됐다.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앗, 위험해요, 타트!"
갑자기 뒤쪽에서 도리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며 몸을 피하는 순간, 큰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도리다가 권총을 들고 머리 위 100미터쯤 되는 곳을 겨누어 쏘았다.
탕!
총성과 함께 절벽 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보니, 절벽의 바위 사이에 두서너 명의 털이 많은 종족이 눈에 띄었다. 그 중 한 놈이 움찔하더니 골짜기로 떨어졌다. 타트도 재빨리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고 쏠 자세를 취했다.
또 다른 곳에서도 털이 많은 종족의 모습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절벽에서 바위가 두서너 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적은 절벽 위에서 바위를 굴려 일행을 전진하지 못하게 할 모양이었다.
바위는 심하게 소리를 내면서 땅에 부딪치면서 부서졌다. 그 중의 하나가 일행의 1미터 앞쪽에 떨어지자 소년소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절벽 쪽으로 몸을 붙이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적의 계략에 말려들고 말겠다.'
타트는 이렇게 생각하고, 주저하지 않고 길 한가운데로 뛰어나왔다. 위를 쳐다보니 절벽에 착 엎드려 있던 털이 많은 종족이 또 바위를 굴리려 하고 있었다.
타트는 재빨리 권총을 겨누어 한 발을 쏘았다.
탕!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절벽에서 한 놈이 떨어져 내려왔다.
"타트, 위험해요, 바위!"
도리다가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찰라에 타트는 몸을 옆으로 홱 돌렸다. 다른 한 놈이 또 바위를 굴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때는 늦었다. 바위는 타트가 몸을 돌린 바로 그곳에 떨어졌다.
꽝!
크게 충격을 받은 타트는 눈이 캄캄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에 맞았구나.'
쓰러져 있으면서도 타트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었다.'라고 생각했다.
 
최후의 명령
 
무서운 진통과 충격의 순간이 지나갔다.
발은 무거운 돌에 눌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운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바위가 5센티미터만 더 가까이 떨어졌더라면, 타트는 바위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도리다가 급히 달려왔다.
"빨리 바위를!"
두 소년과 도리다가 창끝을 바위 밑에 넣어서 바위를 움직였다. 이윽고 바위는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위를 치웠으나, 타트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무리하게 일어서려고 하니, 심한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양쪽 발은 형편없이 뭉개져 있었다.
"타트, 정신 차리세요."
도리다가 타트를 안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나는 좋으니 절벽 위의 적을 주의해요. 잘못하면 전멸한다."
"이제 괜찮아요. 세 놈을 쏘아 죽였더니 겁을 집어먹고 죄다 도망가고, 지금은 한 놈도 없어요."
"그래, 잘 됐어."
타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통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리다, 당신은 앞으로 가서 이 산길을 조사해 줘요."
"그러나 당신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도리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는 신경 쓰지 말아요. 이것은 명령이오."
타트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빨리 절벽이 끝나는 곳을 조사하고 와요. 그리고 대형 파괴 폭탄을 사용해 이 길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장소가 있는가를 조사해 봐요."
타트는 한번 말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도리다는 잘 알고 있다.
"알았어요."
하고 도리다는 일어서서 힘차게 달렸다.
아이들이 타트의 주위에 몰려왔다.
겔버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
겔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뻔한 일이다. 나는 양쪽 발이 뭉개졌다. 그리고 출혈이 심해서 살 수 없을지도 몰라. 아마 산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때 나를 메고 도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짓을 하면 털 많은 종족에게 전멸 당하고 말 것이다. 겔버, 너는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
겔버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이곳을 빠져나간 뒤, 털이 많은 종족이 뒤따르지 못하도록 이 길을 막을 것이다. 아니, 더욱 놈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처치할 작정이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되지요?"
"어떻게 된다는 것은 너도 뻔히 알 것이 아니냐? 네 어머니처럼 되는 것이다. 즉 죽을 각오다."
타트는 힘주어 똑똑하게 말했다.
겔버는 몸을 움츠리고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나요, 아버지?"
타트는 분명하게 그러나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하는 수 없다, 겔버."
겔버는 눈을 지긋이 감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아버지, 제가 할 일을 가르쳐 주세요.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대로하겠습니다."
타트는 처음으로 굳세고 침착한 아들을 가진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너는 나를 업고 어머니가 조사한 장소까지 데려다 주면 된다. 그리고 대형 파괴 폭탄을 나의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겔버는 대형 파괴 폭탄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타트는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나를 이 곳에 두고, 너는 일행을 이끌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 산마루에 도착할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멈춰서는 안 된다. 대형 파괴 폭탄의 위력은 굉장하다. 잘못하면 너희들까지도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겔버는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권총과 단검, 창, 손도끼, 수류탄은 너에게 넘겨 주겠다. 나의 것은 모두 너에게 준다. 폭탄만 남겨놓으면 된다."
그 때 도리다가 숨가쁘게 달려왔다.
"타트, 이 앞에 폭포가 있어요. 그 곳까지는 좋은 길이에요. 그 폭포 앞에 폭탄을 장치하면 절벽이 무너져서 절대로 빠져나갈 길이 없게 돼요."
"산마루는?"
"폭포 바로 위가 산마루에요."
"됐다."
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모두 나를 들어다오. 무릎 밑은 손을 대지 말아라. 자, 빨리 가자!"
 
대폭발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걷기 시작하고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또 왔다, 저놈이!"
갑자기 뒤쪽에서 망을 보던 소년이 외쳤다.
절벽 바로 밑에서 털이 많은 종족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한 소년이 몸을 돌려 투창을 던졌다. 멋진 곡선을 그리며 창은 놈의 가슴에 꽂혔다.
"캬아!"
하고 털이 많은 종족의 비명 소리는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빨리!"
타트는 또 독촉했다. 모두 타트를 업은 겔버를 둘러싸고 달렸다. 타트는 수시로 뒤쪽을 돌아보았으나, 털이 많은 종족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골짜기를 흘러 내려가는 급류의 소리와 폭포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얼마 후, 골짜기의 물이 보이고, 그 상류 쪽에 하얗게 번쩍이는 폭포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점점 폭포소리가 크게 들렸으므로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은 들리지도 않았다.
타트는 겔버에게 업힌 채 아픔을 참으려고 얼굴을 찡그리며 사방을 돌아다보았다.
도리다가 본 것은 정확했다. 이 골짜기를 무너뜨리면 아무리 재빠른 야수라도 올라올 수가 없겠다.
"여기에 나를 내려다오. 이 바위 위가 좋구나."
하고 타트는 명령했다.
바위 위에 내려 대형 파괴 폭탄을 받았다.
"겔버, 수류탄 사용 방법을 알지?"
겔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여러 번 배웠으니까요. 맨 먼저 꼭대기를 이렇게 비틀고 옆에 달려 있는 버튼을 누르고 두 세 번만에 던집니다. 목표거리는 투창 정도지요. 그리고 던지고 나서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어떤 물체의 뒤에 숨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도 당하니까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타트는 겔버의 머리를 어린아이일 때처럼 쓰다듬어 주고 싶었으나 차고 말았다.
"대단히 어려운 위험이 닥쳐와서, 그리고 모든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때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겔버, 이제부터는 네가 지도자이다. 이제는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치더라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어볼 사람도 없다. 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예."
"탄환은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해라. 그리고 탄환을 다 쓰고 나서도 권총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권총 없이도 어떻게 해 나갈 길을 연구해야 한다. 알겠지?"
"아버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헛되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금속은 꼭 쓸모가 있으니까."
"잘 압니다. 그건 전부터 내려온 규칙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아도 규칙은 꼭 지키겠습니다. 바니스도 잘 돌봐 주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도 규칙을 꼭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됐다. 자, 가거라. 시간을 너무 끌었구나. 놈들이 곧 올 것이다."
"잘 알았습니다."
겔버는 아버지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며 말했다. 타트는 옆에 서 있는 도리다 쪽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도리다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이제 이별할 때가 다가왔나 보오. 도리다, 잘 부탁하오."
"타트!"
도리다는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였다. 타트는 그 말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저도 여기에 같이 남고 싶어요. 같이 죽어요.'
라고 말하고 싶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 남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어른은…….
"안녕히, 타트."
도리다는 이 말을 한 마디 남기고 겨우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소년소녀들도 뒤돌아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녕, 아버지!"
"잘 가거라."
그 때, 아이들과 같이 걷기 시작하던 바니스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타트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타트! 왜 당신은 가지 않나요?"
"나는 여기에 할 있어서……"
"그러나 당신만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내 말대로 해요, 바니스."
"그러나 타트 당신은 약속했잖아요. 우리들을 타리슈에 데리고 간다고…… 우주선에서 모두 같이 있을 때 말이에요. 아나리아와 오르버, 엘들러와 기너들이 같이 있을 때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의 바니스의 표정은 20년 전의 옛 모습대로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때는 정말 즐거웠어요. 자주 웃고 놀이도 하고 농담도 해가며……"
"그랬지. 바니스, 정말로 그 때가 좋았지."
타트는 차츰 심해 가는 고통을 참으며 미소지었다.
"물론 그때의 약속은 지켜야지. 그러나 지금 말한 대로 나는 여기서 꼭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어요. 그 일을 마치면 곧 뒤따라가지. 산마루 너머에서 기다려줘요. 꼭 약속하지."
"정말이에요?"
바니스는 미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아이 같은 얼굴로 타트를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바니스. 내일 아침이 되면 모두 함께 타리슈를 향해서 출발해요."
바니스는 웃음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타트. 먼저 가서 기다리겠어요."
말을 마치고는 돌아서서, 옆에 기다리고 있던 보올라의 손을 잡고 일행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이제 타트는 홀로 그곳에 남았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한동안 들리다가 그것마저 폭포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금 지나 타트는 폭탄의 포장을 풀고, 언제든지 스위치를 누를 준비를 해 두었다.
"이 일이 나의 최후의 일이다. 이 일만 끝나면 20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는 큰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을 몇 년 전에 아나리아가 숨을 거두기 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 나도 곧 죽는다.'
문득 타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죽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고 싫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지금까지 언젠가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끝내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하지 못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예를 들면 광석을 제련하려던 일이 그것이다. 어딘가에서 필요한 광석을 찾아내어, 어떤 방법으로 제련하여 금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제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보석처럼 귀중히 여기는 금속제의 창끝과 칼등을 많이 만들 수 있고, 무기 외에도 농기구나 연장 등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기를 먹기 위해 찾아다니며 잡던 말처럼 생긴 동물도 생포해 훈련시키면, 짐도 실을 수가 있고 사람도 타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또 있다.
지금까지는 우연히 발견한 풀의 열매를 가루로 만들어 구워먹었는데, 다른 이용 방법도 있으리라. 그 열매로 씨를 뿌려 많은 수확을 올릴 수도 있으리라. 그 수확한 종자를 다음해에 뿌리기 위해 저장하여 땅에 뿌린다면, 식량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풀 열매는 매년 봄에 뿌리기만 하면 넉넉한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말았구나.
또 먹을 수 있는 풀뿌리도 땅에 심으면 많이 얻을 수 있고, 식물의 섬유를 잘 손질하여 실로 만들면 의복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결국 해 보지 못하고 끝나고 마는구나.
그러나 타트는 생각했다.
나는 하지 못했지만, 아들 겔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겔버가 못하면, 겔버의 아들 세대에는 꼭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아들 세대가 되면 그 풀의 열매와 풀뿌리를 땅에 뿌리고 심어 넓은 들을 만들 것이다. 말과 다른 동물들을 기를 수 있는 목장이 넓은 평야에 여러 개 마련될 것이다.
그렇다. 미래에 희망을 가지면 된다.
살기 위해 인간은 점점 지혜가 발달된다. 그리고 이 자연을 개조하여 하루하루 더욱 살기 좋은 세계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를 자손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우주 이민단의 단장 겔버 타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타트는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아무 미련도 없다. 그는 이 행성에 와서 처음으로 가슴 벅찬 만족감을 느꼈다. 할 일을 다 했다는 흐뭇한 마음이었다. 문득 절벽 위를 쳐다보니, 털이 많은 종족의 모습이 이곳저곳에 나타났다. 그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두 사람, 세 사람, 열 사람…….
얼마 안되어 이삼십 명의 털이 많은 종족은 타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타트가 혼자인 것을 알고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타트는 천천히 기다렸다.
이윽고 산길은 흉하게 털이 많이 난 그 종족들의 모습으로 메워져 있었다. 백 명, 아니 더 많을 것 같다. 털이 많이 난 종족들은 서로 밀고 밀리면서 타트가 있는 바위 앞까지 다가왔다. 손에 손에 보잘 것 없는 돌도끼와 돌을 치켜들고서 흰 이빨을 드러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어대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선두의 가장 큰놈이 동료들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타트는 침착하게 대형 파괴 폭탄의 스위치에 손을 가져갔다.
털이 많은 종족들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타트가 혼자 있으면서도 그 우레 같은 불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이 때가 기회라는 듯이 와아하고 달려왔다.
타트는 그래도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1미터 가까이까지 왔을 때, 스위치에 대고 있던 손 끝에 힘을 주었다!
다음 순간, 꽝 하는 대폭발이 일어나고, 폭발의 연기는 사방에 퍼졌다.
 
새로운 지도자
 
그 때 무서운 폭발이 천지를 진동하였을 때, 겔버 일행은 마침내 산마루를 완전히 넘었다. 산 전체가 큰 지진으로 흔들리는 것 같고, 심한 폭발음으로 머리가 아찔했다.
겔버 일행은 나무를 끌어안는 사람도 있고, 서로 껴안은 사람도 있었다. 또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겔버는 발에 힘을 주고서 뒤돌아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골짜기 아래에서 거대한 검은 연기와 불꽃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기어코 해치웠구나!"
도리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덜덜 떨면서 신음하듯 말했다.
"기어코……"
겔버는 동물의 울부짖는 소리처럼 외쳤다.
검은 연기는 점점 크게 번지고, 바위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용감하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다. 이제 우리는 절대 안전하다. 털이 많은 종족은 여기까지 따라올 수는 없다."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는 겔버의 눈에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겔버는 입술을 깨물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커먼 연기는 점점 높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그 연기 속에 사라진 타트의 혼이 겔버 일행에게,
'굳세게 살아라. 내가 너희들의 뒤를 보살펴 주겠다.'
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아이들까지도 겁을 내지 않고 그 연기의 구름을 또렷또렷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쳐버린 바니스의 머리에도 저 연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바니스는 문득 겔버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타트, 이런 곳에 있었어요. 언제 올라오셨어요? 저는 몰랐어요."
"뭐라구요?"
겔버는 깜짝 놀라면서 반문했다.
도리다는 겔버와 바니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겔버가 타트와 꼭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바니스는 너를 아버지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겔버. 너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까."
도리다는 겔버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니스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냥 두어라, 겔버."
겔버는 도리다를 쳐다보고, 또 바니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소년소녀들을 둘러보았다. 그 때 겔버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가슴을 펴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나는 타트다. 겔버 타트의 아들인 겔버 타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의 새로운 지도자이다. 반대할 사람은 있는가?"
그는 도끼와 창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은 허리에 찬 권총 위에 대고 모두를 훑어보았다.
갑자기 소년의 키가 커진 것 같고, 젊으면서 건장한 거인이 된 것 같이 보였다.
도리다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겔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야윈 얼굴에 지난 십 년 동안 한 번도 웃어보지 못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 겔버 타트이다. 새로운 지도자이다. 우리들 단장이다!"
도리다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바니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이 아냐? 타트는 처음부터 우리들의 지도자였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바니스의 천진한 말이었다.
"내일이 되면 타트는 우리들을 타리슈에 데리고 가 주실 거예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신천지 타리슈에. 우리들은 그 곳에 훌륭한 집과 정원과 농장과 공장을 세우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동차와 비행기 등 우리가 필요한 좋은 물건들을 가질 수가 있게 돼요. 그렇잖아요, 타트?"
"그렇고 말고요, 바니스. 당신들을 모두 타리슈에 데리고 갑니다. 훌륭한 것이 많이 갖추어진 좋은 천지 타리슈에!"
새로운 타트, 젊은 타트는 약속했다.
그의 가슴에는 지금 한 지도자로서의 긍지와 의무감이 끓어올랐다. 겔버 타트는 앞길을 내다보았다.
눈 아래에는 연이어진 낮은 산맥과, 숲이 우거진 그 앞에는 넓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보였다. 그리고 저 먼 지평선에는 높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보였다.
젊은 타트는 아버지인 타트에게 이어받은 돌도끼를 치켜들고 외쳤다.
"자, 저 평야로 가자!"
 
깨쳐가는 인류
 
이렇게 하여 일행은 전진했다.
산을 오르내리고 골짜기를 건너고, 숲을 지나 평야에 이르렀다.
일행은 결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끝없는 전진을 계속했다.
드디어 마지막 탄환도 다 써버렸다. 장총과 권총은 금속의 재료가 되어, 창과 단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차츰 닳고 녹슬어, 그것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에는 돌을 갈고, 동물의 뼈와 뿔을 갈아서 무기로 만드는 것을 익히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대는 차츰 교대되어 나갔다.
맨 먼저 도리다가 늙어서 죽었다. 그 다음을 이어 바니스도 죽어 갔다. 그렇게 되고 보니, 도르샤에서 온 사람은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 때는 새로운 타트가 이끌고 있는 일단은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야수와 싸우고, 병이나 사고로 매년 많이 죽어가기는 했지만, 사람의 수는 매년 늘어난 것이다.
그러고서 몇십 년이 흘러갔다. 새로운 타트도 늙어서 아버지처럼 죽어 갔다. 그러나 그 때는 그의 아들, 삼 대째의 타트들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
삼 대째의 타트 시대에는 수가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사람의 수효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되고, 수천 명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그 동안 그 사람들은 수십 개의 집단으로 갈려나가 새로운 토지를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간 곳마다 부락을 이루고, 수효는 더욱 불어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곳곳에서 털이 많은 종족과 싸웠다.
처음에는 털이 많은 종족과 사람과의 싸움의 승패는 반반이었다. 그러나 유인원과 사람 사이의 중간인 종족, 털이 많은 종족은 사람의 적이 될 수는 없었다.
몇천 년이 지나고, 몇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사람들은 털 많은 종족을 몰아내고 드디어 멸망시켰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털이 많은 종족은 드디어 멸망되고 말았다.
그 대신 새로운 인간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털이 많은 종족을 구인류 -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부르고, 도르샤에서 온 사람들의 자손을 신인류 - 크로마뇽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 이 크로마뇽인들이 남겨놓은 동굴의 벽화와 조각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의 고고학에서는 원숭이에 가까운 네안데르탈인이 어떻게 되어 진화된 신인류로 변화되었는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상은 이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도르샤라고 부른 고향인 행성은 동쪽 하늘에 붉게 보이는 화성이고, 행성 타리슈는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이다.
 
<끝>
 
 
인공 두뇌
쇼드마크 작․이원수 역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224p. 19cm (SF세계명작50)
 
인 쇄      1978년 1월 15일
발 행      1978년 1월 25일
역 자      이 원 수
제 판      명림 정판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조판․활판  이우 인쇄사
제 본      서문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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