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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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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이선 시해설

이선 시해설 모음
2021년 10월 28일 21시 31분  조회:1118  추천:0  작성자: 강려
 엔지오 신문 연재 1
 
<시가 있는 마을>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이선의 시 읽기>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 기능으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건너뛰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은 심상운이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디자인의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이론으로 정립한 시인이다.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심상운의 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고대미이라 목관 사진’과 ‘고대숲’에서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새들이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울고 있다.
  시인은 그림 한 장을 감상하다가 상상력의 줄기를 우주까지 뻗어서 한편의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1연, 2연, 3연이 각각 다른 그림이다. 1연의 병원 응급실과 2연의 냉장고 밥과 3연의 미이라 목관은 각각 다른 그림이지만 링크되어 연관성을 갖는다. 과거면서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심상운은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문제로 지적되었던 시의 ‘진정성’을 증명하였다.
 
 
 엔지오 신문 연재 2
 
<시가 있는 마을>
 
 
거목
 
 
 
김규화
 
 
 
 
뿌리는 땅속에 묻고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하늘로 키 늘리고
그 기둥에 굵은 가지를 서너 개 엇갈리게 박고
조금 잔 줄기를 그 배로 늘려서 그 기둥에 박고
또 조금 잔 줄기를 그 배로 늘려서 그 기둥에 박고
또 조금 잔 줄기를 그 배로 늘려서 째고 또 째서
마지막에는 한산 모시올 같은 잔가지들의
집채 만한 온몸에다가 당나귀 귀 백성들을 나폴나폴 달려붙인
그 나라 임금은 통치 천년의 바람나무
 
 
그 나라에서는 날마다 뿌리에서 물 끌어올려
고루고루 가지의 맨 끝에 매달린 백성들에게까지 젖줄 대주느라고
힘차게 경 읽는 소리가 뿌리에서부터 나무기둥을 타고
하늘 공중의 나무 끝에까지 도르래로 오르고
임금은 수고롭고
백성들은 얇고 작은 몸을 자주자주 뒤집어 반짝이면서
임금과 함께 트고 둥그렇게 만들어가는 나무나라
 
 
평론: 이선 시 읽기
 
 
  김규화는 ‘하이퍼시 동인’으로 뉴미디어 시대의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하이퍼시’ 창단 멤버이다. <거목>은 사물성에 기초하여 쓴 시로, 사유와 직관을 입체적으로 구조화한 시다. <거목>은 칼릴 지브란의 철학시와 같은 우화적 기법과 전설적 구조를 가진 이야기시다.
  <거목>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나무를 입체적으로 구조화하여 사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이야기시를 만들었다. 위의 시의 중심어는 1연의 ‘배수’라는 단어다. ‘나무의 큰 기둥과 작은 줄기, 잔 가지와 잎사귀’의 구성요소를 배수로 나타내어 나무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다.
  1연은 냉정하게 ‘나무’라는 사물을 관찰하여 사실만 정의하였다. 그러나 2연에서는 나무의 삶의 문제, 나무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임금’과 ‘백성’의 역학관계로 나무의 구조를 직관하여 전설같은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
   1연은 나무의 사실적인 부분만 부각시켰다.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2연은 나무의 삶을 부각시켰다. 2연은 나무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시인의 속내이면서 인간의 삶을 치환은유 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군상들을 거시적 안목으로 바라보는 ‘통치 천년 바람나무인 임금’의 마음은 참으로 수고롭다. ‘백성에게 경을 읽어주고, 젖줄을 대주고, 도르래질을 하는‘ 나무의 고단한 삶이 읽힌다. ‘나폴나폴 당나귀 귀’처럼 변덕스러운 인간들과 나무의 삶이 치환은유 구조로 오버랩 된다.
 
 
엔지오 신문 연재: 시가 있는 마을 - 김영찬
 
용서하라, 저녁이 된 것을!*
 
김영찬
 
내 생애의 마지막 남자가, 라고 말문을 연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라이터 있니?
옆의 여인은 한없이 느리고 게으른 손가락으로
가늘고 뚱뚱한 핸드백을 열어
뒤적거린다
 
Cafe Gracias의 흐린 유리창 밖으로 끈 끊어진 풍선
하나가
날아가다가 전선에 감겨 제지당하는 걸
두 사람 모두 못 본 체 한다
 
담배는 없고
불만 있네……,
불필요한 사람도 글쎄 얼마든지 드물지 않는 법
비를 머금은 구름이 커튼 틈새로 하릴없이 참견하려다가
검은 외투를 걸친 듯이 무거운 침묵
촛불 흔든 바람의 길이 엇갈리고
 
내 생애의 마지막 남자를, 이라는 상투어를 수습하려던 여인은
손마디가 풀려 찻잔을 놓쳤다
박살난 커피 잔이
크고 작은 파편들로 나뉘자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처럼
저녁이 되었다
용서하라 저녁이 된 것을!
 
그리고 오래 머물러 있어라, 밤이여
 
*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연극 대사의 한 토막처럼, 연극 도입부처럼 대사를 툭 던져 놓는다. 김영찬의 시는 설명적이지 않다. 또한 긴 시도 지루하지 않다. 연극은 길어도, 장면이 바뀌고, 극적 구도를 갖기 때문이다. 김영찬의 시도 대부분이 길다. 장면전환을 하면서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사건을 전개하고, 사유와 극적반전, 대사를 치려면 결코 이야기가 짧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김영찬 시의 구도를 표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녀의 이야기는 구상과 추상을 섞은 듯, 이해가 되는 추상화를 그렸다고나 할까? 일상의 이야기를 툭 던지지만,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연극처럼, 그의 시는 낯선 풍경을 만든다.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면서 감각적 새로움이 오감을 자극하며 긴장하게 한다. 연극적 요소 때문이다.
  1연의 나른하지만 억눌린 남녀의 대화는, ‘박살난 커피 잔이/ 크고 작은 파편들로 나뉘자’ 구체적인 사건이 생성된다. 불안불안한 풍경들이 연극의 배경처럼 2연에서 펼쳐진다. ‘유리창 밖으로 끈 끊어진 풍선 하나가/ 날아가다가 전선에 감겨 제지당하는 걸’ 두 사람 모두 못 본체 하는 구도는 두 남녀의 관계가 갈등구조를 갖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삼류 멜로 드라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유치하거나 저질이 아니다. 그 이유는 3연의 ‘검은 외투를 걸친 듯이 무거운 침묵/ 촛불 흔든 바람의 길이 엇갈리고’ 처럼 직관과 사유, 시적 은유적 표현을 세련되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잘 계산된, 또는 훅 내던지듯, 놓아버린 ‘자유’가 김영찬 시의 특징이다.
 
이선 프로필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은상수상, 2004년 하나은행 공모 특선
2007년 『시문학』 등단
2007년 서경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2011년 <올해의 좋은시> 백인 선정, 2011년 제8회 푸른시학상 수상.
시집: <하이퍼시> 외 동인지 20여권
논문집: <아동의 창의력 계발을 위한 동시쓰기 지도방법 연구> <샤갈과 김춘수 연구>
평론: 심상운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서평, 및 평론 다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
좋은시공연문학회 사무차장
한국시문학문인회 이사
 
 
도마
 
 
 
 
 
여영미
 
 
 
 
 
방패보단 도마가 되기로 했어
 
모두가 피하는 칼
 
늠름히 받아내며
 
울퉁불퉁한 모든 삶의 재료
 
내 안에서 알맞게 반듯해지고
 
다져지는데
 
까짓 칼자국이야
 
한두 개일 때 흉터,
 
삶이 되고 보면
 
꽃보다 향기로운 무늬가 된다
 
 
 
평론: <이선 시 읽기>
 
 
 
   여영미의 「도마」는 인식과 재인식을 넘나드는 춤추는 나비다. 시의 날개는 통통하며 긴장감이 있다. 상처에서 피워낸 꽃이 늠름하다. 잠언, 장자, 불경, 도덕경 한 페이지씩 넘기는 바람결. 인생의 체험과 철학이 관조로 압축되어 있다.
 
   1행의 ‘방패보다 도마가 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반백년 살아낸 사람은 안다. ‘모두가 피하는 칼/ 늠름히 받아내며/ 꽃보다 향기로운 무늬‘를 만든 여영미의 시는 서정주 시인의 ’국화‘보다 한 차원 높은 시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여영미의 시는 표현 중심주의 현대시를 계단 아래로 저, 멀리 밀쳐버렸다. 의미가 표현을 이긴 현장검증 자리. 여영미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무저항의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내포하고 있는 ‘칼’과 ‘도마’의 예리한 경계에 서 보라, 시는 웅변보다 강하다. 선명하고 강렬하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구 나를 내리쳐 달라’는 도마의 항변은 4-6행의 ‘울퉁불퉁한 모든 삶의 재료’들을 ‘내 안에서 알맞게 반듯해지고/ 다져’ 본 현장에 서 본 사람은 안다. 고통과 상처를 무늬로 승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긴 깨달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가? 상처에서 향기가 나기까지에는.
 
  노대가의 예술세계에서나 만날 것 같은 관조와 인내, 용서의 미학. 여영미 시가 추구하는 새로운 미의식은 고통과 상처도 향기로운 꽃이 된다는 새로운 인식과 철학이다. 수용과 순응, 겸허함을 받아들인 완숙미가 돋보인다.
 
  향기로운 빛을 내는 탁자처럼. 비바람과 눈비를 맞고 단단하게 자라서 자신의 몸을 다 내어주고, 톱질과 끌을 맞고 멋진 테이블이나 변신하는 나무를 보는 것 같다. 여영미는 젊은 날을 단단하게 익어가며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과 눈비를 다 맞고 견딘 낙엽송이다.
 
  위의 시는 ‘먼저 인간이 되라’는 명제를 보는 것 같다.
 
엔지오 신문 연재: 시가 있는 마을>
 
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
 
 
박정원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내를 버린 남자가 커피 볶는 집에서 백석을 읽는다
 
소나무부부가 손을 꼬옥 잡고 드센 바람도 좋아라 유리창 밖에서 응앙응앙 울고
 
가는 눈이 간간이 뿌려지는 전봇대에 앉아 볶은 커피 향을 기웃거리는
직박구리 한 마리
 
강 건너 저편엔 천국행열차가 산 그림자를 끌어내려 굼벵이처럼 지나가고
 
서서히 지워지는 마을들
하나 둘씩 불이 켜지는 만주벌판의 집들
 
여자는 말없이 백석과 동침하려 이불을 펴고
마침내 도착한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연신 스마트폰에 담아내는 남자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세상한테 지는 길이라네 내가 좋아서 버리는 거라네
 
눈도 푹푹 나리지 않는데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않는다
 
 
<이선의 시 읽기>
 
 박정원의 시「크리스마스이브의 백석」은 두 개의 구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구도는 ‘백석’과 백석의 ‘애인’이고 또 하나는 ‘나’와 ‘그녀’의 구도이다. 두 개의 그림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다. 또한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된다. 시의 복합적인 이중구조는 시점과 관점을 흐트러놓음으로써 독자에게 감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시가 평이하거나 싱겁지 않고, 현대적 감각의 맛갈스러움을 더해 준다.
 1연의 현재적 상황은 ‘남편을 잃은 여자’와 ‘남편을 버린 남자’가 찻집에 앉아 있다. 과거  ‘백석’과 백석의 ‘애인’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만남이다. 일일 연속극 현장이며, 현대 대한민국 성풍속도이기도 하다. 불륜은 감미롭고도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는, 어느 시대에나 흥미있는 소재다. 시에 극적 긴장감을 준다.
  위의 시는 8행의 시가 한 연을 이루고 있다. 1행부터 현재 → 과거 → 현재 → 과거,
과거 → 과거․현재 → 현재 → 현재로 짧은 8행은 사실과 사건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과 배경이 어우러진 박정원의 시가 하이퍼적 상상력을 갇는 것은 6연이다.
  “여자는 말없이 백석과 동침하려 이불을 펴고‘ 과거시점이다. 그러나 ’마침내 도착한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연신 스마트폰에 담아내는 남자‘ 는 현재시점이다. 이 구절 때문에 불륜을 꿈꾸는 현대의 남녀가 극적으로 클로즈업된다. 남자의 ’그녀‘가 ’나타샤‘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흰당나귀‘가 사실적인 당나귀냐, 시의 구절을 사진 찍는 것이냐도 중요하지 않다. 독자는 이미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불륜남녀와 함께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마음속으로 초대한다. ’백석‘과 ’애인‘을 용서하였듯이, 이 남녀의 불륜을 이해하고 수용한다. 한편의 시가 갇는 힘이다. 도덕과 역사를 뛰어넘어 새 역사와 도덕을 쓴다. 흰 눈밭 위에.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저년을 잡아라
 
박재릉
 
저년을 잡아라.
정신 나간 저년이다.
나를 노려보는 춘향이 같은 입술이
뱀처럼 달큰히 징그럽게 날름거리는 저년이다.
 
삼도천서 멱감던 저년이
도솔천서 깔깔거리던 저년이
이승 어느 낭자에 실려
내 입술이 지그시 닿으면
소름끼치게 펄쩍 뛰는 저년이
미친 저년이
 
이승 신방 숨은 골방을
몰래 덥쳐 안고
빨간 등불 시왕각시
타는 알몸으로 알몸으로...........
 
머구리를 먹은 듯 울렁거리는
질갱이를 씹은 듯 메스껍게
체한 울음을 토할 듯 미친 저년이
 
칠성당서 웃는 저년이
양천 우물가에서 뒤보는 저년이
감악산 약수터를 휘휘 돌아서
깔깔깔깔 달아난다. 달아난다.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
내 혼비백산 타는 앓는 숨결속에서
주름살이 울고 바람이 울고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전문
 
* 시왕각시: 이승에서 한 맺힌 젊은 여자
* 칠성당七星堂):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인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집
 
  박재릉의 시는 원초적 관능미와 리듬감, 색채이미지가 급박하게 어우러져 달려간다. 한용운의 가슴 서늘한 ‘문둥이’ 시와 서정주 시의 관능적 ‘뱀’ 이미지가 무속과 어우러져 낯설고 섬뜩한 새로운 미의식을 만들고 있다.
  박재릉의 「저년을 잡아라」는 서정주의 「춘향의 말」을 패러디한 작품처럼 보인다. 당대 유명한 시인의 작품을 자존감을 걸고 더 관능적이고 더 격조 높은 수준의 작품으로 만들어 서정주를 능가하는 시인이 되겠다는 결의를 다진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뱀, 도솔천, 춘향’ 등 서정주 시에서 보여주는 낯익은 단어들 때문이다.  또한 서정주의 「춘향의 말」은, 1연 ‘향단아, 그네 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라고 시의 첫행을 대사로 치며 리듬감과 운동감을 주고 있다. 1연, 2연, 3연 모두 끝행에서 ‘나를 밀어올려 달라’고 계속 다그치면서 달리는 이미지, 운동감을 계속 증폭시키고 있다.
  위의 시는 「저년을 잡아라」는 제목부터, 내용까지 ‘저년을 잡아라, 저년을 잡아라’ 달리는 이미지를 주고 있다. 또한 낯설고 무섭고 에로틱한 표현. ‘춘향이 같은 입술’이나 ‘뱀처럼 날름거리는 저년’ ‘도솔천서 깔깔거리는 저년’ ‘체한 울음을 토할 듯 미친 저년’ ‘신방 숨은 골방을/ 몰래 덥쳐 안고/ 빨간 등불 시왕각시/ 타는 알몸으로 알몸으로’ ‘우물간서 뒤 보는 저년’ 등의 표현에서 자유분방하고 거리낌 없는 토속적 관능과 에로티시즘이 거칠게 뿜어져 나온다. 박재릉 시는 관념이 전혀 없다. 행위와 리듬과 원초적 관능이 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년을 잡아라’는 연극적 모티브를 갖고 있다. 뮤지컬이나 연극, 노래로 재구성할 수 있는 매력을 한가득 담고 있다.
 
 
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5시 28분
 
 
이소정
 
 
이때 쯤 되면 동이 튼다
하늘의 허벅다리에 어느 한 구석이
터지고야 말아
빛 몇 가락이 새어나오고
부피 늘어난
하늘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괴기스럽던 밤의 홀쭉한 복부가
끊임없이 부풀다
마침 어미별 잃은 아침새가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이면
터진 배꼽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
 
<이선의 시 읽기>
 
  이소정 시인은 아시아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명덕외고 3학년 재학생이다.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 상상력과 객관화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오래 시를 쓴 기성시인의 시 중에서도 객관화에 실패한 시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개관화 되지 않은 상상력은 작품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진정성을 잃는다.
  위의 시는 제목부터 객관화 되어 있다. 이소정 학생이 어느 여름날 일찍 등교할 때, 해 뜨는 시각이 5시 28분이었을 것이다. 매일 TV에서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을 예보하니 객관화된 분명한 사실이다.
  해가 뜨는 것은 사실이면서, 큰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우주가 열리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큰 사건이 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았다. 해가 뜨는 것은 분명 찰라적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일상이다. 손에 잡혀서 기억될 물건도 아니다. 그러나 이소정은 예리하게 그 시각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천체의 거대한 움직임을 순식간에 입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로 구성하여 구체적으로 그려내었다.
  ‘허벅다리, 입꼬리, 복부, 배꼽’으로 인체의 부분, 부분으로 비유함으로써 감각적이고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터지다, 새어나오다, 끊임없이 부풀다, 무수하다’ 라는 생성과 발산, 확장의 이미지의 단어들을 구사하여 해가 뜨는 모습을 확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미별 잃은 아침새가/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이면/ 터진 배꼽 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
  이 시의 백미는 9-11행이다. ‘어미별 잃은 아침새’는 아침에 홀로있는 ‘외로움’의 이미지와 ‘배고픔’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는 행위에 시적 논리를 부여한다. 또한 10행은 11행 ‘터진 배꼽 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는 구절에 시적 논리성을 부여한다. 또한 11행은 필자가 중국 가는 배 위에서 본 일출광경처럼 무수한 빛기둥이 상상된다.
  위의 시는 해가 뜨는 찰라적 장면을 잡아, 아주 감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인의 재능이 앞으로 어떤 꽃을 피울지 기대해 본다.
가져온 곳 :  카페 >시와 도자기|글쓴이 : 이미지| 원글보기
 
 
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5시 28분
 
 
이소정
 
 
이때 쯤 되면 동이 튼다
하늘의 허벅다리에 어느 한 구석이
터지고야 말아
빛 몇 가락이 새어나오고
부피 늘어난
하늘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괴기스럽던 밤의 홀쭉한 복부가
끊임없이 부풀다
마침 어미별 잃은 아침새가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이면
터진 배꼽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
 
<이선의 시 읽기>
 
  이소정 시인은 아시아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명덕외고 3학년 재학생이다.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 상상력과 객관화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오래 시를 쓴 기성시인의 시 중에서도 객관화에 실패한 시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개관화 되지 않은 상상력은 작품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진정성을 잃는다.
  위의 시는 제목부터 객관화 되어 있다. 이소정 학생이 어느 여름날 일찍 등교할 때, 해 뜨는 시각이 5시 28분이었을 것이다. 매일 TV에서 해 뜨는 시각과 해 지는 시각을 예보하니 객관화된 분명한 사실이다.
  해가 뜨는 것은 사실이면서, 큰 사건이기도 하다. 사실 우주가 열리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큰 사건이 매일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았다. 해가 뜨는 것은 분명 찰라적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일상이다. 손에 잡혀서 기억될 물건도 아니다. 그러나 이소정은 예리하게 그 시각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천체의 거대한 움직임을 순식간에 입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로 구성하여 구체적으로 그려내었다.
  ‘허벅다리, 입꼬리, 복부, 배꼽’으로 인체의 부분, 부분으로 비유함으로써 감각적이고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터지다, 새어나오다, 끊임없이 부풀다, 무수하다’ 라는 생성과 발산, 확장의 이미지의 단어들을 구사하여 해가 뜨는 모습을 확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미별 잃은 아침새가/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이면/ 터진 배꼽 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
  이 시의 백미는 9-11행이다. ‘어미별 잃은 아침새’는 아침에 홀로있는 ‘외로움’의 이미지와 ‘배고픔’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짧고 뭉툭한 부리로 하늘을 쪼’는 행위에 시적 논리를 부여한다. 또한 10행은 11행 ‘터진 배꼽 사이로 아침이 무수하다’는 구절에 시적 논리성을 부여한다. 또한 11행은 필자가 중국 가는 배 위에서 본 일출광경처럼 무수한 빛기둥이 상상된다.
  위의 시는 해가 뜨는 찰라적 장면을 잡아, 아주 감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인의 재능이 앞으로 어떤 꽃을 피울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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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祭
-수술실에서
 
가영심
 
고요의 가슴 강물로 흘러간다.
낯선 강물처럼
거울 벽은 순간 흔들리고
헌혈을 위해 눕던
그대의 기도마저
하얗게 목마름으로 누워 있는 방
 
한 모금의
생명을 위하여
또 다른 시간 밖에서
내가 기다림으로 울음 울 때
아픔은 神의 최후의 눈물방울.
 
그대가 만드는
운명의 종이꽃을 만지다가
부수다가
 
한 잎 한 잎
시간을 불꽃으로 태워가고
아, 이름 모를
영혼의 새 한 마리
 
나에게서
지금 막 눈 떠 날아간다.
 
 
<이선의 시 읽기>
 
  가영심의 시「목숨祭」에는 ‘물, 불, 새’의 심상이 있다. 가장 압축한 인간의 심상에 남은 마지막 이미지가 ‘물, 불, 새’의 이미지일 것이다. ‘흙’의 이미지를 더하면 완벽한 죽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병자는 자기 자신을 다 버리고, 마지막 남은 심상을 내부로부터 끄집어내서 표출한다.
  절대상황과 절대고독 앞에서 죽음과 대치하여 보라, 누군들 작아지고 가벼워지지 않을까?
안으로 침잠하여 고요한 강물로 흐를까? 거부하며 폭발하여 불꽃으로 타오를까? 그도 아님. 한 마리 새가 되어 절박함에서 가볍게 벗어나서 희락의 나라로 날아가기를 염원할까?
 시인은 병마와 싸우며 작아지는 연습을 많이 했을 것이다. 음식을 줄이면 체중이 작아질 것이다. 욕심을 버리면 영혼도 가벼워질 것이다. 시간도 버리고 방치하여 놓아두면 새처럼 가벼워져 호르르 날아갈 것이다.
 
  1연의 ‘거울 벽은 순간 흔들리고/…기도마저/ 하얗게 목마름으로 누워있는 방’, 2연의 ‘또다른 시간 밖에서/ 내가 기다림으로 울음 울 때’, 3연의 ‘종이꽃을 만지다가/ 부수다가’ 시인은 모든 갈등을 놓고, 비움의 미학을 터득할 것이다. 드디어 4연의 한 마리 ‘이름 모를/ 영혼의 새’가 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되는
  위의 시 1-4연은 5연을 완성하기 위한 조건 연들이다. 5연에서 이 시는 비로소 완성된다. 가벼워져 날아가는 영혼, 지금 막 눈 떠 날아가는 영혼을 화자의 객관적인 눈이 바라보고 있다, 5연에서 시의 객관화가 완성된다. 시가 완성된다.
 이 시는 가벼워짐의 미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체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말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미모와 기호까지 버릴 때 완성되는 가벼움의 미학. 그 순간 영혼이 ‘지금 막 눈 떠 날아’가는 찰라적 순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지혜자의 눈이 객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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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마을- 문정영
 
점화(點話)
 
 문정영
 
  보고 듣지 못하는 그는 손가락에 눈과 귀가 있다.
 
  상대방의 손가락 위에 자기 손가락으로 점자(點字)를 쳐서 대화를 한다.
 
  눈물 한 방울이 점자처럼 손등에 떨어지기도 한다.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화려함이 먼저라고 척추장애인 아내에게 배운다.
 
  눈과 귀를 닫고 마음으로 보면 세상은 눈물방울보다 작다.
 
  아내의 손끝에서 꽃향기와 별빛을 읽는 그는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는 불안과 고통에 이르는 것도 달팽이만큼 느리다.
 
  일 년처럼 읽으며 십 년처럼 느낀다.
 
  문장이 단순해진 것은 모르는 것까지 일일이 적기 위해서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풀잎과 공기를 더듬어 쓰는 작가이다.
 
  새벽의 연우(煙雨)가 막 깨어난 꽃잎을 감싸는 것처럼 손끝이 별빛에 가 닿는다고 쓴다.
 
  그가 점화(點火)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의 일이다.
 
 
<이선의 시 읽기>
 
  시인은 대상의 마음을 여는 열쇄를 가졌다.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내서 객관적으로 드러내어 사물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꽃이나 나무여도 좋고, 가위나 색종이라도 좋다. 사물시는 객관화가 쉽다. 그런데 사물이 인간일 경우에는 객관화가 쉽지 않다. 시인이 매력을 느낀 대상의 행위와 생각, 느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인간에 집중하여 시를 쓸 때 자칫 감정에 빠지기 쉽다.
  문정영이 측은지심이란 자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시적 대상인 ‘맹인’에 대하여 개관화시킨 것에 주목하여 보자.
  ‘척추장애인 아내’와 느리고 단순하게 사는 어느 작가의 인생이 슬로우 비디오로 재생된다. 이 시의 압권은 12행이다. ‘그가 점화(點火)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의 일이다’라는 구절이다. 또한 제목의 ‘점화(點話)’와 마지막 연의 ‘점화(點火)’의 중의성도 이 시의 묘미다.
  이 시는 12행으로 끝난 시가 아니다. 1-11행까지 느리게 전개되던 시가 12행에서 힘을 받는다. 12행은 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13, 14행은 독자의 상상력의 공간이다.
  ‘달팽이처럼 느리고 단순하게’ 살던 작가는 아내가 잠들고, 별들도 잠든 밤중에 탄력을 받아 작품을 구상하고, 줄거리를 짜고, 자기가 구상하는 소설의 주인공인 ‘아름다운 그녀’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를 일. 또한 낮엔 잊었던 ‘불안과 고통’도 뇌활동이 활발하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며, 더 첨예하게 그를 추궁해 올 것.
  예술은 밤중에 더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의 지배자니까.
 
 
머리카락의 자서전
 
박남희
 
머리카락은 수시로 자서전을 쓴다
바람에 흩날리면서 이리저리 헝클어지면서
자서전을 쓴다 머리를 감을 땐
한 뭉치씩 빠지면서, 가려움을 토해 놓으면서
자서전을 쓴다
 
내 마음 가까이에 사는 여자는 얼마 전에 긴 머리를
잘랐다
사람들은 산뜻하고 젊어졌다고 말하지만 난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안다
 
갈대들도 가을이면
허리를 굽혀 한 계절의 마지막 자서전을 쓴다
갈대의 머리가 흰 것은
이제 더 이산 먹물을 찍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가을 능선이 점점 흰 머리가 늘어간다
무덤에 들었던 아버지가 바람에 함께 출렁이며 일어나
못다 쓴 흰 머리카락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
 
 
<이선의 시 읽기>
 
  박남희의 「머리카락 자서전」은 1연 나의 머리카락, 2연 그녀의 머리카락, 3연 갈대의 머리카락, 4연 아버지의 머리카락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정확하게 구획정리된 논밭처럼, 잘 자란 나무처럼, 박남희 시는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박남희 시의 구조를 나무에 비유한다면 뿌리와 줄기, 잎, 잘 익은 열매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새, 바람, 비, 안개까지 다양한 보조자료들이 분위기를 돋운다. 어린아이가 열매를 따 먹고 입맛을 다시는 묘미까지 상상력을 펼친다.
  또한 직관과 사유를 통한 ‘낯설게하기’가 감각적 즐거움과 감상의 깊이를 더해준다.
  박남희 시는 통합공과처럼 스케일이 크다. 또한 객관화된 상상력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박남희 시는 철저하게 사물에 기초한 사물시다. ‘사물이 말하게 하라’는 규칙을 엄격하게 지킨다. 객관화된 상상력으로 시를 쓰기 때문에 낯선 전개와 새로운 철학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이 있으며, 독자는 그에게 설득당한다.
  박남희 시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서 딱딱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인간본연의 보편타당한 서정을 건드려서 새롭게 조명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일상에서 만나는 소재를 선택하여 사람 사는 기본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박남희 시인의 재능은 많은 시인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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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멀미
 
 
                                        정연덕
 
 
 
작은 귀를 세우고 그 얼굴에 욕망을 잘라낸다
땡볕에 몸을 태우는 원시인 하나 산피에트로 광장에
흰나비 날고 수채화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서성이던 로테*의 가슴에 쪽빛 파도가 출렁이다
 
홍매화와 딱따구리 사이 키들거리는 버들치가
어떤 빛인지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며
투명한 바다를 찾아 나선 여자들의 아랫도리가
나비 그림 속으로 하나씩 둘씩 뛰어든다
 
바로크의 메리안* 그녀의 꽃과 나비들
뜨겁게 자란 촉수로 봄의 손가락을 잡는다
숲에서 천둥번개를 찾다 멀미를 한다
 
큐폴라* 천정의 벽화가 있는 제단을 나와
날아오르다 나풀나풀 거리다 솔솔 입력되고
봄을 끌어내 청보리 물결로 춤을 춘다
 
 
 
* 로테(Rothe): 독일 관념론 학파의 루터교 신학자, 저서에 신학적 윤리학 등
* 메리안: 독일의 삽화가, 판화가, 여성 불평등에 반기를 든 바로크시대의 인물
* 큐폴라: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대성당의 대원개 큐폴라(Cupla)의 빨간 돔
 
 
 
 
 
 
 
   <이선의 시 읽기>
 
  정연덕의 「봄밤의 멀미」는 하이퍼시의 성립조건과 서정시의 성립조건을 복합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다. 하이퍼시의 단점으로 고착될 것 같았던 정서적 건조, 철학의 부재, 시의 진정성을 모두 해결하였다. 하이퍼시와 서정시의 그 방법론을 찾아보자.
  첫행의 ‘작은 귀를 세우고 그 얼굴에 욕망을 잘라낸다’는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욕망’이라는 관념어를 첫행에서 서슴없이 ‘의제’로 제시한다. ‘욕망’은 모든 인류의 역사와 문화, 사랑, 배반을 내포하는 포괄적 주제다.
 ‘욕망’을 다루면서도 이 시가 관념에 빠지지 않는 것은 ‘사실과 사물’을 시의 기본재료로 사용하면서 ‘사건’을 꾸미기 때문이다. 첫째, ‘로테’라는 실존적 인물을 등장시켰다. 또한 ‘산피에트로 광장’이란 장소를 제시하여 ‘현재의, 장소와 시간’을 제시하고 ‘현재성과 진정성’을 획득한다.
  둘째, ‘바로크의 메리안’과 ‘큐폴라 천정의 벽화가 있는 제단’을 제시함으로써 철학과 신화, 여성주의까지 언급한다. 갸웃갸웃 놀이판을 들여다보며 숨은 의도성과 배반을 찾아내도록 호기심을 자극한다.
  셋째, ‘큐폴라 천정의 벽화가 있는 제단’을 내세워 첫행에서 제시한 시제인 ‘인간의 욕망’의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 각 연에서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제목으로 연관시키는 하이퍼시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넷째, 서정성이다. ‘1연- 롯테의 가슴에 출렁이는 쪽빛 파도, 2연- 투명한 바다를 찾아 나선 여자들의 아랫도리가/ 나비 그림 속으로 하나씩 둘씩 뛰어든다, 3연-뜨겁게 자란 촉수로 봄의 손가락을 잡는다, 4연-봄을 끌어내 청보리 물결로 춤을 춘다’ 등 자연과 여인과 서정이 파도치며 흰 물결을 일으킨다. 짐짓 치고 빠지며 역사적 여인들과 놀망놀망 희롱하는 여유를 보인다.
   또한 여러 개의 그림들이 겹치며 무한 미술구성을 그린다. ‘흰나비, 수채화, 바다, 숲, 청보리 물결’ 등 회화성과 운동감, 서정성을 갖춘 상상력이 감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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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침실
 
문덕수
 
 
신발 밑바닥을 털지 않아도 신장은 투덜대지 않는다
낡은 TV만이 한 대 오롯이 앉은 거실의
벽시계 밑을 탈 없이 지나서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천장은 어제 그대로의 높이여서 안전하고
벽은 10년 전의 그 높이로 날 안아준다
등산모 운동모 맥고모자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고
오늘은 벗어 걸 아무 것도 없다
내 생일 선물의 빨쁘레질리 카운티스마라도 있지만
사흘 전의 구겨진 와이셔츠도 그대로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의
그리스도의 비밀, 붓다의 입문
아직 못 읽은 신간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이선의 시 읽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상념없이, 주관을 버리고 바라보면 어떤 색깔, 어떤 모양일까? 신발은 제 생각을 주장하여 깔끔 떨지 않고, 신발장은 선입견을 가지고 신발을 배척하지 않는다.
  무념무상의 사물들이 조용히 눈뜨고 노 작가를 직시하는 직관의 시간. 그리스도의 비밀과 붓다의 깨달음이 공존하는, 침실풍경.
  조용히 정지된 침실, 그 풍경화를 읽는다. 와락 가슴 두근거리게 내면으로 안겨오는 성숙과 겸허함.
  3행의 부사어. ‘오롯이, 탈없이’ 하루를 또 살아낸 가난한 영혼이 진득하니 손끝에 만져진다.
  4행을 주목하여 보자.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 탈관념과 직관, 객관화를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객관화된 나를 내가 들여다본다. 말로 주장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행동과 행위를 자연 그대로 ‘보여주기’ 한다. 시간이 흘러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5행처럼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는 시간이 올 것이다. 이순을 지나면 행동하는 모든 것이 순수자연 그대로의 의지다.
9행의 ‘오늘은 벗어 걸 아무 것도 없다’ - 비움의 미학. 가볍게, 더 가볍게 물질을 내려놓는.
  마지막 행의 ‘ 아직 못 읽은 신간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나이 들어 갈수록 덕성과 지성으로 생각을 지배하고, 야성과 욕망을 비우는 행위가 아름답다.
  문덕수라는 노작가의 내면의 방, 일기장처럼 혼자만 보는 ‘비밀의 방’을 슬쩍 들여다본 부끄러움.
  문덕수는 이 한 편의 시로 인생과 자아와 시론을 썼다. 예수와 석가가 공존하는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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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16 - 김규화
 
 
한강을 읽다
 
                          김규화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이선의 시 읽기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아날로그 시에서‘상상력’은 시의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상상력’의 부재는 하이퍼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아날로그 시가 정지한 그림이라면 하이퍼시는 ‘움직이는 디지털 그림’이다. 하이퍼시는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으로 공감각적 운동 이미지를 만든다. 하이퍼시는 화면이 선명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움직이는 그림 기법’의 하이퍼시는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한 합성사진이다. 상상력의‘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감각을 만든다.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철학이다.
  김규화의 시는‘어머니’라는 보통명사를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한강’이 ‘거꾸로 이젤’을 들고 순행적인 시간의 시점을 거꾸로 돌려 ‘반시계 방향’으로 진입하며 시에 감각적 미의식을 준다. 아날로그 시가 시인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했다면 이 시는 사물, 즉 피사체의 관점에서 관찰한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을 하여‘아파트- 하늘- 구름- 어머니- 돛단배- 새’로 그림의 화면이 바뀐다. 사물에 운동성을 주며 장면전환을 하며‘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시어 선택에서도 고정성과 획일성에서 벗어나 독자에게 정서환기의 장을 열어준다. 아파트라는 사물을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이라는 운동성을 줌으로써 시에 생동감과 움직임을 준다. 평면 그림에 운동성을 주어 입체시로 만들었다. 수채화의 여백처럼 시적 여운을 남긴다. ‘출렁, 흘러내리는, 올랑촐랑’등의 시어는 시에 운동감을 준다. 사실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표현이 아우러져 심상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린다. 붓으로 물을 찍어 독자의 추억도 감각적으로 그렸다 지운다.‘돛단배’와 ‘물새’라는 사물이 장면전환을 하는 붓이다.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가 아닌 파스텔톤의 ‘움직이는 풍경화’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이 여러 번 이루어진다. 여러 번 출렁거림을 주어 ‘풍경화’에 ‘움직임’을 준다. 하늘과 구름과 물새라는 사물을 공간이동하여 붓으로 사용한다. 김규화는 이 시로 독창적인 현대적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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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15
 
  어머니의 간장사리
 
                           이 혜 선
 
 
시어머니 제사 파젯날
베란다 한 구석에 잊은 듯 서 있던 간장 항아리 모셔와
작은 단지에 옮겨 부었다
20년 다리 오그리고 있던 밑바닥을 주걱으로 긁어내리자
연갈색 사리들이 주르륵 쏟아진다
 
툇마루도 없는 영주땅 우수골 낮은 지붕 아래
허리 구부리고 날마다 이고 나르던
체수 작은 몸피보다 더 큰 꽃숭어리들
알알이 갈색 씨앗 영글어
환한 몸 사리로 누우셨구나
 
내외간 살다보먼 궂은 날도 있것제
묵은 정을 햇볕삼아 말려가며 살아라
담 너머 이웃집 연기도 더러 챙기며
묵을수록 약이 되는 사리 하나 품고 살거라
 
먼 길 행상 가는 짚신발 행여나 즌데를 디디올셰라
명일동 안산에 달하 노피곰 돋아서
어긔야 멀리곰 비추고 있구나*
물의 마음 환히 비추는 사리 하나
 
이승 저승 가시울 넘어 맨발로 달려오신
어머니의 간장사리
 
* 백제 가요 ‘정읍사’에서 차용
 
 
<이선의 시 읽기>
 
  이혜선의 「어머니의 간장사리」는 과거형이다. 백제가요 「정읍사」를 차용한 것이나 향토적 순수의 다정인 시어머니에 대한 정서가 예스럽다. 그러나 이 시가 상투적이거나 지루하지 않고 진정성이 있는 것은 ‘간장사리’라는 사물성에서 출발하여 시어머니의 지아비를 향한 사랑과 당부의 말씀을 객관화시켰기 때문이다.
  ‘간장사리’보다 더 적절한 한국 어머니에 대한 비유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간장항아리는 가난한 지어미가 대를 물려오면서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다. ‘간장 맛이 좋으면 살림이 불어난다’, ‘집안이 망하려면 장맛부터 변한다’는 말이 있다. 간장은 옛 어머니들의 가장 귀중한 기초양념이며 조미료였다.
  위의 시는 시어머니가 물려준 간장항아리와 시어머니의 몸체 같은 ‘간장사리’. 시어머니가 들려준 지아비를 섬기는 자세. 백제 여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여러 세대의 여인의 삶을 조명하였다. 대상에 대한 확장, 소재의 확장을 통한 시의 시케일이 크다.
  ‘간장 찌꺼기’라는 ‘사물’에 집중하여 묵을수록 약이 되는 ‘사리’의 경지까지 찾아내었다. ‘간장사리’라는 말 속에 인내와 고난, 찌꺼기로 ‘나머지 생’을 산 ‘어머니’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표현과 기교로 멋을 부리지 않아도 좋은 시는 ‘느낌’과 ‘설득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진정성’과 ‘객관화’는 시의 중추신경이며 뼈대다. 뼈대가 으스러지면 허리가 굽고 온 몸이 저리고 아프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한 작품은 구성이 단단하고 힘이 있다. 연과 연이 서로를 받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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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마을 18 - 오남구>
 
부드러움의 단상
 ―접사
 
 
오남구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
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
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
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이선의 시 읽기>
 
겹쳐 그리기 기법 - ‘다시점’'다초점’
 
  오남구 시인은 작고하기까지 문학사에 남을 새로운 시론을 증명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디지털시론>을 연구하였다. 후학들에게 실험시를 가르치고, 직접 시 작품을 쓰면서‘염사’와 ‘접사’, ‘탈관념’으로 디지털 이론을 요약하였다. 그 방법론으로 ‘사진찍기’ 기법의 ‘클로wm업’과 수학공식을 응용하였다. 오남구의 디지털 시론은 ‘표현주의’시론으로 텔레비전의 ‘보여주기’ 기법이다. 그이 ‘탈관념 이론’은 문덕수의 <하이퍼시론> 과 심상운이 정의한 하이퍼시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덕수는 광법위하고 넓은 ‘디지털’개념을 축소하여, 선명하고 객관화된‘하이퍼시론’으로 발표하였다. 오남구의 시론이 실험시로서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
  위의 시는 필자가 주장하는 이론으로, 하이퍼시의 8가지 방법론 중 한 방법론인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겹쳐 그리기 기법>은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과 같은 시 창작 기법이다. 사람의, 앞, 뒤, 옆을 한 평면 위에 그린다. 피카소는 ‘다시점’‘다초점’ 그림을 그렸다. 점선으로 눈 표시를 하여 여러 방의 성행위를 훔쳐보는‘엿보기’그림도 있다.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는 건축물의 투시도나 단면도처럼 하이퍼시의 양방향성과 쌍방향성을 추구한다.‘다시점’과 ‘다초점’하이퍼시는 보이는 사실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사실을 한 화면에 한꺼번에 펼쳐 보여준다. '겹쳐 그리기 기법‘은 ‘외면 겹쳐 그리기’와 ‘내면의 겹쳐 그리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오남구의 시「부드러움의 단상」은 ‘외면 겹쳐 그리기’와 ‘내면 겹쳐 그리기’를 병행하고 있다. 비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비의 내형과 비의 외형을 대조적으로 파고들어간다. 비의 내형에서는 비를 직관하여 날카롭게 재해석하였다. 1연의 ‘숨을 쉰다, 에워싸 가둔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는다, 수평으로 퍼진다, 빗물이 번진다, 속도가 날을 세운다, 갇혀 버린다,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등 비에 대해 다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위의 비에 대한 표현은 오남구가 주장하는 ‘바라보기’나 ‘보여주기’의 표현주의 관점을 넘어 그 이상의 새로운 시세계를 보여준다. 새로운 ‘표현기법’으로‘날카롭게 관통하기 기법’을 사용하였다. 오남구가 디지털시론에서 주장한 ‘보여주기’ 기법보다 시가 한발 더 앞서 갔다.
  위의 시는 짧은 단문 문장을 사용하였다. 문장은 날카롭고 직선적이다. 짧고 직선적인‘문장기법’은 줄기차게 꼿히는 비의 외형과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다. 2연의 ‘조각 허공’과 ‘부스러기 무지개’는 시인이 시각적 이미지를 극명하게 잘 표현한 ‘표현주의’의 극치다.
  오남구의 ‘비’는 아날로그 시대의 ‘슬픔’과 ‘이별’의 대명사인 관념의 비가 아니다. ‘비’를 여러 방향, 여러 각도에서 절개하고 분류하여 한 화면에 펼쳐 보이고 있다.‘신호등이 켜진’ 거리에서 아주 짧은 찰라의 순간 직면한 ‘비’를 여러 방향에서 관찰하여 직관하였다. 내면의 눈과 외면의 피부로 접촉한 비다.‘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그린 ‘하이퍼 그림’이다. 위의 시는 심상운이 ‘다선구조론’에서  주장한 ‘다시점’과 ‘다초점’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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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의 시 읽기 - 위선환> / 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탈  위선환
   
 
                                                            
  목 안이 칼칼하고 바람은 낮게 분다 돌들이 구르면서 서로 부딪친다
  냇가에서 집어든 물방울은 깨졌고 돌멩이가 뛰어서 건너간 수면은 잘게 부서졌고
 
  달빛 환한 밤에
 
  河回의 물굽이를 깔고 앉은 각시의 하얀 각시탈을 입 벌리고 바라보는 이매의 이매탈은
 
  턱이 떨어져나가고 없다
  걸립할 때, 별이 춤판으로 떨어졌다 강 건너 낮은 하늘로 빛이 지나가고 개가 짖더니
  벗은 여자의 배 위에서 벗은 남자가 죽었다
  나는 다섯째 마당에 나가서 파계하고 중탈을 벗는데 갑자기 얼굴이 없다
 
                                    
                    <가면 벗기기 - 시나리오 기법>
 
 
  위선환의「탈」은 4연으로 이루어진 시나리오 기법의 시다. 마당극이나 춤판에 올릴 수 있는 극적 구성을 갖고 있다. 시인은 4연에서 ‘춤판’과 ‘다섯째 마당’을 제시어로 사용하여이 시의 공연성을 암시하고 있다.
  위의 시는 극의 구성요소인 <기승전결> 4단계로 나눌 수도 있다. 또한, 더 세분하여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위선환의 시는 가장 한국적인 ‘하회탈’이라는 고전적 소재를, 가장 모던한 스타일의 현대적 기법으로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위의 시는 강한 극적 자극이 있다. 시골장날 마당극에서 볼 수 있는 편안하고 느긋한 해학적 소재는 아니다. 굳이 분류한다면 스릴러 추리극에 가깝다. 불안하고 급박한 위기감이 시 전체에 깔려 있다.
  위의 시를 구성의 5단계로 나누어 보면 <발단: 1-2행, 전개: 3-4행, 위기: 5-6행, 절정: 7행, 결말: 8행>으로 분류할 수 있다.
  1연 발단 부분 - ‘목 안이 칼칼하고’ ‘서정적 자아’는 불안정하다. ‘돌이 구르면서 부딪치고/ 물방울이 깨지고/ 돌멩이가 수면을 부순다‘. 연극이 일상적이지 않듯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첫 장면도 일상적이지 않다. 극 초반부터 불안과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2-3연 전개 부분 - ‘달빛 환한 밤’에 모호한 극적 분위기가 고조된다. 도깨비가 나올 것도 같고 사랑이 무르익을 것도 같은 아릿한 밤이다. 턱이 없는, 모자라고 불안정한 병신탈인 ‘이매탈’은 ‘하회의 물굽이를 깔고 앉은’ ‘각시탈’을 입을 벌리고 넋놓고 바라본다. 정신지체인 병신이 젊은 아낙을 ‘짝사랑’하면 집착의 사랑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도망치느냐, 죽느냐, 죽이느냐 결국, 극단의 사랑이 될 것이다.
  4연 1행 위기 부분 - ‘턱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는 부분은 ‘위기 부분’에 해당된다. 불안과 위기상황은 4연 2행의 ‘개가 짖’을 때에 한층 고조된다. ‘도둑’이 들거나 ‘낯선 사람’이 침입했을 때 개가 짖는다. ‘이매탈’은 드디어 행동을 일으키며, 사건을 벌이는 것이다.
  4연 3행 절정 부분 - 극은 박진감 넘치게 ‘절정’을 향하여 달린다. ‘벗은 여자의 배 위에서 벗은 남자가 죽었다’ 치정살인? 복상사? 과연 어느 쪽일까? 이매탈인 많이 모자라는 ‘병신탈’은 ‘젊은 각시탈’을 짝사랑하다 동반자살을 하는 것? 갈대밭 무성한 저녁, 쪽배 위에서? 궁금궁금 하게, 위태위태하게, 긴장감 조성하기.
  4연 4행 결말 부분 - ‘나는 다섯째 마당에 나가서 파계하고 중탈을 벗는데 갑자기 얼굴이 없다’.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다. 스산하다. 왜냐하면 이 시극은 스릴러물이기 때문이다. 파계와 파격미.
 
  스릴러 기법을 도용한 위선환의 시는 연극과 시나리오로 꾸미거나 마당극으로 공연할 수 있는 공연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시는 하회탈 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여자가 남자를 짝사랑한 하회탈 설화를, 반대로 남자인 ‘이매탈’이 ‘각시탈’을 사랑하다 죽는 것으로 바꿔서 각색하였다. 하회탈의 열 번째 탈인 ‘이매탈’은, 허도령이 꿈에 계시를 받아 외부와 단절하고 숨어서 목욕재계하고 신성한 ‘탈’을 만들던 중, ‘허 도령’을 짝사랑한 동네 ‘처녀’가 얼굴이라도 보려고 문에 구멍을 뚫고 문구멍으로 들여다본 죄로, 허도령은 부정을 타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래서 10번째 ‘이매탈’은 턱이 없는 미완성으로 남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선환은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처럼 고려시대의 슬픈 선남선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하여 한편의 시로 완성하였다. 국보 제121호로 박물관에서 귀히 대접받는 하회탈. 분명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회탈은 ‘신’으로 모시고, 사람이 범접하지 않고 신성시하여 제를 올리고 잘 보존했기 때문에 11-12세기 작품이 지금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제사장만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고 닦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성시하는 성경의 ‘언약궤’와 같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빈아답의 집에서 나왔는데,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들었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고 성경에서 언약궤를 언급하고 있다. 당시 탈을 만들던 장인은 천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육체의 지배계급인 ‘양반’과 정신의 지배계급인 ‘중’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천민 계급인 ‘백정’과 같이 춤판과 마당극으로 등장시켜 회화하여 놀이를 하였다.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은 어느 시대나 금기다. 그 사랑의 결말은 비극이다.
  위선환의 「탈」은 서정주의 ‘문둥이’ 시처럼 섬뜩한 배반의 사랑을 다룸으로써 ‘낯설게하기’를 실현하였다. 묘하게 호기심과 미의식을 자극한다.
  마지막 행의 ‘나는 다섯째 마당에 나가서 파계하고 중탈을 벗는데 갑자기 얼굴이 없다’는 부분에서 다시 1행의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서정적 자아’가 재등장한다. 그러나 1연의 사건이 생기기 전의 시점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미 ‘어떤 결과’를 도출한 위기의 상황에 서정적 자아가 놓이게 된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막이 내려도 독자는 불안하다.
  아주 희귀한 복상사를 다룸으로써,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랑의 정점을 ‘보여주기’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의 배 위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세기 동안 동네 아낙네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쉬쉬, 만담거리가 될 것이다.
  전설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시는 꼭 스릴러 연속극을 보는 것 같다. 악마는 죽었는데 꼭 또 현재에 살아날 것만 같은.
  극적 긴장감과 호기심, 불안감을 조성하는 능력은 위선환 시의 힘이다.
  위선환은 가장 한국적인 하회탈을 소재로 가장 현대적인 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탈은 존재의 분신이면서 또한 존재 자체이다. 몸체이면서 외형이요, 내면이다. 외형에 자아의 얼굴을 가리고 자유롭게 자신을 희화하고 상대를 조롱한다. 그리하여 얼굴 맞대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진정한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적나라하고 보여준다.
  탈 뒤에 숨은 자아와 탈을 벗은 자아의 괴리감이라고나 할까? 성을 버려야 하는 중이 성을 선택한다면 갈등과 불안증이 고조될 것이다. 파계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현재의 자아를 던져버리고, 탈 뒤에 숨는다. 얼굴 없는 자아다.
  어느 것도 자신의 모습이 아니다, ‘탈’을 쓰고 있어도 ‘탈’을 벗어 던져도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는, 시인의 존재의 불안.
  부조리극의 극치다,
  위선환의 「탈」은 민화처럼 가장 한국적인 소재다. ‘탈’은 ‘자아’며 ‘초자아’다. 왜냐하면 ‘탈’의 인물은 초월자인 ‘신’을 의미하면서 또한 타락자인 ‘양반’과 ‘병신’, ‘중’ 등 기존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천시받는 인물을 대변한다. 현대물로 치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치정행각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이미 각시는 각시가 아니다. 중은 중이 아니다. 양반은 양반이 아니다. ‘탈’을 뒤집어 쓴 순간 역할이 바뀐다. 대표성을 잃고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인물이 된다.
  위선환은 4연 3행의 ‘벗은 여자의 배 위에서 벗은 남자가 죽었다’는 극적상황을 제시함으로써 극적 클라이맥스를 만들었다. 치정관계에 얽혀 보험사기를 하고 아내를 죽인 살인자나, 점잖은 척하면서 뒤로 연애질과 잡기를 하는 현대 양반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다섯째 마당에 나가서 파계하고 중탈을 벗는데 갑자기 얼굴이 없다’
  마지막 4연 4행 결말 부분은 ‘다섯째 마당’이라는 극의 장면제시를 하고 있다. 파계한 중이 ‘탈’을 벗으니 얼굴이 없다. ‘탈’은 얼굴을 가려서 진짜 얼굴이 안 보인다. 오랫동안 탈을 쓰고 있으면 이미 진정한 자신의 ‘얼굴’이 없다. 탈을 벗는 순간 진실에 노출된다. 탈을 쓰지 않으면 현실과 존재마저도 위태롭고 불안하다. 현대에 다시 한번 언급할 필요성이 있는 질문이다. 누가 ‘탈’을 벗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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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오 신문/ 시가 있는 마을 21호/ 유지소
y거나 Y
 
 
유지소
 
나무란 나무는 모두
y거나 Y; 일평생 새총을 만든다
떡잎부터 고목까지 나무는
나무로부터 새를 날려버리기 위해
y거나 Y; 새총전문제조자가 되었다
새는 나무의 도플갱어; 이것은 나만 아는 사실
새는 나무의 육체로부터 유체이탈한 나무의 영혼
; 이것은 나무만 알고 새는 모르는 사실
나무는 영혼이 육체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유배자처럼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고정식 탁자 같은 나무에게
새는 일종의 접이식의자 같은 것이다
나무 이전에 새가 있었다,는 말을
나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단언컨대, 새는 나무 이후에 있었다.
새; 나무에게 새는 뿌리를 탈출한 나무이다
나무; 새에게 나무는 뿌리를 박은 새이다
y거나 Y; 공중에 떠 있는 새의 은자부호
y거나 Y; 공중에 떠다니는 나무의 부표
새는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나무에 둥지를 틀고
나무는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해 새를 날린다
새는 나무로 돌아오는 힘으로 일생을 살고
나무는 새를 날려버리는 힘으로 일생을 산다
새가 영원히 나무로 돌아오지 않을 때
나무는 비로소 완전한 나무가 된다
 
 
 * 2012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시>상 수상작품
  <이선의 시 읽기>
 
 「y거나 Y」는 나무의 형태를 관찰하여 ‘y거나 Y’로 읽는다. 또한 새총모양으로 읽는다. 붙박이로 서 있는 나무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와의 관계를 ‘y거나 Y’로 상징적으로 읽는다.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연인관계, 불륜관계, 상하복종관계, 이별, 집착…, 모든 관계는 함수 'x와 y'로 이루어져 있다. 그와 같이 위의 시「y거나 Y」에 어떤 대립적인 관계와 상황을 대입하여도 그 관계가 성립된다. 기호시가 독자의 확산적 사고를 도출하는 이유는, 대입하는 사물에 따라서 의미확장이 크기 때문이다. 남의 은밀한 일기장을 훔쳐 읽는 것 같은 쾌감이 있다.
  그 대상은 밀착된 자아이면서 대립되는 타자다. ‘자신’이면서 타자다. 라캉은 ‘욕망이론’에서 ‘자아를 타자로 인식하는 자아의 시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시의 본질은 자아를 객관화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가까이 있는 자아를 멀찍이 놓고 바라보기’라고 이름붙여 본다. 기호 'x와 y'는 자아면서 동시에 ‘타자’를 의미한다. 위의 시 6-7행에서 ‘새는 나무의 도플갱어; 이것은 나만 아는 사실/ 새는 나무의 육체로부터 유체이탈한 나무의 영혼’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자아의 타자화’는 16-17행 ‘새; 나무에게 새는 뿌리를 탈출한 나무이다/ 나무; 새에게 나무는 뿌리를 박은 새이다’ 부분에서도 증명된다.
 「y거나 Y」는 설명적이고 지루하고 빤한 시들에 식상한 독자에게, 신선하고 감각적이며 낯선 이국 거리에서 매력적인 외국 이성을 만난 것 같은 낯설음이 주는 호기심과 설렘을 준다. ‘고정식 탁자 같은 나무에게/ 새는 일종의 접이식의자 같은 것이다’와 같은 표현은 내용과 표현의 ‘낯설게하기’의 극치다. 
  ‘새는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나무에 둥지를 틀고/ 나무는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해 새를 날린다/ 새는 나무로 돌아오는 힘으로 일생을 살고/ 나무는 새를 날려버리는 힘으로 일생을 산다’ 위의 시의 주종을 이루는 대귀법이다. 대귀법의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들이 선명하고 쿨하게, 때론 따끔하게, 새콤하게, 은밀하게 독자를 유혹한다.
  ‘자아의 타자화’는 갈등과 배리의 ‘등배관계’다. ‘새가 영원히 나무로 돌아오지 않을 때/ 나무는 비로소 완전한 나무가 된다’ ‘관계의 미학’의 정점이다. 사유의 깊이와 절제와 정돈, 버림의 미학이 감각적인 기호시로 완성된 간결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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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 ․ 3
 
                     양준호                            
 
  오늘도
  나는
  흑거미를 소리나게 밟아 죽였다
 
  누군가
  나의 눈빛을 읽고 가는 아직도
  어린놈이
  벽을 몇 번 두들기다 갔다
 
  고요하다
 
  오월이 숨찬 기氣를 내뿜고 가는
  여기는 관악의 하반신이 시작되는……
 
  고요하다
 
  딸은 잘 있을까
 
  고요.
  물고기의 눈동자에서 파닥대던
  무늬산호수꽃
  고요.
 
  고요하다
 
 
                                                         
<이선의 시 읽기>
                                      
 
  양준호는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시’ 동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단하던 80년대부터 독특한 하이퍼시를 써 왔다. 양준호의 시는 상황시다. 실존적 단절과 절대고독을 <흩뿌리기 기법>으로 허공중에 단어를 던지며 의미를 함축한다. 시인의 시에는 대사와 반복어가 많다. 단어와 행이 짧다. 꼬리가 잘려나간 연 같다. 토막 난 단어들이  긴장감과 위기감을 준다. 축약된 연극 대본처럼 양준호는 설명을 버린다. 의미도 버린다.
  양준호의 시를 읽으면 혼자 골방에서 울고 있는 소년을 보는 것 같다. 카리스마와 괴기스러움, 파격 속에 숨어있는, 어리고 상처받은 어린이가 보인다. 그 어리고 여린 것,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 그 도발과 반격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단어와 단어는 단절되고, 연과 연도 단절된다. 단어들이 제각각 결합되고 사방으로 내던져진다. 그 단절된 것들의 구성 조합이 하이퍼시의 조건인 ‘리좀’을 충족시키고 있다.「積 ‧ 3」은 양준호의 작품 중에서 순한 편이다. 부사와 어미를 제목으로 쓴 시를 한권의 시집으로 엮을 만큼 역량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희귀한 꽃 이름이나 사물 단어카드를 늘 가지고 다닌다. 7연의 ‘무늬산호수꽃’도 그런 열정으로 찾아낸 꽃일 것이다. ‘무늬산호수꽃’은 다른 꽃 으로 대체하여도 시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다. 무의미 단어의 연결과 결합, 대체 가능한 단어들은 ‘무의미’와 ‘탈관념’을 주장하는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무늬산호수꽃’은 시와 환상적인 결합을 하고 있다. ‘물고기의 눈동자에서 파닥대는 무늬산호수꽃’에서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자율신경을 가진 시인의 감각을 본다. ‘무늬산호수꽃’은 ‘고요’와 만난다. 고요한 감성의 그림자를 만든다. 의도된 완벽한 계산이며 효과다.
  양준호 시인의 ‘積’ 은 시집 한권 분량의 시리즈물이다. ‘흑거미’를 밟아죽이면 어떤 소리가 날까? 절대고요의 절대상황을 상상하여 보라, 시대를 잃어버린 고독한 시인은 칩거 중 거미 한 마리와 대적하게 된다. <흑거미 만나기-흑거미 바라보기- 흑거미와 놀기- 흑거미 죽이기> 일련의 과정과 단계는 실존적 절대상황이다. 절대고요가 먼저일까? 절대고독이 먼저일까?
  ‘어린놈이 벽을 몇 번 두들기다 갔다’ 부분에 주목한다. ‘어린놈’은 손자이거나 은둔시인에게 전화를 거는 행세하는 어줍잖은 시인일지도 모를 일. 양준호 시인은 세상을 향해 벽을 여러 번 두들겼을 것이다. 미련과 실망 뒤 마침내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켰을 것이다. 침묵과 고요.
  ‘관악의 하반신이 시작되는’ 봉천동 어느 적막한 골방에서 세상과의 소통을 기다리고 있는 시인을 상상해 본다.
  ‘딸은 잘 있을까?’
  격리된 고요 속에서도 딸은 유일한 관심거리다. 자신의 분신에게만 소통의 의도를 갖고 있다.
‘물고기의 눈동자에서 파닥대던 무늬산호수꽃’의 그림자, 시인의 속눈썹 위에 걸려 있다. 지친 고요가 심심하고 고단하다.
  양준호 시인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 시인이다. 하찮은 세상을 비웃듯 세상과 섞이기를 거부한다. 시인의 필체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길고 길쭉하다. 마치 세상에서 벗어나 허공을 날아가는 나비의 자유로운 날개처럼. ‘積’ 시리즈는 세상에서 밀려난 천재 시인이, 세상을 역으로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찰하는 듯 고요로 침잠하는 詩다.
 
  시인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어, 헛웃음 웃게 하고 싶다. 동료시인의 변변치 못한 시를 험담하며 반주 삼아 술 한 잔 마시게 해 주고 싶다.
 나의 골방도 고요하다. 모기 죽이는 소리.
 들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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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 Y
 
김인숙 
 
  8월의 교차로에 차들이 뒤엉켜 있다
노란 유치원차와 파란 활어차가 부딪쳐 난장판이 되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노랗게 노랗게 엄마를 부른다 울음소리가 교차로를 뛰어 다닌다 물 밖으로 튕겨진 활어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긴다 배를 뒤집고 거품을 내뱉는다
 
어디로 가란 말이냐 한낮의 햇살이 아스팔트를 녹인다 농어의 점이 점점 더 짙어진다 붉은 아가미의 탄식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광어의 배가 노랗게 익어간다
 
노란 모자를 놓친 아이가 농어를 들어 올려 품에 안는다
농어의 입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이선의 시 읽기>
 
  김인숙의「교차로 Y」는 제목이 감각적이며 실재적이다. 영문자 ‘Y’는 좁은 삼거리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든, 확산적 이미지를 가진 파장이 큰 제목이다. 시에서 제목은 매우 중요하다. 시를 한편의 영화라고 가정하여 보자. 설명적이거나 진술적인 제목은 우선 관객의 선택에서 밀린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 제목이 많은 이유다. 글자 6자 영화는 성공하고 12자가 넘으면 망한다는 등 다양한 속설이 있다.  반어적이고 역설적인 영화제목을 만나면 참 시적이라는 생각이 한다.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시를 쓰면 제목을 잘 붙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김인숙의 시에「다시 시작되는 천국」이란 제목의 시가 있다. <시네마 천국>을 패러디한 제목이다. 실재로 그 시에는 <칠수와 만수> <공동경비구역> <쉰들러리스트> 등 여러 편의 영화제목이 등장한다.
  김인숙의 시는 템포가 빠르다. 문장이 짧다. ‘―이다’체의 선명하고 단순한 문장을 던지듯  배열한다. 설명적이거나 지루하지 않다. 사실과 상황을 직설적으로 던진다. 시적거리가 먼 단어들이 벌이는 언어충돌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는 그녀의 재능과 달리 언어충돌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극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사실과 사건을 아주 단순하게 보이는 대로 적는다. 시인은 화자의 느낌이나 감정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다.
 위 시의 중심어는 ‘8월-교차로- 노란 유치원차-활어차-아스팔트-광어- 농어-노란 모자를 놓친 아이- 농어 입- 숨결’  10개의 단어가 전부다. 나머지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수식어들이다. 10개의 단어만 읽어도 여름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일어난 활어들이 벌이는 난장판이 생생하게 감지된다. 유치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귀를 쟁쟁 울린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한 사실에서 극적 진실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긴 질문과 여운을 던진다. 10개의 중심 단어와 한 개의 질문. 이 시의 쿨한 매력이다. 시인의 잠재된 능력을 읽는다.
      “노란 모자를 놓친 아이가 농어를 들어 올려 품에 안는다
      농어의 입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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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
 
    
손해일
 
 
신안 증도 슬로시티에 소금꽃 피었다
물 햇빛 바람이 살 섞은 열꽃
형체 없는 물 가두고 열고 풀어  
염부가 돌리는 무자위 수차와 당그래질
무한궤도로 증발한 지상의 땀꽃 
 
한때 바다였다 솟구친 희말라야 연봉
아득한 만년설 눈보라에 흩날려
몽골초원 고비사막 하늘땅 홀리는 신기루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에 순장된 암염들이
눈사람 예띠의 이른 아침
키 쓰고 소금 얻는 오줌싸개의 홍안에도 피었다 
 
득도한 부처 염화시중의 우담바라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사해(死海) 갈릴리 물위를 걷는 예수
썪지 않는 빛과 소금     
찬연한 생명꽃
 
 
  <이선의 시 읽기>
 
  ‘소금꽃’은 ‘생명꽃’이다. 이 시의 주제다. 첫 연과 끝 연, 알파와 오메가다. 생활에서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매일 만나는 것이 소금이다. 그러나 마냥 잊어버리고 존재감이 없는 것이 또한 소금이다. 있지만 없는 것, 그림자 같은 존재가 소금이다. 소금에 대하여 말하라고 하면 누구나 한 바가지 분량의 소금관념, 소금은유, 소금비유를 쏟아낼 수 있다.
  그러나 손해일은 그 흔한 소금 이야기를 종횡무진 하면서 관념에 빠지지 않는다. 작고 흔한 보잘 것 없는 것을 ‘히말라야/ 아득한 만년설/ 부처 염화시중의 우담바라/ 사해 예수’까지 자연주의와 우주, 종교론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쉬운 소재를 좋은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낯선 튀는 소재로 독특한 시를 쓰는 것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평범한 것, 만만한 것을 만만치 않게, 사물을 잡고 끈질기게 파고들어가서 근본까지 파헤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손해일의 「소금꽃」은 김치, 간장, 젓갈, 어떤 음식 속에 들어가서 이름 없는 무엇이 된 소금을 다시 끄집어내서 성분과 영양분과 원소를 분류해 놓은 것 같다.
  시라는 음식은 최소단위 원소들을 소금과 잘 섞고 뭉쳐서 맛깔스럽게 접시에 구성미를 살려 차려낸 화려한 음식과 같다. 그 시의 구조가 집합적으로 어떤 이미지로 그려낼 지는 작가의 손과 눈, 감각이 어떻게 단어를 뭉치느냐 하는 기술에 달려 있다. 좋은 시는 비유와 관념이 스스로 혼자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손해일의 소금은 홀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연과 인물, 사건 속에 숨어서 자신의 존재를 녹이고 있다.
  소금은 생활의 근본이며 기독교의 근본이다. 또한 자연의 근본이며 음식의 근본이다. 소금은 ‘희말라야 연봉’ ‘몽골고원 고비사막’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 ‘눈사람 예띠’ ‘오줌싸개’였던 ‘나’ 손해일에게까지 연결되는 맛의 근본이며 생명의 고향이다.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석한 시 구성기법이다. 스스로 녹아서 스스로를 잊혀진 존재로 만들어낸다. 두리뭉실 섞어서 뭉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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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를 낚다
 
정 호
 
회야강 자갈모래 물길
낚시 드리우고 은어를 낚는다
한순간의 전류가 릴을 타고 흐르길 기다리지만
찌는 듯한 무더위만 찌를 물고 있다
담배 한 대 태우는 동안
또 한 무리의 은어떼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온다
바야흐로 짝짓기철이다
자갈모래 퍼내며 산란탑을 쌓다가 
물낯에 내 그림자만 얼비쳐도
은회색 배떼기만 번뜩번뜩 뒤집으며   
직유의 물살 환유로 따돌리며     
순식간에 행간을 빠져나가 글자 뒤로 숨는 사금파리떼들
어디서 오이꽃이 피는가 입안에
오이수박향 가득 괸다
물가장자리로 그 꽃들을 끌어내고
접었던 물길 다시 펼친다 물낯 같은 종잇짝 위로
줄글들 돌돌돌 흘러내린다
냇바닥, 이저리 널린 자갈 글 틈 사이에 숨은
수박향 담백한 은어隱語 몇 마리 낚아올린다
 
<이선의 시 읽기>
 
        여유, 은유, 환유의 물빛 언어가 빚는 말그물
 
  강태공이 낚싯대 드리우고 낚아 올리는 건 물고기가 아니다.
낚싯대에 걸린 것은 서러운 달빛 한 조각, 구름 한 조각, 잃어버린 시의 조각들일 터. 그 조각들 모아서 엮으면 달빛도 물비늘로 반짝일 터.
  정호의 시는 낚시질처럼 급박하지 않다. 은유와 환유가 담배 한 모금 피우는 시간처럼 여유롭고 한가하게 오간다. 시를 낚기 위하여 부러 낚시질 놀이를 펼쳐 놓고, 시가 걸리든 말든 짐짓 외면하고 풍경이나 구경하는,
  정호의 시는 오이수박 맛이다. 무상무심의 물맛이다. 물은 무향무맛이지만 몸에 좋다. 아프게 찌르지도 왜곡도 자극도 없다. 바람의 향기처럼 자기 자신은 무심한데 타자의 향기로 은근한 풍유로 이끈다.
 
  ‘은회색 배떼기만 번뜩번뜩 뒤집으며’
 
  ‘산란’과 ‘짝짓기’도 은근한 물맛이다. 탐욕과 욕정과 급경사의 갈등구조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은어떼’의 물비늘이 환상처럼 펼쳐내는 아름다운 시의 구조가 숨어 있다. 그것은 시인의 삶에서 보여주는 ‘여유’ 다. 정호의 시에는 정서, 정신이 살아 있다. 그의 삶도 물질을 애써 외면하며 짐짓 ‘여유’를 부린다. 그이 시에는 은유와 환유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게 있다. ‘수박향 담백한 은어隱語 몇 마리 낚아’ 올려 매운탕 끓여 먹고 싶은 시맛이 있다.
 
시가 있는 마을- 신규호
 
조각달 
 
 
신규호
 
 
 
생각은 깜깜하고
태어날 듯 태어나지 않는다
 
견고한 알 하나
항문 끝에 보이고
 
대붕(大鵬) 한 마리 검은 나래를 펴
하늘을 덮고 있다
 
출산이 끝나면
타조의 알보다 클
 
생각 한 쪽은 파묻혀
보이지 않고
 
낡은 절 처마 끝에
풍경만 울어댄다
 
마르지 않는
눈물 한 방울
 
 
<이선의 시 읽기>
  
 <확산적 이미지의 우주적 생성과정>
 
  신규호의「조각달」은 스케일이 크고 우주적인 심상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서정주의「동천」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분류하여도 될 정도로 확산적 이미지가 강하다.「조각달」은 제목과 내용에서 1-7연까지 각 연들이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각 연들은 제목과 맞물려 확산적인 생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원초적 자연주의와 만난다.
  1연- 생각의 탄생, 그러나 ‘생각’은 어떤 ‘다른 사물’을 대입하여도 등가법칙이 성립된다.
  2연- 알과 항문, 생각의 시작과 끝, 예수의 알파와 오메가 이론을 대입하면 우주적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3연- ‘대붕(大鵬) 한 마리 검은 나래를 펴 하늘을 덮고 있다’ / 천지창조의 이미지가 강하게실존적 위기감을 조성한다. 탄생을 위한 알의 파괴,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서처럼. ‘알은 세계다’, 탄생을 준비하는 파괴적 알의 이미지가 드라마틱하고 원대하다.
4연- ‘출산이 끝나면/ 타조의 알보다 클’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적 이론을 대입하여 보면 ‘생각은 우주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우주다’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우주적 스케일의 생각이 출산될 준비를 하고 있다. 신의 탄생, 천지창조, 신화적 이미지가 강렬하다.
5연- ‘생각 한 쪽은 파묻혀/ 보이지 않고’/ 광대한 우주에서 다시 돌아와 ‘나’에게 집중한다. 출산하여 터트리면 ‘우주’적 스케일의 시가 탄생할 텐데, 잡힐 듯 파묻힌 생각의 꼬리가 열리지 않아 ‘시인’은 고뇌한다.
6연- ‘낡은 절 처마 끝에/ 풍경만 울어댄다‘/ 급박하게 원대한 목표를 향해 상황을 몰아가다가 ‘여유‘를 되찾는다. 현실의 ’자아‘로 돌아온다. ’낡은 절‘, ’처마 끝‘, ’풍경소리‘는 ’여백‘과 ’여유‘다. 쉼의 공간을 주는 시 작품은 ’타자‘와 ’세계‘를 품어 안는 공간이 크다. 신규호 시인의 ’여유‘와 ’큰그릇‘ 됨됨이를 본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관찰하기‘와 바라보기’다.
7연- ‘마르지 않는/ 눈물 한 방울’ / 7연은 ‘감성’이다. ‘눈물’은 패배와 후퇴 같지만, 한발 물러서서 다시 기다리는 여유다, 반성이다, 독백이다. ‘눈물’은 인간의 근원적 순수며 태초의 모습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으앙’ 우는 울음이다.
  신규호의「조각달」은 태초의 이미지들의 종합 선물세트다.
  시인의 우주적 시나리오 연극 공연을 넋 놓고 관람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여행을 떠난다.
 
    “아, 태초의 모든 시작과 끝은 ‘울음’과 ‘눈물’인 것을…”
 
시가 있는 마을- 신현락


구름 위의 발자국


신현락



나비는 꽃잎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새는 죽어서 구름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아무도 꽃잎의 발자국을 보지 못 한다
꽃잎이 지고 나비의 날개는 비에 젖는다
나비를 비애의 그림자라고 명명하는 건
당신 몫이겠으나 여기부터는 구름의 영역이다
당신은 꽃잎을 밟으며 꽃잠에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구름의 문장을 해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름이 하늘색을 지우는 건 잠깐이다
한때 나는 구름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쳤으나
새들만이 그 너머로 날아갔음을 안다
꽃잎 위에 비 내리고 어제가 오늘이 되었다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나는 죽은 새를 들고
구름 위의 발자국을 맞히는 신궁을 기다린다



<이선의 시 읽기>


          환상과 직관의 모자이크 액자


'나비'를 A 이미지라고 명명하여 보자
‘꽃’을 B 이미지라고 명명하여 보자
‘구름’을 C 이미지라고 명명하여 보자
‘새’를 D 이미지라고 명명하여 보자
신현락의「구름 위의 발자국」은 제목처럼
가볍고, 보드라운 A, B, C, D 이미지들의 모자이크다.
 ‘나비, 꽃, 구름, 새’는 ‘가볍다’는 공통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 가벼운 ‘집합 이미지’들은 자칫 공상으로 흐르기 쉬우며, 표현주의와 감상주의로 흐르기 쉽다. 그런데 위의 시는 깃털처럼 가볍게 단어를 터치하면서도 시의 뿌리가 단단하고 깊다. 그 힘은 사물성에서 출발한다. 사물에 입힌 사유의 힘이다. 또한 ‘사물’에 행동과 행위를 줌으로써 ‘동적 이미지’로 ‘사실성’을 강화하고 있다.
꽃잎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나비의 날개는 비에 젖는다
꽃잠에 들
구름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쳤으
그 너머로 날아갔
비 내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지만
나는 죽은 새를 들고
발자국을 맞히는 신궁을 기다린다


위의 밑줄 친 행위를 주도하는 문장들은 ‘공상’과 ‘상상’의 시적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좋은 비유는 관념보다 더 깊은 확장된 관념을 생산한다. ‘사물’과 ‘사실’에서 출발한 상상력은 시적 논리를 강하게 한다.
환상과 직관, 죽음과 현실, 과거와 현재, 상상과 이성, 과거와 미래가
한 공간에서 반짝이는 복합그림의 선명한 이미지액자가 환상적이다.
 
시가 있는 마을- 강인한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강인한
 
이른 아침 갓 구운 핑크의 냄새
골목길에서 마주친 깜찍하고 상큼한 민트 향은
리본으로 치장한 케이크 상자처럼 궁금한 감정이에요.
 
초보에게 딱 맞는 체리핑크는
오전 열 시에 구워져 나오지요
십 대들이 많이 구매하지만 놀라지 마셔요, 때로는
삼, 사십 대 아저씨가 뒷문으로 들어와 찾을 때도 있어요.
 
육질 좋은 선홍색의 연애는
오후 두 시 이후에 뜨거운 오븐을 열고 나와요.
구릿빛 그을린 사내가 옆구리에 낀 서핑보드
질척거리는 파도 사이 생크림 같은 흰 거품은 덤이지요.
 
아무래도 못 잊는 블루
그중에서도 뒷맛이 아련해 다시 찾는 코발트블루는
땅거미 질 무렵 산책로에 숨었다가 뛰쳐나오기도 하지만요.
 
가장 멋들어진 연애는 한밤의 트라이앵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라지는 삼각관계로 구워내
당신의 눈물에 찍어먹는 간간한 마늘빵 그 맛이지요.
 
<이선의 시 읽기>
 
  강인한의 시는 두 부류로 나뉜다. 건조하고 거칠게 밀어붙이는 재해석된 사회 고발성 시와 부드러운 키스처럼 달콤하지만, 선명하고 이성적인 서정시로 분류된다. 굳이 후자의 시를 선택하여 사랑 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금은 밤 11시 반, 추운 어둠의 계절 속에 홀로 서서, 사랑을 갈구하며 인터넷 배에 매달려 표류하는, 현대인이라 불리는 족속으로 살고 있는 ‘나’의 현주소를 고발하기 위함이다.
  2.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아무러면 어때 사랑시대, 급하게 싼값에 포장되어 각 가정으로 배달되는 택배사랑을 매일 받는데도, 이 기쁜 사실을 망각하고 착각하여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양 ‘나’를 거듭 ‘실연자’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3. 달리, 더 자세히, 부연설명하자면, 사랑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외롭냐는 거다? 왜 ‘너’가 바로 ‘나’ 옆에 꼭 붙어 있는데 왜 이리 불안한가? 묻고 싶기 때문이다.
  4. 그러나, 또한, 그리고, 그러면서, 사랑의 부재 속에서도 불륜 드라마 몇 편을 매일 제작하는. 아직도 진정성있는 진지한 사랑을 기다리는 희망고문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예정된 결말의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5. 그런데 오늘 ‘나’는 텔레비전 주말 연속극에 흥분하여, 수목 드라마, 화목 드라마, ‘다시보기’ 클릭 매일 연속극 클릭.
     아직 늙지 않은 이성을 억누르고, 감정을 부추기는 몽매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마늘빵 사랑도 놓쳐버린 상실의 주인공이라 시인하기 때문이다.
 
  강인한이 해석한 현대인의 사랑 색깔은 핑크, 체리핑크, 선홍색, 블루(코발트 블루) 네 가지다. 강인한이 명명한 사랑의 맛은 민트향, 케잌맛, 서핑보드, 흰 거품, 눈물 젖은 마늘빵 맛이다. 수만 가지 사람의 수만큼, 아니 하늘의 별 만큼 많은 사랑을 강인한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1. 10대- 첫사랑, 민트향
  2. 20대- 육체의 사랑, 체리핑크(때늦은 중년의 불륜 포함)
  3. 40대- 선홍색, 위험한 데미지의 사랑(첫사랑을 찾아나섰다가 패가망신함)
  4. 50대- 사랑과 전쟁 드라마의 주연배우, 막장 드라마 주인공이 자신이 되고 만다.
  강인한의 사랑 시는 기지와 재치, 예리함 위에 올려놓은, 부드럽고 달콤하고 상큼한 초콜릿 맛이다. 
 
  사랑에 대하여… 논문을 쓰라면, 누구나 할 말이 많을 것.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하라면 서울에서 태평양 건너, 미국 들렸다가 아프리카까지 가도 끝나지 않을 거다. 누구나 자신의 사랑이 특급사랑일 테니까.
  사랑아, 너를 경외한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종족보존이라는 절대절명의 위엄을 지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왔구나. 세상에 불륜과 거짓을 다 제거하고 순수사랑만 남긴다면, 아마 지구는 이미 멸종하고 말았으리라.
  어떤 색깔이든 사랑이란 이름이 붙은 것들을 존경한다.
  거짓사랑, 배반의 사랑, 미련의 사랑, 아첨의 사랑, 그 외 모든 사랑이란 이름들에 박수를 보낸다. 모태 솔로들이 자랑스레 ‘짝’이란 프로에 나와 공공연히 시위를 벌이는 이 살벌발칙한 시대에. 풍요하여 빈곤한 사랑을 위하여! 건배를 들자.
 
  질문한다. 강인한 시인의 사랑은 지금 몇 시쯤일까? 그의 사랑시간 계산법은? 시인의 사랑 감정계산은? 지금… (컨닝하여 본 결과)아직 진행 중…행복. 젊고 건강하다. 아직도 살아있는 시인의 사랑을 위하여…건배! 짝짝짝,
 
저수지에 빠진 의자
 
유종인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 그림자를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이선의 시 읽기>
 
                  ‘시’의 의자에 앉은 ‘사유’의 물살
 
  ‘저수지에 빠진 처녀’ 이야기라면, 달콤한 사랑과 배반이 흥미를 끌 것이다.
  ‘저수지에 빠진 남자’ 이야기라면, 실직의 고달픔, 가장의 비애가 출렁일 것이다.
  ‘저수지에 빠진 할머니’ 이야기라면, 자식의 짐이 되기 싫어 택한 죽음의 방법으로 수면제보다 물이 더 안전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뜬금없이 ‘저수지에 빠진 의자’가 주인공이다?
  유종인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저수지에 둥둥 떠다니는 보잘 것 없는 의자에 집중하고 있다.
 1. 의자는 다리가 부러졌다
 2. 의자는 물속에 빠져있다
  저수지라는 갇힌 공간에서,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헤엄을 쳐서 저수지를 벗어날 수도 없다.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갈 힘도 없다. 그러나 평생 남의 엉덩이만 받아주던 의자는 누군가의 버팀목이었다. 누군가의 의지처였다. 지금,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의 양수같은 저수지에 첨벙 뛰어들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누군가의 뒤에서만 존재하던 다리병신 의자는 누워서 편히 쉬고 싶은데 편히 죽을 수도 없다. 그 힘없는 절름발이 의자에게 ‘물줄기가 기대고, 산 그림자가 앉고, 물고기들이 둥지로 삼으려 모여’든다. ‘제 울음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5연 1-2행)게는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이 있다. 죽음 이후에도 끝내지 못한 의자의 삶이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물고기들을 의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아니 이미 죽었는데), 죽음 이후에도 부양하고 있다.
  아니, 의자는 영원히 타인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짊어진 능력자로, 긍정의 힘으로 해석하여야 할까?
  ‘의자’는 많은 시인들이 사랑한 시적 대상이다. 관념적 의자, 사물의 의자, 바닷가에 버려진 의자, 공사장에 버려진 의자, 삐걱거리는 의자, 필자의 ‘빨간 손바닥의자’까지. 그러나…
  유종인의 ‘의자’는 가장 성스러운 의자다
  유종인의 ‘의자’는 사유하는 의자다
  유종인의 ‘의자’는 봉사하는 의자다
  유종인의 ‘의자’는 유종인 자신이다
  유종인의 ‘의자’는 유종인의 삶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모든 우주와 자연, 인간을 앉히고도 넉넉한 그의 인품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질 것이다.
 
  ‘시’의 의자에 앉은 ‘사유’의 물살이 시원하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찌든 생활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내보자.
 
시가 있는 마을- 이생진
 
누드는 슬프다
 
이생진
 
슬픔이 누드를 학대한다고
자백한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시엔의 누드를 보러 가던 날
조선일보(2007년 12월 22-23일자)에서 유미리(소설가)의 누드
를 봤다
유미리는
‘유미리 불행전기록柳美里 不幸全記錄’이라는 신작 표지에
자신의 누드를 넣었다
반 고흐가 그린 누드는 머리를 숙이고 앉은 전신 누드이고
유미리는 서 있는 반신 누드다
유미리의 머리카락은 젖꼭지까지 내려왔고
시엔의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내려와서 흐느낀다
왜 누드는 흐느낄까
둘 다 팔려고 내놓은 ‘슬픔’
‘언젠가는 팔릴 거야’라는 편지를 고흐는 썼고
유미리의 누드도 ‘팔릴 거라’는 야심에서 내놨다
누드는 팔려도 슬프고 팔리지 않아도 슬프다
 
<이선의 시 읽기>
 
  이생진의 시집 『반 고흐, ‘너도 미쳐라’』시집을 앞에 놓고, 다시 고흐의 『슬픔』그림을 들여다본다. 또한 유미리의 누드 사진을 다시 보기 위하여 인터넷 순례를 시작한다. 그러나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이생진의 시로 돌아온다. 상상이 현실보다 더 생생한 경우도 있다.
나의 기억과 느낌을 믿어보기로 한다.
  유미리의 누드와 고흐의 누드에는 공통된 것이 있다. 누드가 야하거나 음욕적이지 않고 금욕적이고 아이의 누드처럼 안타깝고 비애스럽다는 것이다. 깨질 것 같은 몸, 깨질 것 같은 영혼, 영과 육이 분리되어 바스러질 것 같은 여린 몸, 절대 고독, 두 개의 누드는 침묵하며 오래 들여다보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유미리의 누드와 고흐의 누드는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미사여구와 꾸밈이 없다. 그냥 ‘보여주기’만 한다. 설명이나 덧붙이기나 사설이 없다. 오히려 여백이 느껴진다. 이생진의 시작품「누드는 슬프다」도 두 개의 누드처럼 간단하고 단순하며 설명적이지 않다.
    유미리의 머리카락은 젖꼭지까지 내려왔고
  시엔의 머리카락은 등허리까지 내려와서 흐느낀다
  가장 사실적이며 현재를 그대로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렸다. 그런데 지독히 슬프다. 왜일까?
  이생진 시의 매력은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기’하지만 일필휘지로 내갈기는 일성은 절제된 재해석과 관통하는 언어의 위력이 칼끝처럼 날카롭다.
    둘 다 팔려고 내놓은 ‘슬픔’
    ‘언젠가는 팔릴 거야’라는 편지를 고흐는 썼고
    유미리의 누드도 ‘팔릴 거라’는 야심에서 내놨다
    누드는 팔려도 슬프고 팔리지 않아도 슬프다
  쟁쟁하고 분명하고 생생한 시인의 목소리처럼 그의 시도 쟁쟁하고 분명하고 선명하다. 이생진은 두 개의 누드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시로 잘 살려 표현하였다. ‘시’ 안에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슬프다’는 이미지의 공간을. ‘여백’이나 여운이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좋겠다. 예술의 목적성은 팔리는 것이 아닌데, 기를 쓰고 팔려는 두 개의 누드.
  팔려고 기를 쓰는 고흐의 그림
  팔려고 기를 쓰는 유미리의 소설
  그런데 왜 이리 슬플까?
 
 
보자기
 
김유선
 
 
보자기는 싸기 위해 비어있다
감싸주기 위해 종일을 비워놓는 그녀
온종일을 기다려서
무엇이든 감싸주는 그녀
찌든 감정도 더러운 시간도
도망치고 싶은 주둥이 긴 길도
네 귀퉁이 아귀 맞춰 꽃잎으로 묶는 그녀.
 
<이선의 시 읽기>
 
               여백과 압축, 사유의 사다리 오르기 관점
 
  김유선의 시를 읽으면 들국화 가득 핀 들판에 서서, 별을 보며 심호흡을 하는 소녀의 싱싱한 다리가 생각난다. 그의 시에는 화려한 미사여구나 겉치레가 없다. 건강하고 씩씩한 힘이 있다. 김유선의 손이 닿으면 관념도 아름다운 꽃이 된다.
  김유선 시의 관념은 인간과 인간성 회복이다. 그 관념은 사람의 향기를 품고 있다. 대중이 좋아하는 목적성과 시인이 좋아하는 표현주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시인이다. 위의 시도 지하철역에 전시하여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시다. 또한 안방 침실 위에 걸어 놓고 외우고 싶은 시다. 치솟는 가슴속 불길을 다독이며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는 하얀 손. 다소곳한 손.
 
  도망치고 싶은 주둥이 긴 길도(6)
  네 귀퉁이 아귀 맞춰 꽃잎으로 묶는 그녀.(7)
   위의 시는 ‘여백과 압축, 사유의 사다리 오르기 관점’으로 그녀의 삶을 펼쳐놓고 있다. 위의 시 6-7행 두 줄은 대하드라마보다 긴 스토리를 함축하고 있다. 재해석된 짧은 문장, 짧은 행, 짧은 여백의 공간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상처. 흰 치마, 흰 고무신 내 어머니들의 삶이.
  나무 사다리를 꼭 붙들고 밑을 내려다보지 않고, 위로만 올라가는 위기의 삶을 살아낸 여인의 도전이 보인다. 과정을 포기하고 자식을 버리고 이혼하였더라면, 오늘의 ‘나’와 ‘우리’는 없다. ‘여자’보다 위대한 ‘어머니’를 선택한 그녀. 오늘 과정을 포기한 여자는 내일의 결과(열매)를 알 수 없다. 흔들리는 사다리 위에서 얼마나 절망하였을 것인가? 어지러움과 위기를 견딘, 그 종착지에는 아름다운 박꽃이 별빛에 반짝일 터. 하얀 박덩이가 어서 따가라고 넌지시 말해 줄 터.
 
  찌든 감정도 더러운 시간도(5)
  무엇이든 감싸주는 그녀(4)
 
시인의 자서전을 읽는 것처럼 경건하게, ‘네 귀퉁이 아귀 맞춰 꽃잎으로 묶은 그녀의 보자기’를 펼쳐본다. 긴장되는 손. 눈. 마음.
  아귀가 딱 맞는 아름다운 마음꽃 보자기.
 
불꽃나무 한 그루
 
안차애
 
마이크로 월드 잡지에 찍어 논 뇌동맥 칼라 사진을 보고서야
누구나 자기의 하늘이 꽉 차도록 
가지 많은 나무 한 그루씩 키운다는 걸 알았다 

이글이글 타는 용광로 쇳물빛 혈관이
위로위로 불꽃 날름대며 타오르고
타오르다 굽이치며
굽이치다 제 몸을 터뜨려 새 가지를 내면서
불타는 나무 한 그루로 자라고 있었다

사랑이야!
소리치며 힘차게 뻗어가던 가지 하나가
슬픔인걸,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큰 가지에 눌려 휘청 구부러진다
휘어지며 생긴 작은 매듭 하나, 둘, 셋......
종양처럼 나비처럼 열매처럼 굽이굽이 맺혀있다
신기하기도 하지
엉겨도 끊기지 않고 휘어져도 꺾이지 않은 나무 가지들의 
저 먼 끝에선 푸른 노을이 피어오르고.

붉게 독 오른 내 사랑이 
더 붉게 무너져오는 네 슬픔을 휘감아
블루마블, 
둥그런 천구에 푸른 별빛으로 연신 스며들고 있다
청남빛 둥근 세상 한 귀퉁이로 기어이 타오르고 있다
 
<이선의 시 읽기>
 뇌혈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뇌관이 목에서 머리꼭대기로 불꽃처럼 마구마구 솟구치고, 양쪽 귀 옆에서도 마구마구 솟구치고, 정수리쪽으로 뻗은 빨간 뇌혈관 사진을 보며 놀란 적이 있다. 위의 시처럼 정말 한 그루 ‘불꽃나무’였다.
 
  안차애의 시는 ‘빠르다, 붉다, 굵다. 달린다’
  재해석된 문장들이 급박하게 밀려드는 물살처럼 솔직하다
  
  사랑이야!
 
소리치며 힘차게 뻗어가던 가지 하나가
  슬픔인걸,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큰 가지에 눌려 휘청 구부러진다
  휘어지며 생긴 작은 매듭 하나, , ......
 
종양처럼 나비처럼 열매처럼 굽이굽이 맺혀있다
 
  위의 시 3연 1-6행은 생을 단막극으로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희망이 절망의 전환점이 되는 사랑의 꺾은선 그래프.  ‘붉게 독 오른 내 사랑이/ 더 붉게 무너져오는 네 슬픔을 휘감아/ 블루마블,로 부딪치고 상처입는 사랑의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
  안차애의 시는 급박한 삶의 현장을 스케치한다.‘붉게 독 오른 내 사랑이’(4연 1행)에서와 같이‘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현재의 ‘나’를 등장시켜 삶의 리얼리티와 진정성을 강조한다.
  안차애 시를 만나면 누구나 창자를 모두 꺼집어내어 속내생각을 시인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같다. 이내 잠재된 생각까지 들킬 것 같다. 재해석된 문장들은 화끈하고 솔직하게 다가오고, 시인에게 생의 화두를 화끈하고 솔직하게 풀어놓어야 할 것 같은 ‘충동감’을 느낀다.
 
철쭉나무 그늘                                            
 
                                       김선진
                                                                           
장맛비 바삐 오는 축축한 발걸음 소리                  
이른 아침, 베란다 건너 철쭉나무 밑
음습한 그늘 속에서
화다닥, 놀란 만삭의 길 고양이
얼결에 줄줄이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다,
 
아침나절 까치 울음소리
 
몸을 푼 철쭉나무 그늘을 벗어나
측백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뜨거운 여름, 하오 고단한 산후조리
 
꼬물꼬물 다섯 새끼들
축 늘어진 어미 배를 딛고
젖꼭지를 찾느라 분주하다
어미는 마음껏 몸을 부려두고
가슴을 쭈욱 펴고 젖꼭지를 새끼 쪽으로 밀어준다
 
아무도 떼어내지 못할
젖꼭지
 
채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를 종일 핥더니
오늘, 퍼붓는 폭우 뒤에
행방 묘연
 
어디로들 갔나,
 
고양이 그림자를 놓친
철쭉나무 그늘
 
 
<이선의 시 읽기>
 
    시인의 길고양이를 보는 시선이 나른하고 길다, 따뜻하다.
    우장산 공원 영산홍나무 밑에도 세 마리 새끼고양이가 살고 있다.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어둠을 사랑하는 족속들이다. 의자 밑에 엉덩이를 드러내고 숨어버린 아기같다. 사람들에겐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걸 모르는 걸까?
  화려한 수식어를 남발하지 않아도, 깜짝 놀라 새끼를 주루룩 낳는 길고양이 모습을 적나라하고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우습고 재미있고 측은하고 애틋하고 처절하고 믿음직스럽고 아련하고 애잔한
  ‘새끼를 낳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왜 이렇게 감동스러울까?
  사실적이 주는 힘이다. 명징하고 철학적이다.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순간적으로 포착한 진실은 감동의 파장이 길다.
  가슴을 쭉 펴고 젖꼭지를 내어주는 어미 고양이의 자세가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절망의 끝에서 태어나는 희망처럼. 눈물나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비쩍 말라 비실비실 말라갈지라도 제 새끼를 잘 거두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다섯 마리나 키우려면 어미 길고양이는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 거다. 요즘 음식물 분리수거로 먹을 게 없는데.
  시인의 궁금증은 몇 날이고 고양이를 눈으로 찾고, 관찰하고, 지켜볼 것이다. 더 마음이 내키면 생선 몇 마리 넌지시 건널지도 모를 일. 결국 데려다 안방에서 기를지도 모를 일.
  
  고양이 그림자를 놓친
  철쭉나무 그늘
 
  위의 시 8연은 늘 고양이를 궁금해 하는 ‘철쭉나무 그늘’에게 슬며시 시인의 마음을 실어놓은 것. 시인의 마음이 자못 어떠해야 하며, 시의 눈은 자못 어떠해야 하는지 이 시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웅변하지 않고 넌지시. 은근하게. 시인의 성격대로. 무기교의 극치다.
 

 
박수현
 
당신은 뒷골목 담배가게 한켠에서
나를 훔쳐보는 치한
온 몸을 훑는 눈길에
내 피돌기는 화들짝 빨라지지
 
당신은 상한 통조림에서 뽑아낸 신경독
이마며 눈가의 주름
다림질하듯 펴준다며 반평생 나를 홀리지
 
당신은 나의 배후가 된 저녁 종소리
세상 가장 구석진 곳까지 따라온
불길하고도 황홀한 呪文
 
나는 당신의 캄캄한 입술
온갖 체위로 서로 더듬다가
한 백년쯤 깊디깊은 묘혈 속에
나, 머리채 잡힌 채 매장되고 싶지
 
<이선의 시 읽기>
 
  시인과 詩(시)는 어떤 관계일까? ‘시 쓰기’에 대한 ‘시’작품을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편쯤은 써 보았을 것이다. 또한 아직 못 써 보았다면, 시인 자신이 시를 쓰면서 체험한 나름의 시론에 입각한 감각적인 ‘시’를 남기고 싶은 소망이 있을 것이다.
  시인과 시는 천형의 무속인과 영매처럼 ‘운명적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詩(시)와 설레는 연애질을 하든, 중독증에 걸렸든, 집착 증후군을 앓든 간에 스스로 행복하여 택한 천형임에 분명하다. 김기림에게 어느 시인이 “그 나이에도 아직도 철이 안 났느냐?”고 놀렸듯이, 시는 어린 마음에서 싹이 튼다. 늙고 병든 마음에서는 시의 싹이 트지 않는다. 아직 덜 여물고 약한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시가 발화한다.
  시인은 홀린 듯 평생을 시에 애착을 갖는다. 만약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신경쇠약에 걸릴 지도 모른다. 릴케는 ‘젊은이여, 잠 안 오는 밤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미칠 것 같은 밤’에 시를 쓰라고 권고하였다. 또한 프로이드는 ‘사회화에 실패하여 부적응을 겪는 사람이 정신적 고통과 갈등을 예술로 ‘승화’하여 표현한 것이 ‘시’라고 하였다. 독자가 작가의 사회화의 부조화로 인한 내면의 상처에 공감하는 과정을 ‘감동’이라고 정의하였다.
  만약 시인이 시를 쓰지 않는다면, 견딜 수 있을까? 신경쇠약에 걸려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황홀한 마법의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무당이 공수를 받듯, 시인은 영감을 받아 언어의 직조를 짠다. 시를 쓰는 작업은 가장 돈이 적게 드는 예술행위다. ‘가난한 시인’이란 말은 훈장처럼 명예롭게 현재까지 전수되어 오고 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가장 직접적이고 싸게 비용이 지불되는 ‘자가 정신(정서)치료’ 수단이다.
  위의 3연 3행처럼 시는 ‘불길하고도 황홀한 呪文’임에 분명하다.
 
  나는 당신의 캄캄한 입술
  온갖 체위로 서로 더듬다가
  한 백년쯤 깊디깊은 묘혈 속에
  , 머리채 잡힌 채 매장되고 싶지
 
  박수현의 시를 읽고, 위의 몇 가지 시론을 전개해 보았다. 성실하게 묵묵히 시만 쓴 박수현 시인에게도 시의 끼가 보인다.
 
꽃들은 아직도 춥다
 
박소향
 
흘러도 흘러도 누가 뭐랄 것 없는 새벽 강에서
꽃들의 떨리는 입술을 만났다
언제나 먼저 다가서게 하는 꽃들의 눈을 보았다
 
가끔은 그리운 사람의 이름으로 서 있기도 하다가
조용히 제 이름을 내려놓는다
 
꽃들은 저마다 제 몫을 다하여 삶을 누리다 간다
그러나 잊히는 것은 아니리
그 어디에 향기로 남아
문득 바람으로 바다로 섬으로 울음을 참았으리
 
보라 저 만발한 들에
띠를 두른 꽃들이 종종걸음으로
기어코 볓빛 하나 따라 나선다
질러가던 바람도
배고픈 달빛으로 누웠다
 
꽃들은 아직도 춥다
 
 
<이선의 시 읽기>
 
  박소향의 전원시는 겸손하고 따뜻하다. ‘그대, 너’는 ‘자연, 신, 님, 절대자’로 치환하면 의미가 증폭된다. 생을 터득한 지혜자의 눈빛이 고요하다. 맑은 신앙과 명상 뒤에 체득한 소박함이다. 
  전원생활을 하며 직접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전원시집’ 한 권 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일찍 밭에서 삽질을 해 본 시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은 안다. 자연이 주는 힘은 단순함이다. 먹고 자고 땅 파고, 벌레 잡고 풀 베고.
  위의 시에는 ‘느림의 미학’이 있다. ‘버림의 미학’이 있다. 꽃처럼 귀하게 대상을 존중하는 ‘존재의 미학’이 있다. 춥고 배고픈 날의 가난을 향한 ‘그리움’이 있다. 꽃의 향기처럼 아름다운 사람의 향내를 가리어 내는 ‘소박한 정열’이 있다. 위의 시는 마지막 연이 이 시의 주제어다.
   
꽃들은 아직도 춥다
 
  생의 ‘허기, 욕망, 열정, 좌절, 인내, 희망…’ 여러 감정과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 한 행의 시어는 어떤 ‘관념’도 성립시킬 수 있는 무한한 ‘확장적 의미어’ 구절이다. 이 짧은 시어 한 구절이 긴 대하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꽃을 위한 예언서
 
                                                    강영은
 
  초저녁별과 나 사이, 꽃잎 위를 기어가는 투구벌레의 등이 꼭짓점이다. 제 등이 꼭짓점인지 모르는 황금 갑옷이 반짝일 때마다 막 피기 시작한 꽃잎이 휘어진다.
 
  곡선을 봉인한 날개 속에 죽음이 유지되기를 원할 뿐, 꽃잎을 덮고 있는 어둠을 보지 못한 당신은 에게해의 하늘을 건너 온 별빛이라고, 노래한다.
 
  핀다는 것은 경배 받는 자이며 경멸 받는 자의 노래, 대지가 받아 적는 어둡거나 환한 문장이라는 걸, 나는 말하지 못했다.
 
  순간의 영원 같은 꽃의 화엄에 양 날개를 묻은 투구벌레처럼 당신은 영원히 입을 다물 수 있나,
 
  사랑에 대한 최초의 예언서는 알지 못하지만 삼각형의 문장을 접는 당신의 입속으로 붉은 모가지가 툭, 떨어진다.
 
  곡선으로 피었다 곡선으로 지는 꽃,
 
  태양의 문신을 몸에 새긴 투구벌레는 검게 빛나는 도리아식 기둥을 숭배할지 모르지만 꽃의 신전을 삼킨 당신을 나는 지평선이라 부른다.
 
 * 2011년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시> 선정 작품.
 
<이선의 시 읽기>
 
  ‘꽃’을 노래한 시는 비유와 상징어로 이루어진다. ‘꽃은 ‘사랑’이다‘ 라는 등식을 대입한다면, 꽃은 시의 영원한 ‘은어’다. 위의 시의 ‘꽃’은 사랑에 대한 적나라한 표출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자동기술기법의 예리한 문장력으로 형상화하였다.
  위의 시의 구조를 분석하여 보자. 먼저 각 연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1연- 별, 나, 꽃, 꼭짓점, 투구벌레, 휘어지다
  2연- 곡선, 봉인, 죽음, 당신, 어둠, 별빛
  3연- 핀다, 경배, 경멸, 어둠, 환함
  4연- 순간, 영원, 꽃의 화엄, 투구벌레, 당신, 영원한 침묵
  5연- 사랑, 예언서, 삼각형, 당신 입, 붉은 모가지
  6연- 곡선, 피다, 지다, 꽃
  7연- 태양, 문신, 숭배, 신전, 당신 지평선
  위의 시 1-7연의 문장을 분석하여 보면, 제목 ‘꽃을 위한 예언서’는 ‘사랑에 대한 예언서’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 ‘시작, 행위, 배반, 소멸’까지 사랑의 모든 과정을 ‘7연’의 짧은 시 속에 완전하게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 놀랍다. 지금까지의 진부한 사랑론이 아니다. 구질구질 설명적이지도 않다. 사물이 말하게 하는 ‘표현주의’ ‘사물시’다. 사랑의 ‘상징성’과 ‘의미화’를 실현하며, ‘객관화’까지 실현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또 다른 구조는 반어적 표현법이다. 반어적인 사랑의 본질을 관통하였다.
  1연- 피다, 지다/ 2연- 어둠, 빛/ 3연- 경배, 경멸, 어둠과 빛/ 4연- 순간, 영원/ 6연- 피다, 지다/ 7연- 태양, 지평선
  
  강영은의 시는 위대한 <사랑 예언서>다. 구조와 표현, 철학이 있다. 사랑의 배반과 절정, 소멸을 다루면서도 대상을 향한 저주와 원망, 분노가 없다. 감각적 미의식이 객관화되었다. 각 연들은 ‘중의적 2중구조’로 표현의 극치를 이루며 연결되었다.
 
사라지는 길
 
 
박소원
 
 
저 속까지 마를 대로 마른 단풍잎
계절 끝까지 각자 한 가지 색만 쓰고 있습니다
 
전깃줄 위로 빈 가지를 세우는
덩치 큰 나무 밑에서
나는 몇 권의 일기장을 불태웁니다
 
벌겋게 달아오른 색만 쓰던 형은
결국 정신요양원으로
나는 멀리서 형을 보내는 길로 들어섭니다
 
바람이 붑니다 붉은 잎사귀들
솟구치는 불길 위로 뛰어내립니다
두툼한 내 일기들도
벌겋게 한 가지 색만 쓰며 사라집니다.
 
 
 
<이선의 시 읽기>
 
  지하철에 걸린 시를 읽으며, 어떤 연령층이 읽어도 이해되는 시, 그러나 졸렬하거나 유치하지 않은 시, 진정성과 감동이 있는 시를 목표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박소원 시에서 대중과 시인이 꿈꾸는 정직하고 쉬운 언어로 쓴 감동적인 시의 요소를 본다, 거기다 사유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위의 시는 쉬운 생활어로 씌어졌다. 구성도 단일하다. 어조도 ‘―습니다’체의 고백적 문체가 담담하다. 복잡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시의 감정은 복잡하다. 화자와 복잡하게 얽히고 꼬인 형의 ‘인생’이 있다. 진정성과 깊이가 있다. 가족사가 아프다.
  위의 시는 철저한 ‘사물시’다. 2연 전깃줄 위로 빈 가지를 세우는/ 덩치 큰 나무 밑에서/ 나는 몇 권의 일기장을 불태웁니다.부분을 눈여겨보자. ‘일기장을 불태운다’는 단순한 ‘그 사실’은 ‘정리한다, 청산한다. 잊는다. 버린다, 아프다’ 등 여러 ‘감정의 전이’를 파생시키며 연상작용을 한다. 독자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1연과 4연에서 보여주는 ‘색’에 대한 ‘사유’도 힘 있다.
 
  저 속까지 마를 대로 마른 단풍잎
  계절 끝까지 각자 한 가지 색만 쓰고 있습니다(1연)
 
  두툼한 내 일기들도
  벌겋게 한 가지 색만 쓰며 사라집니다.(4연)
 
  다음, 4연으로 구성된「사라지는 길」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1연의 중심어― 단풍잎, 색
  2연의 중심어― 일기장을 불태우다
  3연의 중심어― 형, 정신요양원
  4연의 중심어― 바람, 붉은 잎사귀, 일기, 색
 
  이 시의 중심어를 압축하면 ‘일기장-형-정신요양원-색’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박소원 시인은 화자를 여성인 ‘언니’를 버리고 남성인 ‘형’으로 치환하였다. 상담심리에서는 ‘성’을 바꾸는 것을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해석하여 정신병 증후군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정신분석적 심리분석 시각으로 보면 ‘정신요양원’과 ‘형’은 밀접한 관계성을 가진다. 위의 시는  ‘설명적이지 않’다. 시시콜콜 ‘형’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놓지 않았다. 시를 읽는 독자는 아픈 형을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여, 소설보다 긴 스토리를 재구성하며 궁금해 할 것이다. 단절이 주는 극적인 효과다. 아직 다 타버려 재가 되기 전에, 일기장에 남아있는 곧 사라져버릴 ‘색’에 대한 비밀들을 들추어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시는 가지치기를 할수록 선명해진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가족관계’의 ‘상처’를 시인은 홀로 꽃 피우려 애쓰고 있다.
  박소원 시의 저력을 느낀다. ‘클로즈업’과 ‘가지치기’ 기법, 12행의 짧은 시가 주는 파장이 깊고 선명하다.
 
나무의 외출
 
김용언
 
 
달력 몇 장이 뜯겨져 나가고
시침 몇 개가 부러지고
드디어 초침까지 곤두박질 친 후
나무 꼭지에는 서너 개의 바람이 펄럭인다
외롭다는 건
나무가 나무 밖의 세상에 서 있을 때였다
 
여름이 농익을 무렵 화려하던 나무는
뱀의 허리처럼 구불거리고
드디어 가까운 길도 아득해진다
 
외출을 시작하려나 보다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몇 장의 마지막 메시지에 마침표를 찍고 있다.
이젠 시퍼렇게 날이 선 고독을
아침 인사처럼 받아들일 모양이다
 
가을로 서 있는 나무
이미, 나무는 나무 밖의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이선의 시 읽기>
 
  나무는 고정된 ‘장소’를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식물’이다. 그러나 나무가 고정된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나무에게 ‘시간’이라는 절대상황을 부여하면 ‘움직임’을 시작한다. 「나무의 외출」이 시작되는 것이다.
  첫째, 위의 시는 1-4연에서 식물인 나무에게 ‘시간의 흐름’이라는 변수를 주어 나무의 ‘환경’과 ‘형태’를 바꾸고 있다.
  1연 1-3행: ‘달력 몇 장이 뜯겨져 나가고/ 시침 몇 개가 부러지고/ 드디어 초침까지 곤두박질 친 후‘
  2연 1행: ‘여름이 농익을 무렵’
  3연 3행: ‘몇 장의 마지막 메시지에 마침표를 찍고 있다’
  4연 1행: ‘가을로 서 있는 나무’
  
    둘째, 위의 시의 주제는 ’외로움과 고독‘이다. 중심어를 살펴보자,
  1연 4-6행:  ‘서너 개의 바람이 펄럭인다/ 외롭다/ 나무 밖의 세상에 서 있을 때’
  2연 3행: ‘가까운 길도 아득해진다’
  3연 4-5행: ‘시퍼렇게 날이 선 고독을/ 아침 인사처럼 받아들일 모양’
  4연 2행: ‘나무 밖의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셋째, 위의 시는 ‘겨울 —> 여름 —> 가을’로의 시간이동 과정에 따라 나뭇가지와 줄기는 자라 ‘장소이동’과 ‘형태변화‘를 동시에 진행한다. ‘시간’은 나무를 자라게 하고, 추위에 떨며, 나뭇잎을 떨어뜨리게 한다.
   시인이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시간이동’은 ‘공간이동’을 유도하여, 운동감을 준다. 또한 위의 시는 상황만 제시하고 있을 뿐, 설명적이지 않다. 생의 허무와 고독을 가장 잘 표현한 ‘나무는 나무 밖의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는 문장은 압권이다.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는 표현법은, 낯설고 직관적이고 아름답다.
 
시와 섹스
 
김용오
 
나에게 있어서의 시는
본능적으로 즐기는 섹스와 동일하다.
정갈한 저녁상을 물려놓고
감미로운 서정의 음악을 들으면
조금씩 발기하는 나의 남성.
햇빛을 물고 빤짝거리는 나무들의 잎새나
빗물에 씻긴 푸른 산빛의 황홀을
한순간 따뜻한 어둠 속에 엎드려 맛보는
알몸의 정사,
나에게 있어서의 섹스는
정신적으로 즐기는 시와 동일하다.
질척거리는 일상의 골목길을
잠시 잊어버리고
조용히 앉아서 마시는 한잔의 블랙커피,
수도하는 선승처럼
불켜진 한밤의 집중의 침실에서
꼭 다문 침묵의 혀를 빨면
조금씩 밝아오는 영혼.
온몸을 끌어안고 뒤척이는 여자들의 신음소리나
부르르 흐느끼는 허벅지의 짜릿함을
한순간, 하얀 종이 위에 엎드려 느껴보는
언어의 정사.
나에게 있어서 시와 섹스는
서로 두 손 잡고
한 몸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같다.
 
<이선의 시 읽기>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티우스는 쾌락과 배설을 시의 효용성으로 정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배설이다”
   로마의 서정시인 호라티우스(Horace)― “시는 심미적 쾌락과 교훈을 준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다간 두 석학은 다르지만,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작년에 작고한 김용오 시인의 ‘성담론’을 화두로 ‘성’과 ‘시’의 상관관계를 논해보자.
   물리적 배뇨작용과 ‘성’적 배설작용은 모두 카타르시스를 준다. 시에서 느끼는‘심미적 미의식’과 ‘감각적 흥분’도 카타르시스를 준다. 창녀와 연애를 하든, 수녀나 승려를 짝사랑하든 사랑의 본질은 같다. 호기심과 쾌감이다. 손으로 만지는 쾌감인가? 눈으로 만지는 쾌감인가?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담론 ‘시’가 성공하는 이유는 만유공통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교묘하게 섹슈얼리즘을 은밀하게 표현한다. 특히 ‘시 쓰기’에 대한 ‘성적 환타지’는, 정절을 내세우며 음탕하게 숨어서 읽는 <춘향전>처럼 은밀한 쾌락의 극점이 있다. 발가벗은 시어들은 오감을 자극한다. 심미적 자극과 쾌감을 준다.
  필자도 잘 생긴 육체보다는, 샤프한 지성에 오르가즘을 느낀다. 육체를 가진 이성보다, 자기중심적이고‘자기애’가 강한 시인들의 기질 탓일 것이다. 암수 한 몸의 ‘달팽이’처럼. ‘시 쓰기’는 자위행위의 고급스런 변형된 형태일지도 모른다. 강한 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한다. 힘은 아름다움이다. 고대 선사시대부터, 여자들은 동물과 싸워 먹이를 잘 구하는 사내를 추켜 세웠을 것이다. 힘은 어느 시대에나 삶의 근본이며 가장 큰 효용가치를 가지고 있다. 둘째로 강렬한 물리적인 힘은, 무용가나 미스코리아처럼 자기 몸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직접적이며 강렬하다. 배우도 자기 몸이 기업이다. 그 다음 부류가 손가락을 이용하는 미술가다. 그런데 시인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생각이 많다. 언어유희는 가장 추상적인 ‘생각놀이’다. 지치지도 않고 혼자 숨어서 논다. 생각이 육체를 지배하면 당연히 육체가 약해진다.‘육체’가 죽고, ‘생각’을 키운다. 위의 시의 화자 ‘나’는 시를 쓰면서‘알몸의 정사’(9행)‘언어의 정사’(22행)를 맛본다.
  미식가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찾아다니듯이, 시인은 ‘맛있는 언어’를 먹으려고 숲과 바다를 찾고, 바람과 비를 맞는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부족함이다. 결핍은 배고프다.‘욕구’를 숨기고 있다가, 가장 안전한 기회를 갈구한다. 그것이 혼자 노는 성이다. 아니, 사실은 ‘성’이 아니고 ‘성놀이’다. ‘유사 성행위’다.
관능과 성에 탐닉한 김용오 시인은 사실은 성에 가장 약한 남자였을 수도 있다. 강렬한 욕구는 결핍과 불만족에서 발기되기 때문이다.‘햇빛을 물고 빤짝거리는 나무들의 잎새나/ 빗물에 씻긴 푸른 산빛의 황홀’(6-7연) 은 거세된 가장 정갈한 유사 성행위다. 승려나 신부의 섹스와 같다. ‘욕구’와 ‘배설’이 ‘한 몸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같다.’(마지막 행) 갈등이 성욕을 자극한다. 지치지 않고 시에 흥분하게 한다.

무성의 입술
 
위상진
 
석고상은 붉은 입술로
일렁거리는 말을 한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
 
잠에서 깨어나자
그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진다
회색 피가 흘러나오는 제라늄 화분
그는 입술을 더듬어 본다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
 
낮에도 밤은 여러 번 찾아왔고
휘어지는 길을 따라 아침은 사라졌다
간호사들은 오늘 죽은 사람의
생일 케잌을 우물거린다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
 
밧줄에 묶인 채 거꾸로 올라가는 간판
창밖의 검은 태양은
바닷물 색을 울컥 울컥 쏟아내고
간판이 있던 자리 공중에 걸린 둥지 하나
어린 새의 솜털이 묻어 있다
 
구름그림자를 덮어쓴 간판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는다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
 
그는 유리창 위에 입술을 벙긋거린다
한 단어 한 단어 말의 입김이 번진다
 
 
<이선의 시 읽기>
 
  필자가「무성의 입술」을 논평하는 이유는, 필자가 주장한 시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시론은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한 행에서 단어와 단어의 낯설게하기, 어절과 어절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를 완벽하게 실현하여, 자기 이름의 상표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필자의 시론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또한 시를 쓸 때 ‘제목, 단어, 표현, 비유’에서 닮은 표현을 피하기 위한 고민을 필자도 한다. 누군가의 시에서 읽은 것을 ‘무의식적 표절’을 할까 두려워 새로운 ‘표현’을 버리기도 한다.
  위상진 시인은 그럴 때 ‘인터넷 검색’을 하여 검증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위상진 시인의 시 특징은 사동보다는 피동적 표현기법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는 그 경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6개의 연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제목의 낯설게하기, 행 안에서의 단어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그믐달 마돈나』에 실린 다른 작품들처럼, ‘한 연 내에 여러 개의 파생된 보조관념’이 등장한다. 부채살처럼 여러 개의 보조관념이 마디마디 퍼져 있다.   
  <낯설게하기 기법>은 1980년대부터 양준호가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을 도용한 ‘단어 흩뿌리기’ 표현기법을 구사하여 ‘행과 행’,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를 이미 보여주었다. 그러나 위상진은 ‘객관화’와 ‘재해석’ 특징을 추가하였다.
  또한 표현주의를 추구하지만, 감각적 미의식과 진정성이 엿보인다. 아래의 대사는 거짓이 아닌 참이다. 작가의 목소리든, 화자의 생각이든, 3인칭 타자의 무의식을 차용하였든, 진정성이 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무 말이나 좀’(1연)
  ‘좋은 말을 해본지가 오래 되었어’(2연)
  ‘나는 내 맘에 들고 싶어’(3연)
  ‘내가 벗어둔 집에게 인사를 한 적이 없어’(5연)
 
  자동기술기법으로 연과 연을 단절하고, 흐름을 끊어주지만, 객관화에 집중하였다. 또한 ‘제목’과 ‘마지막 끝연’의 ‘끝행’에서는 반드시 객관화를 실현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지나치게 집중한 ‘낯설게하기’가 산만하거나 복잡하거나, 통일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의적, 다의적 ‘표현주의’ 기법은 새로운 ‘심미적 미의식’을 만들고 있음에 주목한다.
 
장자론壯者論
 
차영한
 
 
지리산에서 줄 없는 낚싯대로
떡갈나무 숲 가실거리는 파도 사이
농어를 낚고 있다 짙푸른 절정의 깊이에서
한없이 헤엄치는 물살 쪽으로 내던져
흔들리는 만큼이~나 휘어진 낚싯대를
힘차게 끌어당기는 좌사리, 치리섬들
산머루 같은 눈매로 달려온다.
가뭄에 탄 골짜기가 소낙비를 마시듯
얼큰한 내 술잔 안에서 파닥이는 지느러미
오호라 저것 봐 내뿜는 눈부신 꽃 비늘 튄다.
컥컥 미늘을 물어뜯는 욕망덩어리 떼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흥건한 땀방울 맺힌
생소금에 툭툭 떨어진다. 이것 봐
석쇠에 굽고 회를 치는 칼빛 웃음소리
내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는 새빨간 아가미
다시 짓누르는 하늘 한 자락 들썩이다가
갑자기 내 숨소리를 빼앗아 먼 산맥 굽이치게
파도 소리는 떡갈나무 숲 물고기 떼를 휘몰아
펄떡펄떡 뛰며 가로질러 헤엄치고 있다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장자론壯者論」이라는 제목과 시 내용에서 장자의 ‘이도관지以道觀之’의 범신론적 자연주의 향내가 물씬 풍긴다. 또한 ‘이미지의 극점’을 만난다. 시각과 청각과 미각을 동원하여 오감을 자극하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리산 단풍과 가랑잎이 바람에 쏠려 구르고, 떠다니는 모습을 <바다- 좌사리- 치리섬- 농어떼>로 이미지화하였다. ‘나’라는 화자는 무아지경의 풍경 속으로 감정이입 되어 무아지경이다. <장자론> 시 제목과 ‘산’과 ‘나’와 ‘물고기떼’가 하나로 선경을 이룬 모습이 조화롭다.
  차영한의「장자론壯者論」의 구조는 ‘지리산-나-나와 지리산’ 이라는 3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1부 1-10행(감상자 시점), 2부 11-15행(적극적 개입자 시점), 3부 16-19행(나와 자연의 합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차영한의 ‘장자론’은 장자의 ‘자연주의’에서 진일보하였다. ‘자연’을 향한 ‘나’의 적극적 개입을 주목하여 보자. ‘나’라는 주체는 식물성이 아니라 동물성이다. 생존과 번성을 위하여 약육강식을 하는 ‘욕망’ 덩어리다. ‘지리산 물고기 떼’ 이미지를 감상하는 모습도 적극적이다. ‘눈’으로만 감상하는 시적거리가 먼 ‘관찰자 시점’이 아니다. ‘입’으로 ‘먹음’으로써 더 직접적으로 자연에 개입한다. ‘생소금…, 석쇠에 굽고, 회를 치는’ (13-14행) 감상방법은 얼마나 감각적이고 육감적인가? 이보다 더 멋진 적극적인 자연감상 자세가 있을까?
  3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풍경을 먹다가 평정심으로 돌아간다. 나를 자연에 풀어놓고 있다. ‘내 숨소리- 파도소리- 물고기 떼'가 합치된다.
 
   짓누르는 하늘 한 자락 들썩이다가
   갑자기 내 숨소리를 빼앗아 먼 산맥 굽이치게
   파도 소리는 떡갈나무 숲 물고기 떼를 휘몰아
   펄떡펄떡 뛰며 가로질러 헤엄치고 있다
 
  차영한은 위의 시에서 <장자론>이라는 제목에 맞는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미지>의 바다를 헤엄치다가 풍랑에 휘말려 독자도 함께 표류한다. 장자의 무아지경의 자연에 합치된 나. 이미지가 맛있다. 지리산을 꼭 한번 먹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플라스티네이션 4
 -조용한 증인
 
                                               김해빈
 
 빛을 삼켜버린 전시실 
 창백한 남자 그리고 나
 거리는 1m도 되지 않았다
 
 두근거리며 피를 내뿜던 심장과 날카롭던 시신경 그를 둘러싼 미세한 세포들
 모두가 한 발 건너 조용한 증인으로 섰다
 
 웃음이 빠져나간 텅 빈 두개골과 횡간막 사이
 남자의 목소리는 납덩이로 굳어있다
 어느 기억을 가리키는지 손끝은 하늘을 향하고
 중추신경과 말초신경마저 끊어버린 몸짓은 완전한 균형이다
 
 수만 번 손끝으로 요일과 날짜를 새던 그의 네트워크
 쏟아지는 정보를 찾아 시신경보다 빠른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는지도 몰라
 
 주검 앞에 껍질을 벗어 버린
 그의 선홍빛 근육에서 자유에너지가 불끈 솟구친다
 
 
 * 플라스티네이션: 인체 플라스티네이션(Plastination)은 1977년 독일의 해부학자 "군터 폰 하겐스" 박사에 의해서 처음 연구 개발되었다. 시체에서 수분과 지방을 깨끗이 제거하고 실리콘 고무 에폭시나 플라에스테르 합성수지 등을 주입해 통통하게 살아있는 듯 그 상태로 영구 보존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선의 시 읽기>
 
  김해빈의 시는 구조화에 집중하고 있다. 1-5연의 시들이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객관화되어 있다. 또한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에 주목하여 보자. ‘사물’과 ‘사실’ 사이에 객관화된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다.
  화자인 ‘나’는 ‘1m 거리’(1연)방경 내에서 대치하고 있는 ‘플라스티네이션 남자’를 증언한다. 혹은 변명하고 싶은 것일까?
  시인의 무의식은 ‘창백한 남자’(1연 2행)의 현존했던 삶을 재생시켜 구조화하고 있다. 그 남자가 살아있을 때의 실재적인 몸- 피, 심장, 세포(2연), 두개골, 횡간막, 중추신경, 말초신경(3연), 시신경(4연), 껍질(살갗), 근육을 상상력은 재현한다.
  또한 그 남자의 생활도 복원해 본다.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는/ 손끝’(4연 1-2행)과 ‘자유에너지’(5연 1-2행)를 인지한다. 5연에서 화자인 ‘나’의 ‘플라스티네이션 남자’를 향한 욕망을 읽는다.
 
  주검 앞에 껍질을 벗어 버린
  그의 선홍빛 근육에서 자유에너지가 불끈 솟구친다’(5연 1-2행)
  
  과학이 재현한 인물, 즉 ‘대상’에 대한 관찰과 관심은 시의 본질이다. 또한 죽은 남자를 향한 연구와 분석은 시인의 ‘대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다. 여기에 ‘욕망’과 ‘욕구’를 결합하여 주면 ‘시적 에너지’가 증폭된다. 비록 ‘주검’으로 변한 인간, 무생물화하여 단지 ‘사물’인 인간도 관심을 받으면 ‘생명력’과 ‘에너지’를 갖고 힘을 얻는다.
  뼈대가 단단한 김해빈의 시를 읽으면 남성적 에너지가 느껴진다. 무리하지 않은 수사가 ‘현실’과 ‘현재성’을 강조하며, 생장하는 힘을 느끼게 한다.
 
 페르시안 인체신경총
 
                                김백겸
 
  페르시아 의사들이 온 몸을 해부해서 그려놓은 고
대의 인체신경지도를 보았다
  노란 장기들과 파란 핏줄들을 배경으로
  붉게 그린 신경들은 가슴을 발화점으로 피어오른
불꽃이었다
  온 몸을 의식으로 채운 불꽃들은
  몸을 용광로처럼 태워 그 빛을 사방으로 보내고 있
었다
 
  빛이 닿는 범위가 나였다
  나의 빛은 눈과 귀와 입과 항문과 정수리에서 닫히
고 매듭으로 꼬여 세계와 나의 분별을 만들어냈다
  이 빛들이 매듭을 풀고 세계의 끝까지 실패의 명주
실처럼 풀려나가는 날
  몇 억 광년 밖의 별들의 소식이 풀잎 같은 떨림으로
내 가슴에 전해지는 그 때
  나는 곧 세계가 될 것이었다
 
 
<이선의 시 읽기>
 
  김백겸의 『기호의 고고학』시집은 경전이다. 예언서다.
  칼릴 지브란이 윤회하여 폭포수 아래서 다시 들려주는 외침이다. ‘물소리’와 뒤섞인 ‘진리의 소리’를, ‘듣는 자’가 ‘언어의 기호’를 가려내어 해독해야 한다.
  ‘시’와 ‘부처’와 ‘태양’과 ‘인간’이 하나인 빛의 세계. ‘욕망’과 ‘육욕’과 ‘문명’이 하나의 DNA인 어둠의 세계. 작가는 신의 혜안으로 ‘인간현세’와 ‘내세’와 억만년 전 ‘전세’를 <페르시안 인체신경총>처럼 요약하고, 재해석하고 있다.
 
  작가의 의식은 항상 깨어 ‘온 몸을 의식으로 채운 불꽃들은’(1연 6행) ‘그 빛을 사방으로 보내고 있’(1연 7행)다.
  ‘나’는 ‘빛’이다.(2연 1행)
  ‘나’는 곧 ‘세계’다.(2연 8행)
  작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신’의 입장으로 거대안목으로 시를 쓴다.
 
  작가의 의식은 자연의 섭리를 관찰하고, 인간본질을 관찰한다. 자신을 법안으로 꿰뚫는다.  ‘나의 빛은 눈과 귀와 입과 항문과 정수리에서 닫히고/ 매듭으로 꼬여 세계와 나의 분별을 만들어냈다’(2연 2-3행) 작가가 말하는 ‘분별’은 ‘진리’를 득도한 상태다. ‘눈’은 혜안, 지식과 지혜다. ‘귀’는 ‘들어주는 마음’으로 임금의 백성을 향한 열린 마음과 연민이다. ‘항문’은 욕망이다. ‘항문’을 닫는 것은 ‘욕망의 절제’다. 욕심과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면 이미 ‘성인’이나 ‘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정수리’는 몸의 ‘중심’이다. 머리는 몸의 가장 윗부분, 이상과 현실을 중재하는 곳이다. 이 모든 이치를 ‘매듭으로 꼬’아 (2연 3행) 분별하는 ‘나’는 바로 신이다.
  위의 시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빛’인 진리는 작가가 현실과 시에서 추구하는 테마다. “나”는 ‘데미안’이며, 부처며, 예수다. 작가의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예지는 영원하리라’고 믿는다. 스케일이 큰 예언서 같은 작품에서, 고대인들이 고인돌 앞에서 갖는 경건함을 느낀다.
 
이선의 읽기- 최서진
 
분꽃들
 
최서진
 
떨고 있는 새들의 늦은 오후가 풍금소리처럼 모인다
비로소 피어나는 분꽃들
엄마의 독백이 화단으로 흘러가 비를 맞는다
 
무거운 침묵이 꽃밭을 가득 메울 때 왼쪽으로 꺾이는 얼굴
엄마는 화단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엄마 가지 마세요, 우리는 아직 꽃일
 
꿈을 조절할 수 없어 목이 자랐고
비가 내리지 않는 오후에는 벌레처럼 서로를 갉아 먹었다
 
언니들은 풀처럼 빨리 자란다. 엄마를 닮아가기 위해 짙어지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별들은 여러 각도에서 몸을 부딪쳐 왔다
 
나는 어두운 화단을 걸어 나가고 싶은 얼굴로
날마다 분명해진다
 
꽃잎이 모르는 단어처럼 흩어진다 쓸쓸한 화단 끝에 매달려 잘 발음되지 않던 꿈
풍경을 기억하던 잎들이 하나 둘 떨어져 질문처럼 쌓인다
 
언니들의 얼굴로 발음해 다섯 시에 피는 배고픈
 
분꽃이 지는 쪽으로 여름과 저녁이 태어나고
나는 분꽃으로 중지 된다
 
 
 
<이선의 읽기>
 
최서진은 위의 시에서 새로운 패턴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 창작 기법>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10연으로 구성된「분꽃들」은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신선한 감각적 자극을 준다. 그러나 연과 연들은 분리되지 않고 <나-어머니- 언니>라는 대상을 ‘분꽃’으로 치환하여 연결시키고 있다.
  위의 시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1연- 엄마의 독백, 분꽃
  2연- 엄마, 화단
  3연- 엄마 가지 마세요, 우리는 어린 꽃
  4연- 서로를 갉아 먹었다
  5연- 언니, 풀, 엄마를 닮아 짙어지고
  6연-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7연- 나는 어두운 화단을 걸어나가고 싶다
  8연- 꿈, 질문
  9연- 언니들 얼굴, 배고픈 꽃
  10연- 나는 분꽃으로 중지된다
  <어머니- 언니- 나>로 이어지는 ‘가난’과 ‘분꽃냄새’는 멜로적 요소를 가지며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짐작할 만한 뻔한 가족사가 진부하지 않은 것은 시의 품격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묘사력과 사유,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정성이 주는 힘이다.
 묘사- ‘떨고 있는 새들의 늦은 오후가 풍금소리처럼 모인다’(1연 1행)
 사유- ‘꿈을 조절할 없어 목이 자랐고’(4연 1행) ‘분꽃이 지는 쪽으로 여름과 저녁이 태어나고’(10연 1행)
 진정성-‘비가 내리지 않는 오후에는 벌레처럼 서로를 갉아 먹었다’(4연 2행)
 당위성- ‘나는 분꽃으로 중지 된다’(10연 2행)
 
   객관화된 소설의 묘사기법을 사용한 피동적 고백체 문장도 눈길을 끈다.   ‘떨고 있는 새들의 늦은 오후가 풍금소리처럼 모인다/ 엄마의 독백이 화단으로 흘러가 비를 맞는다’(1연 1, 3행) ‘풍경을 기억하던 잎들이 하나 떨어져 질문처럼 쌓인다’(8연 2행)
   
  위의 시는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를 잘 적용하였다. 그러나 문장들은 산만하지 않고 일맥상통하게 읽힌다. 그 이유는 복합 문장구성을 하고 있지만, 각 문장들이 객관화되었기 때문이다.
 
君子三樂*
 
 
우 원 호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왕도王道를 바랐던 이천 년 전의 맹자孟子의 말씀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를 향한 효심과 형제간에 우애가 깊지 않음이 첫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버림이 두번째 즐거움이요
 
후학後學들 모두에게 존경尊敬받지 않는 삶을 사는 일이 세번째 즐거움이다
 
'오늘날의 군자君子는 자본가로 성공한 사람을 일컫는다'라고
 
역사가들이 말할 것이므로……
 
*군자삼락君子三樂: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인 맹자(孟子 B.C. 372~B.C. 289)가 《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서 이른 말로 君子有三樂(군자유삼락)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
 
 
 
<이선의 시 읽기>
 
 
군자2 (君子)  



[명사]
1.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
2. 예전에,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을 이르던 말.
3. 예전에, 아내가 자기 남편을 이르던 말.
[유의어] 남편1, 현자1, 대인1
 
  우원호 시인은 군자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에, 군자를 언급하고 있다. 문학에서 ‘정치’나 ‘돈’을 언급하는 것은 고상한 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 같아 터부시하는 주제다. 80년대 독재에 저항한 ‘인권운동’이 NGO 활동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다. 그런데 우원호는  ‘시’에서 외면당하는 정치이야기와 ‘관념’의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륜’과 ‘사도’와 ‘사회문제’에 집중관심조명을 하고 있다. 패륜의 시대에 살고 있는 불쌍한 ‘시’, 우원호의 용기있는 ‘발언’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군자’라는 단어가 사양어가 된 것은, 현대문명사회에서 ‘군자’라는 존재가 사라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먼저 위에 제시한 ‘군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어질고 덕성과 학식이 높은 사람, 둘째 높은 벼슬을 한 사람, 셋째 남편을 지칭한다고 되어 있다. 벼슬을 한 사람은 어질고 덕과 학식이 높다는 명제가 생긴다.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이 예전에는 벼슬을 한 것이 사실이다. 예전 아내는 ‘군자의 자질과 조건’을 갖춘 남편과 살았다는 가설도 성립된다.
 군자가 사라진 뒤에 ‘선비’라는 단어가 그 뒤를 이었다. ‘선비’라는 단어에는 ‘꼬장꼬장하고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 문학의 깊이를 가진 학식, 인간적 품위를 가진 인성’이 함의되어 있다.
  현대는 선비라는 단어도 사라지고 ‘선생’이 난립한다. 모두 사장인 시대에 모두 선생이다. 좋은 일이다, 선생이 많으면 배움과 지식을 갈구하는 희망사회가 될 것이니까. 그러나 현대의 ‘선생’이라는 단어는 ‘컴퓨터 선생, 테니스 선생, 바이얼린 선생, 발레 선생, 미술 선생’ 등 기술적인 분업강사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전에 그 단어는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권위를 가진 때도 있었다.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은 ‘인성, 덕성, 지성’을 갖춘 선비정신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을 지칭한 단어였다. 그러나 ‘경제’와 ‘문명’과 ‘자본’의 원리가 현대사회의 최우선 구성요소가 된 이후로 선생도 돈으로 사는 시대가 되었다. 사립학교 교사 자리에 수천만원이 오가고, 강사와 교수 자리에 수억이 거래된다는 얘기가 신문지상에 올랐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가 수십억에 거래된다는 얘기도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금권시대다.
  물론, 핵가족 사회에서 이혼하지 않고 살려면 부모 형제와 독립하여 ‘아내’에게 충실하여야 한다. 처와 자식을 충실히 부양하는 가장이 되려면 기회주의자가 되어야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제자를 좋은 대학에 입학을 많이 시켜야 명문고다. 물론 대학도 취업준비를 위한 수련장이다. 좋은 대학친구의 우정은 기관에 포진하여 나눠먹기식 공생공존을 한다.
 
  우원호의 ‘무기교의 기교’ 시가 나른한 삼복더위에 한방 시원하게 펀치를 날린다. 잘 먹고 잘 살던 ‘시’가 주눅이 든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얼싸 반갑다고 껴안고 웃는다.
 
인간학 개론 4.
-말 ․ 말 ․ 말
 
이오장
 
뛰어가며 한 말
빠르다고 진실은 아니다
바람탄 말 물에 젖기 쉽고
입으로 물어온 말
뱉는 순간 부서진다
똑같이 한 말도
속삭였다고 가깝지 않고
강 건너 온 말 귓가에 잡으려면
많은 메아리를 재워야 한다
마주보고 한 말
눈으로 전했다고 색깔이 없을까
믿었다고 하는 대답
눈웃음이다
산 하나 넘을 때마다
울림으로 퍼지다가도
합쳐지질 못하고 휘돌아도
사그라지지 않고 퍼져가는
말. 말. 말
콩 심은데 콩, 팥 심은데 팥
혼자서 한 말도
굴러가면서 번져
말 심은 곳에 허물 돋는다
 
<이선의 시 읽기>
 
  시인은 ‘말’로 ‘시’를 쓴다. 말을 못하는 갓난아기가 하는 ‘말’은 생존에 필요한 ‘요구’와 ‘요청’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말’은 생존의 요구보다는 ‘설득’과 ‘변명’과 ‘거래’의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시인’의 ‘말’인 '시'는 더욱 발전하고 고품격화하여, ‘비유’와 ‘이미지’로 진화하였다. ‘다의성’과 ‘모호성’으로 점철된 시인의 말은 ‘사실’과 ‘사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화적이고 함축된 ‘시’의 ‘언어유희’는 몇 껍질 ‘의미 벗기기’를 하여 수수께끼처럼 ‘말’을 해독해야 한다.
  소쉬르는 말을 ‘기의’와 ‘기표’로 분리하여 정의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사물’에 옷을 입힌 것을 ‘이름’이라고 본 것이다. ‘이름’은 단지 ‘기호’라고 보았다.  ‘사물에 옷을 입혀 관념의 옷을 벗겨’ 감각적 미의식을 살려야 좋은 시로 인식된다. 대중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관념시’를 좋아하지만, 시인에게 관념은 독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경구절은, 태초에 ‘사물’이 먼저 존재하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뜻일까?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하나님은 사물을 짓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미지의 시대인 현대에는 단어는 이미지를 대신한다. ‘강, 바람, 산, 꽃, 구름’이라는 단어를 나열하면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진다. 계곡이나 강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진다. ‘바다, 파도, 갈매기, 돛단배’라는 단어가 나열되면 여름바캉스를 떠나고 싶어진다. 언어는 이제 ‘사물+느낌+행동욕구’까지 함의하고 있다.
  한국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가 지시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랑해’ ‘I LOVE YOU’ ‘愛’ ‘쥬뎀므’ 는 한 단어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사랑해’라는 말도 ‘사랑해’라고 아기가 엄마에게 말하면 애교로 인식된다. 여고생 딸이 아빠에게 말하면 ‘용돈’을 더 타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이 젊은 처녀에게 말하면 그 말은 ‘키스해도 돼?’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노인이 노파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맛있는 밥을 줘서 고마워요’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한국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말의 다의적인 측면을 잘 나타난 말이다. ‘사물’ 앞에 서서 ‘이것’이라고 지시하며 가리켜도, 각각의 사람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오장의 시에서 ‘말 ․ 말 ․ 말’은 ‘전달’과 ‘해석’의 오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의 해석적 시각으로 말을 분류하였다. 말은 사람의 수만큼, 아니 각 사람의 생각의 갈래만큼 여러 가지로 저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위의 시에서도 ‘뛰어가며 한 말, 바람탄 말, 입으로 물어온 말, 뱉는 말, 똑같이 한 말, 강 건너 온 말, 메아리, 마주보고 한 말, 눈으로 한 말, 믿는다는 말, 눈웃음 말, 퍼져가는 말, 혼자서 한 말, 등 여러 말의 실례가 제시되고 있다.
  위의 시에서는 마지막 행에서 ‘말 심은 곳에 허물 돋는다’는 부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말에 대한 여러 정황을 제시하고 있지만, 결론은 간략하다.
  말의 종류는 ‘색깔’과 ‘맛’의 종류보다도 복잡하고 많은 것 같다. 위의 시를 발상의 전환을 하여 보면 어떨까? 혜안을 지닌 노시인의 눈이 아닌, 사춘기 소년의 시안으로 ‘말’에 대한 시를 썼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소년이 마음을 교환한 사랑하는 소녀에게 보내는 시라고 상상해 보라. 소년에게 ‘말’은 ‘믿음+신뢰+희망’이다. 말은 ‘호기심+친밀함+사랑’의 감정이다. 소년에게 있어서 말은 어른보다 천배, 만배 긍정적인 힘을 가질 것이다. 소년이 가진 ‘말’의 ‘상상력’과 ‘환타지’는 우주까지 뻗어나가리라. 그 시는 분명 긍정적인 시가 될 것이다.
  어린이 때는 ‘눈빛 언어’도 호소력이 강하다. 그러나 청년기를 지나고 기성세대인 어른이 되면 ‘습관성’과 ‘의도성’이 과다 표출되어 ‘말’은 ‘신비주의’의 옷을 벗는다. ‘냉정’과 ‘배반’과 ‘모순’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폭력성’을 갖는다.
  이오장 시를 읽으며 심도있는 자성의 질문을 해 본다. 말의 ‘매력’과 ‘마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말이 ‘호기심’과 ‘매력’을 잃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별 닦는 나무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는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물이 들어
삶이 지고 싶은 나를
 
 

 
 
<이선의 시 읽기>
 
 
시인이 원하는 시의 정점은 어디인가? 작품이 대중에게 사랑받고, 시인에게 인정받고, 평론가에게 선택되는 것. 또한 문예사조와 역사에 거론되는 것. 작가 사 후 50년 백년이 지나도 석박사 논문으로 조명하고 연구되어지는 것. 쉬운 시, 감각적 미의식이 있는 시, 진정성이 있어 대중들이 유치하지 않은 시. 무기교의 기교, 은밀하게 기교를 숨긴 작품성 있는 시를 지향할 것이다.
  어제 새벽 4시 20분쯤 잠이 깨어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가지들이 휘늘어져, 나의 방,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는 별 사이로, 밤벚꽃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별꽃을 보았다. 앞집 빌라, 수능을 코앞에 둔 입시생도 잠든 시간. 모든 사물이 숨죽인 공간, 홀로 별꽃 피어 빛나고 있었다.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빛을 밝히는 걸 목격했다.
  공광규 시인의 『별 닦는 나무』는 대중이 좋아할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선 대중이 좋아하는 ‘사랑 시’라는 거다. 쉽다. 진정성이 있다. 시인이 읽어도 유치하거나 작품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석박사 논문으로 연구될 새로운 구조와, 문예사조를 바꿀 표현 기교를 가지고 있는 반전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을 작품이다.
  
  이시의 백미는 1연의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 되나’ 부분이다. 은행나무와 나를 치환하고 있다. 이 시의 또 다른 매력은 ‘진다’라는 주제어다. 
  ― ‘뜨는 별’은 당신에게 양보하고, 나는 ‘지는 나뭇잎’을 택하겠다는
  
  공광규의『별 닦는 나무』를 여러 번 다시 읽는다. 순수하다. 여과된 사랑의 감정이 느껴진다. “이 사람, 사랑을 하나?” 작품과 작가가 오버랩된다. 그 대상이 아내라면 더욱 좋겠지만, 남의 아내라고 하여도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 사랑은 별처럼 서로를 빛낼 것이므로. 흔들리지 않는 은행나무가 되어, 큰나무가 되어 별처럼 빛나는 내 여자의 길을 닦아 주고 싶은 것. 더 반짝거리게 하고 싶은 것. 질투하지 않는 사랑.
  용문사 은행나무를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고, 필자는 졸시『보들레르와 은행나무』를 썼다. 몇 년 뒤, 가을에 용문사를 찾아 대웅전 앞 천년 은행나무를 찾아갔다. 시에게 미안해서다. 하늘을 찌르는 은행나무는 감탄과 감동이라는 말로 부족했다.
  신성을 느꼈다. 그 은행나무를 먼저 만났다면, 다른 시를 썼을 것이다. 그 시는 매우 짧을 것임. 서양풍의 세련되고 감각적인 긴 ‘고백록’이 아니다. 천년 동안 삭제한 나뭇가지. 지우고 지운 몸, 은행나무 그 여백의 지혜를 배울 것.
  공광규 시인의 ‘별 닦는 나무’를 용문사 은행나무 ‘답사기’, 또는 ‘감상문’ 이라 이름하여 본다. 조지훈과 박목월처럼 화답가를 쓰고 싶은 욕구. 소곤소곤 대화 같다. 밤에 쓴 부치지 않은 편지. 답장을 하고 싶은― 짧고 아름다운 시, 결코 쉽지 않은 언어장치. 진정성이 주는 멋스러움.
 
새벽강
 
 
 
 강정화
 
 
 
 어둠에 단잠 못 이룬 밤
 
 벅찬 삶의 무게에 짓눌려
 
 눕지 않은 그림자로 가부좌 틀고
 
 아득한 외로움에 면벽하다
 
 앉은자리 저편으로 두런 두런
 
 훌쩍거리는 물의 혼령 만났네
 
 
 
 길 찾는 머나먼 행군으로
 
 잠들지 못한 물들의 속앓이
 
 낮게 몸 낮추어도 기죽지 않고
 
 입다문 침묵으로 속내 나누면
 
 느리지만 서두르는 법 모른 채
 
 
 
 분노에도 일어서지 않는 낮은 자세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돌고 돌아
 
 꺾이어 상처 나도 혼자 이겨내며
 
 여명의 새날 기다리며
 
 차디찬 이슬로 이마 훤히 씻은
 
 의연하게 흘러온 장한 물결 맞이할 때
 
 서둘러 달려나가
 
 장한 모습 버선발로 맞이하리라.
 
 
 
<이선의 시 읽기>
 
 
 
 강정화의 「새벽강」은 시인이 시와 접신하는 과정을 거짓없이 보여준다. 1연은 <불면- 벅찬 삶의 무게- 외로움과의 면벽- 시의 혼령과의 만남>이라는 시가 자연 발아하여 터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2연 3-5행에서는 시인의 기질을 본다. ‘낮게 몸 낮추어도 기죽지 않고/ 입다문 침묵으로 속내 나누면/ 느리지만 서두르는 법 모른 채’ 지치지 않고 시에 탐닉하는 시인의 모습을 본다.
 
  3연은 1-6연을 주목하여 보자. ‘분노에도 일어서지 않는 낮은 자세/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돌고 돌아/ 꺾이어 상처 나도 혼자 이겨내며/ 여명의 새날 기다리며/ 차디찬 이슬로 이마 훤히 씻은/ 의연하게 흘러온 장한 물결’ 부분에서는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시인이 겪는 심리상태와 시작과정의 어려움이 절절하다.
 
 
 
  시인의 나라는 불면의 밤을 지나, 외로움의 새벽강을 건너, 홀로 도착하는 그리움의 숲이다. 어두운 밤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숲에서 여우가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밤. 별빛 한 줌 나뭇가지에 걸려 그림자 얼비춘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는 밤에, 시가 첨벙첨벙 강물을 건너온다. 비로소 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밥보다 외로움이 맛있어야 시인이다.
 
입맞춤
    
           권 혁 모
 
삐치고 치켜 올린 선과 선이 다시 살아
연초록 혹은 연분홍 나래가 되기까지
허공을 마냥 날아서 너를 만나기까지.
 
진정 황홀 앞에선 천지도 눈을 감네
사랑은 길고 긴 날을 상형문자로 건너와
저것들 몸부림 끝에 새 별 하나 안더니.
 
고단한 삶이었네 당겨놓은 힘줄이
빛의 충돌이 일어나 보석으로 눈뜨는 밤
이제야 다 버렸으니 나와 단 둘이구나.
 
<이선의 시 읽기
   
  ‘입맞춤’이나 ‘포옹’이라는 제목을 읽으면, 조각상이 생각난다. 워낙 로댕의 조각작품이 유명하기도 하다. 시에서 실제적인 상상력의 그림이 그려지면 객관화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권혁모의 입맞춤은 상상력과 회화적 조각적 형상화가 만나서 환타지 현상을 재현하고 있다. 시각, 촉각적인 느낌과 재해석이 달콤하고 쌉싸름하고 뜨겁다. 화가나 조각가의 미술작품을 앞에 놓고 시를 쓰면 자주 이런 환타지한 시가 탄생한다. 시가 미술의 시녀라고 누군가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언어는 가장 추상적인 상상력의 과학이다. 미술은 직관과 재해석이다. 상상력에 직관과 재해석이 들어가면 사유의 힘이 커진다.
  ‘삐치고 치켜 올린 선과 선이 다시 살아’(1연 1행) 부분에서는 고궁의 높은 기와지붕, 처마와 처마가 만나는 날렵한 선이 비상하는 이미지를 준다. 2행의 ‘연초록 혹은 연분홍 나래가 되기까지’부분은 입맞춤이라는 달콤한 행위에 공상과 상상이 가미되어 ‘환타지’한 느낌을 살렸다. 그러나 객관화된 문장은 아니고 공상의 범주에 든다. 3행의‘허공을 마냥 날아서 너를 만나기까지.’ 부분에서는 이 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두근두근 마음속에 숨겨둔 ‘첫사랑’이든, ‘불륜’의 대상이든 실제적인 ‘사람’이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이 시는 1연에서 이미 공상과 상상의 모든 요소를 성공시키고 있다. 2연은 ‘상형문자- 몸부림’이라는 등식이, 곧 혀들의 몸부림을 형상화시킨 시의 백미다. 3연의‘당겨 놓은 힘줄, 빛의 충돌, 보석’이라는 중심어는 이 시를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3연의‘ 이제야 다 버렸으니 나와 단 둘이구나.’부분은 영화의 대단원 부분이다. 피어리어다. 3연 3행의‘놓음’과 ‘버림’은 관념을 말로 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 관념이다. 
  이 시는 시를 배우는 이들에게 교과서로 권할 만큼 시에서 필요한 감각적 미의식과 형상화기법, 이미지, 공상과 상상력의 범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시인들이 시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객관화의 문제다. 그 이유는 ‘사물’에서 출발하지 않고 ‘상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시는 상상력의 ‘그림 그리기’작업이지만 그 상상력은 사물성에 근거하여 출발할 때만 객관화가 쉽다. ‘환타지’도 ‘귀신이야기’도 사물에서 출발한다. ‘별’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별들의 전쟁> 환타지 영화가 탄생하는 원리다. 
  권혁모의 시는 첫사랑 첫입맞춤처럼, 달콤하고 맑고, 새콤하고, 뜨겁다.
원초적 DNA를 다룬 성애 시는 대부분 성공적 결과물을 낳는다. 그 이유는
시인이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는, 생활 속에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자신의 몸을 사용한 현실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권혁모는 시에서 요구하는 직접적이고 절실하며 뜨거운 요소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부드럽게 포장하고 냉정하게 재단하는 객관화 기법까지 완벽하다.
 

 
대본: 최지하
 
M: 달빛이 차구나
D: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불가능 할까요 선인장 처럼요
M: 머리를 빗자
D: 물을 마셔야겠어요, 끈적끈적하게 내 몸을 흐르는 외로움을 씻어내야죠
M: 너를 거치지 않은 그리움이 어디 있느냐
D: 그가 뜨거운 그림자에 젖어 달에 잠긴 모래 위를 걷고 있어요
M: 사막에 아마란스가 피었단다
D: 그의 발바닥에서 방황하는 사막의 흔적을 지워줘야겠어요
M: 여러 개의 슬픔중 하나쯤은 떠나보내는 기쁨으로 채워보아라
D: 난 그의 안에서 잉태되었어요
M: 핑계 삼아 그 사막으로 너의 귀를 보내거라
D: 그의 꿈을 다 먹어버려 나를 몰라볼지도 몰라요
M: 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어둠이냐, 그림자이냐, 생각이냐
D: 개구리비가 올까요 그러고 나면 한 쪽 세상은 텅 비워질까요
M: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단다
D: 자꾸만 내 생각과 눈이 마주쳐요
M: 길목을 돌아갈 때 어느 쪽으로 가면 바다 일지 생각해 보았니
D: 내 발은 늘 붉었죠
M: 돌아갈 땐 늘 생각은 지난 일이 되어 사라진다
D: 누구를 탓하지는 않아요
M: 돌아올 땐 누구나 길에서 묻은 것들은 버리고 돌아온다. 그래도 길은 흩어지지 않는다
D: 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해요
M: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며 어둠을 손질하며 내일을 기다리지 마라
D: 계절이 지날 때마다 헛되게 버린 구두가 너무 많아요
M: 너의 발자국은 아직 너와 이별하지 않았어, 괜찮다
D: 그래요, 난 자주 아팠지만 절망이든 기대감이든 매끈한 것은 지루했어요
 
D: 저 바람에 모래가 들 것 같아요 문을 닫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M: 곧 아침이 올 터인데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이선의 시 읽기>
 
 최지하의 시는 엄마와 딸의 대사로만 이루어지는 2인 시극이다. 낯설게한 언어들이 파노라마처럼 곡선과 직선, 포물선을 그리며 무수히 흩어진다.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만나고, 뭉치고, 헤어진다. 마치 일상의 연인들의 이별처럼. 오래전 떠난 정서적으로 엄마를 떠난, 딸의 독백처럼. ‘Image Show’ 를 한다. 상상력의 공간이 확대될수록 갈등이 증폭된다. 그러나 엉뚱한 이야기 전개와 작위적인 단어연결과 이미지 충돌을 한 행에서 다 보여주고 있지만 내용이 허황되거나 산만하지 않다.  그 이유는 ‘상상력의 객관화’를 시에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질서정연하게 ‘질문’과 ‘대답’이 교차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독자들은 시의 선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시는 상담심리치료에서 문학치료-‘시 치료’의 한 패턴으로 인지할 수 있 수 있다. 모녀의 갈등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심리치료에서 ‘역할 바꾸기’ 상담치료 기법과 그 맥락이 같다. 극은 갈등에서 시작된다. 그 갈등을 증폭시켜 ‘상황극’으로 ‘보여주기’ 한다.
  1연 첫행에서 ‘M: 달빛이 차구나’라고 엄마가 먼저 말을 건다. 무차별적 대화를 ‘핑퐁’으로 주고받다가, 2연에서는 상황을 정리한다.
 
  D: 저 바람에 모래가 들 것 같아요 문을 닫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M: 곧 아침이 올 터인데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딸은 엄마의 ‘수용’할지 망설이고 있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은 상태다. 곧 엄마를 수용할 것이다. 엄마도 ‘곧 아침이 올 터인데’ 라며 희망메시지를 전한다.
  2연 마지막 행에서는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상황종료다.
   ‘딸’과 ‘엄마’가 동시에 현재의 상황을 ‘어둠’으로 인식한다. 상담심리치료에서 ‘직면화’라고 하는데 ‘어둠’의 현재를 ‘인식’하고 ‘직면’한다는 것은 ‘문제’를 인정한다는 거다. 문제를 인정하고 ‘치료’단계로 진입한다.
  ‘부케’는 자기 구원의 꽃이다. 부케는 한 송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 개의 꽃을 목을 잘라서 철사를 끼우고, 리본과 잎사귀, 구슬로 장식한다. ‘상처’와 ‘아픔’이라는 이름의 ‘꽃’에게 찬란한 ‘박수’로 치장하는 것이다. 상담심리치료의 완성, 치유의 단계다. 상처도 꽃이다. 시의 영원한 주제다.
  갈등의 구조, 엇갈리던 ‘질문’과 ‘대답’이 비로소 해결이라는 국면을 맞이한다. 문학치료는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 이론과 같다. 자아를 내려놓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은 3일 동안 거울을 바라보는 자라고 하였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 객관화된 시가 써진다. 그 사건 속에 풍덩 잠겨서 허우적거린다면 ‘토로시’나 ‘서정시’를 쓰게 된다. 아직 ‘감정몰입’ 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에서 ‘설명’을 완벽하게 제거한다면 ‘토막난 단어들의 연결’로 귀결될 것이다. ‘면서, 며, 고서, 고, 아서, 아’ 설명형 어미들은 시를 설명적 패턴으로 만든다.
 
  위 시에는 순례자의 기도 같은 ‘명상시’의 요소가 있다. 명상시의 조건은 ‘본질과의 만남’ 이다. 시에서 금기어인 ‘외로움, 방황, 천국, 내일, 이별’등 관념어가 자주 등장하여도 구태의연하지 않은 것은, 언어충돌 효과로 문장을 비틀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지만, 가장 갈등의 관계인 ‘딸’과 ‘엄마’를 대조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둘의 관계는 영원한 숙제다.  
  최지하의 극시의 매력은 엄마와 딸의 ‘진실대담’이다. 일상적인 언어를 걸러내고 영혼의 대화를 한다면 아마도 저런 대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가을의 노래
 
이수화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 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 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잎이 진다. 아침을 나서는 생활의 문턱에도 이름 모를 일년생(一年生) 초본식물(草本植物)이 잎을 떨구고,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 

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 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우리가 살아갈 누리에 낙엽이 져도 나의 기도(祈禱)는 낙엽과 더불어 흙이 되리니- 아아.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 가을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이선의 시 읽기>
 
  시인이라면 누구나 생애 단 한편의 대표작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이수화의「가을의 노래」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의 감상주의적인「가을날」이나, 릴케의 기도 시「가을날」과는 다른 품격과 내용, 철학, 시적 표현 방법으로 변별력을 갖는다.
  이수화의 「가을날」은 위의 시들보다 날선 감각과 표현이 있다. 또한 반성적 철학과 지혜를 갈구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1-5연에서 보여주는 아래 구절들은 ‘가을 이미지’를 ‘철학’과 ‘사유’로 승화시켰다.
  1연- ‘이 가을에는…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2연-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4연-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5연- ‘나의 기도(祈禱)는…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아래에 제시한 2연과 3연의 감각적 미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적 표현은 압권이다.
  2연-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 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3연-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
 
  아래에 제시한 4연과 5연은 자연의 섭리에 무조건 순응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갈등과 항거를 통해 배운 순리를 깨달은 자의 지혜가 번뜩인다. 가난도 아름다운 비움의 철학으로 빛난다.
  4연- ‘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 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5연-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수화의 「가을날」은 시인의 하늘로 높게 솟은 아름다운 ‘백발’처럼, 그의 내면이 범상치 않은 ‘개성’과 칼칼한 ‘직관’을 그의 ‘시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시는 그 사람이다’라는 등식을 확인한다.
  천상병의 「소풍」이나, 릴케의 「가을날」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쉽고 간절한 진정성과 삶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도 ‘잉걸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수화의「가을날」도 매력적인 ‘표현주의’ 적 기법이 맛깔스럽다.
 
마지막 본 얼굴
 
함동선
 
물방앗간 이엉 사이로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으로
피난길 떠나는 막동이 허리춤에
부적을 꿰매시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어떻게나 자세하시던지
마치 한 장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한 시오리 길이나
산과 들판과 또랑물따라
단숨에 나룻터까지 달렸는데
달은
산과 들판을 지나 또랑물에 먼저 와 있었다
어른이 된 후
그 부적은
땀에 젖어 다 떨어져 나갔지만
그 자리엔 어머니의 얼굴이 늘 보여
두 손으로 뜨면
달이 먼저
잘 있느냐 손짓을 한다
 
 
<이선의 시 읽기>
 
  황해도 연백 출생인 함동선 시인은, 월남한 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써 왔다. 『꽃이 있던 자리』『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것』『짧은 세월 긴 이야기』등 그의 여러 편의 시집에는 ‘어머니’와 ‘그리운 고향’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분단의 서러움을 몸으로 겪은 그의 시들은 진정성과 한이 서려 있다.
  함동선의 시의 특징은 ‘분단의 아픔을 객관화된 서정성으로 표현하여 파장과 울림이 크다. 위의 시도 함동선 시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본 얼굴」은 제목이 객관화되어 있다. 1-3연 ‘물방앗간 이엉 사이로/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은 황해도 연백의 차가운 날씨와 ‘새벽 달빛’을 치환하여 그림처럼 서늘한 풍경을 그린다. 또한 화자의 마음도 그와 같이 서늘함이 시를 읽는 이에게 전달된다.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은 거짓이지만, 정서는 참이기 때문에 객관화가 성립된다.
  「마지막 본 얼굴」은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를 4연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1-3행 배경, 4-13행 사건, 14-16행 선행사건 그 후, 17-20행 현재 심경>으로 내용중심으로 나누어 보자. 1연은 고아하고 조용하고 차가운 심미적 이미지로 화자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2연은 급박한 사건들이 위기감을 조성한다. 3연은 위기를 넘긴 뒤의 고단한 심경을 진정성 있게 그리고 있다. 4연은 현재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평생 막내아들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 말은 “잘 있느냐” 4음절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묻고 싶은 말도 같을 것이다. 50년 세월 동안 모자가 함께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과 대답이 있었을 것인가? 그 짧은 물음 밖에 할 수 없는 절대상황의 진정성이 아프게 전달된다.
  아직도 분단의 아픔은 계속되고, 서러움을 가슴에 묻고 사는 이들의 한이 달빛을 차갑게 식히고 있다. 함동선의 시련은 개인적으로 안타깝고 아픈 체험이지만, 그 아픔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움과 고독은 시의 화두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절절한 화두는 ‘이별’이다. 이 시는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몸으로 쓴 시다. 함동선의 시는 분단의 아픔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분류되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무슨 색깔이 나올까
 
조병무
 
저 바람을 손아귀에 쥐고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저 하늘을 양손에 쥐고
더욱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그러나
그러나
저 사람의 말씀을
마음으로 눌러 짜면
또 무슨 색깔이 나올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을 사랑으로 짜면
정말
무슨 색깔이 나올까
 
 
<이선의 시 읽기>
 
  조병무의 시 「무슨 색깔이 나올까」는 1-4연을 똑같은 무게감으로 병렬기법으로 질문을 던진다. <바람-하늘-말씀-사랑>을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라는 짧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유치하지 않다. 간단하고 단순한 물음이 근원적 의미의 질량을 가지고 무겁게 진정성을 추구하고 있다.
  1-2연의 질문은 ‘자연의 섭리’에 대한 물음이다. ‘바람’은 변화와 성장을 준다. ‘하늘’은 사색과 우주적 꿈을 심어준다. 남여상렬지사를 바람에 비유하는 것을 보면 바람과 인간의 삶의 근접성을 알 수 있다. 바람은 반란이지만 소통이다. 바람이 없다면 열매를 얻을 수 없다. 바람은 답답한 일상에 주는 활력소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한번이라도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거대한 그림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는 하늘은, 웅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우주의 섭리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현대과학이 밝히고 있다.
  3-4연의 질문은 ‘말씀’과 ‘사랑’으로 ‘인간의 섭리’를 다루고 있다. ‘인간관계의 문제제기’라고 본다. ‘말씀’으로 빚어지는 ‘사랑’의 배반과 의문에 대하여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사실 그 ‘말씀’과 ‘사랑’의 색깔이 모두 밝혀진다면 ‘종족 번식 의식’이 지장을 받을 것이다. 인류의 증식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조병무의 시에서 굳이 질문만 던지고 대답이 없다. 이 시가 확장된 ‘의미화’와 시적 매력을 갖는 것은 선문답처럼 ‘질문 기법’으로 답을 지웠기 때문이다. 시인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을 하는 많은 시들은 싱겁고 심심하다. 기교적으로 1-4연에서 보여주는 똑같은 질문이 무게를 갖는 것은 조병무 시인의 역량이다. <미완성 교향곡> 처럼, 미완의 아름다움이다.
 
역학
 
 
신세훈
 
 
 
깊은 잠속에서
영혼의 아이는 깨어 울고
추운 울음은
여름꽃나뭇가지에 매달려 핀다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
여름내내 숨어 살던
눈송이가 떨어진다
 
 
<이선의 시 읽기>
 
 
  신세훈의「역학」은 짧지만 넓고 긴 학문서 같은 광활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중국의 고전인 「주역」과 한국의 ‘성리학’, ‘음양이론’이 공존하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다루고 있다. 또한 율곡과 원효사상이 들어있다. 무위자연론과 서경덕이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인본주의’까지 내포하고 있다.
세상은 ‘음양’이 만나 반대적인 기운으로 버티고, 밀고 당기며 화합한다. 사랑도 그렇고 하늘과 땅의 이치도 그렇다. 모든 사물과 사물의 현상들은 유기체적인 관계성을 맺고 있다. ‘관계성’은 실존이며 사실이다. 불이 활활 타다 식으면서 그 열기가 공기 속으로 퍼져 공기를 따뜻하게 하고, 인간의 몸을 덥혀준다. 몸의 온기는 활동에너지가 된다. 다시 나무를 패고 아내와 아이들을 따뜻하게 한다. ‘나무가 불에 탄다’는 사실은 인간가족과 사회에 이로움을 주며 영향력을 갖는 이치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런지 모르지만, 우주를 정복한 지금도 ‘역학’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역학적 관계는 삶의 원동력이다. 짧은 단어와 시어들을 살펴보고 그 원동력의 중심을 들여다보자.
  1-2행의 ‘깊은 잠’과 ‘깨어’남은 음양이론으로 인간생명의 반대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잠’과 ‘깨어남’은 철학과 종교의 기본 틀이다. 지혜자가 되거나 순교자가 되거나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2행의 ‘영혼의 아이’라는 말을 주목하여 보자. ‘영혼’이 깨어나면 통찰력과 성찰력을 갖게 되며 ‘도’를 득도하거나 ‘성불’하거나 ‘신’이 된다. 영혼의 파장은 크다. 그런데 ‘영혼의 아이’는 깨달음의 ‘어린 알갱이’다. 순수한 ‘진리’의 ‘결정체’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의 ‘근본’이며 ‘근원’이다. 가난한 영혼이 수천만 번 울어야 득도를 할 것이다. 득도의 완성을 ‘꽃을 피운다’로 해석과 상징을 하고 있다.
  3-4행에서처럼, ‘추운 울음’의 강을 수만 번 건너야 ‘여름꽃나뭇가지’에 꽃이 필 터. 진리가 완성될 터.
  5행,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봄철은 절기의 시작이다. 시인은 웅변하지 않고 ‘순환의 원리’를 ‘나뭇잎의 예감’이라고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독교적 ‘부활’이다. 또한 불교의 ‘윤회’다. ‘인연’이다. 또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생성’과 ‘소멸론’이다.
  7행의 ‘여름내내 숨어 살던’ 부분을 눈여겨 보자. 7행은 위의 시에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가장 시적인 부분이다. 왜냐하면 ‘행위’를 넣었기 때문이다. ‘숨어살던’ 주체적 자아가 존재한다. 바로 ‘눈송이’다. 그런데 그 주체는 약하디 약한 존재다. 햇빛이 비치면 곧 사라질, ‘눈송이’다. 눈송이는 덧없고 허무한 존재로 주체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못하고 곧 며칠 뒤 사라진다. 첩살이하는 시앗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도둑과 같이.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인이 아니다. 자연과 우주 앞에서 무상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다. 노장사상이 녹아있다.
  8행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표현이 압권이다. 만약 ‘물이나 낙엽이 떨어진다’라고 하면 어떨까? 꿈이 없다. 이 시가 형이상학적 수준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유다.
  눈은 희고 깨끗하고, 세상 더러운 것을 모두 덮는다. 또한 별빛처럼 자체발광을 하며 빛을 낸다. ‘눈송이’는 봄, 여름, 가을 동안 숨어있다가 ‘겨울’에 다시 ‘살아났다’가 다시 떨어진다.  
 
  만물생성의 원리를 짧게 압축하여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음양이론과 철학, 종교론을 시의 배경으로 깔아놓고, 시에 행위를 집어넣었다. 형이상학인 ‘이’를 배경으로 깔고, 형이하학인 ‘기’를 넣어줌으로써 화룡점정으로 그림이 살아난다.
  의성이 고향인 신세훈은 안동 유학파의 피를 직간접적으로 수혈하였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역학’적 깊이와 넓이가, 만물의 기운 속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꽃밭에서
 
 
최은하
 
 
휘돌아온 바람으로 네
비로소 자리하여
하늘 가장 가차이
춤을 추는 몸짓으로
너는 꽃으로 피고
나는 별빛으로 남아
네 향기속에
내 이름 사르련다
우리 땅 한가운데 너
혼불의 새야
 
 
 
<이선의 시 읽기>
 
 
 
시간과 공간의 파노라마 그림 그리기 기법
 
 
  최은하의「꽃밭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수놓는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현실에서 자연상태의 ‘꽃밭’의 이미지는 ‘울긋불긋’ 여러 꽃들이 화려한 이미지를 그린다.
  ‘꽃’에 대한 시는 수많은 시인들이 언급하여 더 쓸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여전히 ‘꽃’은 시인들에게 사랑받는 제목이다. 최은하의 ‘꽃밭’의 특징은 ‘꽃’이라는 한정적인 작은 ‘사물 이미지’를 꽃밭 주변의 ‘바람, 하늘, 별, 향기, 새’ 등 넓은 자연의 이미지로 확장하고 있다. 또한 그 이미지에 ‘정’과 ‘동’이 뒤섞이며, 움직임을 주었다. ‘휘돌아온 바람(1연 1행), 춤을 추는 몸짓(1연 4행), 꽃으로 피고(2연 1행)’ 등에서 사물의 형태에 동작과 움직임을 주어 정적인 ‘꽃밭’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어 시의 공간을 넓혀준다. 땅의 공간에 속한 꽃들에게 허공과 하늘과 바람을 이동시켜 시에 역동하는 힘을 준다. ‘이름을 사르련다(2연 4행)’와 ‘우리 땅 한가운데 너(3연 1행)’ 시행에서도 ‘이름’이라는 추상명사에 움직임을 주고, 사랑의 대상인 ‘너’를 ‘우리 땅 한가운데’로 이동함으로써, 대상을 우주적인 개념으로 확장하고 있다. 사물을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하여 흔들어주면 시가 답답하지 않고 시원하게 된다.
  위의 시의 구조를 살펴보자.
  1연은 대상의 사랑을 얻기까지의 어려움, 배경적 구조를 갖는다. 2연은 대상에게 사랑과 헌진을 다짐함, 행위를 동반한 사건의 구조, 3연은 구원의 대상으로 사랑을 승화함. 사랑의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위의 시는 서론, 본론, 결론, 3단구조, 또는 기․승․전․결 4단구조로 분류할 수 있다.(단 4단구조일 때는 1연을 1-2행과 3-4행으로 2분함)
3단 구조의 내용을 살펴보자.
  1연은 사랑의 시련과 고통으로 ‘배경’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2연은 사랑의 실현이며 결합이며 행위다. ‘꽃’과 ‘별빛’으로 사랑의 대상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네 향기’속에 ‘내 이름’을 사르며 영원한 사랑의 헌신을 맹세하고 있다.
2연은 내용에서 구체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들어갔다. 사람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실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 이름을 불사른다는 의미는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보다 크다. 자아를 ‘무’로 없애는 경지까지 각오한 ‘희생’이며 영구한 ‘결합’이다.
3연은 구원관이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희노애락’이 ‘혼불의 새’로 새로운 차원의 사랑으로 ‘승화’다. ‘솟대’의 ‘새’와 같이 ‘혼불의 새’는 샤머니즘에서 종교적 구원관을 의미한다. 또한 ‘불’의 이미지는 육체적인 욕망의 분출을 의미한다. 옛날 멜로영화에서 정사장면에는 자주 불꽃이 활활 타는 벽난로가 등장했다.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우주적 느낌과 지혜자의 설법처럼 대단하고 상징적인 것. 다만 그 의미화 작업인 시로 표현하는 일은 현실적인 과업이다.
  최은하의 「꽃밭에서」는 사랑의 대상인 ‘너’는 ‘꽃’과 ‘바람’과 ‘향기’와 ‘혼불의 새’로 치환하여 확장하였다. 확장된 공간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많은 사건과 사랑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치졸’하거나 ‘색’이 제거된 담백하고 서정적이며 지혜자의 사랑이다.
  꽃으로 대표되는 이 시가 일제 강점기에 발표되었다면 대단한 애국시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1연은 국가의 위기와 혼란, 애국 투사들의 독립운동 고난, 2연은 애국심의 발현과 행위, 다짐, 3연은 구국의 민족혼 등으로 분류되어 교과서에 실렸을 수도 있다.
80년대에 발표되었다면, 1연은 노동자와 민주투쟁을 하는 민중들의 애환과 고난, 2연은 신나를 몸에 끼얹고 ‘이름’과 ‘몸’과 ‘영혼’을 불사르며 죽음을 선택한 애국열사의 행위, 3연은 민족혼을 걸고 구국투쟁을 계속하자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2000년대 현대 정보화시대는 ‘개인’을 중시한다. 개인이 국가며 왕이다. 2013년에는 시어와 단어 자체에만 집중하여 분석하는 표현주의 경향이 강하다. 기교에 치중하여 내용이 빈약하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위의 시가 여러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그 내용적 해석의 폭이 광대한 것은 좋은시라는 반증이다. 좋은 시는 어느 시대, 어느 때와 장소에도 진정성을 갖는다.
 
하릴없이
 
 
이기와
 
 
오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간다
오리를 안아보니 속이 빈 구름이다
구름이 허공에 잠기지 않는 건 마음이 없기 때문인가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방울달린 혀가 내 심심(深深)한 생각의 수면에 방울을 던져
소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게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물 밖으로 튕겨낸다
물과 놀아도 물에 젖지 않는 오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오리’를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그’라는 3단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오리’에 대한 관점과 나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정 반대이다. ‘오리가 물 위에 떠 있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오랫동안 시인은 관찰하고 있다.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4행)’라는 구절을 건지기 위하여. 이처럼 시는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5-7행)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10-11행)’
 
  위의 두 시행들은 두 물음이 대조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관조’와 ‘소속감’이라는 말로 정의한다면 ‘도인’과 ‘생활인’의 견해차이다.
  소설을 엉덩이로 쓴다는 말처럼 시는 눈으로 쓴다. 시각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시가 잘 된 시라는 말은 ‘이미지’의 중요성과 함께 표현의 선명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시를 쓰는 일은「하릴없이」룸펜처럼 방바닥을 뒹굴어야 시상을 얻는다. 바쁘게 분초를 다투고 살면 돈은 벌지 몰라도 시와는 멀어진다. 시는 ‘여유’ 라는 ‘생각의 비’를 맞고 자라는 초목이다. 무심한듯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은 초목을 살리는 절대필요 조건이다.
  그러므로 ‘하릴없이 무심함’이야 말로 시의 절대구성조건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람과 숲과 들과 강을 무념무상으로 바라볼 때 직관적으로 슥 시가 들어선다. 물론 세밀화 기법의 시도 있다. 논리적이고 이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정밀화 기법의 시는 구성력은 탄탄하지만 확장의 폭이 적다. 그 이유는 작가가 이미 다 지정하고 말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오리도 반나절 동안 물장구만 치고 논 것은 아닐 것. 몸을 물 밖으로 지탱하기 위하여 물 아래에서는 열심히 발을 움직이고, 생을 지탱하기 위해, 물속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몸을 거꾸로 쳐들고, 목을 길게 물속으로 집어넣고 수고하였을 것.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게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물 밖으로 튕겨낸다(12-13행)’처럼, 프로이드는 시인을 사회화에 실패한 집단으로 분류하였다. ‘시인’과 ‘시’는 무릇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멀리 ‘지나가듯’ 생을 바라본다. ‘물’과 ‘오리’처럼 세속에 젖지 않고 고상하게 사는 것이 시다.
  위의 시는 대학강사를 하다가 복지학으로 바꾸어 고아원 설립을 꿈꾸다가 화천에 <명상예술학교>를 설립하고 자연주의 음식을 손님들에게 극진히 대접하며 명상기법을 가르쳐 세상을 선하게 인도하려는 이기와 시인 자신의 일상 같다. 산수 좋은 강원도까지 떠밀려간 시인의 삶을 반영하는가? 세상에 속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본다.
 
인생 
 
                         
한연순
 
 
식탁에 놓인 수저 한 벌이 외롭다
식탁에 놓인 수저 두 벌이 외롭다
식탁에 놓인 수저 세 벌이 외롭다
식탁에 놓인 수저 네 벌이 외롭다
 
도금을 할수록 외롭다
 
같은 수저 집에 있으나 다른 영혼을 꿈꾸며 마치 헤어져 바라보는 사랑의 아픔처럼
 
잠깐씩 식탁과 식기 세척 통에서 바쁘게 눈 맞추다가 강물처럼 멀어져간다
 
 
<이선의 시 읽기>
 
  한연순의 시 「인생」은 확장된 사물시의 진수를 보여준다. 만약 제목을 「식탁풍경」이나 「밥상 앞에서」등으로 하였다면 제목은 안정적이지만, 해석의 범위가 한정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인생’이라는 광범위하고 관념적인 제목이 왜 관념적이지 않고 직접적이며 사실적일까? 그것은 시 내용이 철저하게 사물시 쓰기 방법론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 말하고 사물이 생각하고 사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외롭다’는 반복어도 당위성을 가지며 촌스럽지 않은 것은 ‘수저’라는 사물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외롭다고 직설하면 시는 격이 떨어진다.
  2연의 ‘외롭다’도 ‘도금을 할수록 외롭다’ 고 직관과 재해석을 하였다. ‘외롭다’는 말은 ‘참’이라는 명제로 반성적 국면과 숙연함을 준다. 수저 한 벌이 밥을 먹어도 외롭고, 두 벌이 모여 밥을 먹어도 외롭고, 세 벌이 모여 앉아 밥을 먹어도 외롭고, 네 사람이 마주보고 둘러앉아 다정하게 밥을 먹어도 외롭다.
  ‘같은 집에 있으나 다른 영혼을 꿈꾸며 눈 맞추다가 멀어져 가는’ 현대의 가족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외롭다’는 현대인의 표어다. 현대인의 슬로건이다. 시를 쓴 시인이나, 시를 읽는 독자나, 제왕도 신하도, 시장상인도 막노동꾼도, 술집여자도, 손님도 외롭지 않은 인간은 없기 때문에 ‘외롭다’는 호소력이 있으며 힘을 갖는다.
  위의 시는 관념은 실패한다는 시적 진리를 거부한다. 과감하게 시도하여 정확하게 결과를 얻어냈다.  짧고 명쾌하고 간결하다. 그 파장이 크다. 한연순의 대표시로 손색이 없다. 예술은 방법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방법론을 만드는 것이다.
 
나무의 장례
 
권순자
 
 
한 사내가 나무의 가슴을 스윽 벤다
 
나무의 이름과 나무의 얼굴과 나무의 이야기가
잘려나간다
춥고 더웠던
따스하고 정겨웠던 날들
나무의 몸 안에 갇혀있던 언어들이 우르르 톱밥으로 날았다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수천수만의 햇살을 타고
가볍게 날았다
 
아,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매이고 매여서 놓여나지 못하던 몸이
한 번 발을 내디디니
천길만길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을
 
무거운 기억들이 허공으로 뜨고
몸속에 갇혀있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사내가 내민 수화에 말문이 터져
사방이 소란스럽다
 
소리의 뼛가루는 몸이 가벼워
저들끼리 부딪치고 엉기며 구화를 나눈다
꾹꾹 눌러온 속을 풀어헤친다
 
물결치는 바람
폭설에 몸 귀퉁이 빌려주었다가 내려앉은 어깨는
이제 썩어서 쉽게 부서져 내렸다
너를 사랑한 푸른 마음은 붉은 죄가 되어
내 몸도 창백하게 병들어갔다
 
푸른 몸에 품었던 열망은 심장에 울음을 쟁이고
울음은 추워도 얼지 않는 눈물이 되었다
 
눈물도 이제는 환한 바람으로 발효되고 있는 중.
 
<이선의 시 읽기>
 
  시가 작가의 무의식적 발현이라면 위의 시는 시의 기본에 충실하다. ‘1연 -나무의 가슴을 벤다, 2연- 나무의 이름과 나무의 얼굴과 나무의 이야기, 3연- 몸이 한번 발을 내 디디니, 4연- 기억, 몸, 말, 5연- 구화, 6연- 꾹꾹 눌러온 속, 7연- 심장, 울음, 눈물, 8연- 눈물의 발효’ 등 모든 연에서 의인화기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의인화 기법은 시에 생동감을 주며,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만든다. <나무의 장례>는 한 개의 아름다운 의자가 되어, 또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위의 시, 1-8연의 등장인물과 시적 구조를 살펴보자.
 1연- 시적화자와 나무를 베는 사내가 등장한다.
 2연- 잘려나간 나무, 나무의 몸에 갇혀 있던 언어들이 자유를 찾는다.
 3연- 움직이지 못하던 나무의 몸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4연- 갇혀있던 나무의 말이 쏟아진다. 사내의 수화에 말문이 터진다.
 5연- 소리의 원소들이 서로 구화를 나누며 속을 풀어낸다.
 6연- 바람과 폭설에 주저앉고 썩은 나무의 몸.
      내 몸이 병든 이유는 허락받지 않고 너를 사랑했기 때문
 7연- 나무의 열망은 심장에 쌓여 울음과 눈물이 됨.
 8연- 눈물의 발효.
  ‘한 사내가 나무를 벤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출발한 시는, ‘나무의 자유로운 몸’과 ‘나무의 말’과 ‘소리의 원소들의 결합’까지 유추하여 입체적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바람과 폭설에 나뭇가지가 썩어나가도 어찌할 수 없는 나무의 운명적 비애를 ‘너를 사랑한 푸른 마음은 붉은 죄가 되어/ 내 몸도 창백하게 병들어갔다(6연 4-5행)’고 의인화하여 사랑의 원죄의식까지 깊이 도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6연은 나무의 관점에서 출발했던 ‘사물시’가 갑자기 인간화자인 ‘나’의 관점으로 급선회하여 당황스럽다. 작가의 무의식이 반영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와 ‘너’라는 직접적인 화자의 등장은 시 속에 갑자기 작가의 의식이 뛰쳐나와 생경하게 끼어든 느낌이다.
  ‘푸른 하늘을 사랑한 푸른 마음은 죄가 되어/ 나무의 몸은 창백하게 병들어갔다’라고 수정해보면 어떨까? ‘사물이 말하게 하라’는 시적원리를 벗어나지 않고, 관점이 흩어지지 않는다. 관점과 시점이 혼동된 다선구조의 시는 분명한 의도성을 가지고 시도되지 않으면 해석에 혼란을 준다.
  그러나 직접적인 ‘고백’이 독자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는 크다. 모든 시는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출발한다. 시가 외롭다는 것은 시인이 외롭다는 증거다. 상상력의 확장을 보여주는 권순자 시인의 ‘나무’는 그 파장이 크다.
 
보르헤스를 읽는 밤
                                     김지헌
 
문장이 자꾸만 길을 잃는다
때로 의식을 끌어당기는 어둠을 직시해가며
보르헤스를 읽는 밤
 
늙은 역사가의 호기심으로
제국의 흥망사를 논하듯
무한천공에는 오합지졸 같은 별들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따금 미시령터널 쪽으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서둘러 사라지고 나면
또다시 절해고도,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단단해진 어둠을 흔들어 깨뜨린다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어댄다
패잔병 같은 혹독한 겨울의 잔해들 속
바짝 말라 기억의 회로가 끊긴
겨울나무들조차 이곳에선
눈이 먼 보르헤스를 추종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사들처럼
나이테 속에 바벨의 도서관*을 새긴다
 
이곳 내설악엔 겨울이 일찍 도착해서
오래도록 질기다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단 전 세계 작가 40인의 작품 모음집
 
 
 
 
 
 
<이선의 시 읽기>
 
  김지헌은 이방의 천재작가 보르헤스를 읽고, 필자는 김지헌을 읽는다. 아니다 필자는 김지헌의 눈으로 보르헤스를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시에 내포된 보르헤스적 요소를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시에 내포된 보르헤스적 요소를 제외시키고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표본을 도출해 내기 위해 보르헤스적 요소를 분석한다.
  김지헌의「보르헤스를 읽는 밤」의 구조와,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의 구조를 비교해 보자. 김춘수는 감성에 호소한 서정시를 썼다. 김춘수의 시가 단일구조인 반면, 김지헌의 시는 다시점 구조다. 현재진행형-과거완료형-현재완료형-과거추적형-현재진행형 시간의 환타지를 시로 엮어낸다. 김춘수의 시는 샤갈의 그림 <나의 마을>을 텍스트로 하였고, 김지헌은 ‘보르헤스’를 텍스트로 하였다. 정반합의 원리처럼. 시간의 환상을 좇던 보르헤스처럼. 위의 시 4연을 살펴보자.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단단해진 어둠을 흔들어 깨뜨린다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어댄다
  패잔병 같은 혹독한 겨울의 잔해들 속
  바짝 말라 기억의 회로가 끊긴
  겨울나무들조차 이곳에선
  눈이 먼 보르헤스를 추종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사들처럼
  나이테 속에 바벨의 도서관*을 새긴다
 
  ‘상식을 벗어나 정신의 오지탐험’을 추구한 ‘보르헤스’라는 이방의 시인을  초대하였다. 시와 철학과의 만남은, 종교와 철학의 만남처럼 이질적이면서 동질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철학이 과거에서 불어온 바람을 현재에 숙성시킨 것이라면, 시는 미래의 환타지한 상상력을 현재로 끌어내어 성숙시킨 맛깔스런 바람이다.
  감정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의 원리.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 이성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의 원리.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어둠을 흔들어 깨뜨리듯,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듯이(4연 1-3행)’<바벨의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보르헤스파의 지성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을까? 겨울밤, 먼 이국에서 후대의 시인은 홀로 과거의 천재시인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는 밤. 냉정과 열정 사이. 이성과 지성 사이. ‘내설악에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골목
 
권혁수
 
 
똑바로 걸어도 휘어지는
골목이 있다
 
아이들의 벽화가 몇 개 벙어리처럼 웃는
 
아침에 골목을 빠져나간 별들이 저녁에
마을 밖 멀리 머물러 답답한 하늘 아래
흐린 창문을 열고
어제 떠난 사람을 기다린다
 
떠나지 못해, 기다리지 못할 골목은 없다
 
술 취한 발자국 소리 끌고
벽화를 더듬어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밤,
떠나온 집과 찾아갈 집 사이로
걸어 들어온 만큼 다시 걸어 나가야 하는
 
골목은 끊어진 직선이 아니다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 1-6연은 권혁수 시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특징을 그 살펴보자.
  첫째, 짧고 간결한 문장. 1연의 단 2행의 시를 완성본이라고 가정해 보자. 아래 2-5연을 모두 버리더라도 완전한 시의 요소를 갖고 있다. ‘똑바로 걸어도 휘어지는/ 골목이 있다(1-2행)’ 로써 더 이상 붙일 사족이 없다. 길에 대한 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변화무쌍한 양상을 보이며 진화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짧은 언어 속에, 많은 사유를 간직한 시를 만나보지 못했다. 2행의 ‘골목’은 ‘타인, 회사, 이데올로기, 사회풍자’일 수도 있다. 다각도로 해석이 되는 좋은 시의 표본이다. 눈에 그림처럼 시가 그려진다. 이미지와 사유의 만남이 촌철살인의 시구다.
 둘째, 각 연의 ‘낯설게하기’.   2연은 단 한 행의 문장으로 하이퍼적이다. 의도적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삽입된 연이다. 그러나 다른 연과 생경하지 않다. 2연이 들어감으로써, 생활적 요소가 들어가 시에 사람냄새가 난다. 가족과 아이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진 가장의 애환이 느껴진다.  ‘아이들의 벽화가 몇 개 벙어리처럼 웃는’은 표현주의 예술인 시의 심미적 미의식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사진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늦게 귀가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상상의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하며 여백의 미를 살렸다. 단 한 줄의 시가 갖는 파장이 크다.
  셋째, 서정성.  3연은 ‘골목, 하늘, 기다림’ 모두 독자들이 좋아하는 ‘슬픈 이별의 이미지’가 있다. 김소월부터 현대까지 시의 단골소재다. 한의 성서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넷째, 사유의 힘.  4연 ‘떠나지 못해, 기다리지 못할 골목은 없다’ 부분을 살펴보자. 이 연에서 ‘골목’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치환하여 보자. 유행가의 한 구절처럼 애절한 사연이 장편소설 분량으로 증폭한다.  ‘골목’ 이라는 사물의 시각으로 쓴 사물시다. 사물의 독백이다. 객관화된 사유가 깔끔하다.
  다섯째,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표현.  5연은 1, 2, 3, 4행 모두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 문장들이다.  1행- ‘술 취한 발자국 소리 끌고’라고 피동형 문장으로 현대적 멋을 살렸다. 2행- ‘벽화를 더듬어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밤,’은 아이를 ‘벽화’로 은유하였다. 3행- ‘떠나온 집과 찾아갈 집 사이로’는 상황제시 부분이다.  ‘집’은 ‘모임, 애인’ 등 어떤 단어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권혁수 시가 보여주는 사물시의 요소들은 하이퍼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여섯째, 탄탄한 구성.  6연 ‘걸어 들어온 만큼 다시 걸어 나가야 하는’ 단 1행의 문장이 갖는 힘은 1-6년의 시가 갖는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 어떤 길도 갔다고 돌아서 나와야 한다.
  권혁수의 「골목」을 읽으면, 이미지와 사유의 객관화가 가지런히 정리된 필통처럼 단정하다. 모자람이나 치우침이 없고, 억지스러움이나 생뚱맞음도 없다. 현대시의 단점인 난해한 은유로 독자를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좋은 시는, 시 스스로 평론을 쓸 ‘거리’를 제공해 준다. 표현주의 예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한 시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물렁한 추억
       
정 연 덕
 
 
종일토록 기다리다
돌아섰던 바닷가 나뭇가지에
당신을 묶어 놓습니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도요새처럼 휘잡던 날개를 접습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리움
가시처럼 꽂힌다 해도
더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턱을 괴고 수평선을 보며
멈춰 섰던 오랜 날들 가슴속에 묻고
하나씩 하나씩 숨겨두고 가렵니다
 
아파하던 4월의 바람이
문득 떠오를 때쯤 흔들리던 나무도
키가 크고 숲을 이루겠지요
          
 
<이선의 시 일기>
 
  정연덕의 「물렁한 추억」은, 잘 익은 홍시처럼 맛있게 숙성하였다. 관념을 완벽하게 배제한 시적 완성도를 본다. 위의 시에서 기승전결을 살펴보자. ‘당신을 기다리던 나무(1연)- 날개를 접는다(2연)- 가시처럼 돋는 그리움(3연)-가슴속에 숨겨둔다(4연)- 나무가 숲을 이룬다(5연)’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 시적 정서는 그리움과 아픔이다. 그렇다면 1연의 ‘당신’은 ‘그리움’과 ‘아픔’이다. 그리움과 아픔은 ‘나무’와 ‘숲’을 이루도록 키워온 시인의 내면의 고뇌다. 고뇌와 불행감도 밖으로 꺼집어내서 분류하고 분석하면 모두 ‘이유’가 있다. 시인은 프로이드를 공부하지 않아도 프로이드적 정신기법의 시를 쓴다. 자신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그때 거기’의 과거상처를 자가치료한다. 전 과정의 과업을 완수한 시인과 화자에게 주는 수료증은 독자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다. 
  위의 시를 내용 중심으로 네 가지 방향에서 해석하여 본다. 1연 3행의 ‘당신’을 ‘어떤 대상’으로 치환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시로 분류된다. 목적시, 연애시, 자유시, 성장시 등. 무한한 공간적, 시간적, 관념적 해석이 가능하다. 시가 확장되어 열린다.
  첫째, 1연의 ‘당신’에 ‘이데올로기’를 대입하여 보자. 그 대상이 이데올로기라면, 관념을 모두 익힌 목적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상’과 ‘상실한 꿈’을 이야기하면서 전혀 관념적이지 않다. 실망과 배반을 먹고 성장하는 나무와 숲.
  둘째, 1연의 ‘당신’을 ‘학생 운동의 희생자’라고 생각하여 보자. 만약 그 대상이 장렬하게 전사한 학우라면. 그 잔인한 4월을 배경으로 하였다면 이보다 완성도 있는 참여시를 볼 수 없다. 비련의 젊은 학생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로 만든 오늘날 민주주의의 나무와 숲.
  셋째, 1연의 ‘당신’을 연애의 대상인 ‘연인’으로 해석하여 보자. 성장시기에 통과의례처럼 겪던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를 벗어나서 성숙한 사랑의 완성과 미완의 사랑을 품는 40대 중년을 본다. 아픔과 슬픔도 승화시킨 사랑.
  넷째, 1연의 ‘당신’을 ‘정신적 숭배대상’으로 해석하여 보자. ‘사르트르’나 ‘니이체’ 등 인물을 대입하여 보자. 인격체를 향한 니이체적 고뇌의 시작이다. 초인을 꿈꾸던 짜라투스트라의 꿈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직시하는 지식인의 고민이 시작된다. 정신의 선봉에서 지휘하던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체가 허물어진다.
  위의 시에서 1연의 ‘나무’와 ‘당신’은 묶어버린 하나다. 혼연일체다.
  위의 시에서 5연의 ‘바람’과 ‘나무’와 ‘숲’은 하나다. 혼연일체다.
 
일곱 겹의 입술
 
 
정지우鄭誌友
 
 
 입술이 취하는 양파주점* 눈이 매운 술안주가 있다.
 
 
 부딪치지 않고 탁자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으로 주량을 잰다.
 
 
 흐린 음주엔 옆 좌석이 슬쩍 끼어드는 술병도 있지만 아주 얇은 껍질 몇 개만 있어도 감흥에 젖을 수 있다.
 
 
 외투를 벗거나 안경을 한 꺼풀 벗어놓은 빈자리들
 
 손등으로 땀을 닦는 일은 주정酒精의 관계여서 때로는 모르는 인상.
 
 
 홍당무가 되어도 흉이 없는 당신은 그저 옆자리일 뿐이다.
 
 
 한 잔에 얼굴 속으로 털어 넣는 얼굴
 
 절망은 분노의 옆얼굴이다. 
 
 
 
 끝이 없는 계단과 모서리를 돌아가는 시간.
 
 
 
 술잔에 찍힌 입술이 눈물을 흘린다.
 
 일곱 겹 입술의 말에는 눈물이 있다.
 
 
 
 눈이 매운 건 좌석 배치도 때문일까 입술이 벗겨낸 표정 때문일까.  
 
 
 
 둥근 접시의 요일엔 빨간 망에 든 양파가 배달된다.
 
 흰 거품의 당신을 흔들면
 
 술과 양파를 곁들인 오늘이 접시 위에서 붉다.
 
 
* 양철북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낯설게하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제목, 연, 행, 낱말’들이 각각 모en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요즘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젊은 감각의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이다.‘낯설게하기’를 통하여 시적 정서가 환기되고 지루한 시 쓰기 방법론에서 탈피하고 있다.
 
  ‘한 컵의 맥주잔에 찍힌 입술자국’에서 출발한 단순한 발상이, 연마다 새로운 구도를 갖고 의식을 만들고 있다.‘피동적 기법’의 시 쓰기 기법이다.
 
  빨간 루즈를 칠한 입술이 200cc 맨주잔에 찍어놓은 일곱 개의 립스틱자국. 지성과 야성. 취기와 호기심. 술주정과 눈물. 평이한 주점의 풍경화가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의 시의 옷을 입고, 일상과 상식의 옷을 벗고 하이퍼적이다. 요염하고 감각적이다. 
 
  피동적 사물은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우의 시에서는 풍경이 감정을 나타내고, 피동적 동사가 의식을 주장한다. ‘둥근 접시의 요일엔 빨간 망에 든 양파가 배달된다.(10연 1행)’을 살펴보자.
 
  ‘요일’이라는 시간의 개념에 ‘둥근 접시’라는 이미지의 옷을 입혔다. 또한 ‘빨간 망에 든 양파’라는 선명한 색채이미지는 ‘둥근 접시’와 상대적 조화를 이루며 선명한 구조의 이미지를 돕는다.  ‘둥근 접시’와 ‘빨간 양파’는 구체적인 사물이다. 구체적인 사물이 불명확한 시간의 개념인 ‘요일’을 선명한 사물이미지로 꾸며준다. 여러 개의 중첩된 이미지가 구체성과 객관성을 돕고 있다. ‘요일’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선명하고 구체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흰 거품의 당신을 흔들면/ 술과 양파를 곁들인 오늘이 접시 위에서 붉다.(10연 2-3행)’부분을 눈 여겨 보자. ‘이상 시인’이 말하던 속을 까도 알 수 없는‘양파’의 이미지는, 제목인 ‘일곱 겹의 입술’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시의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를 살린 ‘흰 거품의 당신을 흔들면’이라는 표현에는 ‘흰 거품’이 주는 ‘가벼운 이미지’와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이미지가 합쳐 ‘당신’을 수식한다. 취기에 농과 연애를 자극하는 술집의 풍경화가 농염하다. 그러나 철학이 있는 것은 ‘한 잔에 얼굴 속으로 털어 넣는 얼굴/ 절망은 분노의 옆얼굴이다.(6연 1-2행)같은 구절이 보여주는 사유의 힘이다.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억누르며 술을 마시는 범인들의 모습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끝이 없는 계단과 모서리를 돌아가는 시간.(7연)’ 처럼, 술집에서는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반복적이다. 말, 술잔, 시간이 천천히 돈다. 과거가 현재에 와 있고, 현재가 내일이면 과거가 된다.
 
 
  위의 시는 피동과 사동으로 표현주의적 현란한 기교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시는 진정성을 가지며 중심이 든든하다. 8연 1-2행‘술잔에 찍힌 입술이 눈물을 흘린다./ 일곱 겹 입술의 말에는 눈물이 있다.(8연 1-2행)’부분은 화자가 시를 쓰게 된 근본이유일 것이다. 술은 기분을 풀려고 먹지만 이상하게 술은 먹을수록 슬퍼진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심미적 미의식을 추구하며, 객관화와 진정성 추구는 앞으로 표현주의 시가 추구할 과제다.
 
곤드레
 
정연석
 
 
해거름에 시장기가 돌아서 초지리草芝里
곤드레 밥집에 갔습니다.
'시장 갔습니다'란 쪽지 붙은 유리문에
꽃잎 오므린 매화마름 꽃을 닮은
해쓱한 두 얼굴이 얼비쳤습니다.
양념장에 쓱쓱 비빈
곤드레 밥그릇이 헛보였습니다.
곤드레만드레하였습니다. 
홍골레망골레하였습니다. 
마주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허기에 취한 저녁이 깊어갔습니다.
 
  * 홍골레망골레; 술이나 잠에 취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곤드레만드레"의 경상도 사투리.
 
 
<이선의 읽기>
 
   꿈이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 것은 ‘가난’이라는 씨앗에서 자라는 풀꽃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린 가난은 새싹과 같아서 꿈속에서도 자란다.
  정연석의 「곤드레」는  ‘시장기- 곤드레 밥집- 유리문쪽지- 핼쓱한 두 얼굴- 헛보임- 곤드레만드레 취함- 헛웃음’이라는 무의식의 흐름을 의식이 좇고 있다.   시는 비유다. 하지만 그 비유는 연상작용에서 발아된다.
  위의 시의 중심 행은 2-5행이다. ‘곤드레 밥집에 갔습니다./ '시장 갔습니다'란 쪽지 붙은 유리문에/ 꽃잎 오므린 매화마름 꽃을 닮은/ 해쓱한 두 얼굴이 얼비쳤습니다.  부분이다.
  시는 지워지지 않는 인물, 사건, 사물들의 풍경에서 발아된다. ‘매화마름꽃을 닮은 해쓱한 두 얼굴’은 시인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다. ‘해쓱한 그 얼굴’은 시인의 심상에서 시심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는 사람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던 기억의 덩어리들이, 꿈을 꾸거나 술을 먹었을 때, 의식의 통제가 풀려 무의식이 의식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를 쓰는 행위는, 무의식의 흐름에 의식을 맡기는 일이다. 언어들이 마음껏 취하여 연상작용을 하도록 의식을 해제시킨다.
  5행의 ‘두 얼굴’을 ‘그’와 화자인 ‘나’의 과거 추억을 객관화한 장면으로 해석하여 보자. 사람이 쉰 살이 되면 인생의 분기점에 서게 된다. 살아온 날과 살 날이 선명하게 갈린다. 또한 원망하던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나이다. ‘두 얼굴’ 중 한 얼굴에 ‘아버지’를 대입하여 보자. 독자는 ‘어머니, 형제, 첫사랑’을 대입하여도 좋다. 문득 옛날을 현재에 불러오고 싶은 사람. 누구나 있다. 그 사람이 모질게 보고 싶어,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으며 ‘그’를 식탁에 초대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곤드레만드레 옛 추억과 감정에 취하여.
  11행의 짧은 시가 독자의 무의식을 자극한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흔든다. 짧지만 강한 여운으로 과거회귀를 종용한다. 이 시를 읽으면.
  프로이드는 무의식 이론을 학계에 발표하였지만, 시는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펼쳐 보인다. 이 시는 무의식을 현재에 실현시키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움처럼 ‘꽃잎 오므린 매화마름 꽃’ (4행) 한 송이 맘속에 피어올리고 싶어질 것.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폐선(廢船)
 
 
 
차윤옥
 
 
아우성치는 격랑의 파도,
때때로 철썩철썩 울음 울 때
상처투성이의 이력(履歷)을 드러낸 채
밧줄에 결박되어 귀의(歸依)한 목선 한 척
출항을 못하는 그물에 얽힌 사연,
슬픈 조각들이 주름진 시간 속에 녹아 있다
얽히고 얽힌 그물처럼
얽히고 얽힌 우리의 삶
일출과 일몰을 투망질하는
남루한 하루
구석진 곳까지 찾아주는 밀물과 썰물
오늘도 먼 바다를 꿈꾸고 있다.
 
 
<이선의 시 읽기>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저리 가라,
부자와 행복도 물러가라.
 
시가 실현하고 있는 소재는 상처와 상실이다.
차윤옥의 「폐선(廢船)」은 시의 필요충분조건인 ‘상처와 울음’ 조각들의 ‘색채 구성화’다. ‘파도, 격랑, 버려진 것, 슬픈 조각, 일출, 일몰, 구석진 곳(1-2연)’ 등 소외되고 약한 부분을 통체적으로 드러낸 고백적 그림이다.
 
플라톤은 시인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몽상가라고 비웃으며 추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반만 진실을 말하였다. 시니컬하게 자신을 고발하고, 비웃음으로써 스스로 정서치유를 하고 독자를 힐링한다는 시의 효용성을 무시하였다. 시는 슬픔에서 출발하지만, 이상과 희망을 꿈꾼다.
위의 시에서처럼. 버림받은 사물이 된 「폐선」은 ‘상처투성이의 이력(1연 3행)’을 와신상담하며 또 다른 꿈을 찾고 있다.
 
차윤옥의 시는 ‘격랑의 파도’가 ‘폐선’을 위무하듯 따듯한 위로가 있다.
또한 ‘밧줄에 결박되어(1연 4행)’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상주의가 있다.
‘구석진 곳까지 찾아주는 밀물과 썰물/ 오늘도 먼 바다를 꿈꾸고 있다. (2연 1-2행)’을 살펴보자.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바다에, 마치 양수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태아처럼. 밀물과 썰물에 폐선은 몸을 맡기고, 바다에 귀의하고 있다.
 
차윤옥의 시는 표현의 기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튼튼하고 굳건한 생활의지와 삶의 본질을 굵은 선으로 처리한다. 슬픔을 부드럽게 감싸지만, 나약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족을 붙이지 않은 간략하고 짧은 문장. 행의 명사형 끝처리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용에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줄일 수 있는 마지막까지 압축하여 내용을 선명히 부각시켰다.
 
‘밀물’과 ‘썰물’처럼 시어들을 구석구석 음미하여 보라,
알맞게 발효한 김치처럼
맛있게 익은 시어가 삶의 의미화를 증폭시킨다.
어떤 기교보다 멋스러운
진정성이라는 기교와 만나는 시간이다.
 
白南準 2
 
 
 
양준호
 
 
 
내 눈에선가
 
먹TV에선가
 
소녀는 전단을 뿌리고 갔다
 
 
 
너는 꽃의 뿌리줄기에 대해서 사색해 보았니
 
 
 
사각형 속에선가
 
원주율 속에선가
 
어머니의 눈물 빨갛게 빛나는데……
 
 
 
아,
 
이 허무한
 
낮술 도미 안주라도 씹을까
 
 
 
내 눈에선가
 
먹TV에선가
 
소녀는 전단을 뿌리고 갔다
 
 
 
 
 
<이선의 시 읽기>
 
 
 
  엘리어트의 ‘잔인한 4월’은 한국 땅에 황사바람을 몰고 왔다. 대지는 4월의 젊은 피를 먹고 새로워져 간다. 어머니는 황폐한 대지를 눈물로 적신다. 땅은 새 기운을 얻어 식물을 키운다. 4월의 함성도 무성하게 자란다. 가을이 되어 쇠퇴하기 전에.
 
  자유와 희망을 위한 진혼곡은 독재에 항거한 젊은이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늘 자녀의 ‘독립’과 ‘자유’와 ‘희망’을 위하여 기꺼이 눈물이 되었다. 시는 어머니의 눈물에서 발아한다. 양준호의 시에서 ‘어머니’를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부재는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각형 속에선가/ 원주율 속에선가/ 어머니의 눈물 빨갛게 빛나는데……(3연 1-3행)
 
 
 
  위의 시가 현재를 부정하며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1연과 3연, 5연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에선가’라는 표현 때문이다. 미지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화자의 심리상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출시킨다. 미래적이지만 확정적이지 않은 ‘―에선가’라는 중심어가 위의 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내 눈이 찍은 영상과 TV가 찍어서 내 보내는 영상이 모두 참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 눈에선가/ 먹TV에선가/ 소녀는 전단을 뿌리고 갔다(1연 1-3행)’을 살펴보자.
 
 양준호의 시에서 암묵적으로 등장하는 ‘소녀’는 누구인가? 양준호는 여동생이 없다. 그가 내면으로 초대하는 ‘소녀’는 시인이 사랑하는 여자다. 영혼으로 초대하여 대화하고 싶은 여자일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 후 그의 시에는 ‘소녀’와 같은 비중으로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여자다.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보면 두 가지로 분류된다.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양준호의 시에서 보여주는 ‘소녀’가 뿌리는 ‘전단지’는 어떤 의미일까?  ‘―에선가’라는 1-2행은 전제부분이다.  미확정적이고 부정적이고 실제적이지 않다. 불확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에 ‘백남준’이라는 아티스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강렬하였다. 백남준의 시적 영상은 양준호의 시와 닮아 있다. ‘단어던지기’와 ‘이질적 단어의 결합’과 낯선 이미지들을 통합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현재형으로 보여주는 영상은 현재가 아니다. 과거도 과거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다. 미래도 미래 그대로의 미래가 아니다. 백남준이 보여주는 영상처럼 영준호의 시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시켰다.
 
  위의 시에서 양준호는 ‘원주율’처럼 반복적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어머니의 삶과 소녀의 전단지는 낯설면서도 친밀하다. 또한 확장적 해석이 가능하다. 4월에 읽으면 독재에 항거한 젊은이의 주검의 절규로, 가을에 읽으면 자연의 절규로.
 
 
 
  ‘뿌리줄기’처럼 강렬하게 전달되는 ‘낯선 이미지’에 독자들은 즐겁다. 니힐한 철학자의 독백처럼. 이미지들이 ‘어머니의 눈물’처럼 ‘빨갛게 빛(3행 3연)난다. 매마른 영혼들에게 피의 제전의식을 하는 대지처럼.
 
나무 속을 들여다보다
 
김필영
 
나무도 종을 친다
누가 뿌리 끝 물줄기를 따라
빈 방 한가운데에 들어가 종을 치는지
덩덩, 울리는 종소리
갈라진 껍질 사이로 어둠이 밀려온다
그 중심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이파리들이 받아 적는다
어깨 위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여린 손에 달빛이 쉬어가는 건
깊은 고요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여운 때문이다
그 공명이 그리운 잎사귀들
아우성치며 울림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온다
서로를 버리고 떠났던 이들
다시 돌아와 기대어 흐느낄 때
나무도 덩덩, 울음을 터트린다
어둠을 뚫고 붉은 해가 떠오르는 한
나무속에 타종소리 그치지 않는다
 
<이선의 시 읽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죽을 때와 살아날 때를 안다. 나무는 제 뿌리와 줄기의 수분을 모두 말려 추위에 얼지 않고 겨울을 견딘다. 생명력은 절망의 암흑기에 휴식을 취하며, 다시 살아날 봄을 위하여 새로운 힘을 휴지기에 저장한다.
  김필영의 시는 봄을 알리는 타종소리처럼 명쾌하다. ‘종소리’는 상징과 ‘비유’다. 종소리는 ‘시작’과 끝을 알린다. 또한 다음 시간에 시작할 새 수업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을 갖게 한다.
  김필영이 ‘직관’한 ‘나무의 종소리’는 나무의 ‘뿌리- 줄기- 잎사귀’를 흔들어 깨운다. 곧 ‘새’와 ‘벌’들이 날아오고, 그 나무는 열매를 준비하며 꽃을 피울 것이다.
  잎사귀들이 떨어져 거름을 만들고, 제 뿌리에 자양분을 공급하듯, 사랑했던 사람들, 떠났던 이별이 다시 돌아와 줄 것을 예견하는 종소리다.
  위의 시의 구조를 나무에 비유하여 보자.
  ‘나무’라는 소재를 줄기로 세우고, 그 줄기에 사유의 뿌리를 뻗어간다. 나뭇가지마다 상징과 비유의 꽃을 피워보자. 새들은 저녁에 모였다가 아침에 먼 산으로 날아간다. 낙엽이 떨어진다. 연인들은 낙엽을 밟으며 사랑을 속삭인다. 연인들은 싸우고 이별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일은 다시 해가 떠오른다. 태양이 존재하는 한, 나무는 엽록소를 생성하며 희망을 잉태한다.
  
  어둠을 뚫고 붉은 해가 떠오르는 한
  나무속에 타종소리 그치지 않는다(16-17)
 
  위의 시는 ‘공명’을 통한 ‘사회화’를 염원한다. 그 중심어는 ‘위로와 희망’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삼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봄과 여름과 가을을 견디고, 겨울을 이겨낸 시간은 위대하다. 나무의 계절은 ‘타자’를 위한 ‘배려’다. ‘산수화’와 ‘풍경화’가 되어 뇌의 피로를 씻어주고,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8행)’가 되어주고, 그늘과 열매를 제공한다. 또한 죽어서는 가구가 되어 준다. 그 가구는 버려지지 않고 난롯불에서 제 몸에 불을 붙여, 가난한 사람의 추운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시는 한 그루 나무다. 시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여러 정황들이 겹겹이 드라마처럼 새롭게 전개된다. 향기와 열매를 맛있게 하는 것은 시인의 재주다.
 
봄소식
 
 
                              최창순
 
 
  한겨울 밭에서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이면
  개구리의 겨울잠 자는 소리
  쑥 달래 냉이 다리 뻗는 소리
 
  그뿐이랴
  땅속에 움츠린 풀씨들
  봄을 기다리는 소리
 
  자연의 소리는
  시기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공생하며 살아간다
 
  사람들 사는 세상에는
  언제쯤 봄이 올까?
 
    * 최창순 시집, 『아내와 그네』 중에서
 
 

 
<이선의  읽기>
 
 
  시는 한 뿌리에서 두 개의 나뭇가지를 뻗는 신기한 나무다. 그 뿌리의 속성은 둥글다. 그 줄기의 속성도 둥글다. 자양분을 전달하기 위하여. 둥근 원통 기둥에 물과 햇빛과 맑은 공기를 품고 산다.
  그러나 모든 詩의 뿌리와 줄기가 둥근 것은 아니다. 가시를 가진 시의 줄기는 더러 납작하거나 뾰족하기도 하다.
  모든 나뭇가지는 뾰족하다. 詩 나뭇가지의 끝도 뾰족하다. 앞으로, 위로, 옆으로, 더 뻗어나가 더 좋은 열매를 만들기 위하여.
 
  최창순의 시는 둥글고 부드러운 줄기를 가지고 있다. 그 시에는 ‘시기’와 ‘미움’이 없다. 위의 시와 대조하기 위하여 다른 시를 한편 소개한다. 필자가 급히 쓴 봄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겨울 뿌리’에 대한 시다. ‘봄 원형’의, 봄소식을 기다리는 시점은 같다. 그러나 시의 관점이 다를 때, 절망과 희망은 다른 시 이미지를 만든다.  ‘시’라는 한 뿌리에서 뻗은 다른 ‘줄기’를 비교하여 보자.
 
   바람 불고
   눈 내리고
   생장점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운, 겨울밤
   줄기, 잎새, 온몸 추위에 버리고
   ―누워있는 자리
   발목만 댕강, 캄캄한 땅에 갇혀 있다
 
   눈을 꼭 감고
   귀를 막고
   숨도 쉬지 않고
 
   혼자 애타게 기다리는, 봄얼굴
   어디쯤, 봄 꽃바람 불어오고 있는가?
 
  늦가을부터 봄까지 한 계절을 숨죽이고 기다리며 시는 성장한다. 더러는 다시 몇 계절을 순환하며 기다리기도 한다. 그래도 먹을 만한 열매를 맺지 못하여 주인에게 밑동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어떤 시작 과정과 역경을 견딘 ‘시 나무’든, 시는 희망을 주는 ‘밝은 시’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어두운 시’로 나눌 수 있다. 즉 ‘슬픈 시’와 ‘아름다운 시’가 존재한다.
  최창순의 시를 읽으면 행복하다. 부드럽고 감동적이며 희망적이다. 필자의 시를 읽으면 자연의 이치를 파헤쳐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하지만 그 ‘톤’은 슬프다. 항거와 억압이 있다.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다른 사유를 이끌어낸다.
  ‘공생’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최창순의 ‘봄소식’은 세상에게 주는 선물이다. 독자에게 주는 행복이다. 지하철역에서 자주 만나고 싶은 시 얼굴이다. 
 
은빛 멸치
 
우 애 자
 
제 속에 바다를 가둔 은빛 멸치
바다의 비린 정을 놓지 못해
몸을 안으로 구부린다
 
잊히지 않는 깊은 생을 끌어안고
등 굽어지고 은빛 비늘이 벗겨져도
감지 못한 눈은 푸른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다
 
은빛 멸치는 어두운 상자 안에서
오래도록 아픈 꿈을 꾼다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끊임없이 길을 만들었던
찬란했던 시절만큼 가슴 시린 시간,
 
소금기에 하얗게 굳은 멸치
아픈 그림자를 지우며
은빛 비늘로 푸른 바다를 부른다
 
 
<이선의 시 읽기>
 
  시는 ‘반어’와 ‘역설’로 만든 ‘구조물’이다. 거기에 ‘비유’의 꽃을 매달아 독자를 구인한다. 수필보다 솔직하지 못한 시는 ‘은유’로 병풍을 치고 시인의 감정을 숨긴다. 독자들은 그 위장술을 해독하며 즐거워한다.
  우애자의 시에는 반어와 역설이 있다. 부정과 긍정의 미학이 실재한다.
  아래 두 그룹의 시어들을 비교하여 보자. 첫 그룹의 시어들은 ‘절망’의 단어로 구조되어 있다. 삶은 ‘멸치’나 화자인 시인에게 모두 버겁고 어두운 절망이다.   
   등 굽어지고 (2연 2행)
   비늘이 벗겨져도 (2연 2행)
   감지 못한 눈 (2연 3행)
   어두운 상자 안에서 (3연 1행)
   아픈 꿈 (3연 2행)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3연 3행)
   소금기에 하얗게 굳은 (4연 2행)
   아픈 그림자 (4연 2행)
   저 은빛의 아득함 (4연 4행)
 
  그러나 다음 시구에서는, ‘반어와 역설’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생을 끌어안고 (2연 1행)
   푸른 바다를 향해 달리고 (2연 3행)  
   끊임없이 길을 만들었던 (3연 4행)
   찬란했던 시절(3연 5행)
   아픈 그림자를 지우며 (4연 2행)
   은빛 비늘로 푸른 바다를 부른다 ( 4연 3행)
   내 안의 푸른바다 (5연 1행)
 
  시인은 작은 것, 슬픈 것에 자신의 감정을 덧씌운다. 프로이드는 시인의 무의식을 읽는다. 시인은 사물의 무의식을 읽는다. 독자는 사물을 통하여 시인의 무의식을 읽는다.
  먹이사슬구도에서 희생된, 멸치가 먹은 미미한 사물― 멸치 뱃속에서 소화를 기다리는 음식찌꺼기들의 무의식도 읽어낸다. 소화불량을 앓는 바다와 어부의 24시간도 읽어낸다. 그물에 걸리는 순간부터-건조되기까지.
  우애자의 시에는 ‘멸치’라는, 자신이 새벽경매에서 매일 만나는 건어물에, 자신의 생을 위장하여 반어적으로 숨겨 놓았다. 멸치는 시인 자신의 인생이다. 건조되어 가는 과정에서 등이 굽고, 은빛 비늘이 벗겨지고, 눈을 감지 못하고 죽어가는 부정의 순간. 그러나 그 눈은 푸른 바다를 향하고 있다.
  시인을 아는 지인들은 비유를 확장하여 그 행간에 숨은 인내와 눈물을 해독해 낼 것이다.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창의성은 문제해결력이다. 우애자의 시는 배반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재결합하여 ‘문제해결’을 하고 있다. ‘첫 부정’과 ‘끝 긍정’이 조화하여 ‘승화’를 이루었다. 인내하며 용기있게 사는 것은 창의적인 일이다. 삶에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은 힘이다. 시창작은 창조행위다. 시인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번지 점프
 
 
김기덕
 
 
 
추락하는 몸엔 끈이 있다
심연에 떨어졌다가도 솟구치는 용수철의 힘
부도 맞은 아버지와 낙엽 사이엔 상대성 끈이론이
작용한다
버티던 줄을 놓아버린 여자는 아파트 옥상에서 화
단으로 떨어졌고
화살들은 돌아올 수 없는 숲으로 날아갔다
놓아버림과 매달림 사이에서 열매들은 방황한다
성년의 통과의례처럼 추락하는 하루의 절벽,
꽃잎들도 비명을 지른다
줄을 매는 하늘과 줄을 푸는 땅 사이에 비처럼 금
을 긋는 유성들
별들은 날기 위해 벽을 넘어 사다리를 오른다
먹이를 움켜쥐려 급하강하는 독수리
낚시에 꿰어 요동하는 물고기
끈에 매달려 붕붕 울고 있는 요요
팽팽히 나를 잡은 끈들의 매듭은 굳게 손가락을 걸
고 있다
탯줄의 숨소리 흐르는 양수의 강물로 낙하하는 씨
앗들
끈이 풀린다
 
 
 
<이선의 시 읽기>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아왔다. 김기덕의 「번지 점프」는 하이퍼시론에 입각하여 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이퍼시의 중심 이론은 ‘모듈’과 ‘링크’와 ‘리좀’ 구조로 대표된다.
 
김기덕은 ‘끈’이라는 ‘사물’을 8연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각각의 다른 연과 ‘링크’시켰다. 그러나 각 연은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모듈’이라는 ‘소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확산적 ‘리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김기덕이 발의한 <끈 이론>을 주목하여 보자.
1연: 번지 점프 끈- 용수철 끈- 아버지 추락의 끈
2연: 추락의 끈- 화살의 끈
3연: 열매의 끈
4연: 청춘의 끈, 낙화의 끈
5연: 유성우 끈
6연: 사냥으로 낙하하는 독수리 끈- 낚시에 매달린 물고기 끈- 끈에 매달린 요요
7연: 인생의 끈- 손가락 끈
8연: 탯줄 끈- 탄생 끈
 
위의 시는 8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생활과 동물, 식물의 여러 극한 생존과 소멸의 상황을 각 연은 독립적으로 주장한다. 작은 ‘단위조직’인 ‘모듈’은 서로 ‘링크’하며 ‘리좀’으로 확산된다. 소단위를 모아서 전체의 끈으로 묶는 방법이다.
 
각 연은 소단위 ‘모듈’인 각각 다른 ‘끈 이야기’를 나열형으로 평등하게 독립적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각 연들은 독립적이며 개별적이지만, ‘끈’이라는 중심축을 중심으로 ‘제목’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여러 상황의 각각 다른 이미지를 나열하며, 평행적이고 독립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다. ‘리좀’ 그물망으로 확산시켜, 한 초점을 향하여 집합적으로 모여 있다.
 
위의 시 쓰기 방법론은 하이퍼 시론에서 주장하는 <무의미 시론>을 증거하고 있다. 1연을 빼버려도 시가 구성된다. 2연을 빼도 시가 구성된다. 3연을 빼도 시가 구성된다. 각각의 연들은, 내용이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는 ‘사물’과 ‘객관화’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칫 감성과 정서, 감동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건조한 과학적인 미의식을 배제하여 문장이 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은 인간이 영원히 궁금해 하는 탐구의 과제다. 김기덕은 위의 시에서, 냉철한 과학적 시선으로 시를 분석적으로 제작하였지만 ‘생’과 ‘사’의 문제를 직시하며 직관적 사유로 하이퍼시의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시켰다.
 
두꺼비 육아법

​​​     김 석 환
​ 
  1.
  두꺼비 중에는 돌연변이 암컷 두꺼비가 있다는데 물 속에 알을 낳아 두면 천적들에게 먹힐 까 봐 제 배 안에 품고 있다가 부화기가 가까워지면 구렁이 굴을 찾아가서 스스로 잡혀 먹혀 구렁이 몸 속 무덤으로 들어간다. 부화된 두꺼비 새끼들은 구렁이 배 속 요람에서 죽은 제 어미 몸은 물론 고단백질 구렁이 몸을 먹고 자라다가 구렁이가 껍질만 남으면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다.
 
  2.
  남은 생보다 더 무거운 짐을 실은 리어카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휘어진 가파른 골목길 끝
고물상으로 들어간다
 
-요 며칠 새엔 너무 짐을 많이 실어 타이어 터지겠슈
-내일 모레가 장가 못 간 막내아들 생일인디 ...미역 한 꼭지 쇠고기 한 근 값... 채울라고 꼭두새벽부터 나와 뒤지다 보니 ...
 
일찍 뜬 별 하나 두꺼비 걸음새로
노파의 발자국을 헤아리다
은빛 다림줄을 내린다
 
어느 이교도들의 사원
돔형 지붕 같이 둥글게 휜 노파의 등
한가운데 추를 맞추려
초롱초롱 눈을 닦으며
 
 
<이선의 시 읽기>
 
 
김석환의『두꺼비 육아법』은 이야기 구조의 ‘옴니버스 소설 기법’의 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뱀에게 자신의 몸을 투척하여 새끼가 파먹게 하여 살리는 어미 두꺼비의 ‘살신성인’의 정신과 파지를 줍는 노파의 생을 ‘두꺼비’의 생애에 비유하였다. 위의 시는 하이퍼시 기법과 일반시의 ‘사유’구조를 합성한 2개의 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의 ‘링크’와 ‘모듈’ 구조와 ‘리좀’적 ‘사유의 확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위의 시를 하이퍼시의 ‘링크’기능에 대입하여 살펴보자.
하이퍼시의 ‘링크’기능을 적용하여 ‘1, 2’의 두 가지 이야기를 병렬기법으로 합성하였다. 2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은 독립적이고 등가적이다.
 
 
또한 ‘길다’라는 이미지를 ‘길’에 비유하여 ‘인생의 길’과 ‘링크’한다. 5개로 이루어진 각 연은 각각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뱀의 긴 몸-구불구불 휘어진 가파른 골목길-두꺼비 걸음새의 별- 노파의 발자국-은빛 다림줄-돔형 지붕-노파의 휘어진 등- 추’ 등 ‘길 이미지’로 ‘링크’된다.
 
 
또한 ‘구렁이’를 중심어로 ‘둥글다’는 중심 이미지를 갖고 있다. ‘둥글다- 뱀의 길고 둥근 몸- 돔형 이교도 사원- 할머니 등’은 서로 이미지가 ‘링크’된다.
 
 
‘링크’ 기능은 하이퍼시의 ‘모듈’구조를 적용할 수 있다. ‘모듈’기능은 각각의 독립된 다른 이야기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시에서 보여주는 스토리와 이미지의 복잡하고 다양한 ‘확장성’은 하이퍼시의 ‘리좀’ 구조의 확장성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위의 시는 하이퍼성을 배제하더라도 스토리의 ‘다양성’과 사유의 ‘확장성’이라는 매력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매력적인 시의 정의는 길어도 설명적이지 않다. 스토리는 압축된 소설구조를 가지고 있다. 진부하지 않고, 반전과 역설이 있다.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빨리 읽힌다. 표현은 상투적이지 않으며 신선하다. 중심어들은 어디서 들어본 단어와 이미지가 아니다. 시인이 처음으로 개발한 단어의 합성과 개성적인 문장표현을 갖고 있다. 스토리는 길어도 지루하지 않으며 탄력적이다. 특히 시는 재미있어야 한다. 좋은 시는 계속 읽고 싶고, 외우고 싶어진다는 특징을 갖는다.
 
꽃들
 
 
김 명 인
 
 
낮잠에서 깨니 머리맡에 꽃소식이 당도해 있다
만선에 실려 오는 꽃나무 한 시절들
그대가 약속을 지키려 근근하듯이
꽃은 제철의 두근거림으로 한 해를 갱신한다
상청 이불 덮고 누웠으니
어디서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한낮
꽃 타래들, 다비에 든 듯 화염 사르는구나!
공손한 꽃아, 피고 지는 건
네 일이지만 나는 너를 빌려 쓰고 내일로 간다
연년세세로 물든 분홍 새 날개 펴니
거처 없이도 견디는 깃발처럼
혼곤한 신생의 새봄 안간힘으로 울뚝하다
오늘은 오늘 꽃, 수만 송이로 허무는 탑
버림받을 사랑이니 돌보라고
이 환(幻), 나에게 흘려보내는 건 아니겠지?
 
 
<이선의 시 읽기>
 
 
  꽃은 ‘여성성’과 ‘미’의 상징으로 대표되며 시와 노래, 무용, 영화의 표상이 되어왔다. 김춘수의「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시인들은 꽃에 대한 이미지를 부둥켜안고, 새로운 표현을 고민하였다. 지금까지 발표된 시보다, 더 좋은 시를 쓰지 않으려면 ‘꽃시’는 이제 그만 쓰라고 선배시인들이 권고할 정도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지금도 시인들은 여전히 ‘꽃시’를 쓰고, 독자들은 ‘꽃시’를 사랑한다.
 
김명인의 「꽃들」은 어떤 새로움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표현기법을 살펴보자. 1행 ‘낮잠에서 깨니 머리맡에 꽃소식이 당도해 있다 ’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피동형 표현기법이 감각적이며 젊고 신선하다.
 
둘째, 구조를 살펴보자. ‘꽃 이미지’를 상상력을 확장하여 < 낮잠- 개화- 꽃소식- 화염- 낙화(버림받은 사랑)- 환(幻) >이라는 ‘시 구조’를 전개한다. ‘꽃’이라는 사물을 인간의 ‘사랑’으로 치환하였다.
 
셋째, 사유와 철학, 직관을 살펴보자. 꽃을 환(幻)으로 해석하였다. 젊은 시절 불타는 ‘화염의 사랑’을 ‘다비식’으로 은유하고 있다. 오랜 직관과 사유로 얻은 철학이다.
 
넷째, 현재진행형 시 구조에 주목하여 보자. ‘혼곤한 신생의 새봄 안간힘으로 울뚝하다/ 오늘은 오늘 꽃, 수만 송이로 허무는 탑/ 버림받을 사랑이니 돌보라고/ 이 환(), 나에게 흘려보내는 건 아니겠지?’(12-15행) 부분이다. 대화와 질문 형식의 사실적 표현은 진정성을 갖는다. 시인과 시적화자의 사랑에 대하여 독자들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시가 작가의 무의식의 발현이라면 시인의 사랑은 진행형이다.
 
 
15행의 짧은 시가 갖고 있는 확장된 공간이 넓다. 감각적 표현기법과 미의식. 철학과 사유. 진정성까지.
‘사랑은 환(幻)이다’라는 깨달음에 젖어― 뿌리는 줄기를 그리워하고, 꽃은 나뭇잎을 그리워한다. 나무테처럼, 반지의 둥근 원처럼.
어렵거나 재주를 부리지 않은 단어와 문장. 지하철에서 만나 하루 종일 가슴에 담고 싶은 시. 생각과 사념에 젖어 지혜를 얻는 시.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 그 넓은 시 공간과 만난다.
 
시간은 
 
 
김 규 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직선을 그으며 간다
  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쓴다
  왼쪽은 과거이고 지금 쓰고 있는 쪽은 현재이고 아직 안 쓴
오른쪽은 미래이다
  지금 쓰고 있는 내 손은 계속하여 오른쪽인 미래로 자리를
바꾸어 간다
  현재는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바로 이 자리라고 펜 끝으로
말한다
  과거는 그대로 기억의 창고에 머물러 있다가 꺼내면 희미
하게 나타난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캄캄한 밤을 헤쳐 나가기 위해 현재
를 만들고
  드디어는 과거와도 한통속이다
 
현재 과거 미래가 하나로 뭉쳐 오늘은 밍밍한 펜 끝이다
 
 
 
    * 김규화 신작시집 『햇빛과 연애하네』중에서
 
 
 
 
 
 
  <이선의 시 읽기>
 
 
  심심하지 않은 시’는 좋은 시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 없고, 다른 시인이 쓰지 않은 ‘표현’은 좋은 시다
  끝까지 읽고 몇 더 생각하며 ‘정독’하게 하는 시는 좋은 시다
  제목과 내용이 따로따로인데, 한 맥을 가지고 제목과 각 연들이 힘차게 ‘관통’하는 시는 좋은 시다.
  설명적이지 않은데, ‘철학’이 있는 시는 좋은 시다.
 
  김규화의 「시간은」은 위의 여러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쉬운 말로 이해되지 않는 문장은 없다. 그런데 여러 번 읽었다.
  위의 시의 매력은 14행의 짧은 시가 갖는 힘이다. 1연 1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일직선을 그으며 간다’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쓴다’라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글을 쓰는 행위를 ‘객관적으로 사물화’하였다. 인생은 직선이다. 물론 왼손잡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갈 수도 있다. 포물선이나 꺾은선 그래프를 그리거나 원으로 순환하는 디자인적인 인생도 있다. 그러나 위의 문장은 시를 향하여 직선의 일념으로 시를 쓴 시인이라면 그 의미를 안다.
  2행을 살펴보자. ‘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쓴다’라고 단순하고 명료하게 글쓰기 행위 자체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위의 1, 2행의 문장은 모두 사실적인 문장이다. 그런데 인생에 대한 상징과 함축을 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내포하고 있는 확장된 문장이다. 그 문장에는 재해석과 직관이 있다.
  1연 마지막 행의 ‘드디어는 과거와도 한통속이다’라는 반짝이는 문장을 들여다보자. 이 한 개의 결론적 문장을 도출하기까지, 시인의 체험과 체득과 여과의 긴 인생여정 과정의 희노애락이 생략되어 있다. 그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독자의 즐거움이다. 평생을 시에 바친 시인이 남기는 한 문장이다. 인생은 펜끝 하나다. 촌철살인의 명징한 문장이다.
  시간에 대하여 쓴 시는 많다. 그러나 김규화의 「시간은」은 다른 시와 변별력을 갖는다. 14행의 짧은 문장은 모두 객관화되어 있다. 직관과 재해석이 빛난다. 집중하게 한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황 학 주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 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그림자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이선의 시 읽기>
 
 
 
   시에서 제목은 반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황학주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멜로 영화처럼 달콤한 제목이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을 가진 제목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사랑하면 살아야 하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 ‘사랑’과 ‘죽음’은 반어적이고 상대적인 언어조합이다. 두 단어는 불안전하고 미지정적인 위기감이 충돌하고 있다. 또한 극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갈등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예술은 자유를 추구한다. 시인은 무의식의 자유까지 확인하려 한다. 황학주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어떤 시점과 관점의 자유를 추구하는 지 살펴보자. 시는 확대해석이 가능하고, 그 확대의 범주가 넓을수록 좋은 시다. 그러나 독자와 평자는 무한대적 범위를 가진 확대경으로 작품을 감상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위하여 죽은 6월의 젊은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은 이 땅, ‘자유’와 ‘죽음’은 엄숙히 검토되어야 할 주제다. 
 
 
  위의 시를 1980년대 ‘자유’를 위하여 희생된 젊은이들 목숨에 바치는 추모시로 해석하여 보자. 온 몸에 신나를 끼얹고 자살한 서울대 어린 대학생들. 학업을 중단하고 3D 산업 노동자로 숨어든 대학생들. 그 시대 자유를 위하여 데모 한 번 하지 못하고, 도서관에 숨어 공부만 하던 젊은이는 아마 죽을 때까지 친구를 향한 죄책감을 지니고 살 것이다.
 
 
  오늘의 풍요와 자유는 80년대에 빚진 자유다.
  매일 매일 ‘당신의 그림자와 마주 보고 달려 있’(3연 3행)는 이 땅의 양심과 지식은 고뇌한다.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 했지만’(1연 1-3행) 그 겨울을 기억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4연 1행) 너도 갈 것이다. 그러나 그날을 잊지는 않는다. 뇌와 눈과 손과 발에, 온 몸에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각인되어 있으므로.
 
 
  그 <겨울 공화국>은 자유와 목숨을 맞바꾸었다.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젊은 목숨을 고드름처럼 매달고 위험하게 떨어지거나 녹았다. 음식문화와 명품백과 아이돌에 열광하는 오늘날의 젊은 자유를 위하여 그들은 겨울을 춥게 보냈다. 건국대 높은 창가에서 꽃잎처럼 젊은 목숨들이 낙화하였다.
 
 
  선각적 지식인은 예지한다. ‘누가 또 매달리는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5연 2-3행). 방만한 자유의 시대에 시인은 긴장감을 느낀다. 게으른 시대에서.
 
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정 호 승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떠날 때는 내 돈을 모두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에게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촛불을 들고 강가로 나가 물고기에게 말한다
  물고기는  조용히  지느러미를  흔들며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내 산을 모두 밭으로 만들어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네 밭을 모두 산으로 만들어 내가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제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때
  기어이 인간을 버리고 혼자 울고 싶을 때
  나는 강가로 나가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운다
  침묵만이 그들의 언어이므로
  침묵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므로
 
 
<이선의 시 읽기>
 
 
 
  대중이 좋아하는 시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쓴다.
  둘째, 대중이 좋아하는 연애시와 사랑시를 쓴다.
  셋째,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 표현을 한다.
  넷째, 자연, 생물, 사물에서 얻은 직관과 사유로 시의 품격을 높인다.
  다섯째, 작가의 해석적 깨달음과 재해석이 있다.
  여섯째, 약자가 되어 진정성과 애환적 어조로 독자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위의 시를 살펴보고, 대중들이 사랑할 만한 요소를 찾아보자.
  첫째, 제목이 짧고, 직접적. 내용도 진정성이 있으며 감각적이다. 바쁜 현대인도 한번쯤은 ‘나무, 풀, 별’에게 말을 건 적이 있다. 
 
  둘째, 대중이 좋아하는 ‘사랑시’. 1-2행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때’ 는 정서적, 정신적, 감정적 사랑 모두를 포함한 사랑의 일반화다. 대중적 사랑이다. 그러나 3-4행 ‘그래도 떠날 때는 내 돈을 모두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에게 단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는 현재적, 현실적 적나라한 사랑의 현재감정이다. 사랑은 원래 ‘통속적’이며 육체적이다. 1-4행은 솔직하다. 직접적이다. 감각적이다. 에로스적 사랑은 대중의 원초적 욕구를 자극한다.  
 
  셋째, 시의 품격. 5행 ‘나는 촛불을 들고 강가로 나가 물고기에게 말한다 ’ 부분을 살펴보자. 미완의 사랑은 번뇌와 번민을 가져온다. 아마도 신라시대 여인들은 촛불을 바위 위에 켜 놓고, 남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주술적 기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촛불을 들고 강가에서 기도를 하지는 않는다. 속도화 시대에 별을 쳐다볼 여유도 없는 현대인의 사랑방법은 아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5행은 아름답다. 기원하는 한 남자의 간절함과 진정성이 있다. 또한 사랑을 통속적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승화’하였다.
 
  넷째, 사유와 감각적 미의식. 2연 1-2행 ‘내 산을 모두 밭으로 만들어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네 밭을 모두 산으로 만들어 내가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를 살펴보자. ‘산’을 남성성으로 ‘밭’을 여성성으로 치환하여 보자. 애로티시즘과 섹슈얼리즘의 극치다.
 
  다섯째, 솔직함과 진정성. 2연 3-4행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제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때/ 기어이 인간을 버리고 혼자 울고 싶을 때’ 부분에서는 ‘진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 사랑의 감정은 이런 거야’ 라고 독자는 절절하게 공감한다.
만약 그 사랑이 나는 유일한 진정성을 가진 우주적 사랑인데, 세상은 부정과 불륜이라고 지탄한다면? 불같은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알 것. 금지된 사랑일수록 뜨겁게 불탄다.
 
  여섯째, 상상력과 동정심 유발. 2연 5행 ‘나는 강가로 나가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운다’ 면, 독자는 영화처럼 무조건 주인공편이다.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우는 비현실적 진실에 독자의 상상력은 심미적 자극을 받는다. 동정과 공감 100%.
 
  일곱째, 객관화와 사실적 표현, 재해석. 2연 6-7행 ‘침묵만이 그들의 언어이므로침묵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므로’ 처럼. ‘침묵’은 사실적인 표현인 동시에 객관화, 재해석을 내포한다. 침묵하는 사랑은 더 아파서, 독자의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초월적 사랑은 어느 시대에나 예술의 주제였다. 갈등과 극적 요소가 강한 내용은 지금도 우리의 안방극장을 독점하고 있다. 연예인이라면 가십거리가 되지만. 평범한 옆집 중년부부의 사랑에 누가 돈을 지불하고 영화관에서 구경할까? 불안정하고 쇼킹한 내용에 대중은 돈을 지불하고, 실 컷 울고 카타르시스를 한다.
 
 
  한 편의 짧은 시 속에는 10권의 대하드라마가 숨어 있다. 위의 시는 필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진정성을 가진 시인의 숨은 사랑 이야기는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독자를 공범자로 흡입한다. ‘시는 소설이다, 영화다’, 정호승은 흥행을 아는 시인이다.
 
옛날 영화 제목 같은
 
                                                  
이 승 하  
 
 
 
  화려한 영상매체의 시대에 나 참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다네
  파격을 모르고 파국을 모르고 파탄을 모르고
  어제는 무사분주 오늘은 무사안일 내일은 무사태평
 
  그 시절에는 영화 수입 업체의 직원도 시인이었다
  ‘수영장’(La Piscine)을 ‘태양은 알고 있다’로 바꿀 줄 아는 감각을(태양이 알기는 뭘 아는가!)
  ‘여상속인’(The Heiress)을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로 바꿀 줄 아는 상상력을(신파의 극치가 사람을 울려!)
  소설가도 소설의 제목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붙이거늘
 
  나 어느새 산문의 시대에 산문 같은 시를 쓰고 있다네
  운율을 잃고서 좌충우돌
  압축미를 잊고서 횡설수설
  때로는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일삼았네
  시란 결국 말을 갖고 노는 말놀음인데
  나, 말을 학대하고 있었네 매질하고 있었네
  먹을 것 제대로 주지도 않고 잘 달리기만 바랐던 것
 
  ‘보니 앤 클라이드’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푸치 캐시디 앤 더 선댄스 키드’를 ‘내일을 향해 쏴라’로 바꿔 붙이는 실력
  나 이제부터라도 역설과 상징을, 아이러니와 알레고리를, 다의성과 모호성을!
  말을 잘 부릴 줄 모른다면 시는 이제 그만 쓸 것!!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한다. 짐짓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듯이, 말을 걸듯이, 내레이션을 하듯. 그러나 진지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한다. 반어적이고 역설적이며 아이러니한 기법이 이 시의 기교다.
 
먼저 제목을 살펴보자. 제목은 2음절로 된 4개의 단어로 조합되어 있다. 전혀 멋을 부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옛날영화처럼 말이다. 그것이 숨은 기교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목에서 다 보여준다. <옛날 영화 제목 같은> 시에 대하여 역설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이승하의 시「옛날 영화 제목 같은」은 네 가지 관점으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1연은 현재적 관점, 잘 먹고 잘 사는 안일주의에 빠진 시인을 고발한다.
2연은 ‘옛날 영화 제목’을 내세운 사회적 관점, 시를 허투루 다루는 사회분위기를 고발한다.
3연은 ‘나’를 내세운 작가적 관점, 시창작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4연은 역설과 아이러니의 미래적 관점이다.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승하의 시는 시에 대한 반성적 국면을 갖게 한다. 시에 대한 자학적이고 니힐하며 시니컬한 접근법이, 반어적으로 시에 대하여 숙연함을 갖게 한다. 시를 가벼이 여겨온 것에 대한 미안함에 부끄러워진다.
 
처음 시를 쓸 때 ‘대중이 좋아하는 시를 쓸 것인지, 시인들이 좋아할 시를 쓸 것인지 결정하라’ 는 말을 선배 시인들에게서 듣는다. 마음속으로 시인도 좋아하고 대중도 좋아할 두 마리 토끼를 꼭 잡고야 말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면, 두 가지 다 놓쳐 버린 어정쩡한 시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승하가 시인으로서 이 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다만 수입영화의 제목을 원어와 달리 번안한 것에 대한 불평일까? 흥행을 앞세워 무지한 대중의 입맛에 맞춘 것에 대하여? 아니다. ‘기승전결’ 중 시의 ‘결’에 해당하는 부분은 4연이다. 결론적으로 ‘말을 잘 부릴 줄 모른다면 시는 이제 그만 쓸 것!! 이라고 시인들에게 경고한다.
3연을 살펴보자. ‘산문시, 운율을 무시한 시, 압축이 안 된 시, 설명 시, 내용과 알맹이가 없는 말놀음 시’를 고발하고 있다.
4연을 살펴보자. ‘역설과 상징, 아이러니와 알레고리, 다의성과 모호성’의 시를 이승하는 찬양하는 것일까? 진지하게 질문하여 볼 일이다.
 
21세기 한국은 시의 춘추전국시대다. 시의 범람과 시인의 범람시대에 살고 있다. 좋게 말하면 문화혁명이요, 나쁘게 말하면 시의 비전문가가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다. 다음 질문을 시인 자신에게 하여 보자.
 
나는 멜로영화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연애편지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일기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기록문이나 신문기사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연설문이나 논문 같은 시를 쓰는가?
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먼저 자족하는가?
 
자기가 쓴 시에 감동해서 먼저 울고 있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자기감정을 독자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동물, 꽃, 새, 물고기들의 생각을 다 아는 척하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시인은 공감과 감동의 천재인가, 엄살꾸러기 거짓말쟁이인가?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지고지순한 존재인가, 객관성을 잃은 변덕쟁이인가?
 
이승하 시인은 오늘의 시인들에게 질문한다. 정직하게 객관화된 대답을 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나와 나
 
 
 
       
김남조  
 
 
 
 
  범선을 타고
  내가 저만치 사라진 후
  부두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내가 또 있다
  더 이상한 건
  떠나간 나와 남아 있는 나를
  흐린 필름을 통해
  무슨 세균검사처럼 점검하는
  세 번째의 나
  이를 진단할 의사
  혹은 판결할 법관은
  어느 방향에서
  언제 도착할는지
 
 
 
<이선의 시 읽기>
 
 
 
시는 시인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시가 메시지를 갖는 이유다. 물론 미술이나 음악도 창작자의 감정이 feel을 받고, 아이디어를 찾을 것이다. 시인은 삼 일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라고 한다. 거울은‘객관화’를 의미한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관찰한다는 뜻이다.
거울 이미지는 시에서 객관화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창작 과정에서 <사물시>는 시인의 감정을 절제하고 사물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사실에 기초하여 시가 더욱 객관화된다. 위의 시는 사물시의 관점과 같이 객관화되어 있다.
 
 
위의 시는‘라깡 이론’에서 ‘자아의 타자화’로 명명할 수 있다. 1-3연은 감정을 배제하고 제삼자의 입장에서‘나’를 분석한다. 자아를 시적거리가 먼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1연을 살펴보자. 1-2행‘범선을 타고/ 내가 저만치 사라진 후’부분에 라깡이론을 대입하면, 자아를 객관화하여 감정을 배제하고 멀리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다른 표현기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먼 과거의 시점에서 현재까지 살아온 사실적인‘나’를 감각적 표현기법 미의식을 주었다. 2가지 요소가 모두 있다. 3-5행‘부두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내가 또 있다’부분을 살펴보자.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를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이다. ‘부두’라는 한 공간과 시점에서 2가지 사건이 실행된다. 중첩 이미지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두 얼굴의 나를 또 다른 내가 관찰한다. 사물인‘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또 다른 타자인‘나’다.
 
 
2연은 라깡 이론과 프로이드 정신분석 비평 방법을 대입하여 보자. ‘그때 거기’라는 시점은 프로이드 정신분석 비평의 핵심 포인트다. 프로이드는 시를 사회부적응자인 시인이, 그 부적응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발표하고, 독자가 공감하여 감동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3행‘흐린 필름을 통해’부분은 오래 전 잊어버린 상처의 기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는 상처로부터 시작한다. 시는 상처에서 피는 꽃이기 때문이다.
4-5행 ‘무슨 세균검사처럼 점검하는/ 세 번째의 나’는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 이론과 프로이드 이론이 중첩된다. 프로이드 이론은 과거를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와서 그때의 사건과 사실을 재정리한다. 각각의 상처와 기억에 이름표를 붙여야 시인은 직성이 풀린다. 그 이유는 먼 과거시점에서 일어난 큰 사건은 어린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힘 있는 어른이 되어 뇌 깊숙이 숨겨왔던 상처를 꺼내 현재에 재현한다. 다시 예리하게 슬픔의 이유와 근원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싶어한다. 시는 시가치유의 과정이다.
 
 
3연은 시창작 과정에 비유한다면 비평과 평론이다. 1-4행‘이를 진단할 의사/ 혹은 판결할 법관은/ 어느 방향에서/ 언제 도착할는지 ’부분을 살펴보자. 시인의 무의식은 자신의 감정을 분석평가해 줄 타자를 기다린다. 또 다른 타자의 객관적인 인정이 필요하다. 작가는 과거의 먼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공감해 주기를 원한다. 그 공감은 독자와 비평가의 몫이다. 혹 직접 상처를 입힌 당사자인 형제나 어머니의 사과가 보다 빠른 감정치료제일지 모르는데 시가 너무 우회하는 건 아닐까?
 
 
김남조의 시를 라깡이론과 프로이드 심리비평 방법을 적용하여 분석하여 보았다. 그러나 거울은 사실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은 실상을 허상으로 반사하여‘보여주기’한다. 작가는 무의식으로 시를 쓰고 자신을 반영한다. 비평가는 창작된 작품에서, 작가의 무의식과 심리를 캐치하고 이름을 명명한다. 시는 선택받고 비평과 분석을 거쳐야 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비평이 활성화되어 새로운 문예사조가 탄생되기를 기대한다.
 
백치시인
 
 
     
이영식  
 
 
 
 
  내 머리맡에 놓인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알 두 쪽은 달렸는데 남자가 없다, 대쪽 같은 기개가 없다
 
  한 때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더운피 개천에 풀어 저자거리에 이름값이라도 한 모양인데, 요즈음은 신변잡기 파리채 놀음이나 다름 아니다
 
  作爲만 있고 行爲가 없다, 活語(?)라면 살 저며 등뼈 내놓고 초고추장이라도 튀어야할 게 아닌가
 
  가끔 언어를 비틀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성찬을 베풀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개다리소반에 찬밥이다
 
  시인의 모자를 쓰고 보니 어깨가 자꾸 움츠러든다, 걸음걸음이 조심스럽고 그림자조차 낮은 곳으로 눕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되어간다, 목 비틀린 채 땅바닥에 헛바퀴를 돌고 있는 외뿔풍뎅이다
 
  세상의 저녁, 어느 한 불빛이 내 시를 읽고 있는가? 우리가 상한 날개 껴입고 헛춤을 추는 것은 아직도 추락할 꿈이 남아있음이라.
 
 
 
 
<이선의 시 읽기>
 
 
이영식의「백치시인」을 읽으면 시인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시인이라는 직업에 대하여 자괴감이 든다. 어느 집단이나 직업군이나 나름의 애환이 없겠는가? 그러나 정신과 정서가 예민한 시인은 늘 오감이 깨어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더 아프게, 더 슬프게, 더 절절하게 느낀다. 시인은 유난히 자의식과 피해의식이 강하다. 그 자의식은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데, 이 심기불편함이 또한 시를 밀어붙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시의 아이러니다.
 
 
이영식이 자평한 시인론을 살펴보자. 7연의 짧은 문장들로 재해석하여 요약적 보여주기를 하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불만족과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1연- 남자다운 기개가 없다.
2연- 내용이 사상이나 이념이 없다. 신변잡기를 쓴다.
3연- 생각만 많고 추진력이나 행동력이 없다.
4연- 언어유희로 성찬을 베풀지만 내용은 빈약하다.
5연- 시인은 위축되고 소심해진다.
6연- 목이 비틀린 채 누워있는 풍뎅이처럼 같은 자리를 맴돈다.
7연- 상처로 쓰는 시는 추락하는 꿈을 향하여 춤을 춘다.
 
 
이영식의 7가지 시인론을 읽으면 콧등이 시큰해지고 머리가 멍멍해진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에게 냉정하게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시인이여, 10가지 질문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맘속으로 대답하여 보라.
 
 
나는 매너리즘에 빠진 시에서 비상할 돌파구를 찾고 있는가?
내 시는 나를 구원하는가?
내 시는 독자를 구원하는가?
내 시에는 새로운 철학이 있는가?
내 시는 새로운 표현기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내 시는 지루하지 않은가?
나는 시를 쓰는 작업이 재미있고 행복한가?
내 시는 역사를 바꿀 힘이 있는가?
내 시는 나만의 상표로 분류할 수 있는가?
내 시는 후대에 새로운 이즘으로 탄생할 수 있는가?
 
 
시인이여,
늘 속이 답답한 시인이여,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는 시인이여,
그대는 영원히 꿈꾸는 이상주의자다. 현재의 자신의 등급보다 늘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봄의 완성
 
 
정용화
 
 

향기를 반으로 접으면 나비가 된다
바람은 오래된 권력처럼 나태해지고
나무마다 온통 초록 연기를 뿜어낼 때 우리는 귀가 큰 구름을 쓰고
우기 속으로 저물어간 꽃 속에 당도한다

 
쉽게 부서지는 입술을 가진 당신
아직 꽃으로 피지 못한 것들이 한 줄의 비밀로 환원될 때
단단한 혀로 만져지는 침묵
나비는 정오 근처를 날고 봄은 수평선으로 확대된다
 

햇빛을 녹여 꽃으로 돌아가는 시간
나비 만으로는 봄을 다 말할 수 없기에 시드는 꽃을 바라보는 일은
늘 위태롭다
그것은 얼룩을 더듬어 일구어낸 몇 개의 발자국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비의 문장은 설익은 고백이라서 향기라는 욕망을 갖고서야 봄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계절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한 묶음의 봄으로 압축되면 투명을 향한 좌표 하나
지니게 될까 나비가 꽃 속에서 접고 있던 날개를 펼 때 비로소 절반의 봄이 완성된다

 
<이선의 시 읽기>
 
 
 정용화 시의 압축파일을 풀면 몇 가지로 요약되는 은유적 이미지와 연결고리를 만난다.
 
 
  첫째, 물질이미지를 형상 이미지로 환원하여 감각적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이름을 ‘나비’이미지라고 명명하여 보자.
  나비 이미지는 <가볍다-날다-욕망과 환상-이상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나비효과 등, 나비는 욕망의 또 다른 매개체다. 나비가 날개를 펼쳤다 접는 이 분화된 모습에서 시는 시작된다. 역으로 향기와 꿀을 얻는 나비의 모습을 치환하여 나비를 향기로 언급하고 있다. 무형태의 물질을 나비라는 현실의 물상으로 표현하여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둘째, 또 다른 기법은 사동을 피동으로 바꾸어 감각적 신선함을 얻고자 하였다. 1연 4행 ‘우기 속으로 저물어간 꽃 속에 당도한다’ 구절과 2연 2행 ‘아직 꽃으로 피지 못한 것들이 한 줄의 비밀로 환원될 때’ 구절과 3연 ‘햇빛을 녹여 꽃으로 돌아가는 시간’에서 보여진다.
 
 
  셋째, 또 다른 기법은 해석적 문장과 단어의 치환과 피동으로 생겨나는 이미지의 ‘낯설게하기’다. 생경한 언어의 충돌로 만들어내는 집합적 이미지가 신선함을 준다. 1연 ‘바람은 오래된 권력처럼 나태해지고’ 구절에서 ‘바람’의 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낯선 문장이지만 사실적 문장이다. 객관화된 이미지다. 멋을 낸다고 감정에 치우친 문장을 마구 투척하면 객관화를 간과하게 된다. 모든 시어와 생각들이 ‘새로움’이라는 옷을 입었다.
  2연 ‘단단한 혀로 만져지는 침묵’을 들여다보자. 평서체 문장은 ‘침묵하는 혀’다. 그러나 ‘단단한 혀로 만져지는 침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더 구체성을 갖는다. 사실 혀로 침묵은 만질 수 없다. 그러나 데칼코마니처럼 표현기법의 묘미다. 똑같은 앞면과 뒷면이 뒤집어 찍으면 멋스럽다. 둘러치나 매치나 시어는 같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같지 않다.
  2연 4행 ‘봄은 수평선으로 확대된다’ 부분을 들여다보자. 평서체는 ‘수평선으로 해가 진다’가 맞다. 그러나 문장을 한번 흔들어주었다. ‘진다’라는 이미지를 ‘확대된다’고 돌연변이적 표현을 함으로써 신선함을 준다. 확대 이미지는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3연 1행 ‘햇빛을 녹여 꽃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들여다보자. 시간의 경과과정이 구체성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체감된다. 사실은 ‘꽃이 햇빛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맞다. 그러나 피동형으로 문장을 도취시켰다.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 스타일 기법은 정용화의 상표다.
  3연 4행 ‘그것은 얼룩을 더듬어 일구어낸 몇 개의 발자국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 구절도 도치와 치환적 문장이다. 또한 피동적 표현이다. ‘잃어버린 발자국’은 상징적으로 떠나간 사람과 떠나보낸 인연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설명적이거나 구태의연하지 않다.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다.
 
 
  넷째, 특징은 기승전결 4연의 시 구절에서 보여주는 나비 이미지의 공통성이다. 1연에서는 향기와 나비를 연결하였다. 2연에서는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개짓과 입소문을 연결시키고 있다. 가볍다라는 이미지를 연결시켰다. 3연에서는 나비와 꽃의 상관관계다. 시드는 꽃을 여성성으로 매치시켜 잃어버린 인간관계로 설정하였다. 4연은 나비의 ‘날다’라는 이미지를 상승욕망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꽃’의 ‘여성성’에 탐닉하는 ‘나비’라는 ‘남성성’을 넘을 때 인간관계의 완성된 이상이 실현된다는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정용화 시의 매력은 단단한 내용을 가벼운 기교로 설교하지 않는 데 있다. 정용화 시의 모든 문장은 참이라는 설정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가볍게 시어에 접근하지 않고 객관적 사물과 객관적 행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사유의 신선함이다. 1연 ‘향기는 반으로 접으면 나비가 된다’ 2연 ‘봄은 수평선으로 확대된다’ 3연 ‘시드는 꽃을 바라보는 일은 늘 위태롭다/... 그것은 얼룩을 더듬어 일구어낸 몇 개의 발자국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4연 ‘나비의 문장은 설익은 고백이라서 향기라는 욕망을 갖고서야 봄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나비가 꽃 속에서 접고 있던 날개를 펼 때 비로소 절반의 봄이 완성된다’ 부분을 살펴보자. 단답형 결어는 심심하지 않다. 싱겁지도 않다. 무게감과 형태미를 은유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정용화의 시를 읽으면 박하향 가득 머릿속에 피어난다. 문장마다 새로움으로 환하다. 뇌가 덤블링을 한 듯 먹먹하다. 예술이 도달할 종착역은 유미주의다.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한 시적 과제이다.
 
푸른 호랑이 이야기
 
 
이경림
 
 
설렁탕과 곰탕 사이에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어떤 생의 무릎과 혓바닥 사이에는
어떤 생의 머리뼈와 어떤 생의 허벅지 살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이 슬픈 눈과 사나운 관능을 가진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저 높은 굴뚝을 천천히 빠져 나가는 푸른 연기와
사라지는 뼈
사라지는 살들 사이에는
 
 
낡은 의자에 앉아 곰탕을 먹는 노신사와
그 앞에서 설렁탕을 먹는 시든 다알리아 같은 아내 사이에는
 
 
그것들의 배경인 더러운 유리창과
산발을 하고 흔들리는 수양버들 사이에는
 
 
날개를 빳빳이 펴고 태양 속으로 질주하는 새
반원을 그리며 느리게 불려가는 바람 사이에는, 그래!
 
 
미친 듯 포효하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시창작 기법에서 조건절을 사용하였다. 다의적이고 함축적이며 이경림의 시각으로 재해석된 조건절인 ‘푸른 호랑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푸른 호랑이’라는 시어에 시의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와 상징과 생략, 삭제의 원리를 적용해 보자.
3연에서 이경림은 ‘슬픈 눈’과 ‘사나운 관능’으로 바로 답변하고 있다. ‘슬픈’과 ‘사나운’은 분명 이질적이고 반대적 개념과 이미지다. 그런데 한 문장, 한 공간에서 같이 사용함으로써 언어충돌, 이미지 충돌을 하고 있다. 이처럼 ‘낯설게하기’ 기법을 적용한 새로운 해석적 용어는 독자에게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독자는 추리소설을 읽듯, 한편의 시에 집중하게 된다. 작가의 답이 궁금하다. 독자를 끝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것, 이경림 시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푸른 호랑이’ 한 마리 때문에 시가 사는 것일까? 아니다, 이경림은 삶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조망한다. 언제나 이경림의 시는 거짓이 없다. 생경하게 뛰어든 거짓인 조건절인 ‘푸른 호랑이’를 참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분명 푸른 호랑이는 가설인데도, 거짓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경림은 생을 단순하거나 하찮은 놀음으로 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경림의 시는 무게감이 있으며 늘 진중하고 진실하다. 그것은 관통의 힘이다. 생을 진지하게 절단하여 단면을 들여다본다. 그 진실에는 늘 중생을 애정과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감싸는 이경림의 넉넉한 마음스케일이 있다. 1-8연의 기법과 내용을 살펴보자. 이경림 시가 미꾸라지처럼 힘있게 치고 올라가는 시 기법을 발견할 것이다.
 
 
1연- 설렁탕과 곰탕을 먹는 노신사와 아내가 있다. ‘먹는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푸른 호랑이’라는 조건을 줌으로써, 시는 갑자기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지며 비약하고 확장된다. 사물인 설렁탕과 곰탕은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라고 생생한 진행형 삶과 생존을 획득.
 
2연- 1행의, ‘무릎뼈’는 남자의 섹스도구로 발군의 힘을 과시하며, ‘혀’는 여자의 콧소리와 함께 유혹과 애교라는 섹스의 중요한 소품이다. 2행의 머리뼈는 남자가 아내를 얻기 위한 설득작업과 생계수단인 직업에 지략이 사용된다. 허벅지살은 여자의 중요한 섹스심볼을 감싸고 있는 관능적인 몸의 일부분.
 
3연- ‘푸른 호랑이’라는 조건절을 다시 강조.
 
4연- 곰탕과 설렁탕의 조리과정이다. 불을 때고 연기가 나며 살, 뼈들이 녹아난다. 이경림은 사라진다는 슬픈 사실로 인식.
 
5연- 낡은 의자에서 곰탕을 먹는 노신사와 늙은 아내를 클로즈업. 사라지는 시간이 주는 슬픈 이미지.
 
6연- ‘더러운 유리창’과 ‘산발하고 흔들리는 수양버들’은 노신사와 아내의 삶의 역경과 고난으로 대비된다. 일반적 인간과 짐승들의 삶의 모습일 터.
 
7연- 7연 1행 ‘태양 속으로 질주하는 새’와, 2행 ‘느리게 불려가는 바람’은 이상과 괴리, 노신사와 아내의 삶을 유추적으로 본 작가적 시점. 그러나 또한 일반적인 사람이 사는 생의 한 풍경화. 질풍노도의 청춘이 저지르는 외도일 것.
 
8연- ‘미친 듯 포효하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부분에 집중을 하여 보자. 노신사와 늙은 아내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갈등하며 미친 듯 싸울 것. 또한 생을 놓는 순간까지 치열하게 살게끔 생은 고난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
 
요약하면 다음의 패턴을 그린다. 1연 설렁탕과 곰탕 먹는 인물, 푸른 호랑이 조전 제시- 2연 상징적 조건제시- 3연 조건 강조- 4연 사라지는 슬픈 것들- 5연 노신사와 아내 사실 규명- 6연 배경 설정- 7연 배경의 내용, 질주하는 새와 바람- 8연 푸른 호랑이 강조.
 
 
 
이경림의 시 한편을 분석하여 보면 그 안에는 삶이라는 과제가 치열하게전개되고 있다. 1연과 8연까지 긴장의 끈이 흐르고 있다. 이경림이 본 생의 뜨거움이다. 또한 슬픔이다. 척박한 조건에서도 치열하게 맞받아치는 생을 향한 의지와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이기도 하다.
 
한 그릇 설렁탕과 곰탕을 먹으면서 옆 자리 손님을 물끄러미 관찰하였을 것. 마음속으로 그들 모습에서 또 다른 생의 그림을 유추하였을 것. 곰탕을 먹으면서 이렇듯 치열하게 삶의 곡선을 찾아낸다. 객관화된 상징화는 강하고 적나라하다.
 
이경림의 시에는 뜨거운 삶의 집착과 뜨거운 삶의 향기가 있다. 용트림하는 생을 맞받아치는 삶의 치열한 경쟁력이 있다.
 
공모(共謀)
 
                                         
정재학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1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2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다3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4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5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야 차 트렁크 열고 시동 좀 걸어놔6 간신히 1층까지 왔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 순찰중인 경찰이 보였다7 이게 무엇입니까?8 하필이면 자루가 찢어져 그의 멍든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9 하하 이건 고구마입니다10 우리는 서둘러 트렁크에 실으려 했다11 한번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12 그림자 하나가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1 옆의 그림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14 네 그렇게 하시지요15 우리는 자루를 펴보였다15 자루 안에는 지푸라기와 고구마가 가득했다16 경찰관과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17 고구마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났다18 방금 찐 고구마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19 그럴까요 네 고맙습니다20 경찰관이 고구마를 한입 물자 썩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21

 
<이선의 시 읽기>
   
  정재학의 시「공모(共謀)」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처럼 시니컬한 반전 매력이 있다. 21행의 문장이 단 10줄로 묘사되어 있다. 시는 짧고 드라마틱하다. 꿈에서 모티브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 전개된다. 대사와 지문과 해석적 문장이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상황전개에 흥미를 갖게 한다.
 
  위의 시는 구조를 살펴보기 위하여, 편의상 각 문장마다 번호를 붙였음을 밝혀둔다. 한 사람의 대사는 편의상 한 문장으로 처리하였다. 각각의 번호들을 시에서의 행으로 해석하였음을 밝혀둔다.
  위의 시는 다음의 여러 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첫째, 의인화와 과장법, 상징법
  둘째, 희곡 형식의 소설적 구도
  셋째, 상상력의 극대화
  넷째, 사회고발시
  
 
  위에서 제안한 4가지 기법들을 시 내용에서 살펴보자.
  첫째, 의인화 기법과 과장법은 1행과 21행에서 잘 나타나 있다. 위의 시가 꿈에서 모티브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대목이다. 2행을 의인화 기법과 과장법으로 해석하면 시가 편하게 읽혀진다. 고구마는 겨울에 말라서 죽은 것 같아도 살아 있다. 싹을 틔우고 새로운 맛있는 고구마를 생산하는 모체가 된다. 두 문장은 황당한 설정이지만 100% 거짓이 아니다. 의인화하면 100% 참이다. 시는 상징과 비유기 때문이다.
  위의 시를 과장법이나 꿈의 구도로 설정하면 시니컬한 반전 매력을 갖게 된다.  그로테스크한 그림이 된다. 1행과 21행은 위의 시의 구도를 탄탄하게 받혀주는 역할을 한다.
  상징법은 내용적 측면이다. <시체-피의자의 도주- 경찰과 대치장면- 극적해결> 구도는 위의 시를 상징시로 읽게 한다. 있을 수 없는 황당사실을 통하여 거짓과 참이라는 사회적 진실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개인에서 출발한 사건이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다.
 
  둘째, 희곡 형식의 소설적 구도를 살펴보자. 1행에서 21행의 문장들은 사건일지처럼 대사와 지문, 급박한 행위로 이루어진다. 기승전결의 구도를 갖고 있다. <시체- 살인- 그림자 피의자의 도주-경찰과 대치상황- 고구마로 판명나는 극적 해결>이라는 구도를 갖고 있다. 대사와 지문처럼 각 행들은 짧고 힘이 있다. 위의 시에서는 대사와 행위, 지문이라는 희곡 형식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은 것처럼 박진감 있다.
 
  셋째, 상상력의 극대화 부분을 살펴보자. 시에서 상상력이 빠지면 국물 없는 건더기와 같다. 상상력의 공간은 시적 미의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말라버린 ‘고구마’라는 사물을 보고 작가는 상상했을 것이다. 1행의 중요한 역할을 살펴보자.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라는 한 문장은 섬뜩하고 극적인 상황을 위의 시에 설정한다.
  말라서 죽은 것 같던 고구마에서 놀랍게도 싹이 트는 과정을 보고 얻은 상상력일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을 극대화시켜 <시체-살인- 피의자- 경찰과 대치- 극적해결>이라는 희곡 형식의 소설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상상력은 현장감을 부여한다. 상상력은 시의 뼈대며 힘이다.
 
  넷째, 사회고발시의 측면을 살펴보자. 고 박종철 사건에서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는 명언을 생각나게 하는 시다.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거짓 간첩사건 등 우리 사회의 ‘섀도우-그림자’를 고발하고 있다.
  2행과 3행을 살펴보자. 고구마라는 한 개의 사물에서 이 시는 출발한다. 그러나 그 전개와 스토리는 반전을 거듭하며 긴장감을 준다. 그 이유는 출연자를 ‘그림자’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융의 ‘섀도우 이론’ 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그림자’는 이 시의 실재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사회적 어두운 측면을 고발하는 상징시로 읽어야 한다.  ‘그림자’라는 인물은 이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찰과 피의자의 대치상황을 만들고 극적상황을 조성한다. 80년대 경찰과 정치권, 시민의 그림자잡기 놀이를 연상하게 한다. 피의자와 경찰이 공모하여, 거짓을 참이라고 바꾸어버린 결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재학의 시를 읽으면 사르트르의 <더러운 손>이 생각난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소시민들은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정치가와 경찰의 더러운 손과 악수를 하는 악몽. 환한 대낮에 꾸는 선명한 낮꿈.
 
너가 바로 나로구나
 
 
 
 
정대구
 
 
 
 저 예쁜 여인과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수작을 걸며 오솔길을 걷고
있는 숫기 좋은 너가 바로 나로구나
 그날 저녁 노래방에 가서 밤새도록 수십 곡씩이나 목이 터져라 줄
기차게 불러대던 너가 바로 나로구나
 탱고면 탱고 왈츠면 왈츠 고전무용이면 고전무용 막춤이면 막춤
못추는 춤이 없는 너가 바로 나로구나
 어느 회식 모임에 나가 품위 있게 음식을 들며 능란한 화술로 좌중
을 휘어잡는 너가 바로 나로구나
 저것 좀 봐 또 저것 좀 봐 모두가 어울려 확 풀어져 거침없이 노는
데도 역시 멋진 너가 바로 나로구나
 아무리 술이 떡이 되어 돌아와도 마누라의 푸근한 품에 따듯이 안
기는 대접을 받는 너가 바로 나로구나
 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금 나에게는 없는 너 내가 부러워하는
너의 못난 짝퉁 나가 바로 나로구나
 
 
 
 
 
<이선의 시 읽기>
 
 
 
  정대구는 인간군상의 여러 행동패턴을 7연의 시로 역설과 아이러니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적으로 왜곡된 성격유형들을 일곱 가지 행동유형으로 분류하여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는 ‘7연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시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논다’를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여 보자. 한 가지는 역설과 아이러니로 분류하여 ‘사회 고발시’와 ‘시인 고발시’로 분류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7연을 순기능적으로 해석하여, ‘논다’를 재조명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먼저 역기능적 측면인 ‘시인 고발시’적인 측면과 ‘사회 고발시’로서의 측면을 살펴보자.  
 
  첫째, 연애질에 능한 사람
  둘째, 노래를 잘하며 신변잡기에 능한 사람
  셋째, 춤에 능한 사람
  넷째, 능란한 외교와 화술로 인기몰이를 하는 사람
  다섯째, 바닥까지 인품을 내려놓고 저질로 노는 사람
  여섯째, 밖에서 술과 향락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는데, 아내는 모르거나 눈감아 주는 경우
  일곱째, 생각만 앞서고 행동은 못하는 짝퉁인생인 나
 
  사회적 왜곡 행동들이 아이러니 기법과 역설기법으로 나열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변잡기와 외교적 재능은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사회적 성공과 명예, 부, 지위를 얻는 방편으로 역할이 크다. 또한 ‘시의 본질과 원리’에는 집중하지 않고, 시단 정치나 자리에 연연하며 ‘시’보다는 ‘위치’에 능한 시인도 있다.
  심각하고, 정직하고, 정확한 사람은 진지하지 않거나 진정성이 없는 위와 같은 행위들을 싫어한다. 인격과 지식, 역사를 바꾸는 일도 아닌 신변잡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판단과 비판은 유보하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성공과 자리에 대한 부러움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설과 아이러니 기법의 애매성과 모호성의 옷을 벗겨보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화법으로 재해석한다면 다음 말일 것.
 
  첫째, ‘시’라는 본업에는 집중하지 않고 ‘연애질’에 열 올리는 시인.
  둘째, ‘시’에 집중해야 하는 에너지를 ‘노래방’에서 노는 일에 다 쓰는 시인.
  셋째, 모든 춤을 섭렵한 날라리과 분위기 메이커 시인 야유.
  넷째, 진정성이나 정신세계를 버리고, 허세와 인기몰이에 연연하는 시인.
  다섯째, 품위를 잃고, 완전 무장해제하여 저질로 노는 시인.
  여섯째, 밖에서는 술과 향락으로 살면서, 시치미 떼는 시인.
  일곱째, 타락할 용기도 없는, 생각만으로 행동하는 짝퉁 시인.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위의 일곱 가지 행동유형은 ‘순기능적 측면’을 가지며 레크리에이션 재창조적 기능이 있다. 신변잡기나 노래, 춤, 화술은 재능으로 인정받으며 능력으로 부각된다.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이다. 
  시는 숨어서 쓰는 일기처럼 솔직한 고백록이다. 위의 시에서 고백하듯 그런 재능은 화자인 시인에게는 없다. 그 부분이 독자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다. 화자가 지금까지 거부한 행동유형들이 ‘나는 바보같이 놀지도 못하고 살았구나’ 라는 후회의 고백일 수도 있다. 뒤늦게 ‘놀이와 놀기’에 대한 강렬한 자극을 원할 수도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논다’를 ‘인간학’으로 접근하여 철학적 깨달음을 얻은 재해석 시로 해석하여 보자.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와 로마병사와의 연애질에서 시작되었다. 여자의 미모와 사내의 힘의 대결구도다. 동서고금에 미인을 싫어하는 영웅은 없다. 억압된 것은 지나치면 언제라도 분출된다. 연령별로 ‘놀이’를 충분히 하지 못하면 ‘사춘기’나 ‘사추기’에 왜곡으로 나타난다. ‘논다’는 명제는 그 만큼 현대사회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며 주목받고 있다. 사회적 성공을 한 뒤 늦바람을 피우는 것. 놀지 못하고 공부만 하던 교수들이 중년이나 노년에 딸 같이 어린 여대생에게 성희롱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 검사나 판사가 늦게 술과 향락을 배우는 일. 최근 여고생에게 바바리맨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제주도 검사장. 제 때 놀지 못하여 병이 된 사회적 왜곡현상이다.  
  위의 왜곡된 ‘일곱 가지 행동유형’들은 사회적 성공 뒤에 허탈함을 메우기 위한 행동유형으로 해석된다. ‘부러움’이 지나쳐 부정적 ‘모방행동’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위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모두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놀이’와 ‘예술’의 기능을 한 번에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시를 쓰며 놀기’이다. 시는 ‘상상력’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있다. 그 ‘상상력’이라는 그물로 극대화된 무대를 흰 종이 위에 맘껏 펼쳐 놓는다. ‘상상력’은 예술성의 근원이다. ‘상상력’은 이성의 지배를 벗어나 우주공간을 지배한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개성적인 성격이 부러운 경우가 있다. 내가 하기는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행동들을 남은 잘도 하며 사람들은 성공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행동은 생각보다 우위에 있다.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이 영화처럼 그려보는 상상일 뿐. 하고 싶지만 억압하고, 가지고 싶지만 갖지 못하고 억압된 것은 ‘술’과 ‘꿈’으로 획득되듯이.
 
  레크리에이션의 힘을 다시 회복하는 ‘순 기능적 측면’과 ‘논다’로 창조적 에너지를 허비하는 ‘역기능적 측면’이 위의 정대구의 시에는 함께 공존한다. 그것이 정대구 시의 매력이다.
 
그대의 별이 되어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 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이선의 시 읽기>
 
 
  서정시의 매력을 몇 가지로 요약하여 보자.
 
  첫째, 제목의 서정성.
  둘째, 압축미- 간결하고 심플하다.
  셋째 진정성- 왜곡, 도치, 미사여구 언어놀이가 적다.
  넷째, 짧은 행과 연, 여백미.
  다섯째, 관념과 재해석 문장- 해석이 쉽다.
  여섯째, 향유층이 넓다.
  일곱째, 운율- 쉽게 외울 수 있다.
  여덟째, 이미지- 선명한 그림이 그려진다.
  아홉째, 단일구성- 시점과 관점이 복합적이지 않고 단일하다.
  열째, 해석- 다양하게 내용이 확장되어 해석된다.
 
 
  위에서 정의한 서정시의 구조에 허영자의「그대의 별이 되어」를 대입하여 보자. 몇 가지 서정시의 조건과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제목이 서정적이다. ‘그대’와 ‘별’은 자연친화적인 제목이다.
  둘째, 6연으로 구성된 행과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압축미가 있다.
  셋째, 진정성이 있다. 사랑의 속성을 1-6연에서 선명하게 간파하고 있다. 1연- 사랑은 물이다. 눈 멀고 귀 먹는다. 2연- 사랑은 정갈하다. 3연- 사랑은 별이다. 눈 뜨이고 귀 열린다. 4연- 사랑은 그대를 잠 안 자고 지킨다. 5연- 사랑은 전부이면서 무이다. 꿈이며 생시다. 6연- 사랑은 기다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고즈넉이 기다린다.
  넷째, 짧은 행과, 연으로 이루어졌다. 여백미가 있다.
  다섯째, 해석이 쉽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비유는 무리수가 없다. 체험을 통하여 습득된 지식이다.
  여섯째, 허영자의 시는 향유층이 두껍다. 쉽게 이해되어 독자가 많다.
  일곱째, 운율이 있어 쉽게 외울 수 있다. 율격이 노래처럼 입에 착착 감긴다.
  여덟째, 선명한 이미지를 가진다. 사랑이라는 관념이 객관화되고, 구체성을 갖는다. 선명한 그림이 그려진다. 1연- 물. 2연- 정화수 그릇에 담긴 물. 3연- 별. 4연- 잠안 오는 밤에 반짝이는 별. 5연- 번뇌. 6연- 기다림.
  아홉째, 단일구성이다. 시점과 관점이 흩어지지 않는다. 현재-과거-현재. 또는 현재-미래-현재-과거-현재 등 오늘날 현대 영화와 같은 복합적 구성이 아니다.
  열째, 해석이 다양하게 확장된다. 체험과 사유가 깊다.
 
 
   허영자의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 아름답다. 진정성이 있다.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이미지는 선명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깊다. 사랑의 체험과 상처, 기다림, 상실의 아픔이 전달된다. 독자의 마음에 깊게 뿌리를 내리는 서정시의 힘이다.
 
  서정시는 정물화가 아니다. 이발소에 걸린 그림이 아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생략된 수채화다. 시의 구조가 변화무쌍한 21세기 시단에서 쉬르리얼리즘, 다다이즘, 미래파, 하이퍼, 초현실주의, 비트가 경쟁하는 21세기에도 서정시는 경쟁력이 있다. 살아서 꿈틀거리며 독자의 마음을 강렬하게 집중시킨다. 눈으로 읽는 지성적인 현대시. 외우고 싶은 간결한 서정시.누가 승리의 선두 주자가 될 것인가? 보편적인 대중이 존재하는 한, 어느 장르와 경쟁하든 서정시는 영원한 맞수일 것.
 
우화(羽化)*
 
 
                                            
오혜정
  
 
  초록빛 누드가 기어간다
  유연한 곡선의 리듬이
  몸에 결을 새기며 간다
  날개를 향한 동사들이 곡선 안에서 꿈틀댄다
  주름들이 계절을 당기면서 간다
  온몸으로 끌어당겨지는 먼 곳의 봄빛들
 
  빈 가지에 매달린 주머니는 심심하다
  동사들은 껍데기 안에서 차렷! 자세로
  리듬이 ( )안에 갇힌다
  곡선의 결들을 꿈꾸며
  변신을 꿈꾸는 주머니가 딱딱해진다
 
  지난 계절은 바람이 ‘딱딱하다’
  껍데기의 형용사를 벗고
  누드에 날개꽃이 피어난다
  우화羽花
  유연한 곡선이 피어난다
 
  욕실에 앉은 내가
  지루한 형용사를 벗겨낸다
  날개짓이 없는 나는
  매일매일 불완전변태 중
 
 
* 우화(羽化) : 곤충이 유충 또는 약충이나 번데기에서 탈피하여 성충이 되는 일.
 
 
 
 
 
 
 
 
 
 
 <이선의 시 읽기>
 
 
 
   오혜정의 「우화(羽化)」는 우화(羽化)의 과정을 동사와 형용사, ( )와 은유하고 있다. 위의 시 1-4연에서 중심 동사와 형용사를 살펴보자.
 
  1연: 기어간다-간다-꿈틀댄다-간다-끌어당긴다(애벌레 상태)
  2연: 심심하다-갇힌다-꿈꾼다-딱딱해진다(번데기 상태)
  3연: 딱딱하다-벗는다-피어난다-피어난다(탈피 과정)
  4연: 벗겨낸다(탈피 후 나비 상태)
 
  1연은 초록빛 애벌레가 기어가는 형태를 ‘동사’로 보았다. 사실적인 애벌레의 움직임을 ‘동사’로 정의하고 5-6행에서 ‘주름들이 계절을 당기며 불러오고, 온몸으로 봄빛을 끌어당긴다.’고 사유하고 있다. 표현은 피동적 표현기법으로 멋과 사유를 더하였다. 
  2연은 고치 안에 갇혀 있는 번데기 상태의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를 ( )에 갇힌 것으로 보았다. 4-5행에서 ‘곡선의 결들을 꿈꾸며, 변신을 꿈꾸는 주머니가 딱딱해진다’고 사유하고 있다. 직선은 딱딱하다는 관념적 재해석을 하고 있다.
  3연은 딱딱한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의 날개는 곡선이다. 곡선은 유연하다는 재해석을 내리고 있다.
  4연은 곤충의 우화에 현재의 ‘나’를 연관시켰다. 비상을 꿈꾸는 현재 불완전변태 중인 ‘나’를 조명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중요한 요소는 아래에 제시한 시구들이 하이퍼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행들을 살펴보자.
  1연 4행 날개를 향한 동사들이 곡선 안에서 꿈틀댄다’
  2연 2-3행 ‘동사들은 껍데기 안에서 차렷! 자세로/ 리듬이 ( )안에 갇힌다’
  3연 ‘껍데기의 형용사를 벗고/ 누드에 날개꽃이 피어난다’
  4연 ‘욕실에 앉은 내가/ 지루한 형용사를 벗겨낸다’ 
 
  감각적이고 새로운 하이퍼시의 표현구조다. 곤충의 우화과정인 ‘탈피’의 형태를 품사 중 ‘동사’와 ‘형용사’로 은유하고 있다. 감각적이며 새로운 표현기법이다. ‘사물-행위-품사’로 이동하며, 하이퍼시의 ‘러너’ 기능인 ‘건너뛰기’를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적이며 색다른 표현기법이다.
  과거의 시는 1단계나 2단계 러너의 사물시였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상상력의 이동거리’가 멀다. 1, 2단계를 동시간대에 이동하거나, 3단계나 4단계로 훌쩍 ‘건너뛰기’ 한다.
  과거의 서정시와 현대시는 ‘과거-현재-과거-현재’ 패턴의 시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과거-현재-미래-현재’ 시점으로 사물과 사건은 ‘상상력의 순간이동’을 한다. 현대 공상영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표현에 거짓은 없다. 건너뛰기를 하였으나 허황되지 않고 객관화되었다.
  사물의 움직임과 형태를 아주 이질적인 품사와 조합하는 새로운 위의 시 기법은 시에 새로운 감각과 미의식을 준다. 이 새로운 형태미와 방법론은 하이퍼시의 시창작 방법론으로 분류된다. 아버지 오남구 시인이 시작한 디지털 시론을, 딸이 확장시켜 하이퍼시로 실현시킨 것은, 시단의 아름다운 역사다. 시창작 방법론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확신이다.
 
존재의 불안 그리고 내일 자 신문
 
-꿈 4 ․ 사회 동물들의 이기적 사회엔 희망이 없다
 
 
 
 
 
                                                   
이영준
 
 
 
 
나는 고층 빌딩과 빌딩 옥상을 가로질러 놓은
겨우 발로 짚을 만한 넓이에 나무를 밟고
고소 공포에 떨며 건너고 있었다.빌딩 옥상을 통해 땅으로 가려는 필사적 전념을 했다.
 
그러나 어느 옥상도 땅으로 가는 문은 없었고
고소 공포를 피할 여유를 주질 않았다.
옥상은 작열하는 태양으로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무 위에서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하다 겨우 매달려 있을 수 있었다.
 
머리 위 태양은 너무 뜨겁고 빌딩 속 사람들은
나의 위태한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무관심하다.
살려달라고 소릴 질러 대지만 전혀 동요가 없다.
 
문득, 아침 신문에 읽었던 인조인간론이 떠올랐다.
입력된 일만하는 인조인간들
 
감정은 인간의 영원한 실수
감정은 인간을 진보시키지 못하는 병
감정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병, 병․․․
 
나는 더 이상 지탱할 의지를 상실했고 손을 놓았다.
(존재에서 탈피해 편히 쉬고 싶었다.)
 
그, 추락 위로
아침 신문과 똑같은 기사의 내일자 신문이
희망 없는 온 도시를 눈 내리듯 뒤덮어가고 있었다.
 
 
 
 
<이선의 시 읽기>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고독’이라고 정의하였다. 현대인에게 절망에 이르는 병은 ‘불안’이라고 생각한다. 예전 수동식 건축방법으로 빌딩과 빌딩 사이에 나무 사다리를 올리고 공사를 하는 인부들을 비계공이라고 하였다. 비계공은 종종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일을 한다. 아슬아슬한 높이에서 좁은 나무판자에 서서 일하는 그들은 ‘불안’의 대명사였다.
 
이영준의 시는 그만의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문의 사설이나 평론적 구조라고 정의하여 보자. 해석적 문장과 존재론적 질문은 까뮈를 연상시킨다. 까뮈는 그의 작품 「이방인」에서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그는 살인행위를 개인의 의지보다는 ‘강렬한 햇빛’이라는 조건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위의 시에서도 2연 3행 ‘옥상은 작열하는 태양으로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기 때문’과 4연 1행 ‘머리 위 태양은 너무 뜨겁고’ 부분에서 까뮈적 해석을 하고 있다. 햇빛은 화자의 심리상태의 ‘배경’이면서 ‘불안’의 ‘이유’이며 ‘조건’이다. 부조리한 현대사회의 ‘분리불안’적 문명요소를 ‘뜨거운 햇빛’에 치환하고 있다.
 
6연을 1-3행을 살펴보자.
감정은 인간의 영원한 실수
감정은 인간을 진보시키지 못하는 병
감정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 ․․․
 
6연에서 언급하고 있는 ‘감정’은 아날로그 시대의 일차적 유물처럼 생각될 것이다. 까뮈의 존재론적 철학인 ‘부조리’와 전혀 관계없는 이질적 개념인 것 같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조리’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적이고자 하는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지 못하여 ‘불안’이 야기된다. ‘감정’의 개성주의를 주장하면서 개인적 일탈이 일어난다. 감정은 부조리한 ‘갈등’의 주역이다. 현대사회에서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불안신경증’은 심리적 현대병이다.
 
  위의 시는 개인주의적이면서 사회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소외’와 ‘불안’으로 죽어가는 빈민계층의 사회상과 지식계급인 이상주의자의 ‘절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현대 정보화시대에는 개인은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부속품들은 서로 다른 부속품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제 시간에 ‘그때’에 ‘그곳’에서 정확하게 나사인 부속품의 임무를 완수해야 신상품이 생산된다. 부속품은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그 자리를 이탈하거나 한눈을 팔면 생산에 오류가 발생한다. 한 파트의 일원으로 스스로 존재할 뿐이다. 부분은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부모나 이웃의 농경법을 전수받으며 협력해서 살던 고대 농경사회와 달리, 현대인은 이 ‘부분’이라는 조건에서 ‘불안’이 시작되었다. 부분인 개인은 다음 생산과정을 억압받으며, 자기 위치를 버텨내야 한다. 방만하고 과도한 물질의 시대에, 극도로 자유를 제한받는다.
 
  이영준의 시는 웅변과 주장을 하지 않아도 현대사회의 바닥을 고발하고 있다. 논문처럼 논리적이고 냉정하게 비정한 현대사회를 고발한다. 다만 개인의 불안구조를 ‘보여주기’할 뿐인데, 사회전체를 대표한다. 시적거리가 먼 객관적 문장이 해석적이며 단정적이다. 문장은 짧고 힘이 있다. 이영준 시의 존재론적 주제와 독특한 구조는, 그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쥐눈
 
 
 
배홍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룻바닥 터진 틈으로
빠끔히 내다보는 쥐, 쥐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서 어두워져버린,
어두워서 슬픈 눈이 더듬는
내 몸뚱이에
어스름이랄까, 그늘 같은 것이 번졌다
 
벌써 축축했으므로
허물어졌으므로, 슬픔은
검고 고요해도 무방했겠지만
또랑또랑 고이다 까만
눈물 한 방울로 반짝여 들어간 곳, 그곳
 
쥐의 눈 안에, 나는
동그란 심장 하나로 앉아 있었다
 
물렁해진 맥박 안으로
놈의 팔딱거리는 박동이 밀려들어 왔다
 
 
 
  * 배홍배 신작시집 『바람의 색깔』중에서
 
 
 
 
 
<이선의 시 읽기>
 
 
 
  배홍배 신작시집 『바람의 색깔』중에서「쥐눈」을 선택하여 조명하는 이유는 일상성에서 벗어난 제목 때문이다. 상투적이고 비슷비슷한 시를 읽으면 머리가 복잡하고 흐릿해진다. 그러나 다른 시인이 언급하지 않은 독특한 내용과 구조의 시를 접하면 눈이 반짝 뜨인다. 집중하게 된다.
 
  시인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시적화자를 통하여 작품 속에 ‘나’를 투사한다. 위의 시
1-6연에도 ‘쥐’와 ‘나’가 혼용되어 있다. 혼용 구조는 아래와 같다.
  1연: 쥐
  2연: 쥐
  3연: 나
  4연: 쥐, 또는 나
  5연: 쥐+나
  6연: 나+쥐
 
  쥐와 내가 오버랩되어 한 개체로 해석된다. 1-6연의 중심어를 정리하면 ‘쥐’의 상태와 상황을 통하여 ‘나’의 상태와 상황, 하고 싶은 말을 유추해 낼 수 있다.
  1연- 바스락 소리
  2연- 작은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쥐눈
  3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어두운 슬픈 눈, 그늘
  4연- 축축하고 허물어진 슬픔, 검고 고요, 눈물
  5연- 쥐의 눈 안에 있는, 내 심장
  6연- 나의 맥박 안에 들어온, 쥐의 맥박
 
  1-6연을 요약하면 ‘어둡고 습한 곳에 숨어 사는 소외된 쥐, 관심과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잊혀져 아무도 찾지 않는 쥐, 그러나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살아있음을 외치고 싶은 쥐’의 모습이다. 그 소외된 쥐의 모습은 시적화자인 ‘나’의 모습이다. ‘작가’의 무의식에 숨어있는 심상일 터.
시는 행복한 자랑질이 아니다. 소외와 절망, 고통과 그늘을 짊어지고 사는 시인의 모습에서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프로이드는 사회화에 실패한 시인에게 독자는 공감한다고 하였다. 행복한 시는 시가 아니다. 행사 시나 동시에 가깝다.
 
  산문과 사진작가로 시의 길에서 멀어졌던 배홍배 시인이, 시간을 되돌려 워밍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축축하고, 어둡고, 물렁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또랑또랑 반짝이는 쥐의 눈’으로 ‘바스락, 소리를 내는’ 시인에게 ‘팔딱거리는 쥐’의 심장박동소리가 접속되어 있다. 빠끔 새로운 시의 문을 열고 나오는 싶어 하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배홍배 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빗대어 이야기한다. 객관적으로 진솔하게.
 
아래세상
 
 
 
신진
 
 
 
아래세상이 궁금하다
비행기를 탈 때도
아래세상이 궁금하다
산길 오를 때에도
자꾸 내려가고 싶다
일 층 집에 앉아서도
자꾸 궁금한 아래세상
땅바닥을 내다본다
* 신진 신작시집 『미련』중에서
 
 
 
 
 
<이선의 시 읽기>
 
 
신진의 신작 시집『미련』중에서 <장자론>이나 <노자론> 같은 ‘2부, 3부’의 짧은 시를 주목한다. ‘지하철역에 <신진 코너>를 만들어 시리즈물로 전시하면 어떨까?’ 대중들이 반길 것 같다. 지하철역에 걸린 시는 15행 이내의 짧은 시다. 위의 시는 8행의 짧은 시다. 행도 짧고, 쉬운 한글로 썼는데, 깊이와 넓이와 해학이 있다. 세상사는 이치가 보인다. 신진의 시를 ‘놓음의 미학’이라고 이름하여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한 시는 ‘놓음’이 아니라, 시집 제목처럼 ‘미련’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이 이 시의 반전이다. ‘역설과 아이러니’ 기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화자의 심리상태를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하여 보자. 첫째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정말 형이하학적인 ‘아래 세상’에만 관심을 갖는 현재상황이다. 둘째는 문자 뒤에 숨은 화자의 심리상태를 유추해 보는 방법이다. 형이상학에만 관심을 갖고 살던 꿈꾸는 이상주의자인 청년기를 지나서, 중년의 나이에 형이하학적인 아래세상 것에 관심을 가져보려고 새롭게 시도하는 도입상황이다.
첫 번째 상황에 집중하여 해석하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짧은 사유 시’ 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상황은 ‘아이러니와 역설’ 구조의 시로 해석된다. 본 장에서는 위의 시를 두 번째 상황으로 분류하여 해석하고자 한다.
 
인생은 마흔이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마흔 살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다.
‘매슬로우의 욕망’의 법칙을 살펴보면, 인간의 욕망은 삼각형 구도를 가지고 있다. 첫 단계인 먹을 것, 입을 것이 충족되면, 인간은 그 다음 단계인 정신적, 정서적 욕망을 충족하려하고, 꼭지점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 한다.
 
20세를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성년으로 칠 때, 마흔 살은 20년 정도 사회생활을 한 성숙한 시점이다. 인간은 마흔의 분기점에 서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생을 뒤돌아보게 된다.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신의 입신양면만을 위해 산 사람은 생활태도를 반성하며 이웃을 돌보는 자선의 삶으로 우회한다. 또는 반대로 자기를 버리고 배우자, 자녀, 가족, 이웃 등에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한 사람은, 자기가 없다는 허탈감과 자괴감에 빠진다.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거나, 직업을 갖거나 사회활동을 시작하여 존재확인을 하며 성취감을 가지려 한다.
 
위의 시의 중심어인 <아래세상>은 신진의 시집 제목처럼『미련』이라는 단어로 해석되고 요약된다. 위의 시의 화자를 불특정한 한 사람으로 치환하여 대입하여 보자. 그 시점을 40세 중년이 아니라, 노년기 인물을 대입하여 보자.
 
중년보다 노년에 돌아보는 개인의 삶은 더 극적이며 파국적 국면이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삶이든 실패한 삶이든 누구에게나 인생은 진정성 있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파노라마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재상연할 때, 후회도 되고 시집 제목처럼 ‘미련’도 남을 것이다.
 
인간은 향이상학을 꿈꾸면서 몸은 향이하학인 세상에 산다. 꿈을 꾸는 청년기에는 위를 보면서 살았을 것이다. 꿈이 현실을 밀어내고 아래세상을 우습게 보았을 터. 미련도 없었을 터. 그러나 노년기가 되면 ‘지금까지 알고, 생각하고, 실행하던 삶의 방식이 옳은 것이었을까?’ 질문하게 될 것이다. 어떤 부분은 후회도 될 터. 인생은 치열하게 살아온 뒤에 남는 미련 같은 것. 후회는 아니지만 자꾸 궁금하여 뒤돌아보는 것. 연애처럼 실행하지는 못하지만 흥미로운 것.
 
신진의 시는 단어와 문장, 행간에 더 많은 이야기를 숨겨 두고 있다.
1행의 ‘궁금하다’는 단어는 가능성이며 열린 기회다. 궁금하여야 과학과 역사가 새 옷을 갈아입는다. 새로운 도약과의 비밀이 벗겨진다. 궁금하지 않으면 ‘개미, 잠자리, 개구리, 도마뱀’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 궁금할 때 사물이 옷을 벗고 내재된 속내를 보여준다.
 
신진의 ‘아래세상’은 성공가도를 달리다 잠깐씩 뒤돌아보는 간이정거장 같은 휴지다. 산 정상을 향하여 땀 흘리며 오르다가, 바위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는 보랏빛 쑥부쟁이 들판을 보는 환희다. 내가 보지 않고 간과했던 나의 자화상이다. 부끄러움이다. 시의 뒷면이다.
 
순례자
 
 
권순자
 
 
저녁이 되면 낯선 마을 처마 밑을 맴돌지요
달빛이 휘영청 길을 열어주지만
길도 추워서 바람이 머물지 않지요
한 몸 뉠 곳 없는 고양이
주뼛주뼛 처마 밑을 서성거리지요
 
흙에 묻힌 역사는 다시 살아 되풀이 되는데
창백한 꽃들이 달빛에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데
 
어둠이 왜 자꾸 짙어만 가는지
꽃들의 잔기침 소리, 목울대를 흔드는 소리 어느 새
길고 가늘게 뻗어 밤안개로 피고 있어요
안개끼리 기침하고 있어요
 
뿌연 고통의 뿌리들이 사방에 퍼지고 있어요
 
새 가슴 두드리는 넝쿨손, 허우적허우적
반짝이는 푸른빛들이 날카롭게 허공을 조각내는 한밤
앞서간 순례자들이 뼈를 이어
하늘로 다리 놓고 있어요
 
 
 
  * 권순자 신작시집 『순례자』중에서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길고양이의 삶을 여성적 화자의 목소리로 5연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1-5연의 중심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연- 주뼛주뼛 처마 밑을 서성거림
  2연- 흙에 묻힌 역사, 추위
  3연- 어둠, 안개, 기침
  4연- 고통의 뿌리
  5연- 앞서간 순례자들의 뼈를 이어 하늘로 다리를 놓음
  위의 중심어를 합성하면 길고양이의 삶이 한눈에 그려진다. 화자인 시인이 측은지심을 가지고 관찰한 길고양이의 삶이 재현된다.
  위의 시 제목에서 말하는 ‘순례자’는 삶의 순례자가 아니다. 죽음의 순례자다. 험난한 삶을 살다가 희생된 길고양이들의 뼈(주검)들이 이어진 순례자의 행렬인 것이다. ‘결’ 부분의 아이러니한 내용이 이 시의 제목이 되었으며, 매력 포인트다.
 
  길고양이는 야생의 상태에서 먹이가 부족하고 영역다툼이 심하여 4년 이상 생존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보통 2년 정도 사는데 음식쓰레기 봉투를 없앤 뒤로 그나마 썩은 밥이나 생선도 먹을 수 없게 된 현실이다. 야생에서 들쥐나 메뚜기, 비둘기를 잡아먹고 산다. 이러한 때에 권순자의 야생 길고양이를 향한 애정과 관심에 주목하게 된다. 
  사실 길고양이의 삶은 위의 시 제목「순례자」처럼 따뜻한 삶의 터전이나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다. 고양이는 영역을 지키며 사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순례를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는 주인이 떠나도, 그 자리를 지킨다. 장소를 옮겨 살지 않는 이유는 다른 영역에 침입하면 기존에 살고 있던 다른 고양이로부터 테러를 당하기 때문이다.  
  들개, 들고양이, 야생동물로 분류되어 밀렵의 대상이던 야생동물을 인간이 길들이면서 애완견, 애완고양이라는 사랑스런 이름으로 불린다. 요즘 개와 고양이는 현대사회의 소외된 개인에게 반려동물로서, 가족의 자격으로 인정받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사라져가는 아프리카 야생동물은 인간의 큰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동물과 인간은 영원히 대치된 관계에서 벗어나 밀접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야생동물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경외의 대상, 노동력,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 재미있는 구경거리, 인간과 다른 독특한 특성으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다. 
  위의 시는 사회부조리,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인 인간에게 향하던 시선을 동물에게로 확장시키고 있다. 야생동물에 대한 시는 인간에게 정서적 위안을 준다. 인간은 외로움과 소외를 동물에게 위로 받으며, 동물은 인간에게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준다는 것을 믿는다. 아직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고양이들을 가족으로 따듯하게 맞아들여 반려동물로 받아 줄 날을 기대해 본다. 야생동물에 대한 보호와 관심과 애정은 그 사회의 문화의 척도다.
 
해바라기
 
 
김예태
 
 
지하철에 앉아 색종이를 접던 여자의 손가락에서 해바라기가 피어났다
 
“이번 역은 동작 현충원역입니다”
여자가 주섬주섬 해바라기를 들고 내린다
(햇살 부서져 내리는 강물을 건너와 여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
 
피웅피웅
총알들이 햇살의 레이더망처럼 날아다니고 있다
 
베티고지* 낙동강 전투에서 승전보를 전하고 쓰러진 병사들이
노란 철모를 벗어 푸른 하늘에 푹 찔러 넣고 무리지어 외치고 있다
“우리는 꽃 같은 색시를 두고 왔슴다”
 
소피아로렌이 해바라기 가득 핀 들판을 걷고 있다**
 
묘역에서 병사들이 걸어 나와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소피아로렌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6.25때 35명으로 중공군 800여 명을 물리친 최고의 승전 전투지역
** 영화 해바라기의 한 장면-신혼에 소집영장을 받은 남편과 비극적인 이별을 한다
 
 
 
<이선의 시 읽기>
 
 
 
김예태의「해바라기」는 다음의 여섯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제목 ‘해바라기’가 주는 원형성- 태양을 상징한다. 태양을 향한다는 이미지다. 이 시에서는 전쟁에 징집당한 어린 병사들의 무조건적인 격한 애국심이 해바라기와 일맥상통한다.
 
둘째, 1-6연의 연들은 각각, 모두 제목 ‘해바라기’ 와 연계되어 있다.
1연- 해바라기를 접다.
2연- 해바라기를 들고 내린다.
3연- 햇살 레이더망(원형 컷 사진 같은 해바라기 이미지)
4연- 꽃 같은 색시
5연- 해바라기 들판
6연- 해바라기 배경 기념사진 촬영
 
셋째, 두 사건이 현재라는 한 시점에서 행위가 일어나는 동시다발성 현재형 시점이다. 1-2연의 여자의 행위는 현재형이다. 그런데 3-6연의 행위도 현재형이다. 6. 25 사변 때 일어난 행위가 순간이동 기법으로 같은 시간대에서 일어난 듯 착각하게 한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그림이 포개진다. 이러한 방법은 영화에서 오버랩 기법으로 많이 등장한다. 과거회상 씬에서 처리하는 영화기법을 시에 도용하였다.
 
넷째, ‘전쟁과 젊은 병사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아래의 표현들이 서정적으로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전쟁 내용이라기보다 사랑 시 같은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제목-해바라기
1연- 색종이접는 여자- 손가락에서 해바라기가 피어났다
2연-(햇살 부서져 내리는 강물을 건너와 여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
4연- 노란 철모를 벗어 푸른 하늘에 푹 찔러 넣고
5연- 소피아로렌이 해바라기 가득 핀 들판을 걷고 있다
6연- 병사들이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소피아로렌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특히, 6연에서 젊은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사실적 표현을 쓰지 않고, ‘묘역에서 병사들이 걸어나와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소피아로렌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압권이다. 상상력의 공간이 몇 개의 시뮬레이션을 동시에 보여주며 시를 하이퍼적이게 한다.
 
다섯째, 러너기능과 리좀- 시가 촘촘하면 답답하다. 각 연들이 건너뛰기를 함으로써 공간의 여백이 장면전환을 하며 답답하거나 지루함을 덜어준다. 그물처럼 얽힌 사건과 해바라기 이미지가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하고 있다.
 
여섯째, 주석의 효과-시를 설명적이지 않게 한다. 만약 시의 내용으로 이야기식으로 주석 내용의 사건을 펼쳤다면, 분명 시는 지루하고 설명적일 것이다.
 
시는 표현예술의 꽃이지만 내용에 철학적 질문과 인생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는 이슈가 없으면 말장난이 되기 쉽다. 김예태의「해바라기」는 감각적이며 가벼운 터치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언농으로 가볍지 않은 것은 내용의 비중 때문이다. 6.25 전쟁과 어린 병사의 죽음이라는 절대적 위기상황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는 내용인가, 표현인가?’라는 화두를 오늘 다시 던져본다.
 
환호
 
 
김규화
 
 
후반 선제골을 터뜨린 축구선수 리의
세로 쩍 벌린 입에다
시인 〇와 함께 캔 삶은 햇감자 한 알
퐁 집어넣어줄까
감자는 흙 속에서 수줍은 듯 숨어 있다가
호미를 옆으로 뉘어 살살 긁으면
하얀 속살을 드문드문 내놓는다
두근두근 내 가슴이 뛰고
철통 같은 근육의 오른팔을 수평으로 뻗은
리 선수의 가슴이 뛰고
 
초록 풀잎을 단 줄기를 고스란히 뽑아올리면
조르르 따라오다가 감자는
흙 속에 다시 주저앉고
나는 감자를 따라잡으려고 왼손을 휘젓고
리좀은 떨어지고 오른손의 호미는 캐내고
중심은 변두리로 감자 따라, 호미도 중심 따라 변두리로
끊어진 리좀이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다양성으로
쿠이아나 판타나우 월드컵경기장에는
이과수폭포보다 더 센 붉은악마들의 입
그 옆에서 흰 감자 캐는 〇시인과 나
 
리 선수가 지르는 고함소리에 튀어나온 감자가
칠레 산맥을 넘어가는 소리
 
 
 
 
 
<이선의 읽기>
 
 
 
김규화의「환호」는 ‘하이퍼시’의 ‘리좀 기법’을 적용하여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살리고 있다. 김규화는 청각 이미지의 하이퍼 신작시집 『날아가는 공』을 발표하여 <펜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환호」는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변용하여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 부분은 기술적인 장치가 필요한데, 하이퍼시의 리좀기법을 적용하였다. 리좀 기법은 하이퍼시의 링크 기능이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확산되는 기법이다. 각각의 연들은 독립적이면서 자립적으로 제목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단선구조의 시가 다선구조의 형태를 갖게 된다.
 
위의 시에서 실행된 몇 가지‘리좀 구조’를 분석하여 보자.
 
첫째, 영문자‘O'라는 문자 이미지를 사용하였다.‘환호’라는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변환하였다.
O자 모양은 하이퍼시의 리좀 구조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리 선수 입모양 O - O 시인- 햇감자 한 알 모양 O - 둥근 월드컵 경기장 모양 O - 붉은 악마들의 입 O- 응원하는 고함소리 입모양 O- 리 선수 입에서 튀어나온 감자 O - 감자 둥근 호미질 모양 O’ 등 8개의 ‘O’ 자 모양이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리좀으로 단선구조의 시를 다선구조로 확산시켰다. 중첩 이미지는 시를 확장시키며, 새로움과 청량한 느낌을 준다.
 
둘째, 운동 이미지로 움직임과 생동감을 준다.
운동 이미지는 시에 운동감과 움직임을 주어, 시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하이퍼시의 특징 중에서도 리좀은 다양한 확장된 공간을 갖는다.
‘리 선수 고함소리- 철통 같은 근육의 오른팔- 리 선수 가슴이 뛰고- 칠레 산맥을 넘어가는 소리’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열정과 환희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리좀의 ‘연결’과 ‘러너’ 기능으로 이미지를 확장시켰다. 시를 읽는 독자는 실제로 축구경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리좀은 긴 설명을 요하는 신문기사의 영역을 단 몇 줄로 압축시켜 준다.그러나 효과는 배가된다.
 
셋째, 하이퍼시의 순간접속 시간 기능이다. 필자가 처음으로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인데, 하이퍼시는 상상력의 순간이동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자유로이 한다. 전혀 관계없는 것들도 결합된다.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을 ‘러너’한다. ‘시간의 개념’과 공간과 공간이 해제된다.
‘쿠이아나 판타나우 월드컵경기장’과 ‘감자 캐기’는 전혀 관계성이 없다. 독립적이다. 그러나 ‘TV 방송’과 ‘TV시청’이라는 순간접속을 통하여 ‘축구’와 ‘감자 캐는 나’도 순간접속을 한다. 전혀 관계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들끼리 하이퍼적 리좀으로 묶어 버린다. 독립된 의미없는 연들이 의미의 기능을 갖게 된다. ‘삶은 감자’를 먹으며 ‘TV시청’을 하고 있는 ‘나’와 ‘O 시인’은 쿠이아나 판타나우 월드컵경기장과 순간접속 한다. ‘감자-축구장-나- O 시인’이 한 시간대에 순간접속 한다.
이처럼 하이퍼 시의 리좀은 거미줄처럼 관계성이 없는 독립된 연들이 관계성을 갖는다. 위의 시 ‘2연 7행’ 의 문장처럼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다양성’으로 리좀이 실행된 것이다.
 
넷째, 각각의 연과 행은 독립적이다. 삽입과 삭제가 자유롭다.
위의 시는 분명 ‘축구경기’ 이야기다. 그런데 난데없이 ‘감자 캐기’의 비중이 커진다. ‘축구경기’를 밀어내고, 사물인 ‘감자’에 집중하고 있다. ‘햇감자- 왼 손을 휘젓고- 오른손의 호미는 캐내고- 중심은 변두리로 감자 따라- 호미도 중심 따라 변두리로’ 리좀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처럼 하이퍼시는 의미의 영역을 해제한다. 부분이 전체를 제압한다. ‘의미’보다는 ‘구조’와 ‘형태’와 ‘표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선의 시 읽기> 100호 특집으로 어떤 시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김규화의 시「환호」를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환호’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다.‘환호’라는 제목은 기쁨과 탄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100호의 숫자‘OO’와 위의 시의 시각 이미지인‘O'의 중첩은 리좀적으로 연결되며 매력을 갖는 요소다.
또한 김규화의「환호」는 문덕수 시인이 한국에 최초로 소개하고 주장한 새로운 문예사조인 <하이퍼시> 의 리좀 구조를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시다.
필자는 <하이퍼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표현’과‘내용’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실현하기 위하여 고민하였는데, 위의 시는 내용이 있는 하이퍼시다.
앤지오신문 <시가 있는 마을- 이선의 시 읽기> 100호 기념 평론으로 하이퍼시를 소개하는 이유는, 필자가 평론을 쓰면서 ‘창의성 추구’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100호까지 평론의 차별화를 위한 노력을 나름대로 하였다. 각각의 시의 구조를 분석하여, 역으로 시 창작 방법론과 기법을 소개하였다. 시를 공부하는 시인들에게 시 창작의 기본지침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이선의 시 읽기> 100호 발간을 자축하며, <앤지오신문- 시가 있는 마을>에서 작품성 있는 좋은 시를 만나기를 바란다.
 
황사
 
 
허순행
 
 
햇살이 빈혈을 앓기 시작했다
뼈마디가, 웅크렸던 몸을 펴서 그림자를 키웠다
먼지를 뒤집어쓴 시간들이 수채구멍으로 들었고
바람이 황허강을 건너왔다 허공을 떠돌던 어둠이 붉
은 눈물을 흘렸다
물기가 돌지 않던 자궁에서 낮달이 바깥을 기웃거
렸다
 
(흰옷의 여자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한다)
여자: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어요 바람 속에서 바람
처럼 사라지는 말들을 따라다니며 당신을 찾
았어요 걸인처럼(또는 광인처럼) 누군가의 문
을 두드리기도 했어요 떨어지는 해를 지켜보
다가 울음을 토하기도 했어요 그 사람을 만난
건(나로서는) 행운이었지요 오랜만에 정말 깊
은잠을 잤어요 당신이 찾아왔을 때, 그게 생
시였을까요? 유령처럼 서 있는 당신이 실물이
라는 게, 만질 수 있는 실체라는 게 무서웠어
요 골목 끝에서 숨죽여 웃는 운명을 본 듯도
했어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문
뒤로 숨는 나를 지켜봐야 했어요
굴헝처럼 깊은 남자의 눈이 허공을 헤매고 있다
 
밤은 캄캄한 어둠을 기어 나와 달리는 승용차에 올
라타기도 한다 물에 빠진 달그림자를 흔들어보다가
모퉁이에 살고 있는 흰 꿩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구두 뒷축으로 달라붙는 여자의 목소리를 떼어내다가
어둠과 충돌한 그가 어둠 속으로 쓰러졌다
 
밤이 손을 내밀어서 한 생애를 덮어주었다
울음을 매달고 서쪽으로 옮겨가던 별자리가 천년
후의 빛을 쏟아냈다
 
 
 
 
 
 
<이선의 시 읽기>
 
 
 
극시 형태의 꿈의 형상화 작업
 
 
위의 시는 꿈을 형상화한 극시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5가지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고 시의 법과 방법론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극시 형태의 시로서 드라마틱하다. <해설- 여자의 대사- 해설>의 1인 모노드라마 형식이다. 2연 도입부에서 ‘흰옷의 여자와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한다’는 지문으로 사별한 여자가 죽은 남자를 만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2의 등장인물인 남자는 대사가 없이다. 망자인 남자는 허상이다.
또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관찰자’ 시점인 소설 기법을 차용하였다. 위의 4연의 시는 2연만 극본이다. 1연, 3연, 4연은 해설, 또는 지문에 해당한다. 출연자는 두 명이다. 침묵하는 남자와 일방적으로 말하는 여자다. 배역은 두 명인데 한 목소리만 들린다. 모노드라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1연- 해설(또는 지문)
2연- 극본(대사: 여자만, 남자는 침묵. 독백으로 보아야 함)
3연- 해설(또는 지문)
4연- 해설(또는 지문)
모든 시점과 관점은 여자 중심이다. 여자가 극한 상황에 처했음을 나타낸다.
 
둘째, 꿈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황사와 꿈의 ‘불명확성’을 ‘중첩 이미지’로 형상화하였다.
「황사」는 원래 흙과 먼지가 쌓인 곳 위에 또 계속 쌓이는 ‘중첩 이미지’와 시야를 흐릿하게 가리는 ‘불명확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다 잊어버리고 흐릿한 꿈과 연계된다. 위의 시 제목「황사」는 황사현상을 꿈으로 치환하여, 꿈의 ‘중첩 이미지’로 환원시켜 극적으로 갈등구조를 만들고 있다.
‘햇살이 빈형을 앓고, 물기가 돌지 않는 자궁에서 낮달이 낮달이 바깥을 기웃거린다.’ 부분처럼 이 시에서는 명확한 것이 없다. 남자의 부재로 인하여 여자는 불안정하다. 사물과 스토리가 황당무계하고 불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황사와 꿈의 갖고 있는 동질성이다. 모든 것이 부조리한 상황이다.
 
셋째, 시의 기법은 ‘해리현상’처럼 ‘자아’를 ‘타자화’하고 있다.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 기능’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객관적으로 타자화 된 자신을 만난다. 자아는 온전히 타자화되어 극을 전개해 나간다. 위의 시에서 ‘여자’는 망자가 된 ‘당신’을 만나고 있다.
1연, 3연, 4연은 자신의 상황을 영화를 보듯이 관찰한다. 시적화자는 여자인 ‘나’이다. 제 삼자의 눈으로 관찰하여 냉정하게 상황을 기록한다.
 
넷째, 극은 독백적이며 고백적이다. 그 이유는 2연의 일방적인 여자만의 대사 때문이다. 고백록이나 일기처럼, 이야기를 혼자 한다. 대사를 치고 있지만 대사를 주고받는 대상이 없다. 그 형식은 독백체이다. 그런데 1, 3, 4연이 시에서 ‘객관화’에 큰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시적 거리’가 가깝다. 그래서 2연의 톤은 직접적이며 감정적이다.
위의 시의 화자는 시인이고 청자는 독자다. 독백은 니힐하고 직접적 효과가 크다.
 
다섯째, 자동기술기법과 무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작품이다. 프로이드는 ‘꿈의 기능’을 숨겨져 있던 ‘무의식’이 의식화하여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았다. 무의식은 ‘술, 꿈,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의식 밖으로 표출된다. 꿈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은 상상력의 비약으로 신비스러운 경향을 띤다. 생시에 의식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상상력의 순간접속으로 시를 감각적이게 한다.
위의 시에서는 망자를 초대하여 현실에서처럼 ‘여자’가 ‘말’을 건다. 또한 위의 시 1연, 3연, 4연에서는 ‘자동기술기법’으로 소설의 ‘지문’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시가 시인의 감정의 산물이라면, 시인은 탈출과 극복을 시도한다. 니힐하고 우울한 현재의 갇힌 상황을 꿈으로 극복하려 한다. 현대인의 절대고독과 극한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사건과 사실만 일방통행으로 존재할 뿐. 드라마적 요소와 ‘꿈’이라는 불확실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며 여자의 고독과 불안정을 클로즈업 시킨다.
 
갱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든 여자의 우울하며 건조한 삶을 반영한다. 여자는 죽은 남자를 밤에 꿈으로 초대하여 고독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행동의 제한을 받는 꿈은 여자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극시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위의 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생각하게 한다. 무의식의 흐름을 무리하지 않게 객관화시킨 작품이다. 시적 화자와 시인 자신, 망자와의 흐르는 이미지가 제목인「황사」와 조화롭다.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불투명성과 제한성을 극적장치를 하여 선명하게 해결하고 있다.
 
가을 현상現像 · 4
 
 
최진연
 
 
누런 벼메뚜기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는 들판
그 위에 아득한 코발트빛 하늘
하얀 줄을 긋고 은빛 반짝이며 사라지는 비행기
콜로라도의 강물에
누군가 발을 담갔다가 얼른 들어올린다
아이들은 아직도 더러 풀잎 물레방아를 돌리고
종이배 하나가 얄랑얄랑 흐르다가 빠지는
마리에나 해구보다 깊은 바다엔 하얀 섬 하나가
전혀 흔들리지 않고 흐르고 있다
곤돌라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끌려온 베네치아의
바다는 그 사막도시의 발등도 묻지 못하고,
저절로 떠가는 배에서 남녀가 어깨를 안고 부르는
아라리 같은 곡조의 사랑 노래 소리
갑자기 부르르, 부르르 몸을 떠는 나무들
스산한 노래에서 검은 시베리아 바람을 보았을까
잎들은 울긋불긋 물들어 조각품처럼 굳어지고,
콜로라도 강물보다 찬 동강을 건너
김삿갓이 햇살 설핏한 산등을 넘어가고
병 속의 메뚜기 몇 마리가 꼼작거리고 있다
 
 
 
 
 
<이선의 시 읽기>
 
 
최진연의 「가을 현상現像 · 4」는 하이퍼시의 여러 조건들을 함의하고 있다. 그 중 하이퍼시의 <모자이크 기법>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모자이크 기법은 각각의 다른 이미지들을 사각형 구도 안에서 모자이크 그림처럼 연속적으로 배치한다. 그 특징은 각 연들은 개별적이며 독립적이다. 위의 시에 나타난 모자이크 기법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자.
 
 
첫째, 내용 중심의 <중심어모자이크 기법>
 
각 행에 나타난 ‘중심어’를 요약하여 ‘중심어- 모자이크 기법’을 살펴보자. 위의 시는 샤갈의 그림처럼, 이미지 덩어리들이 낱개로 뭉쳐 있다. 시 한 편에 매우 많은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겹쳐 있다. 필자는 이 기법을 ‘겹쳐 그리기 기법’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1행: 벼메뚜기 들판
2행: 하늘
3행: 비행기
4행: 콜로라도 강물
5행: 발을 담그다
6행: 풀잎 물레방아
7행: 종이배
8-9행: 바다의 섬 하나
10-11행: 곤돌라, 라스베이거스, 베네치아 바다
12행: 배 위의 남녀
13행: 아라리 사랑노래
14행: 부르르 몸을 떠는 나무
15행: 스슨한 노래, 시베리아 바람
16행: 울긋불긋 물든 잎
17행: 콜로라도 강물보다 찬 동강
18행: 김삿갓
19행: 병 속의 메뚜기
 
자동기술기법으로 각 행들은 바로 위의 행을 이어 받아서 또 다른 이야기를 더하는 구조다. 현대시의 자동기술기법의 특징이다. 각각의 다른 작은 모자이크들을 합성하여 한 개의 큰 그림을 완성한다. 위의 시는 행마다 각각 다른 사물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그러나 한 개의 모자이크 그림처럼, 각각의 행들 안에 있는 단어들은 각각 독립적이다. 한 단어도 밀리거나 소외되지 않고 선명하다.
 
 
둘째, 색깔 중심의 <색깔 이미지- 모자이크 기법>
 
2행: 코발트빛 하늘
3행: 하얀 줄, 은빛 반짝이며 사라지는 비행기
6행: 풀잎 물레방아(녹색)
8행: 하얀 섬 하나
15행: 검은 시베리아 바람
16행: 잎들은 울긋불긋 물들어
 
색깔 이미지는 시에 감각적 미의식을 준다. 위의 시는 단편적인 한 가지 색깔을 벗어나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하여, 반짝이는 모자이크 이미지를 만들었다.
 
 
셋째, 동사 중심의 <운동 이미지- 모자이크 기법>
 
1행: 펄쩍펄쩍 뛰고 있는 벼메뚜기
2행: 아득한 하늘
3행: 사라지는 비행기
5행: 발을 담갔다가 얼른 들어올린다
6행: 풀잎 물레방아를 돌리고
7행: 얄랑얄랑 흐르다
8-9행: 섬 하나가 흐르고 있다
10행: 곤돌라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에 끌려온 베네치아
11행: 바다는 사막도시의 발등도 묻지 못하고
12행: 저절로 떠가는 배, 어깨를 안고 부르는
13행: 사랑 노래 소리
14행: 부르르, 부르르 몸을 떠는 나무들
15행: 세베리아 바람을 보았을까
16행: 조각품처럼 굳어지고
17행: 찬 동강을 건너
18행: 햇살 설핏한 산등을 넘어가고
19행: 메뚜리 몇 마리가 꼼작거리고
 
1-19행까지 모든 행에 동사를 사용하여 운동감을 주고 있다. 동적 움직임은 시에 생기를 주는 역할을 한다. 시에 현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생동감 있고 펄쩍펄쩍 시가 살아 있다.
 
 
넷째, 상상력의 시간이동, 공간 이동 중심의 < 상상력- 모자이크 기법>
 
위의 시의 특징은 상상력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번 필자가 주장한 ‘상상력의 시간 이동’과 ‘상상력의 공간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행과 연은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벗어났다가 다시 ‘순간접속’ 한다.
<상상력의 공간이동>의 예는 <들판- 하늘- 비행기- 콜로라도 강- 바다- 섬- 베네치아- 사막도시- 배- 시베리아- 동강- 김삿갓- 병속의 메뚜기> 다. 시의 스케일을 크게 한다.
또한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한 예는 <메뚜리를 잡는 아이들- 들판- 사라지는 비행기- 콜로라도 강물에 발을 담갔다 들어올린다- 풀잎 물레방아를 돌리다- 종이배가 흐른다- 섬 하나 흐른다- 곤돌라와 라스베이거스에 끌려온 베네치아- 부르르 몸을 떠는 나무들- 잎들은 울긋불긋 물들어- 동강을 건너- 김삿갓이 산등을 넘어가고 - 병속의 메뚜기가 꼼작거리고>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모자이크 그림이다. 상상력의 시간적거리가 멀다. 먼 거리의 사물과 행위를 <순간 접사>하여 동시에 펼쳐 보인다.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위의 시는 복잡한데 선명한 것이 장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난해한 기법이나 문장이 없다. ‘하이퍼시’ 시 구조를 가진 자립적이며 독립적인 모자이크 이미지가 선명하다. 하이퍼시의 ‘ 중심어 모자이크 기법’은 샤갈 그림의 이미지 덩어리들의 집합과 같다. ‘색깔 이미지 모자이크 기법’은 몬드리안 그림의 구성과 같다. 상상력의 자유로운 시간이동과 공간 이동은 시에 감각적 미의식과 운동감을 준다. 중첩 이미지의 복합적 구도는 파도와 강물의 물결과 반짝임을 생각나게 한다.
 
사랑이여 흐르다가
 
 문 효 치 
 
  
사랑이여 흐르다가 
물처럼 흐르다가
  
여울이 되어 소리도 내며 흐르다가 
파도가 되어 몸살처럼 부딪다가 
 
사랑이여  
물처럼 거침없이 흐르다가
맑고 곱게 흐르다가  
 
때로는 얼음처럼 꽁꽁 막히다가
다시 터져
속 시원히 터져서 흐르거라
어허 사랑이여
 
  
 <이선의 시 읽기>
 
  인간의 DNA는 죽기 전까지, 사랑에 대한 욕망을 추구한다.  ‘사랑’은 ‘생명’이라는 말과 같다. 대중은 사랑 시를 좋아한다. 시인도 사랑 시를 좋아한다. 누구나 사랑에 관해서는 한 마디쯤 할 말이 있다고 믿는다.
  문효치는 사랑을 ‘흐르다’로 풀이하였다. 그런데 긍정문이 아닌, ‘흐르다가’라는 애매한 단어가 중심어이다. 단순한 유동적인 ‘흐른다’가 아니다. 이 시의 묘미는 ‘-다가’라는 어미에 반전매력이 있다. ‘흐르다가’는 한 방향으로의 전진이 아니다. ‘행위’와 ‘방향성’의 전환을 예고하는 단어다. 아래 1-4연의 변화된 형태를 살펴보자.
 
  1연: 물처럼 흐르다가
  2연: 소리도 내며 흐르다가/ 파도가 되어 몸살처럼 부딪다가 
  3연: 맑고 곱게 흐르다가
  4연: 얼음처럼 꽁꽁 막히다가/ 다시 터져/ 속 시원히 터져서 흐르거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갑자기 낮은 곳으로 흐를 때는 바위에 몸을 부딪쳐 풍란이 인다. 얕은 계곡에서 얼어붙었다가도, 심연의 깊은 물길은 뚫려 맑은 물이 흐르기도 한다. 사랑도 물과 같다.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때 사랑은 폭발적 힘을 갖는다.
 
  위의 시에서 사랑의 관점은 3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한 사람이 ‘타인을 알고- 연애를 하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사랑의 과정에서 좌충우돌 겪게 되는 에로스적인 연애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여러 타입의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사랑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화해와 조화로 해석할 수 있다.
  셋째, 사람들의 다양한 사랑의 방식과 모양과 성질을, 소설의 ‘전지적 작가적 시점’으로 관찰한 다시점적 시각의 시로 해석할 수 있다. 
  
 
  문효치의 시는 사랑이라는 관념을 잘 파악하고 있다.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정서는 시의 자질이다. 정서가 행복하고 안정된 시는 힘이 약하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여러 개의 사랑을 소유하고 살아간다. 정신적 사랑, 정서적 사랑, 육체적 사랑 등 여러 종류의 사랑이 복합적인 형태로 꼬여 있다. 사랑은 물과 같아서 유동적이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이선의 시 읽기> 위의 시는 제목의 ‘디자인’ 구조를 가진 하이퍼시다. 그림 이미지의 하이퍼적 요소인데, 제목에서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의미의 영역’ 안에서 ‘새로움’에 도전하고 있다. 위의 시는 1연에서 하이퍼성을 강하게 나타낸다. 동네 골목길에는 가게 한 칸 그 안이 텅 비어 간판의 첫 자와 그 다음 자도 텅텅 비어 ‘어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가게‘만 홀로 버티고 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 입이 없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한쪽 귀와 턱만 있다 1연 2-7행의 ‘비어 있음’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가게 안이 텅 비어 있다/ 간판 글자도 텅텅 비어 있다/ 간간가게만 홀로 있다/ 눈 입이 없다/ 한쪽 귀와 턱만 있다‘ 모두 ’비어있음‘의 이미지다. 또한 그 이미지들은 ’객관화‘된 ’사실‘이다. 또 하이퍼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 )로 구성된 2연이다. ‘(나는 떨어져나간 그 자리를 훈민정음의 초성으로 채워본다)’ 2연은 ‘사실’과 ‘상상력’이 공존한다. ‘간판이 떨어져 나간 가게-가난한 어머니, 학생, 개밥바라기 별’까지 각각의 연들은 하이퍼적으로 ‘링크’ 된다. 4연은 개연성을 가지며 개별적이나 위의 시의 ‘디자인 구조’에서 ‘배경’ 역할을 한다. 2연과 4연은 짧은 1-2행으로만 되어 있고 1연과 3연은 5-7행으로 길다. ‘시는 디자인이다’라는 필자의 의견을 확인하는 연구성이다. 우연히 시장을 지나가다가 간판 한 자가 떨어져 나간 간판을 보고, 상상력의 ‘공간이동’을 하고 있다. ‘반찬가게-어머니-군것질하는 아이들-개밥바라기 별’까지 의미화 영역 안에서 ‘상상력의 공간이동’을 하였다. 또한 ‘현재성의 반찬가게’에서 ‘과거의 어머니’와 ‘미래의 아이들’까지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하고 있다. 사실 반찬가게에서는 떡볶이나 오뎅을 팔지 않는다. 그건 분식센터에서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상력의 산물이다. 필자는 ‘의미의 하이퍼시’를 필자의 시에서 추구하여 왔다. 상상력의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무의미’에 집중한 하이퍼시와 달리, ‘새로운 의미구조’의 ‘구성요법의 시 디자인’에 집중하여 하이퍼시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하이퍼시의 구조를 ‘리좀’과 ‘모듈’로 좁게 한정하였다. 또한 ‘무의미’ 와 ‘기호’에만 집중하였다. 그러나 <하이퍼시 클럽> 회원들은 여러 번의 토론을 거쳐 하이퍼시를 ‘새로움’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였다. 하이퍼시의 중요한 요소인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상상력의 공간이동’(필자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 을 무시하였다. ‘연과 연의 단절’, ‘행과 행의 단절’과 ‘수직이동’과 ‘수평이동’ 내용도 하이퍼시의 중요 요소로 첨부해 둔다

 

미궁에 빠지다
                                  
                                            고경숙
 
 
 
악마가 뜯어낸 창살사이로
반년 치 달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당신이 만지작거리던 모자 끝에
깃털 하나를 꽂기 위해 죽었던 새는
목통을 펄떡이며 바다를 건너왔다
타로 점을 보던 인도여자가
친친 독사를 감고 손을 뻗는 이곳은
교교한 달빛이 점거한 차가운 밀실
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것 같은 
안개 속 기억은 꿈의 예감과 일치해서이다
여명까지 불과 얼마를 남겨두고
창백해지는 당신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이지러졌다 피어나고 
불같이 타다 사그라드는
달의 칼날에 베인 수많은 팔목에서
붉은 장미꽃잎이 떨어진다
탄탄한 밤을 건너오며 수없이 죽고
수없이 되살아날
피보다 진한 바람의 체액
아무도 거두어 갈 수 없는 여기,
지상에 존재하고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그대와 내가 미궁에 빠질 수 있는 
영원한 은닉처.
 
 
 
 
 
 
 
<이선의 시 읽기>
 
 
고경숙의 시는 에로틱한 환타지와 언어의 폭력성이 거칠고 대담하다. 거친 사내의 호흡과 여인의 애욕이 꿈틀대는 드라마틱한 남녀의 절정의 장면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가장 솔직하고, 가장 예민한 태초의 몸의 언어다. 보들레르와 릴케가 꿈결처럼 만난다. 무속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강렬한 문장들은 속도가 빠르다. 다음 장면으로 독자를 급박하게 끌어들인다. 
 
위의 시는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짧고 강렬한 시행 속에 긴 드라마가 함축되어 있다. 연극의 구성요소 중에서 ‘절정’부분만 잘라 놓은 영화 같다. 그러나 그 짧은 ‘절정’ 속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1부는 <모자-깃털-새-타로점-인도여자-독사>라는 중심단어로 집약되는 <마술>과 <점>의 강렬한 이국적 이미지다. ‘낯선 당신’과 자유와 호기심, 상상력은 무한대의 환타지적 사랑을 꿈꾸는 랑의 전개와 발단부분이다. 
 
2부는 <달빛-밀실-안개-당신의 창백한 이마-성호>라는 중심단어로 집약된다. ‘이곳’이라는 ‘밀실’이미지는 장소를 나타내며 ‘객관화’를 실현한다. 사랑의 과정이 그려진다. 그달빛사랑처럼 열정과 냉정, 상처와 배반을 반복한다. 화자는 사랑의 마무리로 ‘성호’라는 ‘종교의식’을 집행한다. 화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보자. 자신이 저지른 사랑에 후회없이 당당하고자 하는 화자의 심리는 자신의 사랑을 숭고하게 격상시키려고 하는 고자 심리적 특징을 보여준다. 
 
3부는 <바람의 체액-미궁-영원한 은닉처>라는 단어로 집약되는 ‘재인식’ 단계다. 사랑의 결론이다. 그 결론은 ‘미궁’과 ‘은닉’을 선택하였다. 화자의 선택을 심리분석 하여 보면 ‘미궁’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결론을 피하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인의 무의식도 결론을 회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회피’보다는 적극적인 ‘사유’와 ‘철학’에 접근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철학적이거나 깨달음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랑의 본질이며 생리일 것이다. 
 
연애시는 부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궁금증을 일으키고, 섹시해야 한다. 또한 슬프고 아파야 한다. 멜로 드라마처럼. 연애의 방정식은 본시 짧은 만남, 긴 고통이다. 사랑은 아픈 거다. 
 
연애시는 감정에 빠지기 쉬운데 고경숙의 시는 미사여구가 없다. 사족을 붙이지 않고 문장을 힘껏 집어던진다. 직선적이고 솔직하다. 구조와 문장에 힘이 있다.

 

그리운 곡선
 
 최종천
 
곡선의 애무를 받고 싶을 땐
욕조의 물속으로 들어간다
아주 옛날에 물은
곡선을 느꼈다 그 기억 본능
녹이 슨 배관을 따라 흐르는 동안
놓아버리고 이제 나의 몸을 만나리라
“이것이 나의 곡선이에요”
나는 담겨진 물만큼이나 
곡선을 그리워했던 건 사실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섹스를 하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을 때
나는 욕조에 담겨진 물에 대하여 말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욕조의 강요로 섹스를 한다
사랑이라는 강박관념에 갇힌 성을…
당연하게도 우리들 대다수는
성이 없는 사랑보다는,
사랑이 없는 성을 원한다! 그것은 옳은 일이다.
성이 사랑을 낳았다.
이제 본론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성은 유일한 實在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허구이다, 특히 예술을 핑계삼아
성을 수식하거나 상징화하지 말자.
오늘 나는 헤어진 그녀를 생각 하다가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운다.
느껴보고 싶었던 그녀의 곡선이 나를 휘감는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 은 관념이기에 형태가 없다
실재가 아니다 영원하다
실재하게 하고 싶었던 그녀와의 사랑, 이라는 관념
바다에까지 흘러넘치는 나의 형태. 나의 실재
나의 孤獨! 
 
* 2012년 제5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시집『고양이의 마술』(실천문학사, 2011) 중에서
 
 
 
 
이선의 시 읽기
 
 
최종천의 시는 단순한 모티브에서 출발하여 끝까지 치고 들어가 철학적 관념을 이끌어낸다. 단순한 사실과 사물과 사건에서 출발하여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다. 최종천의 시는 힘이 있다. 어느 작품도 그의 색깔이 선명하며 작품성이 고르다. 시인의 성격처럼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솔직당당하다. 단정적이고 결론적이며 시적 논리가 강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선명하고 개운하다. 
  
그의 시는 삼단논법이다. 부드럽게, 말랑말랑하게 접근하여, 점층적으로 점점 강렬한 펀치를 날리며 강직하게 결론을 맺는다. 그것이 시적 힘으로 나타난다. 위의 시「그리운 곡선」도 1단계-4단계까지 점층적 ‘기승전결’ 구조를 갖고 있다. 
  
1단계 - 여체와 사랑과 섹스 이야기로 부드러운 도입부. 교사가 수업시작하기 전에 하는 1-2분 동안의 주의집중 학습과 같다. 사랑얘기로 한껏 분위기를 업시킨다. 2단계 - ‘사랑의 강박관념’을 얘기하며 슬슬 논조를 펴기 시작한다. 3단계 - 본론으로 들어가서 ‘주의주장’을 강렬하게 논문 발표하듯 전개한다. 시인지 논문인지 헷갈린다. 4단계- 결론. 제목과 도입부, 상황을 다시 언급.고 서정적 자아를 내세워 고백적 결론. 부드럽지만 강렬하게 마감.
 
위의 시에서 각 단계를 대입해 살펴보자.
  
1단계(기) - 욕조안 풍경(1-12행)
2단계(승) - 사랑학 이론 펴기 시작(13-17행)
3단계(전) - 본론 ‘이제 본론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성은 유일한 實在이다.’(18-21행)
 
4단계(결) - 결에 해당.  ‘욕조 물/ 그녀의 곡선/ 그녀와의 사랑에 대한 기억/ 이별/ 사랑의 관념과 철학 도출/ 나의 고독’ 을 시적 논리로 다시 정서환기함. 부드러운 서정적 자아로 마무리.(22행- 마지막행)  최종천은 실천적 노동과 실존적 행동주의자다. 어느 시에서 ‘말을 줄이라’고 강요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가 시에서 말하면 꼭 그것이 옳은 것 같다. 최종천의 힘이며 능력이다. 
 
위의 시에서도 시인은 단순한 행위인 ’욕조에서 목욕을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진지하게 ’사랑학 개론‘을 전개한다. ’육체냐, 정신이냐‘ 논쟁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사물과 사실에서 출발하여 관념과 철학으로 독자를 힘있게 끌고간다. 
   
인간에게 성은 유일한 實在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허구이다, 특히 예술을 핑계삼아 성을 수식하거나 상징화하지 말자. 최종천이 위의 시에서 하고 싶은 결론은 ‘성은 사랑이다’ ‘성은 육체다’ 고로 ‘사랑은 물질이다’는 관념적 철학을 얘기하고 싶은 거다. 또한 ‘사랑도 관념이다’는 논쟁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맺어버린다. 
 
그런데 묘한 것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그의 어투에 낯익어 길들은 것처럼, 독자는 그에게 설득당한다. 그의 시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시가 그 사람이라면 최종천의 시는 최종천 자신이다. 한 줄로 말을 끝내버리는 ‘어, 아니’ 툭 전화를 끊는 것처럼 그의 시는 선명하고 직선적이며, 결정적이다.
 
헤라클레스를 사랑한 요정 4 
                                                  
이신강
 
<코브라의 춤>
 
코브라는 제 몸속이 온통 독으로 만들어 진 것을 알았다. 
코브라는 지아비도 제 새끼도 다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몸서리 쳐졌다. 
 
 
 
자기 단속을 위해서 화 안내기, 구박도 참아내기, 독설도 웃어넘기기, 못 참을 일은 몸을 흔들어 풀어내기, 그러다가 그녀는 아름다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춤은 서늘한 바람을 불러 오고 모래바람도 비켜가며 푸른 하늘을 들어낸다. 
사막이 촉촉해지고 지아비도 함께 춤추게 하며 선인장 가시도 제 몸속에 숨고 그녀의 새끼들이 모두 살아나게 한다. 
 
 
 
      참아야 산다는 일념으로 춤으로 독을 해체시키며 사막의 별들과 함께 춤추는 그녀.
 
 
 
 
 
 
 
 
<이선의 시 읽기>
 
  이신강의 시에는 재해석의 시점에서 출발한 철학이 담겨 있다. 간결한 문장 속에 ‘사실’과 ‘사건’을 뛰어 넘는, 존재의 아픔이 있다. 삶의 철학과 진정성은 어떤 미사여구의 기교적 표현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사물을 관통하여 투시의 눈으로 ‘코브라’를 직관적으로 관찰하고 자기 몸으로 수용한다. 이신강 시의 스케일이다. <코브라의 춤>은 사물에서 출발하여 사물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시인의 삶을 아는 사람은 그녀의 삶을 재연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헤라클레스’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남편을 상징하며, ‘요정’은 그를 따르는 여자들을 상징한다는 시인자신의 말을 헤아려본다. 코브라는 온통 독으로 만들어진 아내며 엄마인 자신의 상징물이다. 어머니 세대의 지어미의 덕성은 ‘자기 단속을 위해서 화 안내기, 구박도 참아내기, 독설도 웃어넘기기, 못 참을 일은 몸을 흔들어 풀어내기’였다. 
 
  피리 부는 사나이와 코브라의 춤을 TV에서 본 적 있다. 몸속에 독을 품고 사는 미물인 코브라에게 ‘춤’이라는 예술행위를 부여하였다. 시를 고단한 삶의 춤으로 해석한 시인의 아이덴티티에 박수를 보낸다. 삶의 질곡과 절박한 상황에서 춤으로 자아를 승화시키고 있다. ‘춤으로 독을 해체시키며 사막의 별들과 함께 춤추는 그녀.’ 부분은 이 시의 중심문장이다. 철학과 인생관, 자연주의가 한 문장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녀의 춤은 서늘한 바람을 불러 오고 모래바람도 비켜가며 푸른 하늘을 들어낸다. 사막이 촉촉해지고 지아비도 함께 춤추게 하며 선인장 가시도 제 몸속에 숨고 그녀의 새끼들이 모두 살아나게 한다.’
 
  이신강의 시는 달관의 시다. 여린 여자의 가슴에 묻힌 한과 독을, ‘사물’과 ‘사건’을 몸으로 모두 껴안고 참을 뿐만 아니라, 춤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숨 쉬는 법
 
       
김 종 희
 
그는 등에 거대한 초원을 짊어지고
맨발로 구름을 향해 걸었다
초원은 가볍고 아늑했다
 
비행기가 그의 다리 밑으로 지나가고
활처럼 휘어진 초원의 양 끝이
푸른 하늘에 맞닿았다
 
바람이 하늘과 초원 사이를
공처럼 둥글게 부풀렸다
 
위험에 노출된 성난 새들은
소리 지르며 구름동굴 속으로 달아나고
구름 밑으로 떨어진 그는 뽀로로와 함께
에메랄드빛 오즈의 성을 찾아 떠났다
 
풀밭에 벗어놓은 그의 신발에
붉은 해가 매달려
하늘을 온통 분홍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작은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공처럼 떠올랐다
 
 
이선의 시 읽기..'추상화 시 모델을 제시'
  
김종희의 『그가 숨 쉬는 법』은 오버랩 된 색채 이미지가 선명하다. 몇 개의 그림을 오려서 사선과 직선, 곡선, 원으로 디자인하였다. 여러 개의 사물을 한 화면에 흩어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미지들은 시적 질서를 가지고 산만하지 않다. 
  
위의 시에서 ‘그’라는 대상은 극적인 요소를 가진 어떤 현장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 한다. 여러 개의 화면을 오버랩하여 펼쳐보여줌으로써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시에 새로운 정서를 부여한다. 정지된 화면을 한번 흔들어주어 이미지에 운동감을 줌으로써, 정서환기를 시킨다. 
  
아래 동사와 동사어들은 운동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단어들이다. ‘구름을 향해 걷고, 다리 밑으로 지나가고, 맞닿았고, 부풀리고, 달아나고, 찾아떠나고, 해가 매달리고, 바꾸어놓고, 떠오른다’ 
  
또한 위의 시에서는 많은 동사와 명사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선명하다. 그 이유는 ‘초원, 구름, 비행기, 다리, 하늘, 구름, 새, 구름동굴, 뽀로로, 에메랄드빛 오즈의 성, 풀밭, 붉은 해, 하늘, 나뭇가지, 하얀 달, 공’ 등 명사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명사는 사물을 대표한다. ‘사물시’를 씀으로써 시를 ‘객관화’하고 있다.  
  
김종희는 위의 시에서 오버랩 기법으로 추상화 시의 새 모델을 제시하였다. 또한 움직이는 그림을 실험하여, 하이퍼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나의 꽃밭에는
 
                                          여한경
 
나의 꽃밭에는
꽃씨를 뿌리지 마세요.
이미 절로 자라난 꽃들과
꽃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갯짓
이리도 가슴을 두들기는데
나의 꽃밭에는
김을  매지 마세요.
꽃잎들이 새 하늘을 열고
비바람 다녀가고
벌레들 다녀가고
나의 꽃밭에는
울타리를 만들지 마세요.
이 신비로운 꽃향기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선의 시 읽기>
 
  여한경의「나의 꽃밭에는」의 특징은 ‘수용과 확장’이다. 그의 시는 선함을 추구한다.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수용’과 ‘확장’의 범위는 매우 넓다. 불교적인 종교의식처럼 경건하고 맑다. 위의 시에서 보여주듯, 그의 시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꽃, 나비, 비바람, 벌레’까지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확장과 수용의 무한대한 범위는 ‘신비로운 향기’로 작가 자신과 치환하여 작가의 좋은 이미지를 만든다.  각 연의 마지막 행에서  ‘― 마세요’라는 부정적 시어를 세 번씩 반복하여 패턴화 하고 있다. 여한경 시의 아이러닉 기법은 김소월의 시「먼 후일」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잊었노라’의 기법과 같다.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김소월, 「먼 후일」 전문 
 
  김소월의 시에서 보여주듯이, 여한경의 ‘부정어’도  의미가 역설적으로 확장된다. 
 
  ‘잊었노라’가 대상에 대한 화자의 강한 애착을 보이듯, 여한경의 ‘―마세요’는 자연주의를 지향한다.  보통 시에서 반복적인 ‘부정어 사용’의 패턴화 작품은 축소지향적이며 갇힌 이미지로 끝나기 쉬운데, 여한경의 ‘-마세요’는 오히려 그 파장이 크다.
 
    가을의 노래
 
                                                               - 이수화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 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 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잎이 진다. 아침을 나서는 생활의 문턱에도 이름 모를 일년생(一年生) 초본식물(草本植物)이 잎을 떨구고,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 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 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우리가 살아갈 누리에 낙엽이 져도 나의 기도(祈禱)는 낙엽과 더불어 흙이 되리니- 아아.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 가을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이선의 시 읽기>
 
시인이라면 누구나 생애 단 한편의 대표작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이수화의「가을의 노래」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의 감상주의적인「가을날」이나, 릴케의 기도 시「가을날」과는 다른 품격과 내용, 철학, 시적 표현 방법으로 변별력을 갖는다.
 
이수화의 「가을날」은 위의 시들보다 날선 감각과 표현이 있다. 또한 반성적 철학과 지혜를 갈구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1-5연에서 보여주는 아래 구절들은 ‘가을 이미지’를 ‘철학’과 ‘사유’로 승화시켰다.
 
  1연- ‘이 가을에는…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2연-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4연-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5연- ‘나의 기도(祈禱)는…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아래에 제시한 2연과 3연의 감각적 미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적 표현은 압권이다. 
 
2연-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 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3연-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
아래에 제시한 4연과 5연은 자연의 섭리에 무조건 순응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갈등과 항거를 통해 배운 순리를 깨달은 자의 지혜가 번뜩인다. 가난도 아름다운 비움의 철학으로 빛난다. 
  
4연- ‘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 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5연-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수화의 「가을날」은 시인의 하늘로 높게 솟은 아름다운 ‘백발’처럼, 그의 내면이 범상치 않은 ‘개성’과 칼칼한 ‘직관’을 그의 ‘시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시는 그 사람이다’라는 등식을 확인한다. 
  
천상병의 「소풍」이나, 릴케의 「가을날」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쉽고 간절한 진정성과 삶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도 ‘잉걸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수화의「가을날」도 매력적인 ‘표현주의’ 적 기법이 맛깔스럽다.
 
칠 놀이 또는 페인트통
 
 
                                                 심 상 운
 
 
  나는 가끔
  페인트통을 들고 낡은 벽에 칠을 하는 아이들이
  제각기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는다
 
  페이트통 속에선 붉은 해가 부글부글 끓고
  가지가지 형상의 구름들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칠 놀이에 지칠 줄을 모르던 아이들은
  구름을 타고 여행을 떠나고
  나는 온몸에 페인트를 묻히며 칠 놀이에 빠진다
 
  벽에 묻은 칠들은 나뭇잎같이 팔랑거리기도 하고
  제각기 새가 되어 포르르 포르르 날아오르기도 한다
 
  붉은 빛에서는 타히티 여인들의 허리 곡선이 굼실거리고
  퍼런 빛에는 아파트 담을 넘어오다 총탄에 맞은
  젊은 멧돼지의 헐떡이는 숨소리도 묻어 있다
 
  나는 빛깔들을 다 쏟아낸 페인트 통을 두드려본다
  가볍고 맑은 아이들 소리가 나고
 
  눈부신 햇살 속에서 수천의 아파리를 반짝이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은사시나무의 잎사귀소리가 들린다
 
 
      * 심상운 신작시집 『녹색 』전율 중에서
 
 
 
 
               
 
 
                 하이퍼시의��겹쳐그리기 기법��
                    ―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
 
                                                                이 선( 시인 )
 
 
  심상운은『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시론집을 통하여 하이퍼 시론을 정립하였다. 이번 신작시집 『녹색 전율』에 실린 「칠 놀이 또는 페인트통」은 그의 신작시집에 실린 하이퍼시 중 하나이다.
  필자는 위의 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이퍼적 요소에 <하이퍼시의 겹쳐그리기 기법>이라는 이름을 명명하고자 한다. 이미 다른 논문에서 발표한 바 있다. 각각의 연들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하여 정서를 환기시켜 준다. 1-7행의 각 연들을 분석하여 <하이퍼시의 겹쳐그리기 기법>의 요소들을 살펴보자.
 
 
  1.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
 
 「칠 놀이 또는 페인트통」의 시적소재는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페인트칠이 된 벽��이다. 그런데 1-7연의 시행에서 보여지는 그림은 각각 다른 패턴의 그림이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상상력의 공간이동��을 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시점의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1-7연은 각각 다른 상상력의 조합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필자는 다시점과 다초점의 여러 각각의 다른 그림들의 합을 <겹쳐그리기 기법>이라고 명명한다. <하이퍼시의 겹치기 기법>의 구성요소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의 예를 1-7연의 시행을 분석하여 살펴보자.
 
  1연- 나는 가끔/ 페인트통을 들고 낡은 벽에 칠을 하는 아이들이/ 제각기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는다(1연 1-3행)
  페인트통을 들고 벽에 칠을 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시인의 상상력의 공간으로 과거의 아이들을 현재시점으로 초대한다. 시인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벽의 그림에서 듣는다.
그림은 보는 것인데, 본다고 하지 않고,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한시각 이미지를 청각이미지로 교환하였다.  단계를 뛰어넘어 공감각적 이미지를 살린 표현이다.
  한 편의 시를 극이라고 가정하여 보자. 시의 도입부부터 현재형으로 극적 현장감을 준다.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한다.  시에 집중도를 높여주는 장치다. 과거와 과거완료형을 현재형으로 재생하여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하고 있다.
 
  2연- 페이트통 속에선 붉은 해가 부글부글 끓고/ 가지가지 형상의 구름들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2연 1-2행)
  위의 시에서는 그림에서 붉은 해가 끓고 구름이 피어오른다고 하지 않았다. 페이트통에서 붉은 해와 구름이 등장한다. 완성된 그림이 아닌, 그림의 재료인 페인트통에서 붉은 해와 구름이 이미 만들어져 펑하고 마술처럼 빠져나온다. 1연과 같은 표현기법이다. 시인의 상상력의 세계에서 시적논리가 맞는 과학적이지만은 않다. 위의 표현은 비논리적인 표현이 아니라 한 단계를 건너뛴 표현이다.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4세경까지 물활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물건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다. 시는 어린이의 물활론적 세계와 비슷한 세계가 있다. 시와 어린이의 정신세계에서는 상상력의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 지렁이를 늘려 줄넘기도 하고, 지렁이로 팔찌도 하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어린이들의 고정관념을 깨며 큰 인기를 받았었다. 시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작업이다. 여러 색깔로 칠이 된 벽에서, 그 이전의 칠의 단계인 페인트통으로 상상력이 이동되어 있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중 구조적인 상상력의 겹치기 기법이다.
 
  3연- 칠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구름을 타고 여행을 떠나고/ 나는 온 몸에 페인트를 묻히며 칠 놀이에 빠진다( 3연 1-3행 전문)
  아이들의 놀이에서 어른 놀이로 행동의 주체가 바뀐다. ��아이들->나��로 상상력의 수평적으로 순간이동 하였다.
 
  4연- 벽에 묻은 칠들은 나뭇잎같이 팔랑거리기도 하고/ 제각기 새가 되어 포르르 포르르 날아오르기도 한다.( 4연 1-2행 전문)
  벽의 그림은 정지된 화면이다. 그런데 벽의 그림들에 움직임을 주었다. 상상력의 공간이동을 현재에서 미래로 이동하게 하였다. 그림 속의 나뭇잎이 팔랑거리고, 그림 속의 새가 포르르 날아간다.
  그런데 사실 벽의 페인트칠에는 실제로 나뭇잎이나 새가 없을 수도 있다. 순전히 시인의 상상력의 산물일 가능성도 크다.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며 행동을 시작한다. 정지된 그림이 공간이동을 시도한다. 하이퍼적 상상력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현재형의 그림에 미래형 옷을 입혔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상상력의 공간 이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5연- 붉은 빛에서는 타히티 여인의 허리 곡선이 굼실거리고/ 퍼런 빛에는 아파트 담을 넘어오다 총탄에 맞은/ 젊은 멧돼지의 헐떡이는 숨소리도 묻어 있다( 5연1- 3행)
  
  붉은색- ��타이티 여인의 허리곡선��을 상상하였다.
  푸른색- ��총탄에 맞은 멧돼지의 헐떡이는 숨소리��를 상상하였다.
  색깔 이미지를 살아있는 인물과 사물로 치환하였다. 사물인 색깔에 행위를 주어 실제성과 현장감을 주었다. 극적 구성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소설과 극에서 사건을 담당하는 주요한 포인트인 여자를 드디어 등장시켰다. 또한 가장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멧돼지를 등장시켜 극의 흐름을 빠르게 하고 있다. 정물에 행위를 주어 의인화하였다. 상상력의 공간이동이 현재형으로 시간이동을 하고 있다.
 
  6연- 나는 빛깔들을 다 쏟아낸 빈 페인트통을 두드려본다/ 가볍고 맑은 아이들 소리가 나고(6연 1-2행)
  시적화자는 상상력의 공간에서 빈 페인트통을 두드린다.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하여 페인트통 속에서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두 번의 상상력의 이동을 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일상적으로는 그림에서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림의 원재료인 페인트통 속에서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이 시의 포인트다. 상상력의 이동을 대대적으로 크게 한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라는 2개의 과정을 동시에 이행하고 있다.
 
  7연- 눈부신 햇살 속에서 수천의 이파리를 반짝이며/ 바람에흔들리고 있던/ 은사시나무의 잎사귀소리가 들린다( 7행 1-3행)
  7행은 시에 유연성을 제공하고 있다.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효과다. 한정적인 시의 공간인 벽과 그림의 공간에서 벗어나서 자연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소설의 지문이나 그림의 배경과 같은 역할을 하는 연이다. 죽은 그림에서 살아있는 그림인 자연으로, 독자의 눈을 공간이동시킨다.
  ��눈부신 햇빛, 반짝이는 이파리, 바람, 잎사귀소리��로 독자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벽과 칠’이라는 한정적 공간에서 모두 벗어나버렸다. 아주 다른 공간이다. 아이들과 멧돼지와 여자라는 동물에게서도 벗어났다.
  
 
 2. 하이퍼시의��겹쳐그리기 기법��
 
  위의 시는 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1-7연에서 골고루 상상력의 순간이동과 시간이동, 공간이동이 자유롭게 실현되고 있다. 여러 연들은 각각의 다른 그림을 그린다. 상상력이 겹쳐지고, 중첩 이미지를 만든다. 공감적 이미지가 정서를 환기시킨다. 위의 시 1-7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이퍼시의 <상상력의 수평이동- 상상력의 역행-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이 겹쳐그려지며 반복된다. 이 반복적이고 중의적인 겹쳐그리기 그림 기법이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필자는 이 기법을 본 장에서 <하이퍼시의 겹쳐그리기 기법>이라 명명한다.
 제한적인��페인트칠이 된 벽��에서 얻은 단순한 시인의 아이디어가 무한대의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시인이 아이들이 낙서를 해 놓은 벽을 보고 시상을 얻었을 것이다. 과거의 벽 속에서 나온 아이들은 시인의 상상 속에서 현재의 시점에서 행동을 한다. 
  여러 이미지들이 재탄생하여 각각 다른 옷을 입고 과거와 현재, 미래로 무한대로 이동한다. ��나-아이들-나뭇잎-새-타히티 여인-멧돼지-눈부신 햇살- 바람- 나뭇잎소리��등 상상력을 현재로 끌고 와서 각각의 사물에게 행동과 행위를 부여하고 있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구분이 모호하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주인공이다.
 이 시가 가지는 특징은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상상력의 겹치기가 계속 반복된다. <하이퍼시의 겹쳐그리기 기법>이 1-7연에서 다양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무한대의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은 무형의 사물인 페인트와 그림에 행위를 제공한다. 그림이 여행을 떠나고, 작가인 시인도 합류하여 함께 페인트칠을 하며 논다. 시에 자유로움을 주어 작가와 독자와 등장인물이 함께 상상력의 세계에서 논다. 재미있게 시원하게 잘 논다. 한정적이지 않고 제한적이지 않은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은 한정적이고 제한적이지 않다. 상상력의 폭이 무한대다. 그러나 이 시가 횡설수설하거나, 정리되지 않은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특징인 각 연들의 독립성과 개별성 때문이다. 각 연들의 다른 그림은 서로 링크된다. 
  각각의 행들은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하여 다른 이야기를 산만하게 하는 것 같지만, 링크되어 한 공간에서 만난다. 링크는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위의 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 미래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각 연 중에서 한 연을 빼도, 한 연을 더 집어넣어 8연, 9연을 만들어도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하이퍼시의 독립성과 개별성 때문이다. 
 
 
 
 3. 결론
 
  
   위의 시는 <하이퍼시의 겹쳐그리기 기법>이 1-7연에서 다양하게 실현되고 있다. 1장에서 하이퍼시의 특징인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상상력의 공간이동을 살펴보았다. 2장에서는 하이퍼시의 특징인 링크, 개별성, 독립성 등 하이퍼시의 특징을 알아보았다.
   하이퍼시는 답답하지 않다. 상상력의 공간이 넓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극대화를 통하여 시를 한정적이지 않게 한다. 독자에게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한다. 시공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이 정서환기를 시키며 시에 재미를 더한다. 
  
  하이퍼 시인은 한 공간에서 연줄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아이와 같다. 어린이는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다. 그러나 실은 허공을 날아가서 꽃과 나무, 언덕을 넘어 하늘 끝까지 날아간다. 어린이의 상상의 세계에서는 낮달과 숨바꼭질하는 낮별과 은하수계까지 도달할 것이다.   
지금 문학사에서 하이퍼시가 서 있는 위치는 어린아이가 연을 들고 서 있는 것과 같다. 줄을 끊지 말고 문학사에 족적을 남기도록 좋은 하이퍼시가 생산되기를 기대한다. 하이퍼시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심상운의 하이퍼시 신작시집 『녹색 전율』이 집중받기를 바란다.
 
불행에겐 이런 말을
   
 
                                                       이기철
  
 
  불행도 자주 만나면 친구가 된다
  더운 물로 그의 발을 씻겨주고 그의 몸을 타월로 닦아주면
  면내복처럼 유순해진다
  한 열흘은 불행하고 단 하루는 행복하자
  조금씩 내리는 찬비처럼 내게 오는 불행이여
  내 새 옷 한 벌 사 줄게 채소 같은 행복 한 잎만 들고 오면 안 되겠니
  신장에도 장롱에도 책상에도 지붕에도 이슬 같이 내리는 불행
  그러나 내가 그를 찾아가 이마를 짚어주면
  불행도 부츠처럼 편안해진다
  나는 서른까지는 불행하고 마흔은 행복하고
  쉰은 조금씩 아끼며 불행하고 예순은 조금씩 보태며 행복하고 싶었다
  철조망 안에도 햇볕이 놀듯 활짝 불행을 꽃 피워
  행복의 열매를 맺고 싶었다
  먼 길 걷는 사람은 처음부터 불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와 함께 걷는 신발소리가 행복을 맞으러 가는 발자국소리임도 알아야 한다
  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만났고 그와 밥 먹고 그와 잠자면서
  마침내 그의 머리카락 냄새 속옷냄새까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그의 뒤를 닦아주고 그와 입도 맞추었다
  불행은 행복의 언니에게 안기면 스스로 행복의 누이가 될 줄도 안다
 
 
 
 
 
 
 
 
<이선의 시 읽기>
 
  연극은 일상적인 것이 없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범상한 갈등으로 끝난다. 시 제목이 일상적이면, 그 내용과 구조와 표현은 일상적이지 않으며, 좋은 사유를 이끌어내야 한다. 반대로 시가 독특한 제목으로 출발하면, 그 내용과 방법론은 일상과 연계시켜야 한다. 사유를 이끌어내어 인생과 개인의 삶과 연결시켜야 한다. 
  이기철의 시,「불행에게 이런 말을」은 일상적인 제목이지만,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제목이다. 그 이유는 ‘불행’이라는 단어는 누구나 잘 알고 있고,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하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칫하면 관념이나 사설로 흐르기 쉬운 제목이다. 그런데 이기철 시인은 가장 관념적인 ‘불행’에 대하여 쓰면서, 전혀 관념적이지 않은 시를 완성하였다. 그 방법론을 살펴보면 다음의 6가지 방법론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첫째, 시각적 이미지와 객관화
  ‘불행’이란 ‘관념’을 ‘시각적 이미지’로 재해석하고, 사물화하여 ‘객관화’하였다.
 다음 시행을 읽어보자.
  ‘신장에도 장롱에도 책상에도 지붕에도 이슬 같이 내리는 불행’ (7행)
  위의 시 7행의 중심단어는 ‘신장-장롱-책상-지붕’이다.
  신장, 장롱, 책상, 지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각각의 형태와 색깔이 연상된다.
 나무나 플라스틱 신장.
  흰색, 나무색, 갈색, 검정색 나무장롱.
  빨강, 파랑, 흰색 플라스틱 장롱.
  파랑, 주황, 회색 기와집.
  한옥, 전원주택, 연립과 아파트
  각각의 사물들은 각각 다른 색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신장, 장롱, 책상, 지붕’이라는 단어가 대표하는 불행의 조건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신장- ‘신발’은 서정주의 시에서 보여주듯 식구들을 상징한다. 신발은 저녁이 되면 온전히 신발장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당당히 기득권과 소유권을 주장하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혼, 가출, 입양, 군입대, 해외근무, 병원입원, 병사, 사고사’ 등 수많은 이유로 신발은 신발장을 떠난다. 신장은 불행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대표적 사물이다. 신발은 모양과 색깔이 다른 색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장롱- ‘옷’은 인간을 대표한다. 인간의 취미와 교양, 직업을 나타낸다. 장소에 목적에 따라서 모양과 색깔이 수시로 바뀐다. 신발과 똑같은 기능을 하면서 좀더 눈에 띈다. 신발장의 신발이 저녁을 상징한다면 옷은 활동하는 낮을 상징한다. 개성과 색깔이 분명히 표출된다. 옷이 떠난다는 것은 ‘노랑 원피스’와 ‘검정 청바지’의 대결구도처럼 갈등과 비극을 반영한다. 결혼, 이혼, 별거, 사별 등, 어떤 이유로든 옷장을 떠난 옷은 소속과 집단을 떠난 불행한 사건을 상징한다.
  책상- ‘책상’은 직업, 특히 회사원이나 교수, 작가 등을 상징한다. 한국은 1998년 IMF때 출근하면 책상이 없어지는 실직의 쓰라린 경험을 겪었다. 책상에서 불행이 발생한다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붕- ‘지붕’은 각 세대를 의미한다. 지붕은 생로병사가 한통속으로 읽히는, 세대와 가족을 상징한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가족이 아프다. 불행은 세대에게 집단으로 일어난다. 가족 구성원이 불행의 피해자가 된다.
  위의 시는 ‘불행’이라는 관념에 ‘신발, 장롱, 책상, 지붕’ 이라는 상징물에 옷을 입혀 객관화시켰다. 또한 각 사물들은 개인, 가족, 집단을 상징한다. 불행이 일어나는 장소를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은 불행의 형태까지 포괄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불행’이라는 관념어에 옷을 입혀서, 실제적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구체성’과 ‘객관화’를 획득하고 있다. 또한 시각적이며 채색적인 색채 이미지가 있다. 모든 사물들은 그 단체사회가 규정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체험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구체성
  아래의 행을 살펴보자.
  불행도 자주 만나면 친구가 된다 (1행)
  더운 물로 그의 발을 씻겨주고 그의 몸을 타월로 닦아주면 (2행)
  면내복처럼 유순해진다 (3행)
  불행을 친구와 유순한 내복으로 본 것은 늘 가까이 불행 속에서 산 사람만이 경험적으로 요약하여 도출해 낼 수 있는 수학적 공식이다. 체험적이며 경험적이다.
 
   ‘한 열흘은 불행하고 단 하루는 행복하자’ (4행)
   ‘조금씩 내리는 찬비처럼 내게 오는 불행이여’ (5행)
  순전히 경험적 체험을 바탕으로 도출해낸 공식이다. 위의 시는 인생의 ‘10일’은 불행이고 ‘1일’을 행복으로 보았다. 인생의 9할은 불행이고 1할은 행복으로 본 것이 아니다.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한 달을 30일을 기준으로 삼을 때, 불행과 행복은 27.27: 02.72라는 공식이 도출된다. 1달에 3일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위의 시처럼, 우리 인생은 불행을 맞받아치고 추스를 사이도 없이 찬비처럼 계속 맞고 살아간다. 불행 속에서 불행과 함께, 불행과 일심동체가 되어 동고동락하며 산다. 불행에 대한 눈물겨운 한줄 엑기스 문장이다.
  하늘이 주는 불행이라는 비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다만 우산을 쓰든지, 개인 비행기를 타든지, 부모나 형제의 등에 업혀 편히 가든지, 저축한 돈으로 고용인을 고용하든지 목적지로 가는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셋째, 달관의 미학
  아래에 제시한 행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친구사이에서 흔히 행하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자주 만나면 친구가 된다 (1행)
  면내복처럼 유순해진다 (3행)
  내 새 옷 한 벌 사줄게 (6행)
  부츠처럼 편안해진다 (9행)
  그와 함께 걷는 신발소리 (15행)
  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만났고/ 그와 밥 먹고/ 그와 잠자면서(16행)
  그의 뒤를 닦아주고/ 그와 입도 맞추었다 (17행)
  스스로 행복의 누이 (19행)
  친구라면 자주 만나고, 유순해지고, 생일에 옷도 선물하고, 편안하고, 함께 걷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찜질방에 가서 잠도 잔다. 친구가 어려울 때는 뒤를 봐주고 돈도 빌려준다. 서양에서는 만날 때마다 볼에 입도 맞춘다. 친구라면 서로 행복한 형과 동생의 역할도 나누어 한다. 
  시인이 시를 구상할 때, ‘불행’을 친구라고 직관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친구와 나눌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복의 순간들과 조건을 불행이라는 관념에 대입하였다. 불행을 ‘행복의 누이’라고 정의한, 역발상 관점이 이 시의 포인트다. 누구나 싫어하고 경계하는 불행을 기꺼이 초대한 것이 이 시의 매력이다.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넷째, 의인화 기법
  불행이라는 관념어를 인간의 행위로 치환하고 의인화하였다.  
  친구가 되어주고, 발을 씻겨주고, 몸을 타월로 닦아주고, 함께 걷고, 만나고, 밥먹고, 잠을 잔다. 머리카락 냄새, 속옷 냄새를 맡으며, 뒤도 닦아주고, 입도 맞춘다. 이런 경지라면 친구가 아니라 애인에 가깝다. 친구가 장애인이 아닌 이상, 뒤를 닦아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뒤는 뒷배경이 되어 도움을 준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한다.
  
  다섯째, 순응적인 희망의 메시지
  아래의 행들을 살펴보자.
   열흘은 불행하고 단 하루는 행복하자 (4행)
  채소 같은 행복 한 잎만 들고 오면 안 되겠니 (6행)
  서른까지는 불행하고 마흔은 행복하고 (10행)
  쉰은 조금씩 아끼며 불행하고 예순은 조금씩 보태며 행복하고 싶었다 (11행)
 철조망 안에도 햇볕이 놀듯 활짝 불행을 꽃 피워 (12행)
 행복의 열매를 맺고 싶었다 (13행)
 먼 길 걷는 사람은 처음부터 불행할 줄 알아야 한다 (14행)
 그와 함께 걷는 신발소리가 행복을 맞으러 가는 발자국소리임도 알아야 한다 (15행)
  위의 시에서 주장하는 불행의 개념과 재해석은 포기와 절망이 아니다. 순응적인 희망의 메시지다. 사실 필자가 살면서 터득한 이치는, 불행의 극점은 희망이라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시점은 희망을 잉태한 터닝 포인트였다. 그 극점에서 포기하고 절망하여 도태되든지, 극기로 새로운 모색을 하여 발전하든지, 극명하게 갈리는 분기점이다. 가장 큰 시련과 비극 뒤에는 반드시 새로운 인생이 열린다. 그 행복은 견디고 넘어선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눈비와 가뭄이라는 불행 뒤에 열리는 열매가 더 맛있는 법이다.
 
  여섯째, 연극적 구조와 문장
  위의 시는 입체적이고 연극적이다.
  발을 씻겨주고/ 그의 몸을 타월로 닦아주면 (2행)
  이마를 짚어주면 (8행)
  그를 만났고 그와 밥 먹고 그와 잠자면서 (16행)
  마침내 그의 머리카락 냄새 속옷냄새까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17행)
  때로는 그의 뒤를 닦아주고 그와 입도 맞추었다 (18행)
  불행은 행복의 언니에게 안기면 스스로 행복의 누이가 될 줄도 안다 (19행)
  시의 문장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에피소드 거리가 숨어 있다. 그 문장과 구조는 옷을 입고 행동하며 움직임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기승전결이 있으며, 클라이맥스가 있다. 시작과 끝이 있다. 대사와 지문도 들어 있고, 행위도 있다. 스토리가 있으며 연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를 6가지 방법론을 적용하여 분석하여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첨언하면, 위의 시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제목이다. 보통의 시인이라면 제목을「불행」이라는 명사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불행」과「불행에게 이런 말을」이라는 제목은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불행’이라는 제목으로 고정하면, 시가 관념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불행에게 주는 말’은 구체성과 객관화를 획득한 제목이다. 말은 추상적인 속성을 갖는다는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에, 관념으로 흐르더라도 적합성과 정당성, 타당성을 약속받고 들어간다. 더구나「불행에게 이런 말을」이란 제목은 구체성과 객관화는 물론, 현재성과 현장성까지 확보한다. 직접적이며 생동감과 힘이 있다.
  시가 주는 절정의 기쁨과 카타르시스를 이런 부분에서 느낀다. 부드럽고 편안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장, 그러나 시어를 파고 들어가면 지적이며 예리한 사유, 승화된 내용.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내공은 아무나 쓸 수 없다. 친근한 주변의 내용을 극화시켜 읽는 재미가 크다.   ♣♧♣
 
담쟁이 1
 
                     
 
                             강기옥
 
 
 
 
무섭지 않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당신의 꿈을 쫓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게
욕심부리지 않고 서서히
당신의 이상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의 크기만큼만
당신의 넓이만큼만
내 모든 소망을 걸어
웅숭깊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액자형 그림> 그리기 기법
 
  강기옥의「담쟁이 1」은 <액자형 그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액자형 그림> 그리기 기법’으로 씌어졌다. 3연의 짧은 시로, ‘1연-3행, 2연- 3행, 3연-4행’으로 간결하다. 현대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심플라인 옷처럼, 심플하다는 것은 필요없는 군더더기를 삭제하여 내다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버리면 시는 더 단단하고 견고해진다. 강렬한 파장을 가지고 확장된다.
  
  위의 시「담쟁이 1」이 가지고 있는 ‘<액자형 그림> 그리기 기법’의 특징을 아래 7가지로 분류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함축미와 형태미
  위의 시는 10행의 짧은 시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함축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욕심을 내려놓기’하지만 더 큰 ‘이상주의의 실현’이라는 거대한 욕망을 품고 있다. 또한 형태미에서도 3연의 짧은 시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어 배치를 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2. 상징성
  상징과 확장은 시에서 요리사의 절대미각과 같다. 3연 1-2행의 ‘당신의 크기만큼만 / 당신의 넓이만큼만 ’ 부분을 눈여겨보자. 이보다 큰 상징이 없다. 결코 인간이 우주를 벗어나 살 수 없듯이, 담쟁이도 결코 기대고 버틸 수 있는 ‘공간’을 벗어나서 생존할 수 없다. 당신이 있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는 ‘연시’로 해석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위의 시는 상징과 함축, 확장이 큰 시다.
 
  3. 감각적 미의식
  위의 시는 짧은 시어의 반복, 패턴을 통하여 시에 감각적 미의식을 주고 있다. 그림 같은 연 배치도 시인의 의도된 계획이다. 반복적이고 점층적인 시어들은 독자의 뇌를 세뇌시키는 작용을 한다. 향수를 자극하는 고전적 방법의 시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사물이 말하게 하라는 현대적 시창작법을 적용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완성된 형태미와 내용을 가지고 있는 좋은 시다.
 
  4. 확장성
  확장성은 사물인 담쟁이와 인간에게 치환된 주제의 확장성으로 두 가지로 분류하여 해석할 수 있다.
 먼저 1-3연에서 비중있게 강조된 ‘이상주의’ 부분을 살펴보자. 다음 항목으로 요약된다. 인간과 담쟁이 모두 포함된다.
 
  당신의 꿈을 쫓겠습니다(1연) -> 당신의 이상을 따르겠습니다(2연) -> 내 모든 소망을 걸어/ 웅숭깊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3연) 
 
  ‘비현실적인 꿈 -> 당신이 보여준  현실적인 이상실천 의지 -> 전심전력 의지표명’으로 점층적으로 확장된다.
 
  다음 1-3행의 점층적 구조를 살펴보자.
 
  1연 1-2행: 무섭지 않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2연 1-2행: 무리하지 않게/ 욕심부리지 않고 서서히
  3연 1-2행: 당신의 크기만큼만/ 당신의 넓이만큼만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욕심부리지 않고 서서히 이상을 실천한다는 내용이지만, 1-3연에서 보여주는 계속 반복되는 형태는 점층적으로 확장되어 강조된다.
 
  5. 패턴구조
  위의 시는 1연, 2연, 3연이 아래와 같은 구조의 패턴화를 보여주고 있다.
 
  1-3연에서 부사어 사용과 내용에서 패턴화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1연 1-2행: 무섭지 않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2연 1-2행: 무리하지 않게/ 욕심부리지 않고 서서히
  3연 1-2행: 당신의 크기만큼만/ 당신의 넓이만큼만
  
  다음 이상주의의 실천의지에서도 같은 패턴화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1연 3행: 당신의 꿈을 쫓겠습니다.
  2연 3행: 당신의 이상을 따르겠습니다.
  3연 3-4행: 내 모든 소망을 걸어 / 웅숭깊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6. 철학과 사고의 힘
  불교의 참선의 마지막 목표는 ‘내려놓다’와 ‘해탈’이라고 본다. 위의 시는 삶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철학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첫째, 천천히(1연 2행)
  둘째, 서두르지 않기(1연 2행)
  셋째, 욕심부리지 않기(2연 103행)
  넷째, 당당하기(1연 1행)
  넷째, 이상주의(1연 3행, 2연 3행, 3연 4행)
  다섯째, 되바라지지 않기(3연 4행)
 
  그런데 위의 다섯 가지 철학은,  ‘더불어 살기’와 ‘양보하기’까지.  종교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범인의 경지를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삶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시인은 영원히 꿈꾸는 이상주의자다. 현실이 좌절과 고통스러워도 이상을 품고 산다. 배신과 압박에도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위의 시가 일제시대 발표되었다면 <항일투쟁 시>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위의 시가 1980년대에 발표되었다면 <민주화 투쟁시>로 거론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7. 감동의 힘
  3연의 짧은 시는 파장이 커서, 하루쯤 욕심을 내려놓고 온종일 생각에 잠기고 싶어지게 한다. 그만큼 시가 독자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감동을 준다는 뜻이다.
  3연 4행 ‘웅숭깊다’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보자. 사전에는 ‘ 1. 생각이나 뜻이 크고 넓다. /  2. 사물이 되바라지지 아니하고 깊숙하다. ’라고 정의되어 있다. 1번 해석과 2번 해석 모두 포함하여 이 시의 중심어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단어를 발굴하여, 반짝이는 기쁨을 주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 ‘웅숭깊다’라는 단어는 보석과 같다.
 
  ‘담쟁이’의 묘한 매력은 이상주의에 거치는 것이 아닌, 강력한 실천의지를 계속 설파하고 있다. 지하철역에서 매일 만나고 싶은 시다.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시인들이 꿈꾸는 쉽고 아름다운 시다. 매일 읽고 묵상과 반성을 촉구하는.
 
서울에 시집온 봉숭아
 
 
 
민용태
 
 
 
 
첫눈 올 때까지 손톱에 꽃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던 봉숭아는 서울에 시집와서 생활의 철인 3종 경기를 하다 그만 허리가 부러져 누워버렸다. 봉숭아는 꽃보다는 몸을 으깨는 생활 전선의 손톱이 되고 싶었지만, 하루 9 시간 철인 경기는 손톱도 등도 다 닳고 허리마저 부서져 누웠다. 비스듬히 누워 편히 등을 기댈 장독대도 없고, 벌 나비마저 날아오지 않는 아파트 철창에 화분 되어 걸쳐 있는 봉숭아. 꽃보다는 차라리 찬란한 스마트폰이나 값비싼 월급봉투가 되고 싶다.
아파트에 아파 누워서 손톱에 꽃물 들이는 봉숭아. 지금 봉숭아가 기다리는 것은 나비가 아니다. 고층 복합 빌딩에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 손톱 위에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웃고 있다.
 
 
 
 
 
 
 
 
 
 
 
 
의인화 기법을 사용한 상징 시
 
 
1. 서론
 
민용태의 「서울에 시집온 봉숭아」는 다음과 같은 기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의 형태와 구성요소로 시의 외부적 요소로 보면 <의인화 기법- 사물시의 요소- 다초점의 복합적 구성 및 상징성> 으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시의 내부적 요소로 시의 내용적 면을 분석하면, <서울 수도권 집중화와 도시 빈민층 노동자 문제- 질병과 소외, 노인문제> 등으로 요약하여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본장에서는 이와 같은 기준에 준거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하기로 한다.
 
2. 의인화 기법
 
위의 시는 봉숭아의 자서전 같다. 그 장치는 <의인화 기법>이다. 위의 시에서 인용한 아래 낱말과 문장은 ‘봉숭아’인 식물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패턴을 통한 <의인화 기법>의 실례이다.
 
<손톱의 꽃물- 첫사랑- 서울에 시집 옴- 생활의 철인 3종 경기를 하다- 허리가 부러져 누워버렸다- 손톱이 되고 싶었지만- 하루 9시간 철인경기- 손톱 등 다 닳고- 허리마저 부러져 누웠다- 등을 기댈- 아파트에 아파 누워서- 손톱에 꽃물 들이는- 웃는다>
 
 
3. 사물시의 요소
 
위의 시는 사물시의 형태를 부분적으로 강렬하게 지니고 있다. 아래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1연- 비스듬히 누워 편히 등을 기댈 장독대도 없고, 벌 나비마저 날아오지 않는 아파트 철창에 화분 되어 걸쳐 있는 봉숭아. 꽃보다는 차라리 찬란한 스마트폰이나 값비싼 월급봉투가 되고 싶다.
2연- 지금 봉숭아가 기다리는 것은 나비가 아니다. 고층 복합 빌딩에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 손톱 위에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웃고 있다.
 
위의 1연과 2연의 부분은 “봉숭아”의 관점에서 보면 참이다.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시의 눈으로 보면 거짓 없는 참이다. 위의 시가 봉숭아의 자서전이라고 본다면, 객관화된 사물시의 형태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시는, 아래 부분 때문에 완벽한 사물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식물인 봉숭아는 객관적으로 ‘철인 3종 경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의인화 기법으로 재해석하면, 봉숭아가 당면한 환경 즉, 강한 햇빛과 건조한 기후, 폭우를 ‘생활의 철인 3종 경기’로 생각할 수 있다.
사물시는 철저히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이 말하고 행동하게 씌어야 한다. 그러나 2연에서 ‘손톱에 꽃물 들이는 봉숭아’라는 표현은 사물시의 요건에 맞지 않다. 봉숭아는 자기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봉숭아꽃에게 꽃물을 들여 주는 존재는 햇빛이거나 공기거나 토양일 것이다.
위의 시는 객관화된 사물시의 여러 요소를 함의하고 있지만, 100% 사물시는 아니다. 그렇다고 위의 시가 시적 논리에 어긋난 잘못 창작된 작품인가? 절대 아니다, 독자를 집중하게 만드는 2중 구조적 표현방식이 이 시의 매력 포인트다.
 
 
4. 다초점의 복합적 구성 및 상징성
 
위의 시는 1연과 2연으로 된 짧은 시다. 그러나 각각의 연은 다초점의 모자이크 된 복합적 구성 및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시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외적 요소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여러 관점으로 사회문제를 의식화하고 있다.
1연은 ‘봉숭아’라는 사물과, 봉숭아와 대비시킨 ‘인간’이라는 두 개의 관점으로 씌어졌다. 1연 1행-4행, ‘첫눈 올 때까지~ 허리마저 부서져 누웠다.’ 부분을 살펴보자. 이 부분은 인간이 주체다. 인간의 관점으로 씌어졌다.
다음 1연 아랫부분 4행-6행, ‘비스듬히 누워 편히 등을 기댈 장독대도 없고~ 값비싼 월급봉투가 되고 싶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식물인 ‘봉숭아’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2연을 살펴보자. 2연은 ‘봉숭아’로 대변되는 어떤 ‘인간’의 삶의 배경이 노출되어 있다. ‘꿈-서울-막노동-병’ 패턴을 보여주기 하고 있다. 노동현장에서 고도의 위험군에서 일한 ‘봉숭아’로 대변되는 국민, 즉 노동자를 대표하는 저항시로 해석하면 그 상징성이 증폭된다.
또한 제목이 「서울에 시집온 봉숭아」라고 하여 주체가 여자라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 봉숭아꽃의 여성 이미지 때문에, ‘서울에 시집온’이라는 꽃을 주체로 한 사물의 관점으로 쓴 시로 해석해야 한다.
1연 5-6행은 ‘찬란한 스마트폰이나 값비싼 월급봉투가 되고 싶’은 노동자 관점의 시다. 노동자의 최고 행복은 삽, 톱, 망치를 버리고,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서류로 일을 하는 것이다. 펜 노동은 몸을 사고로 죽게 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또 다른 꿈은 화이트칼라의 여유다. 월급봉투는 일당이 아닌 빨간색 날 유급휴가도 포함된다.
위의 시의 다초점의 복합적 구성은, 시에 긴장감과 해석의 묘미를 준다.
 
5. 서울 수도권 집중화 현상과 도시빈민층 노동자 문제
 
위의 시를 앞에서 외연적 측면, 즉 시적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면, 이제 위의 시를 내용적 측면, 즉 사회적 배경, 즉 환경적 측면에서 조명하여 보자.
시인이 시를 쓰는 동기는 정서적 자극이다. 행복한 나라에는 시인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시는 심성의 깊은 상처나 자극, 깨달음이 창작 동기가 된다. 창작욕구는 시인이나 시인주변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산된다.
1연 2-4행을 살펴보자. ‘봉숭아는 꽃보다는 몸을 으깨는 생활 전선의 손톱이 되고 싶었지만, 하루 9 시간 철인 경기는 손톱도 등도 다 닳고 허리마저 부서져 누웠다.’
‘서울에 시집 온 봉숭아’는 위험한 육체노동에 노출된다. 위의 시에서 봉숭아는 노동자를 상징한다. ‘서울에 시집 온 봉숭아’는 상징일 뿐이다. ‘지구에 온 인간’이거나, ‘외국에서 온 근로자’거나, 시골에서 서울에 온 봉숭아거나 큰 카테고리 안에서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병든 노동자에 대한 연민이 문제제기의 골자다.
 
6. 질병과 소외, 노인문제
위의 시를 또 다른 측면으로 고찰하여 보자. 2연 1-2행을 살펴보면,
 
‘지금 봉숭아가 기다리는 것은 나비가 아니다. 고층 복합 빌딩에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 ’
 
위의 시는 ’봉숭아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전선에서 난투극을 벌이다가 허리를 다쳐 누워있는 샷시공, 건설현장에서 비계를 타다가 떨어진 노동자의 슬픈 뒷얘기다. 소외계층의 인권과 행복권, 생존권에 대한 사회고발적 시다..
‘나비’는 노동자의 이상주의와 꿈의 실현을 상징하는 단어다. 그런데 병든 몸은 이제 날고 싶은 의지가 없다. 아픈 노인은 자신을 찾아올 자녀의 전화벨소리에 예민하다.
그러나 2연 3행 ‘손톱 위에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웃고 있다.’처럼 허탈한 자조가 느껴진다.
한 편의 시는, 노인 소외문제, 장애우의 환경문제, 자녀에게 희생과 외면을 당한 부모 등, 당면한 사회 문제들에 관심을 호소하며 각성시키고 있다.
 
7. 결론
 
시의 세계에서는 사물과 자연, 인간과 동물이 물아일체를 이룬다. 시인은 사유와 관찰을 한 뒤 시를 써서 사회문제로 클로즈업하여 이슈로 만든다. 시인은 상상력과 이미지로 최초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특허권자가 되기도 한다. 시는 웅변하지 않지만 데모군중보다 부드럽게 대중을 재빨리 흡입한다.
시인이 베란다 난간에 있는 허리가 꺾인 ‘봉숭아’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면?
그 상황을 직면하고 아파하지 않았다면?
노동자의 생명권과 행복권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 사회는 아프고 병든 거다. 지성을 잃어버린 도시는 영혼이 죽은 거다. 통찰력을 가지고 사회병리현상을 고발하지 않는 사회는 발전과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개인의 행복이 곧 국가의 힘의 원동력이다.
시는 짐짓 빗대어 표현하는 문학이다. 위의 시는 설명하거나 웅변하지 않는다. 재해석의 관점으로 ‘봉숭아’의 삶을 인간, 특히 병든 노동자의 사회적 소외로 치환한 것이다. 짧은 2연의 시로, 긴 대하소설 분량의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 상징성이 있다. 단어와 문장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일. 독자와 평론가에게 주는 시의 이벤트다.
 
날샘일기 
 
 
김정현
 
 
홀로 밤을 지킨다
별과 달이 잠든 탓에
 
여름 가을 뜨거운 햇볕,
늙어버린 호박에 기대었다가
몇 잎 남지 않은 파인애플데이지와
눈을 마주쳐보다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새까만 하늘에
그림을 그리다가
빈방에 윙윙 휘젓고 다니는
파리 한 마리를 지켜보다가
밥 달라고 빽빽거리는 휴대전화를 달래다가
책을 꺼내어 활자를 끌어당기다가
꿈길로 들어서려고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도로 이불을 걷어내고 앉아
새벽의 문턱 넘는 시간을 주물럭거린다
동쪽 산이 붉은 해 하나 토해낸다  
별과 달을 닮은 해가 방실거린다
 
 
별과 달이 잠 든 탓에
홀로 밤에게 손을 흔들었다
 
 
 
 
 
 
                                                간결한 문체와 진정성, 독창적 개성의 손바닥그림
 
 
  위의 시는 간결한 문체와 진정성이 있는, 독창적 개성의 손바닥그림이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이다. 반복미와 확장성, 역발상과 도치 등 시창작의 표본처럼 여러 기법을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기법을 간단하게 아래의 여덟 가지 형태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진정성과 의인법, 아이러니 기법
  1연은 매력적인 전개방식이다. 잠이 안 온다고 하지 않고 ‘홀로 밤을 지킨다/ 별과 달이 잠든 탓에’라고 역발상적 아이러니 기법으로 접근을 하고 있다. 별과 달은 사실, 하늘에 뜨지 않은 날에도 하늘에 존재한다.  시인은 달과 별이 뜨지 않은 것을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이러니 기법과 의인화 기법을 써서 잠자고 있다고 표현한다. 인간의 눈, 시인의 눈으로 발견한 사실이다. 
 위의 시가 진정성을 갖는 이유를 살펴보자.  불면의 상황은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또 지금 겪고 있을 법한 상황이다. 1연과 3연의 2행의 시는 짧지만 강렬하다. 1연에서 잠이 안 온다는 사실을 말하였다면,  2연에서는 왜 잠이 안 오는지 그 이유를 말할 법하다. 그런데 이 시는 한 단계 진보하였다. 그 이유를 관념으로 하지 않고 여러 잠 안 오는 밤에 일어날 수 있는 행위로  대치하였다. 왜? 라는 질문에 대한 간결한 답이다. 군더더기가 필요없다. 1연과 3연의 상황과 이유를 2연에서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설명적이지 않고 사실적이다.
  위의 시가 진정성을 갖는 이유는 사건의 이류를 사실과 사물적 접근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연과 3연은 참이며 사실이다.
  2연의 모든 행은 사실이다. 거짓이 없는 참이다. 
  위의 시는 독자와 평자, 시인을 모두 만족시키는 진정성이 있는 시다라는 명제에 적합한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다. 
 
2. 사실적, 사물적 은유
  1연과 2연, 3연의 행에서 무리한 관념이 전혀 없다. 사실과 사물에 기본적 발상을 두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의 가장 중요한 표현기법 중 하나이다. 관념에 흐르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사물의 관점에서, 자신의 생각과 사념도 사물화하고 있다.  ‘뜨거운 햇볕- 늙은 호박- 파인애플데이지-툇마루-하늘-파리-휴대전화-이불-새벽-붉은 해- 별과 달’ 등 온갖 사물을 나열하고 있지만 산만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념과 정서적 방황을 사물에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초보 시창작 과정에서 범하기 쉬운 관념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사물에 집중하는 것이다.
 
3. 나열형 어미의 효과
   2행을  주목하여 보자. 나열형 어미를 왕성하게 활용하고 있다. 나열형 어미는 설명적 시와 다르다. 위의 시에서 2연의 나열형 어미  ‘-다가’ 가 범람하고 있지만 지루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자.  
  그 이유는 2연은 사건과 사물, 사실만을 나열하고 있다. 의식의 나열, 생각의 나열을 하지 않고 있다.  시적 기교에서 관념을 뺐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관념과 사념에 빠지면 시인 본인의 감정에 치우친  감정시, 토로시가 되기 쉽다. 그러나 위의 시는 사물과 사건, 행위를 나열하여 그 우를 범하지 않았다. 무기교의 기교의 좋은 표현기법이다. 시인이여, 사물에 집중하라.
 
4. 짧고 간결한 행과 연
  위의 시는 짧고 간결하다.  손바닥 그림처럼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는 문자로 그린 그림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1연 2연은 단 두 줄이다. 
  3연의 각 행들의 길이도 짧다. 또한 2연의 각 행들은 그 길이가 각각 다르다. 각 행마다 들어가기, 나가기, 들쭉날쭉하다.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시각적 미의식도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한 행이 너무 길면 시인의 의도와 달리 책이 출판되었을 때, 한 행만 다른 줄로 넘어간다. 특히 한 칸 들어가고 시작하는 경우기 때문에 미완의 그림처럼 불균형이 되기 쉽다. 
  짧고 간결한 행과 연은 독자에게 시원함을 준다. 질리지 않고 쉽게 시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말이 통한다면 줄일 수 있는 만큼 줄이는 것이 좋다. 명사에 붙는 조사도 뗄 수 있으면 떼면 좋다. 각 행과 연도 줄일 수 있는 대로 더 줄이면 시가 더 단단해진다.
 
5. 심심함과 나른함과  게으름의 미학
  시는 바쁘고 조급하게 쓰면 좋은 작품이 탄생하기 어렵다.  일제 통치시대  한국의 초창기 현대시를 쓰던 서정시인들은 룸펜생활을 하였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야 무념무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사유에 잠겨야 개성적인 좋은 시를 쓴다.  조급하게 급생산하면, 발표된 후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시는 심심하고 나른하고 게으르게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한다. 한 사물과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느긋하게 한 사물을 계속 직시하면 직관적 사유를 얻게 된다. 
  위의 시도 1연과 3연에서 밤을 꼴딱 새웠음을 알 수 있다. 
  2연에서는 하릴없이 이일 저일, 이것 저것 만지작 거리고 참견하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 1연과 3연은 시인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2연은 시인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2연은 한없이 더 길어질 수 있다.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또 더 짧아질 수도 있다. 그것은 시인의 역량의 문제다. 
  
6. 행간과 여백의 확장성
  행간과 여백은 상상력의 폭을 넓게 하여 시를 확장시켜 준다. 시에서 확장성은 사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위의 시는 각 연들의 배치가 시적 완성미를 더해주고 있는 부분적 한 이유다. 
 
 
7. 반복과 강조, 도치
  반복법은 시의 대표적인 강조법  중 하나이다. 서정시인 김소월의 시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는 기법이다. 위의 시에서는 1연과 3연의 반복이 시의 미의식을 더해 주고 있다.  1연 1-2행 ‘홀로 밤을 지킨다/ 별과 달이 잠든 탓에’ 와 3연 1-2행 ‘별과 달이 잠든 탓에/ 홀로 밤에게 손을 흔들었다’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애잔한 외로움과 번민을 강조한다. 또한 1연과 3연에서 1행과 2행을 도치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반복이 주는 지루함을 도치를 함으로써 시적 매력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8. 긍정적 에너지
  위의 시는 긍정의 힘이 있다. 2연 ‘동쪽 산이 붉은 해 하나 토해낸다/  
별과 달을 닮은 해가 방실거린다’를 주목하여 보자. 번민과 불면의 날밤을 새우고 또 희망의 아침을 기대한다.   
 
 
위의 시는 읽을 수록 윤이 난다.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시와 차별화된다.  
진정성이 주는 힘이다. 
좋은 시는 독자가 읽고 읽고 외우고 싶어진다.
그러나 더 좋은 시는 시를 창작한 시인 자신과 독자, 평론가가 모두 힐링된다. 오랜 만에 시창작 강의 자료가 될 좋은 시를 발견하여 필자도 힐링되었다.
 
<가온문학 평론 특집- 세자르 바예호의 시 세계>
 
 
    같은 이야기
 
 
                                                             세자르 바예호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있고, 내가 나쁘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을 모르지요
여쟀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나의 형이상학적
공기 속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불꽃으로 말했던
침묵이 갇힌 곳.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형제여, 들어보세요. 잘 들어봐요.
좋습니다. 1월을 두고
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니까요.
 
모두들 압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먹고 있음을…… 그러나,
캄캄한 관에서 나오는 無味한
나의 시 속에서
사막의 불가사의인 스핑크스를 휘감는
해묵은 바람이
왜 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두들 아는 데… 그러나 빛이
폐병환자라는 건 모릅니다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
그 신비의 세계는 구성지게
노래하는 곱사등이이고, 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길 멀리서도 알려준다는 것을 모릅니다.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자학과 절망의 종착점에서 피어난 해탈의 시학
―하이퍼시 구조론을 중심으로
 
이 선(시인)
 
 
1. 서론
세자르 바예호Ce'sar Vallejo(1892-1938)의 시 세계는 내용면에서는 <자학과 절망의 종착점에서 피어난 해탈의 시학>을 실현하고 있다. 또한 시의 표현구조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하이퍼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자르 바예호는 현대 초현실주의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시와 초현실주의 시로 문예사조를 갈라놓는다. 바예호의 시가 현대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하이퍼시>의 어떤 조건을 내포하고 있는지, 하이퍼시의 구조론에 입각하여 작품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 시의 형식인 외형을 살펴보자. 본 논문 2장에서는 표현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기본요소인 ‘링크- 리좀 - 무의미 시- 환타지 영상시(이미지의 결합)-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 ’에 초점을 맞추어 시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시의 내용을 중심으로 3장과 4장에서‘자학과 절망- 해탈의 시학’으로 분류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자학과 절망을‘해탈의 시학’으로 승화시켜 독자를 매료시킨 바예호의 하이퍼시의 특징을 분석하는 일은 현 시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필자가 바예호의 시를 하이퍼시 구조로 분류하는 것은 학계 최초의 학문적 고찰임을 밝혀 둔다.
 
2. 하이퍼시
하이퍼시는 ‘링크’와 ‘리좀’기능이 시의 단절과 결합, 연결을 실행하고 있다. 모든 행과 연은 제목과 소통되지만, 종속적이지 않다.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필자는 바예호의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인‘하이퍼시’구조를 <링크- 리좀- 환타지 영상시- 무의미 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으로 명명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링크
링크(link)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하이퍼시의 링크 기능은, 각 행과 연의 자립성과 독립성을 실현한다. 하이퍼시의 링크 기능이 바예호의 시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연과 연의 이질적 결합’‘제목과 내용’이 분리된다. ‘링크’의 기능은 ‘연결’이다. 그러나 내용이 제목에 제한을 받거나 구속받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 다른 내용’이가능하다. 각 연은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위의 시 1-7연의 각 연들은 제목 「같은 이야기」와 연결되어 링크된다. 그러나 이미지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들이 제목과 독립적으로 연결된다. 새로운 이미지 덩어리들의 합성이다. 그 이미지들은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새로운 감각적 미의식을 시에 준다.
1-7연의 각행은 자립적이며 독립적이다. 각 행들은 앞문장을 뒷문장이 지배하지 않는다. 각행도 ‘이질적 단어와 단어의 합성으로 각 행은 독립적이다. 단어, 행, 연은 삭제와 삽입을 하여도 시의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자립적이다. 아래 3연과 5연의 시를 살펴보자.
 
나의 형이상학적/ 공기 속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불꽃으로 말했던/ 침묵이 갇힌 곳.(3)//
 
모두들 압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먹고 있음을…… 그러나,/ 캄캄한 관에서 나오는 無味한/ 나의 시 속에서/ 사막의 불가사의인 스핑크스를 휘감는/ 해묵은 바람이/ 왜 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5)//
 
위의 시「같은 이야기」 3연과 5연은 제목과 링크되어 연결된다. 그러나 1, 2, 4연과 6, 7연을 모두 빼거나 넣어도 시의 구조가 유지된다. 그 이유는 각 연들이 링크되나, 각 연들은 독립적이며 자립적이기 때문이다. 링크 기능은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2) 리좀
리좀(Rhyzome)은 그물망처럼 얽혀, 확장되는 기능이다. 리좀은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시에 제공한다. 리좀은 확산적 기능이다.
리좀은‘이질성, 다양성, 무의미적 단절’을 실현하는 하이퍼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은‘중첩 이미지’로 실현된다. ‘리좀’의 기능은 거미줄처럼, 그물망처럼 러너로 퍼져나가 확산적 기능을 한다. 다음 시 「삶의 발견」일부를 읽어보자.
한번도, 지금 아니고는 한 번도 삶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지금 아니고는 한 번도 사람이 지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지금 아니고는 한번도 집이나, 거리, 대기, 수평선이 있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내 친구 빼리에가 오면 난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우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사실 내가 언제 내 친구 빼리에를 알았던 걸까요? 오늘 처음 우리가 아는 날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가라고, 가서 다시 돌아오라고, 그리고 나를 보러 들어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를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것처럼, 말하자면 처음처럼. 우리가 산 세월은 얼마나 짧은 겁니까! 내가 태어난 것은 갓 지금입니다. 내 나이를 셀 단위가 없습니다. 지금 금방 태어났거든요! 아직 삶을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여러분, 나는 지금 너무 작아서 하루가 내 안에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됐어요! 삶이 시방 나의 모든 죽음을 정통으로 꿰뚫었습니다.
―「삶의 발견」3, 5,7연
 
「삶의 발견」은 리좀 기능을 활용한 하이퍼시다. 한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자꾸 덧붙인다. 각각의 다른 단상과 의견을 계속 끼워 넣는다. 삽입하고 점점 부풀려져서 한권의 드라마같은 이야기가 생성된다. 리좀 기능을 사용하여 그물망처럼 여러 이야기를 촘촘하게 실로 짜놓은 듯 구성하고 있다. 리좀은 구성력이며 내용과 표현을 결정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무의식적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자동기술기법’으로 쓰고 있다. 요즈음 현대 시인들이 막 시작한 시창작 기법을 바예호는 백년 전에 이미 실험한 것이다.
리좀은 나뭇가지가 각각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시의 기둥에 뿌리가 내리고, 시의 기둥에서 가지가 뻗어나간다. 그 가지에서 줄기가 나온다. 잎이 피고, 꽃이 핀다. 허공엔 새가 날아다니고, 비가 오고, 나비가 와서 앉는다. 구름이 흘러가다 발을 멈추고 머물기도 한다. 바람이 열매를 떨어뜨리기도 할 것이다.
 
3) 무의미 시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열린 문장’이다. 시의 내용을 한정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무의미 시는 불확정적이며 무제한적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아래 시에서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의 요소를 살펴보자.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형제여, 들어보세요. 잘 들어봐요./ 좋습니다. 1월을 두고/ 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니까요.//
 
위의 밑줄 친 4연 3-5행을 눈여겨 살펴보자. ‘1월을 두고/ 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라는 표현은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표현이다. ‘초현실주의 하이퍼시’는 굳이 의미적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무의미 시’라고 보면 된다.
굳이 해석하려는 독자나 평자가 있다면, 1월에 어떤 단어를 대입하여도 제한받지 않는다. ‘나무, 장미, 도자기, 애인’ 어떤 다른 단어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현재와 미래, 과거’라는 시제를 넣어도 시가 성립된다. ‘무의미 시’는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어떤 행과 연을 삭제하거나 삽입할 수 있다.
 
4) 환타지 영상시― 이미지의 결합
하이퍼시는 ‘환타지 기법’과 ‘영상 기법’을 결합하고 있다. 현대인은 ‘환타지’한 영상과학의 시대, 빛의 파노라마 세계에 살고 있다. 바예호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비디오쇼와 빛의 쇼가 합성되는 광전자 시대다. 멀티비젼은 초현실주의의 특징이다. TV도 한 화면에서 여러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각각의 다른 요소와 단위의 덩어리들이 합하여 개별적, 선별적 전체를 만든다. 다음 「한 사내가 빵을 어깨에 메고…」전문을 소개한다.
한 사내가 빵을 어깨에 메고 간다 좀 있다가 나의 조정에 대해 시를 써볼까? 다른 사내가 앉아 긁는다. 겨드랑이에서 이를 꺼내 죽인다. 무슨 용기로 정신분석학에 대해 말하지? 다른 사내가 손에 몽둥이를 들고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의사한테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해볼까? 절뚝발이가 한 어린애의 팔에 의지해 간다 나중에 앙드레 브르통 책을 읽을까? 다른 사내가 추워서 떨고, 기침하더니 피를 뱉는다. 심오한 ''라는 존재를 결코 암시할 수 없는 걸까? 다른 사내가 진흙탕에서 뼈다귀와 과일껍질을 뒤진다. 그 다음에 영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쓰지?
 
 
샤갈의 그림처럼 바예호의 시는 이미지의 작은 알갱이들이 결합하여 이미지 덩어리를 만든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한 화폭 위에 낯선 이미지 덩어리로 펼쳐져 있다. 그 낯선 이미지들은 환타지 영상을 만든다.
위의 시는 새로운 형식의 시다. 각 연마다 끝행에 물음표를 넣고 있다. 평서문과 의문문이 첫연부터 끝연까지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된다. 어긋나는 낯선 질문은 낯선 이미지다. 그 질문이 시에 극적 상황을 만든다. 초현실주의 기법의 하이퍼시다. 동문서답, 선문답 같은 질문과 대답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작가의 마음속에 늘 자리잡고 있던, 진정성을 가진 의문이다.
새로운 시창작 기법은 환타지하다. 대답과 질문을 반복하고 있지만, 반어적으로 하고 있다. 역설적이다. 남자 앞에 나타난 새 여자처럼.
위의 시는 마지막 연, 끝행부터 거꾸로 서술하여도 시가 된다. 무의미적 나열형식의 시다. 바예호는 시는 표현주의를 추구하며, 언농일 뿐이라는 것, 심각한 물음도 심각하게 풀지 않고 가볍게 터치하듯, 음악적으로 ‘보여주기’ 하고 있다. 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는 작가 나름의 메시지다. 실험정신으로 쓴 하이퍼시다.
 
위의 시는 필자의 시 「소금꽃을 꺾다」와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이 비슷하여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래에 필자의 졸필, 시문학 문예지에 발표된 논문을 소개한다.
필자는 지난주 전에는(2017년 9월 28일, 오후 5시- 국회 시낭송회 날) 단연코 바예호의 시를 만난 적이 없다. 어느 지방 국회의원이 바예호 시인의 「같은 이야기」를 낭송하는 것을 듣고 전율을 느꼈다. 몇 명의 시인들에게 다음날부터 전화로 「같은 이야기」를 낭송해 주며, 서러움에 함께 숨죽여 울었다.
그의 매력의 빠져서, 17편의 시를 타자를 쳤다. 갑자기 바예호 시인으로 인하여 필자는 페루에 대하여 급 호감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페루의 자연, 페루의 기후, 페루의 역사, 페루의 전통의상, 페루의 음식, 아 잉카문명… 아즈텍 문명> 이제 페루는 당장 알고 싶고, 여행가고 싶은 나라 1순위가 되었다. 단지 바예호를 더 이해하기 위하여.
 
아래 필자의 졸시「소금꽃을 꺾다」전문을 소개한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신이여
그래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천 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오늘을 부정하면서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지금?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필자의 졸시는 하이퍼시의 몽타주‘환타지 영상시’기법을 장치한 시다. 현대문명 속의 부조리한 상황을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한 공간에 마구‘불안’한 현재를 뭉쳐서 던진다.
 위의 시는 ‘신’과 ‘인간’의 ‘질문과 대답’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상투어와 일상적 문장을 거부한다. 그 대화는 혼돈스럽고, 낯설며, 단절적이다. 미성숙한 초등학생이 낳은 아기는 곧 외국으로 입양되어‘알렉스’나‘미미’로 자랄 것이다.
위의 시는 제목에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소금’은 잎도 줄기도 없는 몸통만 있는 사물이다. ‘소금’과 ‘꽃’을 합성한 ‘소금꽃’도 꽃만 있지 줄기나 뿌리가 없다. 꽃받침도 없다. ‘소금꽃을 꺾다’라고 행위를 강조한 제목에 주목하여 보자. 제목이 아이러닉하며 역설적이다. 소금꽃은 꺾을 그‘무엇’이 없다. 
필자는 환타지 기법의 환경고발, 사회고발 부조리 시를 여러 편 발표하였다. 하이퍼시는 철학과 사유가 없는 말장난 시라는 비난을 극복하려 한 시도다. <낙타-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 도마뱀- 화장실에서 낳은 아기- 도둑고양이와 공원>까지 시의 중심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이동한다. 필자가 백년 뒤 한국에서 죽은 페루 시인 바예호에게 순간이동하여 만나듯이. 환타지 영상시는 장면이동이 가능한 한편의 시극이다. 환타지 드라마다.
5)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
바예호의 시에, 젊은이와 시인들이 탐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금 시대에 딱 맞는 표현, 딱 맞는 내용 때문일 것이다. 바예호의 시는 SNS가 친구인 시대, 단절의 시대, 고독의 시대에 적화된 시다. 쇼셜미디어적 감각이 있다.
바예호의 시는 방안에 앉아서 세계와 소통하는 시대,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에서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상상력의 공간이동’을 하는 시대에 알맞은 하이퍼시다.
모든 시는 거의 다 현재형으로 쓰고 있지만, 내용은 과거인 경우가 많다.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시에 현장감과 실감을 주기 위해서다.
다음 시 5연에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모두들 압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먹고 있음을…… 그러나,/ 캄캄한 관에서 나오는 無味한/ 나의 시 속에서/ 사막의 불가사의인 스핑크스를 휘감는/ 해묵은 바람이/ 왜 우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위의 5연의 시의 중심어는 <캄캄한 관--> 나의 시 --> 사막의 스핑크스 --> 해묵은 바람 --> 울음>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을 시에 적용하였다. 그 기능은 시의 깊이와 감각적 미의식을 더하고 있다. 정적이며 한정적인 시의 답답함을 해소해 준다. 시에 운동감을 준다.‘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은 ‘초현실주의적 하이퍼시’를 창조하였다.
 
3. 자학과 절망
본 논문 2장에서는 ‘초현실주의 하이퍼시’의 표현기법을 위주로 하이퍼시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본 논문 3장과 4장은 시의 내용 측면에서 시를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위에 제시한 시작품 「같은 이야기」 를 살펴보자.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1, 2, 4, 7)
위의 시‘1, 2, 4, 7연’을 살펴보자. 화자인 시인은 자신의 탄생을 아파한다. 신이 아픈 날 만든 미완성 제품이라고 자학한다. 4연에서는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니까요.’라며 거듭 항변한다.
신이 아픈 날 만든‘나’는 모든‘인간’을 대표한다. 신이 아픈 날 제조된 인간이라는 제품은 불완전하고 조악스러울 것. 그 모양새나 쓰임새도 미숙하며, 고장이 잦고 어설플 것. 이미 슬픔과 불행이 예견된 현재다.
다음 시 「아가페」일부를 살펴보자.
 
그 누구도 오늘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 오후에 그 아무것도 내게 청하지 않았습니다.(1)// 찬란한 빛의 행렬 아래에서/ 단 한 송이 묘지의 꽃마저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2)// 그 아무도 오늘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나는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습니다.(7)//
 
위의 시는 죽음과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한 하루는 죽은 하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이 딱 붙어서 같이 살고 있다.
그는 가난과 병마, 11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와 형이 일찍 사망하여 전 생애 동안, 분리불안을 겪었다. 러시아, 영국, 파리 등 해외로 떠돈 이유도 정체성의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자학과 절망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 시는 「하얀 돌 위에 검은 돌」전문이다.
소나기 오는 날 난 파리에서 죽으리, 그 어느날에 대한 기억이 내겐 벌써 생생하다. 난 파리에서 죽으리-아직 바쁘진 않지만- 어쩌면 어느 가을, 목요일, 오늘같은. 목요일일 것, 왜냐하면 오늘, 목요일, 지금 이 시들을 산문으로 베끼고 있는 순간, 내 상박골이 쑤시기 시작하고, 한번도 오늘같이, 이 많은 길을 걸어오며, 정말 혼자라는 생각을 다시 한 일 없다. 세자르 바예호가 죽었다, 그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모두들, 그는 아무에게 아무 짓도 안 하는데; 그를 몽둥이로 거세게 때렸다, 거세게 또한 밧줄로; 이 목요일들 그리고 고독과 비의 길들......
 
1936년에 발표한 「하얀 돌 위에 검은 돌」의‘소나기 오는 날 난 파리에서 죽으리(1연 1행 참조)’라는 예언처럼. 2년 뒤인 1938년 ‘세자르 바예호가 죽었다’(같은 시 3연 1행 참조). 정말 ‘파리’에서.
형이상학적 이상주의자인 바예호는 마르크시즘에 심취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시를 발표하다가 1919년 첫 시집 「검은 전령」을 발표했다. 1920년 방화범으로 몰려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1922년 그의 두 번째 시집 「트릴세」를 발간했다.
바예호의 시는 자학과 절망, 추락의 종착점을 향하여 점프한다. 시는 정신이 아픈 거다. 시를 쓰는 정신의 도구인 시인도 영혼이 아프다. 그렇다, 세자르 바예호는 한 몸에 두 개의 모순된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인디오와 메스티소의 혼혈아로 태어나, 평생 한 몸에 두 문명의 DNA가 갈등한다. 억압된 불안과 절망은 그의 시를 예민하고, 깊고, 강하게 했다.
4. 해탈의 시학
본 장은 시의 내용적인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의 기능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배설’ 즉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다. 시인의 ‘나르시시즘’과 ‘감상주의’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세자르 바예호의 시는 반전이 있다. 죽음과 절망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독자에게 미치는 결과는 시원한‘해탈의 미학’과 카타르시스다. 필자가 본 논문에서 바예호의 시적 논제를‘자학과 절망의 종착점에서 피어난 해탈의 시학’이라 명명한 이유다. 아래 시행을 살펴보자.
 
내가 나쁘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2 1-2)/ 1월을 두고/ 12월만 가져가면/ 안 됩니다.(4 4-6)
 
‘모두들 아는 데… 그러나 빛이/ 폐병환자라는 건 모릅니다/ 어둠이 통통하다는 것도…/ 신비의 세계가 그들의 종착점이라는 것도……/ 그 신비의 세계는 구성지게/ 노래하는 곱사등이이고, 정오가 죽음의 경계선을/ 지나가는 길 멀리서도 알려준다는 것을 모릅니다.//(6연)
 
위의 시 6연은 빛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빛의 상징은 밝음, 선함, 신을 지칭한다. 빛은 사물인 빛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빛을 중의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아픈 신’의 부연 설명이다.
인디오의 후예인 바예호가 섬기는 페루의 신은 ‘태양신’이다. 지금 그 태양신이 아프다. ‘폐병환자, 곱사등이’로 묘사되어 있다. 외세침략과 전란, 이데올로기의 혼란으로 끊임없이 전쟁을 겪은 페루. 황금이 많다고 소문나서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은 페루. 과연 폐병쟁이, 곱사등이 신은 페루를 구원할 수 있을까? 바예호의 고독을 구원해 줄까? 신의 역할은 남의 일에 관여하여 구해주는 해결사다. 프롤레타리아였던 바예호는 신을 부정한다.
그의 시는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하다. 빛은 선이며, 어둠은 악이라는 원시적 개념을 부정한다. 위의 시는 ‘빛은 통통’하고, 어둠은 ‘비실거린다’는 발상을 버렸다. 빛이 상징하는 ‘상승 이미지’를 ‘하강이미지’로 바꾸었다. 어둠과 ‘악’을 오히려 통통한 상승이미지로 격상시켰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지금 나는 이유 없이 아픕니다. 나의 아픔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원인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 원인이 되다 그만둔 그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아무것도 그 원인이 아닙니다만 어느 것도 원인이 아닌 것 또한 없습니다. 왜 이 아픔은 저절로 생겨난 걸까요? 내 아픔은 북녘바람의 것이며 동시에 남녘바람의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이상야릇한 새들이 바람을 품어 낳는 중성의 알이라고나 할까요? 내 연인이 죽었다 해도, 이 아픔은 똑같을 것입니다. 목을 잘랐다 해도 역시 똑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삶이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해도, 역시 이 아픔은 똑같았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위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저 단지 괴로울 따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이 고통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밤이 되기에는 등이 부족하고, 새벽이 되기에는 가슴이 남아돕니다. 그리고, 어두운 방에 두면 빛나지 않을 것이고, 밝은 방에 두면 그림자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지간에 오늘 나는 괴롭습니다. 오늘은 그저 괴로울 뿐입니다.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2연, 4연
 
가을비 내리는 날 바예호의 시를 읽어보라, 그 시의 울림이 깊게 아프다. 그의 시는 너무 아파서 아름답다. 당신의 심연에서 피어난 꽃처럼, 시의 구절들이 내 안에 침잠한다. 내 몸처럼.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는 반어적이다. 아이러니하다. 제목이 「절망에 대하여 말씀드리지요」라고 들린다. 그러나 깊이 음미하여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깊은 사유와 철학의 힘이다. 작가는 존재론적 고독을 직관으로 깨우친 것이다. 슬픔에 탐닉하다보면, 슬픔을 모두 쏟아내어 울어보라, 정신과 몸이 맑아진다. 눈물은 카타르시스다. 슬픈 시도 슬픈 영화나 슬픈 노래처럼 정화작용을 한다.
‘3포 시대’의 한국 젊은이들과 감성이 예민한 시인집단이 바예호의 시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절망의 나락의 정점을 찍으면 집착을 버리게 된다. 승려가 느끼는 해탈의 경지다. 바예호의 시는‘절망과 추락의 종착점에서 피어나는 해탈의 시학’이다. 슬픔의 미학, 절망의 미학이 주는 카타르시스다. 집착을 버리면 영적, 정서적, 육적 평안을 얻는다. 완전한 자유다. 바예호의 시가 보여주는 새 패러다임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문이란 문은 모두 두드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안부를 묻고 싶다, 그리고
소리없이 울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고
모두에게 갓 구운 빵 조각을 주고 싶다.
한 줄기 강력한 빛이
십자가에 박힌 못을 빼내어
거룩한 두 손이
부자들이 포도밭에서 먹을 것을 꺼내오면 좋으련만
 
이 차가운 시간, 땅이
인간의 먼지로 변하는 서글픈 시간,
문이란 문은 모두 두드려,
누구에게든 용서를 빌고 싶다.
―「일용할 양식」1, 4연
 
바예호의 시는 위의 「일용할 양식」처럼, 갓 구은 빵 같은 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손바닥이다. 누구에게든 용서를 빌고 싶은 손이다.
내가 당신에게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그의 시는 구원과 해탈이다.
5. 결론
세자르 바예호의 시는 링크와 링크, 리좀으로 이루어진 ‘하이퍼시’다.‘환타지 영상시’는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하며 시에 운동감을 준다. 그의 시는 단절과 단절 사이, 질문이 있다. 반전과 반전 사이, 역설적 질문은 독자에게 황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세자르 바예호의 삶과 시는 드라마틱한 ‘극적 갈등구조’를 지니고 있다. 패망한 고대 잉카문명처럼, 마추픽추 돌담 언덕처럼. 그의 시는 가파르게 질주하며 점프한다. 슬픔을 녹여내어 해탈의 시학을 완성하고 있다.
황금에 눈이 먼 스페인에 학살당한 인디오―제1차 세계대전― 국경분쟁―내전―가난―이데올로기 전쟁- 페루의 역사와 함께 바예호 시인은 동시대적 고난을 아파 한다. 바예호는 시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방화범으로 몰리며 외국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 타국에서 죽는다. 그러나 그는 처절하게 열정을 가지고 시를 썼다. 그의 초현실주의 문학은, 남미 라틴문학을 세계화시켰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바예호의 시를, 한국의 하이퍼 시인인 필자가 <하이퍼시>로 분류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예사조에 올려놓고자 한다. 시문학을 중심으로 문덕수, 오남구, 심상운, 김규화 등 하이퍼시 동인들이 출범시킨 하이퍼시는, 현재 40 여명의 하이퍼시 동인들이 매년 시집을 내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는 하이퍼 시인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는 현재 평론가와 시인들의 조명을 받고 있다. 앞으로 평론가들이 서로 논쟁하며, 시창작 기법을 연구할 것이다. 정반합의 원리에 의하여, 하이퍼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로 문예사조에 족적을 남길 것이다. **
 
사기꾼 이야기
 
 
 
정 성 수
 
 
 
           한평생 나는 사기를 쳤네
            언제나 추운 앞마당 내다보며
            보아라, 눈부신 봄날이 저어기 오고 있지 않느냐고
            눈이 큰 아내에게 딸에게 아들에게
            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
 
            식구들은 늘 처음인 것처럼
            깨끗한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고
            먼지 낀 형광등 아래 잠을 청했지
 
            다음날 나는 다시 속삭였네
            내일 아침엔 정말로 봄이 오고야 말 거라고
            저 아득히 눈보라치는 언덕을 넘어서
            흩어진 머리 위에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푸른 채찍 휘날리며 달려올 거라고
            귓바퀴 속으로 이미
            봄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오지 않느냐고
 
            앞마당에선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허공에 흰 머리카락 반짝이며 아내는 늙어가고
            까르르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아무 소문도 없이 어른이 되고
 
            종착역 알리는 저녁 열차의 신호음을 들으며
            미친 듯이 내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도
            일그러진 담장 밑에 백일홍 꽃씨를 심고
            대문 밖 가리키며
            
            보아라, 저어기 따뜻한 봄날이
            오고 있지 않느냐고
            바람난 처녀보다 날렵한 몸짓으로 달려오지 않느냐고
            갈라진 목소리로 사기를 친다
            내 생애 마지막 예언처럼.
  
 
「사기꾼 이야기」  시적 아이러니와 역설
 
이 선
 
 
 
 
정성수의 「사기꾼 이야기」는 각각의 연들이 보여주는 시적 아이러니와 역설의 문장들이 감동적인 가난한 사기꾼(?) 아버지의 이야기다. 사기의 내용은 ‘봄이 온다고 가족들에게 사기를 쳤다’이다. 제목과 연관시켜보면, 이 시의 중심어는 ‘봄이 온다’이다. 그러므로 위의 시의 1-7연의 각 연들은 사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시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시인이 꿈꾸는 비현실적인 세계의 이상주의와 몽환적 환상주의를 나긋나긋, 비애적인 목소리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그런데 시를 읽다보면 ‘사기꾼’이 맞기는 한데,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이게도 진정성 있는 한국의‘아버지상’과 직면하게 된다. 시인이 미리 장치한 ‘아이러니와 역설’의 시적 기교 장치 때문이다.
 
시인은 꿈꾸는 이상주의자다. 플라톤 시대부터 ‘시인 추방론’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시인은 ‘비현실적 사회부적응’ 인간형이 분명하다. 시인은 현존하는 자신의 주변의 실제적인 ‘현실 밀착형 인간’보다, ‘먼 거리’에 존재하고 있는 자연과 더 긴밀하게 소통한다. ―꽃과 나무, 구름과 바다, 돌과 별 등 자신에게 말로 직접적 비난이나 거부를 보이지 않는 자연과 더 긴밀히 소통하며 친애적인 경향이 강하다.
「사기꾼 이야기」는 식물이 태양을 향해 나뭇가지를 뻗듯, 식물성 유전자를 가진 가난한 아버지의 거부당한 꿈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뇌와 감각들은 예민하고 촉수가 가늘고 길다. 태양의 후예라기보다는, 달과 별과 구름의 DNA를 유전적으로 상속받은 혼외자식처럼. 그러므로 위의 시의 화자인 ‘아버지’도 인간과 생활,의식주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가난은 시인의 필연성일 터. 투쟁적이며, 경제관념이 투철한 태양의 후예들과는 달리, 시인의 감각에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시의 자질이 형성되어 있다. 시는 ‘자유’와의 숨바꼭질이다.
 
위의 시 1-7연에서는 ‘아이러니와 역설’기법이 병렬적이며 반복적으로 보여주기 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 정성수가 제시하고 있는 ‘아버지상’은 슬픈 소외자의 음성을 지녔지만, 실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내하는 한국의 아버지상이다. 시적 화자인 ‘아버지’는 ‘사기꾼’이라고 자신을 지목하여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어조는 비애적이지만, 그 목소리는 당당하다.
1연을 살펴보자.
1연 1행은 ‘한평생 나는 사기를 쳤네’라고 자신을 시니컬하게 고발한다. 시적 긴장감이 고조되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은 화두를 던지며 야심차게 시에 접근한다. ‘사기꾼’이라는 자기고발은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런데 사기의 내용을 보니 죄로 인정하고 감옥에 넣기는 애매하다. 긴장감이 풀어지며 ‘어디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흠’ 내심 작품 속으로 빠져든다. 그 대답은 ‘보아라, 눈부신 봄날이 저어기 오고 있지 않느냐고’(1연 3행)라며 사기의 진상을 밝힌다.
죄의 지목은 현장성과 피해정도가 객관적으로 측정될 때 부가되는 것인데, 정성수의 사기죄는 성립이 애매모호하다. 오히려 사기꾼이라고 비난받기보다는, 가난 중에도 ‘꿈과 이상, 희망’을 잃지 않는 칭찬받아야 할 덕목으로 보인다. 아이러니 기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날렵한 표현이다.
1연 4행― ‘눈이 큰 아내에게 딸에게 아들에게’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으며 마음이 약할 것 같다. 생활비를 벌어다 주지 않아도 바가지를 긁거나 원망의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다. 또 시인은 그런 아내와 딸, 아들의 약점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식구들이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1연 5행) 부분에서도 ‘아이러니와 역설’ 기법이 실현되어 있다. 사실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는데 슬프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사기꾼은 늘 말로 상대의 마음을 바꾸는 말기술자다. 굳이‘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라고 자기성토를 할 필요는 없다. 굳이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바로 아이러니 기법의 표현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보여주는 반어적인 표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와 같은 ‘반어적 표현’이 아이러니의 기본 조건이다.
위의 시의 어조는 반성적이며, 고백적이며, 애조적이다. 그 부분들이 이 시를 해석할 때 반어적으로 작용하게 한다. ‘식구들은 늘 처음인 것처럼/ 깨끗한 손을 들어 답례를 보내고/ 먼지 낀 형광등 아래 잠을 청했지/(2연 1-3행)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가난한 60-70년대 풍경이 그려진다. 아내는 가난한 밥상을 물리고, 아이들은 후줄근한 이불을 차내며 곤히 잠을 자고 있다. 배부르게 먹지 못한 아내와 아이들의 볼은 창백할 터.
2연을 읽으면 독자는 아버지를 사기꾼이라고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수용을 하게 된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시절의 기억을 한국인은 누구나 배경처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며.
가난한 아버지를 향한 불만을 표출하거나 고발하지 않는, 그때 그 시절 아내와 아이들은 착했다.
3연에서는 ‘다음날 나는 다시 속삭였네/ 저 아득히 눈보라치는 언덕을 넘어서/ 흩어진 머리 위에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푸른 채찍 휘날리며 달려올 거라고’(3연 1-4행)
‘향기로운 화관’과 ‘푸른 채찍’의 이미지는 백마 타고 오는 왕자의 이미지다. 봄날의 희망을 왕자의 이미지로 바꾸며 3연에서는 다시 아이러니 기법을 쓰고 있다. 슬픈 이야기인데, 울고 싶은 이야기인데 지고지순 아름답다. ‘봄이 온다고’ 약속하는 가장의 거짓말 사기극은, 가난을 부끄러움 없이 숭상하던 계절의 인생관이며 순애보다.
그 시절의 아버지들의 아름다운 약속이며 꿈이다. ‘귓바퀴 속으로 이미/ 봄의 말발굽소리가 울려오지 않느냐고’(3연 4-5행)는 다시 아름다운 사기 약속으로 이어진다. 눈물 나게 그리운 아름다운 계절의 가난한 아버지의 약속이다. 가족을 보호하고 안락하게 숨겨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사기꾼 아버지가 분명하지만- 아직 봄은 오지 아니하고 약속은 어긋났지만- 용서하고 안아주고 싶은 약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3연에서도 아이러니와 역설기법의 모순적인 문장과 기교가 돋보인다.
4연 ‘앞마당에선 여전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4연 1-2행) 부분을 살펴보자.
생활과 삶의 아이덴티티 앞에서 아버지의 고뇌는 춥다. 4연쯤 되면 독자는 연민과 동조, 사랑을 느끼게 된다. 점층적이며 반복적인 ‘아이러니와 역설 기법’으로 시인은 독자를 압도적으로 사기꾼 아버지에게 끌어들인다. 어느새 시인의 삶 속으로 동화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독자는 곧 시인의 마음이 된다.
 
‘허공에 흰 머리카락 반짝이며 아내는 늙어가고/ 까르르 까르르 웃던 아이들은/ 아무 소문도 없이 어른이 되고’(5연 1-3행)
늙은 아내와 말이 없어진 사춘기 아이들의 대비는, 또 ‘아버지’라는 이름의 비애의 조건이 된다. ‘아이러니 비가’라는 제목을 붙여 따로 분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각 연들이 갖는 호소력 때문이다.
‘종착역 알리는 저녁 열차의 신호음을 들으며/ 미친 듯이 내일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도 일그러진 담장 밑에 백일홍 꽃씨를 심고/ 대문 밖 가리키며’(6연 1-4행)
아버지의 사기 행각은 6연에서 절정이다. ‘미친 듯이 내일을 이야기한다, ’ 부분이압권이다. ‘미친 듯이 내일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이 시의 아이러니와 역설 기법의 시적 장치다.
 
‘보아라, 저어기 따뜻한 봄날이/ 오고 있지 않느냐고/ 바람난 처녀보다 날렵한 몸짓으로 달려오지 않느냐고/갈라진 목소리로 사기를 친다/ 내 생애 마지막 예언처럼.’(7연 11-5행)
7연에서도 1행과 2행, 3행에서 아이러니 기법을 보이고 있다. ‘바람난 처녀보다 날렵한 몸짓으로 달려오지 않느냐고’(7연 3행) 부분이다. 아직 겨울인데 봄을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억지스러움이 이 시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그 아이러니는 애매하여 경계를 짓기 어렵다. 참인듯한데 거짓이고, 거짓인듯한데 참이다.
 
아이러니 기법은 시의 기본 구도이다. 넌지시 짐짓 말을 던져놓고, 반응에 반응하지 않는 언어유희다. 말 던지기를 하며, 은근히 역설적으로 반응한다. 「사기꾼 이야기」 는 진정성과 ‘아이러니와 역설’ 이라는 시적 기교, 시대상, 시인의 조건과 시인의 천형까지 드러내어 보여주기 하고 있다. 이 세대에도, 이전 세대에도, 다음 세대에도, 아버지들의 애환은 계속될 것이므로. 정성수의 「사기꾼 이야기」는 독자의 수용과 공감이 증폭될 가장의 비애로 남을 작품이다.
 
2015년 가온문학 여름호 발표
 
 
 
이제는​
   
    
박남희
  
 
   
  석양을 팔아야겠습니다
  기우는 것은 빨리 파는 것이 남는 것이지요
  술잔을 생각하면
  저녁하늘이 붉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누가 술에 조금씩 어둠을 섞어 하늘에 버렸을까요
  이제는 별을 팔아야겠습니다
  벌을 받아야겠습니다
  술 취한 별이 모여서 막걸리처럼 흐르는 것을 사이에 두고
  영영 벌 받기 위해
  견우와 직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하늘을 팔아야겠습니다
  
  죽어서 말이 없는 자와
  살아서 눈물 흘리는 자가 흘려보낸 시간 속
  자꾸만 기울어지던 중심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힌 채 인양할 줄 모르는
  저 석양을 팔아야겠습니다
 
 
 
 
 
 
 
<이선의 시 읽기>
 
    ‘판다’의 이미지에 부재와 이별을 담은 트라이앵글 구조
 
  위의 시는 ‘판다’라는 이미지에 부재와 이별을 담은 트라이앵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트라이앵글 구조는 대등하고 독립적인 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를 의미구조와 형태구조로 분석하여 살펴보자.
 
 1. 의미 구조
  
  위의 시「이제는」은 많은 시간의 경과를 겪어낸 ‘현재 시점’의 제목이다. 현재 시점에서 화자는 지금까지 생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집착하며 소유한 것들, 이를 테면 <석양-별-하늘>에 대하여 이별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놓아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예견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제까지 집착하며 소유하고 있던 <석양-별-하늘>을 팔고 싶다고 말한다. 버리겠다고 말하지 않고 ‘팔고 싶’어하는 표현에 주목하여야 한다. 시적 반전 매력을 갖는 대목이다. 버리지 못할 정도로 간절하고, 집착하며, 소중한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팔다’는 ‘석양’의 이미지로 대변된다. ‘석양은 존재하다가 생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생물체의 쓸쓸한 뒷모습’ 이미지를 담고 있다. ‘잡다’와 ‘놓다’라는 단어는 반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존재와 부재, 소유와 상실, 집착과 회피를 의미한다. ‘석양’의 이미지는 ‘놓음’의 이미지다.
  ‘별’과 ‘하늘’이라는 단어를 <융 철학>의 <집단무의식>적 상징성으로 해석하여 보자. ‘별과 하늘’은 실제하는 사물이지만, <성공의 끝-숭배-근원> 등의 현대적 상징성을 가진 단어로 해석된다.
  ‘석양, 별, 하늘’은 이미 많은 시인들이 상용한 단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단어들은 늘 새로운 의미와 표현으로 재탄생되는 신비로운 명약과 같은 이미지를 재창조한다. 굳어버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도 표현과 구조의 새로움을 갖는다면 독창적인 시로 탄생할 수 있다.  
 
 
  2. 형태 구조
  
  다음은 위의 시의 형태 구조를 살펴보자.
 
  첫째, 독립적 병렬구조
  제목과 1, 2연의 연결 형태를 살펴보자.
  제목 ‘이제는’은 독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목을 1연과 2연 맨 앞에 배치하여 보자. 모두 의미가 통한다. 또한 ‘1, 2, 3, 6, 7, 8, 12, 15행’의 앞에 어떤 곳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다. ‘지금은’이라는 제목은 전체를 아우르는 수식어 작용을 한다. 물론 1연 1행과만 연결하여도 된다. 위의 시는 병렬적이며 독립적이다.
 
 
   둘째, 트라이앵글 구조
   <석양-별-하늘>이라는 단어를 중심어로 하는 트라이앵글 구조를 가지고 있다. 3개 단어의 구조와 형태는 대등한 등가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 연과 행들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며 유기적이다.
 
  셋째, 파생적 구조
  <석양-별-하늘> 구조에서 파생어와 파생의미 구조를 갖는다.
  1행 ‘석양’에서 파생된 이미지가 2행 ‘기우는 것’이다.
  3, 4행도 ‘석양’에서 파생된 이미지의 구조를 갖고 있다.
  3행 ‘술잔’과 4행 ‘붉어지는’은 5행의 ‘술에 어둠을 섞은 하늘’의 이미지로 파생된다. 5행의 ‘술’과 6행의 ‘별’은 8행의 ‘술 취한 별이 막걸리처럼 흐르는 것’으로 연결된다. 8행의 ‘흐르는 것’들의 별의 이미지를 끌고 와서 10행의 ‘견우와 직녀’로 연결된다.
 
  2행 ‘기우는 것’은 14행 ‘기울어지던 중심’으로 연결된다. 또한 15행과 16행의 ‘바다 깊숙이 가라앉는 석양’의 이미지와 같다.
 
  1행 ‘팔다’의 이미지는 6행, 11행, 16행에서 반복적 파생을 한다.
 
  
  넷째, 아이러니 기법
  위의 시는 김소월의 「진달래」에서 보여주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와 같은 아이러니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반복되는 ‘팔겠습니다’라는 단어는 역설적이다. 쉽고 짧지만 강렬한 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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