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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덩굴 - 김광영
2022년 05월 26일 16시 27분  조회:671  추천:1  작성자: 강려
담쟁이덩굴
 
김광영

 
 
담쟁이는 홀로 서기를 못한다. 줄기 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악착스레 기어올라야 한다. 원래 담쟁이가 설 자리는 담벼락인데 나무를 타고 오르는 별종도 있다. 제자리를 타고 오르면 눈길이 곱지만, 나무를 타고 오르면 짐으로 보이기도 한다.
 
낙엽송의 둥치에 담쟁이가 타고 오른다. 어깨에 매달린 식솔도 많은데 담쟁이까지 붙어서 살려고 한다. 줄기로는 목을 조이고 부착 근으론 수액을 빨아먹으며 염치없는 짓을 한다. 하지만 낙엽송은 살갑게 봐주는 듯하다. 어쩌면 낙엽송의 우직한 성격이 나풀나풀한 담쟁이를 좋아했지 싶고, 매달리는 손을 뿌리칠 만큼 야멸치지도 않아 연을 맺었는가 싶다.
몸 붙일 곳을 찾은 담쟁이는 미끈한 둥치를 기어올라 상큼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하늘거리는 잎들의 율동. 그 잎에 흐르는 자르르한 윤기는 낙엽송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지 그윽한 그 눈빛을 보내 담쟁이의 기를 살려 놓기에 충분하다. 뼈대 없는 가문에서 자라 듬직한 둥치를 안고 살 수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낙엽송의 마음을 차지한 담쟁이의 기세가 가관이다.
비록 기대어 살지만 홀로서기로 살아가는 싸리나무들을 눈 아래로 본다. 깔밋한 몸에 성질까지 깐깐하여 융통성이라곤 없다고 무시하는 듯하다. 비바람에 모든 잡목들이 휘청거릴 때도 든든한 둥치만 휘감고 있으면 무사한데, 능력도 없으면서 고매한 척 살아가는 여린 나무들을 아둔하게 보는 눈치다. 담쟁이의 반질거리는 잎들을 보면 자신이 아주 지혜롭게 한 세상 살아간다는 듯하다.
담쟁이는 요구조건이 합당치 않으면 간간이 낙엽송의 속을 썩이기도 한다. 생글거리던 웃음도, 귀여운 몸짓도 죄다 거두고 절개도 아닌 절개를 과시한다. 이미 담쟁이의 맛에 길들여진 낙엽송은 ‘어디에서 이 외꽃 같은 웃음과 야들한 자태를 볼 것인가’ 해서 무릎을 꿇고 만다. 비록 더부살이를 하지만 어진 동반자를 만나 성깔을 한껏 부리면서 살아간다.

한편 싸리나무들은 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걸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 한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그런 삶은 용납이 될 수 없다. 둘은 근본부터 다르다. 담쟁이는 요령껏 남의 등골을 빼먹고 살고, 싸리나무들은 궁핍하지만 곧은 절개를 으뜸으로 친다. 그래서 쉽게 살아가는 담쟁이덩굴이 곱게 보이질 않는다. 뼈대 있는 나무들의 모임엔 절대 끼워주지 않고 신분을 구분하며 무시해 버린다. 왜소하고 초라하지만 내면에선 품위를 지니려고 애를 쓴다. 무성한 칡덩굴보다는 나약한 잡목을 높이 보는 무리들이다. 물질보다는 정신을 앞세우고 후세에게 누가 되는 흠집은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간다.
낙엽송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넘쳐흐를 땐 무리가 없는데 가뭄에는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정든 담쟁이를 뗄 수도 없어 애초에 뿌리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눈치다. 담쟁이가 누구인가. 어디에 기대고 살아볼까? 요 궁리 저 궁리하며 눈치 하나로 살아가는 덩굴식물이 아니던가. 약삭빠른 담쟁이는 스스로 떠나주는 것만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서 슬슬 떠날 채비를 한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존재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로 작별인사를 하며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풍채 좋은 낙엽송의 둥치에 얼기설기한 줄기들이 지저분하게 남아서 품위를 추락시킨다. 하지만 그 흔적은 뼈대 없는 후예들을 거두어 먹인 후덕한 처소이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하리라.

설 자리를 아는 건 지혜로운 일이다. 고샅길 돌담 위에 초록 레이스를 덮어씌우듯 뻗어나가는 담쟁이덩굴은 살뜰한 형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담을 운치 있게 꾸며서 발길을 불러들이는 재주꾼이다. 조석으로 피워 올리는 굴뚝의 연기를 마시며 소박한 꿈을 꾼다. 고택의 이끼 낀 기와담장을 덮어줄 꿈이 아니라 오막 집을 그림같이 채색할 아름다운 꿈이다. 허황된 부를 탐내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자리를 반짝거리게 가꾸는 형이다.
해묵은 은행나무가 뜰 안에 우뚝 선 대가의 담장에도 빛깔 깊은 담쟁이덩굴이 엄전케 덮고 있다. 번잡하게 드나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조신하게 담벼락을 지킨다. 엄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생뚱맞은 생각도 가끔 있지만 대가의 체통을 위해 마음을 삭이곤 한다. 명문가가 그냥 되는 게 아닌 것을 체험으로 배우며 자리를 지킨다.
낙엽송을 휘감던 담쟁이! 그는 어물전 망신을 시킨 꼴뚜기다. 두 갈래 길목에서 헷갈린 판단으로 설 자리를 못 찾은 실수한 삶이다. 격을 잃어버린 담쟁이. 그를 마음 깊은 담쟁이들이 와락 껴안으며 시멘트벽이라도 벽을 타고 오르라 한다.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쓰디 쓴 후회의 눈물인가.([수필시대] 2012. 7/8)
 
∣작법 공부∣
 
수필의 다중(多重)적 구성법 구조
 
문예작법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작법은 크게 세 가지로 발견되고 있다.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상징)창작, 서사구성법의 창작,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이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법은 번과 번을 합친 구조의 창작이다.
「담쟁이덩굴」은 일견 번 서사구성법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종결문단의 “그는 어물전 망신을 시킨 꼴뚜기다.”를 담쟁이덩굴에 대한 비유(상징) 창작으로 본다면 + 형태의 구성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다중적 구성법은 소설이나 희곡 등에서는 흔하게 발견되지만 수필작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작법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담쟁이덩굴’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재로 선택한 담쟁이덩굴은 한 가지가 아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담쟁이덩굴은 낙엽송에 붙어서 기생하는 담쟁이, 두 번째는 고샅길 돌담 위의 담쟁이, 세 번째는 대가의 담장을 터로 잡은 담쟁이. 이 세 가지 담쟁이 중에서 낙엽송에 붙어서 기생하는 담쟁이덩굴 이야기를 작품의 중심무대로 삼고 있다.
구성법이란 사건과 사건의 관계설정과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사건)를 어떻게 전개해 갈 것이냐의 문제가 기본 작업이 된다. 이 작품의 중심 구성법은 낙엽송에 붙어사는 담쟁이덩굴과 그 주변 환경과의 다중적 관계 구조로 짜여져 있다.
첫째는 담쟁이덩굴과 낙엽송과의 관계다. 두 번째는 싸리나무와 비교되는 삶의 양상의 관계다. 세 번째는 고샅길 담쟁이와 대가집 담쟁이와 비교되는 삶의 양상의 관계다.
이 같은 다중적 구성법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는 주제는 “그는 어물전 망신을 시킨 꼴뚜기”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이곳의 ‘꼴뚜기’는 말 할 것도 없이 어떤 인물 유형의 상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창작문예수필의 세 가지 기본작법 양상 중에서 번과 번을 합친 고차원적 구성법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사건과 두 개 이상의 보조관념 사건과의 다중적 관계를 얽어 짜서 구성하는 작법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TV 드라마이다. a남자와 b여자 관계라는 중심사건에 a남자의 가정 이야기와 b여자의 가정 이야기, 그리고 a와 관계가 있는 c와 d의 이야기, 다시 b와 관계가 있는 e와 f의 이야기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중심 사건인 a남자와 b여자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 거의 모든 드라마의 구성법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는 다음 회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방송극을 시청한다.
그런데 그런 방송극 시청자들에게 수필을 읽으라고 하면 방송극만큼 손에 땀을 쥐고 읽겠는가? 읽기는커녕 “수필도 문학이냐?”고 손가락질하고 있지 않은가? 왜 수필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창작론이 없는 글쓰기를 무려 1백년이나 하여왔기 때문인 것이다.
수필문단이 이 작품 같은 다중적 구성법을 할 줄 알게 된다면 앞으로 10년쯤만 지나도 떠나갔던 수필독자들이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8 ]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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