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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 10)
2022년 07월 11일 15시 50분  조회:797  추천:0  작성자: 강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

 

김경란

연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서 말라르메의 시간의 시학과 공간의 시학을

연구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프랑스 파리 7대학교에서 말라르메의 '무'의 추구

와 글쓰기의 문제를 연구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 서문

 

  상징주의란 무엇인가?

  막연히 우리는 상징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접하게 된다. 그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며, 또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주의라는 말은 이제 지나가버린 사조를 기술하고 정리할 때 쓰는 한갓 하나의 용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상징주의라는 말은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라는 용어처럼 오래 전에 문학개념 사전에 확고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고전주의, 낭만주의만큼이나 보편적인 존재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상징주의는 역사적으로 폐기되었음에도 부정할 수 없도록 존재하는 문학의 어떤 양식이자 도도한 흐름이기도 하다. 좁은 의미에서 상징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표현의 한 방법을 지칭하기도 한다. 상징주의 문학운동이 전개되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사실주의적 태도에 반대되는 태도를 지칭할 때도 이 용어는 유효하다. 더 중요한 점은, 상징주의가 큰 흐름을 이루든 아니든 적어도 하나의 문학적 태도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징주의라는 흐름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지, 또 어떻게 남아있게 되는지를 알고자 한다.

  어떠한 사조든 그것은 발생 자체 속에 이미 자신의 한계를 지니고서 출발한다. 상징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상징주의는 어떠한 연유로, 어떠한 양식으로 살아있기도 하는가. 그것은 현금의 문학의 양상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그것이 존재한다면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쩌면 출발에 앞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상징주의라는 소멸된 조류가 살아있는 조류와 연결되는 것은 '상징'이라는 문학의 어떤 , 가장 작을 수도 커질 수도 있는 이 영원한 도구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사물과 언어를, 현실과 생각을 잇는 매개인 상징은 단순한 의사소통 차원을 넘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징주의가 상징에 대한 어떠한 태도와 필연에서 싹 텄는지, 그것은 어떠한 언어체계에 도달하는지, 자라고 꽃 피는 과정이, 열매가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작용을 하였고 할 것인지를 알아보려 한다. 그러나 여기는 상징 이론이나 의사소통 이론을 다루는 장소가 아니며, 문학의 작은 기법으로서의 상징주의를 다루는 장소도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겠다.

 

  여러 문학 사조들 중에서 '상징주의'는 정의 영역이 넓고 모호하며 영향 범위 또한 아주 넓은 사조이다. 그것이 문학 전반과 예술의 다른 장르에 미치는 상호관계들은 쉽게 개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독자들을 위하여 상징주의가 충분히 설명된 경우가 많지는 않아 보인다.

  상징주의는 19세기 중반 이후, "고답파(高踏派)와 자연주의의 문학적 유물론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사조라고 정의 내려지기도 한다. 이는 형식적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상징주의의 내용상의 특징은 무엇보다 언어 자체에 대한 자세와 상징에 대한 태도 속에 있는 것이다. 즉 상징주의란 문자 그대로의 사상(事象)들 너머의 또 다른 현실을 언어로써 환기시키고, 언어를 통하여 그들의 세계를 완성하려 한 태도라 하겠다.

  '상징'의 개념 또한 대단히 모호하고 그 영역이 넓다. 상징은 단순히 기호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신화를 지칭하기조차 하는 등, 언어활동의 거의 모든 영역과 연관되기까지 한다. 따라서 상징 자체를 정의내릴 때, 그것은 우선 언어학적 정의와 문학적 정의로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후자에 관심을 두면서 상징주의의 여러 현실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우리는 상징주의 태동에서 출발하여 상징주의의 막다른 점까지, 전체적인 움직임들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다양한 양상들을 항목별로 정리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여러 용어들의 전문적 세부로 들어가기보다는, 다양한 상징주의의 영역들을 독자들에게 평이하게 요약하여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낭만주의, 고답파 등을 배경으로 하고 데카당스, 초현실주의, 현대시, 누보로망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상징주의 운동의 궤적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아울러 이 움직임과 문학 내적이고 외적인 여러 요소와의 관계들을 다양한 차원에서 소개하는 식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상징주의가 포용하는 예술의 다른 영역들, 즉 상징주의의 영향 범주를 따라 가보려 한다. 문학과 다른 예술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주의는 그것 자체로 결코 닫혀 있으려 하지 않았던 사조였기 때문이다. 궁극에는 예술과 예술과의 경계를 넘고 예술 스스로의 초월을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화가와 음악가와 문인들의 일화들은 그러므로 상징주의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모습들을 드러내준다. 상징주의의 눈에 띄는 특징은 문인들이 다른 예술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찾기를 시도했다는 점에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춤은 상징주의 언어에 비유되었으며, 상징주의 문학은 가장 완성된 모습을 극 형식을 빌려 구현하고자 하였다. 상징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예술들을 통합한 예술에 언어를 통하여 도달하려 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언어에 대한 여러 실험과 활자배치술의 혁명에까지 이어져서, 우리들의 오늘날의 시와 산문에 있어서 가장 첨단적인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점은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이상과 같은 시각으로 상징주의의 면모에 조심스레 가닿고자 한다. 상징주의를 낳은 정신은 결국 어떠한 것이었나, 또 그것은 어떻게 하나의 미학으로 완성되었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이러한 질문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징주의 문학사를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향과 한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문학이 어떻게 위기를 맞이하며, 또 그 위기를 넘어서 것인지를 상징주의라는 척도를 통하여 가늠하고자 한다. 문학이 도달하는 딜레마와 동시에 문학이 제시하는 희망을 따라 가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의견의 수동적 종합보다는, 미숙하다 하여도 우리의 고유한 시선에 도달하고자 한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2)

 

2. 상징주의의 정의

 

1. 상징의 어원과 의미

 

상징이란

  '상징(symbole)'이란 말은 희랍어 'sumibolon'에서 나온 말로, 희랍어에서 '상징'은 둘로 나눠진 물건이나, 부호나 표지를 의미한다. 어떤 두 사람이  하나의 물건을 나누어 가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을 때, 각자 나눠가졌던 두 반쪽은 신표(信標)로서, 그들의 친밀관계를 증명해줄 수 있다. 상징은 이렇게 증표의 기능을 한 것이다. 상징은 그 밖에 동일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건이나 담보를 확인하는 데 쓰이는 모든 것, 아테네의 판관들이 법정으로 들어설 때 제출하던 출석증, 두 사람 간의 계약이나 두 부로 만들어진 영수증 등을 뜻하였다. 

  간단히 말해 상징이란 서로 인식할 수 있는 부호에 근거하는 약속과 관련된 것이다. 상징에서는 이처럼 언제나 인식이 문제가 된다. 나아가 상징은 유추적 상응관계에 의거하여 다른 것을 표상하는 그 무엇이면서,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구체적 부호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왕홀(王笏)'은 '왕권'의 상징이다. 우리는 보이는 물건인 왕홀에서 보이지 않는 왕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상징은 하나의 물건이나 대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같은 하나의 이미지"(Aquien, 1993:290~291)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상징은 환유나 제유, 은유 등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저울은 정의를, 월계관은 명예를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의 상징은 대상의 한 가지 특성만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힘이나 아름다움이나 고결함 등, 여러 특성들의 상징이기도 하다"(Morier, 1981:1080).

  상징은 또한 하나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상징은 "유추관계나 관습에 근거하여 또 다른 실체를 표상하는 어떤 실체나 개념이나 대상이나 인물, 혹은 어떤 이야기를 가리키기도 한다."(Benoist, 1985:124)

  사전에서는 '상징'은 "대상의 주요 특질들 중 어느 한쪽 특질을 의미하기 위해 선택된 구체적 대상"으로 "그 구체적 대상은 언제나 특질들의 총체에 속하며, 그 대상은 무한한 의미 내포력을 갖는다."(Morier, 1981:1080)라고 단순히 정의 내리기도 한다.

 

상징의 특성

  상징이라는 약속의 기호는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징의 영역은 다양하며 무한할 수 있다. 상징의 환기력(喚起力)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징은 자의적 기호와는 판이한 차원의 언어이며, 다양한 정신적 현상을 그리는 언어이게 된다. 

  상징은 근래에 그러나 오랜 동안, 주로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조명되어져왔다. 하나의 언어기호를 이루는 양면, 즉 기표(記標 씨니피앙signifiant)와 기표(記意 씨니피에signifie')는 단절된 상태로 존재 가능하고 인간이 단절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모순되게도 기표와 기의가 합치되는 부호를 갈망한다. 이는 인간 본능에 속한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 속에 투영하려 한다. 문학에서의 상징은 기표와 기의로 나눠진 기호가 그 단절관계를 지워 없애고자할 때 필요한 것이다. 의미와 기능상 언어학에서의 상징과 다른 차원의 것이다.

  상징이 가능하고 필요한 까닭은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라는 두 체계로 이루어진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상징은 인간의 인식 체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구의 결과인 것이다. 카시러Ernst Cassirer는 상징주의는 "언어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다"(Auroux, 1990:2519)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기호와 상징이라는, 언어를 대하는 두 가지 다른 태도에 대해 요약한다.

 

 

        소쉬르Saussure의 개념에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무연적(無緣的 immotive)이지만 필연적인 것이다. 반면 상징은 두 기호 사이의 결합이며, 기호들 간의 관계는 유연적(有緣的motive)이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Auroux, 1990:2515).

 

  소쉬르의 개념에서 기호는 기호를 이루는 양면의 결합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상징 언어는 기호의 차원을 넘어선다. 어떤 기호 내부의 결합이 아니라 기호들 사이의 결합과 결집인 것이다. 문학에서 상징은 기의와 기표의 동질성을 전제한다. '유연성'은 '동질성'이라는 전제 하에 있게 된다. 그 전제 하에 '조직적 역동성'이 생겨난다. 상징관계는 기호 자체의 자의성 차원이 아니라 정신의 필요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이다. 

  상징은 요컨대 정신의 구조 위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징언어는 동일한 대상의 여러 특질을 하나의 관점에서 한 단어로 결집시키고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언어는 따라서 정신의 길이며, 가장 짧은 길이 된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표현하려 할 때 상징은 가장 직접적 수단이 된다. 아무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 개념의 길은 우회적이고 힘들지만 "상징은 바로 들어맞는 기호"(Gouriant, 1991:682).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 자동으로 연결된다. 상징은 "무한의 의미 내포력"을 지닐 수 있다. 상징은 정신의 언어인 것이다. 

  그 결과 상징 속에는 커다란 개념이 존재하게 된다. 그 의미는 상징 뒤에 숨어있으므로 사람들은 가려진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궁금하여 그것을 찾아 나선다. 상징은 사람들을 현상으로부터 생각의 다른 단계로 끌어올리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즉 상징체계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최고의 인식체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3)

 

2. 상징주의의 의미

 

  "상징주의(symbolisme)' 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들이 있지만 문예사조로서의 상징주의란 '고답파(高踏派)'와 자연주의의 유물론적 태도에 대하여 정신주의적이고 관념적인 반동으로 발생한, 문학과 예술의 어떤 특별한 움직임을 말한다.

  '고답파(또는 파르나스 le Parnasse)'는 낭만주의 특유의 서정주의와 모호한 동경, 언어와 감정의 과잉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문학의 한 경향으로서, 객관주의와 언어의 엄정성과 완벽한 형식미에 집착하며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웠다. 19세기 후반 소설에서 사실주의의 추구와 일면 유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던 고답파는 초기에는 현실에서 주제를 찾았으나 고대 그리스 문명과 인도 등, 다른 곳으로 점차 시선을 돌리게 된다. '파르나스'라는 명칭은 카튈르 망데스, 알퐁소 르메르 등이 1866년, 18712년, 1876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편집, 출판한 동인지 <현대 파르나스>에서 얻은 것이다.1) 

  고답파의 시운동은 운율의 실험과 소네트의 부흥 등, 언어 형식의 폭을 넓히기도 하였지만, 객관성과 기교의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서 마침내는 텅 비고 굳은 형식과 정신성의 부재만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상징주의는 이에 대한 거부로서 존재하게된 것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에 대한 철저한 추구라는 측면에서는 파르나스를 계승하지만, 시어에 대한 전체적 태도를 혁신하려 하였다. 상징주의는 형식을 위한 형식을 넘어 서서, 시어의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려 한 것이다. 나아가 시언어를 절대적 언어의 경지로 끌어올리려 하였다는 점에서 상징주의는 파르나스와 또 다른 정신성을 보여주었다.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의 모호한 서정주의를 반대하여 고답파의 일면을 계승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객관성 추구에로만 지나치게 기울어있는 점을 수긍하지 못한다. 그것의 생명 없음에 대해 반기를 든 상징주의는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유사한 이유로써 반대한다. 상징주의자들에게 언어란 사실적 묘사나 객관적 기술이나 지시기능을 넘어서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것, 인간의 본질과 관념을 표상하고 넓은 정신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였다. 언어는 더 먼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어 자체에 집착하였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와 다르며 파르나스와는 같은 방향이었지만, 언어에 대한 철학과 지향에 있어서는 크게 달랐다.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운동은 일반적으로 1857년 샤를르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출간으로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또는 20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확산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느 말라르메. 폴 발레리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밖에도 파리의 카페와 카바레에 진을 치고 보헤미안 문인 생활을 한 자 들이 있었고, 그들은 '쥐티스트'(냉소주의자), '쥬망푸티스트'(오불관언파),2) 동물들처럼 텁수룩하다는 뜻으로 '털복숭이파'3) 등, 이상한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그들 문인, 예술가, 반(反)부르주아들은 비관주의와 반순응주의적 태도로 현실을 조롱하고 시를 숭배하며, 신비주의 취미에 빠져든다. 자유분방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여 '테카당(decadent퇴페주의자)'이라고 통칭되었던 그들은 예술을 물질주의로부터 행방시키고, 전통의 도덕적 굴레를 벗어나려 하였다. 모든 것의 부정의 외쳤던 다다이스트(dadaist)4)들의 태도를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퇴폐주의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평론지 <데카당스>(1886~1889)의 편집장 아나톨 바쥐Anatole Baju는 시를 잡지에 싣는다면 그것은 다만 독자에게 "시의 신들의 무기력과 신들의 체제 붕괴를 보여주기 위한 것"(Richard, 1968:24)이라 선언한다. 바쥐는 '퇴폐'라는 말을 자신의 활동의 표지로 삼아, "우리는 '퇴폐주의자들'이다. 우리 잡지에는 퇴폐의 모든 뉘앙스들이 표현된다. 형식의 퇴폐, 관념의 퇴폐가 순수 퇴폐에 이르도록까지"(Richard, 1968:24)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조어와 동시에 고풍의 어법, 방언, 통소거에 집착하고 예외적인 것, 미묘한 것, 특이한 것과 신비주의 등을 추구하여 기교에 치우친 경향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글쓰기와 예술 방식은 '퇴페주의 양식'(style decadence)이라고 형용되기도 한다. '데카당스'의 의미는 확대되어 '세기말(fin du siecle)'과 유사한 뜻으로도 쓰이게 된다.5)

  부정적 외양만이 '퇴폐주의'의 진면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조롱으로 '퇴폐적'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지만, 진지한 의미로서의 퇴폐주의는 중요한 사조였고, 이 흐름 속에 상징주의가 배태되어 있었다. 퇴폐주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자연주의는 정신성이 결여된 '예술의 민주적 타락'(Richard, 1968:34)에 지나지 않는 것, 또는 바쥐의 표현대로라면 '산업적 문학'(Richard, 1968:34)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흐름은 상징주의라는 더 큰 발전적 흐름으로 합류한다. 퇴폐주의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파'라는 이름이 제시된 것이다. 사실 19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이들 퇴페주의자에 훨씬 앞서서, 퇴페주의의 출발에는 보들레르가 있었다. 또한 베를렌은 퇴폐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랭보와 말라르메, 위스망스도 넓은 의미에서 그 일원으로 꼽힌다

  요컨대 퇴폐주의라는 용어에는 단순한 모욕 차원의 지칭과 상징주의의 '예비적 단계'(Richard, 1968:8)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당스와 상징주의는 확실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징주의는 이 모든 퇴폐주의 양식과 시도들을 통합하게 되고 심화, 발전시킨다.

 

  '상징파'라는 명칭은 장 모레아스Jean Moreas가 1886년 9월 18일 <피가로>지에 '상징주의 선언'을 함으로써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우두머리를 자처하였다. 이 상징주의는 좁은 의미의 상징주의, 소문자의 상징주의이며, 기껏해야 약 15년 내외의 활동기간을 가졌을 뿐이다. 상징주의자들의 탐구영역과 활동기간은 사실은 아주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상징주의'라는 깃발 아래 전개되었던 상징주의의 전성기는 이들 '상징파'만이 점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유파에는 시인들이 다양하고 수가 많았지만 상징주의가 평가 받고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은 이들 군소 상징주의가 아니라, 보들레르에서 말라르메에 이르는 전기 상징주의 시인들이 구축한 상징주의다. 사실 상징주의를 구획 짓기가 아주 애매할 정도로, 자칭 상징주의자들을 전후하여 4반세기 이전서부터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이 대단한 성과들을 이룩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단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상징주의'라는 용어가 없었다. 이들이 상징주의자들이라고 일찍이 불리지 못하였던 것은 상징주의 초창기에는 미학이 확립되지 못하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징주의의 '신호탄'격인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고답파의 거장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iter에게 헌정되었고, 말라르메는 <현대 고답파>라는 고답파 동인지를 통하여 데뷔하는 등, 당시의 상징주의 시인들은 고답파 시인들과 시단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모레아스가 주창한 미시적 개념의 상징주의와 대조되는 거시적 상징주의6)는 가리키는 폭이 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아니 적어도 보들레르에서 시작하여 말라르메, 베를넨, 랭보에게서 그 정점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를 칭하거나, 아니면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시적 현대성을 간편히 칭하여 일컫는 말일 수도 있다."(Marchal, 1993:5)

 

  미시적 상징주의와 거시적 상징주의 외에 제3의 상징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1880년과 1914년 사이에 자연주의와는 별도로, 문학뿐 아니라 미술과 음악 작품에서 본질을 포용하려는 이상주의적 시대 분위기를 말한다.7) 빌리에 드 릴라당, 마르셀 프루스트, 폴 고갱, 오귀스트 로댕, 오딜롱 르동, 귀스타브 모로, 리하르느 바그너, 클로드 드뷔시 등이 이들 범주에 속한다(Marchal, 1993:5-6).

  이러한 다양한 상징주의의  정의와 개념 때문에 어떤 평자는 다음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소문자로 쓰면 '상징주의'라는 단어는 상당히 폭 넓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사물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다른 것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그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면, 그 어떤 형태의 표현 방법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비평의 어휘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려면 반드시 그 한계가 좁혀져야 한다.(체드윅, 1983:1)

 

  그밖에 불어에서 '상징주의'라는 말은 문예사조만을 가리키지 않고 더 일반적인 단어로도 사용된다. 이때 상징주의란 예술작품은 인간의 생각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상징의 차원을 구분하는 말로 '상징계'나 '상징성'이라는 말도 있다. 해의 '상징계'라고 하면 해가 암시하는 상징적 관계들과 해석 가능한 영역들을 폭넓게 내포한다. 반면 해의 '상징성'이란 어떤 한 보편적 특성을 겨냥하여 영역이 한정적이다.

 

1) '파르나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의 신 아폴론과 시의 신 뮤즈가 살았다고 하는, 아폴론 신전이 있는 파르나소스山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2) '쥐티스트(zutiste)'란 1883년 샤를르 크로Charles Cros가 사용한 단어. 체념과 분노와 무관심을 뜻하는 '쥣(zut 이런, 제기랄!)' 이라는 감탄사를 앞세우고 크로 주변에 모인 시인들을 말함. '쥬만푸티스트', 또는 '쥬망피쉬스트' 란 '난 개이치 않아' 라고 무관심을 표현하는 자들.

3) 퇴폐주의자들은 진보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였다. 바쥐는 진보의 결과 20세기에는 텁수룩하거나 수염 기른 자들은 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털복숭이란 그러므로 문명 세례를 받지 않은 자유인과, 그들의 진보에 반대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4) 1차 세계대전부터 전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반문명적인 예술문화 운동, 기존의 가치관과 도덕과 미학과 전통을 일체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5) 일반적으로 '세기말'은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1890년대 유럽에 퍼진 정신의 퇴폐주의' 라고 정의된다. 회의주의, 유물주의, 비관주의, 신비주의, 현실 도피 등의 여러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는 또한 낭만주의의 유물로 1850년대 문학에서부터 이미 표현되었던 태도로서, 현실은 환영이며 관습이나 진보 등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단정한 태도이다.

6) 마르샬의 용어임. <상징주의 읽기>1993 참조

7) 이라한 분류와는 일치하지 않으나, 상징주의를 3단계로 나눠보는 또 다른 견해가 있다. 1850년경부터 1880년경까지를 전기 상징주의, 1880년경부터 1900년경까지를 상징주의 전성기, 1900년경 이후를 후기 상징주의로 보는 관점이 그것이다. (김기봉. 2000. 56~57)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4)

 

3. 상징주의 운동

 

   '위대한 선구자'라고 불리는 보들레르가 1857년을 기점으로 열어놓은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문학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전개된다.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는 보들레르를 계승하면서도 각자의 개성과 감각으로 상징주의의 또 다른 문들을 열어놓는다. 보들레르 시 <교감>과 베를렌의 시 <시법>(1882)은 상징주의 운동의 기본 강령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뚜렷하게 시대를 구분지울 수 있을 만큼 확실한 문학선언이나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상징주의는 19세기 말까지 펼쳐지고 20세기에 와서 쇠퇴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쇠퇴는 사조로서의 상징주의에 한한다. 사실 상징주의는 이후에 소멸한 것이 아니라 20세기에 와서 개인의 상징주의는 더욱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폴 발레리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 라는 '의식의 흐름' 수법의 내면소설을 통하여 상징주의 소설을 완성시켰으며, 발레리는 상징주의의 정신과 언어를 더욱 발전시켜서 '순수시'라는 양식으로 완성시킨다.그의 <젊은 파르크>와 <매혹>은 1917년과 1922년에 출판된다.

  대체적으로 상징주의는 19세기 말에 끝난다고 개관하지만 사실은 세기를 넘어서도 계승되고 변모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개화하였던 것이다. 이는 문학사에서 연대기적 분류가 무의미해지게 하는 면모이다. 이렇게 상징주의에는 사조사(思潮史)보다는 개인의 어법(語法)이 더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19세기에서 20세기에까지 펼쳐졌던 대시인들의 활동을 보면, 협의의 상징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19세기의 문예사조를 개관할 때,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나타나게 된 낭만주의가 19세기 전반을, 19세기 중반의 약 30여 년은 사실주의와 고답파가,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30여 년을 주도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또한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적이지 않다. 

 

    "19세기 중반에는 시단을 주도해왔던 (---) 고답파 시인과 보들레르, 베를렌느 등 후에 상징주의의 거성으로 칭송되는 한 잡지에 시를 같이 발표하는 등 문학적 이념의 갈등이나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상징주의의 성립기에는 그 확고한 이론과 미학이 정립되지 못한 채 고답파와 시단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김기봉, 200:54)

 

  사실주의적인 고답파 시는 현실과 세계의 구체적 아름다움의 실현을 목표로 하면서 객관세계를 완벽하게 형상화하는 일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상징주의라는 일종의 반동을 불러왔다. 그러나 고답파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외침으로서, 즉 예술 이외의 것은 모두 예술에서 배제시키려고 함으로써, 초연하고 명상적인 새로운 예술의 토대를 동시에 마련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예술가들, 즉 상징주의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상징주의라는 용어를 쓰기를 매우 조심스러워하였다. 르네 길Rene' Ghil처럼 유파를 형성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를 거절하였다.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는 특정한 유파나 소위 말하는 상징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특정 유파로 통칭되는 것을 혐오하였다. 말라르메는 "나는 유파들을 혐오한다.  또한 이와 유사한 그 모든 것을"(Mallame', 1974:869)이라고도 하였거니와, 1890년대에 젊은 작가 그룹이 '상징주의' 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했을 때에, 보들레는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하였고, 랭보는 파리의 작가 그룹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랑을 끝맺는 중이었다. 말라르메와 베를넨은 각자의 작품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들을 많은 부분 완성해놓은 상태였다.

 

  이들 '위대한 상징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군소 상징주의자들'은 1880~1890년 사이 상징주의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상징주의'라는 표지를 확실하게 수용한다. 이러한 수용의 배경에는 실증주의와 반실증주의, 유물론과 정신주의, 그리고 정치와 역사 등의 대립적 요인들이 있었다.

  1870년대 말에 1880년대 상반기, 즉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1877)과 <제르미날>(1885)이 출간되는 시기에는 자연주의가 전성기에 달했다. 당시는 또 위스망스의 <거꾸로>(1884)가 반자연주의의 교과서로 널리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졸라의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맞서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이 정신적 소설이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8)

  1870년 보불전쟁이 있기까지 프랑스를 지배해온 사상은 사회주의, 실증주의, 과학만능 사상이었다. 1789년의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정치적 역사적 격변을 체험하면서 발전시킨 진보적 사상들은, 경제발전과 유토피아가 건설 가능하다는 낙관론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강한 페시미즘이 정신을 피폐화시켜가기 시작하였다. 전쟁에서 참패한 후 프랑스 사회에는 현실에서 이상향을 제시해주리라 여겨졌던 사회주의와 실증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론이 주도하게된 것이다. 이상을 현세에서는 구현할 수 없다는 한계가, 다시 말해 기존 가치의 붕괴와 텅빈 공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870년대의 패배는 군사적 패배 뿐만 아니라 문명의 종말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의 "자연과학의 진보는 인문과학의 진보와 결합되었다"(Marchal,1993:37). 생물학, 고생물학, 고고학, 문헌학의 발전은 글쓰기의 진실과 가톨릭의 교조주의와 실증적 사고를 시험대 위에 놓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여기에 가세한다. 1877년에 번역되기 시작한 그의 페시미즘은 많은 작가들에게 비극적 관념을 심어주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라는 그 유명한 아포리즘은 "반자연주의적 반동의 철학적 근거"(Marchal,1993:38)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치체계의 붕괴에서 오는 정신적 공황은 극단적 회의론, 퇴폐론, 그리고 유미론(唯美論)을 낳았다.

  이러한 정신적 무정부 상태와 가치붕괴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체계와 문학이념을 제시하고자한 것이 상징주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본질상 이미 반현세적인 태도를 지니고 관념적 이상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8) 마르샬, 위의 책. p.34 참조

 

4. 상징주의 선언

 

  모레아스는 파리에 결집하였던 다양한 문학적 보헤미안들, 퇴폐주의자들을 '상징파'라고 명명하였다. 이 명칭은 그가 1886년 <피가로>지에 <상징주의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 선언에 의하여 미시적 상징주의 운동이 결집되었던 것이다. 퇴폐주의를 비난하는 <시대>지의 기사에 응답하면서 모레아스는 1885년에 이미 '퇴폐주의자'라는 칭호를 훨씬 환기적인 용어인 '상징주의자'로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선언>에서 상징주의자는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며, 교훈성이나 웅변술, 진실주의를 거부하였고, 시란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하고 유추와 상징을 통하여 '관념(idee)'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낭만주의는 반항이라는 소란스런 경종들을 모두 다 울린 후에, 영광과 전투의 나날들을 다 보낸 후에, 자기 힘과 영광을 잃어버리고, 영웅적이었던 참신함을 포기하였으며, 회의적이고 상식만으로 가득 찬 채, 마침내 길들어져버린 것이다. 또한 낭만주의는 고답파들의 명예로우나 인색한 시도 속에서도 허위로운 재생을 꿈꾸었지만, 유년기에 무너져버린 군주처럼 이제 마침내 스스로의 몸을 자연주의에다 위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자연주의는 시류에 아첨하는 몇몇 소설가의 무미건조함에 맞서는, 정당하나 또 오도된 항의라고밖에는 진실로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예술선언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예술에서의 창조적 정신이 보여주는 현재의 경향을 온당히 지칭할 수 있는 유일한 명칭으로 상징주의라는 명칭을 이미 제  안한 바 있다. (----)

 

    교훈과 과장된 묘사와 허위의 감수성과 객관적 묘사에 맞서는 적이라 자처하면서, 상징주의 시는 '관념'을 어떤 감각적 형식으로 빚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전적으로 관념을 표현하는 일을 하면서,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Marchal,1993:135-137에서 재인용).

 

  모레아스는 낭만주의와 고답파와 자연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상징주의의 길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거짓 감수성과 교훈성과 과장된 수사에 대한 거부, 객관적 묘사라는 것에 대한 거부이면서, 자연주의의 무의미에 대한 반동이라고 그는 설파한다.

  동시에 그는 상징주의는 언어의 창조성과 진정한 감수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상징주의 시는 '관념'을 어떤 감각적 형식으로 빚어내고자 한다"라는 그의 말은 상징주의의 언어와 철학, 또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차원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상징주의는 틀에 박힌 언어와 형식에서 자유를 찾고자 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감각이 지시하는 언어에서 길을 찾는다. 또 한편 상징주의는 현실의 거짓된 외양과 감각적 현상들을 관념에 대립시키면서, 현상에 존재이유를 부여하는 본원적 관념을 암시한다. 감각적 형식을 다시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거부의 근저에는 이렇게 플라톤적 관념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연주의와 고답파의 문학적 물질론에 대한 관념적 반동으로, '상징'을 결집의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이 '엄밀한 의미의' 상징주의, 협의의 상징주의는 그러나 겨우 10년 너머 지속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박학자들의 호기심이나 끌 정도의 의미일 뿐"(Marchal,1993:5)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 문학운동은 큰 수확 없이 끝났다.

  '상징주의 파라독스'란 상징주의 운동이 자신의 공식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소멸되어버린 것을 말한다.(Forest, 1989:117). 이 상징주의는 직접 상징주의 선언을 하였던 모레아스 자신이 1891년 '로마파'를 창시하면서 분열되기 시작한다. 로마파는 고전주의 정신의 장점을 재발견하고 고대 로마의 제도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신고전파로 분류되었다. 모레아스의 이러한 '요란한 상징주의'를 베를렌은 이미 상징주의(symbolisme)가   아니라   '심벌즈   때리기(cymbalisme)'(Marchal,1993:6)이라고 평해놓았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5)

 

3. 상징주의의 방법

 

1. 상징주의 정신

 

이상주의, 정신주의

  1891년 말라르메는 상징의 신비란 "영혼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기 위하여 조금씩 어떤 대상을 환기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한 대상을 선택하여 일련의 해석 과정을 거쳐 영혼의 어떤 상태를 이끌어내는 데에"(Mallarme, 1974:869)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글자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빚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함은 정신주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지향을 요약하는 말이다. 상징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에 대한 항의인 것이다. 물질주의는 졸라의 자연주의나 고답파적 사실주의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에 반대하며 반불질주의와 반자연주의로, 즉 관념과 이상이라는 정신 우선주의로 기울었다. 

  자연이라는 개념도 상징주의에서는 정신적 조화의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었다. 조화를 언어의 세계 속에 구현하는 것, 즉 시 속에 내적이고 우주적인 질서를 다시 빚어냄으로써, 언어와 자아와 우주가 하나로 포용되는 상태, 그것이 상징주의의 이상이었다. 고답파의 무관심에 가까운 '무심' 자체는 상징주의에서는 무용한 것이었다. 내적 상태에 몰두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원 너머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초월을 위하여 '탈인성화(d'epersonnaliser)가 요구되었으므로 낭만주의와도 구별된다.

 

    낭만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자아에 두고서 그 자아의 본질을 감성과 심정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고, 상징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인간까지를 포괄하는 우주 자신에게로 환원시키고 그 우주의 본질를 감각과 이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김기봉, 2000:113)

 

  이상이라는 것은 막연하 동경이 아니었으며, 감각이나 감정 속의 안주가 아니라 스스로를 우주적 질서 속에 합일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와 달랐다. 더구나 자연주의에서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었다.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자연주의 담론이 제시하는 생경하고 거친 현실로 축소될 수는 없다는"(Marchal, 1993:8) 저항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징은 현실의 것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절망적인 현실 '저 넘어'의 현실을 환기하는 것이 상징의 중요한 존재의미였다.

 

    이제 현실의 것은 적이 되고, 철학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저 너머 세상은 모두 기꺼이 수용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이기 때문이다.(Marchal, 1993:8).

 

  상징주의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동반하고 필요로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와 헤겔과 니체의 철학은 상징주의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외에도, 기존의 진리에 의문을 표시하고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만들려 하였다는 태도 자체에서도 상징주의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와 아울러 신비와 신비주의는 상징주의 미학의 이상적 모습이자 '가장 세련된 형태'로서 '유행 현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문학은 영혼, 정신, 이데아, 본질이란 개념에 집착한다. 또한 자연주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경하고 과장된 현실보다는신화와 전설에서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문학의 자율성

  자연주의에서처럼 문학과 과학이 접목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주의는 언어 외적인 모든 범주를 떨쳐내고자 한다. 이는 고답파의 예술지상주의를 계승한 측면이다. 언어는 스스로 자율성을 확보하기에 주력한다. 문학과 언어 자체를 되찾고자 한다. 샤를르 모리스는 1891년 상징주의의 차별성을 다음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문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생리학이나 지리학이나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문학에 어떤 특이한 혼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구가 가져다주는 혼동이다. (---) 사람들은 도덕이 도덕론자를 유인했던 논리적 결론을 시인들에게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란 '아름다움' 외에 다른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Huret, 1984:94). 

 

  도구와 목적의 혼동이 자연주의의 부정적인 면의 원인이 되었거나 그것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율성과 미적 독립을 위하여 문학 외적인 목표는 모두 문학에서 배제해야 한다. 문학은 언어 자체만으로써 내적인 긴밀한 구성을, 즉 건축물처럼 '미리 계획된' 구성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은 원래 에드가 알렌 포우Edgar Allan Poe를 계승한 보들레르의 지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말라르메로, 발레리로, 다시 이어진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존재의 근거를 지닌다. 아름다움은 진실되거나 선한 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신념은 고답파에 이어 상징주의가 문학에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다. 이미 도래한 문학의 상징주의 시대에, 문학이 시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는 문학이 이제 모순되게도 절대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은 자비로 출간되었고, 스스로에게 비상업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말라르메는 말한다.

 

    어쩌면 팔리면 안 될 것을 거래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팔리지도 않을 때에는.

                                                                                    (<책에 관하여> : Mallarme, 1974:378)

 

  팔리지 않는 문학이란 다시 말해 정신의 목적에 봉사하기를 희망하는 문학이었다. 어떤 목적이나 종속을 거부하였던 문학, 다시 말해 대중과의 유리(遊離)라는 위험까지 자청하였던 문학은 1857년 이후 세기말까지 "이상과 절대에 목마른, 대부분은 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거의 신앙을 대신"(Marchal. 1993:10)해주고자 하였다. '문학의 사제' '문학이라는 종교'라는 수식어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나온 말이다.

 

비교주의, 난해성

  사실주의 시대에 소설은 대량 인쇄권을 얻어 거대한 대중이라는 문학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내밀한 시 속에서 "정신의 마지막 피난처를 찾았으며, 입문자들만이 다가갈 수 있는 비교주의(秘敎主義)의 성역을 찾고자"하였다(Marchal. 1993:10). 비교주의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은 종교의 태도를 말하므로, 상징주의는 일종의 정신적 귀족주의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문인들이 신비주의의 결사에 가입했다는 연구와 자료들이 있다. 상징주의 주변에 탄생한 데카당스도 반(反)대중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일종의 '선민의식'(Marchal. 1993:10)을 지니고 비교주의에 탐닉하여 새로운 시 언어에 대한 탐색에 나선다. 그들은 고대어를 차용하거나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며, 신문이나 연재소설의 일상어와 구별되는 순수한 언어의 탐구에 전념한다. 기존의 구문 구성법을 해체하거나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도 등으로도 이어지는 이러한 자세는 상징주의 문학에 필연적으로 난해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논리적 근거 하에 시작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난해함은 그들에게는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난해성은 "독자의 준비 부족이나, 시인의 준비 부족에서 온다"(Mallarme, 1974:869)고 상징주의자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문 구성법과 단어 선택 등의 난해함, 거기에 더해지는 상징 자체의 난해함, 반대중주의, 비교주의, 이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새로운 상아탑이었고, 결국 비난과 오해를 동반하며 상징주의 쇠퇴의 중요 요인이 되기까지 이른다.

  이러한 언어추구의 양상 외에도 우리는 보들레르의 댄디즘과 <인공낙원>에서 상징주의가 일반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댄디즘(dandysme)'은 19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일종의 문학적 태도로서, 타협하지 않는 예외적 삶의 양식을 통해 사회적 권위를 얻으려는 태도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보들레르는 댄디즘과 나르시즘을 연관지어 보았다. 그에게 댄디즘은 "정신주의와 국가주의에 닿아있는" 것으로, 영혼의 초월적이고 순수한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알코올과 아시슈(haschisch 인도 삼에서 뽑은 마약)라는 인위적 방법으로 실현된 창조의 상태인 '인공낙원'을 그가 그리는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통한다. 그것은 시적 창조의 원동력인 상상력의 인공 공간을 버리는 일이어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갔다.

 

  이러한 자세는 귀족주의보다는 고립주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탐색과 난해성, 비교주의 등은 예술과 정신의 독자성 추구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질주의와 이성론과 엄정한 객관적 묘사나 무감동에 맞서서 정신의 '불확실한 영역' '미지의 영역' '불확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굳어버린 토대를 지우고 정신의 자율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상징세계는 그리하여 냉엄한 질서에 맞서서 유동성과 환상이 빚어낼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존 예술에 대한 부정은 그러므로 생성과 삶을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환상은 환상을 위한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상징주의의 이상은 일탈이나 격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 현실, 현상, 사실의 세계를 끊임없이 초월항 '영혼의 상태'와 이상, 관념,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징주의가 설혹 현실과 사실의 세계를 떠나고 벗어날지는 모르되, 현상의 세계 자체까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징주의는 (---) 반드시 현상을 통해서 관념과 현상 그것에 여일하게 실려서 현상 및 존재와 관념 및 본질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결합 내지 통일을 이루기를 꿈꾼다(김기봉, 2000:110~111)

 

   상징주의가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내재성과 독자성은 이렇듯 고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조화를 위한 것이었고, 궁극적 통합을 향해있었다. 통합이란 현상에서 출발하여, 현상과 이상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초월이란 허황한 구름잡기도, 세상 모두를 버리는 일도 아니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6)

 

2. 상징주의 미학

 

  상징주의는 그러므로 도피 자체를 위한 이상 추구가 아니었다.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의 대안으로 이상과 절대적 관념과 형이상학을 미학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 즉 '지고의 미'를 표현하고 창조하는 것이 상징주의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 결과 "모든 인식 대상은 하나의 상징 현상이요 상징적 존재"(김기봉, 2003:32)이게 된다. 즉 현상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징계로서, 그것이 감추고 있는 본질적 실체에 다가서는 것이 상징주의 철학의 요체였다. 

  말라르메에 의하면 대상들의 현재의 외양 자체는 진실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현상은 관념을 표방하고 있거나 함축하고서 그것을 끝없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이 세계는 상징들이 거대한 덩어리, 상징의 숲으로서,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고 읽고 그것을 체험한다. 현상은 끊임 없는 해독을 요구하는 본질의 전언자(傳言者)인 것이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을 현상에 대한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에게는 상징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관념'이 예술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철학이나 사상에 머물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주의는 언어 자체의 미학이었다. 일반 언어가 아니라 환기력 있는 언어의 추구였다. 문학은 사실적 산문을 넘어서서 상징적, 함축적, 암시적일 수 있는 힘, 즉 순수한 환기력을 빚어내고 간직하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언어의 이러한 힘을 위하여 상징주의는 언어에서 굳어버린 관습을 지우고자 한다. 굳어진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이러한 언어탐구의 과정을 시인들은 "연금술"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언어의 금과 은을 만드는 방법이었으며, 하나의 의식(儀式)이었다. 현자의 돌이나 지모(地母)나 절대의 언어는 동일한 신성성(神聖性)을 목표로 하였다. 

  상징의 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감각의 정화작업과 동시에 언어의 정화가 요구되었다. 본질적 관념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언어의 새로운 사용법이, 그 세계의 자연스런 유로(流露)를 위해서는 암시의 기법이, 암시를 위해서는 음악의 기법이 필요하였다.

 

교감

  새로운 질서의 공감을 빚어내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감각의 정비가 필요하다. 감수성을 신선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낡은 감각들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부정, 즉 어떤 논리적 필요와 근거 하에 기존의 감각체계를 뒤흔들고 지우는 행위를 랭보는 "모든 감각들의 오래고도 광범위하며 논리 있는 착란:(폴 드무니에게 보낸 편지)" 이라고 설파한다.

  이는 감각의 틀을 단순히 새 것으로 바꾸자는 차원이 아니었다. 랭보는 스승이었던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인은 착란에 의하여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인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세계를 촉지하고, 그곳에로 나아가야 한다. 낡은 시선으로는 볼 수 없고 예언자의 통찰력을 가져야한다고 하였다.

  이 '보는 힘', 즉 정신의 참되고 아름다운 새 질서를 완성하는 능력의 소유자를 랭보는 '견자(見者)라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감각의 오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착란을 통하여 견자가 되는 것, - 이는 마치 무병(無病)을 앓고 난 뒤에 신통력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견자 -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제어력를 벗어나고 자신을 버린 상태에 도달한다. 이때 그는 "나는 타자(他者)"라고 말한다. 나는 죽은 것이다. 말을 하는 자는 나의 넋이 아니라 다른 자의 넋이다.

  이토록 무의식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가 만나고자 하였던 감각과 인식의 또 다른 차원을 보들레르는 일찍이 랭보보다 앞서, <교감>이란 시에서 열어주었다. 랭보가 말하는 '모든 감각들의 착란'이란 보들레르에게서는 감각과 감각의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청각과 시각이 통합되는 것,9) 즉 '색깔 있는 청각' 등으로, 감각이 섞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변하여 또 다른 '영혼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감각과 정신의 해방되어 맞는 낯선 상태, 즉 '미지(未知)'에 대한 추구를 말해준다. 그곳의 '가장 새로운, 보장된 높은 자유"(Mallarme, 1974:3632)를 위하여 무구(無垢)한 감각과 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감수성과 시선의 혁명이 없으면 언어는 세계를 창조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증상," 다시 말해 '공감각(共感覺)'은 요컨대 질서를 다시 빚어내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이다. 이 교감(交感)은 감각과 감각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의 세계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섞인다. 그리하여 자아조차 버린다. 나는 나를 벗어나 나를 바라본다. 자아가 아니라 타자 - 자아인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이 발현하는 것에 동참"한다고 랭보는 말한다.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자아의 바깥에서 자아의 발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행복한 격리에 대해 말라르메 또한 말한다. "나는 이제 비인칭(impersonnel)이 되었다." "네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우주적 합일을 향하여 가는"하나의 능력일 뿐이다"라고(<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 논리와 언어의 우주적 합일을 위하여 그는 개인의 감성을 버리고자 한다. 그것을 시인은 '탈성인화'라고 한다. 일체의 감성적 여건으로부터 비인칭화 됨으로써 거짓된 감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현상의 모순을 극복할 논리를 수용한다.

  말라르메와 랭보는 결국 같은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탈인성화나 자아의 의도적 위기를 통하여 그들은 정신과 언어의 격을 바꾸고자 하였다.  

 

암시와 모호성

 '암시(suggestion)'의 기법은 문학,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상징주의의 모든 작품에서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상징주의자들은 대상을 묘사할 때 객관적인 언어로 윤곽 있게 선명하게 그리는 일은 대상을 죽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말라르메는 "오직 암시만 있어야 한다"(Mallarme, 1974:869)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명시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일이다. 시의 기쁨이란 조금씩 점쳐보는 데 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조금씩 점쳐본다는, 상징이 주는 기쁨의 여지는 지시적 언어로써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꿈이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대상에 대한 관념을 예감하며 대상의 양상들을 따라가는 것이 언어가 주는 기쁨이다. 대상을 '통째로 취한다'는 것은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존 언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모든 생성을 전적으로 막는 일이다.

 

    고답파 시인들은 사물들을 통째로 취하여서 그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신비감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쁨이란 조금씩 풀어 나가는데 있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신비야말로 상징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비가 없으면 생성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신비야말로 생성의 영역이다. 사물을 명명하는 것은 상징의 목적에 반하는 일, 즉 신비로운 상상작용이나 유추작용, 환기작용을 막는 일이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꿈과 언어가 주는 기쁨을 가로막는다. 

  베를렌이 음악이 그려내는 모호한 영역에 집착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음악에서의 '뉘앙스'를 시에 이식시키고자 한다, 베를렌의 모호함에 대한 추구는 랭보의 '감각들의 논리 있는 착란'이 겨냥하는 바와도 통한다. 모두 다 대상에 대한 굳어있는 의식 지우기에서 출발하여, 열린 감각과 질서를 향하겠다는 의지를 따른다. '회색 노래'란 서정적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지향이었다.

 

   또 그대는 오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을 선택하려하지 말 것.

   '미묘함'이 '선명함'에 뒤섞이는

   회색 노래보다 더 귀한 것 없으니.

 

   그것은 너울 뒤의 아름다운 두 눈,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빛,

   미지근한 가을 하늘에

   밝은 별들의 푸른 뒤엉킴이어라!

 

   왜냐면 우리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 (---)

                                                  (<시법詩法>)

 

  암시기법은 그 특성상 미술에 손쉽고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미술에서 암시는 신비와 거의 동의어였다. 암시의 기법은 신비의 해석이라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도록 감상자를 더 쉽게 청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상상과 무의식이 개입되는 감상 - 이로써 감상자는 적극적인 해석자가 된다.

 

    르동은 암시적인 기법이란 사유를 자극하면서, 그것이 조명하고 예찬하려는 꿈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숭고한 조형 요소들을 결합시켜 빛을 발산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모호란 형식들을 통해 '감상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장티, 2002:92-93).

 

   암시는 그러므로 단순한 하나의 기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 표현기법에, 그리고 사실주의의 허상에 맞서는 일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태양광선 아래 사물을 새롭게 보았던 방식과도 어쩌면 상통한다. 빛이 인상주의자들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상징주의자들은 암시의 기법에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감각과 언어의 쇄신과 병행하는 것, 새로운 사물읽기와 같이 가는 것이었다. 암시법은 다르게 보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부터 상징주의는 한 마디로 다르게 보는 법이었다.

 

    (---) 새로운 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상징주의자들 덕이다. 인상주의가 회화를 재현의 틀에서 분리시킴으로써 현대회화를 고안해내었듯이, 언어를 상징기법에 우위를 두면서 동시에, 말을 부호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 완전한 권리를 가졌으며 향후로 확고부동해질 어떤 예술, 즉 시의 -화가에게 색채 같고 음악가에게 소리 같은 - 특수 재료로 만들면서, 우리에게 다르게 읽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상징주의이다(Marchal, 1993:30).

 

  인상주의 회화에서 빛의 발견과 같은 의미를 지닐 정도로,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발견은 서술이나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암시와 상징을 통해 제시하는 방법이었다. 단지 정확하거나 사실적인 기술 또한 함축적이거나 웅변적이기만한 기눙에 머물러서는 이제 시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지지어와 지시대상과의 자의적 관계를 넘어서서 본질을 향하고 다른 우주를 창조해내야 한다. 창조가 이뤄지는 때에야말로 '문자 속의 신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 순수한 '허구'가 실현되며, 글쓰기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본적으로 세계라고 하는 상징현상을 해독해내는 '번역자'이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특이한 상징적 기능을 지닌 언어를 빚어내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김기봉, 2000:40). 시인의 소명이란 상징을 읽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본질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음악

  베를렌이 <시법>이라는 시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음악은 상징주의 시의 바탕을 만드는데 언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말라르메는 "음악에서 우리 자신을 되찾아오는 것"이 문학이라는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음악은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소리 등, 음악의 기초 재료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마치 기악편성이나 교향악과 같은 것이다.

  이 밖에도 음악은 상징주의 언어에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음악은 암시의 기법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의 신비를 빚어내는 일에 조력자 역할을 한다. 또한 음악은 시에 유연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 움직임을 주도하기도 한다.

  음악은 나아가 마치 글쓰기의 직접적 도구나 재료인 것처럼 사용된다. 말라르메의 작품 <주사위 던지기>에는 문자들이 악보의 음표들인 듯 배열되어 있다. 소리의 강약처럼 문자들이 크게 작게, 여러 다른 활자들로써 다채롭게 배치된다. 음악에서 휴지나 중지가 있듯이 백지와 여백이 텍스트 전체를 주도하기도 한다. 그가 <주사위 던지기>를 악보처럼 생각하고 썼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새롭게 창조될 상징들의 조화로운 세계, 즉 언어가 빚어낼 '새로운 환경'을 위해 이처럼 음악의 도입은 필수적이다. 상징주의 시에서처럼 철저히 음악을 사용한 문학은 없다. 음악에 문학을 근접 또는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상징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음악을 <교감>이라는 시에 이미 차용하고 있다. <저녁의 조화>라는 시는 언어와 음악과 춤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융해를 보여준다. 이들은 단지 언어의 기교 차원만이 아니라 시의 원론에 음악을 사용하였고, 음악의 구체적인 사용법들을 보여준다. 음악의 모방 차원을 이미 넘어, 말라르메는 '시는 더할 나위 없는 음악'이라고까지 하였다.

  음악을 더욱 현실적으로 언어에 적용한 예는 베를렌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를렌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고 음악을!"이라고 <시법>에서 외쳤다. 그는 음악을 시 속에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거창한 야망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사용은 소박하지만 능란한다. 리듬의 도입은 그의 시에서 아주 자연스러워서 음악과 시의 리듬은 구별할 수 없도록 거의 하나가 되어있다. 이것이 그의 서정시를 완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그의 시에서는 언어와 감정과 음악이 완전히는 분리되지 않는다.

 

9) 흔히 말라르메의 <창천蒼天> 이라는 시에 나오는 '푸른 알제뤼스(삼종기도) 종소리' 같은 예를 들기도 한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7)

 

3. 상징주의의 언어

 

  말라르메가 "시를 만드는 것은 생각들이 아니다. 그것은 말들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라고 르동에게 설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은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나, 여기서 시인은 문학에서 문학 외적인 것을 분리하고, 상징주의는 결국 언어탐구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언어는 마침내 그것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언어가 살아있는 것은 대부분의 언어는 죽은 언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학어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말라르메는 언어를 두 개의 층위로 구분한다.

 

    우리 시대의 떨쳐버릴 수 없는 욕구 중 하나는 한편으로는 날 것 혹은 직접적인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상태로, 마치 서로 다른 기능을 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의 이중적 상태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시의 위기> : Mallarme, 1974:368)

 

  직접적 언어나 날 것의 언어라는 말은 자연적 언어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 우리들이 사용하는 관습에 젖은 일상어를 말한다. 일상어가 혁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언어를 '분리시킨다'는 말을 쓰고 있다. 언어를 '불완전한 언어들'과 완전한 언어로 구분한다.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언어, 즉 보들레르가 말하는 '모어母語'를 빚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여기가 아니라 '저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언어는 날 것이며 언어 연금술의 대상이다. 두 언어는 기능이 다르다.

 

    서술하거나 가르치기거나 묘사하는 것까지도 괜찮다. 더구나 사람의 생각을 주고 받으려면 말없이 타인의 손에서 동전 한 잎을 가져가거나 건네주는 것으로 어쩌면 각자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언어의 이러한 일차적 사용법은 보편적인 '보고'의 임무를 맡고 있으며, 현대에 씌어진 글의 종류들은 문학만 제외하고 모두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시의 위기>).

 

  문학어는 일상어와는 다른 이차적 언어이다. 일차적 기능과 그것이 전달해주는 허위의 현상들은 지워야만 언어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본질에 대해 암시할 수 있다.

  '순수개념'이라는 말은 '관념' 혹은 '이상'이라고 번역된 '이데(idee)'10)와 많은 경우 동이어로 쓰이는데, 다음 글에서는 기존의 생각으로 굳어지지 않고 본원적 진실에 가까운 개념이나 생각을 말한다. 그 '순수 개념'의 유로流露를 희망하여 이차적 언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율하면서 거의 사라져가는 자연의 한 현상을 말의 작용에 의하여 옮겨놓는다는 기적은 대체 어디에 소용되는 것인가. 눈 앞에서의 구체적 환기라는 제약을 넘어서, 순수개념이 거기서 유로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한 송이 꽃!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의 목소리가 꽃의 어떠한 윤곽도 다 지워내버리는 망각의 저 밖에서, 내가 알고 있던 꽃받침보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서, 모든 꽃다발이 부재하는 꽃이, 꽃에 대한 그윽한 생각 자체가 음악처럼 솟아오른다.

                                                                                                              (<시의 위기>)

 

  기존의 생각과 언어는 모두 지워버린 상태인 빈 마음 위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 새로이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 이차적 언어의 기능이다.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지시하고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매개체인 시어들이 대상을 환기시키고 유추하게 함으로써 마음 속의 이미지를 독자가 깨닫게하는 것이다.

 

    <---> 발음된 말은 그 말의 주위를 진공 상태로 만들고, 감각세계에서 온 일체의 비전을 제거하며, 그리하여 

  (---) 순수하고 외롭고 성스러울 만큼 무용한 관념 그 자체를 환기할 수 있는 위력을 보유하게 된다(레몽, 1983:36)

 

  이러한 힘에 비해 직접적 언어는 소통의 관습적인 도구로만 쓰인다. 동전을 조용히 타인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기능일 뿐이다. 의사전달에 쓰이는 언어는 일단 의미가 이해되고나면 공허한 것으로, 실질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반면 본질적 혹은 본원적 언어는 영혼을 감동시키고 영혼 속에서 몽상들의 생성을 유발시킨다. 그것은 이제 언어 이상의 하나의 '존재', 즉 유기체다. 다시 말해 언어에 의하여 솟아나는 이미지, 소리, 색채, 울림, 그리고 '은밀한 친화력'(레몽, 1983:36)이 결합된 어떤 생성이라고 하겠다.

  말라르메의 말대로, "언어는 생명을 내포하고 있는 유기체에 가까워짐으로써 모음과 이중모음 속에 일종의 살과 같은 것을 드러낸다." 언어의 '살' 즉 실질을 지닌 살아있는 언어라는 존재는 상징들의 더 큰 '관계망'을 만듦으로써, 나아가 태초의 질서를 복원시키는 힘까지 갖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언어의 진정한 효용성이다. 이 효용성은 거의 마법에 가까운 힘이다. 언어의 이러한 신비란 신비주의가 아니라 언어에 최대의 '효율성'이 주어지는 양상을 말한다.

  순수와 긴장에 의하여 빚어지는 언어의 이 압도적인 힘은 거의 본질을 발현시키는 신비로운 가능성이다. 직접적 언어인 일차 언어는 현실의 언어, 기능언어인 데 비하여, 이 본원적 언어는 우리 삶에 새로운 유동성과 자유를 부여하는 언어이다. "타락되고 모양이 일그러진 것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환원시키고 원초적인 무죄의 상태로 복원"(레몽, 1983:37)시키기 위해 존재하여야 하는 이 언어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용한 무상의 언어이다.

 

  이런 종류의 시학에 있어서 난해성은 불가결한 요소임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난해성과 신비주의 경향을 띠며 상징주의 시인들이 대중과 유리된 것은 글자 그대로의 귀족주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상징주의 언어가 갖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었다. 그 속성은 나아가 이제 시 언어와 산문 언어를 차별화하기에 이른다. 시와 산문은 형태상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산문을 논하는 것처럼 시를 논할 수 없도록, 시 개념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마침내 열리게 된다.

 

  발레리는 <시와 추상적 사고>에서 시와 산문을 구분하여, 산문은 걷기처럼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이지만, 시는 춤을 추는 것처럼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며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시는 목적에 산문은 수단에 가깝다. 시의 대상은 분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드러난 목표는 오히려 사물에 대한 스쳐가는 듯한 인상이나 기억일 수 있다.

 

    산문과 마찬가지로 걷기는 하나의 확실한 대상을 노립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하나의 행위이고, 우리는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

    춤, 이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분명 이것도 어떤 행위들의 체계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자신 속에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춤은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대상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하나의 관념적 대상, 하나의 상태, 하나의 황홀, 꽃에 대한 하나의 환영, 삶의 하나의 극한, 하나의 미소 -- 텅 빈 공간에다 그것을 갈구하던 자의 얼굴 위에 마침내 솟아오르는 미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라르메가 언어를 관습적 언어와 본원적 언어로 구분하였듯이, 발레리는 산문언어와 시언어로 구분하면서, 상징언어의 속성에 대해 설명한다. 실용언어와는 달리 시언어를 표현하고 해독하는 것은 내적 감수성이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와 본질과 생성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와 산문은 그러니까 우리의 신체와 신경의 유기체 속에서 결합되고 해체되는 어떤 결합관계들과 연상관계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 것입니다. (---)

    나의 의도, 나의 욕구, 나의 명령, 나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방금 내게 소용되었던 언어, 제 의무를 다한 이 언어는 도달하자마자 사라집니다. (---)

    반대로 시작품은 살았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그것은 잿더미에서 재생하도록, 그리하여 좀 전의 자신으로 끝없이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시와 추상적 사고>)

 

  산문언어는 언어의 목적지에 닿는 순간 효용이 다하지만, 시언어는 결코 소멸하지 않으며 본질 속에 끝없이 재생한다.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언어는 이렇게 실질을 지니게 된다.

  '관념(이데)'의 특질은 일상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부분을 전체로, 이미지를 현실로" 보이도록, 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의 힘을 빌려 빚어내도록 하는 것이 상징의 기능이다. 이것이 바로 시언어이다. 시언어는 현실적 교환이나 지시가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가 목적이다. 그러나 실용언어는 근본 속성상 바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시언어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생하는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시인들의 꿈이다. 말라르메는 그것을 '불사조에 타버린 꿈'이라 하였다. 그 언어는 클로델 Paul Claudel의 말대로 '앎의 상태'를 넘어서 '기쁨'의 차원을 지향한다. 보들레르의 '상징의 숲'은 일상어의 초월을 통하여 창조되는 언어의 신세계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관습적 언어를 정신의 필요에 의해서 영혼의 상태를 그려낼 수 있도록 거의 비의적인 방법으로 정화하는 일, 그것 때문에 언어의 난해성이 있게되는 것이다. 본질로 환원된 언어를 통하여 언어와 정신의 어떤 통합에 도달하는 것 - 그 일을 랭보는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 <모음>은 연금술에 의한 신비로운 언어의 탄생을 그린 것이다.

 

10) 관념으로 번역되는 '이데'는 대체적으로 대문자로 쓰이는데, 원래 시적 관념, 내적 관념, 형이상학적 관념 등을 가리키며, 그 범위가 '상징' 만큼이나 넓다 (Marchal, 1993:174 참고)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8)

 

4. 상징주의의 전개

 

1. 상징주의의 계보

 

자유시, 산문시, 순수시

  상징주의는 19세기 중엽에서 말까지 성행하였고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그 성숙한 성과를 보여주었던 문예사조로서,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의한 반동이며, 이성이나 추론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감정을 파악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직관들과 사고의 표현을 목표로 하여, 기존 문학형식에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그 혁신은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본질언어에 대한 탐색은 시언어, 즉 상징언어에 대한 추구였다. 그리하여 상징주의는 위고Victor Hugo의 낭만주의에서 고답파에 이르렀던 프랑스 당대의 시 전반에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다. 이 새 바람은 자유시와 순수시를 낳게 된다. 관념적이던 상징주의자들이 공략한 것은 시, 그중에서도 자유시 부분이었다.

  베를렌은 자연스럽게 전통 시구의 갱신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자유화시' 또는 과격시는 각운에 대한 전통적 규율에서 해방된 시를 뜻하지만, 정형시의 전통적 율격을 더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유시(vers libre)' 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랭보는 베를렌의 <시법>(1874)보다 앞서, <움직임>(1873) 등의 시에서 베를렌과 유사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베를렌의 자유화시는 자유시의 초석이 되었으나, 각운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하였다. 시를 외형적 율격에서 진정으로 해방시켜 자유시, 곧 오늘날 현대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상징주의의 가장 현대적인 기여의 하나다.

 

   자유시는 음절 계산을 넘어선 시로서, 생각, 호흡, 음악성의 요구에 따라 시가 흐르는 대로, 때로 완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까지 변조되는 시이다. 시를 해방시킨 것은 상징주의이다(Marchal, 1993:177).

   1886년 7월에는 귀스타브 칸Gustave Kahn이 자유시의 창안자로 나선다. 베르트랑 마르샬은 쥘 라포르그의 원고를 친구 칸이 발표시기를 늦추어 한 달 뒤인 8월에 발표함으로써, 그 우선권을 탈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Marchal, 1993:52).11) 라포르그는 두 달 뒤 마약과 폐결핵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마르샬 이전에 이미 리샤르는 칸은 오히려 시의 '절(storphe)'을 시의 가장 핵심적 기본단위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면서, 칸이 자유시의 창안자라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였다(Richard, 1978:380). 모리에 등은 일반론대로 칸을 그 창안자로 기술하였다(Morier, 1981:1168).

  이제 시의 리듬은 기존의 정형에서 많은 변모를 보인다. 상징주의 자유시는 "의미 있으며, 소리 들리는 부호이자, 영혼의 움직임의 상징들인 리듬들을 채택하고자 하였다"(Morier, 1981:1168). 그것은 '언어의 공식적 리듬'에 비하여, 정신의 '새로운 모험'(말라르메)을 가능하게 하여, 시의 형태를 놀랍도록 변모시켰다.

   자유시는 칸과, 언어의 음악성과 순수시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고 '악기파'의 제창자 르네 길Rene Ghil 같은 시인 등을 중심으로 더욱 발전한다.

   상징주의 시는 자유시에서 더욱 나아갔고 그 결과 산문과 유사한 형태의 시가 널리 퍼지게 된다. 보들레르, 로트레아몽, 랭보, 말라르메 등은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1807~1841)이 시작한 산문시를 더욱 발전시킨다. 

   너무 엄격한 형식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하였던 산문시는 대체적으로 베르트랑이 죽은 다음 해인 1842년 간행된 그의 <밤의 가스파르>가 시작한 것으로 본다. 보들레르는 베르트랑에서 영감을 받아 산문형식을 빌려 '소산문시'를 발표함으로써(1855~1867) (사후에 <파리의 우울>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된다), 상징시의 또 다른 문을 열어주었다.

   산문시는 "자유시가 나타난 뒤 사라지게 될 한 전위적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 언어를 창조하려는 노력"(Bernard, 1988:771)의 일환이었다. 또한 산문시는 표현의 무한한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인간의 내적 자유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르로 부각되었다.

   산문시의 시도는 그리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현대 시인들의 광범위한 시도로 끝없이 계속되게 된다. 베르나르의 8백 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저서의 결론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유와 반항의 장르인 산문시는 (---) 시형식을 갱신하려는 하나의 단순한 시도 이상이다. 정신의 욕구, 즉 인간이 운명에 대해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싸움에서의 한 양식이었다.(1988:773)

 

  산문시의 가장 큰 성과는 이렇게 시를 해방시켰다는 데 있다. 상징주의 시는 이렇게 언어의 외적 형식의 소박으로부터의 자유, 즉 언어의 해방과 동의어였다. 동시에 내면이 해방의 동의어로서, 시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동시대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확고히 각인시켜주었다. 향후 프랑스 시는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뉘게 되며, 상징주의는 자유시와 같다는 생각이 당대인들의 머리에 확고히 새겨졌다.

 

  음악의 특질들을 시에 수용하고자 하였던 '순수시'는 프랑스 상징주의가 빚어낸 것이다. 이것은 원래는 "산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시의 이상을 정의 내리는"(Marchal, 1993:175) 말이었다.  이야기나 서술, 개념적 사고 등, 시의 요소 이외의 것들은 모두 시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던  이 순수시는 말라르메로부터 시작된 생각으로, 음악적 암시의 순수한 효과를 중시하였다. 순수시는 극단적으로는 "언어이긴 하지만, 감각적 언어 혹은 음악적 언어였다"(Marchal, 1993:176). 이러한 상징주의의 순수시는 일체의 사회적, 현실적 관심을 떠나서 서정의 세계만을 대상으로 하고자 하는 넓은 의미의 순수시와는 구별된다.

  말라르메의 생각을 '순수시'라는 말로 제시한 시인은 발레리였다. 그는 고도의 지적 세계를 이미지와 감정의 결정체로 조화롭게 빚어냄으로써, 순수시의 영역을 더욱 확충시킨다.

  자유시와 산문시와 순수시의 확립에서 볼 수 있듯이, 상징주의는 이전의 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겠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이미 부여하고 출발한 것이다. 문학은 전위적이 되었고 다양한 유파와 문학선언이 이어졌다.

 

상징주의의 계보

  상징주의 운동에는 세 스승, 즉 감정의 탁월한 양식을 빚어내었던 베를렌, 감각 인식의 새 지평을 연 랭보, 지성의 언어관을 구축한 말라르메가 확고하게 자리한다. 각기 다른 성향을 낳았던 상징주의의 거대한 움직임들의 정점에는, 감각과 시형식과 상징술과 사상의 위대한 선구 보들레르가 있었다. 그의 <악의 꽃>은 서구 현대시를 낳은 가장 거대한 뿌리였다.

  베를렌은 음악적으로 완벽한 순수 서정시를 썼으며 그 감정적인 어두운 면, 원죄의식 등은 데카당스로 이어진다. 주술과 환각으로까지 이끄는 랭보의 언어와 감각은, 환상적 시세계를 개척하였으며, 초현실주의를 열어주었다.

  말라르메의 언어의 정화와 형식의 혁신 작업은 상징주의 이념의 체계화의 결과였다. 말라르메의 순수시와 절대시의 체계는 19세기에 그치지 않는다. 발레리는 그의 업을 확실히 계승하여 20세기 최고의 상징시이자 지성시의 탑을 쌓는다. 말라르메는 소네트를 완성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또한 전통을 넘어서는 활자법을 개발하여 시행이 해체된 시를 창안하였고, 오늘날의 다양해진 활자배치술을 미리 시사하였다. 

  상징주의는 세기를 넘어서도 훌륭한, 개인적인 개화들을 보여주었다. 발레리와 더불어 20세기 대표적 시인의 하나인 폴 크로델, 상문에 있어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앙드레 지드도 사징주의 범주에 들어간다.

  협의의 상징주의, 또는 미시적 상징주의는 약 15년 내외에 걸친 활동으로 1890년경이 전성기였다. 장 모레아스, 트리스탕 코르비에르, 귀스타브 칸, 쥘 라포르그, 알베르 사맹, 프랑시스 잠, 에두아르 뒤자르뎅, 르네 길, 조르주 로당바크, 에밀 베르아랑, 아리 드 레니에, 프랑시스 빌레-그리펭, 사를르 모릿, 르미 드 구르몽, 등 많은 시인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상징주의 선구자들의 창조적 혁신은 구스타브 칸의 자유시와 르레 길의 '악기파'의 창시로 다시 꽃핀다. 그러나 이 짧았던 상징주의는 문학적 기여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보들레르의 시적 혁명, 말라르메의 이론적 체계화, 원죄의식의 베를렌, 감수성의 랭보 - 이 선구자들의 새로운 문학에 비하여 협의의 상징주의는 결국 이에 필적할 만 영향력 있는 대시인은 낳지 못한 것이다.

  그밖에 <악의 꽃> 후기 시에 깃든 병적인 악몽의 세계에 빠진 로트레아몽이 있다. 일명 이지도르 뒤카스의 <말도로르의 노래>(1868년, 1869년)는 '파괴적 아이러니'(Marchal, 1993:23)와 비현실적 내용과 형식의 독창성이 결합된 장편의 미완 산문시로, 후에초현실주의로 부활한다.

 

11) 참고로, 1886년은 상징주의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가 된다. 모레아스의 <상징주의 선언> 랭보의 <채색 판화집>과 르네 길의 <어법> 발간 외에도 칸과 라포르그의 자유시의 원년이었고,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불역된 해이기도 하다.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9)

 

4. 상징주의의 전개

 

2. 상징주의의 반향

 

상징주의의 다른 장르

  말라르메는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에서 세련되고 완벽하며 압도적인 시인으로 소개되었으며, 젊은 문학가 예술가들은 그를 정신적 사표로 삼았다. 파리의 로마로(路)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는 화요일마다 소박한 문학 모임이 열렸는데, 여기서는 시와 문학뿐 아니라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베를렌, 지드, 발레리, 클로델, 피에르 루이스, 프루스트, 구르몽, 레니에, 모리스 바레스 등의 많은 프랑스 문인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널리 알려져서 오스카 와일드 등도 참석한다. 그 외 르동, 고갱, 로댕, 드가,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드뷔시 등, 현대 프랑스의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줄을 잇게 된다. 이 모임은 예술의 여러 분야에 상징주의의 새로운 미학을 전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화요회의 영향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렵 여러 나라에까지 미쳤다.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은 현실 너머 세계의 창조에 몰두한다. 상징주의는 극도 이상주의에 몰두하여, 1865년경 말라르메는 운문극 혹은 극시 <반수신의 오후>와 <에로디아드>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들은 현실을 떠난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였다.

  또한 18세기 마지막 4반기에 바그너의 영향은 프랑스 연극에서 사실주의를 버리고 시적 언어로 신비주의를 그리도록 하였다. 1885년 <바그너 평론>의 창간은 이미 행사하고 있던 바그너의 영향력을 더욱 크게 하였다. 빌리에 드 릴라당, 모리스 메테를링크, 폴 크로델이 그 가장 활발한 성과를 보여주었다.12)

  상징주의의 출발과 본령은 무엇보다 시에 있었다. 그러나 시에서 보여주었던 이상과 관념과 절대에 대한 추구는 다른 장르들에도 영향을 주었고 특이한 양상으로 완성되면서 상징주의의 영역을 더욱 확충시켰다.

  이상주의는 소설에서도 부족하지 않았다. 릴라당의 소설들이 손꼽힌다. 몰락한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유창한 콩트 작가로서 주로 물질주의에 맞서 정신적인 절대의 세계를 동경하는 이야기들을 썼다. 그의 영향으로 많은 상징주의자들은 외부 세계의 현실에 등을 돌리고 절대적 이상주의라는 고통스런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모험은 '절대적 페시미즘'에 도달하였고 다수의 상징주의자들도 같은 길을 갔다(Rait, 1986, 261~262).

 위스망스의 <거꾸로>(1884)는 주인공 데 제생트라는 귀족이 퇴폐적 미학을 추구하며 외부와 단절한 채 삶보다 예술에 빠져 다양한 실험을 행한다는 이야기로, 보들레르가 그렸던 이국적이고 인공적인 세계를 탐미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이 긴 독백형식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미적 쾌락 속에서 고통의 출구를 찾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연적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는데(1913~1927), 여기서 그는 이상을 찾아 의식의 심층을 탐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문학청년인 나, 마르셀이 기술해가는 7편으로 된 1인칭 고백형식의 소설이다. 이 대하소설은 그러나 기존의 서사적 소설이 아니다. 서사적이라면 자아의 내면에 대한 서사라 하겠다. 이 소설은 어떤 이야기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소설이 탄생하는가에 대한 내적 이력을 탐사한 소설이다.

  마들렌느를 먹는다. 그러면 유년의 어떤 추운 겨울, 홍차에 곁들여 먹던 조가비 모양의 이 작은 과자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일리에에서 보낸 유년기가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순화되고 결정(結晶)이 되어 살아난다. 홍차와 마들렌느가 촉매가 되어 자아는 무의식의 심층 탐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태양계의 조직처럼 화자의 의식이 태양인"(Marchal, 1993:121)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화자의 시선에 의해 세계가 재구성되지만 여기서의 세상은 내면화된 세상이다.

  말라르메가 <시의 위기>에서 꽃다발의 부재와 더불어 언급하였던 언어의 환기적이고 암시적인 기능은 이제 프루스트에게 와서 표층의식 저 멀리, 그리고 사실주의적 현상 너머로, 또 다른 하나의 현실을 광범위하게 그리는 데에 쓰이는 것이다. 이제 자아는 사실주의 공간이 아니라 '되찾은 시간'의 새로운 매혹에 빠져든다.

  이처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세기의 세계 중심적 소설을 다시 통합하여"(Marchal, 1993:121), 자아 중심의 상징주의 소설의 전형을 창조하며 동시에 성숙시켰다. 따라서 프루스트의 소설은 상징주의 범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보들레르가 시작한 의식의 심층탐사를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더욱 천착하여 무의식의 영역을 탐사함으로써, 이미 상징주의를 넘어섰다고 평가 받는다.

 

상징주의의 전이

  이상이 상징주의의 횡적인 반향의 양상이라면, 우리는 또 문예사조의 전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초현실주의를 낳게 한 상징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일찍이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에서 시도하였으며 로트레아몽과 랭보가 추구하였던 환상, 그리고 베를렌의 퇴폐주의(데카당스)는 초현실주의의 초석을 놓게 된다.

  현실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상징주의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 너머의 새로운 조화의 공간을 창조하려 하였다. 이에 비해 1900년경부터 시작되었던 '초현실주의'는 보들레르의 로트레아몽, 그리고 랭보의 환각적이고 주술적인 언어에서 시사 받고 현실의 배후로, 현실과 의식의 밑바닥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둘 다 모두 의식의 다른 곳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은 출발이다. 그러나 앙드레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들에 있어서 상징주의와 다르다.

 

    즉 목적보다는 수단에 강세를 두고, 이렇게 해서 달성된 초현실의 본질보다는 비합리적인 수단의 사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또 음악보다 회화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체드윜, 1981:65)

 

  초현실주의는 초현실만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을 꿰뚫어 배후의 현실 속으로도 향하였고, 반면 상징주의는 초현실을 향하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 상징주의는 순수 조형적 구성이라는 차원에서도 주요 역할을 한다. 상징주의는 '세기말'과 '아르누보(Art nouveau)'가 복합되어 널리 파급된다. 글자 그대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는 전통과 단절하려는 의지와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는 의지에 의해서 상징주의와 같은 궤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미학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유사한 예술운동으로, 아르누보는 1893년에서 1905년까지 주도되었으며, 기존의 역사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근대 세계에 맞는 새로운 양식 창조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르누보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진정한 생명체로서의 주거환경이라는 유기적인 개념 차원에서 구조와 장식 간의 구분을" 없애고자 하였다(장티, 2002:9).

  상징주의 활동은 산문에서는 제임스 조이스 뿐 아니라13) 슈테판 게오르게에게 직접 영향을 끼쳤으며, 라이너 마리아 릴게의 시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파울 첼란,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기욤 아폴리네르, 프랑시스 퐁주, 자크 루보, 레몽 크노, 이브 본느프와, 미셀 드기 등, 현대의 무수한 작가들에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2) 제드윜, 1983, p.62 참조

13) David Hayman, <조이스와 말라르메> 1956을 참고할 것.

프랑스 상징주의 / 김경란 (10)

 

3. 상징주의의 퇴조

 

  이상과 관념을 지향한다는 것은 정신의 갈망에 대한 현실의 충족 정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결핍감을 줄 때 더 성행하는 현상이다. 가치체계의 흔들림은 그러나 가치의 위기를 잠재울 수 있을 현실적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세기말병'이라는 병리현상도 물 밑으로 가라앉고 경제적 안정이 찾아옴으로써 이상과 본질이라는 두 명제의 문제도 사람들의 뇌리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 파나마 사건, 모로코 사건, 식민지를 얻기 위한 열강들의 각축 등, 세기 말과 초의 역사적이고 격동적인 사건들은 사람들을  또 다른 혼란과 위기의 와중으로 밀어넣었다.

  상징주의는 현실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생래적인 특성상 현실 변화들에 초연하려는 의지를 중시하고, 실제로 초월을 꿈꾸었다. 역사의 격동기에도 초연히 유지되는 상징주의 상아탑은 현실 감각의 결여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말라르메는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 대한 활발한 참여나 견해 표명이 부족하다고 지금도 비난받는다.

 

  관념주의, 순수에 대한 집착, 언어 자체의 모호성, 언어의 지시대상의 모호성, 유희로까지 전락하였다는 비판을 동반하였던 현학 취미, '신조어에 대한 집착과 체계적 난해성'(Richard, 1978:393), 그리고 합리적 정신으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일부 상징주의자들의 비교술(秘敎術)과 신비주의에 대한 집착은 상징주의가 시대착오로 전락하게 하였다.

  신비주의, 이상주의, 암시적 기법, 교감, 언어와 문학의 절대화, 난해성, 선민의식 등은 상징주의의 고유한 세계를 열었고 광범위한 문학 공간의 구축과 내용과 형식의 혁신에 기여하였지만, 바로 그 특성들로 인하여 상징주의는 대중과 시대의 요구에서 유리된다.

  더구나 상징주의가 대중을 외면하고 작은 잡단의 변두리 속에서 칩거하며 그들의 시집을 자비로 출판하고 있었을 때, 자연주의 소설들은 대량 출판의 시대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적 삶과 단순성과 명확성을 멀리하였으며, 현실의 다양한 욕구들을 수용할 수 없었던 상징주의는 쇠퇴를, 적어도 수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대륙적 합리주의라는 그릇은 상징주의를 한 없이 담아둘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모호하고 난해한 영역에 대한 집착, 즉 "명석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전통적인 정신을 여유 있게 포괄하지 못한 상징주의의 그 반(反)정통성"(김기봉, 2000:53)으로 인하여, 상징주의의 쇠퇴는 미리 예정된 것이었다. 상징주의로서도 마침내 시대를 수용하지 못하였으며, 또 프랑스라는 공간도 상징주의를 결국 거부한 것이었다.

  암시와 상징을 통한 모호한 영역의 환기, 그리고 비교주의와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것, 이들 모두는 상징주의가 벗어나고자 하였던 낭만주의의 성향에 오히려 가까운 것이었다. 상징주의가 향후에도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시의 가장 모호하고도 보편적인 영역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막연하고 구체적이지 못한 언어와 관념의 유희는 더 이상 주류일 수가 없었다.

 

    기실 상징주의는 시를 통해서 순수하고 고도한 정신의 수정 같이 아름답고 별처럼 고결한 영혼 가꾸기라는  관념적인 유희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김기봉, 2000:53)

 

  클로텔은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필요에 의하여, 가톨릭적 상징주의에 여전히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는 1892년 '제노바의 밤'이라는 위기를 겪고, 문학을 '처단'하였다고 하며, 시 쓰기를 포기하게 된다. '자아'의 문제에 몰두하며 그는 20년이 넘는 동안 침묵에 빠진다. 앙드레 지드는 북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에 몰두한다. 프루스트는 문학의 변모를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들 대부분은 상징주의의 유업을 이어받고 있거나 변모시키거나 장차 발레리처럼 더욱 완성시키게 된다.

  이에 반하여, 상징주의의 용도페기를 선언한 다양한 조류들이 상징주의의 뒤를 잇게 된다. 상징주의를 선언했던 모레아스는 현실과 관념 사이의 "전이전 현상에만 관심을 갖는 상징주의는 죽었다"고 하며, 1891년 '로마파' 선언문을 <피가로>지에 게재함으로써 스스로 신고전주의로 복귀함을 알렸다.

  '본연주의', '전일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선언 등으로, 문학계도 역사적 격동의 현장에 동참한다.

  본연주의는 19세기 말, 고답파와 상징주의에 반기를 들어 연금술적인 언어 만들기와 추상화를 거부하며, 자연의 단순성과 풍요를 구가하려 하였던 예술과 문학의 주장이다. 그것은 꿈과 관념보다는 일상과 세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였다. 1897년에 있었던 모리스 르 블롱의 본연주의 선언보다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나 아나 드 노아이유와 프랑시스 잠에게서 그 취지가 더 잘 표명되었다.

  쥘르 로맹은 1905년 전일주의를 제창하여, 집단의 초개인적 일체감을 중시하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전일주의는 공동체적 생활에서 체험하는 집단의식과 감정의 진실성을 내세웠다.

  이탈리판 입체파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미래주의'는 1909년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으로 표명된 것으로서, 속도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형태의 미로서 내세웠다. 기계의 위력으로 출현한 새로운 세계를 환영하고, 움직임과 시간의 본질을 추구하여 과거에 대한 모든 집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다이즘'은 모든 것을 부정하며, 기존의 사회적, 도덕적 속박에서 해방된 개인의 진정한 근원을 찾고자 하였다. 1913년에서 1922년 사이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일어났던, 일체의 현실을 부정하는 반문명이고 반(反)합리적이었던 예술문화 운동으로, 초현실주의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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