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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 (조명제)
2022년 07월 11일 21시 20분  조회:622  추천:0  작성자: 강려
■하이퍼 시
 
해 있을 동안

조 명 제
 
처서(處暑), 백로(白露) 지나자
해가 자꾸 자꾸
한 쪽 지름길로 간다. 대낮인데도
오동잎 같은 해 그늘이 길바닥에 내려앉는다.
짧아지는 해가
우수(憂愁)라는 단어처럼 슬픈 빛깔로
길 위의 모래에 깔린다.
해가 짧아져서 우수가 된다는 걸
까치가 깔긴 똥 보고 낄낄거리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매화꽃빛이
눈썹 끝에 와 매달리는데 어쩌구 문자 보낸 이후,
오래 소식 없는 송영희 시인에게
문득 다시 문자를 날려 본다. 어느새
가을빛이 발끝에 차이는 때
영월 깊은 산골 운학리의 농사는
잘 영글고 있으리. 밀꽃도 한창이리.
보내기 전 다시 읽어 보니,
‘메’자를 빠뜨려 먹어 ‘메밀꽃’이 ‘밀꽃’이 되어 버렸네.
밀꽃? 밀꽃! 밀꽃, 밀꽃 이 이쁜 말을
나는 왜 여직 시에 써 먹지 못했을까.
지상에 내리는 한 줌 햇빛이
금싸라기인기여! 산이 고가구빛으로 깊어지면
해 뜨기 무섭게 진다 한들
뉘 이상히 여기리.
농사에는 농사꾼이 박사예요.
이웃밭 할아버지가 메밀씨를 나눠 주며
심으랬지요. 서울 들락거리느라
한 열흘 늦게 씨 뿌렸지요. 할아버지는
마땅찮아 하셨지만, 뭐 열흘쯤 늦은들 어떠리
하였지요. 일요일, 열한시나 돼서야 부, 시, 시
일어난 아내가 거실로 나온다. 티브이의
티브이 보고 있던 남편과 아이들이 입 맞춘 듯
세 입 한 목소리로 말한다.
“밥 줘!”
얼굴 넓적한 아내가 반사적으로 대꾸한다.
“내 얼굴이 밥으로 보여!”
9월이 오고, 효석(孝石)표 소금을 뿌린 듯
할아버지네 메밀꽃이 환히 피었더랬지요. 보름밤
달빛 아래 누운 맨몸의 메밀밭은
황홀 그 자체였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어도 제발 해 길이만은 여름 같아라 한들
무슨 소용이리, 무슨
끝여름 홍천 비발디 파크의 오션월드!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네. 이집트식 이미지의
온갖 물놀이 기구 만들어 놓고
떼돈 벌고 있네. 옷 같잖은 끈수영복 입은 아가씨들
겨울을 어찌 할꼬. 땡볕 아래 뱀줄로 서서
서너 시간씩 기다려, 뒤틀리는 곡절(曲折)마다
아아아악아아아— 삼사십초 타는 몬스터 블라스터
Monster Blaster! 파도 수영장엔
파라오가 근엄하게
물 좋은 인어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인어들을 패대기치는
파도는 아무 때나 치지 않는다. 기다려야 한다.
잠시가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지나간 세월은
아무리 지루했어도 잠시가 되는데.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그 위엄 있는 고둥 나팔소리가 부드럽게 심금을 울리자
(아직 파도는 칠 생각을 않고 있는데)
아르르르르— 인어들이 먼저
목소리 기절을 한다. 우리 메밀밭의 꽃도
할아버지를 뒤따라 드디어 까르르르르— 한창으로
피어났더랬지요. 아, 이뻐!
근데 말이지요 선생님, 이게 웬 일?
우리 메밀꽃이 한창일 때, 밤은 다 찌그러든
눈썹달 하나를 띄워 놓는 게 아니겠어요!
조각달과 그믐 사이, 메밀밭 꼴이 어땠겠어요. 여자 속옷
6.25 동란 이래 최대 똥값 처분!
미호천변 옷가게 주인 백, 농사에는
농사꾼이 박사라니깐요!
바다 이야기 터지기 전에 죽어 버린 놈
누구야 엉 누구냐 말이다. 죽여 버린 놈이! 밀꽃 피던 봄에
밀밭 속으로 떠나간 긴머리(한 번 묶은)는
어느 하늘빛이 되었을까. 지중해의 푸른 문을 열고
솟아나오는 금발의 헬레나들이여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시간이
많지 않다.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
 
 
조 명 제
 
내 살아 있음의 기쁨이여! 이것이
끝물 사랑의 발설법이던가. 해질녘
캔맥주와 줄김밥 사 들고 루비콘보다 아름다운
강변으로 간다. 먼저 온 데이트족들이 자신들의
반짝이는 사랑 넓이만큼씩
풀밭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 알맞은
사랑만큼의 터를 꾸미고 풀잎 위에 앉는다.
날은 아직 훤한데, 저만치
제일 높은 빌딩 허리춤에서
반달이 희미한 얼굴로 삐져나온다.
빡! 캔을 따고 촉촉한 눈웃음 섞어 틱!
부딪치고, 부풀어 오른 사랑의
거품을 쭈욱 들이킨다. 식사와 안주,
하찮은 김밥이 이리 요긴할 줄이야! 저녁의
미풍을 타고 여기저기
어스름이 가등(街燈)을 켠다.
가을을 검색하자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고기가 당긴다. 겨울잠에 들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내 몸의 센서가 먼저 알고 일러 주는 것이리.
문화일보 1면 사진 기사가 가을을 전한다.
물두꺼비는 짝짓기 꼴로 동면에 들어
7개월을 지낸다고. 물두꺼비는 좋겠다.
너희들은 지겹지도 않니? 한 사람과
한 평생 산다는 거 지겹지도 않아?
한 5년이나 10년마다 결혼을
갱신해야 하잖겠니? 옥시토신의 유효 기한이
길어야 3년이라잖아! 풀잎 끝마다
멀리 도회의 오색 불빛이 이슬처럼 맺힌다.
맞댄 두 이마 아래의 키 작은 풀잎들이
거짓말처럼 고개를 꺾어 까-딱- 인사을 한다. 저들도
심상찮은 사랑의 공기를 느끼는가.
“이 봐! 풀들도 우리 사랑에 경의를 표하는 걸!”
“불륜인데두요?”
라고 그네는 말하지 않았다.
“불륜의 사랑은 위대한 거야.”
“하기사, 세계문학사의 모든 위대한 소설의 사랑은
다 불륜이라고 설파해 왔죠. 당신이
젤루 좋아하는 「닥터 지바고」도 그렇지만요.”
황운(黃雲)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
광덕사 가는 길은 참으로 호젓했다. 절 문을 지키는
늙은 시조(始祖) 호두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어뜨리고 회갈색의 빛나는 가지로
한 줌이 아까운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습작시마다 핀잔을 들은 시인 지망생 이쁜 코 미시 제자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절친한 미쓰 학우 앞에 대고
나 들으라는 듯,
“시를 쓰려면 눈물의 뼈도 볼 수 있어야 한대 글쎄!”
한다. 아직 더러
잎 달린 젊은 호두나무숲을 지나 골짜기로 가는 오솔길
향긋한 가을 잡목들이
팔 뻗듯 가지들을 내밀어
시샘하듯 우리의 허리께를 치며 인사를 한다.
“이 봐! 나뭇가지들이 우리의 사랑을 반기는 거!”
눈이 작아서 예쁜 여자가 대답한다.
“거 참, 신기하네요!”
바빌론강 기슭
거기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리는 울었도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竪琴)을 걸어 놓고서*
밤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큰 눈의 그네는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 살아 있음의 슬픔이
기쁨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성경』의 「시편」137에서 인용.
 
 
 
 
목 화 꽃
 
조 명 제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의 설산고봉을
철새들이 넘는다. 기류를 타고
힘겹게 힘겹게 넘는 두루미떼
수만년 지층을 날아온 날개의 힘과
고공 기류의 긴장이 깨지면서 더러는
8000 미터의 벼랑 아래로 추,락,한,다.
목숨을 건 비행(飛行), 철새들은 내장에
센서 내비게이션을 달고
머나먼 행로를 따라 비행한다. 설악의 울산바위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그리스의 마테오르
그 벼랑 꼭대기의 수도원을
곡예하듯 도르레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검은 망토의 수도사들, 그들은
뼈를 갈아 끼우려고 그 아득한 높이의
가파른 벼랑을 오르는 것일까. 청량산(淸凉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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