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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환시인-“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김규화 시집 『말·말·말』을 중심으로
2022년 09월 25일 16시 13분  조회:569  추천:0  작성자: 강려
□시인론 / 김규화
 
“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김규화 시집 『말·말·말』을 중심으로
 
 
안 수 환
 
불리어진 이름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된다
- 시인의 「멍에」 중에서
 
 
 
1
왜 시인은 말(馬)에 대한 말(언어)의 연관을 뿌리치지 못하는가. 그런 질문을 던져가면서 나는 이 글을 썼다; ① “흰 고래가 바다 한가운데서 상어에 붙잡히고 / 한바다가 흰 피를 내며 출렁인다 / 나의 손끝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말이 뛰쳐나간다” ((이는, 말(언어)에 대한 시인의 경외심을 추인해 보여주는 대목 [즉, 환유換喩]이다))와 같은 극지極地를 보아왔기 때문에 그럴 것이고 (「파발마擺撥馬」), ② “세상의 역사는 말로써 씌”어지는 까닭에 그럴 것이며 (「종마種馬」), ③ “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하는” 까닭에 그럴 것이고 (「종마種馬」), ④ “펜을 손에 쥐고 어루만질 때 / 말은 비로소 살아서 / 공기를 밀어내며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까닭에 그럴 것이다 (「종마種馬」). 시인의 말(언어)은 예컨대 ⑤ “맷돌판 밑에서 자근자근 빻이”는 낱말의 체위體位를 매단 채 (시인의) 의식을 마름질하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연자硏子방아말」). 이윽고 시인의 낱말은 ➅ “아리송한 말(馬)의 육체가 삼삼하게 아른거리는” 사물 곁으로 다가와 그 사물의 복개覆蓋를 열고 시인의 손가락을 깨물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즉, “내 소중한 말(馬)과 하나인 내 손가락이네” (「연자硏子방아말」, 「오추마烏騅馬」)]. 말이란, 말로서 어떤 일정한 생각을 표현해내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 꿈꾸는 말은 말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말의 도추道樞임에 분명하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시인의 말은, 그러므로 언어의 문자적인 연관에만 묶여있지 않고, 진리의 지향인 우주론적인 시제時制의 그 원점을 향해 불빛처럼 타올랐던 것이다. 김규화 시의 인식론은 단순했다. 그는, 그의 시집 『말·말·말』에서 인지적인 의식의 착각을 덜어내기 위해 언어의 파편화로 나부끼는 불투명한 의미의 미봉책을 한겹한겹 벗겨내고 있었으므로.
 
2
김규화 시에 등장하는 수많은 말(馬)은, 말(언어)의 구획 [혹은, 실체적 진실]으로부터 뽑아 올린 본질의 의사적擬似的 조형물들이다. 그의 시적 현실태態 [혹은, 기표]는 인간의 마음 언저리로 피어오르는 우주 자연의 요체要諦로 집중돼 있다. 시인은 무오류의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때부터 시인이 된다. 오류는 내 생각의 가벼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내 생각을 대뜸 우주의 무한함으로 비끄러매는 오기에 기인한 것들이다. 생각이 무거워지면, 인생과 삶은 덩달아 무거워진다. 실제와 허구를 갈라놓고 보면, 우주적 형상에 반하는 비사실적인 우연이 판을 주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는 길운吉運도 있기는 있다). 어쨌든 김규화 시인의 시집 『말·말·말』을 일별해 보건대 그의 예술혼 한복판에는 오방五方 대우주와의 정합整合으로 통하는 언어체계의 기표적인 율려律呂가 굽이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랑스 생 짧은 키에
느긋하고 사교성이 많다
짧고 튼튼한 다리로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산악지대를 오른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창밖의 플라타너스를 본다
달리는 마차의 꽁무니를 TV에서 본다
 
고장난 마차는 바퀴를 갈아끼워도
말은 내장을 갈아넣지 못한다
 
나의 부하이다가도
말은 나의 주물(呪物)이 되고
내가 말의 등에 오르면 우리는 한쌍이 된다
 
태양은 보름달 하얗다
지구는 나뭇잎 초록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
-「콤토이스」 전문



어느새 말 [즉, “콤토이스”]과 내 몸은 한 몸이 된다. 이때는, 위 시 언표의 시의時義가 나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즉, “나의 부하이다가도 / 말은 나의 주물(呪物)이 되고 / 내가 말의 등에 오르면 우리는 한쌍이 된다 // 태양은 보름달 하얗다 / 지구는 나뭇잎 초록이다”]. 낱말의 전위轉位로 바라보면 나 자신의 의식은, 그것이 내 몸의 의식이 아닌 또 다른 누구의 목소리 [즉, “지구는 나뭇잎 초록”]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필경 우주의 침묵으로부터 들려오는 예단豫斷일 것이다. 시인은 사물과의 교감없이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시인이 천리天理를 알아채는 것도 모두 사물 [이르테면,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사막지대를 오르는 (‘콤토이스’)”]과의 정합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변증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물의 미세한 단세포 뒤에는 세계연緣과 맞물린 동그란 표상이 끼워져 있었던 것. 그것들 심오한 전하電荷가 시인의 감성에 와 머물기까지는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일순간의 존재론적 파상波狀이면 충분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인은 낯선 대상과의 일면식 한 번으로도 우주정황의 핵심을 추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얘기가 별안간 우주론 쪽으로 기울어졌다. 시인의 예지豫知를 이야기하다가보니까 그동안 더없이 궁금했던 외부세계의 여러 조항들이 한꺼번에 말문을 열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계는 내 관점의 본보기일 뿐이다. 우리가 재빨리 적응해야할 부분은 낯선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그 대상의 외연外延을 하나씩 둘씩 구별해내는 의식의 정립이었던 것. 지금까지와는 달리 사물의 비익秘匿은 아무것도 시인에게 전달해주지 않는다. 이때는 평정심으로 돌아갈 때다. 그처럼 마음이 고요해지면, 일상적인 경험의 순수 유명론 속에서도 먼 우주통신의 스펙트럼 spectrum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영국은 오래 전부터 암말을 아랍 수말에 교배시킨다

갈색 가죽옷과 진갈색 머리칼에
스멀스멀 풍기는 몸의 향기
질주하며 날아올라
고원(高原)을 넘는 구름같이 서러브레드는
스피드하고 힘 넘치는 경주마가 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당신을 빛나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감이다”
는 카네기의 말
 
고개를 끄덕거리며 맨가슴 펴고
왕발굽으로 콕콕 땅을 차다가
온몸을 떨며 내달리는 행렬에 서서
메뚜기처럼 뛰는 앞다리
바람에 휘날리는 갈기
위풍당당 콧소리, 매끌한 대추색 피부를 뽐낸다
 
별 하나가 공중에서 미끄러진다
공간이 양보하고 시간이 내려온다
말은 아득한 곳에서 와서 아득한 곳으로 간다
-「서러브레드·2」 전문
 
“서러브레드”의 “진갈색 머리칼”·“바람에 휘날리는 갈기”·“온몸을 떨며 내달리는” 그 몸짓은 그대로 하늘의 융기隆起를 빼닮았다. 저와 같은 대유代喩를 보더라도 하늘은 하늘에 있지 않고 대지 위로 내려와 “왕발굽으로 콕콕 땅을 차(는)” 위용을 내보이고 있었던 것 ((말(馬)을 하늘(乾)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천爲天) 그 때문이다 [즉, 『주역』 「설괘전說卦傳」의 ‘위양마爲良馬’,‘위박마爲駁馬’]. 하늘이 하늘인 것은 그러므로 하늘 자체 안에서 잉태되는 천운天運의 척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다. 시인의 말(馬)은, 어디서나-언제든지 그 같은 하늘의 실체적 진실의 회전축軸 아래서 움직인다. 진리는 모난 돌을 밟지 않는다. 말(馬)에 대한 본질적인 공감을 얻어낸 시인의 지각은 어느덧 공간과 시간의 경사면 [즉, 대지적인 지평]을 건너온 “서러브레드”의 “몸의 향기”를 지켜보면서 “고원(高原)을 넘는 구름 같은” 불확정적인 여백이 또 어디 있는가를 다시금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때 시인이 정말로 꿈꾸는 마음의 평온이란 외부로 연결된 자연의 조화라기보다는 그때까지 공허로 남는 세계이해의 재발견이었으리라 [즉, “별 하나가 공중에서 미끄러진다 / 공간이 양보하고 시간이 내려온다 / 말은 아득한 곳에서 와서 아득한 곳으로 간다”]. 김규화 시인의 상상을 꿰뚫는 우주혼은, 엄밀히 말해서 지금껏 시인이 믿어왔던 절대와의 그 밀월관계를 끊어낼 때 그때 그곳으로 다시 밀려오는 변화율이리라.
 
4
시심을 느낀다고 해서 누구나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정신의 퇴락頹落은 업무에 복속돼 있거나, 일상의 인연 속에 파묻혀 있거나, 아예 말문도 틔지 않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을 때 홀연 노출되게 마련이다. 만감에 연루된 사물은 또한 그때까지 아무데나 널부러진 채 시들어갈 뿐이므로. 시의 구성이란, 저와 같이 ‘죽은’ 사물을 살려내는 일이었던 것 [즉, “사물들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야단법석이다 / 이름 짓는 일은 말을 짓는 일이다” 「아랍」]. 허나, 시의 직단면直斷面에 맞는 바람은 좀처럼 불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는, 세상과는 무관한 시인 자신의 선善의지만을 감정해가는 제구였단 말인가). 시는 진실의 복원을 위해 해인산매海印三昧를 끌어안은 시인의 무제한적인 법문이 아닌가. 그랬건만 실체의 단역들은 어째서 세상살이의 부조화를 아직도 끊어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참됨’은 자기갱신의 이성적 절차에만 매달려있을 뿐 아직도 역풍의 페달을 밟고있지 못했다. 그러나 김규화 시인이 바라보는 말(馬)은, 지금 그 역풍을 밟고-대지를 밟고 하늘로 비상한다 [즉, “말이 새라고 말을 하니까 그곳이 환하다 / 환함이 새의 언저리에 산다 / 창이 밝아오고 아침노을이 떠오른다” (「말 탄 자와 차 탄 자」), “말을 타고 말을 하면 말과 한몸이 된다 / 시월 상달은 말날(午日)이어서 / 말있는 날에 말있게 맛있게 간장을 담근다 / 초인종 소리는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말이다” (「말은 기마병騎馬兵을 태우고」), “평원에는 바위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고 / 말은 바위를 내려다보다가 하늘을 올려다 본다” (「갈기와 꼬리」), “말을 잘 타야 말을 만든다 / 그 많은 말들을 찾아낸다 // 흰색 구름바퀴가 하늘을 굴러간다 / 향수에 젖은 뭉게구름이다” (「캐나디안」)]. 하늘의 광채를 쓸어 담는 말은 이제 더욱 정결해져야 하리라. 망상과 비현실에 가로막힌 말(언어)은 미분화된 물방울의 비산飛散처럼 사물 자체를 존재소素가 아닌 우연한 표물標物로 흩어놓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김규화 시인의 낱말은 불포화성不飽和性 질료에 대한 평정이며, 군더더기 사물의 반윤리적인 비번으로부터의 회향이었던 것. 사물의 비상非常만한 비非시적인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5
시인에게는, 사물 [혹은, 사건]의 포괄적인 가닥이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예기』는 예악만을 얘기해서 지루한 책이 되고 말았다. 옳은 말을 한다고 그 말을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사랑의 밀어는 오래가지 못한다. 바람이 바람다운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왔다가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감춰버리기 때문이다. 천명天命은 천명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라일락은 라일락의 끝이었다. 그런가 하면 라일락은 라일락의 한계를 다시금 뛰어넘는다. 해체주의의 눈길로 보면, 자연물 속에는 어떤 유일唯一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객관적 통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의 한계는 그렇다고 해서 들쑥날쑥 현존의 실정을 어질러놓는 게 아니다. 현실과의 화해를 꿈꾸는 시인의 지각은 지금도 여전히 다함없는 사유를 통해 사물들의 촉선觸線과 자기 자신의 속내를 하나로 맞춰놓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없이 시인은 무엇으로 아무것도 아닌-아무도 없는 존재의 침묵 앞으로 성큼 다가갈 수 있겠는가. 이때 김규화 시인은 말(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말(언어) 앞으로 다가간다. 그는 다시 이렇게 쓴다;
 
몸 속에 형광등 켜놓았나
검은 피부가 윤이 난다
 
눈 속에 백열등 달아놓았나
갑자기 저 세상이 비친다
 
커피가 발음을 껍데기에 붙이고
나에게 배달돼 와서 ‘커피’ 한다
 
나는 꿈속에서 그림과 함께 있었다
꿈에서 시작하여 꿈 깨어도 이어지다가
다시 꿈 속으로 나는 들어간다
 
“전체란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이 있는 것이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다
 
말은 살 공간이 작아서
나는 한사코 말의 공간을 넓힌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사는 말은
태어날 때부터 작아서
빨리 달리기에 좋다
 
허벅지의 근육이 빠른 속도를 내고
가는 종아리가 넓게 잡는다
앞다리는 몸무게를 뒷다리는 달리기를 맡는다
 
힘이 좋아서 말은 걷지 않고 잘 뛰어다닌다
-「제주마」 전문
 
말(馬)의 몸이 대지 [혹은, 우주 “전체”]이고, 말(馬)의 몸이 대지와의 약속이다. 몸은, 몸이 아닌 몸의 초월이다 [즉, “허벅지의 근육이 빠른 속도를 내고 / 가는 종아리가 넓게 잡는다 / 앞다리는 몸무게를 뒷다리는 달리기를 맡는다 // 힘이 좋아서 말은 걷지 않고 잘 뛰어다닌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 초월의 대지적인 지평을 좀더 자세히 관찰해보아야 하리라. 초월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업인業因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표상세계의 뒷전으로 한 발짝만 물러나도 유정有情 세간의 그 깊디깊은 표적과 함께 업인의 과보果報가 한꺼번에 밀려들지 않는가. 그랬다. 업인의 휘장 뒤에 숨은 자는 초월을 볼 수 없다. 가만히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라. 거기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자꾸 불러대는 소리가 다가오지 않는가. 바로 그때 내 이름의 공간이 넓혀지고 있었던 것 [즉, “나는 꿈속에서 그림과 함께 있었다 / 꿈에서 시작하여 꿈 깨어도 이어지다가 / 다시 꿈 속으로 나는 들어간다 (···) 말은 살 공간이 작아서 / 나는 한사코 말의 공간을 넓힌다”]. 이때는, 시인은 청정심淸淨心으로 연결된 허공의 가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
 
6
다시 한번 말해보자. 김규화 시인의 “사물” (「아랍」)은 그의 말(馬)들이 그렇듯이 사물이 아닌 사물 건너편에 있는 존재의 개시開示였다. 그는 시집 『말·말·말』에서 말(馬)의 쓰임을 줄기차게 얘기하고 있지만, 정작 시인이 말하고자하는 말(馬)의 기량 [즉, 현실규칙]은 말(馬) 자체의 기량이 아닌 세계정신을 포용하는 시인의 유명론이었던 것. 말(馬)의 쓰임이란, 장자가 말했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여가餘暇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 만물을 접촉할 때 사물의 정묘함을 건너가게 되면 지각으로도 알 수 없는 도추道樞의 무궁함을 만나게 된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이때는,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또 이것이 된다”. 사물은 저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이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물무비피 물무비시 物無非彼 物無非是). 사물은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시간 또한 무궁의 그림자가 아닌가. 시인은 그래서 ‘제주말’을 이야기했고, ‘오추마’를 이야기했고, ‘관우의 적토마’를 이야기했고, ‘나폴레옹의 말’을 이야기했고, ‘차마고도의 말’을 이야기했고, ‘몽골초원의 말’을 이야기했고, (···) ‘펠 펜 포니’를 이야기했다. 최종적으로는 시인의 말(馬)은 언어의 몸으로 다가와 인생살이 자기극복을 돌아보는 영매靈媒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또 이렇게 쓴다;
 
낮 12시는 정오(正午), 오시(午時)에는 말이 뛴다
말이 뛰다가 언덕에서 떨어진다
 
밤새 어루만지면서 말을 다듬어도 말이 새나간다
말이 새나가면 말이 안 된다
들은 말은 들은 데 버리고
본 말은 본 데 버리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눈먼 장님은 서울을 가도
말 못하는 벙어리는 서울을 못 간다고 할머니가 말한다
 
갈기가 목덜미에서 가지런히
목을 타고 한쪽 가슴으로 모아내려가다가도
달릴 때는 갈기를 펴서 평원에 흩날린다
말총이 길게 꼬리에서 빗질되어
포니테일 머릿채로 서 있다가도
평원을 달릴 때는 산발(散髮)을 한다
 
평원에는 바위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고
말은 바위를 내려다보다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몸에 살처럼 깃들어 있는 말
이미 신처럼 몸 안에 산다
말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는 파스칼의 말
-「갈기와 꼬리」 전문
 
위 시는 말로써 말을 되물리는 중의법重意法이 아니다. 치언巵言이다 [즉, “밤새 어루만지면서 말을 다듬어도 말이 새나간다 / 말이 새나가면 말이 안 된다 / 들은 말은 들은 데 버리고 / 본 말은 본 데 버리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 눈먼 장님은 서울을 가도 / 말 못하는 벙어리는 서울을 못간다고 할머니가 말한다”, “몸에 살처럼 깃들어 있는 말 / 이미 신처럼 몸 안에서 산다 / 말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말로써 도道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하늘을 보라.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의 균형이란 하늘의 실상에 합쳐져 있을 뿐이다 (천균자 천예야 天均者 天倪也 『장자』 「우언寓言」). 시인일진대 그러니까 그는 하늘의 균형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김규화 시인은 말을 하는 동안 말을 지우고. 말을 하지 않고도 말을 하는 (무언이언無言而言) 그와 같은 치언을 붙들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김규화 시인의 수많은 말(馬)들이 또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말의 이름은 말의 얼굴이다 / 반짝반짝 빛을 내며 돋을새김하고 있다” (「조홍마棗紅馬」)].
 
7
시인의 상상은 어느새 날개 달린 새의 비상飛上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 [즉, “나의 손 끝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말(馬)이 뛰쳐나간다” 「파발마擺撥馬」, “오래오래 솟대에 앉아 있던 새가 외발을 떼부수고 / 하늘로 날아오른다 / 다시 내려오면서는 꽃잎이라는 말을 받아 온다” 「서러브레드·1」, “말(馬)이 새라고 말을 하니까 그곳이 환하다” 「말 탄 자와 차 탄 자」, “윙윙 소리에 페가수스의 날개가 붕붕 떠오른다 / 떠오른 자리에서 팔라벨라는 사라지고 / 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교적으로 대답한다” 「팔라벨라」]. 시인의 통찰은, 여기서부터는 존재의 규격이 아닌 그 존재를 뛰어넘는 순수의 지향에 관한 무결점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스코틀랜드에 사는 키작은 세틀렌드 포니는
밥주머니가 작아서 조금씩 먹고는 자주 배가 고프다
그래도 힘이 세고 용감하다
 
전쟁터에서는 주검을
사냥터에서는 짐승의 피를 보고
두 눈망울로만 간단하게 말한다
 
말은 기호를 풀어 눈으로 나타낸다
말은 전쟁을 풀어 힘줄로 나타낸다
 
내가 기쁘다니까 분수는 몸을 부수어 대답한다
두려움의 나날이여, 말은 나뭇잎처럼 떤다
 
말은 저 혼자 서서
말은 나와 나란히 서서
먼 산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 기쁘다
 
산은 그림같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산은 말보다 먼저 나를 사로잡는다
 
“실패하는 길은 여럿이나 성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다
-「세틀랜드 포니」 전문
 
시인의 말(馬)은 항상 타자 [그것이, 하늘인지 땅인지 바람인지는 몰라도: “말은 기호를 풀어 눈으로 나타낸다”]로 태어나는 은유의 포물선들이다. 시는, 공허한 빈말을 말하지 않는다. 빈말의 뿌리는 진실성이 아닌 유사성에 닿아있을 뿐이다. 김규화 시인의 말(馬)은, 그래서 그 공허의 표면을 짓밟고 다닌다. 시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구 “실패하는 길은 여럿이나 성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를 차용하는 까닭은 그것들 빈말을 볼모로 잡는 가공의 불빛이었던 것 [즉, “내가 기쁘다니까 분수는 몸을 부수어 대답한다 / 두려움의 나날이여, 말은 나뭇잎처럼 떤다”]. 달리 말하자면, 시인의 철학적인 인식체계의 인용은, 지금까지 말해온 시적 담론을 급회전시킴으로써 그가 꾸려온 언어의 카타크레시스 catachresis (함축적 은유로서의 비유) 자체가 자연의 모방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여실히 검증해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꿈꾸는 말(언어)의 광채였던 것. 그만큼 시인의 시적 통찰은 삶의 경건함에 닿아있었던 것. 그러기에 그는 한사코 “나뭇잎”의 “떨림”을 바라보면서도 무형상적인 우주와의 화동和同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말은 저 혼자 서서 / 말은 나와 나란히 서서 / 먼 산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 기쁘다 // 산은 그림같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 산은 말보다 먼저 나를 사로잡는다”]. 시인이 바라보는 말(馬)들의 형상은 그러나 보면볼수록 말(언어)의 허상 [즉, 이름]을 날려보내는 물격物格이었던 것이다. 노자의 관점으로 다시 말해보자; “이름을 얻게 된 뒤에는 또한 (그 이름의) 그침을 알아야 한다”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노자』 32장). 김규화 시인은, 말(언어)의 빈틈 사이로 달려오는 우주공간의 직의直擬가 어느덧 수많은 말(馬)들의 체용體用과 나란히 겹쳐져있음을 깨달았던 것. 시인의 말(馬)은, 말하자면 그의 영혼을 일깨우는 중간자적 소임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자의 비표祕標 없이 시인은 어떻게 우주정신의 초월을 품어 안을 수 있었겠는가.




<시문학,  2022년 7월호 통권 612호 >
[출처] 안수환시인-“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김규화 시집 『말·말·말』을 중심으로|작성자 나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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