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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환시인-만물의 공허를 받아들이는 시간-위상진의 시집 『시계수리공은 시간을 보지 않는다
2022년 09월 25일 16시 59분  조회:541  추천:0  작성자: 강려
만물의 공허를 받아들이는 시간
-위상진의 시집 『시계수리공은 시간을 보지 않는다』


안 수 환
 
 
 
 
1
철학자의 눈을 뜬 시인은 긴 시를 쓴다. 명상가의 눈을 뜬 시인은 짧은 시를 쓴다. 철학자는 연상까지도 늘려놓고, 명상가는 논증마저도 생략한다. 위상진 시의 사고력은 그러니까 후자의 에피그램 epigram을 따르지 않고, 전자의 긴 호흡법에 맞추어 시를 쓴다.
 
2
소요유逍遙遊는 인간을 단순하게 만든다. 장자莊子 (BC 365년경~BC 270년경)의 생각이 그랬던 것이다. 도 [혹은, 현존]의 행방은 공허했던 것. 공허의 경지에 도달할 때, 그때 인간은 비로소 만물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음의 공허를 장자는 심재라고 불렀다 (허이대물자야 유도집허 허자심재야 虛而待物者也 唯道集虛 虛者心齋也,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만물을 받아들이는 현존. 만물을 받아들이는 공허. 대대성待對性의 한계를 극복하는 공허 [즉, 큰 것이거나 작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먼 것이거나 가까운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령, 포일抱一 [즉, “성인은 하나를 끌어안는다” (성인포일 聖人抱一. 『노자老子』 22장)]의 “1”은 신성한 수數 [즉, 절대치絶對値]이지만, 그 “하나”라는 전일성全一性으로 인해 때로는 포일까지도 위험한 것이 된다. “하나”가 “나”에게 붙어버리면 나는 아집我執에 묻혀버리고, “너”에게 붙어버리면 그 “너”에 대한 나는 맹종盲從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생존은 “하나” 한복판으로 떠도는 꿈결인바 꽃 한 송이와 나는 둘이 아닌 한 몸이었으며, 더 크게는 우주와 나는 단 한 몸의 응명凝命이었던 것이다. 나는 무한 공간의 별빛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런데 초월 [즉, 신명神明]은 어디에 있었던가. 공허의 역순 [즉, 음양陰陽의 교차]이 초월이었던 것. 그러니 나는, 내가 끌어안은 공허 [혹은, 태허太虛]를 내 자신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나는 물 [즉, 감坎]이었으며, 나는 동시에 불 [즉, 이離]이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실체에 매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름 [즉, 관념]에 매달린다. 시인의 천형天刑은 여기에 있었던 것. 그러기에 시인은 언제나 보조관념의 실타래를 풀어낼 따름이다. 실체는 어디 있는가. 실체의 허리는 어디 있는가. 『주역周易』에서는, 모든 실체는 섞여 있다는 것을 이른바 물상잡物相雜의 간극間隙으로 이야기한다 (「계사전하繫辭傳下」 제10장). 물질이 실체였던 것이다. 자연이 실체였던 것이다. 품물品物 [즉, 천天 · 지地 · 인人 삼재三才]이 형체를 하나하나 갖추어냈던 것이다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 실체는 부조리한 법이 없다. 다름이 아니라 실체의 내인內因은 시인의 실재론적 직관에 연관된 생기였던 것. 시인의 상상력은 실체의 내인계內因界로부터 온다. 시인은 품물을 통해 우주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풀어낸다 [가령, 불의 동인은 불에 있지 않고 ‘물’에 있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주역周易』의 항구적인 질문 속에서 혹은 ‘불’의 효과를 ‘열熱’이라고 말하는 바슐라르 (G.Bachelard 1884년~1962년)의 몽상을 통해서 물활론적으로 다르게 입증된 바가 있다]. 그런 다음 시인은 품물의 정적靜寂을 듣는다. 다음과 같은 시의 기품을 살펴보자; “물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墨畵」, 『북치는 소년』 1979년, 민음사). 시인은 예기치도 않게 품물 [즉, “물먹는 소”]의 푸르른 순결 [즉, 영혼의 숨소리] 앞에서 저렇게 몸을 떨고 있지 않은가. 자. 이제부터는 시의 문맥 속에서 뜨거움 [즉, “불빛”]과 차가움 [즉, “물속”]이 서로 뒤바뀌는 위상진의 다음과 같은 시 「시계수리공은 시간을 보지 않는다」를 읽어보자;
 
그는 시간의 습성을 찾는 중이다
어둠의 부속을 핀셋으로 집어낸다
바늘만 보일 뿐
대못에 꽂혀 있는 전표 같은 시간
 
멈춰 버린 시계 위
찌푸린 불빛을 내려다 보고 있는 부엉이 한 마리
 
불빛 아래 해체되고 있는 상속된
시간의 유전자
식은 지 오래된 바람은 왜 한 곳으로만 숨어드는지
이상한 꿈은 왜 물속에서 젖지 않는지
가장 환한 곳에 숨겨진 너를 데려간
시간을 열어본다
 
제비꽃이 지는 동안
순서를 무시한 채 휘갈긴 신의 낙서
인사도 없이 뛰어내린 별과의 약속을
모래 위에 옮겨 적고 있었지
 
차가운 불꽃이 부딪치는 별
듀얼 타임의 톱니가 자전을 시작한다
푸드덕, 그의 심장 뛰는 소리
그는 시계가 없다
 
어둠의 재가 숫자판 위로 떨어질 때
부엉이 날개 바스락거리는 소리
눈꺼풀 닫히는 소리
 
어제 밀린 시간은 지금부터 흐르기 시작하고
너의 시차를 들여다본다
수척한 바람 냄새 오고 있었던가
 
그의 시는 정서적 관심의 대상들을 고려한다기보다는 [그의 시에서 사실적인 설명, 즉 실재의 객관적인 처소를 밝히기란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사물들의 실체 건너편 은유의 불꽃들에서 피어오른 이미지에게 훨씬 더 짙게 반해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상 시인의 손끝에 닿은 사물 그것들은 그러니까 어떤 윤곽 없이도 붉은색 검은색의 어두운 심연을 뚫고 와서 그의 몸에 달라붙은 욕망인 듯이 보이도 한다. 한 번 생각해보라. 시인이 지금 접촉하고 있는 상상력에는 어떤 불씨가 있어서 아직도 설명 불가능한 황홀이 줄기차게 따라붙는가를. 정신력의 바탕으로 본다면, 시를 신뢰하는 자로서의 그 자신 원초적인 기호嗜好는 사물의 광채를 벗어던진 채 어느 순간 불확실한 환시幻視의 흔적들만 찾아 나선 관행은 아닐는지 [그것들은, 또 불길한 은유의 덫일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실체를 외면해버릴 때는 [실체가 정신의 먹이일진대] 길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와 심중에 박힌 욕망의 간격이 단 한 순간에 뒤집혀 사소한 경험인 듯 연기인 듯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상진의 시는 공기처럼 활달하다. 그의 시의 문맥에는 막연한 갈망이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태허太虛와 품물의 간격을 하늘과 땅의 비장물秘藏物 [즉, 비감각적인 초월의지]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관찰 때문이리라. 그것은 또 물질에 대한 경이를 뛰어넘은 다음 품물 내면 깊은 곳에 불빛의 그림자를 남겨둔 허구적인 상수常數 [즉, 굴절률屈折率]들임에 분명하다. 그와 같은 굴절률에 대한 위상진의 탐구는 여전히 그동안 애써 형상화해온 시적 진실 [즉, 물이면 “물속”ㅡ불이면 “불빛”이 되는 항구적인 가치]들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는 발광열을 내뿜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위상진 시의 태허太虛는 텅 빈 것들에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천상의 미묘한 구름냄새 [혹은, 삶에 대한 신빙성]와 감미롭게 접촉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우주는 넓지 않고, 인체의 맥박과도 같은 공기욕空氣浴을 띤 문맥으로 물결친다. 그리하여 시인은 완전히 가변적인 실체, 곧 빛의 내면화 분비물分泌物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정령들과 나란히 눈을 맞춘다. 이러한 시의 문양을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시인의 조견표早見表에 들어온 물체들의 허황虛荒인지 혹은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바 욕망의 흠집인지 (나로서는) 분간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미 위상진의 시야에 들어온 사물들의 표정은 덧없는 침묵과 훨씬 많이 제휴한 것들이었다.
 
3
시인은 다시 다음과 같은 시 「온전한 식사」 (앞부분)를 쓴다;
 
저녁은 별이 타다 남은 재가 떨어지고 있었지
술잔 사이 은닉되어 있는
말의 껍질이 벗겨지는 동안
별자리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았지
 
저기 녹색 보드 광고판에 잠에서 덜 깨어난 겨울은 무게를 털어 내기 시작했나 보다 그때는 맞고 지금도 맞는 그늘진 늑골 사이 품고 있는 온도의 차이, 넘어가지 않는 마지막 페이지는 안대를 하고 있었지
 
초벌을 떠낸 도시를 빠져나가는 불빛
다시 돌아오기 위한
출발점과 도착점은
왜 매번 뒤늦게 알게 되는 건지
 
새가 돌아오지 않는 나뭇가지
잿빛 북향의 바람이 흥정되는 동안
술병은 어린 버섯처럼 순하기만 한데
 
천진한 직관을 제외하고 나면 시를 통해 드러나는 객관적인 인식이란 실은 그리 믿을 것이 못된다. 사유의 매개물은 지식이 아닌 잉걸불처럼 타오르는 원초적 본능이 아니었던가. 어둠은 상징이 아니다. 어둠속 “별자리”는 비단 베개와도 같은 것. 시인의 사색을 넘은 파멸에 대한 도취와도 같은 죽음 [즉, “잿빛 북향”]은 세상의 온갖 물정을 단박에 무無로 돌려놓는 범汎우주적인 상처와 내통한 것. 그렇더라도 죽음은 부드럽게 말한다; “새가 돌아오지 않는 나뭇가지 / 잿빛 북향의 바람이 흥정되는 동안 / 술병은 어린 버섯처럼 순하기만 한데”. 기독교의 생각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서 죽는다. 이때, 시인을 놀라게 한 것은 죽음의 불합리한 취약점을 홀연 뛰어넘는 초월의 정기精氣 때문이다. 살아있는 자의 욕망은 신체에 붙어 있지만, 죽은 자의 죽음은 정령들 혹은 사랑처럼 물상物象의 피륙을 찢고 어떤 경우로든 정서적인 초월의 정면과 맞물려 움직인다 [즉, 빛의 점멸點滅을 보라; “저녁은 별이 타다 남은 재가 떨어지고 있었지 / 술잔 사이 은닉되어 있는 / 말의 껍질이 벗겨지는 동안 / 별자리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았지”]. 물론 죽음이 삶에 좀 더 확연히 유연하게 뒤섞이는 모습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안다 [즉, “초벌을 떠낸 도시를 빠져나가는 불빛 / 디시 돌아오기 위한 / 출발점과 도착점은 / 왜 매번 뒤늦게 알게 되는 건지”]. 불꽃이 꺼진 다음 시인은 이곳에서 우주 회향廻向의 복사열輻射熱을 본다. 시인의 의식에 파고 들어온 빛은 다름 아닌 사랑의 때늦은 [즉, “왜 매번 뒤늦게 알게 되는 건지”] 침전물이었던 것. 위상진 시의 내인內因의 자장磁場은 저와 같은 불꽃 “온도”의 실재화로 기어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4
위상진은 또 무엇을 보고 있을까. 시인의 몸 가까이에는 영매靈媒가 있다. 낮은 곳에 있어도 빛은 수직이다. 영매가 움직이는 방향은 언제나 불꽃과 같은 수직이다. 보자. 모든 존재는 고고한 것. 식물들까지도 어쩌다가 사람 몸 가까이 있게 되면 그것들은 사물의 경계를 건너가서 생각지도 않게 귀기鬼氣 [즉, 영매靈媒]를 띠게 된다. 이는 분명 혼의 엄중함일 것이다. 그는 번뇌를 본다 (「숨어 있는 계단」; “태양은 눈을 감고 있었지”). 아상我相의 주체성이 상실될 때는 번뇌가 찾아온다 (『금강경金剛經』). 이는, 사람의 마음이 객관적 세계인 내 자신 건너편 저쪽 색계色界를 지나치게 탐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실상 아상我相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 그렇다. 존재하지 않은 아상我相이 엉뚱하게도 환상의 세계를 넘겨다보다가는 번뇌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번뇌를 벗어나려면, 청명한 자는 주관과 객관의 대칭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주관 [즉, 아상我相]ㅡ객관 [즉, 인상人相]의 대칭적 범주에 사로잡힌 생각으로 말미암아 번뇌와 욕망의 가시덤불을 밟고 있었던 것. 그러나 주관과 객관 두 쪽을 다 부정해버리면 [즉, 이중부정二重否定] 누구든 편안해진다. 시간에는 현시점이 없다. 현재는 물줄기처럼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흐른다. 서둘러 말하건대, 미래 속에 과거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새는 어디에 있는가.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가. 번뇌의 문제를 끌어안은 시인의 몸은 요컨대 새처럼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시인은 조작적이고도 조야한 언어의 매듭을 풀고 역리적逆理的인 사고체계의 감응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위상진은 또 절벽을 본다 (「완고한 그림자」; “빈 벽에 남아 있는 대못의 그림자 / 완고한 한 점의 그늘인”). 이럴 때는 안쪽다리 대퇴골 근처에다가 힘을 잔뜩 뿌려주어도 좋으리라. 이때쯤 그는 높은 산 정상으로 올라가 저쪽 메마른 얼음덩어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먼지는 작동한다」; “남극의 쌓인 눈은 가만가만 나이테를 문 채 녹지 않는 발의 감각이었지 신들이 밟고 올라간 육각형의 층위는 고집으로 빛나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 다만 벙긋거릴 뿐인”). 거기 서서 그는 혼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점을 곱씹어 판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그는 돌은 돌인 것을 깨닫고, 풀은 풀인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겸애兼愛의 천덕天德 [묵자墨子 BC 468년경~BC 376년경]을 깨달은 자는 어떤 낭떠러지 앞에서라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연을 쳐다보려는 자의 혼미를 염두에 두고 보면, 위상진 시에 담긴 슬픔의 벽은 엷다. 왜 그렇게 보일까. 그는 이 땅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바 시인으로 살아가는 길이 얼마만큼 험하다는 것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또 거울을 본다 (「거울의 이면」;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율 /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유전자 / 아무도 모르게 잠겨 있는 너의 / 배후를 보는 일이어서 [···] 만족할 줄 모르는 끝의 시작이어서 // 너는 가끔 나를 숨어서 본다”). 시인의 거울은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나르시스의 반추反芻가 아니라, 세계이해의 여러 이미지들과 겹치는 존재의 변형이었던 것. 그의 거울 속에 들어있는 풍경은 사물의 폭넓은 현상 [즉, 가역성可逆性]이면서도 여러 겹 이미지들로부터 갑자기 얻어낸 매혹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바라보는 물체들은 당장 사실의 숭고한 가치를 대부분 숨긴 것들이었다. 자연은 자연의 표면 그대로 아름다운 가치의 소여所與라는 점을 직시해보라. 그렇다면 시인이 쳐다보는 착시의 색깔은 어떤 기하학적인 도면을 그리고 있는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 송이 꽃을 바라보면서도 그 꽃의 수줍은 형용보다는 꽃이 꽃이 아니라는 눈물겨운 억측을 달리 품고 있음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정오의 아이리스」; “꽃을 그린 줄 알았는데 / 태양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그리고 말았구나 / 누설되지 않은 아는 비밀 / 노란 가루를 입술에 묻힌 채 뜨끈거리는 / 욕망의 다른 이름 / 구겨지지 않는 얇은 꽃술”). 그는, 물론 꽃의 아름다운 형식을 결정하는 장본인이 바로 꽃 자체에 있다는 점을 모를 리는 없다. 본질적으로 말하더라도 꽃을 보는 시인은, 꽃 속에는 움직이지 않는 기묘한 꽃들이 가득 차있는 것도 아울러 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꽃”은 “꽃” 다음에는 다시는 “구겨지지 않는 얇은 꽃술”의 극점極點을 제 자신의 품속에 감춰두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시인은 또 거울을 본다. 거울을 보되 그는 거울 속으로 들어온 복합적인 의미작용 [즉, 정신분석학적인 의미규정]보다는 그러한 분장으로서의 융합을 털어낸 백합꽃빛 순수를 먼저 보고 있었던 것. 저와 같은 물기를 품은 꽃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꽃을 쳐다보는 시인은 이제 꽃 뒤에 서있는 평온을 본다. 그는, 꽃의 초상을 그려내는 시인일진대 꽃 앞에 서있는 거울의 복합적인 의미망網을 좀 더 멀찍이 치워놓아도 좋으리라. 거울을 보되 그는 이를테면 거울 속으로 들어온 불의 또 다른 증언을 다시 새롭게 들어야 하리라. 그것은, 내 자신의 의지를 최고선의 목적에 부합되도록 맡겨두는 일이었다 [즉, 칸트 (I,Kant 1724년~1804년)의 『실천이성비판』]. 가령, 사회학적으로 말하더라도 급격한 신분상승은 파멸을 낳는다.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 위상진 시에서 아름다움의 질료를 다루는 시적 표징標徵의 문제로 다시 돌아서보자. 예컨대 그는, 불의 시공時空 속에는 물의 도정道程까지 함께 들어있음을 보고 있었던 것. 불의 도움으로 물은 단맛을 낸다. 그는 또 우주적인 시간의 물방울을 본다 (「천국의 시간」; “사랑을 할 때 가장 빛나는 극락조의 깃털 / 배우와 악기의 입에 / 숨을 불어 넣는 그의 두 손 [···] 눈을 뜬 채 눈물 흘리던 / 밤과 낮의 경계가 지워진 불 꺼진 모니터 / 리골레토의 / 절름거리던 시간을 놓아 버렸지”). 이것은, 색色의 절정일 것이다. 그랬다. 하늘에서는 햇빛이 떨어졌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시인은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 마음의 결함이 물방울과 함께 떨어지는 허공의 파동들이라는 점을 쳐다보면서 그것을 어떻게든 보정補正해 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수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행을 훨씬 가볍게 매만지는 초월적인 감응이 아니었던가. 그만하면 그는, 색色을 탐하지 않아도 행복했을 것이다. 하늘로 솟구치는 물보라가 있었을 테니까. 그의 독창적인 시의 정수精髓를 열고 들어가 보면, 독자는 벌써 시인의 문맥 속에서 물방울로 떨어지는 수직의 낙하가 얼마만큼 큰 울림을 주는지 알게 된다. 인생은 슬픔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인생은 이별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아름다움은 잠들지 않는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그가 / 떨어진다는 말을 했다 /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 시간과 몹시 사이가 나쁜, 그는 / 슬픔을 키워 가는 인칭이었어 / 사다리를 치워 버린 불 꺼진 창은 / 인사도 없이 떨어져 내렸지” (「숨어 있는 계단」). 인생전반에 드리운 추억의 문양紋樣들. 물질의 신탁들. 그의 시 속에 한 겹 두 겹 세 겹으로 남아있는 시간의 공명共鳴들. 햇볕을 머금은 물방울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 자신은 투명한 물방울이었다. 인생은 왜 깊은 것일까. 물방울의 낙차 때문이다. 낙차의 끝은 캄캄한 절벽 [즉, “불 꺼진 창”]인 것. 말 없는 허공. 그렇다면 이 허공의 주제에 위상진은 어떻게 다시 대답하고 있는지를 보자.
 
5
위상진은 그의 시 「염전이 떠 있다」를 이렇게 쓴다;
 
나는 나이 먹어 가고 나는 늙을 줄 몰라
입자 굵은 태양이 바닷물에 꽂히고
맨 처음 하늘을 키워 놓는 바다
 
거대한 산을 품고 있는
물의 씨앗 사그락싸그락 결정체로 엉기는
긴 장화 발소리 들려온다
허공으로 팽창하는
정령들의 말랑한 숨결이었지
 
지친 낮이 저물어 가는 염전
소금 밟히는 소리 길게 끌고 온다
수건으로 태양을 가리고
굴러가는 바퀴 위의 첫 소금
부드러운 바닷물을 밀고 또 밀고
낯선 음악이 오븐에서 타닥, 탁 튀어 오른다
세이렌이 수평선을 몰고 온다
 
사금파리 같은 달을 품고 주머니에
구겨 넣은 구름의 입자
감각해야 하는 관계는
어떤 것과 교환되지 않는다
가래로 밀어내고 밀어낸 음절 위에서
소금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지



이때쯤, 시인은 자신이 쓰고 있는 이미지의 활기참 앞에서 그동안 터놓고 이야기하던 버릇 한 가닥을 철회한 듯이 보인다. “허공”의 속삭임이 그의 시의 속살을 깎아내고 있었던 것. 시인의 “염전”은 이상한 일인데, 바닷가가 아닌 “허공” 중에 떠있었던 것. 시인의 “소금”은 “물의 씨앗” [즉, 존재의 근원]이었으되, 이미 “사금파리 같은 달을 품(은)” “허공”으로 떠도는 “구름의 입자” [즉, 존재의 소멸]였으니까. “소금”을 만드는 주체는 “바닷물”이 아니라, “허공”을 주관하는 “세이렌” [즉, 바다에 사는 정령들]의 숨결이었다. 그의 “소금”은 이미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의 입술로 깨문 삶의 밑간이 아니라, 이 땅위에 살면서 “지친” 욕망의 발뒤꿈치 [즉, “소금 밟히는 소리 길게 끌고 온다”]에 밟힌 채 그렇게 “푸르게 빛나(는)” 보폭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불”과 “물”의 결연結緣들을 주목해온 그의 어법으로 본다면, 이는 뒤늦은 후렴일는지도 모른다. 물질의 속과 겉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때부터는 시인의 시각視覺은 회화적 [혹은, 공기적] 상상력의 볼륨 volume을 더욱 더 낮은 데로 낮추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나이테처럼 번지는 허공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 허공이란, 실체적 세계 [즉, 오브제]를 제거한 공간 [혹은, 하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적 진술의 서열로 본다면, 실체들 [즉, “감각해야 하는 관계”]은 시의 시원始元을 훨씬 분명하게 다져놓는 의식의 대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현실세계의 내체內體 깊숙이 파고드는 “허공”이라는 변증법적 직관을 빌어 대지 [즉, “바다”] 위에 한껏 “하늘을 키워 놓(고)” 있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지친 낮이 저물어 가는 염전 / 소금 밟히는 소리 길게 끌고 온다 / 수건으로 태양을 가리고 / 굴러 가는 바퀴 위의 첫 소금 / 부드러운 바닷물을 밀고 또 밀고 / 낯선 음악이 오븐에서 타닥, 탁 튀어 오른다 / 세이렌이 수평선을 몰고 온다”. 시인의 “소금”은, 그러므로 “염전”에 붙어있지 않았다. 시인의 “소금”은, 이제 “허공으로 팽창하는” 지속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소금”의 시간은, 생명운동의 회귀回歸 [즉, ䷾ 기제旣濟 (“물”)가 ䷿ 미제未濟 (“불”)로 바뀌게 되는 영원회귀의 순환. 『주역周易』]로 높이 고양되었다. 위상진의 언어는 잿불처럼 정교한 만큼 또 동시에 정밀靜謐했다. 정밀만큼 고요한 순환巡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요함이 말하는 입술을 만져보라. 내 자신이 내가 되는 근본은 여기 있었던 것. 내가 나를 열어놓게 되면 나는 크나큰 대인 [즉, 범아梵我]이 되지만, 내가 나를 내 몸 안에 가두어버리면 나는 소인 [즉, 졸부拙夫]이 된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즉, 개開], 그렇게 문이 닫히는 [즉, 폐閉] 영혼의 소리였던 것. 그의 시에 달라붙은 영혼의 균형은 저와 같은 형상의 체액體液으로 무르녹고 있었다는 말이다. 고요한 마음은 무정형인 것 같지만, 시인 자신의 얼토당토않은 꿈의 점토를 잘 문질러보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절” 속에 영원회귀의 불꽃이 묻어있었던 것. 저것보라. 사물을 시화詩化하는 데 따른 물질의 원초적인 감각은 낮은 숨결 [즉, “정령들의 말랑한 숨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성적인 “달”의 온도. 심연을 바라보는 위상진 시의 실체론적 효율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 위상진이 보여주는 시의 기원祈願은 “허공”이라는 불급不及의 면전을 가벼이 제 자리로 돌려놓은 약속이었던 것. 그것은 여태껏 “허공”을 업신여겨온 보사적補瀉的 치유로서의 위안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시의 구조를, 그렇다면 우리는 달리 상상력의 형이상학 [즉, 시는 무의식의 표상들로 변주된다]으로 명명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도즈와이유 Robert Desoille 1890년~1966년). 물체 (x)는 다른 물체(x)와 통합되도록 (x²) 짜여 있었으며, 그 반대쪽 대칭의 허공 (~x) 역시도 또 다른 허공 (~x)과 함께 어울리도록 (~x²) 구분되어 있었던 것. 이는, 말하자면 2차원적 사유기반의 의장意匠이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공자가 말하는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논어論語』, 「위정爲政」편] 인지기능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허공은 물체의 상위적 대립으로 갈라진 상형相形이 아니라, 정숙하게 본다면 사상事象의 조화를 확립하는 황홀이라 할 수 있다 [노자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위지현덕謂之玄德의 자유자재에서 받는 ‘위무위爲無爲’의 축복일 것이다, 『노자老子』 3장]. 그만큼, 위상진의 시는 지금까지 정신의 자기완성을 꾀하는 동요動搖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과 환상의 대립각으로부터 별반 면박을 받지 않은 위상진의 시는, 우리들 일상 안으로 떠도는 심리현상의 일반에까지 눈을 맞추면서 더 큰 역동성을 띠고 있었던 것. 이는 그의 시의 음색音色에 가라앉은 생생한 활기 [즉, “물속”과 “불빛”의 혼합물]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는 위상진의 시를 침착하게 음미할수록 더 깊은 신비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토끼는 뿔이 없지만, 그는 토각兎角이란 말을 감춰둠으로써 만상萬象의 허虛와 실實을 변별해냈던 것이었다. 혹은 모순어법도 또 다른 논리라는 점에서 [가령, 기독교의 인지영역인 패러독스 paradox], 그의 시는 어느덧 한층 더 긍정적인 가치를 창출해냈던 것; “내 이름은 스파이 / 내 이름은 바람 / 여러 개 이름으로 자물쇠를 채워 두었지” (「아주 심한 자물쇠」). 현존 [혹은, 허공]의 가치는 깨질 리 만무했다. 시인은 또한 자기 자신의 최면술催眠術 속에 혼자 고립될 리도 만무했다. 그의 낱말은 어언 공기였으므로.
 
 


<예술가, 2021년 봄호 통권 44호>
[출처] 안수환시인-만물의 공허를 받아들이는 시간-위상진의 시집 『시계수리공은 시간을 보지 않는다』|작성자 나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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