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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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의 가족사 찾기(3)
2010년 08월 17일 09시 17분  조회:5704  추천:40  작성자: 김광림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광림의 버클리통신16

                       

 


                      
나의 가족사 찾기(3)

 

  140년의 가족사

   나는 자신의 가족사를 찾으면서, 수선 제일 힘을 넣은 것이 1869년경에 조선 함경도 회령에서 두망간을 건너 간도로 이주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아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무엇이었고, 두만강을 건너기 전 회령에서 무엇을 했으며, 가족관계는 어떠했으며, 그들의 선조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함경도지역의 김해김씨 족보를 거의다 찾아보고, 회령과 간도지역의 향토사를 많이 찾아봤지만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구한말정부의 北墾島視察使 李範允이 1902년에 北間島를 시찰하면서 기록한 호구조사책 52책 속에서 당시 생존해있던 나의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를 찾아내고 가족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책들은 현재 행방불명이 되어있다. 또 중화민국, 만주국 시기에 작성된 간도지역의 호구부에 혹시나 나의 할아버지대의 가족관계가 기록되어 있을 수 있으나 이런 호구부들이 확실히 존재하는지 똑똑치 않다. 조선의 함경도 회령에 혹시나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호적이 남아있지 않는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로서는 찾을 방법이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가난에 찌들리다 함경도 지역의 대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거너 간도로 이주한 평범한 백성의 기록이 그리 쉽게 나오겠는가하는 의문도 든다.

그리하여 족보나 향토사를 통하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전의 가족사를 찾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고, 나의 가족에서 전해내려오는 구전, 자료, 사진 등을 통하여 두만강을 건넌 뒤의 약 140년간의 나의 가족사가 어떠했으며, 한 가족사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생각해보련다.

나의 형제들과 일가친척에 남아 있는 가족사에 관계되는 자료, 사진들을 모으면서 나는 또 한번 비애를 느끼게 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나의 집과 친척집들에 액틀에 넣어 벽에 걸어놓은 낡은 사진들이 꽤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낡은 사진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다. 중국의 국공내전이나 조선전쟁에서 받은 메달이나,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받은 표창장같은 것이 집안에 적지 않게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거의 다 없어졌다. 

1980년대부터 중국 조선족사회가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동북지역에서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주하면서 옛적의 오붓하던 가족공동체가 급격하게 해체되고 가족들이 갖고 있던 낡은 사진이나 자료들이 잘 보관되지 못하고 대부분 소실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대혁명시기에 소실되는 조선족의 가족사 자료보다 현재 소실되고 있는 자료가 더 많은 것 같다. 거기다가 조선족 사회의 세태가 낡은 것을 되도록 버리고 사망한 가족의 유골도 남지고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세대

나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 함경도 회령군 鰲山洞에서 살고 있었는데, 1869년 경에 조선 함경도 六鎭지역의 대기근을 피하여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달라자(大砬子)라고 불리우는 오늘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智信에 정착했다고 한다.  1869년이면 기사(己巳)흉년때인데 이 시기에 함경도 六鎭지역에는 역사상 보기 드문 대기근이 발생하여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지역에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해이다.

  1869년경에 고조할아버지가 어린아이인 증조할아버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가문의 구전으로는 가족관계도 확실치 않다. 아마 고조할아버지는 그 당시 중년이고 대기근으로 회령에서 가족이 대부분 사망하여 살아남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넌 것으로 추정된다. 달라자촌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데 그 당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농사밖에 더 있었겠는가.

증조할아버지는 달라자촌에서 회령의 같은 동네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배씨성의 여인과 결혼하여 가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1945년 광복직후까지 생존했고, 오래동안 과부로 있었다는 것을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비교적 젋은 나이에 달라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1869년경에 두만강을 건너서부터  1885년에  청나라가 간도지역에 越墾局을 설치하여 조선이민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까지 초기의 조선이민들은 불법월경자의 취급을 받았고, 조선에 쫗겨가거나 숨어서 사는 극히 불안한 생활을 해왔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고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하여 고향인 회령에 매장했거나 또는 달라자에서 회령으로 귀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달라자에서 사망한 것 같다.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대에는 살길을 찾아 조선에서 간도로 건너왔으나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들의 법적인 지위도 극히 불안정했다고 생각된다.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회령에 두었던 것을 보면 중국에서 정착하지 않았다는 것이 방증된다. 

 

  할아버지 세대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나의 할아버지이고, 작은 아들이 나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1887년경에 달라자에서 태어났고, 작은 할아버지는 1894년에 달라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가문의 구전에 의하면 3대가 독자라고 하는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외에 중국에 다른 친척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 구전이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는 20세기 초기에 달라자를 떠나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
주 왕청현 백초구진 鳳林村(洞)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왜서 고향인 달라자를 떠나서 봉림촌으로 이주했는지 이유가 똑똑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광복전의 간도지역의 조선인 농민들의 생활상으로 보아 소작문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즉 본인들이 소유한 땅은 없고 남의 땅을 소작짓는 농사군들이니 소작받기 쉽고, 소작료가 낮은 땅을 찾게 되고, 그러다니 새로 개척되는 마을을 찾아서 왕청현쪽으로 이주한 것 같다. 봉림촌에서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형제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자식들도 대부분 거기서 나서 자라다가 1930년대 후반에 형제가 갈라져 할아버지 가족이 왕청현 西崴子村으로 이사하고, 작은 할아버지 가족이 왕청현  동광진 新興村으로 이사했다. 이들 형제가 또 다시 이사한 이유도 아마 땅의 소작과 관계가 있은 것 같다.

   할머니는 고향이 달라자촌 부근에 있는 七道溝 (오늘의 용정시 元東村)라고 하는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이 대체 간도의 초기이민들인 것을 보면 할머니네 가족도  조선의 함경도 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간도로 건너온 것 같다.

   나의 할아버지 형제는 구한말에서부터 조선이 나라가 망하고 일제지배를 거쳐 광복을 맞는 시대, 그리고 중국의 청나라말기, 민국, 만주국을 거쳐 해방을 맞는 시대를 살아왔다. 평범한 백성의 삶이었지만 이런 시대상을 그들의 삶에서 읽어 낼수 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돈벌이로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에 가서 목수일을 몇년간 했고, 일설에 의하면 연해주에서 미국땅인 알라스카까지 건너가서  노무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익힌 러시아가 예상치 않게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1945년에 소련군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주하면서 러시아통역이 필요했는지 소련군 장교가 가끔 찾아와서 통역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재의 도문시 석현진 永昌村에서 일본군이 도망가면서 남긴 군복을 입고다니던 촌민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일본군으로 오해받아 위험에 처했을 때 할아버지가 통역을 잘 해서 무사히 풀려났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48년에  왕청현 西崴子村에서 밭일을 하다가 일본군이 페기한 세균무기에 감염되어 불시에 세상을 떠났다. 

  작은 할아버지는 1970년에 왕청현 동광진 新興村에서 사망했는데 광복전에는 소작농이었고,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땅을 분배받고, 큰아들이 1946년에 왕청현 廟嶺에서 왕청현민주동맹의 자치군으로서 토비와 싸우다가 희생하여 열사가족 칭호를 받고 본인도 노동모범으로서 정부에서 표창도 받은 분이었다.

   나의 가족은 할아버지 시대에는 기본상 중국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본인들이 간도에서 태어나서 간도에서 사망했고, 자식들도 다 간도에서 자랐던 것이다. 회령에 매장한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후에 왕청현으로 이장해온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정착할 의사가 강했다고 보여진다. 그래도 조선측과의 연계는 끈끈했던 것 같고, 그분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인 회령에는 친척도 남아있어 왕래를 했던 것 같다. 나의 나이 든 외삼촌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광복전에는 간도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호적이 조선으로 되여있어 호적증명은 조선의 원적지에 가서 받아왔다고 한다. 광복전에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 가족의 호적이 회령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 세대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일곱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큰 아들이 1903년에 처음 정착지인 달라자촌에서 태어난 외에 다른 자녀들은 모두 왕청현 봉림촌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형제들은  조선의 구한말에서부터 일제지배를 거쳐 광복을 맞고 또 남북이 분단되는 시기, 중국의 청나라 말기부터 민국, 만주국, 국공내전을 거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시대를 살아왔고, 특히 중국의 국공내전과 조선전쟁에는 여러 형제들이 참전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가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였고, 전쟁후에는 형제들이 중국과 조선에 갈라져사는 이른바 이산가족의 삶을 살아왔다.  

   나의 큰아버지는 왕청현 鳳林村에서 살던 젊은 시절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의 반일유격대에 참가했으며 겨울에 사고로 한쪽 다리가 절단되면서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도 젋은 시절에 조선인들의 반일유격대의 식량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1943년에 만주국의 동원하에 개척민으로 흑룡강성 密山縣으로 이주하
였다가 거기서 광복을 맞고 1948년에 부모가 있는 왕청현 西崴子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흑룡강성 密山縣에서 광복을 맞은 후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운동에 가담하고 국민당계의 토비들과의 싸움에서 연락원을 하다가 위험한 고비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노동모범으로 선발된 적도 있었다.

일본이 망하고 광복을 맞이하면서 나의 아버지 형제들은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선 나의 작은 할아버지의 맏아들이 1945년에 왕청현민주동맹의 자치군에 참가하였는데 1946년 에 왕청현 廟嶺에서 있은 국민당계 토비들과의 싸움에서 희생했다. 나는 처음에 민주동맹과 자치군이란 어떤 성격의 단체인지 잘 알지 못했는데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이 단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에 중국 동북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이 패망한후 연변지역에서는 급속하게 공산당 계열의 조직이 형성되었고, 1945년 10월에 연변의 조선인 공산당원을 중심으로 東北延邊人民民主大同盟이 성립되고 연변지역의 각현에 동맹조직과 자치군이 설립되었다. 東北延邊人民民主大同盟은 연변지역에 중국공산당의 지방권력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단체의 주요멤버들은 1946년에서 47년 사이에 정풍을 통하여 지방정권에서 배제되고 해방후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설립에도 그들이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서 이 단체의 주요멤버들이 정풍을 당하고 지방정권에서 배제됐는지 지금까지의 조선족 역사관련의 문헌들에서는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자기의 가족사 찾기가 조선족 역사의 가려진 그늘을 보게 된셈이다.

   나의 가족에서는 1946년부터 48년 사이에 삼촌, 오촌삼촌 (작은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큰누님이 조선의용군, 동북민주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다가 1949년부터 1950년 사이에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조선전쟁에 참가하였고, 1953년에 조선전쟁이 끊난후 삼촌과 오촌삼촌은 조선인민군 장교로 조선에 그대로 남고, 큰누님만 중국으로 돌아왔다.

   나의 어머니의 선조는 조선 함경도 富寧郡에서 살았는데 외할머니네 가족은 간도에 비교적 일찌히 이주하여 현재의 용정시 개산툰진 子洞村에서 살았고, 외할아버지는 富寧郡에서 함경도 甲山을 거쳐 1911년경에 현재의 도문시 월청진 楡基村의 친척집을 찾아왔다가 거기서 외할머니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간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나의 가족사를 찾아보면,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1967년경에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했고, 할머니네도 함경도에서 비교적 일찍히 간도로 이주한 집안이고, 어머니네 집안도 함경도에서 간도로 이주한 집안이다. 연변에서 오래 산 조선족의 가족사를 보면, 대체 함경도 지역에서 이민온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형제들중에서도 둘째백부가 국공내전에 참가하였고, 그 공로를 이전받아 해방후에 농민으로부터 현재의 도문시 석현진에 있는 제지공장에 노동자로 배치받았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가족사를 찾아보면서 아직도 잘 모르거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일제의 지배를 직접 경험하던 세대인데 1940년대에 조선에서 실시된 창시개명이 우리 가족에도 적용된 적이 있는지 전혀 들은바가 없다. 조선에서는 강제적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이 그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어떻게 실시되였는가 하는 점이 똑똑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 하나, 나의 가족에서는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했다거나 일본군에 참가하여 전쟁에 나갔다는 얘기가 전혀 들리지 않느다. 이것도 만주국의 조선인들사이에서는 적은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혹시 내가 이 시대 역사를 너무 몰라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광복을 맞고나서 동북지역에서 토지개혁운동이 일어나고 국공내전이 발생하면서 나의 가족에서는 삼촌과 오촌 삼촌2명, 큰 누님까지하여 4명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그중 1명이 전사), 조선전쟁시에는 3명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들이 어떤 동기로 전쟁에 참가하였고, 이들이 이 전쟁에 대해여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가족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정작 알고 싶을 때에는 당사자들이 다 고인이 되어버렸다.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국공내전시기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약 6만3천명이 중국공산당측의 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고, 전사자가 3천5백여명 된다고 한다.

동북의 조선인들이 아직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 확정되기 이전이고, 조선족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기에 조선인의로서의 의식이 농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중국의 혁명에 참가할 수 있었는지, 이부분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판에 박힌 설명보다 좀 더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나의 가족에서는 조선전쟁이 일어나면서 아버지 형제들이 중국과 조선에 나뉘어져 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산가족으로서의 삶은 살아왔던 것이다. 또 나의 아버지 세대까지는 조선식의 생활방식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일상생활에서도 조선식의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형제들 세대

   나의 부모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우리 형제들 세대의 특징은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1958년의 대약진운동,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등 중국의 굵직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분분 직접 참여하였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나의 4명의 형제들이 홍위병으로 북경에 가서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대 중국이 소련과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사이가 좋았을 때에는 나이든 형제들은 소련의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고, 외국어도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

   나의 형제들 세대에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에 중국정부가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다수의 형제들이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했었는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도시에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서 이제는 농촌에 남아서 농업에 종사하는 형제가 하나도 안남았다. 나의 사촌, 외사촌 형제들까지 시야에 넣으면,  1980년대에 우리 가족이 급격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 이전에 다수가 농촌에 살던 형제들이 도시로 이주하였고, 직업이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고, 이제는 고향인 연변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으로 나갔거나, 특히는 한국에 나가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형제들 세대는 중국의 시회주의 체제하에서 성장하면서 사회주의 의식형태 교육을 많이 받아왔고, 부모들 세대에 비하면 중국화가 진척되었다. 그러나 조선식의 생활방식과 조선민족으로서의 의식은 강하게 남아있었고, 형제들 중에 조선민족외의 이민족과 통혼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과의 교류가 급속하게 증가되는 추세하에서 연변에 사는 형제들은 집집마다 한국 TV나 연예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있고, 민족의식은 오히려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자녀들의 세대

 나의 형제들의 자식의 세대에 이르러 제일 큰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부모들의 고향인 연변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다. 내가 일본에 유학하고 정착한 관계로 조카들의 다수가 일본에 나가게 되고, 또는 직업을 찾아 중국의 연해지역에 나가 있다. 조카들 가운데 연변에 남아있는 것은 대학교에 다니는 조카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나의 사촌, 외사촌 형제들 자식들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다들 일자리를 찾거나, 보다 좋은 생활을 추구하여 중국의 연해지역이나 해외로 나가 있다. 이러다니 고향땅인 연변에는 나이든 형제들만 남게 되어, 우리 가족의 경우만 보아도 진짜 공동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추세속에서 나의 자녀들 세대에는 과연 중국조선족 공동체가 제대로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기능할 지 의문이 생긴다. 나의 형제들 세대까지는 이민족과의 통혼은 전혀 없었는데 자녀들 세대부터는 하나 둘씩 이민족과의 통혼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연변땅에 모여서 옛적처럼 친척들이 오손도손 모여서 살 가능성도 거의 없어보인다.

   고조할아버지가 기막힌 대기근을 피하여 어린아들인 증조할아버지의 손목을 끌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와서 쫓겨다니고 숨어지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할아버지대에는 소작농으로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어렵게 이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 아버지대에는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 땅의 주인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정착한 땅을 겨우 몇세의 후손에 이르러 너무나 손쉽게 떠나버린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2010년8월13일)

 

*그 사이 제 어설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과 미안을 표시합니다. 제가 여기서 공부와 연구로 바쁘게 지내면서 원고들을 빠르게 올리지 못하여 실망을 끼쳐드렸습니다. 저는 7월말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보스턴에 옮겨와서 미국에서 2년째에는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체류하고 있습니다. 그런관계로 다음기 연재부터는 <버클리통신>에서 <보스턴통신>으로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은 미국의 한국어신문에도 연재하는 관계로 한국의 표기방식에 맞추어 썼는데 부디 양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 광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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