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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1)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1)
조국이면서 외국같은 중국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현재도 중국국적을 소유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20여년(일본에서 21년, 미국에서 2년) 거주하면서 일상생활에서 중국이 거의 외국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본인스스로 중국과 멀어지려는 것이 아니여도 생활환경이 중국과 떨어져있으니 자연히 중국실정에 어두워지고 가끔씩 귀국하여도 어떤 때는 오히려 외국에 온 것 같은 당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필경은 중국이 조국이고 형제와 친척들이 다 거기서 살기에 왕래가 끊어질 수는 없고 중국이 나한테 완전한 외국일 수도 없다. 그러다니 나의 의식속에서는 중국이 조국이면서도 외국같은 그런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나는 2009년 7월과 8월 사이에 학술회의차 중국에 가서 곤명, 북경, 연변에서 한달간 체류하였다. 남부의 도시인 곤명, 수도인 북경, 동북쪽 변방인 연변을 돌면서 변화해가는 오늘의 중국의 모습을 많이 관찰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미국에 왔다. 이 글에서는 그때 중국에서 보고 느낀 점, 일본에서 오래동안 관찰해본 중국의 변화, 그리고 미국에 와서 다시 되돌아보는 중국의 모습을 가미하면서 오늘의 중국의 실상에 접근해보려 한다.
곤명에서 열린 국제인류학・민족학대회
2009년7월27일, 나는 일본 니가타공항에서 대한항공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가서 거기서 다시 대한항공의 비행기를 바꾸어타고 중국의 남부도시인 곤명(昆明)으로 갔다. 내가 곤명을 방문한 것은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 제16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는 인류학과 민족학 분야의 최대의 국제학술조직으로 5년에 한번씩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중국에서는 2008년에 개최하기로 예정되었다가 그 해 3월에 티벳에서 대규모 소동이 발생하면서 연기됐다가 2009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운남성이 중국에서 소수민족이 제일 많은 성이고 민족관계가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라는 점이 곤명시가 이 국제대회의 개최지로 정해진 주요 이유인 것 같았다.
이 대회는 중국측에서 중국인류학・민족학연구회, 운남대학교, 운남민족대학교가 공동주최를 하고 중앙정부의 민족사무부서와 운남성정부가 전폭지원을 하면서 개최되었는데 참가하면서 놀라운 것은 주최측의 계획이 너무나 방대한 점이었다. 참가자 4000여명을 예상하고 200개의 분과회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국제학술회의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작 참가해보니 결석자가 속출하고 분과회도 200개가 다 제대로 열렸는지 의문스러웠다. 5일간의 학술대회기간에 중국과 외국의 저명학자들의 강연이 다수 예정됐는데 정작 기대를 품고 들으러가니 부득이한 사정으로 강연자가 올 수 없다면서 직전에 취소되는 사례가 여러번 있었다. 그러면 왜서 겉모습은 방대하지만 내실이 부족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규모가 좀 작더라도 알차게 학술회의를 했었으면 좋았겠다. 곤명에서학술회의를 마치고나서 연변에 가서 두차례의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그 때도 발표예정자들이 직전에 참가를 취소하는 혼동이 적지 않았다. 일본과 미국에서 학술회의에 참가해보면 특별한 사연이 없는한 발표예정자가 참가를 취소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미국에서 대학교 연구소에 있다보면 여기서는 한학기에 한번씩 학술회의 일정을 학기초에 미리 공개하는데 수많은 학술발표가 일정대로 진행되고 취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회의 내실을 다져가는 면에서는 아직도 중국과 선진국들과의 차이를 크게 느끼게 된다.
이 대회가 규모가 큰 국제회의이었기에 운남성정부가 위신을 걸고 성공을 후원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곤명시내에는 마치 올림픽이라도 개최하듯이 이 대회를 홍보하는 선전물이 많이 보이고, 대회기간중에는 참가자들이 아이디카드를 보여주면 공공교통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고, 안내를 전담하는 경찰이 시내각지에 배치됐다. 대회장으로 사용된 운남대학교 캠퍼스에는 각 출입구마다 경찰이 배치되어 신분증을 체크하고 회의장에 출입할 때 짐검사를 하면서 안전대책을 철저하게 강구했다. 내가 참가한 ‘human migration and diaspora’ 분과회에서도 7월30일에 회의를 마치고 주변에 있는 스탭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사복한 경찰이었다. 대회가 규모가 큰데다가 민족학이라는 주제와 관련있고, 중국 민족관계의 안정성을 어필하려는 의도에 2008년과 2009년에 티벳과 신강에서 민족문제로 소동이 일어나면서 보통학술회의와 달리 특히 안전대책에 신경을 쓰는 회의가 됐다.
대회기간에는 곤명주변의 소수민족촌, 곤명민족박물관, 곤명민족원(園) 투어도 개최되어 주최자측에서 중국의 안정된 민족관계를 보여주려는 고심을 엿볼수 있었다. 회의참가자들에게 소수민족촌투어가 특히 인기가 있어 예약권이 일찍히 매진되는 바람에 나도 참가하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대회 마지막 날 이 지역의 소수민족복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꽃을 들고 나타나기에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해외에서 참가한 대회주석단 멤버들에게 꽃을 증정하기 위해서였다. 국제학술대회에서 꼭 이런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지, 왜서 소수민족이 이런 행사에 동원돼야 하는지, 이런면에서는 중국 소수민족의 한명인 나로서는 찹잡한 심정이었다.
봄의 도시 곤명의 이모저모
곤명은 중국 남부의 고원지대에 위치해있어 일년 사계절 봄같은 기후로 하여 봄의 도시(春城) 으로 불리우는데 소문그대로 1년중 제일 무더운 계절인 7월말에 방문했는데도 전혀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차로 시내를 달려봐도 건물의 벽에서 에어컨을 찾기가 어려웠다. 여기서는 여름에도 대체 에어컨을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 곤명은 봄의 도시, 꽃의 도시로서 중국에서 유명한데 거리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단이 많았다. 그런데 도시의 명성에 비하면 시내의 건물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고 중국의 도시중에서도 발전이 빠르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운남성은 중국에서 내륙지역으로 분류되고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지역이다. 곤명에서 들으니 운남성 경제에서 담배산업, 약재산업, 소수민족을 주제로 하는 관광산업의 비중이 아주 크다고 한다.
곤명이 중국에서 그렇게 발달된 도시는 아니었지만 시내를 다녀보면 중국경제의 활기띤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특히 인상깊은 것이 하루 24시간 현금을 자동적으로 입출금할 수 있는 ATM가 아주 많아 돈관리가 쉽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은행마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일본이 이런 면에서는 규제가 심해서 그런지 ATM도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못하다. 돈흐름이 원활한만큰 중국의 경제활동이 왕성하다고 볼 수 있다.
곤명을 방문하여 제일 어려운 것이 음식이 잘 소화가 안 되는 것이었다. 중국 출신으로서 중국음식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곤명에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않고 잘 소화가 되지 않아 고생하다가 조선족이 경영하는 한식집을 찾아서 냉면을 먹었더니 그제야 몸이 정상상태로 되돌아왔다. 삼국지에 조조의 수십만 대군이 북방에서 남방으로 진군하다가 수토가 맞지 않아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대패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역시 전혀 다른 수토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곤명에서 학술회의차 5박을 하면서 숙박했던 호텔과 대회장인 운남대학교 캠퍼스 사이를 걸어다녔는데 하나의 역사적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 것인즉 근대중국의 유명한 사관학교인 운남육군강무당(講武堂) 이다. 1909년에 설립된 이 사관학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원수인 주덕(朱德), 엽검영(葉劍英) 등 저명한 군인들을 많이 배출했을 뿐만아니라 조선인민군 차수(次帥)칭호를 받았던 최용건장군, 베트남인민군 총사령관을 지낸 보 응웬 지압장군이 이 사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관계가 있었다 한다. 그러기에 운남육군강무당 안내책자에 삼국의 최고군사지도자가 이 학교에서 나왔다고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었다. 나라가 크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영향력을 지니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곤명 시내 외곽에 중국 제 6대 담수호로 알려져 있는 전지(滇池)가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약 300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빼어났다. 그런데 남조(藍藻)가 너무 생겨 호수물이 짙은 쪽빛으로 물들고 조류(藻類)가 둥둥떠다니는데가 이상한 냄새까지 풍기여 관광지로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지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호수인데 80년대부터 주변에서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척되고 호수를 메우는 개발이 많이 추진되면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전지주변을 살펴보니 공업용 오수가 정화되지 않은채 악취를 풍기면서 방치돼 있는 것이 보였다. 전지는 곤명의 음료수원으로 활용돼왔는데 오염이 심하여 2007년부터 여기 물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한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환경오염의 그늘을 전지에서 목격하게 된 셈이다.
소수민족이 유난히 많은 지역
중국이 다민족국가로서 56개 민족이 있는데 운남성에만 26개 민족이 살고 있어 중국의 민족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중 15개 민족은 주요거주지가 운남성인 민족이다. 내가 참가한 국제인류학・민족학연합회의 국제대회도 이런 배경하에서 곤명에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대회의 여가시간을 타서 운남성의 소수민족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곤명시에는 운남민족박물관이 있는데 소수민족을 특색으로한 박물관으로서 유명하다. 이 박물관에 가보니 이 지역 여러민족의 복장과 장식품, 소수민족언어로 쓰여진 문헌, 생활도구, 예술품들이 아주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소수민족 복장 전시코너를 보니 복장이 다채다양한 것이 마치도 현대의 패션쇼에 내놓는 복장을 전시해놓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중국 소수민족의 복장은 대체로 다채다양하고 장식품을 많이 사용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봐도 패션성이 뛰어난다. 이 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운남성에 왜 소수민족이 많을 까 생각해보왔는데 지형이 복잡하고 기후가 다양하며 역사상 오래동안 중국 중앙정권의 영향력이 그리 미치지 않아 각 민족들이 주류민족에 동화됨이 없이 독자적인 생활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운남민족박물관에서는 운남성 티벳족자치지역에 거주하는 티벳족 라마(活佛)를 만났는데 이 분이 자신이 창작한 탱화(佛畵)를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판매수입은 전액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들의 교육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탱화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이 분이 제자들과 3년에 걸쳐서 제작했다는 넓이 3미터, 길이 1000미터에 가까운 세계최대의 탱화인데 이 탱화를 한번 둘러보면 티벳불교의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국에서는 막연하게 낙후한 지역으로 이해하는 티벳이 불교를 통해서 보면 그 풍부한 정신세계는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급속한 산업화와 물질적 풍요가 우선시되는 오늘의 중국에서 티벳불교는 인간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하나의 등불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됐다.
곤명에는 운남민족박물관과 가까운 곳에 운남민족원(園)이라고 하는 면적이 약 120헥타르에 이르는 대규모의 민족테마파크가 있었다. 여기를 다 둘러보는데 하루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운남성에 살고있는 26개 민족의 마을을 조성하여 주택, 생활도구, 종교시설들을 실물크기와 같게 전시하였기에 운남의 소수민족을 이해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이었다. 여기서는 주로 소수민족이 안내를 하고 민속놀이가 상시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나도 중국 소수민족이면서도 이 민족원을 견학하면서 한가지 중대한 오해를 하였다. 소수민족마을마다 전통주택이고, 소수민족안내자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있기에 아직도 운남성에서는 소수민족들이 저런 식으로 살고 있을 까 했는데 알고보니 이런 일은 민족테마파크에서나 있지 이제는 소수민족도 거의다 현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남 소수민족과의 만남은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석림(石林)에서도 이어졌다. 석림은 국제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관광지인데 이 지역이 운남성 최대의 소수민족인 이족(彝族)의 자치현에 위치해있어 석림관광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대부분 이족과 이족의 다른 갈래라고 하는 사니족들이었다. 평평한 고원지대에 불시에 땅속으로 꺼져들어간 협곡에 나타나는 석림의 자연경관은 더 말할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약 2억5천만년의 장구한 시간을 걸쳐 해저가 솟아오르면서 석회암의 고원을 만들고, 그 위에 화산폭팔에 의하여 쏟아진 현무암이 뒤덮이고, 빗물과 지표수, 지하수가 침식을 거듭해가면서 오늘의 석림이라는 자연걸작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예술가들이 모여서 석회암을 깍아만든들 이렇게 천만가지로 조화를 이룬 경관을 만들어낼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자연의 오묘함에 새삼 감탄했다. 석림을 구경하면서 이족 가이드와 대화를 나누어보니 이들에게도 소수민족으로서의 비애가 있었다. 이족에게는 분명히 자기의 언어와 문자가 있는데 그 언어와 문자가 잘 계승안되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소수자가 제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움은 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이었다.
곤명에서의 5일간은 나에게 운남성의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소수민족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지니는 소중한 가치를 체험하는 여행이었다.
(2010년1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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