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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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5. 서의 마음, 서의 정신
2013년 01월 18일 10시 30분  조회:4015  추천:23  작성자: 김문학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5. 서의 마음, 서의 정신

 

나는 자신이 전통적 문인취미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이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그 안에는 동양적 문인취미의 또 다른 裸身이 드러난다.

연구와 글쓰기는 주업이고 그림그리기와 서예, 글쓰기의 서화의 여기(餘技)로서 즐긴다. 文,書,畵,琴이 조선말기와 식민지 초기, 청말민초(淸末民初) 다이쇼(大正), 쇼오와(昭和) 초기까지의 동양3극 전통적 文人(文化人, 知識人)의 조화를 이룩한 하나의 입체적 세계였다.

내가 자신을 문인취미를 혹애하는 문인이라고 함은 21세기의 포스트모던사회의 하이데클노로지ㆍ디지털의 거세찬 소용돌이 속에서도 육필로 글쓰기를 견지하는 구식의 20세기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서나 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여기로 직접 붓글을 쓰거나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음악 예술적 의미의 琴은 전혀 문외한이나 남들 따라 어울려서 “카라오케”라 칭하는 노래방에서 몇 곡 부르는 것뿐이다.

 

“文人趣味”에 참혹된 나는 20대부터 서화, 고완에 침취하기도 했는데 지금껏 제법 수집한 근대 동아시아 명사문인의 유묵과 문방 4우의 硯ㆍ墨 ㆍ筆ㆍ紙도 수십 점에 이른다.

내 서제를 文學書房, 또는 文學山房이라 하며, 실제로 명사의 한 두점 서화가 걸려있다. 물론 절대다수는 전문 서고가 있어 거기에 보관하고 있다.

서화가 없는 서재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지인이나 특히 문화인의 자택이나 서재를 방문할 때, 먼저 보는 것이 서가와 벽에 서화가 걸려 있나를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

서나 화가 걸려 있지 않은 서재는 노랑자위가 없는 계란같이 보인다. 아니 방초가 없는 공원이며,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으로 보인다.

서가 있는 풍경, 그것은 지성과 지혜와 예수의 별들이 총총히 박혀서 앞 다투어 반짝이는 찬연한 밤하늘의 공간이다. 윤동주가 읊었던 가을밤의 별 하늘이다.

 

소학교 때부터 습자시간과 작문시간이 제일 좋았다. 주판을 치는 산수시간은 별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묵향이 풍기는 먹물을 붓에 듬뿍 찍어서 선지에 글을 박아 쓰는 습지.

먹즙의 청향이 좋아서 나는 지금까지 붓을 쥐고 습지하는 습관을 버리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서에 대해서 스승에게 사사하여 특별히 배운 적은 없다.

지금도 어느 문파(門派)에 들어가서 습득할 생각이나, 또 특정 서가를 私淑할 예정도 없다.

顔眞卿(안진경), 玉羲之, 歌陽詢, 손과정(孫過庭), 조맹부(趙孟頫), 동기창(董其昌)의 書, 書法의 章法에 대해서 눈동냥도 해왔으나, 특별히 못하거나 모방하지는 않았다. 모방으로서 나 자신의 서가 이룩되리라고는 믿지 않아서였다.

서법에는 용필(用筆), 문가(問架), 풍신(風神)이라는 3요점이 있고 구체적으로 筆墨, 章法, 氣韻이라는 필법이 있다고 손과정은 <筆譜>에서 가르친다.

우선 필묵, 용필에서는 먹색, 먹의 농담에 주의하여 필을 사용하며 그 농담5색이 적당해야 함을 강조한다. 장몀, 서간이란 글자의 구조, 일점일획의 규준에 따라 글자와 글자 사이의 호응, 결체의 서밀, 용필의 경중, 지속, 용묵의 건습, 농담에 따라 하나의 서폭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풍신, 기운이란 구체적 설명은 어려우나 글자체를 통해 풍겨내는 분위기, 정신적, 추상적 멋을 말한다고 한다.

문징명(文徵明)의 小楷는 娟秀秀朗하여 왕택(王澤)의 1장2척의 대폭은 勁健雄獨하며, 풍신은 다르나 일종 느끼는 감동은 비슷하다.

그래서 글씨 서체나 필자의 독특한 개성에 따라 그 소질에는 雅秀, 濕潤雄渾 沈深蒼凉, 淸越, 龍飛 등 특색으로 감명을 환기한다고 한다.

요컨대 서에다 일종의 영성을 부여하여, 氣를 불어넣어, 글을 쓴다고 한다.

書가 일종 “修神養氣”의 방법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는 찬동한다. 글쓰기가 막히거나 기분이 침울하거나 답답할 때 나는 책도, 필도 팽개치고 붓을 쥐고 묵향을 맡으면서 선지위에다 붓글을 써내려 간다. 수십장 쓰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참 이보다 양호한 특효약이 내게는 없는 것 같다.

2006년에 병마에 시달리며 투병중일 때 나는 늘 서를 쓰는 것으로 투명생활에서 낙취를 찾았고 안정을 이룩했다.

그때 나는 고완 수집가인 독자(80대의 망년지교)로부터 청나라 때 왕근성(王近聖)의 제자 제작했다는 고묵(古墨)한편을 선물 받았다. 나는 소장하고 있는 청조시기 말기의 벼루에 갈아서 썼는데 묵향이 온 서재를 감미롭게 감돌아 기분이 하는 나는 백학 같았다.

 

투병에 이런 고묵, 고연은 참 좋은 약이었다. 병은 몸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맘에서 생긴다. 맘이 평온하고 따스하면 몸의 병도 스스로 물러난다. 나는 또 명사의 서를 걸어놓고 응시하면서 그 명사의 필적에서 “오라”를 흡취한다. 만나지도 못함 백년전, 수백년전의 명사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삶의 고락, 의지와 신념을 가르쳐 준다.

사람의 묵적(墨蹟)을 보는 것은 그 개인 개인의 마음을 읽는 것과 같다. 그들의 정신을 읽는 것과 같다. 그들의 얼굴이 다른 것 같이 개성과 정신도 다 다르다.

그 묵적이 무엇을 썼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차라리 나는 묵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묵적을 본다. 훌륭한 묵적은 호흡이 흐르고 그래서 살아있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은 모사, 임서(臨書)를 해서 형태는 본 따 낼 수 있으나 대가의 마음, 정신세계는 절대 쉽게 본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불멸의 의사 안중근의 목적에서 나는 강건. 雄渾의 의지를 본다. 그리고 안중근의 육혈포에 절명한 이토히로부미의 목적에서 나는 한학 유교소양의 깊은 모락가의 활달한 마음을 본다.

 

추사 김정희의 유묵에서는 자유분방한 미학을 보고, 동심 金農의 예서에서는 고귀한 치졸의 미학을, 손문의 書에서는 인류를 사랑하는 고고한 흉금을 읽는다.

 

이완용의 묵적에서는 동양3국 명사에서 최고수준의 달필이상의 분방한 초서의 멋을 본다.“매국노”이든 “애국노”이든 그의 정신세계는 단순히 오명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 없는 고상한 정치가, 선비의 품격이 있다. 나이토고난의 서에서는 일류 거물학자의 박학과 통찰력을, 이어령스승의 만필이 아닌 글씨에서는 소탈의 지성, 얼굴을 본다. 그리고 余秋雨의 글씨에서는 수려한 글 솜씨에 담긴 英知를 본다.

 

대저 “文如其人”이라 하는데 나는 그 말보다 “書如其人”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글은 많이 쓰니까 本人얼굴이 흐리워지는 때도 있으나, 서예는 본인의 글씨가 그대로 마음(성격)씨를 배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맘씨와 글씨의 씨는 직결되어 있지 않은가.

 

서에 대한 동양 3국의 명칭도 각기 다르다. 본가 중국에서는 서법이라 하여 글씨 쓰는 章法, 格法에 치중한다. 일종의 형식, 규범을 중히 여기는 서의 세계이다.

한국은 서예라 하여 서법을 예술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일본은 書道라 하여 즐기는 茶道, 花道와 같이 “三道”를 이루어 “茶禪一味”의 정신세계를 이룬다.

중한일의 서를 보면, 본가의 중궁의 서는 격식에 매인 규범적 미, 기준적미가 주류이고, 한국은 중국의 규범을 지키면서 좀 더 분방한 예술의 경계에 있다. 일본은 더욱 자연적 정서적 원리원칙을 깬 “道”를 자유 활달의 선의 맛이 있다.

이것이 내가 3국의 서를 즐겨 보면서 인상적으로 느낀 “비교3국서론”이다. 이 “서론”적 양상은 3국의 문학, 미술, 예술, 문화전반에 흐르는 특징이다.

 

정치도 문학도 문화도 중국은 보다 유연성이 있고 분방해 보이나 기실은 너무 격식, 규범에 스스로 메어 이탈하지 못하는 결함을 많이 안고 있다. 이데올로기 정치에 종속된 문예전통은 오늘도 중국은 여전하고, 정도는 약하나 한국에서도 그것이 보이며 일본은 하이구와 같은 시나, 소설에서도 거의 정치적 이념으로 글을 쓰는 전통은 보이지 않는다. 노신, 이광수의 작품에서는 계몽, 정치이념, 민족의 이념이 농후하게 깔려있으나 나츠메소세키의 소설에는 이같은 이념이 배제된 인간중심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예술에서 꽃 하나를 묘사해도 꼭 꽃에 무슨 이념, 계몽, 사상을 인공적으로 부여시키고 그 꽃을 순수한 예술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중국과 한국이다.

 

이념의 원리세계 중한과 이념 부재의 美의 세계의 일본의 정신 구조적 이질성, 3국에서 역사관이 이질성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역사문제가 진짜 충돌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역사는 역사학으로서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검토 연구할 학문의 세계이지만, 역사를 정치이념에 이용하는 얄팍한 위정자. 정치꾼들의 농락에 놀아난 것이다. 왜 역사가 이념에 이용당해야 하는가?

역사를 교과서로, 거울로 삼는다면 역사를 더 소중히 하고 존중하며, 적어도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이념으로 역사를 “소녀같이 임의로 분장”시키고 왜곡도 불사하는 행동에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는 말은 거짓말 밖에 아니 된다.

역사 그 자체의 불행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정치로 해석, 이용하려는 그 심산이 불행을 끌어온다. 지난 역사로 오늘을 괴롭히는 우(愚)는 이제 억제해야 할 것이다. 서의 말에서 어떻게 역사 문제로 좀 비약했나?

 

먹을 갈고 붓글을 쓰면서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먹이 사람을 간다. 따라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실은 글이 사람을 쓴다. 인간은 술에 사람이 취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술이 사람에 취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도취된 사람은 그 상대화 自他가 아니라 실은 자기 同一體로 一體를 이루는 법이다. 해서 같은 술을 먹어도 취함에서 나타나는 人格은 천차만별이다.

 

나는 서에서는 “格에 들어가 격을 나오는 ”방법이 좋다. “격은 있으되 격을 깨는” 그런 경지, 이것이 나의 서의 사상이며 정신이다.

뿐만 아니라 내 정신세계, 나의 인생에 관통한 하나의 굵직한 主義이다.

나는 서를 쓰지만 그 누구의 격에 들어선 맞춘 글씨가 아니라 나만의 개성을 살린 글을 쓰고 싶다. “자유분방, 경묘소탈”의 정신세계, 그리고 미학, 격식과 고상을 겸비한 왕부지나 안진경의 교과서적 서체보다 나는 오히려 격식이 없는 격식을 깬 추사 김정희나, 일본의 會八一, 中村不折의 분방한 서체, 그리고 副島種臣의 격을 일탈한 서체가 좋다.

일본인이라서가 아니다. 그 누구의 얼굴이 아니라 그 서체가 좋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일탈과 이단의 서, 나는 글쓰기에서도, 나의 정신세계에서도 이는 궁극적으로 목적이면서도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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