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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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38) “신녀성”의 발랄한 등장
2013년 11월 23일 17시 40분  조회:5943  추천:1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38)

“신녀성”의 발랄한 등장

김문학
 
 

  한중일 동아시아에서 “신녀성”이란 말이 등장하는것은 백년전 1910년이다. 한국병합과 때를 같이하며 일본의 대정(大正)시대와 중국의 민국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무렵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신녀성”은 “새로운 근대사의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냐면 지금가지 력사의 “주인공”은 당연히 남성이였으며 그 절대적인 지배적영향에 가리운 녀성은 왜소하기만 했기때문이다.

  “신녀성”이란 개념, 의식이 생성됨에 따라 그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것은 1911년 일본에서 창간된 녀성잡지 《청답(靑踏)》에서였다.

   “원시(元始), 녀성은 기실 태양이였다. 진정한 사람이였다…” 그해 8월하순 창간된《청답》의 창간사에서 젊은 녀성 히라츠카 라이데우가 선언한다. 5명의 젊은 녀성이 창간한 잡지는 일본 근대의 녀성의 각성을 선고하였으며 그 녀성해방의 기발아래서 기성 가족제도에 대한 반역, 현모량처의식에 대한 대결을 통해 “자아”를 추구하고 사랑과 성의 자유를 추구실천한 “신녀성”이 형성된다.

  당시 일본 최고의 작가로 불린 츠보우치 쇼요(坪內逍遙)의 연극론 “소위 신녀성이란것”이란 글에서 “신녀성”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까지 “신부인(新婦人)”으로 일컬었던것이 일약 뉴우먼(New Woman)이란 의미로 일본사회를 석권하는 키워드로 승격된다. “신녀성”은 우에서 말한 특징의 새로운 타임의 녀성을 긍정하는 용어로서 정착된다.

  히라츠카 역시 “나는 신녀성이다”고 소리높이 주장하면서 그 리론과 함께 과감히 주장을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츠보우치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론하면서 신녀성의 문제는 “부인(婦人)의 해방, 자유의 문제이며 첫째 대우, 둘째 재산, 세째 교육, 네째 직업 등에서 어디까지나 남자와 동등의 위치를 희망하는것”이라고 진술한다.

  그리하여 “신녀성”은 신선하고 충격적인 양상으로 일본사회에 등장하면서 “근대인의 특색으로 녀성을 표현한  신녀성”이 광범한 활약상을 과시하게 된다.
  따라서 신녀성의 씩씩한 모습은 그 걸음걸이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 나라 녀성에 대해 관찰해도 대저 그 걸음걸이에서 신사상이 가미된 녀성이라고 즉각 판단된다. 신사상 영향을 받은 녀성은 발걸음도 씩씩하고 그 태도, 용자 역시 어쩐지 기세찬 멋이 있다”고 신녀성을 묘사한 남성 지식인이 있었다.

  녀성의 지위가 비천했던 동아시아에서 “신녀성”의 등장은 말그대로 근대 “녀성의 혁명”이였으며 사회의 혁명이였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도 지적하다싶이 한국의 근대가 “식민지적모더니티”로서 일본의 영향을 받은 특징이였다면 “일본화된 서구화”(력사학자 박용옥 등)의 일환으로 녀성이 받은 일본의 영향을 배제하기 어렵다.

  1909년 4월 경희궁에서 거행된 “녀성류학생 환영회”에 700~800명의 하객이 운집하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학업을 수료하고 귀국한 3명의 녀성류학생 즉 박에스터, 하란사, 윤정원을 환영하는 모임이였다. “그러나 이 세 녀성엘리트에 대한 사회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들의 뜻을 펼치기에는 당시 시대는 너무나 암울했다.”(조선일보, 2009, 12, 4)

  조선에 “신녀성”이 등장하고 활약하는 때는 민족운동이 륭성하던 1920년대였다. 일본의 “신녀성”을 조선식민지의 류학생들이 감화를 받고 귀국하면서 조선에 전파시킨다.

  자유주의녀성해방론자 김명후, 나혜석은 1910년대 조선류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녀성판인 《녀자계(女子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녀성”의 선구자가 된다. 김일엽은 1920년부터 《신녀자》를 발간하며 전통적도덕을 부수고 녀성의 자기실현을 소리높이 주장한다.

  그들은 “신녀자주의”를 표방하면서 일본을 통해 수용한 서구자유주의, 자아(自我)주의의 련애관을 흡수하고 창도하였다.(김혜숙) 실제로 1920~30년대 서울거리를 활보하는 모던걸(摩登女郞, 신녀성)이 모던보이(신남성)와 함께 패션이나 차림새에서 조선식민자의 신선한 풍경을 이루었다.(신명직 《모던보이, 경성(京城)을 거닐다》)

 “신녀성”은 근대사회의 심벌이기도 했다. 백년전 미국과 일본을 류학한 중국의 “신녀성”을 꼽자면 “중국녀자류학생의 제1호”인 김아매(金雅妹)를 루락시킬수 없다. 1872년 의부인 미국인 교수를 따라 일본 동경대학, 미국에서 의학을 배운 그녀, 중국 최초의 북양부인과병원 원장으로 성장한다.

   1906년 청국교육부체계에 들어선 녀성교육이 1908년에는 500여개의 각급 녀학당이 설립되며 “녀국민”이 대량적으로 훈육된다.

   김천핵이 저술한 《녀계종(女界鍾)》은 녀성의 혁명사상을 주장한 책으로서 중국 녀성해방주장의 최초의 문헌으로 지목된다. 책에서 녀성의 학습, 교육의 권리, 영업, 재산소유의 권리, 출입자유의 권리, 혼인자유의 권리를 창도하며 녀성은 단순히 안해나 어머니가 아닌 독립적인간으로서 인정한다.

  근대 “신녀성”의 대표적 인물하면 당연히 혁명가 추근(秋瑾)이다. 1877년 절강태생의 그녀는 1904년 일본으로 류학하게 되며 녀성의 전족페지를 강렬히 주장하며 1905년에 손문이 주도하는 동맹회에 가입하여 활약한다. 남편과 과감히 리혼을 한 그녀는 소흥에서 《중국녀보》를 창간하여 남녀평등사상을 널리 제창하였다. 그뒤 호남성에서 혁명당을 이끌고 봉기를 하기도 하며 혁명에 투신하다가 1907년 7월 청정부에 체포되여 사형당한다.

  1920, 30년대 민국시기에 이르러 상해에서 근대적의미의 모던걸이 대거 탄생, 활약하면서 사상 및 용모, 패션에서 “신녀성”이 형성, 정착된다. 이는 동시대 일본식민지에 종속된 한국의 “신녀성”과 오버랩되는 면이 있어 흥미롭다.

  서구의 문명을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포로세스에서 탄생된 100년전의 “신녀성”은 동아시아사회의 주역으로 점하던 남성과 같이 사회무대에 등단하여 소리높이 “자아”를 웨치면서 또 하나의 절반하늘을 떠멘 주역으로 정착된다.

“본시 녀자는 태양이였다”는 히라츠카의 선언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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