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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강유위의 두가지 얼굴
2016년 11월 23일 23시 20분  조회:3449  추천:19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84)

김문학

강유위의 두가지 얼굴
 


강유위


  근대 중국과 세계를 진감한 무술변법의 지도자로서의 강유위(1858~1927). 강씨만큼 복잡한 얼굴을 한 근대 중국지식인도 흔치 않을것이다. 근대의 격동의 시대를 누볐던 강유위를 동아시아적 력사무대에 올려놓고 조망하면 그의 여러가지 얼굴과 그 명암이 현현된다.

  강유위의 사전적인 해석은 대개 이렇다. “근대 저명한 정치가, 사상가, 사회개혁가이며 서예가, 학자이기도 하다. 자는 광하(廣廈), 호는 갱생(新生)이며 광동 남해사람으로서 ‘강남해’라고도 불린다. 주요저작으로는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일본변정고(日本變政考)》, 《대동서(大同書)》, 《구주11국유기(歐洲十一國遊記)》 등 다수가 있다…”

  그러나 인물사전적인 해석은 강유위의 참모습, 복잡한 얼굴을 다 담기엔 아무래도 무리다. 많은 근대사자료를 탐독하면서 필자의 시야에 들어온 강씨의 참모습은 한마디로 극과 극을 달린 모순의 양상을 띤 인물이다. 즉 일언이페지하여 위대한 변혁가와 고루한 보수파이며 인물상 역시 저명한 군자인듯하면서도 옹졸한 소인, 용인(庸人)에 불과했다.

  전자에 대해 세인은 추대하고 좋아하지만 후자에 대해 세인은 또 멸시하기도 한다.

  1895년 “마관조약”  체결시 북경에서 회시에 참가하려던 그가 1,300여명의 거인을 련합시켜 “만언서”를 상서한 “공거상서”로 불린 일화는 전설적인 력사적사실로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있다.

     그뒤 1898년 광서황제를 부추켜 “무술변법”이란 유명한 개혁을 시도하나 근근히 100일천하로 끝났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뜬 이 유신은 획기적의의를 갖추었지만 중국의 사회적원인으로 결국 불행하게 패북으로 막을 닫았다. 그러나 이 변법의 력사적의의는 오늘날 재고해도 여전히 지고한 점수를 주어야 함은 의심할바 없다. 



강유위

  신해혁명후 중화민국이 시작된지 1년후인 1913년 기나긴 국외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한 그는 중국 최고의 보황당 수령으로서 공화제를 반대하고 청나라의 페제인 부의를 부식하여 복벽을 꾀하였다.

     무술유신 실패후 그가 걸은 로정은 그의 애제자인, 역시 근대사의 거물지식인 량계초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버린다. 만년 량계초와의 알륵은 한마디로 량자가 택한 로선이 근본적으로 어긋났기때문이다.

  강유위의 많은 관련 력사문헌을 읽으면서 재발견되는 그의 얼굴, 그리고 열길 깊은 속.

  량계초와 달리 강유위의 깊은 속에는 “군자”, “성인”의 대극에 있는 속물적인 “속인(俗人)”, “용인(庸人)”이 크게 반거하고있었다.

  최근 중국사학계에서 그의 “공거상서”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출한 모해건(茅海建)과 같은 중견사학자도 있으나 유신파의 수령으로서의 지위는 부동(不動)할것이다. 그가 혁신파로부터 해외에 망명해서부터 보황파, 수구파로 공화혁명의 적으로 전락되는 뒤모습에는 그의 립장, 인격까지 크게 회의스러운 질책에서 탈피할수 없다.

  강유위는 지식인, 문화인 답지 않게 지극히 공리를 추구하는 욕심쟁이의 일면이 그속에 도사리고있었다. 강씨의 공리성은 우선 권세에 대한 아부에서 표현된다. 1888년 북경에 향시 참가차로 갔을 때 “편알권귀(遍謁權貴)”해서 상서를 한것이 결국 북경관료들의 거절을 당했다. 물론 보수파관료의 관념탓도 있으려니와 한편 그의 아첨하는 비굴성과 “효장비도(xiao張卑蹈)”가 관료들의 반감을 샀다.

  상해의 정관응, 북경의 채원배, 라가륜(羅家倫) 등 당대 일류의 지식인이나 실업가들도 강씨의 공리성에 반감을 가지고 그에 따르지 않았다.

  강씨의 “호대희공(好大喜功)”의 성품에 대해 많은 식자들이 지적했으며 정치학문적인 “표절무단(剽竊武斷)”에 대해 후학들이 지탄했는데 량수명(梁漱溟)은 《동서문화 및 그 철학》에서 “강해남을 제외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은 죄다 존중한다”고 직언했다. 국학거두인 전목(錢穆) 역시 강유위의 《신학위경고》는 경학대사 료평(廖平)의 글을 베꼈다고 지적한다.

  “이런 여러가지 신분의 인물과 시각에서 바라본 강유위의 그 인물 및 정치, 학술활동에 대해 종합하면 하나의 련관성있는 형상을 걸러낼수 있다. 강유위의 용기와 유신사상은 긍정할만 하지만 그의 자부, 부조(浮躁), 공리심의 많은것, 게다가 지나치게 주관의지로써 행동하는것도 사실이다.”[오상(伍常)]

  사실 일부다처제의 봉건제도를 비판한 강유위는 그 자신은 6명의 처첩을 두었으며 만년에는 그의 과분한 공리성으로 거액의 금전을 수중에 넣기도 해 부화사치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1906년 세계 각국을 편력하던 강유위는 공리적인 상업활동에 투신했는바 메히꼬방문시 화교의 의연금으로 토지를 사들여 팔아먹음으로써 일확천금을 했다. 오늘의 값으로 치면 700만원 인민페의 거금을 하루아침에 벌었다. 그는 근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외국을 편력한 일류려행가이기도 하다.

  만년에 강유위는 귀국하여 상해에 대실업가 성선회(盛宣懷)의 화원을 고가로 빌리기도 했으며 1921년에는 초호화의 원림식 주택을 거금을 들여 짓기도 했다. 그는 만면의 15년 동안 몸도 건강했으며 여기저기서 모은 돈으로 항주, 상해, 청도 등에 별장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뿐만아니라 황하, 장강남북, 십여개의 산천명소를 유람하면서 만년을 무위무식으로 허송세월했다. 그러던 1927년 3월 8일, 상해에서 70고희 대축하연을 베풀고 21일 청도에 도착하여 30일에 객사했다. 광동성 불산시에 있는 강유위의 옛 집은 전국문물로서 세계적으로 소문난 명승고적으로 되고있다. 죽어서도 그는 영화를 누리고있는 희대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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