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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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동아시아적 連帶의 사상가-김옥균 재발견(김문학)
2010년 09월 29일 08시 33분  조회:6470  추천:33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9)


동아시아적 連帶의 사상가-김옥균 재발견


김문학

 

 

동경 지하철 긴자(銀座)선 외원(外苑)전역에서 내리면 “청산영원”이라는 공동묘지에 “외국인묘지”가 있다. 그속에 김옥균의 묘비가 보인다. “金公玉均之碑”라고 한자가 새겨진 암석판은 높이 3메터, 두께 15센치, 너비 1메터나 되는 자연석이다.

 

비석에는 한문으로 “오호, 비상한 재능을 안고있으면서도 비상한 시기를 만나 비상한 공도 못이루고 비상한 죽음을 당하도다”라는 장문이 각인돼있다. 죽어서 그 시체가 능지처참당한 김옥균의 묘는 일본과 한국에 세군데나 널려있다. 청산영원, 동경 문쿄구의 진정사안에 그리고 한국 충남 아산 고향에도 있다.

 

김옥균이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것은 1894년 3월 28일, 청일전쟁 발발직전이었다. 그의 죽음 또한 청일전쟁의 일본측의 불씨의 하나로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김옥균이 상해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동경에서 김옥균은 청국공사이며 이홍장의 양자이기도 한 이경방(李經方)과 자주 면담하였는데 이경방의 알선으로 상해에 가서 이홍장과 면담하기위해서였다.

 

이미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조선개혁문제와 동아시아 3국이 연대하는 “화주의”를 이홍장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중국행을 감행한다. 이홍장과 조선정부는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김옥균의 중국행은 죽음의 “함정”으로 들어가는 격이나 다름없었다는것을 김옥균은 각오하고 있었다.

 

손문을 지지해온 미야자키토텐(宮崎滔天)이 호위로 동행하겠다는것도 도야마(頭山滿)가 못가게 말리는것도 김옥균은 “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우기면서 결행한다.

 

신변에 친숙하게 달라붙는 자객 홍종우의 정체를 파악했으면서도 김옥균의 우직한 성격은 그것을 아랑곳아니하게 하고 죽음을 불사했던것이다. 오로지 한중일 3국이 련합하여 조선개혁을 이룰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탔던 김옥균이다.

 

  3월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해의 일본인 호텔인 동화양행 객실에서 조선이 파견한 자객 홍종우의 흉탄 3발에 김옥균은 쓰러져 절명한다. 43세의 파란만장의 생애를 타향에서 접는다. 그 시체는 이홍장의 지시로 군함 “위정호”에 실어 조선으로 운송된다. 이홍장은 김옥균의 암살성공에 대한 축전을 조선국왕에게 보낸다.

 

  조선정부는 양화진에서 그의 시체를 릉지처참하여 몇토막으로 절단하고 수급은 양화진에 효시하고 절단한 각 부위를 조선의 5개 도의 각처 길옆에 방치하여 새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먹게끔 했다. 죽어서도 또다시 비극적릉욕을 당한 김옥균선구자, 그는 나중에 식민지로 토막나는 조선의 비극 그자체의 모습이였다.

 

  그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전 일본이 반청감정의 격랑을 일으킨다. 5월 20일, 천수백명 일본인의 김옥균 추모법요식이 거행되고 그의 유발과 의복을 청산묘지에 묻었다. 당시 일본은 매체를 총동원하여 김옥균시체처분에 대한 청국정부의 조치를 비난하고 반청감정을 환기시켰는데 일청전쟁이 김옥균의 시체문제가 쟁점인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 시체처분문제를 일본이 청일전쟁의 불씨로 이용했던것이다.

 

이제 일본에서 김옥균의 망명생활과 그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884년 12월 8일, 갑신정변실패후 12월 11일 인천항을 떠난 일본배 피토세마루를 타고 나가사키(長崎)항에 김옥균 일행은 13일 입항한다. 12월말 동경의 후쿠자와 유키치댁에 도착하여 안착한다.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잘 살아서 돌아왔다”고 반겼다. 그때 같이 망명한 개화파 인물은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류혁로, 정난교, 신응희, 변수 도합 9명이였다. 그중 김옥균, 박영효(박영효는 미국에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온다) 등은 일본에 남고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가버린다.

 

10년에 달하는 김옥균 등의 일본망명은 실의의 련속이였다. 조선정부로부터 파견된 수차례의 암살위험에서 벗어나기도 하면서 그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누카이, 오자키 등 정치가나 실업가의 생활비지원도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청정부와 조선정부의 “역적”인 김옥균에 대해 냉담해지고 오가사와자섬이나 혹까이도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천생 락관적이고 신조를 버리지 않은 김옥균은 그 원대한 사상과 다양한 취미, 서예로 일본인을 매료시키고 구많은 일본벗을 사귀였다. 박영효의 회억에 의하면 “김옥균의 장점은 교유이다. 실로 교유에 능했다. 문장에 능하고 화술도 뛰여났으며 시, 문, 서, 화 모두 능했다. 김옥균의 결점은 덕과 모략이 모자란것이다.”(이광수 《박영효와 만난 이야기》)

 

  일본의 친구들은 서화발표회를 열어 김옥균의 붓글씨를 팔아 빈궁한 생활에 보태게 했다. 필자가 소장하고있는 김옥균의 서예유묵을 보면 그는 중국문인에 통하는 그런 재기횡일의 글씨를 썼던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김옥균은 개화파의 선구자일뿐만아니라 당시로서는 조선개혁을 동아시아적 시야로 구상한 선구자적인 사상가인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것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표면적 인식에 머물러있기때문이리라.

 

정치가로서의 그는 일본정부의 대청정책과 대조선정책의 우유부단을 비판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중립국화를 주장하면서 조, 일, 청 3국의 련대에 의해 구미열강과 맞설것을 창도했다. 그리고 조선이 봉건전제 체제를 철페하고 입헌군주제적 근대 독립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옥균은 “3화주의”사상을 창안했다. 조선개혁문제를 동아시아의 시야에서 구상한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탁월한 선구적인 사상이였다. 그는 《興亞之意見(흥아지의견)》을 집필하여 “일한청 3국이 제휴하여 구미동첨의 침략을 방지해야 한다”는 사상을 소리높이 주장하였다.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는 이렇게 김옥균의 사상을 평가한다. “’3화주의’는 조선과 일청 양국을 등거리에 배치하는것으로 조선문제에 대한 일청 양국의 개입을 페제하고 자주적개혁의 길을 개척하는 외교전략이였다.”따라서 그가 청국지도자 이홍장을 이 “3화주의”로 설득하여 조선 수구파에 대한 백업(지지)을 중지시켜 조선의 자주적독립의 길을 열어보자는 구상이였다. 김옥균은 늘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여야 한다”고 언급한것 또한 유명하다.

 

그 사후(死後)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재인식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의 3국련대사상도 역시 김옥균의 3국련대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김옥균이 리드했던 100여년전의 조선자주독립사상은 그 “3화주의”사상과 함께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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