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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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
2010년 10월 11일 10시 14분  조회:7556  추천:60  작성자: 김문학

《신조선족》월경론

42.”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1)

김문학



조선족 지식인으로 최초로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지역감정문제를 공론화한것은 필자가 “조선족개조론”에서 였다.

조선족 사회안의 “이질성 요소를 문화적 통합의 시점에서 조선족을 활성화시키자”는 합리적인 제언을 했는데도 연변 일부의 지시인들의 반발은 필자를 적대시하는 적개심으로 에스컬레일트했다. 필자의 뜻을 오독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감정적 반발의 빌미로 삼으려 했는지 알바없지만 역시 조선족 일부의 사고의 고루성과 시야의 폐쇄성을 노정한 대목이기도 하다. 하여 저자로서는 본의가 왜곡당한것과 연변의 현실은 예상했던것보다 더 참혹하다는 점을 재발견돼 마음이 무척 아팠다.

10년후 다시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것은 조선족사회내부구조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연변과 안쪽의 조선족 집단사회의 이질성인식은 미결된 인식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기때문이다.

재차 言明해두지만 필자는 그어떤 연변에 대한 추호의 혐오나 폄하의 뜻이 있는것이 아니며 안쪽 출신이라해서 안쪽만 예찬, 두둔하는 편향적 사고의 지식인이 아니다. 단지 조선족 공간을 이탈하여 해외에서 오랫동안 他者化시켜 바라본 우리의 모습을 인식 규명하자는 일념뿐이다. 이점을 부디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연변인”과 “안쪽인”의 異質性의 규명은 우선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연변사람은 어떤 성격이고 안쪽사람은 어떤 기질이고 하는 이미지는 상당히 일반인들속에 형성되고 있는것은 기성 사실이다. 물론 일반론적인 이미지는 실체험속에서 걸러낸것과 또는 사실과는 어긋나는것들도 옥석혼효의 양상을 나타낸다. 

문화인류학에서 국민성, 민족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하는 연구영역으로 “심리인류학” 및 “문화와 퍼서 널리리”에 관한 연구방법이 있다. 결국 연변인과 안쪽인의 성격연구는 국민성이나 민족성의 하속영역에 속하는 도민성(道民性=조선 팔도 도민의 성격기질)과 직결돼 있으므로 그 도민성과 견부시켜 관찰해야 한다.

즉 연변사람은 다수가 조선 함경도(함경북도) 출신의 후손이며 안쪽사람은 더 광범위하다.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소수의 경기도와 강원도)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연변사람들의 함경도측에서 보면 이 여러 도는 모두 안쪽에 위치하고있기에 “안쪽사람”으로 불리운다. 실제로 연변의 변경오지에서 보아도 안쪽사람들은 중국대륙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것이다.

그럼 조선족의 水源인 조선8도 道民性으로부터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의 국민성(민족성)에 있어서의 지역차, 조선반도속의 문화구조나 민속 및 사고양식의 지방差를 “道民性”이라 칭하고자 한다.

道民性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은 國民性 또는 民族性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 문제와 동일하기에 동일方法으로 사고하는것이 타당하다.

흔히 선천적 인자와 후천적인 환경이 국민성 형성에 영향주는 인소라 하는데 결국 이 양자가 복잡하게 얽히여 개개인의 성격을 형성시킨적은 자명하다. 그러나 무수한 개인으로 이뤄진 집단, 민족을 비교할때 개인차는 서로 상살(相殺)돼버리는 까닭으로 각 집단, 민족사이의 선천전 차이는 묵살되고 오히려 후천적인 문화나 사회적 영향의 차이쪽이 더 압도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고 보는것이 문화인류학자들의 결론이기도 하다.

이 方法에 따르면 조선반도의 (한국•조선인)과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족 2,3,4세의 사고양식이나 행동양식은 조선인이란 유전인자를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이질적인 양상을 노정한다. 또한 엄밀히 말하여 같은 조선족이라해도 연변과 안쪽사이에도 여러가지 양상의 이질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편 인류학자들은 “민족과 국민간에 있어서 선천적 인자의 차이에 대하여 그 선천적 이질성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인류학자 W•코털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생후 1개월의 신생아를 미국과 일본의 비교관찰한 결과, 그 행동차이가 보이는데 미국 영아가 잘 울고 잘 움직이는데 반해 일본 영아는 줄곧 비교적 얌전하고 온순하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후천적 영향이 거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선천적인 차이가 이처럼 미일 양국간에 존재한다는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1946년 미국의 유명한 문화인류 학자이며 《국화의 칼》의 저자인 루즈베네딕트가 동아시아 국민성 연구를 진행하는 “현대문화연구”프로젝트를 무어 “문화성격설(cultur-and-personality) ”이론을 구사했다.

프로이트의 리비드 발달단계의 의거로 연구한 결과 중국인은 토이렛트 트레닝(排便訓練)양식에 있어서 미국인과 달리 엄격한 훈련이 결여했다. 즉 “開裆褲”로 불리는 “짜개바지”을 입혀 언제 어디서를 불문하고 멋대로 배설행위를 방종시키는 양식이 정착돼있다는것이다. 이렇게 “독립자족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때문에”중국인은 언제나 성인이 되어서도 가래침을 맘대로 배설하는 비위생적, 비신자적 비근대적 습관이 보전됐다고 해독했다. 대만의 유명한 문명비평가이며 역사학자인 손융기(孫隆基)의 《中國文化的深層結構》는 미국 인류학자들의 이 중국문화성격설을 원용하게 전개한것이다.

이같이 유년기의 훈련, 환경이 국민성, 민족성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고 소중한 연구업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국민성, 민족성 형성에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있은 “문화-퍼서낼리티론”또는 “심리학적인류학”영역에 있어서 기후, 풍토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 대표적 인류학자인 크라이드•글랙크 혼(Clyde Kluckhohn)은 “기후, 지형, 천연자원””물질文化가 획득하기 쉬운 상황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이 성격 형성에 큰 인자(因子)로 들고 있다.( Kluckhohn&Mowrer 1944)

동아시아에서 문화인류학연구는 미국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류학연구가 최고수준과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미국보다 월등 유니크한 “기후풍토론”을 활발히 전개한다. 유명한 철학자 문화연구자인 와츠지테츠로(和辻哲郞)의 명작 《風土》(1935)는 세계적 사이즈에서 풍토를 (1)몬슨형 (2)사막형 (3)목장형으로 유형화하여 문화양식과 민족성격의 이질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이시다 에이이치로(石田英壹郞)도 풍토와 국민성에 관한 연구를 펼쳤으며 사바다 토요유키(鲭田豊之)는 《육식과 사상과 草食의 사상》에서 동서양문명의 이질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자 소후에 다카오(祖父江孝男)교수는 《문화와 패서널리티》《현민(縣民)성》등 저서에서 국민성과 현민성에 관해 기후풍토의 연관성을 전문 연구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특히 일본 국민성의 지역차를 현민성으로 논술한 그 업적은 특기 할만하다.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2)

한국인의 성격기질=국민성을 최초로 분석한 인물은 그 유명한 춘원 李光洙의 《민족개조론》(1922년)이다. 그뒤 1960년대 윤태림이 《한국인의 성격》,1965년 최재석의 《한국인의 사회와 성격》 1987년 김재은의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양식》과 에세이 형식으로 쓴 이어령의 《흙속에 저 바람속에》(1963)와 김용운, 김열규, 이규태, 최봉영, 최준식 등의 한국인 국민성론도 흥미롭다.

심리인류학, 서양의 심리학이나 비교문화론, 민속학 등 분야에서 한국인론 내지는 국민성론 文化論이 전개되었으나 여전히 공백영역이 남아있어 이 공백을 후학들이 메우는 연구작업을 지속해야할 사명은 중대하다.

한국 인류학계에서나 논단, 문단에서 퐁토와 국민성을 밀착시킨 연구는 산발적이며 미약한것은 유감이다. 더구나 국민성의 차이를 “道民性”으로 연구하거나 논하는것 역시 지극히 산발적인 형태로 흔적을 보이지만 너무 박약하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수 없다.

조선반도 8道의 “도민성”이 최초로 탄생된것은 필자의 지견으로는 1925년 7월호 《개벽》잡지에 게재된 《各道人의 心性(적성)》이라는 글이 아닐까 한다.

함경• 평안도 사람은 성질이 強硬勇悍하여 軍人에 적합하다
전라도 사람은 技術에 장하여 美術工業에 적합하다
충청• 경기도사람은 智諜辯才에 長하여 政治에 적합하다
경상• 강원도 사람은 淳厚質樸하여 文學의 재능이 있다
황해도 사람은 理材에 秀하여 商業에 這하다

이 8도 道民性 이미지는 4字表現으로 표상화되어 고착화 된다.
平安道-猛虎出林(맹호출림)
鹹鏡道-泥田鬪狗(이전투구)
黃海道-石田耕牛(석전경우)
江原道-岩下老佛(임하노불)
慶尚道-泰山橋嶽(태산교악)
全邏道-風前細柳(풍전세류)
忠清道-清風明月(청풍명월)
京機道-鏡中美人(경중미인)

필자는 이 도민성 표상은 조선조시기(1413~1895) 500년에 가까운 시일에 전래한 八道制를 단위로 지역성을 징표화했다고 추찰한다. 특히 조선조시대 중,후기의 성행해온 풍수지리사상 함께 결합되어 형성된 “조선지리인문사상”에서 이 도민성 표상이 축출된것으로 본다.

이같은 지식을 집대성한것이 李重煥(1690~1751)의 《擇裏志(택리지)》이다. 李瀷(이익)과 혈연관계가 있는 이중환은 24세에 과거급제하여 병조좌랑의 벼슬에 오르는 지식인이었으나 당쟁에 말려들어 유배생활후 방랑생활을 보낸다. 책제목이 말하듯이 사대부가 진정 살만한 곳(可居地)을 찾아 방랑했던것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인문지리서로 추앙받는 이책은 별명《조선八域志》인데 8도의 지리, 생리(生利),인심(심성) 산수설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생리와 인심은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도민성 입지를 말하기도 한다. 그는 정치, 경제와 문화 제영역에서 많은 유니크한 지견을 피력하였으며 인간은 지리적 환경의 제한을 받으므로 그 지리적 환경을 잘이용하는것이 그의 기본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발로된 “조선지리인문사상”은 오늘의 시대에도 역시 유효한 팩터들이 많이 존재한다.

다양한 지리환경에 따른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가거지가 존재할수 있다는 이궁환은 모종의 의미에서 풍토론적인 “도민성”론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라고도 볼수 있다.

이제 다시 돌아와서 조선의 道民性을 좀 구체적으로 지리풍토와 연결시켜 관찰해보자.

먼저 함경도의 《泥田鬪狗》를 보면 문자 그대로 “진흙밭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열악한 지리환경에서 억척스럽게 불요불굴의 투지로 투쟁하는 완강한 투쟁정신을 말한다. 마이너스적으로 표현하면 기가 세고 내부의 내홍(內讧)적인 싸움이 잦다는것이다. 토지의 대부분이 고원이나 산지여서 산악지방의 완강한 투쟁력과 생활력이 이같은 악렬한 환경을 배경으로 자연히 생성된것이리라.

李朝의 시조인 李成桂 역시 함경도 출신으로서 고향사람들의 성격을 숙지하고 있는데에서 자신의 부하에 함경도사람은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지방은 또한 조선시대 조선의 범죄자들을 정배시키고 이수시킨탓으로 도민의 民度가 상대적으로 저하하며 지식수준이 낮은 농민의 지역이었다.

“맹호출림”으로 불린 평안도 호방한 기질과 신출귀몰의 행동력이 높이 평가된다. 압록강의 남측, 대동강 유역 이북, 서측은 황해에 향한 지역으로 역사상 단군신화 강림한 지역이기도 하여 지리풍선적으로도 평양은 현대 조선의 “성지”이기도 하다. 또한 압록강을 사이두고 대륙과 인접해있어 대륙문화가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여 외래문명을 먼저 접하군 했다. “南男北女”란 말에서 북녀는 평안도 여성을 가리키는데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았으며 강계미인, 평양기생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석전경우”자갈밭에서 땅을 경작하는 소로 비유된 황해도는 인내성, 근기가 강한 기질로 유명하다. 황하에 연하에 황해도가 아니라 황주와 해주라는 두 도시이름 복합시킨 이름이다.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그 字결합에서 온것이다.

경상도는 “태산교악”으로서 큰 산에 높은 봉우리를 상징적으로 경상도의 도민성을 나타낸다. 낙동강지역은 곡창이기도하다. 신과의 발상지인 경주, 또 하나의 중심이었던 상주가 합하여 “경상”을 이룬다.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그 자신들도 서로 “문둥이”로 칭하며 타도인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권력지향이 강했다. 자존심 강하고 문화의식도 강하다.

“풍전세류”의 전라도는 바람앞의 버들같이 처세에 능하여 “머리좋고 성격나쁘다”는 이미지 또한 강하다. 앞에서 말한것과 뒤에서 행동하는것이 다르다는 자기방위술이 뛰어났다고도 평한다. 기름진 땅으로 말미암아 중앙의 수탈도 빈번했으며 “한(恨)”이 유달리 발달된 도민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는 위에서 든 4자표현으로 맡기면서 여기서는 약하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족을 도민별로 分類하면 주로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와 황해도가 주종을 이루고 그외는 산발적으로 좀씩 혼재해 있기때문이다.


”연변사람”과 “안쪽사람”의 比較•그 民族性적인 이질성(3)

위의 문화인류학적 “도민성”을 배경적 이해로 하여 이제 연변인과 안쪽인의 성격기질과 文化적 異質性에 대하여 관찰分析하기로 하자.

우선 注目해야 할것은 “연변”과 “안쪽”이라는 구별화로 사용하는 단어와 같이 그의 발상, 이해에는 연변은 함경도 출신이고 그들이 시점에서 조선의 여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 등이 안쪽(즉 지리적으로 남쪽)이라는것이다.

그 지리적 인식은 그대로 중국에 월경하여 정착하면서 적용된다. 함경도가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변의 변경을 택한것은 지리적 조건의 요소가 무엇보다 지대했듯이 평안도인이 요녕성을 택한것도 역시 그 같은 상황에서였다. 경상도의 출신이 요녕과 길림, 그리고 흑룡강의 평원 기름진 땅을 선탁한것도 본국에서의 지리환경적 경험을 그대로 적응시켜 택했다고 이해해야 할것이다.

조선족이 대체로 개혁개방전에는 요녕성, 길림성, 연변, 흑룡강성 이 4지역에 집합공간을 이룬 배경에는 본국에서의 “도민”별로 고향의식으로 형성된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대로 본국의 도민성과 직결된 형태를 노정하기마련이었다.

이민초기 “경상도촌과 평안도촌을 통혼, 통상은 물론이요, 통행까지도 불능했던 유혈의 창사가 끊이지 않았다”(《東光》1931년 25호)는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강열한 지역관념으로 결속된 조선족 문화의 여러공간의 이질성을 자연히 보전해왔다.

함경도 출신위주인 연변인들은 보통 기타 도민을 “안쪽사람”이라 칭하고 또는 평안, 경상, 전라 할것없이 함경도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조선족을 통칭 “남선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북선”인 자신들과 “남선”지역의 사람들과는 통혼불허로까지 상식적으로 행사하면서 철저하게 “이질성”을 고집해 왔다.

“우리”와 다른 “그들”로서 서로 담을 쌓고 그 他者를 순전히 他者로만 보고 모종의 편견, 편파적 성향으로 타자를 차별화한것은 중국에 이민, 정착하는 과정에 강열한 “도민성”을 그대로 중국에 적용시킨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도 유전된 “연변사람””안쪽삶”의 대조적인 지역문화가 남아있으며 나름대로 연변같은 소분지文化안에서는 그 토착적 도민성을 동질된 함경도가 집단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고착화시킨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족 안쪽, 즉 산재지구의 마을을 보아도 그 지명, 출명은 조선반도 출신 “도”의 명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테면 안도현에는 강원툰,  전북촌, 경남촌이 실재하며 강원도 원주군에서 온 원주툰, 그리고 매하구지역의 경기도촌등 등이 그렇다.(김경일《중국조선족문화론》1994)

그리고 또 한가지 注目해야 할 사항은 조선족은 그 월경초기부터 거이 知識계층이 아닌 순농민위주였다. 그들이 찾은것은 땅을 개간할수 있는 농경지였지, 도시가 아니었다. 고차의 지식인같이 필담으로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들과 대담을 하면서 교류할수 있는 수준도 능력도 그리고 발상도 있을수 없었다.

토지, 농경지를 찾아 같은 도민출신끼리 군집해 살면서 농사를 짓는것이 그의 전부 생활양식=문화였다. 이질된것은 연변지역의 산악지역 위주의 척박한 땅인데 비해 안쪽사람들은 흑룡강의 동북부의 평원, 요녕은 요동, 요남평원 등 기름진 평야의 땅을 택한것 따름이다.

연변의 함경도 사람들이 척박한 연변땅을 개척하는데 동원된 에네르기는 당연히 그 “이전투구”의 완강한 투쟁력이었다. 연변인에 대한 연변외의 조선족들에게 각인된 표상은 “깍쟁이에다 억척스럽다”는것이다. 생산량이 빈약한 경제조건하에서 “깍쟁이”나 “인심의 박함”은 그 당연한 현현일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포지티브하게 해석하면 “억척스러운 완강한 생활력”일것이다. 그것은 연변인의 최대의 특징적 장점이다.

“이전투구”의 해석대로 따르면 그들에게는 진흙밭에서 싸우는 투쟁심을 인간에게 행사했을때는 무비의 개싸움, 소모전이 전개된다. 戰時에 혁명정신이 강한 반면 평상시에는 그런 인간의 내홍에 집작하는 면이 문화대혁명이나 최근까지 진행되온 문단, 논단 내부의 전근대적 방식의 투쟁이 그것을 극명적으로 노정시켰다.

한국에서 신조선족 칼럼니스트로 월경의 글쓰기를 벌이고 있는 김정룡씨는 연변출신으로서 “연변사람, 안쪽사람 뭐가 다를까?”등 “延邊人論”과 니카 유순호씨의 “연변인론”은 연변사람의 ”전근대적 투쟁기질”을 까밝히고 있는것은 흥미롭다.

조선족사회를 이질성으로 他者化시켜 보는 관점은 필자와도 어딘가 통하는데도 있다. “안쪽사람”의 문화, 성격기질을 좀 더 多洋하게 노정된다.

“안쪽사람”이라 통괄하는 명칭에는 경상도 위주의 흑룡강성, 평안도 위주의 요녕성과 또 경상도+평안도+전라도+황해도+경기도 등 형태의 다양성을 노정하기 때문이다.

진취심이 강하고 강력한 독자적 문화의식을 바탕으로 한 흑룡강성 조선족은 경상도의 “태산교악”기질답게 개방성으로 국내의 월경,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신문 역시 “흑룡강신문”이 가장 개방의식을 뜬 조선족의 최전선을 질주한다는 평이 있다. 문단에서도 그들은 개방성을 바탕으로 조선족 文壇의 최전선에서 개혁의 깃발을 들고 있다.

요녕성 조선족들은 “맹호출림”의  성격기질로 모험하는 정신을 발양하여 조선족기업을 제일 많이 개척형성하면서 “대륙문화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한족과의 처세와도 능하며 그 맹호적 파워”를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요녕성은 문화적인 영역에서는 그 정보적 입지적 우세가 있음에도 큰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것은 경제적 실리를 우선시키는 성향이 강하여 문학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숫적으로 적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연변에 비해 요녕성이나 흑룡강성 출신은 실질적 실리 중시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전공을 文理別로 보아도 연변출신이 文科人文科學을 선택연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반해 안쪽출신은 理工科,經濟상학전공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안쪽사람의 진취심, 행동력의 그림자로서는 성급하고 계획성과 원견력이 좀 결여된 단점도 안고 있다. “하면 된다”는 좋으나 “어떻게 할것인가”하는 소심성도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는 연변을 “小盆地형 文化”란 표상으로 규정지었는데 좀 더 전개시키면 연변 소분지의 사고, 또는 “泥田思考”로 칭하고자 한다. 소분지속의 흙밭에서 왕성한 생활력과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고패턴이다. 좁은 공간에서 그이전(泥田)에  초점을 맞추어 내부에서 행사하는 사고양식과 생활방식이다.

대조적으로 안쪽은 “平原형문화”, 즉 “平野思考”고 칭하고자 한다. 분지나 이전보다 월등 넓은 공간에서 시야도, 사고도 넓은 공간으로 향하며 비교적 개방성을 띤 사고양식, 생활양식이다.

이 같은 조선족이 海外로 나가면서 다시금 “海洋型문화”,즉 “해양성思考”로 또 탈바꿈을 하게 된다. 물론 海洋성은 비유의 명칭으로서 더 넓은 개방성 사고와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21세기의 조선족은 이 3가지 文化型을 이루며 전례없는 生活文化圈을 형성하고 있다.

또 하나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것은 조선족은 두가지 패턴의 “소용돌이사회”로서  특징 지을수 있다고 본다.

미국 정치사회학자이며 대사관 직원으로서 한국에 20년 체류한 경험을 갖고있는 G•헨더슨은 그의 저서 《조선정치사회》에서 한국사회를 “소용돌이사회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는 자세한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필자는 조선족사회에는 특히 연변에는 인구이동에 있어서 연길을 중심으로 주변농촌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중에 중심과 농촌을 연결하는 중간항이 결여돼있으며 그 공백을 보인다.

무슨 얘기냐 하면, 연길과  농촌지방의 사이에 중간도시가 없으며 농촌의 농민이 단순한 이동을 통해 “나도 해냈다”는 식의 단순한 “역콤플렉스”적 반발식으로 충만돼있을뿐 무조건 중심지향의 수단이 돼버리는 약점을 안고있다.

아마 이것은 연길에만 존재하는 현상이기보다는 전국의 중국인에게도 이같은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小城鎮,小縣城이라는 중간단계가 있기도 하여 도시와 농촌사이의 중간상태는 엄연히 존재한다.

연변의 “소용돌이”는 농촌에서 연길로 흐르는 內向性이 지극히 강열하며 그 흐름은 外向性과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小盆地內에서 이런 內向性 경향은 돌돌 돌면서 시야가 점점 좁아지거나 거기서 정체하거나 하는 현상을 보인다. 연변조선족 지식인의 이른바 일류라고 자찬하는 일부에서 보인 이같은 內向性思考는 그것을 잘 입증해준다.

즉 환언하여 소용돌이속에 자신을 뱅뱅 돌리며 세상을 우습게 보다가 그 향심력에 스스로 혼미되어 빠져 “침몰”당하고 만다.

연변외의 안쪽, 산재지구의 소용돌이는 이와 반대로 外向性을 보이고 있다.

즉 이 도면에서 일목요연하게 보아낼수 있듯이 평원에서 또는 큰 호수에서 흐름은 外向性으로 보다 넓은 사고나 시야의 특징을 보인다. 평야라면 보다 넓은 평야로 도시라면 보다 개방성적 도시로, 강이하면 넓은 해양으로 향심력은 外向적으로 개방성을 보인다.

연변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이유는 그 지리적 풍토에서 오는 기질성격과 함께 사고방식의 내향성적인 성향에서도 현현하고 있다.

요컨대 본국의 “도민성”으로 형성된 조선족의 多洋한 성격기질은 그대로 조선족文化群의 바리에션을 노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공간을 유지하면서 보전해온 이런 “도민성격”은 많이 근대화된 한국과도 이질된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이제 조선족이 도시공간에서 재편성되는 문화권은 이같은 기질의 용광로로 된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이같은 성격기질이 경계를 넘으면서 융합되고 조화를 이룬 새로운 도시민적인 문화속에서 새로운 변웅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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