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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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장 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2
2014년 09월 13일 14시 41분  조회:2314  추천:0  작성자: 김철호

 

로심전역에서 이름을 떨친 인민해방군 제156사 제446퇀 제2영 김상범련”의 부분적 조선인장병들.


조선인장병들 전투마다 대공세우고 수많은 전투영웅 배출
동북해방전투서 3550명 희생  목숨으로 동북의 새날 맞아


"영용완강한 7련"

중국인민해방군 제43군 156사 466퇀 3영 7련은 해방전쟁에서 크고작은 전투에 30여차나 참가하여 수많은 공훈을 세워 “영용완강한 7련”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7련의 전신은 돈화현의 림민호, 차성진 등 조선인청년들이 식칼로 일제패잔병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조직한 유격대였다. 이 유격대는 후에 돈화현 보안퇀 3련으로 편성되였다가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합세, 1945년 5월 길동경비 2려 5퇀 4련으로 되었다. 그해 7월 다시 2려 6퇀 3영 7련으로 편성되였다. 1946년 11월, 7련 소속부대는 신개령을 지키는 한편 견고한 방어시설을 수축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 25일 7련은 길림시 교외 402고지를 탈취하라는 전투임무를 맡고 출발하였다. 402고지에는 적 한 개 련이 몇 개의 또치까에 둥지를 틀고있으면서 아군이 길림으로 진격하는 요도를 막고있었다. 다른 련에서 몇차례의 진공을 시도했지만 사상자만 냈을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있었다. 전투명령이 떨어지자 1패와 3패의 엄호를 받으면서 2패의 조성학반이 눔깜작할새에 적진앞 50메터되는곳까지 돌격해 들어갔다.

“장개석군 형제들, 총을 바쳐라! 해방군은 포로를 너그럽게 대한다! 빨리 투항하라!”

조성학반장의 담찬 웨침소리였다. 그제야 적들은 아군 돌격소조를 발견하고 발악적으로 사격해왔다. 이에 격분한 조성학은 전사들에게 “돌격!”하고 소리치면서 맨 앞장에서 돌진해들어갔다. 적진에 뛰여든 전사들은 시퍼런 날창으로 적들을 마구 찔러 쓰러뜨렸다. 전투소조 6명 전사는 인당 6명의 적을 쓰러눕혔다. 이에 적들은 질겁해 도망치는 놈으로 아우성치는 놈으로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이때 7련이 고지로 돌격하였다. 한시간의 치렬한 전투 끝에 7련은 402고지에 붉은기를 꽂았다. 이번 전투후 7련의 조성학반은 대공 1차를 기록받고 “조성학전투영웅소조”칭호를 수여받았다.

1947년 10월말, 7련은 길림교외의 룡담산주봉의 하나인 철가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철가산에는 한 개 련의 150여명의 적이 절벽에 콩크리트또치까와 포대를 쌓아놓고 길림으로 통하는 요도를 지키고있었다. 놈들은 아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주봉밑부터 50메터사이의 나무를 몽땅 베버린후 물을 쳐서 얼음강판을 만들어놓고 1개 퇀 병력이라 해도 얼마든지 막아낼수 있다고 장담하고있었다.

7련에 주공임무가 떨어졌는데 7련은 3패에 진로를 돌파할 것을 명령했다. 전사들은 짚신바닥에 쇠줄을 동여맨후 칼로 얼음을 찍어 얼음층계를 만들면서 산으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톺아올랐다. 3패의 전사들이 적진에서 50메터 떨어진 곳에까지 갔을 때 은페할 나무가 없어서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적들은 수류탄을 마구 내리뿌렸다. 붉은 피가 삽시에 얼음판을 붉게 물들였다.

3패 8반 김윤식이 전사 3명을 거느리고 돌격해올라가겠다고 패장에게 청원했다. 이에 패장 최응남은 적고지에 맹렬한 사격을 퍼부어 김윤식네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김윤식은 3명 전사를 거느리고 비발치듯하는 적탄을 무릅쓰고 적진 밑에까지 접근했다. 그때 2명의 조원은 희생되고 김윤식도 어께에 부상을 입어 피못이 되었다. 그러나 김윤식은 모진 동통을 참으면서 적 또치까 뒤문으로 뛰여들어가 살아남은 적 경기사수놈에게 덮쳐들었다. 억대우같은 적 사수놈은 18살 밖에 안되는 부상입은 김윤식을 깔아눕혔다. 이때 김윤식은 그놈의 두귀를 잡아당겼다. 놈이 “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김윤식은 몸을 일으켜 그놈의 대갈통을 경기관총에 대고 마구 짓쪼아놓았다. 놈을 쓰러눕힌 김윤식은 겅기관총으로 다른 또치까의 적들에게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뒤따라온 최응남패장은 련속 5개의 적 거점을 까부시고 15명을 포로했다. 드디여 진격로가 열렸다. 이때 7련이 돌격해 올라왔다. 3영과 2영도 돌격해 올라와서 적들을 일망타진하고 철가산을 점령했다. 전투후 김윤식은 대공3차를 기록받고 “대담한 단신영웅”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호신용 모젤권총 한자루를 장려받았다. 그후 김윤식은 전오가자전투에서 부대의 퇴각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국 해방후 그를 렬사인민영웅으로 추모하였다.

1948년 1월, 7련은 독립6사 17퇀 3영 7련으로 개편되였다. 3월 9일, 길림의 적들이 장춘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튿날 7련은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25킬로메터 강행군하여 길림시 서쪽 양가교 대통로 길북쪽 200메터 되는 초가집들에 숨어 건량을 눈에 섞어 요기하면서 적들을 매복습격하려고 기다렸다.

오전 11시, 적들의 선발대가 지나갔다. 돌격신호총소리에 뒤이어 나팔소리가 울렸다. 7련은 쏜살같이 적들에게 덮쳐들었다.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맹호같이 뛰여나가면서 총 두방을 쏘아 적 두놈을 쓰러눕혔다. 질겁한 적들은 사처로 흩어졌다. 한철혁은 수류탄 두 개를 련속 뿌리고나서 기관총을 하늘에 대고 쏘며 소리쳤다.

“손들엇!”

한철혁의 고함소리에 질겁한 적들이 눈우에 총을 던지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발 살려주시오” 하면서 애걸했다. 적지휘관의 마누라들도 손목시계, 금반지, 귀걸이, 목걸이를 떨리는 손으로 내들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한철혁은 단신으로 포로한 100여명 적과 가족을 뒤따르던 전사에게 맡기고는 계속하여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한철혁은 다시 60밀리포를 멘 적을 쏴눕히고 포를 빼앗았다. 뒤이어 초가집을 한집한집 수색하여 적 소장이하 200여명을 포로하고 기관단총 한자루, 경기관총 1정, 보총 150자루를 로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공 1차를 세웠다.

양가교전투에서 7련은 적 700여명을 포로하고 포 4문과 수많은 총을 로획하였다.

장춘시 이도하자전투에서 7련은 박지현련장의 지휘밑에 어두운 밤을 타서 측면으로 적들의 뒤를 뚫고들어갔다.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한 개 투탄조를 거느리고 적 화점 3개를 요정내고 적 련장이하 7명을 사로잡았으며 경기관총 3정, 보총 60자루를 로획하여 특공(대공 3차)을 세웠다.

그번 전투에서 7련은 적또치까 7개를 까부셨고 80여명의 적을 포로하고 중기관총 7정, 경기관총 3정, 군마 30필을 로획했다. 하여 7련은 집체대공 1차를 기록받았다.

금주전투와 흑산저격전

1948년 9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동북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대한 료심전역이 전개되였다. 로심전역은 료녕성 서부 및 심양, 장춘 지역에서 진행한 거대한 전역으로서 해방전쟁에서 결정적의의를 가지는 3대 전역중 하나이다. 이 전역에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 47만명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역에서 조선인으로 편성된 많은 부대들이 금주를 공략하고 흑산, 대호산에서 영용히 작전하여 동북해방의 승리를 안아왔다.

료심전역의 첫 전투는 금주전투였다. 1948년 10월 14일, 절대다수가 조선인인 동북야전군 제3종대 제7사 산포영은 맹렬한 포사격으로 적들의 방어공사를 까부시고 보병들과 협동작전하여 적들이 “금성철벽”이라 자랑하던 배수지를 점령, 주력부대의 진공에 길을 틔워주었다. 특히 산포영부패장인 리영철은 전사들과 함께 교통호를 적 또치까부근까지 파고들어가 포탄 한발에 적또치까를 날려보냈다. 치렬한 전투에서 그가 거느린 포병반은 사상자가 많았지만 계속 전투를 견지하면서 적의 화점을 까부셨다.

제119사 359퇀 5련은 조선인 련이였다. 이 련의 2패 패장인 김력준은 의현과 금주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령활하고 과단성있게 부대를 지휘하여 적 두 개 련을 섬멸하고 100여명을 포로하였다. 1련의 조선인간호원인 정화주는 금주전투에서 적의 포화속을 뚫고 뛰여다니면서 많은 부상병을 구해내 “구호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금주전투가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국민당군 료요상병퇀 10만대군이 금주를 지원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적들은 흑산, 대호산에서 해방군의 저격으로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저격진지에는 인민해방군 제10종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아군은 보총, 수류탄, 기관총, 산포로 비행기, 땅크, 대포 등 미국제중무기로 무장된 국민당의 5개 군과 12개 사의 병력과 맞섰다. 적아간의 군력차이는 현저했지만 아군은 끄떡 않고 적을 맞아 싸웠다.

10종대 28사 83퇀 3영은 대부분 조선인들로 구성되여있었다. 특히 3영 8련은 연변과 흑룡강성의 조선인전사들로 묶어져있었다. 이들은 흑산현북쪽의 대백태자툰을 고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23일 아침, 료요상병퇀은 미친 듯이 아군에게 덮쳐들었다. 25일 아침, 적들은 3영이 대기하고있는 대백태자를 향해 돌격해왔다. 8련은 국민당군 제71군의 18개 련의 대부대와 맞다들어 싸우게 되었는데 용사들은 6차례나 적들의 미친 듯한 돌격을 격파해버렸다. 1패 3반 전사인 최성걸은 적의 포탄에 다리뼈가 절골되여 행동하기 불편하자 날창으로 절골된 다리를 찍어 끊어버린후 상반신에 힘을 모아 적들에게 기관단총불벼락을 안기면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영용히 희생되였다.

한편 흑산 101고지에서도 치렬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10종대 제30사 89퇀은 연변의 길동1퇀이 재편성된 부대인데 대부분이 조선인전사들이였다. 고지를 지키던 28사부대가 치렬한 전투에서 크게 손실을 입으면서 적들에게 고지를 점령당하였다. 1영 2련 련장 김인석은 전 영과 함께 28사부대를 증원하여 고지를 쟁탈할 임무를 맡았다. 25일 밤, 아군은 일거에 고지를 점령했다. 뒤이어 2련과 28사의 한 개 련만 남아 고지를 사수하고 그 외의 부대는 전부 철수하게 되었다. 날이 밝으면 기필코 적들의 맹렬한 공격이 있게 될것이였다.

10여일동안 바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지칠대로 지친 전사들은 전투만 그치면 총을 안고 코를 드렁드렁 골기가 일쑤였지만 이번만은 김인석련장의 명령에 따라 전호를 파지 않으면 안되였다. 포격속에서 낮아진 전호를 전사들은 삽으로, 날창으로 파고 팠다. 몇시간동안의 악전고투를 거쳐 겨우 몸을 가릴만큼 파지였다.

날이 밝아지자 과연 적들의 맹렬한 포사격이 시작되였다. 포격으로 생긴 진동과 폭풍은 전사들을 허공 들어다놓았고 돌과 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화약냄새와 연기에 숨막힐 지경이였다. 약 30분동안 계속되던 맹렬한 포격이 멎자 국민당군은 중기, 경기 등 화력의 엄호밑에 아군진지를 향해 까맣게 기여올랐다. 정면에 배치된 2련의 기관총 2정이 적을 향해 불을 뿜었다. 적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그러나 화력과 병력의 절대적으로 우세인 적들에게 101고지 일면을 점령당하고말았다. 형세는 매우 위급했다. 이때 갑자기 28사가 총출동하여 노도와도같이 반격해왔다. 그런데 101고지로 오르던 국민당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분분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금주전투에 참가했던 아군주력부대들이 흑산-대호산일선에 이르러 료요상부대를 포위하고 전면적인 진공을 들이댔던 것이다.

2련은 40여명 사망자를 묻은후 101고지를 떠나 이미 출격한 본 부대를 따라 돌격해나갔다.

11월 2일, 료심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나고 전 동북이 해방되였다. 연변의 아들딸들은 쉴 사이도 없이 만리장성을 넘어 평진전역에 뛰여들었고 소속부대를 따라 남진의 길에 올랐다.

지난 3년간 진행된 동북해방전쟁에서 3550여명의 조선인전사가 희생되였다. 동북조선인들은 자신의 피와 목숨으로 끝내 동북의 새날을 안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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