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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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동북아 4국지》

동북아인의 자서전
2012년 08월 16일 15시 49분  조회:3437  추천:2  작성자: 이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리 강철                                            
 

들어가는 말
 
내 인생이 50고개를 넘고 보니 세상이 좀 보이는 것 같다. 공자는 “오십에 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라 했는데 이제야 자기의 천명을 좀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나한테는 50살이 아직 내 인생의 반생(半生)으로써 앞으로도 걸어야 할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왜서 인생의 중간고비에 이런 글을 쓰려고 하는가?

내가 이 글을 쓰게된 이유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 이유는 몇 년 전에 우리 가족들이 모였을 때 누님들과 형님들이 우리 가족사를 후세에 남겨둘 가치가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몇 번 꺼낸 적 있었는데 그것을 추진하자면 현역에 대학교수로 있는 나와 나의 금방위의 형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않되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우리둘은 지금 한창 사업의 고조기로써 그것을 돌볼 여유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정년퇴직하고 여유가 있는 누님과 형님들한테 글을 써보라고 부탁했더니 반년동안에 다 써냈고 동생들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였다. 그것이 3년 전 일이다.      그것이 마음속에서 줄곧 프레이셔(압력)로 되여서 머리를 앓던 끝에 큰 누님도 벌써75세 고령이 되셨고 병도 많고 하니 저 세상에 가기전에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되겠다는 강박의무감으로 금년 년말까지 우리둘도 원고를 내서 래년에는 출판해 봅시다 라고 약속하고 지난해 가을부터 매일 잠을 두시간씩 줄여서 쓰기 시작했다.

두번째 이유는 나 자신도 한번 인생  중간 총결을 하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살아갈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의 인생은 줄곧 앞만보고 내달리던 올리막길에서 멈추어 서서 뒤도 돌아보는 내리막길로 전환하는 시기라고 생각됐고 지금이 곧 그 전환점이라고 생각한다. 등산에 비교한다면 오르기보다 내리기가 더 어렵다는 (上坡容易下坡难)  중국 고전속담이 있듯이 인생의 마무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기실 40대부터 나의 체력은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경험과 지혜를 잘 살려서 지혜로운 인생을 지향한다면 내리막길을 천천히 비탈길을 밟으면서 멋지게 내려올 수 있고 때로는 다시 올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경험을 하루빨리 젊은 세대들한테  전해주어 그들이 인생에서 굽은길을 적게 걷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도록 거울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인간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 가지만 선배나 선대의 경험교훈을 잘 섭취한다면 더욱 멋지게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지금 지구촌조선족네트워크 구축활동을 하는 것도 내가 얻은 지혜와 인생자원을 우리 젊은이 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지 자기 이름을 남기려거나 유명해지려거나 어떤 리익을 얻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이 두렵고 돼지는 살찌는 것이 두렵다’(人怕出名猪怕壮)는 속담이 있듯이 너무 이름나면 남에게 당할 때가 많다. 될 수 있으면 조용히 자기 인생만을 살고 싶다.허나 생각대로 되지않는 것이 사람의 인생인가 보다.      
 
여기서 우리가족의 역사를 잠간 간단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우리 가족은 중국의 길림성 연변(옛날에는 만주지역의 간도)에 살고 있는 아주 평범한 중국 농촌의 한 농가(農家)였다. 그렇지만 또 평범하지 않는 역사의 한페지를 쓸 수 있는 이유도 있다. 하나는 우리가족은 중국농촌 농민의 전형으로서 가난하기 짝이없이 살아 왔고 구 만주지역과 현대 중국사회의 력사의 풍파를 빠짐없이 겪어 왔다.

 일제의 조선강점과 식민지 지배하에서 할아버지가 가족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만주땅에 온 것이 1916년으로 추정된다. 그뒤로 만주사변 (1931년 9월18일), 만주국 설립(1932-45년), 중국의 국공내전과 토지개혁시기(1945-49년),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 (1949년10월1일-현재), 조선전쟁 (1950년 6월 25일 -53년 7월), 대약진과 인민공사(1958-60년), 문화대혁명 (1968-76 년), 개혁개방 (1978년 -현재) , 천안문사건(1989년) 등 근현대 중국의 100년 력사를 겪어왔다.

  우리가족은 보기드문 대가족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1녀5남을 낳아서 길렀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조선땅에서 건너와 6남6녀를 낳아서 길러놓고 타계하셨다. 그리고 우리 부모는 4남4녀를 (8남매)를 낳아서 길러놓고 타계하셨다.

   1994년3월에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60주년 (다이야몬드 혼)을 축복하는 대잔치를 룡정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렀다. 형제 8남매와 그 자식들, 당사촌, 고모사촌, 이모사촌, 외사촌 등 모두 합치면 100여명이 된다. 그리고 5-8촌 친척들을 넣으면 헤아리기도 힘들다. 잔치날에는 내빈 외빈들을 포함해 200여명이 참석하여 용정시가 들썩 하였다.

이 잔치는 연변의 조선족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기에 룡정시의 문 부시장이 친히 참가하여 축사를 올리였다. 또한 연변텔레비죤 방송국에서 특별취재 팀을 구성하여 취재하여  ‘사랑으로 가는 길’특별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방송하였다.

그 년대에 가난한 농가의 8남매 중 6명의 대학생과 1명의 군인장교가 배출 되였으니 그리 쉬운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살던 산간마을 에서 보면 대 출세 가족인 것이다.

또 우리 부모들은 재간도 좋다. 4명의 딸을 낳아서 시집을 보내고 4명의 아들을 낳아서 장가 보내 며느리르 삶았으니 수출 수입이 딱 평형을 잡은 셈이다.

  맏 누님 인숙이는 가난한 생활 환경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연변대학 수학계를 졸업하고 일생동안 중학교 교원으로 인재육성 사업에 종사한 후 지금은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누님 월순이는 가난을 벗어나려고 체육학교에 들어가 악전고투한 결과 자전거 한대로 연변과 전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건장급 운동원으로 성장 되여 일생동안 체육사업에 종사하였으며 길림체육학원의 교련원(감독)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 있다.

셋째 누님 일금이는 연변사범학원을 졸업하고 소학교 교원으로 일생동안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정년퇴직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넷째 누님 순림이는 유명한 용정고중을 졸업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의 풍파로 대학에 가지 못했다.하지만 농촌에서 분투하면서 나중에 연변대학의 틀별강습반을 거쳐 소햑교 교원으로 변신하여 일생동안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지금은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맏 형 희철이는 고중졸업하고 농사짓다가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하여 군부의 석유정제공장의 기술원으로 일하다가 폭발사고에 의해 눈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공훈을 세우고 결국은 장교 (대위)로 승진했다. 퇴대 후에는 장춘의 길림성 야금연구소에서 보위과과장 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둘째 형 장철이는 문화대혁명의 풍파속에서 고중학교를 중퇴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들을 정성껏 모시였으며 생산대장 등 직을 맡았다. 장기간 건축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집을 지어 사회에 공헌을 했으며 지금은 정년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셋째 형 동철이는 고중졸업하고 농사짓다가 1977년에 길림대학 일어계에 입학하였는데 졸업 후 연변대학외국어학부에서 일본어 교수로 사업하고 있다 . 1989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일본에 가서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시간강사 등 사업을 18년 하다가 연대에 회귀했다.

   막내아들인 나는 대약진운동시기인1958년에 태여나 굶주림속에서 자랐났으며 문화대혁명 10년간에 소학교로 부터 고중까지 동란속에서 공부를 하고 77년부터 농촌에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81년에 중앙민족대학, 중공북경시위당교의 대학원을 거쳐 대학강사로 사업하다가91년에 일본에 유학하여 2001년부터 일본 동경의 국가 정책연구기구에서 사업, 2006년부터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태여나서부터 나의 전반(前半)생애에 중국의 현대사를 몸으로 체험했다. 그것을 전기형식으로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드리니 적으마한 도움이라도 되였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2012년봄
가나자와(金澤)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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