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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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동북아 4국지》

나와 조선 한국
2013년 03월 27일 08시 31분  조회:3459  추천:2  작성자: 리강철
재일조선족동포 리강철 자서전

나의 동북아4국지- 생존분투의 길에서

17.네개의 조국을 가진 기쁨과 슬픔2

나와 조선


나의 인생은 많은 조선족과 마친가지로 태여나서부터 조선반도의 정신적 문화적 영향하에서 시작되였으며 조선반도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적 문화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조선반도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견식을 갖고 있는가?’ 고 물으면 중국에서 태여나 자란 30년간은 기본상에서 지식이 없었다. 조선족에 관한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조선반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에 와서 공부하면서 두만강지역개발연구를 시작해서부터였다. 1996년에 장춘에서 개최하는 두만강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가한 후 그 길로 연변에 가서 훈춘개발구를 고찰하고 원정리(권하)다리를 건너 조선땅에 첫 발을 밟게 되였다 (기실 조선땅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어릴적 여름방학 개산툰에 있는 누님집으로 놀러 갔다가 가까이에 있는 두만강변에서 수영을 하다가 대안의 강변까지 건너가 조선사람들에게 장난으로 말을 걸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한창 조선의 라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에 외국투자가 흥성할 때였는데 관광비자로 입국했기에 기본상 정부관원들을 만날 수 없었으므로 말타고 꽃구경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서고 있는 호텔, 공장건물이나 시장을 살펴볼 수 있었고 개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두 번 정도 라진선봉에 고찰을 갈 기회를 가졌다.

본격적으로 조선에 관해 연구하게 된 것은 2001년 가을에 일본 동경재단시기  사사카와(笹川)재단(동경재단의 모재단:母財団)의 요청으로 조선반도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것이 시작이였다. 일본의 조선반도연구 전문가(특히는 경제)들이 모인 연구회였다. 이 연구회의 목적은 2000년6월에 남북정상회담으로 관계가 호전되여 가는 기회에 일본과 조선간의 교류관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였는데 이를 위하여 당시 중국국적인 나와 연변대학교수로 동경재단 객원연구원으로 와 있는 강룡범교수를 연구팀에 넣어 주었다. 일본사람과 한국출신의 연구자들은 조선에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니 중국국적인 우리들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나는 조선경제에 관해서 특히 라진선봉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의 개발정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15일은 고김일성주석 탄생90주년으로 평양에서는 큰행사를 준비하고 전세계의 우호국가들에 방문단을 초청했다. 강교수의 알선으로 강교수와 나는 연변대학 교수의 명의로 연대방문단의 일원으로 조선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에 갈 수 있었다. 정부의 초대이기에 고려호텔에 주숙하고 귀빈대우를 받게 되였으며 4.15전후에 정부에서 주최하는 많은 행사와 견학에 참가할 수 있었다. 중앙대회에도 참가하여 육안으로 조선의 고김정일총서기를 비롯한 지도자들을 볼 수도 있었다. 평양시내의 변하고 있는 모습도 많이 보고 거리에 나가 조선의 젊은이들과도 많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한 노동당역사연구소의 간부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우리를 안내하는 안내원(당역사연구소의 연구원)과도 뻐스타는 시간에 많은 의견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조선을 이해하고 조선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

그번 방문과 연구회를 통해 나는 조선경제연구의 전문가로 일본사회에서 평가 받았다. 아사히 신문에는 단독 인터뷰기사가 게재되고 여러 연구단체들에서 초청강연을 의뢰받았다. 나는 부득불 조선의 역사나 국제관계에 관하여 공부하지 않으면 않되였다. 그것을 통하여 조선민족에 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졌다. 조선반도가 역사상 주위의 강대국에 끼여서 유린받고 침략받고 강탈당한 처지에 있었으며 이전에 일본의 한 학자가 ‘조선민족은 고생을 많이 한 민족’이라는 말을 점차 이해하게 되였다. 그것이 나에게 반도의 조국과 민족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그 후에도 동북아시아 관련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할 때면 평양에서 온 연구자와 정부관원들을 만나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또한 재일본 조선총련의 관계자들과도 많이 접촉할 수 있었고 조선대학의 학자들과도 같이 연구프로젝트를 하면서 연구교류를 할 수 있어 조선에 대한 나의 지식을 많이 넓혀 주었다.

한편 1995년 이래 조선의 수재 등으로 동포들이 굶주리고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났다. 2002년 라진선봉에 방문갔을 때 외국손님들의 관광뻐스 주위에 몰려드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목격하면 정말 목이 메일 정도였다.

국제관계에서도 조선의 핵개발 등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비난받고 왕따당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물론 북쪽의 정책에 문제가 있고 그것을 개변하지 못하면 나라의 존재자체가 위험하기는 하나 한면 대국의 패권이나 갈등속에서 약소한 나라 약소한 민족이 버림받고 고립당하는 그러한 국제정치가 언젠가는 개변되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북의 분렬, 대륙과 대만의 분열도 결국은 강대국의 패권과 권익투쟁이나 전쟁의 희생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비애를 낳는 근원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나와 한국

내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80년대였다. 그 전까지는 ‘남조선’으로 알려졌으며 중국사회에서 한국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80년대 후반에 한국인들이 북경에 방문오니 여러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주로는 비지네스맨이 많았고 일부분 학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1990년 여름에 북경에서 개최된 아시아운동대회 때 한 친구를 통하여 취재를 온 연합뉴스의 기자를 만났다. 나한테는 처음만나는 한국인이였다. 처음으로 나를 만나자는 외빈이였기에 왕푸징에 가서 조선족고급료리점에서 식사를 초대했다. 식비를 계산해보니 150원이였다. 그때 나의 월급은 겨우 75원 정도였다. 월급의 두배가 되는 식사대접을 인생에 처음으로 해본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 뒤로는 동경과 서울에서 한국기자분을 또다시 만날 기회도 있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학자나 상인들이 북경에 오면 만나보고 교류할 수 있었으며 한국에 관한 료해가 조금씩 늘어났다.

1990년대 내가 일본에 온1년 후에 중한수교가 되면서 중국조선족들의 한국방문이 급속히 늘어남과 동시에 약장사 보따리 장사도 많아지니 당연히 여러가지 불쾌한 사건들도 많았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나한테는 실감이 안나고 또한 나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조상의 나라이니 기회가 있으면 한번 여행이나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일본에서 밥벌이에 공부에 여념이 없었기에 한국여행은 뒤전이였다.

그 후 일본에 있는 나의 형과 형의 처남들이 한국에 여행갔는데 한국의 공항에서 출입국관리국에 불리워 들어가 특별한 조사를 받게 된 일이 있어 몹시 불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적은 중국인데 조선말에 일본말을 해대니 의심받았던 모양이다. 고국의 대문에서 나쁜 인상을 받았다고 하니 나도 한국여행을 해보려던 생각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친구도 친척도 없으니 마음이 끌리는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2월에 나고야대학의 친구인 히라카와교수가 한국에서 노무현정권이 탄생하게 되여 동북아 개발금융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니 주제보고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요청이 왔다. 고 노무현대통령이 선거 공약중에 ‘당선되면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을 추진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노사모그룹의 국회의원들과 학자들이 조직한 국제회의였다. 내가 금방 동경재단에서 동북아개발은행  설립에 관한 연구프로젝트를 끝내고 고이즈미수상한테 정책제안을 마친 반년 후였다.

심포지엄에는 한국내 뿐만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학자와 기자들도 참가했고 심포지엄이 끝난 후에는 김대중정권시기 산업자원부 장관을 했던 김영호 유한대총장 (한국에 유명한 경제학자), 중국 료녕대학의 교수 및 한겨례신문이 주최한 3자 정담(鼎談)에 초청받아 동북아지역개발의 현황과 과제에 대해 좌담하여 이튿날 한겨례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되였다.

한국에 처음으로 가게 된 나는 심포지엄에서 한국말로 처음으로 보고하자니 아주 긴장하였다. 그 때까지 나의 조선말은 연변 사투리(방언)가 많았고 20여년 북경이나 동경에서는 중국말과 일본말이 위주였기에 본격적으로 표준한국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한국에 가서 이틀만에 유명한 인사로 되여 심포지엄 기사와 인터뷰기사가 큼직한 사진과 함께 거재되였으니 말이다.

후로는 한국의 정부나 연구소 그리고 대학의 학자들과 빈번한 교류가 형성되였으며  더우기 내가 일본내각부의 정책연구소(NIRA)에서 동북아그랜드데자인 프로젝트를 주최하면서 한국정부의 대통령자문위원회, 동북아시대위원회, 대외 경제정책연구원(KIEP), 국토연구원(KRIS), 개발연구원(KDI) 등 연구소와의 교류사업이 많아지면서 한국을 제집 문앞 지나듯 드나들게 되였다. 당연히 한국말도 제법 할 수있게 되였다.

나의 또 하나의 조국과의 인연은 이렇게 한국의 주류사회와의 만남으로 맺혀졌다.
이렇게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2005년4월에  일본 NIRA연구소의 파견으로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초청을 받고 방문연구원으로 서울에 1개월 체류하면서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였다. 한국에는 여러번 다녀왔지만 한국의 서민생활체험은 처음이였으므로 나에게는  소중한 1개월이였다.

 이 기간 나는 한국의 많은 연구자와 정부관계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으며 또한 강원도 콘도를 걸쳐 조선(북한)의 금강산 여행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내가 제일 격동된 것은 금강산에서 우리 민족들과의 만남이였다. 일반 한국인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고 또 관광뻐스를 모는 운전수들과 식당의 복무원들은 중국 조선족들이였으며 관광지에서 안내하고 관광상품을 파는 사람들은 조선(북한)사람들이였다. 나는 금강산에서 3개국의 한민족동포들과 만나서 여러가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민족이 이렇게 분렬되고 이산되고 각자의 이념이나 행동양식이 서로 다른 민족처럼 변해진 것이였다. 언제가면 우리민족이 하나로 될 수 있을가?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기 짝이 없다.

그 뒤로는 한국에 사는 조선족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2005년12월에 일본에서 개최한 조선족국제심포지엄에 한국의 조선족연구를 하는 유명한 학자 이진영교수와 최우길 교수를 초청하게 되였는데 후에 서울에 가니 그분들의 소개로 조선족류학생네트워크의 예동근회장을 만나게 되였고 많은 조선족 류학생들과도 만나게 되였다. 세미나도 개최하여 보고를 초청받기도 했다.  한국에서 수 천명의 조선족 류학생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으며 조선족연구회를 서울에서도 만들어서 일본과 중국과 서로 교류하면서 조선족세계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구상을 젊은 학자들과 밤새면서 의논하기도 했다.

2010년8월에는 예동근 고려대박사의 알선으로 일본의 조선족연구학회와 한국의 재외한인학회가 공동으로 첫 국제세미나를 서울 교려대학의 아시아연구소에서 개최하여 해외한인을 연구하는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였다. 이듬해는 부산의 부경대학에서 역시 예동근교수의 알선으로 제2차국제세미나가 개최되여 많은 학자(한국학자와 조선족학자)들이 서로 교류하는 장으로 되였다. 한국에서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민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선족들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그들의 민족의식과 조국관은 어떠한가? 앞으로 풀어가야할 과제들이 아직도 많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조선족의 글로벌 네트워크 나아가서는 전세계 코리안의 글로벌 네크워크는 중일한을 중심축으로 형성되여가고 있으며 그중에서 두개의 조국, 세개의 조국, 네개의 조국을 가진 초국경적 인간들의 정력적 활동을 통하여 린근 나라와 나라와의 국제적 경제문화 교류가 활성화되고 지역공동체가 추진되여가고 있다. 이 또한 우리 조선족들의 삶의 의의와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면 국제정치나 국제사회에서 서로 이산된 우리민족과 분렬된 민족국가의 갈등과 대립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비극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항상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한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마이노리티로 살아오는 우리 조선족은 너무나 나약하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서서 경제교류 문화교류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함으로 국제정치의 흐름을 바꾸어가는 것으로써 우리의 힘을 과시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 유대인이 나라의 정치를 무대뒤에서 조종하고 영향주듯이 우리들도 소속되는 각나라에서 정치와 정책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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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5 ]

5   작성자 : ㄷㄱ
날자:2013-04-01 10:51:31
조선족은 그냥 열심히 인력으로 일하는게 최고
조선족은 중국인 아닌가?
4   작성자 : 아태구도
날자:2013-03-27 16:09:18
아래 네티즌선생 한중일 교류가 활성화 안되는 걸
조선족에게 덮어씌우지 말라
3월22일부터 아태지역의 전략구도는 바뀌어졌다
아직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선시대에 머물어있다니
3   작성자 : 시민
날자:2013-03-27 12:21:18
조선이 왕따를 당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의념의 같지 않아 그런건데 왜서 왕따라고 말하시는지 학자 답지 못하네요
2   작성자 : 네티즌
날자:2013-03-27 10:20:09
처음엔 말이 통하는 점 때문에 조선족을 통해서 중국을 보려고 했더니 순 엉터리였다. 한족 지식인들은 세계의 흐름을 이해하며 중국을 비판도 하면서 중국을 설명하는데, 조선족 지식인들은 편견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중국찬양만한다. 그리고 조선족 지식인들은 중국글로만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니 중국밖의 세상이 중국을 보는 시각이 어떤 것이지도 전혀 모르고 있다. 조선족 지식인의 맹점은 보편적 국제적 상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강철씨 말처럼 조선족이 한중일 경제 문화 교류를 활성화 하는데 기여할 일은 없을 것이며 조선족이 중간에서 나서지 않는게 한중일의 정상적 교류를 도와주는 것이다.
1   작성자 : 네티즌
날자:2013-03-27 09:49:27
북경아세아운동대회가 1988년이 아니라 1990년도 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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