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중에 나한테는 인생을 바꾸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니 내가 찾아냈다. 1995년8월에 일본의 아시아경영학회와 중국 장춘의 길림성사회과학원이 장춘에서 두만강개발을 테마로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여름방학 기간이라 한번 참가해보고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아직 알바로 생활하는 학생의 형편이니 한번 출국하여 회의에 참가한다는 것은 경제상으로 부담이 컸다. 허나 이것은 내가 두만강개발 령역에 발걸음을 들여놓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결심을 내리고 참가하기로 했다.
이번 국제심포지엄에서 나는 많은 두만강개발지역에 관한 지식과 개발구상에 관한 정보를 얻을수 있었으며 수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인생선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물을 2명 만났다.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 (環日本海総合研究機構)라는 동경에 거점을 잡은 연구소가 있는데 그 연구소의 이사장 도조언(涂 照彦)과 사무국장 누쿠이 히로시(温井 寛) 가 회의에 참가하고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두만강개발을 포함한 동북아경제협력의 중심지가 환일본해 지역이였기에 지금도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연구소나 학회가 많이 있다. 그런데 동경에 이런 연구회가 있고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일본해쪽에 가지 않아도 일류의 학자와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이 두분은 대단한 사람이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였다. 도조언 이사장은 당시 나고야(名古屋)국립대학과 교수였는데 대만출신으로서 동경대학에서 박사를 졸업한 일본에서 유명한 국제경제학 학자였고 1980년대에 니이가타(新潟) 대학에서 교수로 있을 때 처음으로 [환일본해국제경제권]을 형성할 아이디어를 논문을 통해 발표한 동북아경제권을 제창한 첫사람이였다.
누쿠이 히로시 사무국장은 일본사회당의 사회신보(社会新報) 편집장을 오래간 담임하고 있어 사회주의권의 여러 나라들을 많이 취재한 경험이 있는 유명한 국제파 기자였다. 1990년대초부터 일본의 정치가들은 [환일본해 초당파국회의원 포럼]을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환일본해 국제경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사회당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의 동북아연구의 일류 학자들과 정치가들을 조직하여 만든 연구소였다.
장춘회의가 끝나자 나는 연변의 훈춘으로 향했다. 연변태생인 나였지만 인생 처음으로 훈춘이라는 곳에 가 보게 되였으며 훈춘경제개발구를 현지고찰하고 조사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그길로 조선의 라진까지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국수속이 순조롭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 국제회의 참가와 현지고찰의 덕분에 나의 석사론문은 식은죽 먹기로 써낼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경에 돌아온 후 나는 환일본해종합연구기구의 누쿠이 (温井) 사무국장을 찾아간 일이다. 다망한 중에서도 기꺼이 나를 만나 주었다. 나는 자신의 상황을 소개드리고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드리겠다고 하였다. 누쿠이 선생은 자기의 성이 온정(温井) 이기에 금강산의 온정리가 자기의 고향일수도 있고 자기의 선조가 조선사람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으며 1970년대부터 김일성주석을 3번이나 단독 취재한 일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인자하고 박식한 분이여서 이야기 나누기도 쉬웠다.
나중에 이분이 나의 인생의 길잡이를 해주고 아버지처럼 가족적 관계를 만들어 주기도 한 참으로 내 인생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결혼은 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는데 우리를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한 가족처럼 사랑해 주었다. 설명절마다 자택에 초대해주고 일본의 전통적 설명절 료리를 대접해 주었다. 또한 나의 아들을 친 손자처럼 대해주고 세배돈도 매년 꼭꼭 주었다. 일본의 유명한 별장지 가루이자와(軽井沢)에 별장 한채를 가지고 있어서 매년 여름이면 자기의 별장에 초대하여 3,4일씩 같이 생활하였다.
사업상에서는 나를 젊은 연구자로 길러 주었다. 이 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의 편집을 나한테 맡겨주고 많은 지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매년 니이가타에서 개최되는 동북아경제포럼에 나의 려비까지 대주면서 같이 다녔다. 나의 학술적 활동면이 급속히 늘어나고 일류의 학자들과 국회의원들과의 인맥도 급속이 확대되였다. 그러다보니 일본의 원총리들과도 연구회나 학회에서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한편 나는 대학원에서 박사론문에도 정력을 넣어야 했다. 그리고 또 대학의 중국류학생회 회장도 맡으면서 중국대사관과의 관계도 넓혀졌다. 형의 관계로 연변대학 일본학우회의가 조직하는 활동에도 가끔 참가하면서 연변출신의 학자교수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생겼다. 1995년에는 천지구락부(天池倶楽部)라는 조선족류학생 단체가 동경에서 성립되였는데 나는 조선족사회와의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이듬해에 연변대학출신의 정선생의 초대로 천지구락부에서 조직한 모임에 보고자로 참가하여 두만강개발상황을 보고 했다. 그후로부터 점차 일본의 조선족 사회와 교류가 많아졌고 천지협회의 부회장도 맡으면서 조선족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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