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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학
찌는듯한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음력 8월이 다가오면 아침저녁으로 날씨는 신선해지며 하늘은 맑고 높아진다.
지난 세기 70년대, 이맘때가 되면 고향마을에서는 탈곡장을 닦는 작업을 다그치고 추석바심이를 서두른다. 탈곡장터는 일반적으로 마을이나 툰 변두리의 공지를 선책한다. 농민들은 탈곡장터의 농작물을 거두어 내고 보습으로 땅을 엷게 갈아번진다. 그리고 골고루 써레질을 한다. 써레질작업이 끝나면 소에게 석마돌을 메워 땅을 다진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마돌은 원기둥이나 량옆 직경이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원을 향하여 굴리는 석마돌의 한쪽 직경이 다른 한쪽 직경보다 작으면 원심력의 원리에 의하여 소가 적은 힘을 들이고 일축을 낼수 있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의 생산실천가운데서 터득해낸 지혜가 숨어있다. 땅이 다져지면 그우에 촉촉하게 물을 뿌리고 묵은 북데기를 골고루 펴고 또다시 석마돌을 굴린다. 석마돌을 굴리는 일이 끝나면 터갈라진 틈서리나 작은 홈채기를 메우기 위해 우사의 소똥을 실어다 붓고 또 물매질을 한다. 다 마무리된 탈곡장은 떡판처럼 반듯하고 운동장처럼 넓고 시원하다.
가을 백노가 지나면 농민들은 벼가 잘 영글고 배수가 잘되는 논뙈기를 골라 바심한다. 추석명절을 앞두고 탈곡장에서 벌어지는 소고기 나눔새는 너무나 이색적이다.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사냥을 한 수렵물을 나누듯이 소를 잡아 소가죽을 벗기고는 그 우에 고기와 내장 그리고 뼈를 골고루 섞어 인구에 따라 몫을 나누고 호를 단위로 무지를 만들어놓고 매 세대주의 이름자를 종이에 척 박아 표시를 해놓는다. 그러면 분배때문에 의견을 제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제날 고기붙이가 너무나 드물었고 항상 제한된 식량으로 쪼들리게 생활하여 왔던 우리들에게는 추석날 먹는 소고기에 백옥같은 햇이밥이 천하별미였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게 부러울게 없이 행복하였다.
날씨가 점점 차져 개울가의 물들이 살어름이 지기 시작하면 고향 마을은 본격적으로 가을싣걱질과 탈곡에 들어간다.
탈곡장은 모든 농작물들의 집합 장소였다. 농민들이 봄에 힘들게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린 모든 농작물의 결실은 고스란히 탈곡장에 모인다. 실어들이고 털어내고 저장하고 남기고 나누어주는 모든 작업들이 흐름식으로 진행되여 로력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 탈곡장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에 일을 하다 휴식시간이 되면 농민들은 집체로 정치학습이나 비판토론회 혹은 생산대 가을 분배와같은 일반회의를 벌릴 때도 있었다. 회의가 열리지 않을 때는 모여앉아 인생살이도 담론하고 때론 누군가 걸죽한 잡담을 늘여 놓아 탈곡장이 떠나갈듯한 웃음판으로 번져 지기도 하였다.
탈곡장은 농민들의 애환이 서렸던 곳이기도 하였다. 지겹게 어렵던 그 시절 아무리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량식고생을 하는 군체가 바로 농민들이였다. 매년 탈곡이 시작되면 공작대가 내려와 나라와 집체, 개인의 3자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여야 한다며 모든 농작물을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철같은 원칙을 제기하고 누구든 그를 어기면 엄하게 다스렸다. 심지어 감자나 고구마도 30%를 곡물로 환산하여 농민들에게 지급하였다. 우리 고장은 나라의 공구량임무를 완성하면 인당 벼 450근이 차려졌다. 터밭에서 나는 남새외에 기타 농산물이 거의 없었던 그때는 그 량식표준 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여 농호 대분분이 량식고생으로 몸살을 앓았었다. 커가는 아이들, 특히 남자애들이 여럿인 가정들에서는 하는수 없이 입쌀을 시내에 지고 가 수량이 많은 옥수와 같은 잡곡을 바꾸어 먹기도 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밤탈곡을 유난히 좋아했다. 왜내하면 밤탈곡을 하면 생산대에서 지급하는 일인당 3량의 보조량과 기름이 조금 들어간 반찬이나 국물을 얻어먹을수 있었기때문이였다.
한번은 탈곡장에 감자를 실어들이고 아줌마들이 크기에 따라 분류하였다. 작업하다 보습날이나 호미날에 상한 감자들을 돼지먹이에 처넣기가 너무 아까와 담이 크게 슬그머니 탈곡장 변두에 있는 집체양돈장의 돼지죽가마에 삶았다. 때마침 어느 농가에서 가을배추김치를 버무리였다. 예로부터 삶은 감자와 김치는 찰떡궁합이였다. 하여 그날 탈곡에 참가했던 사원들은 휴식시간에 삶은 감자를 놓고 갑작스러운 “파티”를 열어 마음껏 즐기였다. 그후 “감자파티”에 참석했던 사원들이 누구나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그런대로 아무 탈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탈곡장은 마을 청년들의 활동장소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탈곡장이 닦아지면 그 시기에만 있었던 여러 항목의 민병훈련이 진행되였고 아이들은 뽈을 차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유희를 즐기였다. 어린시절 하학하면 몸 먼저 마음이 가닿는 곳이 탈곡장이였다. 책가방을 둘러메고 탈곡장에 들려 책가방 두개를 탈곡장의 변두리에 척하니 놓고 축구장의 꼴문대를 만든다. 편을 갈라 축구를 시작하면 서쪽하늘에 해가 지여 공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아쉬운대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날 학교 축구팀의 대원들이나 이름을 날린 축구선수들은 거의 다 탈곡장에서 뽈을 익히고 뽈을 차던 “뽈개지”들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탈곡이 끝나고 마당의 곡식들이 다 거둬들이면 남는건 여러가지 북데기나 콩깍지들이다. 그러면 탈곡장은 집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모여드는 “동물농장”이 되였다.
보이지 않는 집돼지들은 탈곡장에 나가보면 십중팔구는 찾을수 있었다. 돼지를 찾아 탈곡장에 들어서면 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눈길을 북데기무지에 박고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저기에 하얀 서리가 끼여있고 연한 김이 살살 피여오르는 곳이 있다. 집돼지들이 길다란 주둥이를 북데기무지에 들이박고 정신없이 뒤번지며 “노다지”를 캐다 북데기속에서 그대로 잠이들어버린것이다.
돼지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면 당연히 돼지똥들이 널려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탈곡장엔 돼지똥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매년 겨울만 돌아오면 학교에서 소학생들에게 비료모으기 임무를 준다. 어릴적 나도 비료모으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작은 발구를 끌고 손을 홀~홀~ 불며 마을 골목길이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공지를 누비며 돼지똥이나 개똥을 찾아 다녔다. 그중에서도 애들이 가장 많이 다녔던 곳이 바로 탈곡장이였다. 탈곡장에 가면 돼지똥들이 많이 널려있어 어렵지 않게 작은 발구를 채울수 있었다…
탈곡장을 둘러싸고 돌아가던 농촌에 어느해부터 인가 변화가 일기 시작 하였다. 호를 단위로한 호도거리가 시작되자 운동장과같은 큰 탈곡장은 무용지물이 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농촌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고향에서는 벼농사마저 그만 두게 되였다. 탈곡장터에는 한집, 두집 기와 집들이 즐을 지어 일어서게 되였다.
요즘 고향 마을에는 또 거세찬 개발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마을 복판에 60메터 너비를 가진 아스팔트길이 동서로 아득히 뻗어나갔고 탈곡장터의 단층집들은 파가이주되고 그 자리엔 현대식고급아빠트가 그 높이를 자랑하며 하늘을 차고 일어서고있다. 예전의 탈곡장터의 흔적은 오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농민들의 삶의 터전이였고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슴배였던 곳이며 탈곡기가 윙윙 돌아가고 벼단이 춤을 추며 누런 낟알을 털어내며 들끓었던 탈곡장의 이색풍경은 서서히 력사의 뒤안길로 멀어져가고 말았다.
다만 아직 우리 세대의 추억속에 그 이색풍경이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웬지 오늘따라 다시한번 추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흘러가버린 이색풍경에 푹 빠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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