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세대들은 뒤주를 보았을가?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을 뒤로뒤로 슬슬 밀고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 세대의 고달픈 삶을 살펴보면 뒤주가 보이기 시작한다.
농사군인 아버지의 소박한 꿈은 큰 뒤주를 갖추고 뒤주에 곡식을 꼴독 채워 흡족하게 바라보는 것이였다고 한다. 그게 아마 부자꿈이 였으리라.
그래서 감자골이라 불리우는 두메산골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에라, 이곳이 아니면 못살랴!)싶어 태를 묻고 정들었던 고향을 뿌리치고 무작정 이주민들 속에 끼여 두만강을 건너고 개산툰 후동고개를 넘어 화첨자라는 곳에 정착했다.
화첨자는 감자골 보다는 조금 나아 감자를 섞은 보리밥으로 때를 에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땅이 없이 부자집 소작살이만 했는지라 쪼들리는 생활은 계속되고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아 아버지의 뒤주의 꿈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생활을 이어가다 광복을 맞이하고 이어 땅을 분배받게 되였다.
후에 살면서 보니 그당시 아버지의 소박한 부자꿈이 이루어 지지 않은것이 천만 다행이였다. 만약 그 세월 아버지가 자신의 소유한 땅이있고 거기다 여러개의 뒤주를 갖추고 생활에 여유가 있게 잘 살았더라면 어찌 가정성분을 빈하중농으로 획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세월 지주, 부농가정 락인이 찍히고 정치적으로 악몽과도 같은 다른 궤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만해도 무서운 일이다. 세상일이란 요지경으로 때론 이렇게 나쁜 일이 오히려 좋은 일로 번져질 때가 있는가 보다.
토지개혁으로 아버지는 오매에도 바라던 땅의 주인이 되고 당신의 땅에 당신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였다. 아버지는 인젠 자신의 소박한 뒤주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몇해간 아글타글 등이 휘고 손뿌리가 터지게 밭농사에 올인하였다. 하지만 워낙 척박한 땅과 렬약한 환경인데다 운마저 따라 주지 않아 먹을 량식마저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또 땅을 팔고 소수레에 한해 농사에서 얻은 알곡과 짐을 챙겨 싣고 바람에 실려 다니는 민들레씨처럼 날려간 곳이 부르하통하가 굽이쳐 흐르고 버들방천 우거진 솔완자라는 연길벌이였다. 솔완자는 참, 살기 좋은 고장이였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그 당시 중국 어느 농촌들과 다름없이 호조조, 합작화, 인민 공사를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과 꿈이 벅차올랐다.
허나 록록치 않은 현실 생활은 늘 아버지의 뒤주꿈을 멀리 날려 보냈다.
그후 60년대 중기에 이르며 나라에서는 전한 단계의 극 ‘좌’적이고 실제를 떠난 그릇된 농촌정책을 시정하고 새로운 농촌정책을 실시하였다. 아버지의 뒤주꿈은 희망이 생겼다. 나라에서 대약진과 3년재해를 이겨낸 이듬해 고향마을은 대풍작을 거두었다.
생산대에서는 일년 량식을 분배하여 주었다. 다섯 식구의 량식은 겉벼로 거이 2천근이 넘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집식구들이 먹을 벼를 찧고 알곡이 나머지가 생겼다. 아버지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뒤주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다음해 봄 아버지는 초가집 아래간에 뒤주공사를 벌렸다. 나무가 귀한 곳이라 요행 여기저기에서 널판자를 주어다 벽 세면을 두르고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밑면은 돌로 구들고래를 켰다. 앞면은 널판자를 가로 고정시키여야 했는데 못이 참나무에 잘 들어 박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박으면 못이 휘여들기를 반복하던 중 누군가 못 끝에 콩기름을 바르면 잘 들어간다기에 그대로 했더니 과연 틀림없었다. 다만 인당 한달에 2냥으로 공급된 귀한 콩기름을 아쉽게 못박이에 허비해야만 했다.
그해 우리 집 초대형 뒤주공사가 드디여 마무리가 되여 아버지의 뒤주꿈은 한단계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뒤주꿈이 이루어 지고 뒤주에 벼가 차있어 보기에는 그럴듯 했다. 하지만 웬지 해마다 먹을 량식은 모자라 량식고생은 계속되였다. 집집마다 벽에 량식절약공약이란 게시판이 번듯하게 붙혀있어 시시각각 안주인들의 신경을 조이였다.
량식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는6, 70년대 나라에서 제정한 농촌량식표준을 보면 불보듯 뻔했다. 수전지방의 량식표준은 징구량을 완성하면 인당 겉벼로450근이고 완성못 하면350근 이였다. 말이450근이지 거기에서 메주콩이나 기타 잡곡들을 덜면 그 수량에 가닿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생산대의 거이 모든 집들이 량식고생을 하였다.
먹을 량식이 부족하니 사람들은 늘 배고프고 허기진 상태여서 혹 좋은 음식을 만나면 뒤를 가리지 않는 일이 벌어지곤 하였다. 따라서 뭐든지 많이 먹는 먹방 스타들이 나타났다. 60년대 말 중학교시절 전쟁준비로 학교 운동장 옆에 방공굴을 판 적이 있다. 돌도 씹으면 소화시킬 한창 때이고 일이 힘들고 지친 상태라 우리 반 남자애가 청무우와 입쌀을 섞은 죽 여섯 그릇을 해치웠다. 아래 마을 청년은 한끼에 두부 열한모를 소멸하고도 아쉬워 하더라고 했다. 또 앞마을 청년은 운동대회가 끝나고 저녁회식에 참가하여 국수 다섯그릇을 훌쩍 비웠다. 출출하고 허기진 김에 보신탕을 마주 하자 급한김에 큰 국자로 마구 퍼먹는 젊은이가 있어 주변을 놀래우기도 했다. 특수 환경과 년대에 우리가 몸소 겪고 본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명절이거나 집에 손님이 올 때에나 하얀 밥이 음식상에 오르고 일반시에는 입쌀에 감자나 청무우를 섞은 밥그릇이 오르기 일쑤였다. 어릴 적 섞음밥이 너무 싫어 때 아니게 명절이나 손님이 그리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후 아버지가 세상을 뜬 이듬해인 80년대 초 나라에 서는 집체를 단위로 한 생산경영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호를 단위로 한 도급제를 실시하였다. 도급제를 실시하자 첫해에 이변이 일어났다. 우리 집은 호에 해당한 징구량을 나라에 바치고도 아버지가 만든 뒤주에 벼를 넘쳐나게 저장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평생 이루지 못한 꿈과 소망을 끝내 이루어 냈고 그로 하여 지겨웠던 량식고생은 종말을 짓게 되였다. 어머니가 기뻐하신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해 넉넉한 식량에 다달이 지급되는 나의 교사로임이 더해져 생활은 처음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여유가 있게 되였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그후 가족이 성시식량배급을 받게 되자 아버지가 남겼던 뒤주는 자리만 차지하고 쓸모없는 페물이 되여버렸다. 80년대 말 시내의 단층집에 이사를 가 살게 되니 여러개의 작은 오지독들이 뒤주를 대신하였다. 오지독을 사용하니 자리를 적게 차지하고 보기에도 좋았으며 사용하기에도 퍽 편했다. 어머니의 손길은 늘 오지독에 가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을 머금은 오지독은 언제보나 반들반들 광택을 내며 온 집안의 넉넉한 삶을 보란 듯이 자랑하였다.
90년대 중기에 아파트에서 살게 되자 오지독도 편하지 않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오지독은 뒤주의 사명을 다 한것이다. 오랜 세월 사용해 오며 손때 묻고 애지중지하며 세월을 함께해 온 오지독을 버리게 되니 어머니는 너무 괴로워하고 아쉬워하셨다. 여러개 오지독 가운데 밤빛 오지독은 어머니가 광복 이듬해 화첨자에서 연길장에 가 사서 왕복100여리 길을 머리에 이고 온, 년륜이 가장 긴 오지독이였다. 오지독은 연길에서 화첨자로, 화첨자에서 연길 교외 솔완자로, 솔완자에서 다시 연길 도심으로 원형을 그으며 주인을 따라다닌 애물단지였다. 그것을 버리게 된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삶의 환경과 질이 변화를 거듭하며 쌀뒤주의 변화도 거듭되였다. 처음 아파트로 이사를 와 50키로그람 비닐통 쌀뒤주를 사용했는데 가볍고 매우 편했다. 그후 또 버튼을 누르면 계량되여서 쌀이 나오는 30키로그람 용량을 가진 미형 쌀뒤주를 사용했다. 헌데 시간이 지나며 그것마저 크고 거치장스러워 아예 5키로 용량의 초미형 쌀뒤주를 사용했다.
또 몇해가 지나 시장에는 1키로그람 용량의 원기둥이나 압축용으로 포장된 비닐쌀뒤주가 류통되여 장보고 들고 다니는데 상당한 편리를 가져다 주었다. 헌데 그것 마저 불편하다고 아예 마트에 전화를 걸어 집까지 쌀을 배달시켜 먹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하다. 너무 편해 누워서 떡먹거라 손발에 털이날 지경으로 호강스럽다.
쌀뒤주가 대형으로부터 소형으로의 변화는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지나온 우리들의 삶의 력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자라고 귀할 때는 많고 큰것을, 넉넉하고 넘칠 때는 적고 편한 것을 바라는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수량보다는 질과 맛 그리고 몸에 리로운 유기농쌀을 선호하는게 요즘 사람들의 삶의 태세인 것 같다.
참, 살기가 편하고 쉬운 좋은 세상을 맞았다.
큰 뒤주를 꿈꾸며 배를 곯는 허황한 세월은 영영 가버리고 지금과 같은 넉넉함의 환경에서 편리하고 간편한 쌀뒤주의 시대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연변일보 해란강부간 3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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