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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컵] 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2020년 09월 21일 16시 03분  조회:514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한영철


지난해에 우리 집 세식구는 한국에 가서 음력설을 쇠게 되였다. 그전까지 공무차로든 친척방문차로든 한국에 여러번 다녀왔지만 거기서 음력설을 쇠기는 처음이였다. 하긴 뭐 요즘에는 형님을 비롯한 형제들과 조카들 그리고 친척들 대부분이 한국에 머물러있는지라 설명절이나 련휴 때면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움직이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에 간 지 얼마 안되여 형님은 이번 걸음에 아버지의 고향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물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한번 다녀오는 것이 오랜 념원이였던지라 나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정월 초사흗날, 형님, 누나, 조카 그리고 나까지 넷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 평택에서 떠난 차는 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달렸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였다.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의 동년의 발자취와 청춘의 숨결이 남아있을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과 더불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북받쳐오르는 이름 모를 감동 때문이였다.

사전에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큰집의 형수님이 우리가 어떻게 오고 몇시에 도착하는가고 여러번 전화로 문의해왔다. 그러고도 걱정스러웠는지 포항에 있는 딸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를 마중해서 모시고 오라고 분부까지 했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 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버지의 고향인 산내면 쪽으로 달렸다.

조상들의 뼈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고향과 가까워질수록 초조감 때문에 나는 차창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길옆에 무심히 자란 일초일목마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차창 쪽으로 바짝 밀어붙이고 더욱 유심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곳일가?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또 어떤 모습으로 되여있을가?’

나로 말하면 조상들의 넋이 슴배여있고 그들의 숨소리가 은은하게 다가올 것만 같은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 자체가 감동이고 격동이였다.

“다 왔어. 여기야!”

그 소리에 흠칫 놀라서 깊은 사색에서 깨여났다.

차에서 내려보니 시골 내음이 다분한 오붓한 동네였다. 우리가 찾아간 사촌형님네는 새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자못 아담해보였다. 널판자로 울타리를 빙 둘렀고 뜰안에는 경운기 한대와 네바퀴 오토바이가 세워져있었다. 집 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이 자라있었다.

대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서는데 사촌형님과 형수님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뛰여나온다. 큰아버지네 아들과 며느리 되는 분이니까 우리 가문의 종가집 후손들이였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고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한바탕 수인사가 끝나고 나서 사촌형님 내외가 정좌하자 우리는 례법 대로 큰절을 올렸다.

“너그들이 오니 참으로 반갑다야. 오노락꼬 욕 보았다.”

“많이들 기다렸다. 고생들 했다.”

처음으로 듣는 한씨 집안만의 고유한 남도말투였다.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듯했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말투가 떠올라서 그랬던지 그 소리가 듣그럽게 들리지 않았다. ‘아, 이것이 바로 혈통이라는 거구나. 옛말이 그른 데 없다더니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구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 때가 되였다. 형수님은 75세의 고령이였지만 제사와 같은 대소사를 자주 치르는 종가집 며느리라 그랬는지 저녁 차리는 솜씨가 여간 잽싼 게 아니였다. 년세에 비해 목소리도 챙챙하고 기억력도 아주 좋았다.

저녁상을 둘러싸고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큰아버지는 생전에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엄청 즐거워했단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중국에 간 우리 아버지가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큰아버지랑 삼촌들이랑 함께 아버지 제사까지 지냈다니 그 심정을 가히 헤아릴 수 있었다. 이런 얘기들을 그전에 인편으로 듣기는 했다만 이번에 아버지의 고향에 와서 직접 들으니 그 충격은 배로 늘어났다.

정든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와 생리별을 하게 된 것도 엄청 고통스럽고 서러운 시련이였을 텐데 한몸이 성한 채로 퍼렇게 살아있는 데도 부모와 형제들은 그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니 너무나도 억이 막혔다. 순간 이국타향에서 혼자서 향수를 달래며 죽도록 고생만 해온 아버지의 얼굴이 우렷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1921년, 한국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에서 한씨 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한일합병’으로 일제의 치하가 시작되여서부터 침략자의 마수는 조선 팔도강산 그 어디든 뻗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편벽한 시골 오지인 아버지의 고향도 영낙없이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면에 주둔한 일본경찰은 마을에 있는 청년들을 강제로 징병하기 위해 시골 오지인 아버지의 고향 산내면까지 쫓아왔다.

식구가 많아서 내남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동네에는 저 북쪽에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중국의 동북평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런 와중에 일본놈들의 징병 위험까지 들이닥치자 아버지는 18살 되던 해에 혼자서 불철주야 북상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들 중의 남도(南道) 이주민 1세의 반렬에 오르게 되였다.

정작 건너오니 동북땅도 호락호락한 고장은 아니였다.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는 어디로 가든 똑같은 세월이였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몰랐던 아버지는 이국타향의 허허벌판에서 탄광과 벌목장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그 과정에 별의별 고역을 다 치렀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투항을 선포하던 그 무렵 아버지는 연길에 계셨다.

그 뒤,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한 처녀를 만나 지금의 연길시 근교의 소영촌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아버지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런 자식들이 중국에 정착한 남도 이주민 2세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평시에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농한기에는 부업으로 소방목도 하고 양봉업도 했다. 식구들을 배를 곯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신념 하나로 아버지는 억척스레 일하며 평생 고생에 부대꼈다. 그러다가 1985년, 파상균감염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6~7년만 더 앉았어도 꿈속에서도 사무치게 그리던 고향땅을 밟아볼 수 있었으련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우리가 사는 소영촌에는 남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에 마을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경상도사투리를 들으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남도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건너왔기에 우리한테는 사촌과 같은 가까운 친척들이 없었다. 어린시절, 내 또래 친구들은 쩍하면 오늘은 할아버지네 집이요, 래일은 큰집이요 하면서 하루 건너 친척집에 다녀왔지만 우리가 드나들 수 있는 친척집이라곤 외삼촌네 집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우리에게 당신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조전리(枣田里)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대추가 유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언젠가는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셨다. 하지만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난 지 40여년이 되도록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40년은 인류력사의 긴 강으로 말하면 일순간에 불과할지 몰라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말하면 반평생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동안 아버지는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고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가?

지난 세기 70년대말부터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서신거래가 잦아졌다. 그 때 우리 마을의 누구네 집에서도 한국에 있는 친척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의 주소를 모르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나오는 리산가족찾기 프로그람을 듣군 했다. 당시 아버지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늘 그 방송프로그람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아버지는 또 둘째형님한테 부탁해 연길시에 살고 있는 한××가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메아리방송에 편지를 보내게 했다. 그 편지를 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더욱 메아리방송에 신경을 기울였다. 얼마후 한마을에 사는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 나왔다는 것이였다.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을 찾았다고 자랑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자청해서 술까지 한잔했다. 오매불망 애 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지는 어린애마냥 즐거워했다.

얼마후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혈육의 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주소도 아버지가 기억한 것과 거의 비슷했다.

“아우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로 알았던 네가 살아있다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기쁘기가 한량없구나. 타향에서 고생은 또 얼마나 했고…”

그 날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우리 집안의 소중한 력사기록물로 남을 만큼 조심스럽게 간직되고 있는 편지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 한국방문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어떤 집들에서는 친척방문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허나 우리 집의 사정은 좀 특별했다. 아버지가 망인으로 기재된 것이 화근이였다. 그런 상황이니 큰아버지도 우리를 요청할 수 없었다.

2001년, 큰형님은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고 그 뒤 한국에서 쭉 일하면서 생활하게 되였다. 그 당시 큰형님은 우리 집의 대표로 처음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았다. 그 때 아버지의 형제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고 산내면에는 사촌형님네 내외간만 살고 있었다. 사촌형님은 아버지의 고향에 찾아온 사촌동생을 그토록 반갑게 반겨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집안제사 때면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했다. 진짜 가슴이 미여지도록 아픈 이야기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삼촌의 제를 지내주었다니 감격에 목이 메는 순간이였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갑산집이요, 룡포동집이요 하는 조상들 고향마을 이름을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 법 대로라면 우리 집은 조전리집이였을 것이다.

남도 사람들의 생활 특징은 우리 집에서도 려과없이 나타났다. 과거에 동네에서 고추장을 담그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아버지는 비빔밥도 좋아하고 랭국도 반겼다. 학교에서 들놀이 갈 때 내가 고추장을 발라서 구운 더덕반찬을 가져갔더니 모두 맛 있다고 야단이였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어언 35년이 된다. 그 사이 나도 한국에 여러번 다녀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육이였기에 40여년의 리별 속에서도 서로 잊지 않고 끈끈한 정을 이어오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수천수만명의 이주민 력사중의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리별과 상봉, 슬픔과 환락이 어우러져있는 진실한 력사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남도 조상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강들이 모여서 주야장천 바다로 흘러가듯 쉼없이 엮어지고 있다.
 
<로년세계> 2020년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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