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도 남는 여유
박철산
북적북적한 도심에서 살다가 공기가 맑고 전경이 좋은 강뚝 옆의 엘레베터가 달린 새집에 이사 가게 되면서 또 한번 이사짐을 싸게 되였다. 꼬박 15년 만에 하는 이사임에도 나에게는 몸에 배인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다. 이순의 문턱을 넘어선 지 이슥한 나에게 이사는 잦았던 전근과 정비례될 만치 그 차수가 많았다. 손으로 꼽아보니 이번이 자그만치 14번째다.
여러개의 향진과 기관의 여러 부문을 돌면서 사업하다보니 전근이 잦았고 그만큼 이사도 잦았다. 매번 이사짐을 꾸릴 때마다 쓰던 물건을 버리는 일이 제일 곤혹스러웠다.
결혼할 때 친구들이 선물한 수십년 된 기념품, 세간 날 때 부모님들이 사준 가스렌지, 아들애 돌생일 때 갖춘 밥상… 세월이 흘러 이젠 대부분이 색 바래고 시대에 한창 뒤떨어진 고물이 되여버렸지만 손때 묻고 정이 오르고 기념적인 의미가 있다는 핑게를 둘러대면서 번마다 고생스럽게 꿍져서는 새집으로 날라갔다.
옷장 문을 열고 옷부터 챙겼다. 계절에 맞춰 빼곡하게 줄을 세워놓은 옷들이 옷장 가득 넘쳐났다. 정장만 해도 몇벌 된다. 출근할 때 몇번 입어보고 퇴직한 후에는 가끔 례식장에 갈 때나 한번씩 걸칠 뿐 평소에는 전혀 입을 일이 없다보니 옷장을 지키는 병사가 따로 없을 만큼 머쓱하게 걸려만 있었다. 꺼내서 입어보았더니 마치 빌려입은 옷처럼 엉성하였다. 몇번 걸치지도 못한 정장을 그대로 버리자니 아깝고 남한테 주자니 탐탁치 않게 여길가 봐 입을 만한 옷들을 골라 세탁소에 맡겨 깨끗이 빨았다. 그리고 나서 옷들을 네거리에 걸어놓고 “수요되는 분들은 가져가세요.”라는 글이 적혀있는 패말을 그 옆에 걸어놓았다. 과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옷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불필요한 책들은 페품수매소에 팔아넘겼고 글쓰기에 필요한 공구서적과 명작들만 남겼다. 책만 해도 수십상자 되리라 짐작했는데 선별작업을 거치고 나니 달랑 서너상자가 남았다. 옷견지와 책, 신발 등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이사짐이 퍼그나 간편해져 마음도 따라 홀가분해졌다.
이립의 나이에는 무엇이나 얻고 가지고 잡으려고 아둥바둥하며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하루빨리 승진해서 로임이 오르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예쁜 안해를 얻어 근사한 아빠트에서 자식들을 낳아 키우면서 알콩달콩 행복한 생활을 이루기 위해 미친듯이 일만 했다.
하지만 이순의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사유가 달라졌다. 퇴직과 함께 생활반경이 점차 좁아지면서 심미관과 가치관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저도 모르는 사이 실용주의라는 척도에 맞춰 생활을 재단해나가게 되였던 것이다. “벗이 많으면 길이 더 넓어진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격, 취미가 서로 엇비슷한 친구끼리 만나는 게 더 편해졌다.
퇴직 초기에는 그래도 이런저런 협회에 가입하여 여러가지 활동에 참가했지만 요즘은 다 접고 작가협회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워이신 친구들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가입했던 불필요한 그룹에서 모두 나와버렸다. 이렇게 하니 의미가 없는 모임에 참가하는 차수가 줄어들고 술상을 마주하는 일들이 적어지면서 독서와 글쓰기에 더 많은 정력을 들일 수 있었다.
무언가를 버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더하기와 덜기의 련속이나 진배 없다. 빈주먹에 왔다가 한줌의 흙으로 자연에 돌아가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전반전에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아글타글했다면 인생의 후반전부터는 하나, 둘 비워가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한 누군가의 말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당신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잘 나갔든 나이가 들어서는 과거에만 련련해하지 말고 현실에 립각하여 진부한 사유와 가치관, 탐욕과 허영심, 부정적인 언행과 묵은 습관을 대담하게 버리길 바란다. 주어진 삶에 항상 만족하고 꾸준히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새 사물을 받아들이는 진취적 습관을 키워가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매너 있게 늙어가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버리며 살아가는 지혜를 갖출 때 우리의 황혼길에도 비로소 더 아름다운 꽃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나무처럼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쓸데없는 굵은 가지, 병든 가지, 제멋대로 자란 가지 등을 잘라내면 나무가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매한가지이다. 이사짐을 정리하며 마음까지 정리된 것 같아 한결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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