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해의 바람
김경조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몇달 전부터 안해의 눈을 피해가며 도적담배를 피웠는데 끝내는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올봄의 어느 하루, 안해가 밖으로 일 보러 나간 틈을 타서 능숙하게 뒤창문을 열어제끼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안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피우던 담배를 미처 숨길 새도 없는 데다 입과 코로 짙은 담배연기가 마구 뿜어나오는데 변명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안해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내 등을 사정없이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담배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또 담배생각이 난답니까?”
안해는 내 병의 근원이 담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긴 내가 워낙에 골초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3년전, 페암 판정을 받고 한쪽 페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다시 담배를 입에 대는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다.
녀자들은 40세가 넘으면 목청이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 날 일을 겪고 나서 확신하게 되였다. 여직껏 살아오면서 내 앞에서 언성 한번 높인 적 없던 안해가 그 날 따라 지붕이 날아갈 듯 고함을 지르며 나를 나무랐는데 마치 뭔가 끝장을 내려고 작심한 것 같았다.
“가요! 살기 싫으면 자식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우리 둘 같이 바다에 뛰여들어요!”
우리 집이 마침 바다와 10분 거리에 있는지라 안해의 머리속에 가장 먼저 바다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내 팔을 인정사정없이 잡아끄는 안해의 눈에서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술후 몸을 겨우 가누는 남편을 살리겠다고 3년이 넘도록 그 비싼 해삼과 전복으로 영양식을 만들어 올리는 안해의 정성을 뒤로 한 채 그녀가 그토록 질색하는 담배를 다시 찾았으니 어찌 환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안해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나는 그동안 지켜왔던 자존심을 내려놓고 안해를 와락 끌어안으며 진심으로 잘못을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젠 정말로 담배를 끊을게!”
아무도 참여하지 않은 우리 둘만의 ‘전쟁’에서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고 안해가 내놓은 3가지 조항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전쟁’은 소리없이 마무리되였다. 그 3가지 조항은 이러했다. “첫째, 담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둘째, 술은 냄새도 맡지 않는다, 셋째, 아침저녁으로 한시간씩 걷는다.”
패자의 운명은 늘 그렇듯 ‘참담’했다. 하루 사이에 우리 집의 위계질서는 ‘녀명남복(녀자의 명에 남자가 복종하다)’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안해의 엄격한 감독하에서 이 3가지 조항을 어김없이 지켜야만 했다.
3년전 내가 수술을 받던 날, 수술실로 들어가는 나를 바래는 안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두 다리를 덜덜 떨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안해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페를 도려내는 수술은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되는 대수술이였던지라 장장 6시간 뒤에야 나는 비로소 수술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행운스럽게도 나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마음을 조이며 애 타게 나를 기다리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다시 보는 순간 안해는 허둥지둥 달려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도 큰 수술이였던지라 나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튿날 아침 8시, 면회실로 들어오는 인파 속에서 나는 안해와 아이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도 반가워 희죽 웃었다. 일반 병실이 아닌 중환자실로 실려간 내가 걱정되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가슴을 조이였는데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모든 불안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며 안해는 지금도 외운다.
한동안의 병원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안해는 지극 정성으로 나를 돌봐주었다. 몸에 좋다는 영양식을 정성껏 만들어서는 하루 세끼 꼬박 대접했고 내가 입맛이 없어 둬술 뜨네마네하고 수저를 내려놓으면 “한술만 더!” 하면서 얼리고 달래기도 했다. “어쩜 외손녀를 키울 때보다 더 힘드네요.”라며 응석을 부리는 안해 앞에서 수저를 다시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안해는 한밤중에 자다가도 몇번씩 일어나 맥없이 자고 있는 내 얼굴에 대고 숨소리를 확인해보군 하였다. 행여나 이상한 증상이 있을가 봐 마음을 조이며 불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안해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수술한 지 3년 뒤에 이루어진 정밀검사에서 회복이 빠르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였고 지난 여름부터는 낚시동호회 친구들과 낚시질을 다닐 정도로 나의 건강은 몰라보게 좋아지고 있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안해와 함께 하면서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너무 많이 지면서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언제 한번 뭉치돈을 가져다 안해의 손에 쥐여준 적 있나, 그렇다고 평생을 살면서 안해한테 화장품 한번 선물해준 적도 없었다. 철따라 류행되는 예쁜 옷 한벌 내 손으로 사주지 못했고 안해의 손을 잡고 려행 가본 기억도 없다. 돌이켜보면 나라는 남자는 안해에게 지지리도 못난 남편이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해는 나를 만나 살아온 60년 가까운 세월이 너무나도 보람 있고 내가 지금까지 자기 옆에서 버팀목이 되여주어 얼마나 행복하고 든든한 지 모른단다. 다음 생에도 어김없이 나를 찿아와 남편으로 모시고 지금보다 더 멋지게 살아보겠단다. 어쩌면 나는 돈을 버는 복은 없어도 처복 하나는 있는 사람인가 보다. 안해의 진정어린 고마움에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난다. 한편 안해의 일편단심에 보답은 고사하고 항상 실망만 안겨주어 부끄럽고 미안하기 그지없다.
3년전 내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 내 손목을 꼭 잡고 “누워있어도 내 곁만 지켜주면 돼요.”라고 흐느끼며 말하던 안해의 애절한 목소리가 지금도 내 귀전에서 메아리친다.
안해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 한 채 잠시잠간씩 갈마드는 담배의 유혹에 빠져 안해의 여린 마음에 소금을 뿌렸으니 지청구가 아니라 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그 어려운 시기에 나 하나를 믿고 시집을 와서 애들을 낳아 키우며 가정을 꾸리느라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고달프게 살아온 안해,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운 정, 미운 정 쌓으며 살아온 안해는 말 그대로 나의 조강지처이다.
“찌그러진 오막살이라도 제 집이 좋고 꼬부랑 할멈이라도 제 할멈이 제일이다.”라고 한 선인들의 철리가 담긴 말의 참뜻을 뒤늦게라도 깨달았으니 참 다행스럽다.
젊어서 안해의 왼쪽자리를 지켜주었다면 이젠 안해의 오른쪽 자리에서나마 내가 살아서 숨 쉬는 소리를 들려주며 안해를 즐겁게 해주련다. 나에겐 안해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 나를 위해서, 안해를 위해서.
<로년세계>2020년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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