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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
2020년 11월 06일 10시 35분  조회:521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고모부

요시화


고모부가 암으로 입원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어머니한테서 전해듣는 순간 나는 망연자실한 채 할 말을 잃었다. 반평생을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며 아낌없이 모든 걸 베풀어오던 분이였는데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하니 실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떨리는 손으로 고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맞아.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혈액암이래. 너희들이 걱정할가 봐 비밀에 붙이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는데 어떻게 너까지 알게 되였어?”
“감기도 아니고 이렇게 큰 병을 숨기려 하시다니요? 고모부가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잘 알면서… 적어도 저한텐 숨기지 말았어야죠.”
아직도 나를 어린애 취급 하는 고모가 하도 야속해서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하긴 그 진정을 모르는 건 아니더라도 이제 고모부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만 애꿎은 고모한테 화를 내고 만 것이다.
“치료를 다그치고 있으니 이제 차도가 보일 거야. 그나저나 고모부가 누구보다 씩씩하게 항암치료를 잘 견뎌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고모는 연신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나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항암치료가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인가. 살이 타는 듯한 모진 동통과 머리카락이 뭉청뭉청 빠지는 아픔, 게다가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을가. 지금껏 가족들 몰래 두분이 참고 견뎌왔을 힘든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 있어 고모부는 혈육이나 다름없는 가족이였다. 류하와 사평이란 두곳에 멀리 떨어져있던 두분이 한창나이에 지인의 소개로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 고모부와 우리 가족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처가부터 배려한 고모부의 희생이 시작되였다. 인품 좋고 수더분하기로 소문난 고모부는 국영농장에 출근하고 있었던 터라 가족 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먹여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처가집에 객식구가 여럿이나 딸려있다보니 늘 살림살이가 넉넉치 못했다.
내가 아홉살 되던 해 부모님은 리혼하면서 나의 양육권을 두고 한동안 줄당기기를 해왔다. 혹여 어린 나이에 상처라도 입을가 봐 늘 마음을 조이고 있던 고모부는 삼촌한테 부탁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그 때 고모네는 우로는 년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아들 둘을 키우고 있다보니 넉넉한 형편이 아니였다. 그러니 어린 조카인 나를 데려가는 게 결코 쉬운 용단은 아니였다. 하지만 고모부는 한번도 나를 객식구같이 서럽게 군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는 나를 측은하게 여겨 친자식보다 더 아껴주었다. 반년 쯤 지나 엄마의 손에 이끌려 고모네 집을 떠나 연변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나는 이십여년간 친가와는 련락을 끊고 지내다싶이 했다.
친가와 어렵사리 다시 련락이 닿게 된 건 나의 결혼식을 치르던 무렵이였다. 꿈속에서마저 그리워하던 고모부가 늙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나는 어린애마냥 하염없이 눈물부터 흘렸다. 고모부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그동안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여태 련락도 못하고 지냈구나. 너무 미안하다…”라며 말끝을 맺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오열했다.
친가를 대표하여 나의 결혼식에 참석한 고모와 고모부가 아버지 없이도 어엿하게 자라 이렇게 시집을 간다면서 나의 손을 부여잡고 어찌나 서럽게 우시는지 많은 하객들이 새색시의 부모님으로 오해했다는 게 후문이다. 두분의 진정어린 눈물을 보면서 그동안 친가에 품었던 원망과 섭섭함이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도 그 때였다.
“이보게, 자네를 사위라고 불러도 되겠지? 못난 고모부이긴 해도 늘 맘속에 딸처럼 품어온 조카라오. 자격이 없는 줄 알면서도 우리 시화를 잘 부탁합세… 고생스레 자란 아이니… 앞으로는 부디 행복하게 살도록 잘 아껴주오.”라고 목 멘 소리로 새신랑한테 나를 부탁하는 고모부의 눈가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모부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너무 썰렁하게 느끼지 않고 혼례를 올릴 수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삼촌 두분도 만나뵐겸 오랜만에 이루어진 고모부와의 짧은 만남이 아쉬워 나는 일부러 신혼려행지를 두 삼촌과 고모네가 살고 있는 북경으로 잡았다.
만감이 서린 얼굴로 고모네 집에 들어선 나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강산도 두번 바뀔 만한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고모네 살림살이는 전혀 나아진 기미가 없어보였다. 아니, 어쩌면 예전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와닿았다. 비좁은 세집에서 성가한 두 아들네 내외간이 얹혀지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작은삼촌네 딸까지 십여년째 맡아키우고 있다보니 숱한 식구가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게다가 몸이 성치 않은 큰삼촌네 살림까지 거의 맡아하다싶이 하는 상황이였다. 그제서야 고모부가 그동안 나를 찾지 못했던 까닭을 조금이나마 알아갈 수 있었다.
집이 비좁은 데다 식구까지 많다보니 집과 퍽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세차 일을 하는 고모부는 아예 그 곳에서 살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난방조차 안되는 곳에서 힘들게 일하며 지내는 고모부의 처지를 알고 나니 고모네 집에 얹혀사는 객식구들이 괜히 야속해났다. 그보다도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꾸역꾸역 희생만 하는 고모부가 참 답답해났다. 한두해도 아니고 수십년간 넉넉치 못한 형편에 처가 식구들까지 거들어주느라 한몸을 혹사하면서 아득바득 애면글면하는 고모부를 도무지 리해할 수가 없었다.
“고모부, 왜 만날 고모부만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느냐구요?”
삼촌들과 두 사촌형제에 쏠리는 원망까지 담아 나는 쩍하면 고모부를 닥달했다.
“괜찮아. 일복이 터진 팔자인 걸 어떡하니. 그래도 아직 몸이 튼튼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특유의 악센트가 강한 말투로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는 고모부는 이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편안한 모습이였다. 2년후, 감감무소식이던 아버지마저 문득 나타나 고모네 집에 눌러앉게 되니 가뜩이나 가냘파진 고모부의 어깨에 무거운 짐 하나가 더 얹혀지게 된 셈이였다. 그래도 고모부는 이제서야 가족이 한데 모여 지낼 수 있게 되였다면서 오히려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고모네 내외는 북경을 떠나 한국으로 돈벌이를 가게 되였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더니 한국에 간 지 얼마 안되여 또 사달이 나고 말았다. 한국에서 일하던 작은삼촌이 그만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치료비용은 물론 재활치료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고스란히 고모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였던 것이다. 환자가 사전에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터라 그 비용이 어머어마하였지만 고모부는 그번에도 말없이 모든 비용을 대주었다. 고모부 내외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덕분에 작은삼촌은 다행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제는 조금 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심양에서 홀로 지내던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또다시 고모부를 힘들게 할 줄이야. 평소에 모아놓은 돈이라곤 전혀 없는 아버지였으니 병치료에 드는 비용은 역시나 고모부의 몫이 되여버렸다. 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질 때마다 고모부는 빚까지 지면서까지 비싼 약을 구해다 주었다. 병세가 한동안 안정되자 아버지는 고모부의 고향 류하에 있는 한 경로원에 들어가 지내게 되였다. 그 뒤 아버지의 병세가 다시 위독해졌다는 기별을 받은 고모부는 고모와 함께 아버지의 림종을 지켜주려고 일마저 그만두고 무작정 귀국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밟은 고향땅에서 고모부는 그리운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 쌓인 회포를 풀 틈도 없이 아버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내가 아버지 곁을 지키겠다고 나서자 젊은 녀자가 맡기에는 고단한 일이라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도 고모부는 고인에게 손수 수의를 입혀주었는가 하면 객지라 다른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우리의 사정을 헤아려 자신의 옛 전우들을 불러 제일 힘든 후사를 모두 떠맡아주었다.
언젠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글을 본 적 있다. 나무는 자신의 모든 걸 깡그리 내주면서도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 대가를 바란 적 없었다. 그렇듯 아낌없이 내주는 나무와 반평생 처가를 아낌없이 받들어온 고모부가 참 많이 닮아보였다.
한번은 고모부에게 처가를 이렇게 챙기는 리유가 뭔지, 고모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가고 롱담삼아 물어본 적 있다.
“네 고모가 날 믿고 시집 왔으니 처가 식구면 내 식구인 거야. 제 식구를 챙기는 데 무슨 리유란 게 필요하겠어?” 고모부의 담담한 대답이였다.
“고모부, 그 때 엄마가 날 데려가지 않았으면 난 고모부네 집에 그냥 있었을가요?”
“당연하지. 이렇게 잘 컸을지 장담은 못하겠다만 어련히 내 몫이 되였을 테지.”
오래동안 품어온 궁금증을 풀려고 넌지시 던진 질문이였는데 고모부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어린 답복을 주니 어릴 적부터 가족애에 그토록 목 말랐던 갈증이 시원히 가시는 것 같았다. 딱딱한 장알투성이의 거칠거칠한 손을 살며시 잡으니 투박한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마저 훈훈해났다.
이런 고모부한테 모진 시련을 안겨주었으니 하늘도 참 무심하지… 병원측으로부터 항암치료를 꾸준히 받고 골수이식까지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요즘은 자신의 골수로 골수이식이 가능할 만큼 의학기술이 발달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놀란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픈 고모부를 어떻게든 살리겠다며 가족 전체가 떨쳐나섰다. 평생 처가를 위해 걱정해온 고모부의 로고가 이렇게나마 위로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갑갑하던 가슴이 빠금히 뚫리는 것 같다. 요즘에 귀국해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고모부는 가족들이 걱정할가 봐 쩍하면 그 걸걸한 목소리로 “괜찮아. 지금 보니 암도 별것 아닌걸. 왜 다들 이렇게 호들갑 떨어?”라고 너스레를 떨군 한다.
평생 아낌없이 주기만 했던 고모부에게 이제는 우리 가족이 거센 비바람을 막아줄 든든한 우산이 되여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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