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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컵] 청산은 만고에 푸르르며
2020년 11월 06일 11시 10분  조회:511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청산은 만고에 푸르르며

홍성빈


타고난 음치로 노래 한곡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던 내가 어찌하다보니 시조창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였다.
십여년전, 우연하게 시조 명창 괴암 백원호선생이 부르는 〈청산은 어찌하여〉를 들은 게 그 발단이 되였다. 고요한 느림 속에 우아함이 물결치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긴 가락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숨 죽여 경청하노라니 조상들이 견뎌온 지난 시간에 대한 고백을 듣는 듯했고 앞날에 대한 벅찬 희망의 숨결이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나는 시조창의 깊은 매력에 풍덩 빠져들었다.
멋스러운 우리 시조창을 널리 전파하고 민족의 뿌리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2008년 5월, 국내 최초로 사단법인 연길시 중국조선족시조창협회를 설립했다. 초창기 멤버는 아홉명이였다. 다들 열정은 하늘이라도 찌를듯 높았다만 제대로 시조창을 부르는 이는 단 한명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였다. 우리는 대한시조협회의 도움을 받아 교재를 구했고 사비를 털어 한국에서 선생님을 모셔왔다. 자금난 때문에 교실을 마련할 수 없었던지라 공원이나 광장에서 련습했고 추운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이면 회원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교재가 닳고 테프가 늘어지도록 시조창을 불렀다.
초반에는 주위의 반응이 다소 시큰둥했다.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면 자칫 곡소리로 들리기 십상인 시조창 특유의 곡조 때문이였다. 실제로 공원에서 시조창을 부르다 시민의 신고로 경찰이 달려온 적이 있는가 하면 회원의 집에서 부르다 초상을 치르는 줄 알고 아빠트 경비원이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회원들 가족들도 귀에 거슬리는 그런 소리를 하느라고 사비까지 털어야 하느냐며 우리의 열성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는수없이 집에 있을 때면 화장실이나 이불 밑에서 식구들 몰래 련습했고 밖에 나가서도 민페가 될가 봐 소리를 잔뜩 죽여가며 시조창을 불렀다. 이런 힘든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시조창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2010년 12월 3일, 우리 협회 회원 7명은 한국 경상남도 함안에서 펼쳐지게 될 한중일시조창경창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대련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처음 참가하는 국제대회인 만큼 다들 무척 긴장한 모습이였다. 그래도 중국을 대표해서 참가한다는 긍지와 해외 고수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은 한껏 부풀어있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심사일군이 관광비자로 한국에 돈벌이하러 가는 사람들로 넘겨짚고 우리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협회 사단법인등록증과 한국 주최측의 초청장을 보여주면서 국제시조창경창대회에 참가하러 간다고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도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시조창이란 게 뭡니까?”
의심이 덕지덕지 실린 얼굴로 출국심사일군이 물었다. 어떻게 해석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가 고심하다가 중국의 전통음악극 경극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700년 력사를 자랑하는 조선전통음악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경극처럼 유구한 력사를 가진 전통 문화유산이지요.”
그래도 심사일군은 여전히 아리숭한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이러다가 자칫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간 우리는 차라리 시조창을 들려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출입국 심사 창구 앞에 나란히 서서 당나라 시인 최호의 7언률시 〈황학루〉를 개작한 〈석인이승〉을 합창했다.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가버려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네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구름 천년을 유유히 떠있네
개인 날 강에 뚜렷한 나무그늘
앵무주에는 봄풀들만 무성하네
해는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강의 물안개에 시름만 깊어지네
 
출입국 심사구역에서 느닷없이 울려퍼진 노래소리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꿋꿋하게 끝까지 시조창을 불렀다. 불현듯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다른 회원들도 어느새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결코 슬픔이나 원망이 아닌 이름 못할 긍지감과 자부심 그리고 쾌감 같은 게 녹아있는 눈물이였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성을 다해 시조창을 불렀다. 그제서야 심사일군이 미안해하며 우리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우리 일행은 한시간 십오분 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또다시 얄궂은 일이 벌어졌다. 한국 출입국관리소 직원도 우리를 돈 벌러 한국을 찾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입국 허가를 거부했다. 행색으로 보아 형편이 넉넉해보이지 않는 데다 나이도 지긋한 사람들이 시조창을 부르려고 한국까지 왔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대한시조협회의 초청장과 서류들을 다 보여주었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설 수는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였을가, 아니면 서운함 때문이였을가. 우리는 다시 서로 손을 잡고 입국 심사대 앞에 나란히 서서 리황의 시조 〈청산은 어찌하여〉를 합창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류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하리라
 
이번에도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대련공항에서와는 달리 슬픔과 설음이 담긴 눈물이였다. 가슴을 허비듯 애틋한 시조창이 인천공항에서 울려퍼졌다. 눈물을 흘리면서 시조창을 부르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진정을 읽었던 건지 심사일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우리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중국에서 오신 분들이 저희들한테도 서먹한 시조창을 참 멋지게 부르시네요. 진작에 알아보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국 심사를 끝냈지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왜서 꼭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났다.
그번 한중일시조창경창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갑부, 특부, 명창부, 국창부 장원을 휩쓸면서 그나마 얼어붙었던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후 우리는 해마다 우수 회원을 선정하여 한국으로 3개월간 연수를 보냈고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회원이 다른 회원들을 이끌어주는 방식으로 시조창을 점차 보급시켜나갔다. 그리고 짬짬이 학교나 경로당에 가서 무료로 시조창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끈질긴 노력 끝에 시조창의 열기가 국내에서 피여오르고 있고 조선족시조창은 지방무형문화재로 등록되였는가 하면 중화음송학회 영구보존항목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오로지 소리 하나로 국경을 뛰여넘어 하나가 될 수 있있던 지난날 일화들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다. 어스름을 헤치고 눈부시게 빛을 뿌리는 아침해살처럼 우리 문화가 이 땅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만고상청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운명처럼 시조창을 부른다.

《로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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