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를 퍼덕일수록 더 높이 난다
-도문구강병원 조철우 원장의 인생멜로디
문인숙
도문시 도문구강병원과 연길시 신세기구강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조철우 원장, 그의 성공 스토리가 궁금하여 일전 필자는 연길 신세기구강병원을 찾았다. 지난 40여년간 치과(구강과)라는 한 우물만 파온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노라면 끊임없는 자기 수련을 딛고 세련된 가치관과 만족할 줄 모르는 정열적인 추구가 성공을 이끌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직한 수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다
“우직한 수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군 합니다. 비록 70 고개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업이나 생활에서 50대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구요.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는 끈질긴 성미가 한몫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조철우 원장은 서글서글한 성미답게 자부심 또한 강한 분이였다.
1968년 10월, 중학생이였던 그는 ‘지식청년들은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시대 흐름을 타고 농촌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그는 농촌에서 근 3년간 일하다가 1971년 10월, 추천을 받아 도문시병원에 들어가게 되였다. 첫 일터는 병원 물자보급(后勤)과였는데 빈틈없는 일본새로 그는 인차 지도부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당시 도문시병원에는 치과(구강과)는 물론 전문의도 없었다. 병원 지도부에서는 그 공백을 메우려고 합당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조철우를 적임자로 꼽았다.
“조직의 배치 대로 치과에서 일하게 되였지만 문외한인지라 막막하기 그지없었지요. 당시 농촌에는 하방(下放)된 지식인들이 많았어요. 마침 홍광위생원에 일제시대 일본인 치과의사한테서 치과를 배운 적 있는 의사가 있다고 해서 나는 그 분한테서 약 1년간 치과의술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 분한테서 배운 의술로는 태부족이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에 연변병원으로 연수를 떠났지요. 그리고 그 곳에서 1년 동안 부지런히 의술을 익혔습니다. 그 뒤 1983년, 길림성인민병원 구강과에서 1년간 연수하면서 치과의술을 한 차원 끌어올렸습니다.”
조철우는 도문시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의술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이처럼 배움의 길에 올랐다.
1988년 2월, 연길시에 노블구강병원이 설립되였다. 노블구강병원은 외국의 선진적인 설비와 치과의술을 도입한 연변의 첫 전문병원이였다. 이런 병원이라면 보다 고차원의 의술과 설비를 접할 수 있지 않을가 라는 생각에 그는 결연히 17년간 몸 담고 있던 도문시병원을 떠나려고 작심했다. 하지만 전문대학을 나오지 못한 데다 높은 학위가 없다는 문턱에 걸렸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조철우가 아니였다. 그는 연수라도 좋으니 노블구강병원에서 치과 관련 지식을 배울 수만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저의 간절함이 통했나 봅니다. 일단 연수생으로 노블구강병원에 남게 되였지요. 그리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였지요. 학력은 비록 다른 의사들한테 미치지 못했어도 그동안 쌓은 경험과 배움에 대한 끈질긴 추구가 병원측에 진심으로 다가갔나 봐요. 그래서 1년 만에 전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연변의학원에서 반공반독(半工半读) 형식의 치과학과 학생을 모집하였다. 조철우에게는 가뭄에 단비나 다름없는 소식이였던 만큼 바로 응시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는 공부였던지라 독학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걸탐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2년간의 학업을 원만히 마치였다.
“처음으로 대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그 설레임은 한마디로 형언키 어려운 거였어요. 책과의 씨름은 자신과의 겨룸이기도 했지요. 오직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열심히 흘린 땀은 노력한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학기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였습니다.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조철우는 1988년 3월부터 1992년 5월까지 근 5년간 노블구강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고학력의 엘리트들과 경쟁하면서 나중에 주임직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인생은 모험 속에서 일매진다
“인생에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삶에서 주춤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나의 삶도 어쩌면 한차례의 큰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블구강병원에 취직했으니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고 주임직까지 맡았으니 ‘벼슬’을 한 셈이지만 창업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까요.”
당시 노블구강병원은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할 조철우가 아니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의 고향에도 이런 병원을 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형편에 무슨 돈으로 창업을 한단 말인가?’
당시 조철우의 로임이라야 주임 수당금까지 합쳐서 고작 400원밖에 안되였다. 이 돈으로 세집값을 지불하고 가정살림에 보태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도문시정부를 찾아갔지요. 도문에 치과를 설립할 의향을 상세히 피력하고 나서 나의 주머니 사정을 얘기했지요. 마침 전문 치과병원이 필요했던 차라 정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주었지요. 그 덕에 17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구요. 당시 17만원은 천문학적 수자였습니다. 꿈이 아닌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습니다.”
연길에다 구강병원을 앉히지 않고 도문을 선택하게 된 리유를 조철우 원장은 이렇게 밝혔다.
“사실 연길에서 창업했더라면 사업이 지금보다 더 번창하고 규모도 더 커졌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도문을 선택한 리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첫번째 리유가 바로 도문은 나의 두번째 고향이라는 데 있습니다. 태여난 곳은 아니지만 그 곳에서 자라고 그 곳에서 처음으로 치과를 접했는가 하면 가정을 이루고 한 가정의 세대주가 되였기 때문이지요. 두번째로 도문 시민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였지요. 세번째로 그래도 노블구강병원에서 많은 의술을 익혔는데 연길에서 노블과 경쟁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로 당시 도문은 교통요로여서 지리적으로 위치가 괜찮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조철우는 밑천 17만원을 가지고 100평방메터짜리 건물을 임차하고 필요한 설비를 갖추어놓은 다음 경험자들을 우선으로 하는 직원모집에 나섰다. 오직 조철우라는 한 인간의 됨됨이와 능력을 믿고 바로 응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며칠 사이에 직원 모집을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도문의 첫 구강전문병원인 도문구강병원이 정식으로 오픈하게 되였다.
조철우 원장은 낮에는 환자들을 보고 저녁에는 직원들 강습에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창업 초기여서 집을 마련할 여건이 안되여 병원 한쪽에 칸을 막고 세식구가 살았다. 10평방메터도 안되는 작은 단칸방이라 침대 하나를 겨우 들여놓을 수밖에 없어서 침대 우에 다락을 만들어 아들의 침대를 마련해주었다. 겨울이면 벽에 서리가 하얗게 한층 앉을 만큼 집이 추웠기에 잘 때마저 손에 장갑을 껴야 했다. 직원 대여섯명의 점심과 저녁 밥상도 식탁이 변변치 않아 침대 우에 차려야 했다.
“개원하여 1~2년 동안은 새벽 3시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낮에는 진료하고 저녁에는 직원들 강습에다 낮에 끝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다른 데 곁눈을 팔 사이가 없었지요. 그 때 병원 맞은편에 한창 노래방이 흥성하고 있어서 가끔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싶었지만 사업에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강한 오기로 모든 유혹을 물리쳤지요.”
도문은 물론 연길, 화룡, 왕청에서도 입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찾아왔다. 환자들은 자체로 담배종이에 번호를 적어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렵게 시작한 창업이였지만 의술이 뛰여나고 봉사태도가 좋은 데다 전체 직원들이 똘똘 뭉쳐 열심히 일한 덕에 3년 만에 대부금 17만원을 다 갚는 아름찬 쾌거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대출을 받고 대출을 갚고 하면서 1992년부터 2010년까지 9년 사이에 병원 건물을 4번이나 옮기며 규모를 조금씩 늘여나갔다. 현재 도문구강병원의 영업 면적은 1,000평방메터에 달한다.
조철우 원장은 연길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각별히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2006년, 연길에 500평방메터 규모의 신세기구강병원을 설립하고 의학원을 졸업한 아들(조춘일)에게 경영을 맡기려 했다. 그런데 아들은 자신을 아직 더 무장해야 한다면서 한국류학의 길을 선택했고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느라 5년후에야 귀국하는 바람에 조철우 원장은 연길과 도문을 오가면서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몸살을 앓아야 했다. 물론 지금은 아들이 신세기구강병원 원장을 맡고 있지만 말이다.
인생은 줄타기
사업하는 사람 치고 고생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을가? 조철우 원장도 사업에서 늘 탄탄대로는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자금난과 직원관리가 제일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대출을 받고 대출을 갚는 과정에서 신용을 무엇보다 중히 여겼기에 한고비 또 한고비의 자금고비를 헤쳐나갈 수 있었고 넓은 아량과 긍정적인 마인드로 직원들을 대했기에 그들과 10~20년이나 한솥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조철우 원장의 직원 사랑은 남달랐다. 자신은 세집에 살지언정 직원들에게는 따뜻한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싶다면서 1998년 60만원을 대출받아 도문시에다 3층짜리 직원아빠트를 지었다.
조철우 원장은 10년 혹은 20년 동안 함께 해온 직원들이 창업하겠다고 나갈 때마다 섭섭해하면서도 돈을 꿔서라도 밀어주는 ‘괴짜형’ 보스였다.
“‘바보’라는 소리도 듣고 핀잔도 많이 들었습니다. 직원들도 날개가 굳어지면 날아가기 마련입니다.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나한테서 배운 기술로 치과를 꾸렸으니 나 자신은 또 새로운 기술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또 한국 연수의 길에 오르군 했지요. 기술이나 설비 면에서 늘 앞서가기에 왼심을 써왔습니다. 그러했기에 제자들은 또 스승이라고 찾아와서 새로운 가르침을 받고,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 더불어 성장하게 된 거죠.”
조철우 원장은 함께 있는 동안만은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직원들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줄타기이다. 빠른 변화 속에서 자칫하면 경쟁의 선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큰 성장을 이룰 수 없음을 감안한 조철우 원장은 1998년, 연변조선족자치주구강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협회가 기반을 다질 때까지 4년간 협회를 이끌어왔다.
조철우 원장은 협회를 설립한 후 쎄미나르를 조직하고 경험을 교류하는 한편 한국 치과 업계와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새로운 정보를 공유했는가 하면 후배들이 한국에 나가 연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는 등 많은 일들을 했다. 협회가 설립된 지 어느덧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학술단체로서의 그 빛을 예이제없이 찬란하게 뿌려가고 있다.
‘안해표’ 도시락과 황혼의 로맨스
성공한 사람의 뒤에는 늘 헌신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조철우 원장은 오늘이 있기까지 묵묵히 뒤바라지를 해온 안해의 공로가 크다며 특히 ‘안해표’ 도시락이 힘의 원천이였다고 말한다.
“직원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1등 공신’은 바로 안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무뚝뚝한 내가 사업을 한답시고 가정의 모든 일을 안해한테 떠맡겼으니 말입니다. 안해의 헌신적 정신과 알뜰한 살림살이로 오늘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안해는 그동안 무뚝뚝하고 일밖에 모르는 나한테 불평 한번 내비친 적이 없습니다. 하루에 두세번씩 도시락을 싸야 하고 병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대로 쏟아부을 때도 있었지만 안해는 늘 불평없이 받아주고 묵묵히 기다려주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열 때면 밥과 반찬의 향, 안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힘이 솟는다는 조원장, 원체 무뚝뚝한 성미인지라 지금까지 살뜰하게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단다.
“안해 자랑을 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하지만 저는 이 자리를 빌어 한번 쯤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안해(박경자)는 우리 조선족녀성의 미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다정한 안해, 훌륭한 엄마로, 병원에서는 직원들의 훌륭한 누이로, 엄마로 이미지가 각인됐습니다. 부모가 없는 직원에게 짝을 무어주고 몸소 달아다니며 결혼준비를 해준 사람입니다. 내조의 녀왕이지요.”
나이 들면서 안해와의 대화 시간을 늘이려고 일부러 다가가고 있다는 조원장, 한주에 두시간씩은 학원일정이다. 안해는 가야금학원, 조원장은 바이올린학원에 다닌다. 이 시간 만큼은 사업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즐거움을 맛 본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안해는 가야금을 타고 조원장은 바이올린을 켜면서 음을 맞추며 늘그막 사랑을 무르익혀가고 있다.
이게 사는 멋이다. 예술을 의학에 접목시키듯 삶도 예술에 접목시키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조원장, 취미생활로 전에는 골프를 쳤고 최근에는 바이올린을 배우느라 땀동이를 쏟고 있다. 골프를 쳐도 허리 나갈 정도로 쳤고 바이올린 역시 프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도 조만간 프로가 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운다.
“70 고개를 바라보지만 늘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가서 절정에 이르렀다가 뚝 떨어지는 순간이 올지라도 하는 일에, 배움에 최선을 다하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보람을 느끼지요.”
조원장은 구강협회 년말총화 때 그동안 갈고 닦은 바이올린 연주솜씨를 선 보였다. 젊은이들도 많은데 나이 많은 늙은이가 무대에 오르겠느냐면서 거절했다가 각 현, 시와의 겨룸에서 도문지회가 뒤질가 봐 결국 무대에 나서게 되였다고 한다. 쑥스러움도 잠간, 황혼의 로맨스가 바이올린 선률을 타고 장내를 가득 메웠다.
“취미생활은 누구한테 자랑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삶의 질을 향상하고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데 있습니다.”
이처럼 조철우 원장은 오늘도 삶이라는 항아리에 하나하나의 성취감 넘치는 스토리를 채워가고 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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