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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엄마'를 모시는 아들
2020년 12월 08일 14시 24분  조회:628  추천:0  작성자: 로년세계
두 '엄마'를 모시는 아들

허강일


“자기의 부모를 모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저 두분 다 똑같이 모시는 게 전부지요.”
여든 고령의 친모와 70세를 바라보는 장모를 한집에 모시고 산다는 소문을 듣고 김학철씨를 찾았을 때 그가 쑥스럽게 던진 첫마디였다.
1971년생인 김학철씨는 김씨 가문의 4남매중 막내로 흑룡강성 가목사에서 태여났다. 총명하고 령리한 막내의 출생으로 온 가족은 환희에 차넘쳤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이였다. 느닷없이 고열에 시달리던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일어나지 못하게 되였던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소아마비후유증으로 영원히 장애자로 살아야 한다는 무서운 진단이 떨어졌다.
가족에서는 어떻게든 그의 다리를 치료하려고 가목사 일대의 병원을 전전했지만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옵니다. 불편한 다리를 갖고도 저렇듯 씩씩하게 잘 자랐는데 가령 그 때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김학철씨의 로모 백옥숙(84세)녀사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끝을 흐리였다.
화남현중학교를 졸업한 뒤 김학철은 림업국 종업원 가속으로 가목사림업국 산하 저가락공장에 출근하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몸이 불편한 남자가 저가락공장에 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맡아나갔다.
김학철씨는 차츰 능력을 인정받아 출근 반년 만에 직장 주임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맡은 직장도 선진직장으로 평의되였다. 김학철은 일약 공장의 스타로 뜨면서 많은 처녀들의 관심을 끌다가 1996년, 이쁜 한족처녀 전동매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얼마 뒤, 국가의 림업정책에 따라 저가락공장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떠나면서 락담하고 있을 무렵 김학철은 위기를 기회로 잡아 화남시에 〈아리랑노래방〉을 차렸다.
김학철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노래방은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김학철은 화남에서 알아주는 노래방 사장으로 뜨게 되였다.
몇해전부터 김학철은 화남보다 더욱 큰 곳에서 꿈을 이뤄보려고 가족을 이끌고 청도에 진출하였다. 그는 청도농업대학 서쪽 켠에 비즈니스호텔을 차렸는데 인츰 큰 인기를 몰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두번째 호텔을 오픈하게 되였다.
“호텔을 찾는 모든 손님들을 가족이라 생각하고 맞아주고 대해준 것밖에 없습니다.”
김학철씨는 단골손님들이 많이 생긴 리유를 오는 사람마다 동등하게 맞아준 격의 없는 ‘가족식’써비스에서 찾았다. 혹간 손님의 신분을 등록하다가 생일을 맞은 고객을 만나게 되면 잊을세라 생일을 축하해주었고 명절이면 손님들의 방안에 선물을 보내드리리만치 자상하게 배려해주었다.
2018년, 김학철씨는 형님네 집에 계시던 로모를 모셔오겠다고 서둘렀다.
당시 형제들은 장모님을 모시고 있던 그가 친모까지 모시려 하자 부담이 너무 크다면서 로모를 양로원에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며 설득하였다.
“자식이 있는데 왜 양로원에서 만년을 보내게 해야 합니까? 안됩니다. 제가 꼭 모실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던 장모가 딴살림을 차리고 나가 살겠다고 하였다. 두 로인을 함께 모시겠다고 나선 사위가 한편 대견스러우면서도 자식들한테 부담이 될가 봐서였다.
김학철은 장모의 손을 꼭 잡고 간곡하게 말했다.
“장모님, 제가 장모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저의 로모를 모셔오려는 것은 장모님을 저의 집에서 나가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장모님과 저의 로모 모두에게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구요.”
“한사람을 모시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인데 어찌 나까지 자네한테 부담을 끼칠 수 있겠나.”
김학철의 장모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사위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다.
“아닙니다. 사위가 반자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장모님을 항상 저의 친엄마처럼 생각해왔습니다. 많이 부족한 줄 알지만 최선을 다해 두분에게 효도할 것이니 제발 저의 곁에 남아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한분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장모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던 김학철은 그 당장에서 고향에 계시는 로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로모에게 사연을 밝히면서 두 로인이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며 넌지시 물었다.
항상 사람이 그리웠던 김학철의 로모는 아들의 제의를 냉큼 받아들였다.
“나야 좋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 운신하기 힘든 상황이라 안사돈한테 페가 되지 않을런지 걱정이구나…”
세월의 무게에 눌리워 많이 지쳐있는 사돈의 목소리를 전해들은 김학철의 장모는 인츰 사위의 손에서 전화기를 가져와서 말을 이었다.
“언니, 걱정 말고 오세요. 제가 아직은 젊었으니 언니를 잘 돌봐드릴게요.”
장모가 자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김학철은 인츰 고향에 내려가 로모를 모셔왔고 그 때로부터 한집에서 민족이 서로 다른 두 사돈이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게 되였다.
김학철의 로모 백옥숙은 운신이 불편하였다. 화장실 출입은 물론 식사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였다.
백옥숙의 목욕, 식사대접, 화장실 출입은 모두 사돈인 상아금이 맡아하게 되였다.
김학철은 장모가 자신의 로모에게 음식을 한술 한술 대접하는 모습이야말로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묘사했다.
“저는 언니를 사돈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냥 저의 친언니라 생각하고 인생 끝까지 잘 돌봐줄 겁니다.” 백옥숙의 입에 잣죽을 떠넣어주던 상아금이 옆에서 한마디 곁들였다.
“저의 남편은 정말 효자입니다. 두 로인을 깍듯이 섬기는 그 마음에 거짓 한점 없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김학철의 안해 전동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인젠 사돈 없이는 못살 것 같습니다. 사돈과 함께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니까요.”
김학철의 로모 백옥숙도 사돈 상아금의 손을 잡고 감격에 젖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먼저 장모와 로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밖에서 돌아와서는 먼저 장모와 로모의 손을 잡고 낮에 보고 들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김학철한테는 이미 버릇처럼 굳어졌다.
지난해부터 시작하여 김학철은 약소군체와 어려운 이웃을 위한 공익사업에 나섰다. 그는 친한 친구 류장보와 함께 ‘성양사랑의 빛’ 공익협회를 설립하여 자신이 상무부회장 직을 맡았다.
이 공익협회는 근 4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데 지난 8월 1일에만 하여도 영예군인가족 12세대를 선정하여 후원금과 물품을 보내주었다.
“김학철의 인격에 매료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우리 협회에 뭉쳐 함께 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학철씨는 우리 모두가 공인하는 효자입니다. 그는 우리 협회의 홍보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성양사랑의 빛’ 공익협회 회장인 류장보의 치하이다.
공익단체에서 김학철에게 매달 일정한 로임을 지불하기로 하였는데도 그는 일전 한푼 받지 않고 모두 공익사업에 돌리였다.
김학철은 평소에도 “사랑에는 계선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외우다싶이 하면서 살았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건 자식으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로서 그 의무를 포기한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두분입니다. 저의 로모가 저한테 생명을 주셨다면 저의 장모님은 안해를 저한테 선물해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우러러 모셔야 할 분들이지요.”
김학철씨는 로모와 장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김학철씨는 대련민족대학에서 시장마케팅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외동딸이 자기들보다도 더욱 극진하게 로인들을 섬기고 있다면서 대견한 미소를 지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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