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첫사랑
한직능
50여년간 가슴에 묻어둔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필을 들어본다.
1969년 12월, 나는 내몽골 울란호트 고성촌에서 란주군구 중형폭격기부대 36사 레이다병으로 입대하였다. 입대한 지 9개월 만에 위장에서 유구촌백충이 발견되여 서안시에 있는 공군451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아마 부대농장에서 일하면서 돼지고기를 먹은 게 화근이였던 것 같다.
내가 든 병실은 4인실이였는데 환경이 아주 깨끗하고 정결한 데다 간호사들도 예쁘고 친절했다. 입원은 했다만 남들처럼 운신이 힘든 것도 아니고 다만 장에 기생해있는 유구촌백충을 깡그리 제거하기만 하면 되는 병인지라 별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 매일 여러가지 검진을 받고 나면 별로 할 일이 없었는지라 살만 피둥피둥 찌는가 싶었다.
우리 층을 책임진 간호사는 도합 두명이였는데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제일먼저 하는 일이 청소였다. 간호사중 한명은 20대 중반이였고 다른 한명은 키가 크고 이쁘장하게 생긴 처녀였는데 그 때 나이가 18살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병원복도는 넓고 길었는데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간호사들을 볼 때마다 여간 안스러운 게 아니였다. 그 뒤로부터 나는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화장실 청소부터 복도 청소까지 깔끔하게 해놓고는 다시 침대에 돌아가서 자는 척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사가 우리 병실에 드나드는 차수가 많아졌을뿐더러 우리 병실 청소에 유독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나한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지농(참군시기의 이름은 한지농이였음.)씨, 당신이 매일 아침마다 우리를 도와 청소를 하고 있다는 걸 다 알아요. 고맙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발 그만두세요. 환자가 청소를 한 사실이 발각되면 저희가 비평받습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비껴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도와주려고 했는데 결국엔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병실에서 내가 가장 젊고 ‘건강한’ 환자였으니 나를 의심 대상으로 간주한 것도 당연한 일이였다.
이튿날 아침, 간호사가 탕약을 가져오더니 그것을 먹고 변을 보면 유구촌백충이 배출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과연 약을 먹고 한참후에 화장실에 갔더니 유구촌백충이 거침없이 배출되였다. 온몸이 맑고 깨끗해지는 느낌이였다.
몸이 건강해졌으니 보란듯이 청소를 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병실에 들릴 때마다 예쁜 간호사는 주동적으로 말을 걸기도 했다. 알고보니 그녀는 란주군구 고급장령의 딸이였는데 아버지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이곳에 오게 되였다고 한다. 나는 조선족이고 농민의 아들이라고 말했더니 자신의 아버지가 항미원조에 갔다 온 분이라면서 조선족은 노래도 잘 부르거니와 춤도 잘 추는 민족으로 알고 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국경절이 다가올 무렵, 란주군구 문공단 단장이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마침 문예선전대를 무으려던 참에 문공단 단장을 만나게 되자 그에게 부탁하여 젊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젊은 환자들 중에서 20여명을 골라 림시 ‘문예선전대’를 만들기로 하였다. 나와 예쁜 간호사도 그중에 포함되여있었다. ‘문예선전대’는 저녁이면 린근 대대나 공장에 가서 공연을 했다.
어느덧 입원한 지 2개월이 되여갔다. 그 사이 예쁜 간호사와 함께 ‘문예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정이 퍼그나 들게 되였다. 예쁜 간호사가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그윽히 바라볼 때면 심장이 막 방망이질했다. 퇴원을 며칠 앞두고 예쁜 간호사가 나를 찾아와서 입을 열었다.
“지농씨, 모레 떠난다고 했죠? 앞으로 서안에 올 기회가 된다면 꼭 병원에 들려주세요. 그간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전사로서 응당히 해야 하는 건데요 뭐.”
“서안에 온 김에 시내에 들려 구경이나 하세요. 볼 거리가 많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대안탑(大雁塔)과 고성벽 그리고 양러우포머(羊肉泡馍)는 꼭 드셔보세요.”
“제가 길을 잘 몰라서…”
길치가 아니였지만 예쁜 간호사가 함께 가주었으면 하는 속내로 나는 슬쩍 내뱉었다.
“평일이라서 청가를 맡기 어렵습니다. 시내에 가서 물어보면 다 알아요. 시내에 가는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가요? 제1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제가 찍은 일촌짜리 증명사진을 찾아주실 수 있어요?”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리는 것 같았다. 이런 사적인 부탁을 한다는 건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넘겨짚으니 기분이 날 것만 같았다.
예쁜 간호사와 동행할 수 없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간호사가 준 ‘중임’이 있으니 예정 대로 이튿날 서안 시내를 돌기로 하였다. 나는 대안탑과 고성벽을 둘러보고 나서 유명한 양러우포머 식당을 찾았다. 서안의 대표적인 음식답게 식당 안은 점심전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양러우포머 네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나서 곧추 사진관으로 향했다. 사진을 찾고 병원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다섯시가 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함께 산책을 하자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흥분된 가슴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서 나는 그녀와 함께 산책길에 나섰다.
“사진을 드릴게요.”
나는 사진관에서 찾은 사진을 꺼내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사진이 너무 작아서 그런지 잘 나오지 못했네요.”
그녀는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하얗고 맑은 얼굴에 초롱초롱한 큰 눈을 가진 그녀는 누가 봐도 둘도 없을 만한 미인이였다.
“이제 돌아가면 언제 쯤 다시 올 수 있어요?”
“병이 나지 않고서야 한번 오는 게 어디 그리 쉬인 일이겠어요.”
“휴일도 없어요?”
“주말에는 보통 쉽니다.”
“아, 좋네요. 그럼 주말에 놀러 오세요. 아 참, 오늘 시내 구경은 잘했나요?”
“네, 잘했어요. 맛 있는 음식도 많고 구경거리도 진짜 많더라구요.”
우리는 이렇게 서안의 지방명물로부터 조선민족의 민속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웃고 떠드는 가운데 잊지 못할 추억으로 적막한 밤 산책길을 아롱다롱 수 놓았다. 종달새처럼 꺄르륵 웃어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났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뒤 그녀가 9시전에는 병실로 들어가야 된다면서 분홍색 혀를 낼름 드러내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메롱 하더니 급히 병원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내가 떠나던 날, 그녀는 나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고무격려까지 해주며 다음의 상봉을 기약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진을 잘 보관하여 달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그제야 그 날 밤, 그녀가 꺼내 보여준 사진 한장을 돌려주지 않은 게 생각났다. 내가 설명을 하려고 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더니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부대에 돌아온 뒤 가끔 삶이 힘들거나 외로울 때면 그녀의 사진과 그녀가 남긴 고무격려의 말을 떠올리면서 외로움을 달래군 했다. 부대 특성상 외지로의 출장이 거의 불가능하였기에 그리움과 외로움이 겹칠 때마다 지방 우전국에 가서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입당하고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을 부단히 무장해야 했다.
1971년 6월 28일, 나는 800명 신병 가운데서 제일먼저 입당을 했고 네차례의 기술혁신으로 장려까지 받았다. 그 시기에 기무대대(机务大队)는 립공상(立功奖)은 없고 장려를 많이 받을수록 간부 승진이 더 빨랐다.
모든 게 순리롭게 나아가는가 싶었는데 간부 진급을 위해 가족조사를 하던 중 해외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치심사가 무척 까다로운 특종병 간부 진급에서 아쉽게도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나는 4년 병역의 마지막 해 년말에 퇴역명령을 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도무지 그녀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병역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그녀에게 퇴역한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나의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듯 여러번 반복해서 물었다. 그동안 항상 좋은 소식만 전했으니 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였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내가 어떤 신분이든 나라는 사람이 좋으니 꼭 함께 있고 싶다는 속내를 비치였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부탁해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말까지 꺼냈다. 하지만 나는 서뿔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전화를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망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많이 실망했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에이는듯 아팠지만 고향에는 환갑나이에 외동아들의 종군을 허락한 년로한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기에 사랑과 효라는 갈림길 앞에서 나는 효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한테 다시 전화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미처 싹트지 못한 첫사랑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영영 묻어버리고 말았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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