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가족문화에서의 가옥 공간 사용에 대하여
박승권
“가족”이라는 학술용어는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집”이라는 술어로 통할 때가 많다. 그런데 “집”이라는 술어는 고향을 나타내는 지리적인 개념, 거주공간을 나타내는 물리적인 개념, “량반집”이라고 할 때처럼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정치적 개념 등 상하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리해되고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족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혼인에 의하여 결성된 하나의 사회 집단을 가리키며 그 가운데서 가장 작은 단위이고 사회의 기초로 되고 있는 개념이다. 머독(G. P. Murdock 1949)에 의하면 가족이란 주거를 같이 하고 경제적인 협동 및 자녀의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사회집단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가족은 아래와 같은 네가지 요소를 구비하였다 할 수 있다. 즉 가족은 우선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거주공간을 구비하고 있으며 생산과 경영 등을 함께 하는 경제적인 협동체이다. 그리고 가족 내부에는 혼인을 통하여 이루어진 부부관계가 존재하고 또 혈연관계를 기초로 하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이상의 요소들을 전부 다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공동된 거주공간에서 생활을 하여야만 하겠지만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례를 들면 대학공부를 위하여 집을 떠나 외지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대학생들이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친족단위이지만 거주 공간을 같이 하고 있지 않는 경우 가족과 구별하여 가구(household)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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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야기하다싶이 거주공간으로서의 집은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빼여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아낼 수 있다. 가족 내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위치와 역할 분담 등도 집 공간 사용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문화적인 관습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민족들에서도 공동으로 나타난다.
우선 우리 민족과 가까이 살고 있는 만족의 공간 리용을 살펴보자. 촌에 사는 만족들의 집들은 보통 집문 앞에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고 집 뒤에는 백양나무가 심어져 있다. 가옥은 낮은 담으로 외계와 구분되여 있다. 집은 정방(正房), 상방(厢房)이라고 하는 행랑칸, 축붕(畜棚) 즉 가축 우리, 그리고 변소 등으로 구분되여 대체로 비슷한 자리에 위치해 있다. 대문에 들어가면 안쪽에는 영벽(影壁)이 설치되여 있다. 남향으로 앉은 집은 서쪽, 가운데, 동쪽 등 세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서쪽 방은 존귀한 공간으로서 거기에는 조상을 상징하는 신판(神板)과 조종판(祖宗板)을 모신다. 북방의 한족들은 집의 북쪽 벽 아래에 상을 받쳐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의 서쪽 방에는 남북 향으로 된 온돌이 있고 또 서쪽 벽 밑을 따라 좁고 긴 모양으로 온돌이 있다. 온돌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신을 신은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신을 신고 온돌에 올라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불손행위로 금기시되여 있다. 만족들은 온돌을 “만자갱(万子坑)”이라고 한다. “만자갱”은 중국 조선족 가옥에서의 온돌보다 그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서쪽 벽 아래 온돌 우에는 상이 받쳐져 있는데 여기에 그 가족의 조상이 모셔져 있다. 따라서 서쪽 온돌은 신성한 곳으로 인식되여 사람들이 함부로 앉으면 조상들께 불경스럽다고 하면서 꺼린다. 그리고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서쪽 벽에는 그림을 부치거나 달력을 걸거나 하는 행위 역시 금기시되여 있으며 매일마다 깨끗이 청소해준다.
그 외에 만족들은 한 구들에서 자더라도 어른들은 남쪽을 사용하고 자녀들은 북쪽을 사용한다. 그리고 년장자의 집에 가면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하더라도 옆자리를 찾아 앉는다. 년장자들과 동석하는 것은 례절에 어긋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손아래 사람은 그 옆자리에 공손히 서있는 것으로 례의를 표시한다. 만약 외할아버지가 집에 방문하였다면 의례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접대하는 것이 례의인데 공교롭게 이 두 사람이 모두 외출 중이라면 외손자가 직접 접대한다. 이때 외할아버지는 온돌의 바른편의 상좌에 앉게 되고 외손자는 왼쪽 편에 두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공손히 접대하여야 된다고 한다.
유목지역의 몽골족들의 전통적인 집은 중국어로 포(包)라고 한다. 원형으로 된 집은 출입문과 화로 그리고 집에서 모시는 신 등 세 점을 이어 놓는 중심선을 기준하여 량쪽에 두 부분으로 나뉜다. 집 한가운데에는 화로가 설치되여 있고 신상(神像)은 출입문을 마주하여 제일 안쪽에 모셔있다. 모시는 신은 대체로 칭기스칸이다. 2006년 12월 내몽골 울란호트 지역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하고 있던 몽골인들은 당시 포(包)가 아니라 일반 주택에서 살고 있었지만 신상은 집의 제일 안쪽에 상을 받쳐 모시고 있었다. 포(包)에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신상을 등지고 출입문을 향해 앉아 손님을 접대한다. 남자 손님은 신상을 마주하여 왼손 편에 앉고 녀자 손님들은 신상의 오른쪽 편에 앉는다. 남녀의 활동 령역이 좌우로 구분 된 것이다. 손님접대 때문에 녀자 주인이 상대 쪽으로 건너가야만 할 때에는 신상 앞을 지나거나 화로를 건너뛰면 부정 탄다고 한다. 반드시 출입문 쪽으로 에돌아 건너가야 한다. 신과 화신(火神)에 대한 경외심과 녀성에 대한 성적인 폄하가 동시에 존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의 집에 가면 주인이 앉는 자리와 가미다나(神棚) 그리고 부쯔단(仏壇)의 자리가 대체로 고정되여 있다. 주부는 부엌과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집주인은 상을 사이에 두고 주부와 마주 앉는다. 손님은 윗목에 모신다. 일본인 가옥에서 주인의 자리는 불가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의 아버지가 래방하였다 하더라도 이 자리는 차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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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집은 우선 양택(阳宅)과 음택(阴宅)으로 나뉜다. 양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산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고 음택은 저승에서 간 사람들이 사는 집이다.
전통적으로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인생의 종료가 아니라 공간적인 이동이다. 즉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동이다. 죽은 사람의 무덤도 한 사람의 삶의 일부로 되여 있다. 사당은 세상을 떠난 조상의 령을 모시는 곳이고 무덤은 몸을 모시는 곳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대접은 산 사람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전통적인 집안에서 신주를 집안에 모시거나 혹은 따로 사당을 지어서 모시는 것은 바로 이런 사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사에 대하여 잠깐 말한다면 우리 민족은 유교적인 관습으로 보통 사대봉사를 한다. 고려 공민왕시기 포은 정몽주는 제례규정을 제정하여 대부 이상의 관원은 삼대 봉사(三代奉祀) 하고 6품 이하의 신분을 가진 사람은 이대봉사 하고 7품 이하의 하급관원과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경국대전 예전 편에서는 사대부 이상은 사대봉사를 하고 6품 이상은 삼대봉사하며 7품 이하는 이대봉사하고 일반 서인(一般庶人)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분의 차이로 구분되여 조상을 봉사하던 이런 관습은 갑오갱장(조선 고종 21년)이후로 반상의 구별없이 약화되면서 변화를 일으켜 일반 서민들도 사대봉사하기 시작한다. 서민들 중 신분 상승의 필요를 느끼던 일부가 먼저 가문의 지체를 높이는 행위의 일환으로 사대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사날이면 신주를 사당에서 꺼내 제사장에 모신다. 그리고 설, 청명, 추석과 같은 명절이면 집에 제사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내거나 혹은 직접 조상의 묘소에 찾아가 추모행사를 한다. 이때면 저승에 사는 조상들과 이승에 사는 이들이 한 자리에 만나는 것이다.
가옥은 보통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 내외를 구분하였다. 사랑채는 집안 남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령역이고 안채는 녀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사랑채의 주인은 당연히 그 집의 가장이였다. 조선시대 남녀구분의 률법을 엄격히 지키는 일부 가족들에서는 남자는 주 공간인 사랑채에 침방을 따로 두어 평상시에는 이 방에서 잠을 잤다고 문헌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가장이 사랑채를 자녀한테 양보한다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권한을 물려준다는 의미로도 통한다. 큰 집들에서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을 쌓아 경계를 나누었으며 그 사이의 련결은 중문으로 통해 이루어졌다. 중문은 지리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였지만 성별적으로는 남녀의 령역을 구분하였다. “바깥량반”, “안주인”이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령역 구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자들의 방문은 주로 정문과 직결된 사랑채에서 이루어지고 녀자들의 나들이는 옆문을 통하여 안채에서 이루어진다. 유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조선조사회에서 이런 률법은 매우 엄하게 지켜졌다. 일부 가문에서는 현시대에도 가문이 엄수하여야 될 계률로 엄격히 고수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유성용 종택 충효당(忠孝堂)에서 영국의 녀왕 엘리자베스가 방문하였을 때 녀왕을 정문을 거쳐 사랑채에서 영접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옆문을 통해 안채에서 접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문중회의까지 열면서 고민하다 결국 아무리 왕이더라도 녀성이기 때문에 옛날 습관과 유교식 량반 문화대로 안채에서 의전을 갖추게 하였다는 여담도 있다.
물론 각 지역마다 그 가옥구조가 다르고 공간에 대한 리용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안방과 사랑채의 역할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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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의 조선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래에 1990년대 말 룡정시 한 농촌의 조선족가족에서 집 공간을 어떻게 리용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조사 대상은 길림성 연변 룡정시 태양향 중평촌의 양천 허씨의 집이다. 허씨는 함경북도에서 본적을 두고 있었으며 1980년대 중기까지 이 집에서 살다가 연길에 이사하였는데 이 집은 1990년대 말까지 존재하였다. 집 지은 지 오래된 관계로 새 집주인이 헐어버렸다. 아래의 자료는 이 집 맏딸인 허순자씨(63세)의 진술에 근거하였다.
일단 집은 네 귀와 사면에 나무를 심어 외부와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이렇게 경계가 불명확한 집들은 터전에 채소를 심는 계절이면 이웃과 밭고랑 싸움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여 집집마다 대개 이런 방법을 취해 분쟁을 미리 막았다. 1990년대 말까지 울바자를 세울 재료가 부족한 농촌에서는 봄이 되여서야 지난해 가을에 남겨 두었던 수수대로 개배재(울바자)를 쳐서 터전에 짐승들의 침범을 방지하였다.
사랑칸은 땔나무나 혹은 농기구들을 두는 곳으로 사용되였다. 그리고 소를 집에서 키울 때에는 사랑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바깥쪽은 외양칸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사랑칸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를 살펴보면 그 자리는 대문과 가까이 한 자리이다. 사실 전통적인 가옥 구성에 있어서 사랑방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접빈객의 구실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구성상 사랑방이라는 이름이 부쳐지기도 할만한 장소이다.
건너칸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를 키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면 북쪽 벽 아래에 구멍(수궁이라고 함)을 만들어 소의 분뇨가 직접 배출되게 하였다 한다. 건너칸에는 겉곡을 저장하여 두는 뒤주가 있었다. 겨울에는 닭과 개와 같은 가축들이 여기에서 살게 한다. 이 때문에 남쪽으로 난 바람벽 아래 모퉁이에는 체구가 작은 가축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대신 뒤주는 항상 덮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는 정지칸으로 통하는 문(바당문이라 함)은 두꺼운 천이나 혹은 비닐로 봉페하여 출입을 막고 사람들은 건너칸을 통하여 외부로 출입하였다.
바당은 현관 구실을 하는 곳이다. 집에 들어서면 여기에 신을 벗어 놓는다. 구들은 보통 정강이 높이만큼 높다. 사람들은 신을 벗고 올라간다. 그 밑에는 부엌과 통하는 온돌이 연통(구새라고 함)까지 여러 고랑 놓여 있는데 고랑은 기수로 되여있는 것이 상례이다.
부수깨는 부엌의 아궁이를 말한다. 땅을 네모지게 어른 허리만큼 파고 들어가 불 아궁이를 만들고 그 우에 가마를 걸어두었다. 불을 지피지 않을 때에는 두꺼운 널로 이를 덮고 이를 구들 치우듯이 매일 닦아 깨끗이 거두어 두고 있었다.
정지칸은 집에서 공간이 제일 넓은 곳이다. 사람들은 주로 여기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부엌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남자들은 부엌과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동쪽과 남쪽 구역을 주로 사용하고 녀자들은 부엌과 가까운 구역에서 활동한다. 남자가 가마목의 따뜻한 곳을 찾아 앉으면 사내답지 못하다고 구박받기도 하였다 한다. 다시 말하면 정지칸의 동쪽과 남쪽은 웃쪽으로서 상좌에 속한다. 이전에는 식사할 때 밥상이 차려지면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위치로 자리를 찾아 앉는다.
고방에는 장롱이 있다. 집에서 안방에 속한다. 고방에 낸 창은 남쪽으로 낸 창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집에서의 귀한 물건들과 쌀독이 여기에 보관하고 있었다. 낮이면 이불을 잘 개여 여기에 두고 있었다.
웃방은 남자의 공간이다. 사랑채인 격이다. 체신을 지키는 손님들은 직접 웃방문으로 출입한다. 그리고 정지칸을 함부로 기웃거리거나 나오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라도 체면을 지키는 남자 손님이 온다면 주인은 난방을 위하여 여러 겹으로 봉하였던 웃방 출입문을 출입이 가능하게 미리 손보고 여기에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아무리 귀한 녀자 손님이라 하더라도 웃방에 함부로 올라가 앉는 것은 실례로 되였다. 경제적 형편이 부유한 집들은 웃방 우에 한 칸을 더 지어 한웃방이라고 부르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런 집들은 당지에서는 팔간집이라고 불렸는데 이 집 주인들은 해방초기 중농이나 혹은 부농으로 성분을 획분받아 그 후 2,30년간 정치적인 시달림을 받기도 하였다. 4세대가 같이 살고 있는 경우 한웃방에는 한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가 기거하고 웃방은 할아버지가 기거하였으며 정지칸은 아들이 자녀들과 함께 기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식사 시에는 팔각으로 된 작은 상으로 음식을 차려 한웃방에 계시는 한할아버지께 올려 갔다고 회상하였다.
변소는 집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변소 주위에는 나무들이 비교적 빼곡히 심어 쉽게 눈에 띄이지 않게 하였다. 변소는 창고와 사랑칸 사이에 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길을 내어 직접 다닐 수 있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굳이 그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차단하여 변소가 집과 외따로 떨어져 있게 하고 있었다. 변소를 가려면 돼지우리와 사랑칸 사이에 난 대문을 나가 돌아가야만 하였다. 뒷간은 멀어야 된다는 속담과 맞먹는 셈이다.
김치굴은 가을 김장철에 집 앞 터전의 맨땅을 어른 키 높이 조금 넘게 파고 그 우에 가리대를 얼기설기 얹어놓고 짚단 등으로 가린 뒤 흙을 두툼하게 덮어 굴처럼 만든 것이다. 김치굴에는 김치, 감자, 무우 등과 같은 과동 식량들을 보존하였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김치독을 꺼내어 깨끗이 씻어 건너방이나 사랑칸에 보관하여 둔다. 그리고는 김치굴은 헐고 그 자리는 흙을 메워 평평하게 하여 다시 터전으로 가꾸었다.
장독은 집안의 그릇을 넣는 식장 옆 부엌 쪽에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겨울철이면 기온이 령하 2,30도 내려가 장을 담근채 밖에 두면 동파되기 쉽상이다. 당지에서 집 밖에 장독대를 따로 설치한 집이 없었으며 장독은 여름에 씻어 말릴 때만이 해볕에 소독하기 위하여 밖에 내여놓았다고 한다.
이상은 20여년 전 연변의 한 농촌 마을에서의 집 공간에 대한 리용이다. 현재에 와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취사도구로 가스레인지가 보편화되고 보일러 등으로 난방이 되면서 “가마목”이 없어졌고 돼지 사육의 규모화에 따라 집집마다에 있던 돼지우리가 사라졌다. “김치굴”도 랭장고의 출현으로 없어지거나 혹은 시멘트 지하실로 되여 해마다 파고 메우고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졌다. “변소혁명(厕所革命)” 으로 이전에 멀리 하여야만 했던 변소가 집안으로 들어와 수세식 화장실로 되였다. 전통사회에서 집에서 태여나고 집에서 사망하는 것을 리상적으로 여기던 사람들이 지금은 분만이 가까이오거나 림종이 가까이 오면 병원을 찾는다. 뿐만 아니라 남녀 분공과 역할이 모호해짐에 따라 안팎의 경계도 희미해져 공간사용에서의 혼용도 존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용은 인간의 문화적인 행위로서 지리적 ·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 등 다양한 여러 요소들이 서로 얽혀 작용하며 이런 각종 요소들 사이의 력학적인 관계속에서 시대적으로 그 의미가 재해석되고 재구성되고 력동적으로 실천된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박승권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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