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netizin-1 블로그홈 | 로그인
netizin-1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칼럼

진달래는 피고 천지꽃은 진다
2020년 07월 20일 09시 33분  조회:1942  추천:1  작성자: netizin-1

image.png

어릴 때부터 익혀온 고향 사투리가 엄청 많지만 그중에서도 천지꽃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꽤 오래 되였지만  필자는 아직도 진달래라는 표준어 대신 천지꽃이란 방언을 더 자주 쓰고 있다.

꽃부데(함경도 방언 꽃봉오리)가 앉은 가지를 꺾어 물병에 꽂아두면 연분홍 꽃이 곱게 피여난다. 해마다 천지꽃이 필 무렵 전쟁터에 나갔던 아들이 돌아온다고 즐거워하시던 외할머니 그러다 때아닌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면 천지꽃이 죽는다고 락루(함경도 방언 눈물 흘리다)하시군 하였다. 몇해 지나 아들 사망통지서를 받은 후로부터 천지꽃이 피기 시작하면 고령군 개포리라는 큰아버지가 죽은 곳 지명을 입속말로 곱씹어 외우군 하시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필자는 낙동강류역 고령군 개포리 땅 큰아버지 시신이 밝혀있는 곳을 찾았어도 울 수는 없었다. 세월을 돌이킬 수 없어서 혹독하고 슬플 수만 없어서 그저 처절할 뿐이다.

이 세상에는 향긋한 향기로 코끝을 간질이는 화려한 꽃들이 많고 많지만 유독 천지꽃이 내 맘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잡게 된 것은 어린시절이 꽃잎을 질근질근 씹어 단물로 배고픔을 달래던 추억만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숙성, 발효되여온 천지꽃이란 말은 알른알른 선인들의 체취가 묻어있어 살결처럼 따뜻한 체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 삶이 붉게 타는 리유는 바람을 타고 배재굽이를 넘나들었던 투박한 함경도 토박이말 천지꽃이 필자를 한껏 붉게 물들여놓았던 까닭인가 본다. 그 옛날 화전 불길처럼 산언저리에 붉게 피여나는 천지꽃은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추억같이 옛이야기를 품고 내 살과 피를 파고들어와 꽃떨기가 싱싱하게 피여나있다. 춘하추동의 순환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섭리라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지만 주름이 늘어가도 천지꽃 이름만은 엄동설한에서도 맘속에 만발하게 꽃을 피운다.

천지꽃 이름은 ‘天指花’로 오랜 고서에도 기록되여있고 천지꽃과 사춘격인 철쭉꽃 이름과도 서로 소리가 닮아있다. 제주도 남부 서귀포지역에서는 진달래를 젠기꽃으로 말하여왔고 젠기꽃을 꾹꾹 눌러 만들어놓는 빙떡을 젠기라고 불렀다. 몽골어에서는 테를지( 特日乐吉)라 한자로 표기하는데 천지꽃 뜻과 음이 일맥상통된다. 천지꽃잎을 뜯어 말리우면 짙은 향기가 풍기여 함경도에서는 예전에 절에서 가루를 내여 향불로 피워왔었다. 만주어에서는 천지꽃을 ‘niyanci hiyan’(安楚香)라 표현하고 있다.

일찍 피고 일찍 지는 꽃의 시주팔자 탓이라 할가 천지꽃 이름은 우리 력사 여백을 메워주기도 하고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기능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이제 바야흐로 우리 곁을 떠나 저 망각의 대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진달래광장, 진달래마을, 진달래국수, 진달래비행장 이름은 다투어 피여나 장관을 이루고 있지만 천지꽃이란 말은 각종 행사는 물론 여러 방송, 신문, 서적에서도 그 자취가 사라진 지 오래되여 이제 두 눈을 비비고 샅샅이 뒤져서 찾아보아도 좀처럼 보기 힘든 사어로 되여버렸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천지꽃이란 말을 쓰는 마지막 세대로 남아있는 가장 서글프고 고독한 세대일지도 모른다.

여러 줄기가 한데 어울려 무더기를 이루며 피여나는 천지꽃은 주로 뿌리로 번식하는 관목이다. 모든 꽃은 뿌리가 땅속에 박혀있으면 늦든 이르든 언젠가 꽃봉오리가 열리고 꽃이 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열매가 달리고 씨앗을 퍼뜨린다. 허나 천지꽃 뒤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천지꽃 뒤에 남은 것은 그 옛날 물병에 꽂은 꽃처럼 시들어버린 메마른 추억 뿐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를수록 천지꽃 기억은 지워지고 그 우에 진달래 이름이 덧씌워진다. 진달래는 피고 천지꽃은 진다. 천지꽃에 대한 기억은 때론 블랙박스처럼 압축되고 저장되여있더라도 종당에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차츰 삭제되여갈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말의 변천사에서도 보듯이 언어의 생로병사 시집, 장가는 연변과 함경도 방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식한 학자들에게도 연변과 함경도 방언이 외목(함경도방언 따돌림)에 나고 왜곡되여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천지꽃 이름은 물리적으로 만지거나 끄집어낼 수 있는 물체가 아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특별한 계기가 생기면 아직도 깊숙이 저장한 기억들을 불러내와 우리 마음을 흔든다. 다른 꽃들을 볼 때는 건성이지만 유독 천지꽃만은 우리 맘속에 자리잡고 들어와 힘겹고 지친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 꽃잎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천지꽃과 진달래는 동일한 꽃을 말하지만 천지꽃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진달래로 바라보는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진달래는 피고 천지꽃은 진다.

연변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61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61 우리 가요의 현시점과 갈길은 어디인가? 2022-03-10 0 920
160 우리 가요의 현시점과 갈길은 어디인가? - 박영일 2022-03-10 0 940
159 조선의 뜸부기는 다 네 뜸부기냐 2022-03-07 0 935
158 자대 2022-02-25 0 875
157 [한복론난] 과연 된장다운 민족 2022-02-14 0 794
156 호호호虎虎虎 호호호好好好 2021-12-29 0 998
155 송년회의 의미 □ 림창길 2021-12-24 0 966
154 영문자 이름의 재외동포로 살아간다는 것 2021-12-16 0 975
153 구狗와 견犬 2021-10-25 0 1077
152 죽음의 일상화 2021-10-14 0 1147
151 해방타운 2021-09-16 0 1127
150 코로나 시대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2021-09-01 0 1025
149 도전하는 꼴찌에게도 박수갈채를 2021-08-27 0 1124
148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21-08-26 0 1059
147 디지털 정보화 시대, 우리가 반납한 것은 2021-08-06 0 1109
146 월드컵 가는 길 첩첩산중,‘리철군단’ 꽃길 있을가? 2021-07-15 0 1085
145 [권기식 칼럼]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인민을 위한 위대한 대장정' 2021-06-21 0 1021
144 돼지목에 진주목걸이 2021-06-08 0 1214
143 오늘도 한시에 취해본다 2021-04-23 0 1237
142 욕구와 행복 2021-04-09 0 1247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